Bible Reading Made Easy

알렉산더 대왕의 유언에서 얻어야 할 인생 깨달음

알렉산더 대왕은 세상을 떠날 때 왜 아쉬움을 안고 갔는지 알고 있나요? 그의 유언이 우리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왜 우리는 평범이 아닌 뛰어남을 선택하려 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것을 좋아하며 평범한 사람이 아닌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나길 위해 노력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추구 방식이 가져오는 고통과 억압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위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길이 없었고, 명확한 방향성도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가족, 자녀, 사업, 결혼, 지위등을 정신적 지주와 평생 추구해야 하는 목표로 삼았고, 살아가는 희망이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가?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은 모두 다르며, 행복한 이유도 모두 다르다. 단란한 가정을 이뤘을 때, 명예와 이익을 얻었을 때, 재산이 많았을 때…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의 행복을 채워 주고,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잠시의 행복이 아닌 영원토록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내가 완벽주의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

주변에는 완벽주의자가 되기 위해 모든 일에 완벽을 추구하고 남들에게 빈틈을 남기기 싫어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완벽함"은 커녕 오히려 자신에게 불행으로 다가 올 수 있다. 그럼 사람은 왜 완벽주의자가 될 수 없고, 또 어떻게 해야 완벽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돈과 명예가 행복한 삶을 이뤄줄 수 있는가?

평생 돈과 명예를 위해 바쁘게 살던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나서야 사람은 어떻게 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할지도 깨닫게 되었다.

별 하늘을 바라보며 알게 된 비밀

끝없는 별하늘은 늘 사람에게 끝없는 상상과 동경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신비하고 아름다운 별하늘은 마찬가지로 저를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별하늘을 좋아하는데 어려서부터 좋아했었습니다. 그때 저는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어린 시절을 지내면서 여름 저녁만 되면 늘 시골의 빈터에 누워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을 보면서 외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전설 이야기를 들었었습니다. 견우직녀, 북극성, 북두칠성, 간혹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천진하게 소원을 빌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유성이 어디서 왔을까, 하늘에 정말 신선이 있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좀 커서 별하늘에 관한 그런 아름다운 전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성좌와 유성우와 극광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것들은 저로 하여금 별하늘에 대해 더욱 반하게 했습니다. 저는 이런 별들의 모양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고 또한 별하늘에 대해 더 많이 알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좀 더 커서 저는 여기에 관한 지식을 배우게 되었고 직접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책에서 우주는 대폭발로 생겨난 것이고 게다가 부단히 확장되고 있으며 이런 성체들은 다 규칙적으로 하나하나의 성계를 이루고 이런 성계는 다 동일한 평면에 있으면서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저의 지식욕을 만족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게 했습니다. 저는 이런 아름다운 별들과 이런 신기한 현상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늘 생각해보았습니다. 정말 우주의 대폭발로 생긴 것인지, 별하늘은 극한이 있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이렇게 규칙적으로 운행되는지, 이런 것은 제가 줄곧 알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 궁창의 광명체가 있으라고 명령하니 이 광명체가 하늘에서 빛을 내어 땅을 비췄을 뿐만 아니라 낮과 밤, 계절, 날, 해를 위해 징조로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한 동시에 하나님이 이루려는 매사는 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지정한 방식에 따라 응하고 있었다. ‘하늘 궁창의 광명체’가 바로 상공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물체인데, 그것은 하늘을 비출 수도 있고 땅과 바다를 비출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분부한 절주와 빈도수에 따라 회전하며 땅의 서로 다른 시간에 따라 비추고 있다. 이리하여 땅 위의 것의 낮과 밤은 이 광명체의 회전 주기로 말미암아 산생된다. 그것은 낮과 밤을 위한 표기로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서로 다른 회전 주기로써 인류의 절기와 각종 날을 위한 징조로도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반포한 사계절━춘하추동과 상부상조하고 서로 상응하며 조화롭게 인류의 계절, 날, 해를 위해 규칙적이고 정확한 징조를 보인다.』 저는 이 말씀을 보고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 이 별하늘이 근거없이 생길 리가 없어. 어떻게 그것들을 통제하는 힘이 없을 수 있겠어? 조물주의 위대함과 비범함이 이 별하늘을 만들었고 아울러 조물주께서 이런 천체의 운행 궤도를 정해 그것들이 서로 방해하지 않게 하신 거야. 그래서 인류를 위해 규칙적인 계절을 정해 인류가 더 좋게 땅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하셨어. 이 신비한 별하늘은 다만 조물주의 비범함과 위대함의 약간의 유로일 뿐이야!’

우리의 힘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10월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나는차에 앉아 차창 밖의 시원한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창밖에 떨어지는 꽃잎과 노란빛을 띤 나뭇잎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신비함에 감탄했다. 서서히 차를 움직여 마을 근처에 있는 공사장을 지날 때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고개를 돌려 남편에게 물었다. “저 사람 당신 친구 아니야?” 남편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아!” 난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그 사람을 쳐다봤다. 근심으로 가득 차 초췌한 얼굴에는 덥수룩한 수염이 자라있었다. 땀으로 젖은 옷이 깡마른 몸에 들러붙어 있었고, 힘들게 리어카를 끌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지난날의 우람한 체격에 기세등등했던 사장님의 모습은 어디 가고 저렇게 초라한 모습만 남았단 말인가?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난 궁금한 맘에 남편에게 물었고, 남편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휴, 세상에 노력만으로 돈을 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니까. 재처럼 말이야. 작업반장으로 돈을 벌더니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야심에 가득 차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마음에 큰 사업을 벌였는데, 일이 잘 안 풀려서 돈을 모두 날리고 말았어.” 남편의 말에 남편과 겪었던 힘든 시절이 떠오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 남편과 나는 우리의 힘만으로 많은 돈을 벌고 남들보다 성공하여 우리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린 어린 애를 어머님께 맡기고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삼륜차를 끌며 찬 바람을 뚫고 20여 리 떨어져 있는 시장에 물건을 팔러 갔었다. 돈을 조금이나마 더 벌어보려는 마음에 매일 저녁 늦게 거리에 사람이 없을 때까지 일했지만 간신히 입에 풀칠할 정도밖에 벌 수 없었다. 나중에 남편은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홀로 수천 리 밖에 있는 하이난(海南)에 일하러 갔다. 하이난(海南)에서 성공해보려고 했지만, 남쪽 지방은 매우 습하고 일교차도 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번 돈은 모두 병원비로 나갔다. 병이 낫고 집 근처에는 벌이가 마땅치 않자 남편은 또다시 하이난(海南)으로 향했다. 하지만 겨울이 되자 남편이 일하던 곳의 사장은 돈을 들고 도망갔고, 남편이 번 돈은 10만원 가량의 교통비가 전부였다. 하지만 우리는 실망하지 않았고, 우리의 노력만 있다면 아름다운 터전을 갖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은 다시 베이징으로 향했다. 그런데 3개월간 일하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길에 번 돈을 소매치기 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편이 돈을 두 곳에 나눠 있어서 반만 소매치기 당했다는 점이었다. 남은 절반은 생활비로 모두 썼다…. 그때 우린 부자가 되겠다고 악착같이 일했다. 몇 년간 악착같이 매달린 끝에 남편에게 남은 건 허리통증이었고, 내게 남은 건 디스크뿐이었다. 우리는 겨우 입에 풀칠만 할 수 있는 정도였다. 너무 답답했다. 다른 사람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았는데 왜 우린 돈을 벌 수 없는 걸까? 대체 왜 이런 걸까. 그 후 나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1년에 200만 원을 벌고, 2년째에도 200만 원을 벌고, 3년째에도 200만 원을 벌고. ‘왜 돈이 늘어나지 않는 거지? 그래서 언제나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 도대체 얼마나 큰지 시험해 보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두 손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하거나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권능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보려고 한다.아무리 노력하고 힘을 써도 왜 항상 제자리인 걸까. 조금 벌었다 싶으면 또 돈이 새어나가 계속 제자리이고. 조금이나마 더 버는 게 이리도 힘드니 원하는 만큼 번다는 건 더 힘들겠다. 그건 헛된 희망, 지나친 욕심이야. 사람이 얼마를 벌 수 있는지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어. 나는 하나님의 주재를 진심으로 믿어!’ 하나님께서 주재하시는 게 맞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고, 스스로 다시 말했어요.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믿어.’ 예전에 말했던 것과 다르지 않나요? 어떤 것이 달라졌을까요? (그건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 도대체 얼마나 큰지 시험해 보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두 손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하거나 자신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려고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 권능의 범위를 벗어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보려고 한다.』,『사람의 운명은 다 하나님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 너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장악할 수 없는데, 설령 늘 자신을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고 바쁘게 지낼지라도 자신을 장악할 수 없다. 네가 자신의 앞날을 알 수 있고, 자신의 운명을 장악할 수 있다면, 너를 어찌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고민거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인간의 운명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고, 사람이 평생 얼마큼의 부를 쌓고, 어떠한 삶을 사는가는 하나님께서 이미 명정해놓으셨다. 그건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렸다’, ‘욕심내다간 탈 난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내 힘으로 아름다운 내일을 만든다’과 같은 사상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주재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자신의 힘으로 더 많은 돈을 벌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며, 좋은 나날을 보내고, 다른 사람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주재에 맞서면 운명과 싸우는 힘든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도 없게 된다. 남편의 친구처럼 말이다. 정해진 운명을 따르지 않고 수년간 필사적으로 살았지만, 온갖 고생 끝에 약간의 돈은 벌었으나 결국 사업 실패로 번 돈을 모두 날려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남편과 나도 마찬가지였다. 힘들게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지만 결국 몇 푼 벌지 못했고 우리의 운명도 바꾸지 못했다. 이 모든 게 운명이 우리 손에 달렸고 운명에 맞서 싸워 생긴 결과가 아닌가? 이로써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하나님의 권세가 닿는 곳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사람마다 얼마큼의 부를 축적할 것인가는 하나님에게 달려있으며,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자건 가난뱅이건 하나님은 이미 정해놓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네가 이런 것을 인식하게 되었을 때, 다음으로 네가 해야 할 것은 낡은 인생관을 버리고 여러 가지 함정을 멀리하며, 너의 인생을 하나님으로 너를 위해 책임지고 결정하게 하고 너를 위해 안배하게 하며, 하나님의 지배와 하나님의 인도에 순복하기만을 구하고, 자신의 선택이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사람은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고, 진정한 인생 얻기를 추구해야만, 점차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인생의 모든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알게 되었다.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창조주의 섭리에 따라야만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나는 과거 악착같이 살던 나날들과 작별했다. 더는 어떻게 하면 내 힘으로 더 나은 삶을 살게 될까 고민하지 않게 되었고, 평소와 같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대했다. 그 후, 남편은 새로운 화물차를 한 대 샀고, 집 근처에서 물건 배송 일을 하게 되었다. 예전처럼 악착같이 일하진 않았지만,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우리는 부족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넘치지도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린다. 예전에는 운명과 맞서느라 너무 힘들었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에 따르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정도 찾았다. 이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빵빵”, 갑작스레 들려온 경적에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차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운명과 싸우며, 고통 속에 살고 있을 남편 친구와, 운 좋게 그 고통 속에서 빠져나와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행복한 삶을 사는 나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감사로 가득 찼다….

눈의 피로를 풀어주는 간단한 방법을 찾다

정보통신의 발전으로 컴퓨터, 휴대전화는 사람들의 훌륭한 도우미가 되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자기기 없인 살 수 없게 되었다. 젊은 세대인 나 역시 휴대전화와 컴퓨터에 엄청나게 집착하곤 한다. 매일 컴퓨터 앞에서 공부하며 자료를 찾고, 친구와 연락하고, 계획표를 작성하는 등 컴퓨터가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컴퓨터는 정말 편리하고 유익하다! 하지만 전자기기는 편리함을 누릴 수 있는 동시에 조금의 고민도 따랐다. 컴퓨터 앞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면 컴퓨터에서 나오는 전자파 때문에 눈이 뻑뻑하고 아프며, 심지어 어지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업무상의 필요로 컴퓨터를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나는 매일 컴퓨터와 동고동락할 수 밖에 없었다. 얼마 뒤, 주변 동료들도 장시간 컴퓨터와 휴대전화 사용으로 눈이 많이 나빠진 걸 보게 되었다. 전자파 차단 안경을 쓴 사람도 있고, 수술 받은 사람도 있으며, 오랫동안 안경을 써서 안구가 튀어나온 사람도 있었다. 빛나고 생기 넘치던 눈이 침침해져 생기가 없었다. 계속 이렇게 가다간 동료들처럼 될까 두려운 마음에 안구 피로를 풀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섰다. 우선 컴퓨터를 1시간 하면 10분간 먼 곳에 있는 초록색 식물을 바라보며 정기적으로 눈의 피로를 풀어보았다. 이렇게 지속하니 눈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지만 그때뿐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여전히 눈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 컴퓨터 대신 손으로 쓰기로 했다. 하지만 업무 효율이 절반으로 떨어졌고, 펜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그 후, 옆에 앉은 동료가 TV 광고에 나오는 안약을 쓰는 걸 보고 나도 그중에 제일 좋다는 안약을 골라 사용했다. 하지만 약물로 순간의 고통만 덜어줄 뿐, 눈의 피로는 여전했고, 오히려 눈이 점점 아팠다….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끝내 고통을 덜어줄 방법은 찾지 못했다. 어느 날, 우연히 친구가 내게 놀러 왔다. 같이 얘기하는 도중에 친구에게 말했다. “눈이 너무 아프니까 컴퓨터 보기도 싫어. 그런데 또 컴퓨터가 없으면 일을 할 수가 없으니….” 친구가 말했다. “내가 좋은 방법 알려 줄게. 녹차를 우려서 차갑게 식힌 다음 눈에 넣고 10분 동안 휴식해 봐, 눈이 굉장히 편해질 거야. 녹차는 식물이라서 부작용도 없어. 나도 해봤는데 효과가 좋더라고.” 드디어 좋은 방법을 찾았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다. 그래서 친구가 말한 대로 해보니 정말 눈이 편안해졌다. 2주 동안 계속했더니 뻑뻑함도 많이 가셨다. 그 후로 지금까지 꾸준하게 해보니 뻑뻑하고 아팠던 증상들이 모두 사라졌고, 마음속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작은 식물이 신통하기도 하지! 전자파 차단 안경에 안약까지 써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는데 녹차에 이렇게 신기한 효능도 있고, 부작용마저 없다니! 몇 년간의 고통을 드디어 해결했구나!’ 나중에 인터넷에서 녹차의 효능을 찾아본 후에야 녹차에 전자파 차단 효과뿐만 아니라 다양한 효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해열, 해서, 청심, 양음, 분비물 촉진, 해갈, 이질 멈춤, 상처 치료는 물론이거니와 여름철 짜증과 뒤척임 등 에도 효과적이었다. 게다가 여름철 무더위, 더위로 인한 설사, 이질과 부스럼이나 종기, 붓기 등에도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녹차는 여름에 마시기에 제일 좋고, 효능 또한 뛰어나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만물 중 동식물이든 풀이든 상관없이 사람이 몸에 상처를 입거나 병에 걸렸을 때 필요한 식물도 만들어 놓았다. 예를 들어, 화상을 입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로 씻으면 되느냐? 아무 천으로나 감싸면 되느냐? 그러면 곪거나 감염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칫 잘못하여 불이나 뜨거운 물에 데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로 씻어 내면 되느냐? 예를 들어, 열이 나고 감기에 걸리거나, 일하다 타박상을 입거나, 무엇을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나거나, 혈관 질환처럼 생활 습관이나 감정에 의해 발생된 병이나, 정서적인 병이나, 오장육부에 생긴 질병 등은 그에 맞는 식물로 치료할 수 있다. 이러한 식물에는 어혈을 풀거나, 통증을 없애거나, 지혈이 가능한 것도 있고, 마취를 하거나, 피부의 정상적인 회복을 돕는 것도 있으며, 체내의 어혈과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것도 있다. 이러한 식물 모두는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고 쓸모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위해 예비한, 비상시에 필요한 것들이다. 이들 중에는 사람이 무심코 발견하게 된 것도 있고 또 어떤 기이한 현상이나 사람들을 통해 발견하게 된 것도 있다. 발견한 후 인류에게 전해 내려오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만든 식물 또한 가치와 의미가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모두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의 생존 환경을 창조할 때 사람을 위해 만들고 재배한 것으로 모두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릴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보살핌을 느낄 수 있었고 마음도 따뜻해졌다. 하나님은 자애로운 어머니가 아이를 세심하게 돌봐주듯 우리를 만드시기 전에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셨고, 다치거나 병에 걸렸을 때 치료할 수 있는 약초도 마련해 주셨다. 우리가 오랫동안 컴퓨터를 보면 컴퓨터 전자파로 인해 눈이 뻑뻑하고 아플 때, 하나님께서 만드신 녹차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녹차는 천연 안약으로 사용할 수 있고 해열, 해서, 청심 등 다양한 효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부작용도 없고 효과도 뛰어나다. 찻잎 외에도 우리가 평상시에 접하게 되는 다른 한방 약초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서 발생하는 각종 질병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마련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 삶의 곳곳까지 세심하게 생각해 주시는 분이다! 이러한 것을 통해 하나님의 비미은장을 실제적으로 볼 수 있었고, 묵묵히 우리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셨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학교에 다닐 때 ‘본초강목’의 저자를 존경하며 그가 모든 약초를 발견해 인류를 위해 커다란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세심한 준비가 있었음을 이제 깨달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것을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않으셨고 공로를 칭찬해 주길 바라지도 않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직접 누릴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것으로, 우리 인류를 향한 창조주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활함에 있어 실제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린다!

맘 편히 일하는 비결 — 다른 사람에게 틈을 남겨라

어떤 사람들은 맘 편히 일하고 싶으나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맘이 안 놓이고, 걱정이 되어 혼자 감당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일에 쫓기며 스트레스까지 받게 되는데 과연 이렇게 하면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새벽녘 발코니의 작은 풀을 바라보며

새벽녘, 발코니로 나가 스트레칭을 하다 문득 고개를 숙였는데 발코니 한구석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잎사귀를 보았다. 집 발코니에는 시멘트로 덮여있었고, 주변은 두꺼운 플라스틱인 데다가 수분도 부족했을 터인데 어린 잎사귀가 자란걸 보니 믿기지가 않았다. 어린 잎사귀를 바라보며 그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묘와 하나님의 권세가 참으로 위대하다고 감탄하게 됐다!

당일치기 농장여행 — 창조주의 기묘한 행사에 감탄하며

떠들썩한 도시에서 벗어나 한적한 길을 따라 유기농 농장을 하고 있는 친구네로 놀러 갔다. 멋들어진 경치와 푸른 하늘에 새하얀 구름이 눈앞에 펼쳐졌고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왔다. 신선한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니 정신이 맑아지고 마음이 탁 트였다. 주변을 돌아보니 향기로운 꽃 내음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봄의 숨결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분홍색, 노란색, 흰색, 보라색의 야생화들이 봄바람에 살랑거리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허리를 숙여 자세히 보니 풀숲에는 작은 달팽이도 있었다. 가만히 귀 기울이자 작은 곤충들이 저마다 독특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 멀리 바라 보니 밭에는 가지런하게 줄 맞춘 채소들이 너도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고 있었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새소리가 농부 아저씨의 바쁜 발걸음을 뒤쫓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농장 주변의 작은 나무숲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친구가 다가와 농장에 있는 것은 모두 유기농 채소, 유기농 과일이며 화학비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주변에 작은 나무숲이 있는 것은 다른 곳에서 뿌린 농약이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덧붙였다. 친구 덕분에 농작물을 키우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이 좋은 땅을 갖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흙이 아주 부드러웠고 간간이 알갱이들도 보였다. 알갱이는 지렁이나 다른 작은 동물들의 배설물과 세균이 뭉쳐진 것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땅이 건조할 때면 작은 알갱이들이 수분을 내뿜어 땅이 마르지 않게 해 주고,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밭 옆에 있는 샛길을 따라가니 주변에 자유롭게 자라난 무성한 잡초가 보였다. ‘설마 농부 아저씨가 너무 게을러서 잡초를 제거하지 않으신 건가?’ 사실, 이 잡초는 일부러 남겨둔 거였다. 왜냐하면 잡초는 땅이 사라지지 않게 막는 특별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폭우가 지날 때면, 토양의 수분을 흡수해 채소나 과일의 뿌리가 물에 잠겨 썩지 않도록 해준다. 왕바랭이처럼 꼭 뽑아줘야 하는 잡초도 농부 아저씨는 뽑은 후에 그냥 버리는 법이 없었다. 뽑은 잡초의 뿌리를 위로 가게 하여 농작물 옆에 두어 잡초 자체는 말라 죽더라도 잡초의 양분이 천연 비료가 되어 다시 땅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잡초더미에서 진귀한 약초를 흔히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장의 습열을 빼주고, 붓기를 가라앉히며 독소 배출에 도움이 되는 고들빼기, 해독 효과가 있는 까마중, 부기를 빼주는 민들레, 결석을 예방해주는 질경이, 덩굴식물인 인동 덩굴 꽃과 나팔꽃까지… 사방에 보물이 깔려 있었다! 농민들은 굳이 제초할 필요도 없었을뿐더러 예상 밖의 수확도 얻을 수 있었다. 밭에는 강낭콩, 완두콩이 심겨져 있었고, 그 옆에는 옥수수와 회향차가 심겨져 있었다. 친구는 여러 가지 식물을 같이 심으면 시너지 효과가 있다고 설명해 줬다. 콩과 옥수수를 같이 심으면 콩에 있는 니트로게나아제라는 신비한 물질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질소를 잡아 주어 옥수수에 전달해 주고, 옥수숫대는 콩이 자랄 수 있는 넝쿨이 되어 콩이 햇볕을 더 잘 받을 수 있게 해준다. 초록빛으로 빛나는 채소밭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채소에 해충이 있으면 어떡하지? 그건 농부 아저씨가 가장 골치 아파하는 일인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자연생태환경을 유지하기만 하면 농약 없이도 채소 자체에 방어 능력이 있어 독특한 향으로 해충의 천적을 유인하여 채소에 붙어있는 해충을 모두 잡아먹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참으로 신비로웠다! “저기 뱀이 있어요!” 멀리서 한 아주머니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머니의 침착한 표정을 보면서 ‘어떻게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있지? 나라면 기겁해서 소리를 질렀을 텐데.’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농장에 있는 여러 가지 동물에 이미 익숙해졌던 것이었다. 게다가 뱀도 자신의 역할이 있었다. 뱀은 농작물을 해치는 쥐를 잡아먹어 농작물을 보호해준다. 그 외에 농장에는 꿀벌, 거미, 달팽이, 여러 가지 새, 하늘소, 두꺼비, 거북이 등도 있었다. 모든 동물은 자신의 역할을 발휘해 농작물이 잘 자라도록 해 주었고, 생태환경의 균형을 유지해 주었다. “꼬끼오…” 닭 울음소리를 따라 바라보니 농장에는 많은 닭들도 키우고 있었다. 친구는 닭이 알도 낳고, 해충도 잡는다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했다. 뿔닭은 움직임이 굉장히 빨라 벌레를 잘 잡는다. 농부들은 뿔닭을 꽃밭에서 키워 해충도 잡아먹고 잡초들도 정리하게 했다. 닭이 다닐 수 있게 길만 만들어 놓으면 꽃밭을 헤집어 놓는 일도 없었다. 게다가 닭의 분뇨는 개화 식물의 가장 좋은 천연 비료였다. “멍멍멍…” 똑똑한 목양견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양견은 경비처럼 농장의 가축들을 감시하며 농장 안에서 왔다 갔다 했다. 가축들이 길을 잃거나 도망가지 않도록 막으면서도 승냥이의 공격을 받지 않게 보호해 주기도 했다. 목양견은 농장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우미였다. 신선한 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며, 마음으로 느껴 보니 이곳의 모든 것은 나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때, 친구가 하나님 말씀을 보내 주었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각각의 형태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고, 각각의 방식으로 그것의 생명력과 생명의 형태를 나타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모두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만물의 성장 법칙, 성장 과정, 성장 방식을 정하였으며 또 만물이 이 땅에서 생존하는 방식을 만들어 상호 의존하고 끊임없이 발전하도록 해 왔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법칙과 방식이 있기 때문에 만물은 이 땅에서 무사히 생존하고 또 성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환경이 있었기 때문에 인류는 안락한 삶의 터전과 생존 환경을 갖고 하나님의 인도 속에서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모든 만물의 생존 규율과 법칙을 정해 주셨음을 알 수 있었다. 만물은 하나님께서 정해 준 규칙에 따라 각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지렁이가 흙을 부드럽게 하면서 자신의 배설물로 땅이 마르지 않도록 하여 농작물에 풍부한 영양분을 제공하는 것도, 채소가 해충을 막기 위해 냄새로 해충의 천적을 유인하여 해충을 없애는 것도, 잡초가 토양이 없어지지 않도록 막고 적당한 수분을 유지하게 하는 것도, 콩이 옥수수에 질소 비료를 제공하고, 옥수수가 콩이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뱀이 쥐를 잡고, 닭이 해충을 잡고 잡초를 제거하는 것도, 개가 인간을 도와 가축을 보호하는 것도… 이런 일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상부상조하며 더불어 살고, 서로 기대어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칙이 있어, 만물은 이 지구상에서 생존할 수 있고 인류 역시 안정적인 생활환경을 누리게 되어 자자손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권능의 체현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존을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이시고, 안배를 잘해주셔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창조주께서 주재하시고 공급해주신 신비한 환경 속에서 살며 하나님께서 주신 천연 식물을 누리니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규율을 모든 이가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삼림을 벌채하고, 농약을 써가며 농작물을 경작하고, 물과 공기는 오염 되었고, 동물들은 도축 당하고 있다. … 사람과 만물의 관계는 더불어 살고,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관계였다. 생태계가 깨지면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인류에게 돌아오게 된다. 지금 우리는 유기농 채소를 먹기조차 힘들고, 깨끗한 공기로 호흡할 권리조차 잃어버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원시 생태계가 파괴되면서 갈수록 여러 질병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어떤 태도로 만물을 대해야 하겠느냐? (아껴야 합니다.) 아끼고 보호하며 효과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고 파괴하지 말고 낭비하지 말며 제멋대로 변경시키지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만물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해 준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 된다.』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실천할 길을 알려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만물을 소중히 여기고, 보호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규율과 법칙에 따르는 법을 배우고, 효율적으로 이를 이용하여 더는 생태계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여러 가지 공급을 받을 수 있다.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았고, 아름다운 노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기러기 떼가 대형을 바꿔가며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세상 만물이 창조주의 역사를 보여 주는 모습에, 창조주를 향한 무한한 감사와 찬미를 바친다!

내 몸이 아픈 이유는 무엇일까?

어려서부터 나는 잔병치레가 잦았다.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 아픈 기억밖에 없는 듯하다. 어린 시절 나는 독창, 종양, 치질로 고통받았고 커서는 시도 때도 없이 두통에 시달렸다. 게다가 겨울엔 감기를, 여름엔 열사병에 시달렸다. 몸도 약해서 조금만 고된 일을 하면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팠다. 저혈당으로 어지럼증과 두통은 달고 살았다. 여러 가지 병들이 끊이지 않았다. 몸이 허약하다 보니 부모님과 형제들은 혹여 내가 힘들거나 추울까 봐 노심초사했다. 결혼 후 남편 역시 나를 물심양면으로 보살폈다. 힘든 일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가족들의 사랑에 눈물이 흐르곤 했다. 하지만 병마가 가져온 고통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고, 가족들이 날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약을 찾아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일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족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이 낫기는커녕 병명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온몸이 쑤시고 허리가 아파와 몸을 일으키기도, 음식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게다가 목도 뻐근했는데 그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남편은 의사를 불러왔지만, 의사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만 했고, 내 고통을 덜어주지 못했다. 결국, 의사는 “별다른 이상이 없습니다. 며칠 지나면 저절로 호전될 것입니다”라는 말만 남겼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고 난 계속 침대에서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병마에 시달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난 계속해서 생각하고 스스로 물었다. 사람은 왜 병에 걸리는 것일까? 고통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병마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통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통 속에 신음하고 괴로움이 날 감쌌을 때 자매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주었다. “육체의 고통과 번뇌와 공허 그리고 인간 세상의 이런 처참한 일은 다 사탄이 타락시킨 후 사람을 괴롭히면서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점점 타락되어 질병도, 고통도 점점 심해졌고, 갈수록 인간 세상의 공허함과 비참함, 인간 세상에서의 생존이 불가함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은 인간 세상에 점점 희망이 없어진다고 여기는데, 이런 것은 다 사탄이 타락시킨 후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런 고통은 사탄이 더한 것이고 사람이 사탄에게 타락된 후에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탄의 손아귀에서 사람의 훗날의 아름다운 처소를 바꿔 오려면 반드시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이런 고통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고통들을 다 체험하면 맨 마지막에 사람의 이런 고통들을 면해 준다. 사람을 대신해 모든 고통을 받은 후 하나님은 힘 있는 증거를 갖게 되어 마지막에 인류의 훗날의 아름다운 처소를 바꿔 오게 되는데, 바로 사람의 생로병사를 면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의의 있지 않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날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하셨고, 죽어가던 내 영혼에 밝은 빛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드셨을 땐 인간이 이렇게 고통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탄이 인간을 타락시켜 인간이 사탄의 어두운 권세와 타락한 육신에서 살게 되면서 인간 세상에 고통과 번뇌, 그리고 생로병사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인간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간을 위해 희생하시고 친히 인간을 구원하러 인간 세상에 오셨다. 2천년 전, 자비로우신 구세주 예수께서는 인간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시고자 친히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오늘날 다시 성육신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겪는 병마와 고통을 없애주시려 기꺼이 인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셨다. 그리고 진리가 인간을 이끌고, 구원해주리라 말씀하셨다. 뿐만 아니라, 직접 사탄과 싸우기까지 하셨다. 이 모든 것은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을 다시 구원해 인간이 사탄의 권세에서 영원히 벗어나 더는 고통과 피해를 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인간을 고통과 번뇌가 없는 아름다운 처소로 이끌어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난 인간의 병과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게 되었고, 어머니처럼 진실한 사랑과 연민을 베푸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께 구원받을 것이란 희망도 품게 되었다! 그 후 난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읽으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키워갔다. 고통이 찾아올 때면 하나님 앞으로 달려가 기도드리고 나의 고통과 나약함을 호소하며 병마를 이길 수 있는 믿음과 희망을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드렸다. 그러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되었다. “질병이 임함은 하나님의 사랑이니 그 속에 꼭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다. 비록 육체가 고통을 좀 받을지라도 사탄의 생각을 갖지 말라. 질병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찬미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누리게 되니, 질병 앞에서 낙심하지 말고 누차 찾고 구하며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이 빛 비추어 깨우쳐 줄 것이다. 욥의 믿음이 어떠했는가? 전능한 하나님은 전능한 의사이다! 병 안에서 살면 병뿐이고 영 안에서 살면 병이 없다. 너에게 한 숨만 붙어 있어도 하나님은 너를 죽지 않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 감미롭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특효약이다! 마귀와 사탄을 부끄럽게 한다! 하나님 말씀을 더듬으면 의탁할 데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효과 빠르게 마음을 구한다! 만사는 전무하고 모든 것은 평안하다. 믿음은 바로 외나무다리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건너기 어렵고 목숨을 내걸면 편안히 건널 수 있다. 사람에게 두려워하는 생각이 있는 것은 바로 사탄의 우롱인데, 사탄은 우리가 믿음의 다리를 건너 하나님 안에 들어갈까 봐 두려워한다. 사탄은 온갖 방법을 다해 늘 생각을 주기에 늘 하나님의 빛 비춤과 깨우침을 구하고, 늘 하나님을 의지하여 우리 안의 사탄 독소를 정결케 하며, 영 안에서 늘 하나님을 가까이하기를 훈련하여 하나님이 권세 잡게 하고 온 몸과 마음을 점유하게 하여라.”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믿음과 힘을 다시금 불어넣어 주셨다.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내 병도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숨이 붙어있는 한 하나님께선 날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자 진정제를 맞은 것처럼 평온해지며 더 이상 병으로 인해 일찍 죽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떨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바로 하나님께 자주 기도드리고, 말씀을 읽고,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욥의 믿음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고 진심으로 의지하라고 하셨다. 또한, 사탄이 인간의 육신을 통해 괴롭히니 육신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사탄의 계략을 꿰뚫어 보게 되면 사탄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나는 병든 몸을 하나님께 맡겼다. 병든 육신에서 살지 않고 “전능한 하나님은 전능한 의사이다! 병 안에서 살면 병뿐이고 영 안에서 살면 병이 없다. 너에게 한 숨만 붙어 있어도 하나님은 너를 죽지 않게 할 것이다.” “ 하나님의 말씀은 참 감미롭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특효약이다! 마귀와 사탄을 부끄럽게 한다! 하나님 말씀을 더듬으면 의탁할 데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효과 빠르게 마음을 구한다! 만사는 전무하고 모든 것은 평안하다.” 라는 말씀으로 살았다.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가다 보니 병은 어느샌가 완치되어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 어떤 명의도 고치지 못했던 병이 완전히 나은 것이다! 난 하나님 말씀의 권병과 힘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정말 전능하신 의사셨다! 이제 난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창조주의 앞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얻은 생명은 광명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건강하게 하나님의 앞에서 사는 것이다! 날 구원해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정말 감사드린다. 모든 영광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린다!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

저는 농사를 본업으로 삼았던 일반 농민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논과 밭에서 바쁜 하루를 보내며 직접 농작물이 성장하는 기묘한 자연의 섭리를 체험하였습니다.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무성해져 가을에 수확하면 겨울에는 저장하는 일상이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이어졌습니다. 각종 농작물은 영원히 변치 않는 이 규칙에 순응해 뿌리를 내리고 발아해 꽃을 피우며 결실을 맺었습니다. 사람들도 시종일관 이 불변의 법칙에 순응하며 만물을 관리하고 만물을 누렸습니다. 이는 조물주께서 인간에게 하사하신 자비로운 은덕과 크나큰 혜택입니다! 그때 저는 인간이 조물주께서 주관하시는 기묘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며 그분께서 주시는 모든 자연식품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 국가 정부에서는 “과학을 배우고 과학을 활용해 과학을 발전시키자”는 경제 발전 전략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제창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 수준은 나날이 발전했고 사람들의 생활 수준도 빠른 속도로 높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일 년 내내 바나나, 포도, 수박, 오이, 옥수수 등 각종 과일과 채소를 섭취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지역의 특산품도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는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발전은 사람들의 물질에 대한 큰 욕망과 수요를 만족시켜 감탄과 찬미를 자아내게 했습니다. “이렇게 과학이 발전된 현대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일이 있을지언정 해내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현대 사회의 발전은 과학의 덕이라고 생각하며 이처럼 ‘하이 레벨의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어서 굉장히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 수준도 향상되었으며 덕분에 소강사회가 현실이 되는 것은 머지않은 미래의 일이다”라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까지 많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현대사회의 ‘좋은 점’은 모두 과학의 혁혁한 공헌 덕분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누구도 과학이라는 화려한 겉모습 뒤에 감추어진 이면을 알지 못했습니다. 즉 과학이 우리에게 얼마나 잔혹한 피해를 가져다주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약품이 채소와 과일에 어떤 이변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유치하게도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과학을 발전시켜 얻은 엄청난 성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 저는 과일과 채소 사업을 하게 되었고 그제야 매번 도매로 산 채소와 과일이 판매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부패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도매로 산 당근은 겉보기에 신선하고 외형도 보기 좋을 뿐만 아니라 수분도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이틀 정도 판매하고 나면 바로 썩어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계속 마음속으로 ‘도대체 왜 이렇게 쉽게 썩어버리는 걸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 원인에 대해 이해할 기회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요즘 채소와 과일에는 성장촉진제와 선도보존제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자연의 성장 규칙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채소와 과일을 빠르게 숙성시키고 색상도 예쁘게 만들어줍니다. 소매점에서는 당근을 빨리 팔아 더 많은 이윤을 남기려고 세척수에 약품과 색소를 첨가해 당근을 세척해서 더 붉고 신선해 보이도록 만듭니다. 실상 당근에는 이미 유독 성분이 가득한 농약이 흠뻑 묻어있는 상태인데 말이죠. 부추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짝 노란 빛을 띠는 잎도 좋은 품질이지만 소매점에서 판매 전날 농약을 뿌려 색상은 더 짙어지게, 얇은 잎은 더 굵어지게 만듭니다. 콩나물은 화학비료를 사용해 성장을 촉진합니다. 원래는 색이 전체적으로 푸르며 얇고 가는 모양을 띠는데 약품에 담가두면 희고 굵은 콩나물로 변하게 됩니다. 한번은 어떤 나이 지긋하신 농부 할머니가 오이를 도매 판매할 때 제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수확한 오이 양이 너무 적어 이윤을 많이 보지 못했어요. 제 남편이 수확 전날 비료를 뿌리지 않은거예요.” 저는 이상하게 여기며 물었습니다. “비료와 이번 수확이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는 겁니까?” 그분은 “비료를 뿌려주면 오이 출하량이 늘어나고 오이도 기다랗게 맺히는 데다가 꽃도 크고 예쁘게 핀답니다. 요즘 과학기술이 많이 발전해서 좋은 농약이 많이 개발되었어요.”라고 대답했고 이 내용을 들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끊임없이 그분의 이야기를 들은 저는 우리가 매일 같이 먹고 있는 채소가 겉으로는 보기 좋고 신선해 보이지만 사실 농약과 호르몬으로 가공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사업을 했던 기간에도 도매상이 포도, 토마토, 딸기 등의 많은 과일과 채소를 빨리 성숙시켜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두 하나같이 덜 익은 상태의 과일과 채소에 약품을 사용해서 빠른 숙성을 유도했습니다. 약품을 뿌린 작은 포도알은 크기가 커졌고 녹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했습니다. 심지어 전날 약을 뿌렸다가 둘째 날 바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일부 식품 중에서도 과일은 다른 지역에서 운송해오는 경우가 많은데 운송과정에서 대량의 방부제, 화학약품, 포르말린 등 유해성이 높은 약품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먹고 있는 대부분의 쌀, 밀가루, 식용유는 자연 상태의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로 개량한 유전자 변형 식품입니다. 심지어 식용 달걀까지도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해 만들어 낼 정도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발전된’ 과학 기술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섭취하는 음식이 과학기술로 가공된 성찬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농약과 독약을 먹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현재 사람들은 화학비료와 각종 호르몬이 첨가된 과일과 채소 등 기타 식품을 섭취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각종 괴질을 앓게 됐습니다. 당뇨병, 심장병, 고혈압, 각종 암은 현대인에게 흔히 발생하는 병이 되었으며 최근 중국의 암 환자는 매년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어린 환자는 이제 겨우 5세입니다. 이렇게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고 죽을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어찌할 바를 모르곤 합니다. 과학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를 돌이켜보면 사람들은 지금같이 이렇게 다양하고 이상한 괴질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인류는 앞으로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과학이 가져다준 풍부한 물질적인 자원을 누린 인류는 왜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후에 저는 운 좋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체험하게 되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정답을 찾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사탄이 과학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 것은 과학이란 명목으로 사람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고, 과학과 오묘한 비밀에 대한 탐색을 만족시키며, 또한 과학이란 명목으로 물질적 욕구와 생활의 질을 끊임없이 높이려는 사람의 요구도 만족시키는 것이다. 사탄은 바로 그런 명목을 내걸고 과학이란 방식으로 사람을 패괴시킨다.…사탄의 구실은 바로 사람이 과학을 연구한다면 사람의 생존 환경이 갈수록 좋아지고, 생활 수준도 끊임없이 높아지며, 또한 과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날로 늘어나는 사람의 물질적 욕구와 끊임없이 높아지는 생활의 질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사탄은 그런 까닭이 아니라면 왜 과학을 발전시키겠느냐고 말한다. 이것이 사탄이 과학을 발전시키는 이론적 근거이다. 하지만 과학이 인류에게 초래한 결과는 어떤 것이냐? 우리는 어떤 환경들을 접하게 되느냐? 인류가 호흡하는 공기는 오염되지 않았느냐? 우리가 마시는 물은 진정 깨끗한 물이냐? (아닙니다.) 그럼 우리가 먹는 먹거리는 어떠냐? 대다수가 자연적인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그것은 화학 비료로 재배한 것이고, 유전자를 개량해 재배한 것이며, 또한 각종 과학적 방식으로 변종시킨 것이다. 우리가 먹는 야채, 과일마저도 이미 다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은 자연적인 먹거리를 먹으려고 해도 쉽지 않다. 계란마저 원래 맛이 아니라 소위 사탄이 말하는 과학으로 가공된 것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생활의 질은 사람이 예상한 목표에 도달하여 사람의 욕망과 육체를 만족시켰을지라도 실제로 사람이 생존하는 환경은 모두 과학이 가져온 각종 ‘성과’에 의해 파괴되고 망가졌다. …우선 생태계의 균형이 깨지게 되고, 그와 동시에 인류의 오장육부도 그런 환경으로 더러워지고 해를 입게 되며, 각종 전염병과 온역, 스모그도 도처에 만연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지금 사람이 통제할 수 없는 국면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는 지금 이런 일을 분명히 보았으니, 인류가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계속 이렇게 사탄을 따르면서 지식으로 계속 자신을 충족시키고, 과학으로 계속 인생의 미래를 탐색하는 방식으로 생존해 나간다면 인류가 자연스레 맞이하게 될 결말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멸망입니다.) 바로 멸망이다. 즉, 한 걸음 한 걸음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지금 보면, 과학은 사탄이 사람을 위해 잘 배합해 놓은 일종의 혼미탕이고 잘 섞어 놓은 만성 자살 독약인데,너희를 흐릿해진 상태에서 사물(事物)을 분별하게 하여 아무리 보아도 또렷하지 않고, 어떻게 해도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탄은 또 과학이란 명목으로 너의 구미를 당겨 놓고 너의 코를 꿰어 한 걸음 한 걸음 깊은 수렁 속으로 끌어가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과학이란 것은 원래 사탄이 인류를 멸망시키고 독살하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사탄은 “과학발전을 대대적으로 실천해야 인류를 행복하게 하고 사람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라는 슬로건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마비시켜 사람들이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고 물질적인 생활을 누리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오인하게 했습니다. 과학을 숭상하고 끊임없이 과학을 연구해 사람들이 과학 발전을 수단으로 많은 것들을 연구하여 만들어 냈고 이로써 하나님께서 최초에 인류에게 향유하도록 예비해 주신 모든 것들을 파괴시키고 변화시켰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과학 발전에만 심취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원시적인 생존 환경과 각종 식물을 훼손시켰습니다. 우리들이 먹는 각종 채소와 과일에는 숙성제, 성장촉진제, 팽창제, 증색제, 선도보존제 등등 각종 유독 성분이 포함된 식물 성장 호르몬이 가득 뿌려지고 있습니다. 채소와 과일에 잔류해있는 이런 유독물질은 완벽하게 제거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체내로 흡수됩니다. 사람들이 이런 유독 물질에 장기간 오염된 채소와 과일을 섭취했을 경우 몸에 필요한 각종 영양분을 원활하게 공급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화학 약품이 체내의 오장육부, 심지어는 혈액에도 침투되고 있습니다. 이런 잔류 농약이 체내에 장기간 축적되면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이상한 괴질에 걸리게 됩니다. 고혈압, 심장병, 당뇨병과 암은 현대 사회에서 아주 흔한 질병이 되었습니다. 연령과 상관없이 이런 병을 앓게 된 인류의 건강은 철저하게 훼손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탄이 과학기술 발전에 전력을 쏟아부어 우리 인류가 맞이하게 된 결과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 발전을 위해 각종 명목으로 엄청난 규모의 화학 공장이 무수히 많이 생겨났습니다. 각양각색의 자동차가 점점 많아졌고 공기, 물, 토양, 기온 등등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해 예비하신 생존 환경이 서로 다른 정도의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오늘날 과학 발전이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재난을 가져왔고 우리들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사탄의 음험한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신 원시적인 생태계와 각종 식품에서 멀어지고 과학 연구를 통해 새로 개발한 식품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예비해주신 것이야말로 우리 몸에 가장 잘 맞고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한 인류가 사탄에게 무정하게 짓밟히고 훼손되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인류를 굽어살피시며 말세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육신으로 현세에 나타나시어 진리를 말씀하시고 직접 사탄에 깊이 타락되어 미혹된 인류를 구원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하나님은 이 세계와 이 인류를 창조하였고, 더욱이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인류의 문명도 만들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인류를 어루만지며 위로하고 있고, 또 오직 하나님만이 이 인류를 밤낮으로 보살펴 주고 있다. 인류의 발전과 진보는 하나님의 주재를 떠날 수 없고, 인류의 역사(歷史)와 미래도 하나님 손의 안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류가 좋은 운명이 있기를 바라고 한 나라가 좋은 국운이 있기를 바란다면, 인류는 다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다 하나님 앞에 와서 회개하고 죄를 자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의 운명과 결말은 피할 수 없는 큰 재앙일 것이다.』『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다. 하나님의 지위와 하나님의 생명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넉넉한 생활과 사람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그런 공평한 사회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생명 공급이다. 인류는 오직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생명 공급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만 인류의 필요와 인류가 탐색하고자 하는 욕망과 심령의 공허함을 해결할 수 있다. 』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운명을 정하셨으며 인류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한 이상, 공급해 주시며 인도하고 구원하십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 속에서 벗어나 과학을 발전시켜 다른 길을 걸음으로써 과학으로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려고 한다면 사람은 몰락의 길로 접어들 것이며 암흑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어 결국 사망에 이를 것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유일한 참 하나님만이 인류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권병과 능력이 있습니다. 인류가 좋은 운명과 처소를 원한다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예비하신 생존환경에 순응하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더는 대항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 속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모든 사람의 인생 역정은 갓난아기부터 시작되는데,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주변의 인·사·물도 부단히 바뀝니다. 우리는 자신의 두 손으로 운명을 바꾸려고 시도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운명에 순응하면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꿈꾸던 것을 이룰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 그러나 우리가 어떤 인생을 체험하든, 나이가 들면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마지막 관문인 죽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제가 아는 이모는 병원에 근무합니다. 병원에 가서 이모를 찾아뵐 때마다 병실을 지나게 되는데, 병상에는 약물로 겨우 연명하는 노인들이 누워 계십니다. 매번 무심결에 노인들과 눈을 마주칠 때마다, 저는 왠지 모르게 막연하고 뭔가 두려워하는 그 눈빛에 동정심이 생기게 됩니다. 노인들 옆에는 가족들이 분주히 드나들며 식사를 준비하기도 하고 물을 가져다 주기도 하고 옷을 입혀주기도 하고 약을 먹이기도 합니다. 가족들은 온갖 방법으로 노인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기어가 일단 돌아가면, 그 누구도 역전 시킬 수 없습니다. 예전에 아래와 같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교사 한 분이 만성 신부전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유명하다는 병원을 다 찾아다녔지만, 병세가 호전되기는커녕 갈수록 심각해졌습니다. 투여하는 약이 날로 많아지면서 눈이 흐려져 물건이 잘 안 보이고, 다리도 저려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단 결과 약물중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약물 과다 투여로 인해, 신장질환이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 그 교사는 ‘가족들이 나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고 있어. 난 차라리 죽는게 나아. 근데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는데, 왜 안 되지? 왜 죽음이 두렵지? 왜 이 세상을 떠나기가 두렵지?...’라는 생각을 한 적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머지않아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왜 마지막까지 운명과 싸울까요? 알고 보니 다 죽음이 닥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 미지의 세계로 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 아직 젊은 저는 늘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의 죽음에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왜 죽음이 정말로 다가왔을 때, 담담하게 마주하지 못할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날 저는 드디어 한 권의 책에서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왜 현재의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냐? 죽음에 직면할 때 어떤 사람은 바지에 오줌을 쌀 것이고, 어떤 사람은 부들부들 떨 것이며, 어떤 사람은 혼절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심지어 소리 내어 통곡할 것인데, 이런 것은 절대로 죽음이 다가왔을 때에야 사람이 돌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음에 직면할 때 이런 난감한 표현을 유로(역주: 흘러나옴)하는 까닭은 주로 사람이 마음 깊은 곳에서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안배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깨달음이 없고 더욱이 진실한 순복도 없기 때문이며, 사람이 스스로 모든 것을 안배하고 장악하려고만 하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과 자신의 생사를 장악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쓰였습니다. 이 말을 묵상하면서, 죽음에 임했을 때의 사람들의 여러가지 표현들이 떠올랐는데, 마음속의 의혹이 점차 풀렸습니다.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조물주를 알지 못하고, 조물주의 주재와 안배에 대해 인식이 없으며, 더욱이 진실한 순복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한 사람이 언제 태어나고, 언제, 어떤 배경에서 죽을지는 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에게 패괴된 후 마음속에 각종 사탄의 독소가 가득 차서 더 이상 하나님의 주재를 믿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능력으로 인생을 바꾸려 하고 늘 하나님의 권병,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정말로 죽음이 다가오면, 우리는 자신이 어디로 갈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 책에서는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이 아무 고통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 하고, 아무 아쉬움과 걱정도 없이 인생의 마지막 관문에 직면하고 싶어 한다면, 그 유일한 경로는 바로 아무 유감도 남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인간 세상을 떠날 때 아무 유감도 남기지 않을 않는 유일한 경로는 바로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하고, 조물주의 권병을 인식하고, 조물주의 주재 아래에 순복하고, 조물주의 권병 아래에 순복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이 인류의 분쟁을 멀리하고 죄악을 멀리하고 사탄의 매임에서 떠나 욥처럼 조물주의 인도 아래에서, 축복 속에서 살 수 있고, 자유와 해방을 받으면서 살고, 가치 있고 의의 있게 살고, 떳떳하게 살 수 있으며, 욥처럼 조물주가 시련하고 거두어 가는 것에 순복할 수 있고, 조물주가 지배하고 안배하는 것에 순복할 수 있으며, 욥처럼 일생 동안 조물주를 경배하여 조물주의 칭찬을 받게 되고, 조물주가 친히 발한 음성을 듣게 되고, 조물주의 나타남도 보게 되며, 욥처럼 즐겁게 살다가 즐겁게 세상을 떠나고, 아무 고통도, 아무 걱정도, 아무 유감도 없게 되며, 욥처럼 빛 속에서 살고, 빛 속에서 인생의 각 관문을 넘기며, 빛 속에서 순조롭게 자신의 평생 길을 다 걸어가고 순조롭게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게 된다. 즉, 피조물로서 조물주의 주재를 경력하고 체험하고 인식하고 난 후에 빛 속에서 떠나게 되는데, 그로부터 조물주가 칭찬하는 피조된 인류로서 조물주의 곁을 지키게 된다.” 이 말을 통해, 저는 오직 조물주의 섭리와 주재에 대해 인식이 있고, 진실로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귀복해야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은 기한이 차서 죽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가 보통 사람과 다르게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든 축복을 주시든, 그는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했습니다. 그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인정하고, 순복하기를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임했을 때, 그는 아무 걱정도 유감도 없었고, 자신의 결말을 걱정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 그는 즐거웠고 죽음의 통제에서 벗어났던 것입니다. ‘인생’이란 단어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리든 또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체험하든, 어쨌든 우리는 조물주가 우리에게 정해주신 규칙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오직 조물주의 섭리와 주재를 받아들이고 순복해야 자신의 인생을 욥처럼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 책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이런 것을 진정 깨달을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자연히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할 것이고, 몸 이외의 모든 것을 담담하게 내려놓고 머지않아 임할 모든 것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순복하면서 조물주가 사람을 위해 안배해 놓은 인생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할 것이며, 무턱대고 거부하지 않고 무턱대고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추천 동영상: 「천국의 꿈」

행복한 인생을 얻는 비결

인생의 깨달음 오직 욥을 본받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떠나야’만 행복한 인생을 얻을 수 있다. 결혼한지 몇년차에 접어든 그는 직장인 입니다. 부부간에 금실이 좋고 자식도 영리하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는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일할 수밖에 없어 그는 인생이 정말 막연하다고 느낍니다. 다른 한 사람, 중년인 그는 화이트 칼라입니다. 먹고 입을 근심이 없지만 승진과 더 많은 연봉을 갖기 위해 필사적으로 잔업을 해야 했고 접대가 많아서 제시간에 퇴근도 하지 못해 그는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칩니다. 마지막 한 사람은 말년에 이른 부자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떳떳하고 부러워 할지 모르지만 재산을 놓고 서로 다투는 자녀들 때문에 말년의 그는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삶은 다른 인생 경험을 가져다줍니다. 서로 다른 인생 경험은 또 서로 다른 고민과 쓰라림이 따르게 됩니다. 사람은 다 완벽하길 바랍니다. 가족이 화목하고 사업도 성공하고, 명예와 재물을 함께 얻어서 마음이 충실하길 바랍니다. 생활에 대해 여러가지 불만과 유감을 가지며, 어느날 세 사람은 만나게 되었습니다. 직장인은 화이트 칼라의 안정된 직업을 부러워했고 화이트 칼라는 부자가 사업에 성공한 것을 부러워합니다. 부자는 직장인의 가정이 화목한 것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들은 다 생활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그들은 더 열심히 노력하여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행복한 인생을 얻으리라고 맹세했습니다. 그 후 10여년이 지났습니다. 직장인은 윤택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지만 먹고 마시고 놀며 즐기는 사교(社交)장소에 잡혀 제시간에 퇴근하고 싶어도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화이트 칼라는 사업에 성공한 사장님이 되었지만 시시각각 다른 사람에게 속아 재산을 빼앗길까 봐 경계하게 되어 말할 수 없는 공허와 고독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부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의 자녀들은 그의 제삿날에야 산소에 가서 꽃바구니를 차려놓습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대다수가‘직장인, 화이트 칼라와 부자’중의 한사람이 아닐까요? 가난할 때는 안일한 생활을 동경하고,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하여 아무 근심이 없을 때는 큰 부자가 되길, 그러나 정작 큰 부자가 되고 나면 더 깊은 공허감에 빠지게 됩니다. 제비는 가을에 날아갔다가 봄이면 다시 돌아옵니다. 푸른 풀은 겨울에 시들었다가 봄바람이 불면 다시 살아납니다. 그러나 인생은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몇년, 십여 년, 혹은 몇십 년동안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고 노력합니다. 짧은 시간에 목숨을 걸고 금전, 지위, 감정, 혹은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여기는 물건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한가지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으로 우월한 물질적 향락을 누릴 수는 있어도 마음의 평안은 돈 주고 살 수 없습니다. 지위는 우리의 허영심을 일시적으로 채울 수는 있어도 마음 속의 고독함은 감출 수 없습니다. 감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육체 관계를 잠시 유지할 수는 있어도 인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몇 단락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네가 갓난아기로 이 인간 세상에 와서부터 너는 너의 직책을 이행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명정으로 인해 너의 배역을 맡아 네 인생의 여정을 시작한다. 너의 배경이 어떠하든, 네 앞날의 여정이 어떠하든, 어쨌든 하늘의 섭리와 안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자신의 운명을 장악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네가 하나님의 행사를 인식할 수 있든 없든, 하나님의 존재를 믿든 믿지 않든, 너의 운명이 하나님의 명정 가운데 있는 것은 의심할 바 없고, 또한 하나님이 영원토록 만물을 주재하는 그분이라는 것도 의심할 바 없다.” “하나님이 없는 날,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날,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참되게 인식하지 못하는 날은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의의가 없고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한 사람이 어디에 있든, 어떤 직책을 겸임하든 사람의 생존 방식과 추구 목표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다 끝없는 슬픔과 가시지 않는 고통이어서 사람으로 차마 다시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 않게 한다. 사람은 조물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조물주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고, 진정한 인생 얻기를 추구해야만, 점차적으로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인생의 모든 공허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사람에게 깊이 반성하게 하는 이 말씀을 보고 갑자기 행복한 인생을 얻는 비결을 깨닫게 된 것 같았습니다. 사람의 출생, 성장, 가정, 평생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지는 다 조물주의 손 안에 장악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장악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할 수 있고, 사람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인생을 다 합당하게 안배하셨습니다. 사람이 한정된 시간 내에 하나님을 경배할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나 자기의 욕심과 욕망을 만족시키려 한다면 그건 시간과 생명을 낭비하는 것이고, 남는 것은 공허함과 고통 뿐입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많은 크리스천들은 성경에 기재된 욥에 대해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욥은 일생 동안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중에서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께 경배하기를 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반듯한 아들 딸을 베풀어 주었고, 엄청난 재산과 많은 하인과 가축을 베풀어주었지만 그는 안락한 생활 속에서도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기 1장 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대적할까 봐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이 일에서 볼 수 있듯이, 욥은 확실히 실제 행동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인생의 참 진리를 실행했습니다. 욥기 1장 21절을 보면, 후에 사탄의 시험이 닥쳐 모든 자녀와 재산을 잃고 온몸에 악창이 나서 아내와 친구들의 조소와 조롱을 당했지만 욥은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면서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욥은 재산, 감정, 명예를 잃고 심지어 목숨이 위험한 지경까지 되었어도 이전과 다름없이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는 그가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주재한다’는 것을 굳게 믿었는데, 사람이 세상에세 살아가면서 수명이 길든 짧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안배하신다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종하면서 의연하게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복을 받든 화가 닥치든 신경쓰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그는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고 하나님께 몇 배의 축복을 다시 받게 된 것입니다. 더 좋은 자녀와 몇 배가 되는 재산을 얻었고 천수를 다 누릴 수 있었으며,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도(道)를 실행하여 마음속에 편안함과 평온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욥의 후반생은 계속 하나님의 보살핌과 축복 속에 있었고, 더 이상 사탄의 침입과 방해가 없었으며, 그는 완전히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욥에게 베풀어 준 가장 큰 축복입니다. 아직도 당신의 생활이 그리 만족스럽지 않아 고뇌하고 원망하고 있습니까? 그럼 당신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 말씀이 생명이 되지 않은 사람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큰 돈을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색에 빠진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금전, 미녀, 명리와 육체를 자극하는 것들이 사람에게 죄악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생활에 만족하지 않아 아직도 지위를 갖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하는 사람, 당신은 생각해 보았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어 주목받고 떠받들리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권리를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높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점점 모든 인격과 도덕을 상실하게 되고, 진정한 친구를 다 잃게 되며 주위에는 가면을 쓴 사람들만 남게 됩니다. 이러한 생활이 당신이 원하는 생활입니까? 사람은 일생 가운데서 사탄의 시험에 자주 직면하게 됩니다. 금전이든 명예든 지식이든 지위든 권세든 다 충분히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는 진리의 도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주 사탄의 시험에 빠집니다. 사악을 숭배하는 원인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행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겉으로 사역을 많이 하거나 좋은 행실이나 종교의식을 지키는 것만 중요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안정하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열어놓고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상고하고 실행하는 것에는 공을 들이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부터 욥처럼 살면 어떨까요? 금전과 명리에 얽매이지 않고 무슨 일이 닥치든 자기의 애호와 욕망과 상상대로 맹목적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인도와 하나님 말씀의 요구에 따라 나날을 보내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점차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되고 진리가 자기 생존의 근거와 생명이 되어 편안함을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며 하나님이 만족스러워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게 행복한 인생을 얻는 비결입니다. 제가 금방 본 아래 말씀과 같습니다 “사람은 늘 표면에서, 도리상에서 떠다니고 안으로 실행하지 않으며 안의 각종 정형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언제나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면 진리를 얻을 수 없고 진리를 얻지 못하면 진리가 너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를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사실이다......네가 믿음이 있고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협력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생명이 부지중에 너의 생명이 된다. 이렇게 부지중에 너의 이 생명 안에 곧 하나님이 발표한 진리의 요소가 있게 되고 이런 실제가 있게 되고 이런 살아 냄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네가 부지중에 하나님과 합하지 않겠는가? 네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얻으면 너에게 부지중에 하나님과 합하는 요소가 있게 된다. 사람에게 하나님과 합하는 요소가 있으면 사람이 하나님을 완전히 만족케 하여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될 희망이 있는 데에 도달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아무런 난이도도 없다.” 향의(向義)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가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흔히 우리 이 세대의 사람들이 좋은 시기를 만났다고 합니다. 돈만 있으면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슨 남방의 것이든, 북방의 것이든, 각 지역의 맛있는 음식, 특산물 등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사시사철 과일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과일은 있어도, 없어서 못 먹는 과일은 없다고 합니다. 이는 어르신들이 흔히 말하는 대약진 운동때 초근목피를 먹던 시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정말 너무 행복하네!’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현재 사람들의 생활 조건이 이렇게 좋고 또 건강에 몹시 신경을 쓰는데, 마땅히 사람들이 갈수록 더 건강해 지고, 더 장수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지만 왜 지금 비만, 뇌혈전, 각종 암, 백혈병 등등 각종 희귀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을까요? 심지어 최근에 더 많은 희귀병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좋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데, 왜 장수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수명이 짧아지고 있을까요?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저의 동료를 놓고 말해보겠습니다. 그는 가정환경이 매우 좋아 임신 후 태어날 아이를 위해 태교에 전념하였습니다.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서 한 살도 되지 않아 당뇨병 진단을 받고 인슐린을 맞기 시작하였습니다. 의사는 아이가 20살을 넘기기 힘들테니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믿기 힘든 일입니다. 이런 질병들의 침범에 직면하여 사람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두려워하던 데로부터 현실에 직면하고, 예사로 여기던 데로부터 죽음을 기다리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의학자들은 갖은 애를 다 써도 이런 질병들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지를 알아내지 못하고 그저 그럴듯한 논조로 얼버무려 무지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의 사역을 받아들이고 난 후 저는 말씀 중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최근에는 사회의 진보로 인해, 소위 말하는 사회 발전으로 인해 교통이 편리해지고 정보가 발달하여 동서남북이 서로 관통되면서 북방 사람들도 남방의 과일이나 남방의 특산물 혹은 야채들을 먹을 수 있는데, 심지어 1년 내내 먹을 수도 있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식탐과 물욕을 만족시켰지만, 사람의 몸은 오히려 각기 다른 정도로 해를 입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예비한 먹거리에는 남방에는 남방 사람들에게 적합한 먹거리와 야채, 과일이 있고, 북방에는 북방 사람들에게 적합한 먹거리와 야채, 과일이 있기 때문이다. 즉, 남방에서 태어났다면 남방의 것을 먹어야 아주 적합하다. 남방의 그런 기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먹거리와 야채, 과일까지도 예비해 놓았다. 북방에는 북방 사람들 몸에 꼭 필요한 먹거리가 있다. 그러나 사람은 식탐이 점점 심해져 사회의 발전 추세에 따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속에 휩쓸려 들어갔고, 자신도 모르게 그런 법칙을 어기게 되었다. 비록 사람은 지금의 생활 형편이 나아졌다고 여기지만, 이런 사회의 진보는 아주 많은 사람들 몸에 보이지 않는 해를 끼쳤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기 원치 않는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물을 예비해 주고, 사람에게 그런 먹거리와 야채, 과일을 예비해 준 본래의 뜻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사람이 스스로 자연법칙을 어기고 과학을 발전시켜 초래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무관하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것은 아주 풍부하여 지역마다 그곳의 특산물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곳은 홍대추(보통 대추라 함)가 많이 나고, 어떤 곳은 호두가 많이 나고, 어떤 곳은 땅콩과 각종 견과류가 많이 나는데, 이런 물질적인 것들은 다 사람의 육체에 필요한 영양을 공급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들은 계절과 시간에 따라, 또 그 시기에 따라 적당한 양으로 사람에게 베풀어 주는 것이다. 사람은 육체적 누림을 탐하고 식욕을 만족시키기를 탐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사람이 자랄 수 있도록 정해 놓은 정상적인 법칙을 쉽게 어기고 파괴하게 된다. 앵두를 예로 들어 말해 보자. 앵두는 다들 알고 있겠지? 앵두는 몇 월에 나느냐? (6월입니다.) 대략 6월쯤에 난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몇 월이면 끝나느냐? (8월입니다.) 6월부터 시작해 8월까지 2개월 동안 먹을 수 있다. 앵두의 신선도가 유지되는 기간은 2개월뿐이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그 기간을 12개월로 연장시켰는데, 다음 해에 앵두가 새로 나올 때까지 연장시켰다. 즉, 1년 내내 앵두를 볼 수 있다. 그런 현상이 정상이냐? (비정상입니다.) 그럼 앵두를 먹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언제냐? 바로 6월부터 8월까지인데, 이 기간이 지나면 아무리 신선하게 보관해도 먹으면 제맛이 나지 않고, 또한 사람 몸에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의 신선도가 유지되는 기간이 이미 지난 다음에는 어떤 화학 물질을 써도 그것이 자연적으로 자라면서 구비한 성분들을 유지시킬 수 없다. 더군다나 화학 물질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해는 사람이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다. 알았겠지? 지금 시장 경제가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이냐? 남방과 북방의 교통이 편리해져 1년 사계절 각종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북방 사람들도 늘 바나나를 먹을 수 있고 남방의 어떤 음식이나 특산물 혹은 과일도 먹을 수 있어 마치 사람의 생활은 좋아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생활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과학 발전으로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시장 경제가 사람의 육체에 가져다준 것은 정상적인 자연 생장 법칙을 어기는 것이고, 가져다준 것은 해로움과 치명적인 재난이지 행복이 아니다. 알았느냐? (네.) 포도를 보아라. 지금은 시장에서 1년 사계절 판매되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포도는 따고 나면 신선도가 유지되는 기간이 아주 짧다. 그 포도를 이듬해 6월까지 보관한다면 그때도 그것을 포도라고 할 수 있겠느냐? 쓰레기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그 포도에는 포도의 원래 성분이 함유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더 많은 화학 약품이 묻어 있다. 1년이란 시간이면 신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양 성분도 이미 없어진 것이다. 사람들이 포도를 먹을 때 ‘정말 행복하고 좋다! 30년 전만 해도 이 계절에 포도를 먹을 수 있었을까? 한 알이라도 먹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지. 지금의 삶은 얼마나 좋은가!’라고 여기는데, 그게 정말로 행복한 것이냐? 만약 흥미를 느낀다면 화학 약품으로 신선도를 유지한 포도를 가져다가 그것의 성분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 성분이 사람에게 어떤 유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연구해 보아도 좋다.......그렇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모든 먹거리를 예비해 준 그 본래의 뜻이 무엇인지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그런 물질적 음식을 탐하라고 한 것이냐? 사람이 그런 물질적 식욕을 만족시키는 데에만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영양 과다가 되지 않겠느냐? 영양 과다로 몸에 각종 질병이 유발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정한 자연법칙을 어기면 절대로 좋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에 따라 알맞게, 서로 다른 시기와 계절에 따라 사람에게 각기 다른 먹거리를 누리도록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무더운 여름을 보내면서 몸 안에 적지 않은 열기와 습기, 건조함이 쌓이는데, 가을에 많이 나오는 과일을 먹으면 그 습기와 건조함이 제거된다. 동시에 소와 양도 튼실하게 자라 사람은 육식으로 몸보신할 수 있다. 사람이 각종 육류를 먹고 나면 몸에 에너지와 열량이 생기고, 엄동설한 추위를 막아 낼 저항력이 생겨 매서운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어떤 시기에 사람에게 무엇을 예비해 주는지, 어떤 시기에 어떤 것들이 자라고 열매를 맺고 익게 하는지는 다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일찍이 안배해 놓은 것으로, 적절한 한도가 있지만, 사람은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은 말씀에서 사람의 생명이 짧아지는 원인을 밝히셨습니다. 바로 인류가 부단히 고품질의 생활 방식을 추구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만물의 생존법칙을 위반하고 파괴하였기 때문입니다. 조물주는 지역에 맞추어 인류에게 공급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 지대, 여러 체질의 사람들의 수요를 가장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남방에는 남방 사람들이 먹어야 할 음식이 있고, 북방에는 북방 사람들이 먹어야 할 음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밖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풀어 주신 각종 음식물 또한 계절과 시간을 나눕니다. 어느 계절에 무엇을 먹어야 인체에 가장 유익할지 조물주께서 이미 세심하게 안배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만물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인식이 없어 무턱대고 식욕을 탐하고 육체의 향수를 탐하여 각종 과학적인 수단으로 음식물의 생장주기를 조절하여 유통기한을 연장하였습니다. 따라서 각종 비철 채소와 과일들이 도처에 널려있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물질적인 생활은 풍부해졌고 사람들의 식욕도 만족을 얻었고 시장경제 또한 활성화되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사람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각종 희귀병으로 인한 죽음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으며 영문을 알 수 없는 이런 질병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람을 해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사탄이 인류에게 주는 쓰라린 경험과 재난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오직 조물주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조물주의 말씀대로 행하여, 모든 파괴를 중단하고 자연으로 돌려보내야만, 진정으로 사탄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그럼 이 모든 것을 만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새로 창조하려 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방법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너희에게 방법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실, 아주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면 너희는 이 방법의 가능성을 알게 될 것이다. 인류가 지금 이런 생존 상태에서 살고 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이냐? 인류의 탐욕과 파괴 때문이 아니냐? 그럼 인류가 이런 파괴를 멈춘다면, 이 생존 환경이 점차적으로 좋아지지 않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라면, 즉 하나님이 이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인류가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 모든 파괴를 멈추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모든 파괴를 멈추고, 즉 하나님이 창조한 만유에 대한 약탈과 참해를 멈춘다면, 인류의 생존 환경은 점차적으로 좋아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생존 환경은 점점 더 열악해지고 점점 더 심각하게 파괴될 것이다. 』

왜 크리스천의 삶이 번뇌로 가득합니까?

사람들은 크리스천의 삶은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고 늘 말합니다. 그러면 왜 지금의 삶이 번뇌로 가득합니까? 예를 들면, 직장 일로 인한 스트레스, 자녀에 대한 걱정, 가족들과의 불화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중년에 접어들면서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앞날이 막막해지는 등등 …… 주 예수께서 말씀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 28~30) 주님은 신실하시므로 말씀하신 대로 되고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지난날 우리도 영이 안정되고 평안한 것을 경험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성령이 갑절로 사람을 감동시켰습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갈급해하고 사모하였으며, 또한 있는 힘껏 주님의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주님께 자백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주님은 바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우리의 모든 걱정을 해결해 주셨으며, 우리들로 영 안에서 안식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마음은 세속에 얽매여 있는데, 설령 육체는 만족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심령의 갈급함은 오히려 해결받지 못하였고,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누리지도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깨달아야 합니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안식을 누릴 수 있고,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이 말씀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비물질적인 것임을 알려준다. 비록 하나님이 너에게 모든 물질적 필요를 공급해 줄 수도 있지만 너의 물질적 필요가 만족을 얻었을 때 이런 물질이 너에게 가져다준 만족은 진리에 대한 너의 추구를 대체할 수 있는가? 아주 뚜렸한바, 대체할 수 없다!……내가 예를 하나 들겠다. 네가 배가 고플 때 음식으로 보충해야 하는데, 이 음식은 좀 좋아도 괜찮고 좀 별로 여도 괜찮다. 네가 배불리만 먹으면 배고픈 그 느낌은 없어지고 사라질 것이며, 네가 거기에 앉아 있어도 잠잠해질 수 있고 너의 육체가 편히 쉴 수도 있다. 사람의 배고픔은 음식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하나님을 따르면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제로라고 느낄 때 너의 심령의 공허한 느낌은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음식물로 해결할 수 있는가? 또는 네가 하나님을 따르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때 너의 이런 심령의 허기는 무엇으로 보충할 수 있겠는가? 네가 하나님께 구원 받는 것을 경력하는 과정에서 성정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지 못했다면 너는 아주 조급함을 느끼지 않겠는가? 너의 이런 느낌은 너의 심령에 안식을 얻지 못하게 하지 않겠는가? 이런 심령의 허기는 무엇으로 보충할 수 있겠는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일부 사람들은 거리를 거닐고, 일부 사람들은 몇몇 괜찮은 사람을 찾아가 이야기하고, 일부 사람들은 한숨 푹 자고,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보거나 본분을 하는 방면에 공을 많이 들이고 힘을 많이 쓰는데, 이런 것이 너의 실제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가? 이런 행실에 대해 너희는 모두 깊은 체험이 있다. 네가 힘에 부침을 느낄 때, 너로 하여금 진리의 실제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하나님의 깨우침 얻기를 매우 사모하고 있음을 느낄 때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너에게 필요한 것은 한 끼 배불리 먹는 것이 아니고 몇 마디 마음에 딱 맞는 말도 아니며 더욱이 육체가 잠시적인 안일과 만족을 얻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을 하라는지,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너에게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알려주고 너에게 무엇이 진리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네가 이런 것을 깨달은 후에는 설령 소소한 것일지라도 너의 심령이 한 끼 배불리 먹는 것보다 더 만족을 느끼지 않겠는가? 너의 심령이 만족을 얻었을 때는 너의 심령이나 너의 온 몸과 마음이 진정한 안식을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일을 이렇게 비유하고 이렇게 분석하니, 너희는 지금 왜 내가 너희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이니라'는 이 말씀을 보라고 하는지 알게 되지 않았는가? 이 말의 뜻은 바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전부는 네가 전에 가장 소중하다고 여겼던 물건이나 사람을 포함한 것보다 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만약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얻지 못한다면, 사람이 만약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안식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이 진정으로 심령의 안식을 얻고 싶어한다면, 유일한 길은 바로 하나님 역사의 발자취를 따르고, 하나님이 현실에서 하시는 말씀의 공급을 받아야 하는 것임을 보았습니다. 은혜시대, 주 예수께서 사람이 회개하도록 하는 도(道)를 발표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주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하여 포용하고, 인내하고, 주님께 자백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바로 죄사함을 받고 영이 안정되고 편안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께서는 당시에 구속 사역만 하였을 뿐, 죄를 제거하는 사역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은혜시대 후기가 되어 사람은 죄를 짓고 죄를 자백하는 악순환 속에서 살게 되었는데, 사람이 죄를 범하는 본성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사람의 죄짓는 본성을 철저히 해결해야만이, 사람이 더 이상 사탄에게 훼방받지 않고 고통스럽고 어두운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은혜시대 구속 사역의 기초 위에서 또 말세에 사람의 패괴 성정을 철저히 정결케 하는 사역을 하였고, 가장 새로운 말씀을 발표하셔서 사람에게 정결케 되고 구원받는 추구의 길을 가리켜 주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 시리라” (요한복음 16:13) 지금 예수님의 예언은 이미 이루어졌는데, 예수님은 일찍이 육신으로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말세의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일곱 인을 떼고 책을 펼쳐 말세에 사람을 심판하고 정결케 하는 사역을 전개하였고, 인류에게 수백만 자에 달하는 말씀을 발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뭇 교회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세에 발표하신 말씀에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복해야 하며, 어떻게 성정 변화에 도달하고, 어떻게 인류의 패괴 실질을 인식해야 하는가 등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진리는 전부 사람의 생명에 필요한 것입니다. 무릇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순복하는 형제자매들은 성령의 역사를 얻었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세상, 직장, 가정, 인간관계를 대하는 진리 원칙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정 변화의 길을 찾았고, 성령 역사의 인도하에 점점 더 홀가분하고 유쾌하게 되었으며,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로서 오직 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줄 수 있고, 사람에게 길을 가리켜 주며, 사람의 생명을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오직 말세의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 말씀의 양육을 받아야만 생명이 자랄 수 있고, 사탄의 흑암 권세 아래에서 철저히 벗어날 수 있으며, 모든 고통의 얽매임에서 벗어나고, 심령에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름'에는 하나님의 뜻이 숨어 있다

얼마 전에 연이어 며칠 동안 날씨가 아주 무더웠습니다.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온몸에 땀이 나서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종(鐘)자매가 “일년 중에 여름이 없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자 저도 “그러게 말이에요, 저는 추위를 타도 더위는 타지 않아요. 근데 이런 고온은 너무 덥네요. 만약 여름이 없다면 온종일 땀을 흘리지 않고 얼마나 가뿐하겠어요!”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소(蘇)자매가 “중국의 곤명처럼 사계절이 봄 같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더운 날씨는 정말 불쾌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정말로 여름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틀 후, 자매 몇 명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 한 단락을 보게 되었습니다. 『봄이 오면 끝없이 내리는 보슬비가 봄 기운을 가져오고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 주어 토양이 녹기 시작하며, 작은 풀이 흙을 비집고 나와 싹이 트기 시작하며, 나무도 점차 푸르게 변한다. 이 모든 생물은 대지에 새로운 생기를 가져다주는데, 이것이 만물이 발전하는 광경이다. 각종 동물도 굴에서 나와 봄날의 따스함을 느끼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 여름이면 만물이 무더위를 누리고 또한 만물에게 가져다준 여름철의 따스함도 누리고 있다. 만물은 신속히 자라는데 나무와 풀, 각종 식물 역시 신속히 성장하고 있으며 꽃이 피고 열매까지 맺는다. 인류를 포함해 만물도 여름철에 분주히 보내고 있다. 가을철이 되면 가랑비가 가을철의 상쾌함을 가져다주고 각종 생물은 추수의 계절을 느끼기 시작하며 만물도 결실을 맺어 열매가 있게 된다. 인류도 가을철 만물의 열매로 인해 주렁주렁한 열매를 수확하기 시작하여 겨울을 위해 음식을 예비한다. 겨울철, 만물은 추위 속에서 차츰 휴식에 들어가고 조용해지기 시작하며 사람들도 겨울철에 한가해진다. 이 춘하추동이 바뀌고 변화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법칙에 따라 운행되고 변화되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법칙으로 만물을 이끄시고 인류를 인도하고 계시며, 인류에게 풍부하고 다채로운 생활 방식을 제정해 주시고 인류를 위해 서로 다른 온도와 서로 다른 계절의 생존 환경을 예비해 주셨다. 법칙 있는 이런 생존 환경하에 인류도 규칙적으로 생존하고 번식하고 있다. 이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또한 이 법칙을 깨트릴 수 있는 사람과 사물은 하나도 없다. 벽해상전이든 아니면 상전벽해든 이 법칙은 줄곧 존재하는데, 그것의 존재는 하나님의 존재로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님의 주재와 관리로 말미암은 것이다. 법칙 있는 이런 큰 환경이 있기에 인류의 생활도 이런 법칙과 규칙 중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런 법칙은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을 양육하고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법칙 중에서 생존할 수 있게 하였고,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을 위해 창조하신 만물과 법칙 있는 이런 생존 환경을 누리고 있다. 설령 사람이 이런 법칙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여기고 이런 법칙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 해도, 설령 사람이 하나님께서 이런 법칙을 지배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이런 법칙을 주재하고 계심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어쨌든 하나님은 줄곧 변함없는 이런 사역을 하고 계신다. 그가 이런 불변의 사역을 하는 목적은 바로 인류의 생존을 위함이고 인류가 계속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도 하나님께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만드신 것은 다 사람의 생존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단락의 말씀을 교제하니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깊이 느끼게 됐습니다. 식물은 여름의 햇빛과 무더위가 없으면 자랄 수 없고 꽃이 필 수 없으며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인류는 양식이 없으면 굶어 죽고 전 인류 역시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는 법칙은 전 인류의 생존을 위해 있게 된 것인데,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고려합니다. 우리의 이익이 손해를 보게 되면 바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서 만든 어떤 사물이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람은 영원히 이기적이고 하나님은 영원히 사심이 없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사심이 없고,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영원히 이기적이어서 자신만 위하는데, 사람 눈에는 자신만 있고 전 인류의 이익을 영원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하나하나를 만드신 것에는 다 그분의 본뜻이 있습니다. 또한 그 뒤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은 절대 만드실 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늘보다도 높고 누구도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잘것없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러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자신의 생각과 상상으로 제멋대로 평가하거나 단정짓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런 진리를 깨달았을 때 우리는 무더운 여름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 더 이상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의 법칙을 제정하셔서 인류로 하여금 번성하고 생존해 나갈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 다시 무지개를 볼 때

이른 아침, 저는 해변을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습니다. 방금 비가 한바탕 쏟아졌기 때문에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해변의 오솔길에는 행인들이 드물어 아주 고요해 보였습니다. 저는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때 바닷바람이 살며시 불어왔고 파도는 해안을 살며시 때렸는데, 마치 소곤소곤 대는 것 같았습니다. 갈매기 떼들이 바다 위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갈매기의 울음소리는 아침의 정적을 깨우고 있었습니다. 이때 멀리 보이는 해수면 위로 무지개가 저의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어릴 적 기억에 저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무지개는 정말로 아름다워!”라고 유쾌하게 말하곤 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순탄치 못한 생활을 경험하고 인간 세상의 처량함을 느끼면서 “햇살은 늘 비바람이 지난 뒤에 나오는데 비바람을 겪지 않고 어찌 무지개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늘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무지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으로 되어 저는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저는 예수를 믿었는데 노아의 이야기를 보고 나서야 원래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우신 언약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창 9:11~14,16)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땅 위의 살아 있는 모든 생물과 세우신 언약입니다. 이로 인해 저는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제가 주님을 믿지 않았다면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약속이라는 것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저는 또한 홍수로 세상을 멸한 것은 하나님의 극렬한 진노를 죄악으로 물든 인류에게 쏟아부은 사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천년 이래 이 사건 뒤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말씀을 보고 나서야 아름다운 무지개 뒤편에는 원래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깊은 아픔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욱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어린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세상을 멸한 것은 하나님이 원했던 것인가? 틀림없이 하나님이 원했던 것이 아니다! 세상을 멸한 후의 지상의 참상을 우리는 비록 대략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 당시 하나님이 본 그 광경이 어떠했는지는 전혀 상상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사람이든 아니면 그 당시의 사람이든 아무도 하나님이 그 정경을 보았을 때, 하나님이 홍수로 멸한 후의 세상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할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인류의 패역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때 홍수로 세상을 멸한 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는데, 이 사실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자 역시 아무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세워, 즉 약속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이 전에 이런 일을 한 적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알려 주었고, 하나님이 이후에는 영원토록 다시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멸하지 않는다고 알려 주었다. 이 ‘언약’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이 이 인류를 멸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슬펐음을 보게 되었다. 사람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류를 멸할 때와 인류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눈물을 흘리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너희가 다시 무지개를 볼 때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최소한 하나님이 전에 홍수로 그 세상을 멸한 것 때문에 슬퍼한 적이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고, 하나님이 비록 이 세상을 증오하고 이 인류를 증오하였지만 그가 친히 만든 인류를 멸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아팠고 포기하기 어려웠고 어쩔 수 없었고 참기 어려웠던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그가 유일하게 위로를 얻을 만했던 것은 바로 노아 일가 여덟 식구였는데, 노아의 협력으로 그가 만유를 창조한 심혈과 대가가 그나마 헛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이 아팠던 끝에 유일하게 그의 아픔을 메울 수 있었던 일이다. 그 후로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기대를 전부 노아 가족에게 두었고,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 아래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랐으며, 그들이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것을 다시 보지 않기를 바랐고, 또한 그들이 훼멸되지 않기를 바랐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서야 저는 비로소 인류가 사악과 타락 가운데서 살면서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아 하나님의 공의롭고 거룩한 성품을 촉노해 하나님께서 부득이하게 홍수로 세상을 멸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랑을 그분께서 친히 만드신 인류에게 다 쏟으셨습니다.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은 포기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류가 죄악과 음란 가운데 살면서도 회개하지 않아 한차례의 홍수에 의해 훼멸당하는 것을 보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아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심하셨을 때 노아만이 하나님의 유일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방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맨 마지막에 하나님은 그의 일가족이 방주에 들어가 생존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로 언약을 세우셨는데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전에 이런 일을 행하신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이후에는 영원히 다시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그분의 축복 속에서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구구절에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걱정과 염려와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수천년이 지났습니다. 홍수로 세상을 멸했던 사실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기억이 희미해졌습니다. 현재 온 인류는 이미 극도로 사악하고 패괴되어 더이상 하나님의 나타남을 찾지 않으며, 마음속은 온갖 향락과 폭력으로 가득차 갈수록 타락되고 패괴되다보니 노아시대의 사람들과 비교하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즉시 인류를 멸하시지 않고 성육신하셔서 말씀을 발표하심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영을 불러 깨우시고 사탄의 괴롭힘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각종 재난으로 우리에게 경고하시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는 6천년 경영 계획을 끝내시고 이 사악한 옛 세계를 멸하려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찬가지로 인류를 차마 멸하시지 못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그분의 보호와 축복 가운데서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말세에 행하시는 이 모든 사역은 말세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구원으로 더욱 충만합니다 ! 이전에 자주 무지개를 보던 일을 회상해 보면, 무지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마음껏 사진을 찍을 줄만 알았었지 무지개 뒤편의 하나님의 뜻은 소홀히 했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조물주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까?

이전에 공익 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합니다. 광고의 내용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제 1막 어떤 젊은 아버지가 작은 사내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이제 막 옹알옹알 말을 배우기 시작한 단계여서 이 세계에 대하여 호기심으로 가득했고 무엇이든 마냥 신기해 하기만 했습니다. 두 부자는 공원에 와서 벤치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작은 꼬마는 그 신기한 주변 환경을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마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눈 속에 넣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 꼬마가 한 가지 신기한 것을 보고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이게 뭐에요?” 젊은 아버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고 사랑스런 눈빛으로 귀여운 아들을 바라보며 매번 상냥하고 인내성 있게 아들의 물음에 답해 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한 쌍의 작은 새를 보고 심지어 7~8번 물었는데도 젊은 아버지의 눈빛에는 짜증스러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작은 생명을 너무나 사랑했고 이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마냥 좋기만 했고 사랑스럽기만 했습니다…… 제 2막 여전히 그 부자 둘이었습니다. 다만 지금은 아들이 아버지를 데리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이미 연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전처럼 나란히 벤치에 앉았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위치가 바뀌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을 뿐입니다. 노인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이때 한 쌍의 새가 날아와 풀밭에 앉았습니다. 노인은 너무 놀라고 기뻐서 장난조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이게 뭐지?” 아들은 인내성 있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노인이 또 물었습니다. “아들아, 이건 뭐야?” 젊은 아들은 여전히 인내성 있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이 세 번째 물어보았을 때 아들은 짜증을 냈고 잔소리로 받아들이며 싫어했습니다. 노인은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네가 어렸을 때, 이렇게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단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서 잠시 멍해 있다가 눈물을 글썽거렸는데 마치 무엇을 깨달은 것 같았습니다. 또 마치…… 저는 이 공익 광고가 다시 생각나서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아들이 잘 자라도록 세심하게 보살펴 주었고 가장 좋은 것을 다 아들에게 주었지만 아버지가 아들의 이해와 보살핌이 필요할 때, 그가 얻은 것은 오히려 아들의 냉랭한 낯빛이었습니다. 둘 사이에 왜 이렇게 큰 차이가 날까요? 그래 아들이 여태껏 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그가 마음을 다른 것에 빼앗겨 아버지가 있어야 할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이전에 읽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지은 후 그들을 벗으로 삼고 그들의 유일한 가족이 되어 그들의 생활을 보살펴 주고 그들의 의식주행도 보살펴 주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담, 하와의 부모의 신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이 한 이 일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높고 크심을 볼 수 없었고 하나님의 지고지상함도 볼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신비함도 볼 수 없었고 더욱이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도 볼 수 없었으며 다만 하나님의 낮춤, 자비를 보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 책임과 보호를 보았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대한 태도와 방식은 마치 사람의 부모가 자기 자녀를 염려하는 것처럼, 또 인류의 부모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배려하는 것처럼 실제적이어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조물주께서는 가장 진실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었고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아 사랑하고 돌보고 관심을 가지고 염려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라나 어른이 될 때까지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실제적이고 하나님은 생생하게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옆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이런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기에 너무나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다! 왜 우리들이 이것을 마음으로 체득하려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매번 하나님이 슬퍼할 때 하나님이 마주한 것은 전혀 그를 아랑곳하지 않는 인류이고 마주한 것은 그를 따르고 입으로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전혀 그의 어떠한 느낌도 아랑곳하지 않는 인류인데, 그의 마음이 어찌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역사 경영 중에서 비록 하나님이 진실하게 각 사람을 향해 역사하고 말씀하며 조금도 남김없이, 조금도 숨김없이 사람과 대면하지만 이와 정반대로 그를 따르는 각 사람은 다 그를 향해 봉한 것이고, 주동적으로 그를 가까이하고 주동적으로 그의 마음을 알아가고 그의 느낌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하나님의 지기(知己)’가 되고 싶어 하는 그 사람들도 그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고 그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으며 그를 알아가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할 때, 즐거워할 때 그의 즐거움을 그와 함께 나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해받을 때 그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마음이 아픔을 느낄 때 그가 털어놓는 것을 들어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몇천 년 동안의 하나님의 역사 경영 중에서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이해하고 느끼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더욱이 하나님의 곁에서 함께하며 그의 희로애락을 그와 함께 나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하나님은 외로웠다. 하나님은 외로웠다! 하나님의 외로움은 패괴된 인류가 그와 대립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욱이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이해하기를 추구하는 그 사람들, 심지어 그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까지도 그의 마음을 모르고 그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그의 희로애락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지불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죄가 없는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자신의 생명으로 전 인류를 구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주님이 다시 육신으로 돌아와 말씀을 발표하고 정결케 하는 사역을 하여 우리들을 구원하시는데, 주님이 받은 것은 오히려 사람의 냉담과 무관심이었습니다. 아무도 주동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 않고 아무도 주동적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고 구하지 않으며 아무도 주동적으로 하나님의 발걸음과 하나님의 나타남을 찾지 않고 아무도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고심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을 체득하려 하지 않고 아무도 하나님의 아픔을 체득하려 하지 않습니다……사람이 믿는 것은 여전히 막연 중의 하나님이고 자신의 머리로 상상해낸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참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거들떠보지 않으면 어떻게 조물주의 사랑을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조물주가 그래 우리가 사랑할 가치가 없는 분이란 말입니까?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권세를 창현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겨울에 주인집으로 이사왔습니다. 주인집 뒷마당은 매우 난잡했고 시들어 죽은 각종 잡초와 볼품없는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에 복숭아나무는 가지가 앙상하여 모양새가 없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 복숭아나무 너무 못생겼네! 열매나 맺을 수 있겠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복숭아나무도 싹이 돋아나고 파릇파릇해지더니 후에는 기름진 잎사귀로 가득하여 생기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무에 대해 약간의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하루하루 흘러가면서 복숭아나무는 꽃이 피고 서서히 열매를 맺었습니다. 가지에 달린 복숭아를 보니 작고도 못난 것이 마치 벌레 먹은 듯했습니다. 쭈그렁복숭아를 보는 순간 저는 매우 실망하였습니다. ‘복숭아나무야, 복숭아나무야. 네가 만약 싱싱한 복숭아를 맺지 못하면 너의 가치를 또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니?’ 복숭아나무에 대한 저의 기대는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의 시선은 빨갛게 익은 복숭아에 끌렸습니다. 주렁주렁한 열매는 햇빛의 자양을 받아 어느새 그렇게 크고 빨갛게 열렸는지 전의 그 “쭈그렁이” 모양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복숭아는 바람에 온몸을 흔들며 주위의 모든 것과 인사를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탐스러웠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서 저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기묘한 행사의 창현 하에 이 세계는 조금씩 하나님이 만든 만물에 의해 풍성해졌다. 그것은 혼탁하고 어둡던 데에서 밝고 환해지고, 몹시 고요하던 데에서 생기발랄하고 활력이 넘치게 되었다. 피조된 만물 중에서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작은 것에서 미소한 것까지 어느 한 가지도 조물주의 권세와 능력으로 창조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매 한 가지 피조물마다 그것의 특유하고 고정된 존재의 필요성과 가치가 있다. 그것의 형식이나 구조가 어떻게 서로 다르든지 어쨌든 조물주의 창조에서 온 것이기만 하면 그것은 모두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서 생존한다. 어떤 때 사람이 한 가지 곤충을 보고 그 곤충이 아주 못생겼으면 “이 벌레 왜 이렇게 못생겼어? 이렇게 못생긴 벌레는 절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게 아니야. 하나님이 절대 이렇게 못난 것을 만드실 리 없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은 너무나 우매하다! 마땅히 “이 벌레는 아주 못생겼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거니 틀림없이 그것의 독특한 용도가 있을 거야.”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은 그가 만들려는 각종 생물들에게 다양한 생김새가 있게 하고 다양한 기능과 용도가 있게 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든 만물은 천편일률적인 것이 없다. 외형에서 내부 구조까지, 생활 습성에서 제각기 차지한 위치까지 모두 각기 다르다. 소는 소의 생김새가 있고 당나귀는 당나귀의 생김새가 있고 사슴은 사슴의 생김새가 있고 코끼리는 코끼리의 생김새가 있다. 말해 봐라, 어떤 것이 가장 잘생겼고 어떤 것이 가장 못생겼는가? 어떤 것이 가장 유용하고 어떤 것이 가장 존재할 필요가 없는가? 어떤 사람은 코끼리의 생김새를 좋아하지만 코끼리로 농사짓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사자와 범의 생김새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그것들이 만물 중에서 가장 위풍있게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그것들을 애완동물로 삼아 기를 수 있는가? 어쨌든 만물을 대함에 있어서 사람은 모두 조물주의 권세에 순종하는 즉 조물주가 만물에게 제정해 준 법칙에 순응하는 이런 태도를 품어야 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며, 조물주의 본의에 대해 구하고 순종하는 이런 태도를 품어야만이 진정 조물주의 권세에 대해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것이니 사람이 또 흠잡을 이유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모두 그것의 특유한 면이 있고 모두 하나님의 권세와 지혜를 창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복숭아나무를 볼품없고 맺힌 열매도 못났다고 한 것은 저의 시야가 좁아서 겉면만 보고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있는 만물은 모두 완전무결하다는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때 제가 못났다고 여겼던 복숭아나무를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복숭아나무는 여전히 못난 그대로이고 주변의 잡초도 여전히 우거져 있어.’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조화롭게 보였습니다. 즉 복숭아나무는 모양새가 “못났다” 해서 자신이 살아갈 “용기”를 잃지 않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해서 주변의 잡초를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잡초도 “지위가 낮다” 하여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각자의 사명을 모두 이행하고 있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들을 어떻게 여기든지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고 묵묵히, 조용히 자기들이 존재하는 가치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하나님이 말씀하는 동시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생겨났다. 순식간에, 저마다 형태가 서로 다른 작은 생명이 흙 속에서 작은 머리를 한들한들 내밀면서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지도 않은 채 한시도 참지 못해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이 세상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다. 그것들은 조물주가 베풀어 준 생명에 감사를 드리고 있고 그것들이 다 만물 중의 일원이고 조물주의 권세를 창현하기 위해 제각각의 생명을 바칠 것임을 이 세상에 알리고 있다. 하나님 말씀의 발함에 따라 땅 위에는 풀들이 파릇파릇하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각 종류의 채소가 생기 넘치게 자라나 흙을 뚫고 올라오며 산천, 평원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밀림이 울창하다…… 조금의 생기도 보이지 않던 벌거벗은 이 세계는 신속히 푸른 풀과 채소와 나무 등의 각종 식물에 덮여 푸른 빛깔이 차고 넘친다…… 공기 속에는 푸른 풀의 향기가 가득하고 흙의 향기가 풍기며 각종 식물은 공기의 흐름에 따라 숨을 쉬기 시작하고 자라나는 과정을 시작한다. 동시에 이 모든 식물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 맺고 번식하는 생명 역정을 시작하고 그것들 제각각의 생명의 운행 궤적을 충실히 지키기 시작하고 만물 중에서의 그것들 제각각의 배역을 이행하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모두 조물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조물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며, 모두 조물주의 끊임없는 공급과 자양을 얻을 것이고 또한 영원히 조물주의 권세와 능력을 창현하기 위해 이 대지의 곳곳에서 꿋꿋이 살아갈 것이며, 그것들은 또 조물주가 그것들에게 부여한 생명력을 영원히 창현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저는 하나님께서 시초에 이 세계를 위해 식물을 창조하는 기묘한 광경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창조하는 그 순간부터 그것들에게 생명이 되풀이되는 궤적과 만물 중에서 맡아야 할 그것들 각자의 역할을 주셨습니다. 조물주의 명정으로 말미암아 이 법칙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전이되지 않았고 또한 사람의 애호에 따라 바뀌지도 않았습니다. 식물로써 그것들은 완강하게 곳곳에서 살고 자신의 존재로 조용하게 조물주의 권세와 능력을 창현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묵묵히 조물주의 은택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이렇게 평범한 것 같지만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어느 누가 발견한 적이 있을까요? 이 한 그루의 복숭아나무는 저에게 사람됨의 도리를 알게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지위가 있든 없든 지식이 있든 없든 재주가 있든 없든 모두 하나님의 주재와 명정이고 모두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습니다. 조물주의 안중에는 어떤 종류, 어떤 하나의 피조물이든지 모두 그것 의 특정된 사명이 있고 존재할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조물주의 주재에 순응하고 조물주의 권세를 창현하기 위해 피조물의 직책을 잘 이행하여 피조물의 사명을 완성할 뿐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도대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아주 친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녀는 가정도 행복하고 사업도 성공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고, 젊은 나이에 공장을 운영하고 차와 집 그리고 자녀도 있어 정말 출세한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일이 바쁘다 보니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지 않았고, 너무 과로해서 그런 거니 조금 쉬면 좋아질거라 생각해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결국 몸이 더 심하게 아파오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내 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녀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힘든 것이었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유방암 말기입니다. 조금 일찍 오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이 상태로는 치료하기가 힘들고 위험한 상태입니다.” 이 갑작스러운 비보에 그녀는 고통 속에 빠져들었고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습니다. ‘그때 느낌이 좋지 않을 때, 왜 일찍 검사 받지 않았을까’라며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병상에 누워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최근 몇 년 동안 바쁘게 뛰어다니고 사업도 성공했으며 가정도 아주 행복했지만, 머지않아 이 모든 것이 그녀와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난 후, 남편은 아직 젊어 다시 결혼할 수 있고 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엄마”라 부를 것이며 집과 차의 주인도 다른 사람이 될 것이고, 모든 것이 곧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거라는 것을 생각하니 그녀는 상심의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비록 남편과 자식이 그녀를 놓치기 아쉬워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죽음이 닥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저는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지만 그녀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서 추구하는 명리와 지위는 모두 허망하고 아무런 가치와 의의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가 이런 것을 추구하고 있지 않는가. 돈과 세력이 있고 집과 차도 있지만 마지막에 이런 것들이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사람이 일생에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살면서 도대체 무엇을 추구해야 헛되이 살지 않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느 날, 저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혈육간의 정, 돈과 명리이며 사람은 혈육간의 정, 돈과 명리를 일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본다. 비록 사람들이 다 운명이 기구하다고 원망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사람은 왜 살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삶의 가치와 의미”, 사람이 가장 잘 알아야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이런 문제를 뒷전에 두고 일생이 몇 년이든 사람의 청춘이 다하기까지, 귀밑머리 백발이 되기까지, 얼굴이 노화되기까지, 명리가 사람이 노쇠해지는 걸음을 막지 못하고 돈이 사람의 심령의 공허함을 메우지 못한다는 것을 의식하기까지, 누구나 생로병사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기까지, 누구나 운명의 안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기까지 오로지 명리를 추구하기 위해 바삐 뛰어다닌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인생 중의 마지막 고비에 직면할 때에서야 사람이 설사 거액의 재산이 있고 고귀한 신분과 대단한 지위가 있다 하더라도 다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다 필연적으로 그의 원래 위치로 즉,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고독한 영혼으로 돌아갈 것임을 진정 깨닫게 된다…… 사람이 곧 죽게 될 때에야 사람은 평생을 쏟아부어 추구했던 것들이 본래 다 금방 사라져버리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어서 어느 하나도 붙잡을 수 없고 어느 하나도 가져갈 수 없고 어느 하나도 사람에게 죽음을 피하게 할 수 없으며 또한 어느 하나도 고독한 영혼의 귀로 가운데서의 위로나 동반자가 될 수 없고 더욱이 어느 하나도 사람을 죽음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은 한평생 다 돈과 명리를 추구하며 이 양자를 목숨을 건지는 지푸라기로 삼고 유일한 받침대로 삼는데, 마치 돈과 명리를 가지면 사람이 계속 살아갈 수 있고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죽음이 다가올 때에야 사람은 돈과 명리가 사람에게 그렇게 요원하고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이처럼 연약하고 힘없고 이처럼 일격에도 견디지 못하며,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이처럼 고독하고 의지가지없고 이처럼 무력하며, 원래 사람의 생명은 돈과 명리로 바꿔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든지 얼마나 높은 지위가 있든지 죽음 앞에서는 다 마찬가지로 빈궁하고 미소하며, 돈으로 생명을 살 수 없고 명리가 사람의 죽음을 면케 할 수 없으며, 돈이든 아니면 명리든 다 사람의 수명을 일분일초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이런 느낌이 있을수록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갈망하고, 사람은 이런 느낌이 있을수록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무서워한다. 이때서야 사람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진정 발견하게 되고 또한 사람이 살든 죽든 다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사람이 장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진정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에게 세상의 돈·지위·명예를 추구하면 결국엔 모두다 헛된 것임을 알려 줍니다. 사람이 죽음에 직면했을 때, 이런 것들은 사람의 생명을 1분 1초도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의 생사는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원래 위치인,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고독한 영혼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조물주께서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확실히 가리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조물주의 주재를 체험하고 조물주의 권세를 인식하는 기회로 삼고 하나의 피조된 인류의 본분을 다하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얻기 어려운 한번의 기회로 삼는다면 사람은 틀림없이 정확한 인생관이 있을 것이고 틀림없이 조물주의 축복과 인도 아래에서 살 것이며 틀림없이 조물주의 빛 속에서 거닐 것이고 틀림없이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할 것이며 틀림없이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귀복할 것이고 틀림없이 조물주의 기묘한 행사를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또한 틀림없이 조물주의 권세를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말할 필요없이,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조물주가 사랑하고 열납하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이라야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하는 태도가 있을 수 있고 인생의 마지막 한 고비를 흔쾌히 맞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저는 사람의 모든 것은 조물주께로부터 온 것이고 결국에는 다시 주물주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사는 모두 조물주께서 배치해 놓으시고 정하신 것으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각 사람이 이 세상에 온 것은 다 자신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시고 배치하시는 것에 대해 진실로 인식하게 될 때, 조물주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할 것이며 진리에 대한 추구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추구를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자신의 일생을 조물주의 주재와 권세를 체험하는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이러면 명리·지위·돈의 유혹을 담담하게 대하고 다가오는 죽음을 포함해 생활 가운데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또 마땅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의의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창현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추구하여 마지막에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때는 조물주의 축복 가운데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생활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해야 하며, 자신의 일생을 조물주의 손에 맡겨 조물주께서 주재하시고 배치하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만 가치와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가 당신의 귀숙인가?

2015년 7월 1일, 뉴스에 의하면 선양(沈陽) 시내에서 한 여성이 10층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고 올라갔다가 삶과 죽음 앞에서 망설이고 있을 때 건물 아래에서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휘파람 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답니다. 구경꾼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사람들이 그 건물 아래로 모여들었습니다. 주민들 말에 의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웅성거리고 있었고 또 휴대폰으로 다른 사람에게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 있어, 빨리 와서 구경해. 진짜 볼 만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뉴스에서는 구경꾼들 가운데서 끊임없이 휘파람 소리와 조소 소리가 들려왔고 어떤 사람은 “떠들썩하게 굴지 말고 재간 있으면 뛰어내려!” “빨리 뛰어내려, 보기도 힘들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휴대폰으로 경찰에 신고 전화를 했지만 주택 단지에 폭발사고가 발생하고 불이 났다고 했답니다. 뉴스에 의하면 그 여성이 뛰어내린 그 순간에는 주위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답니다. 뒤이어 사람들은 계속 수군거렸다고 합니다. “와, 정말 뛰어내릴까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요?” “방금까지도 살아있던 한 생명이 이렇게 없어지다니요?” “너무 참혹해요! 에휴, 다들 떠들지 않았더라면 혹시……” 뉴스를 보고서 저는 그 여자가 자살한 것에 대해 비애에 잠겼습니다. 사람이 이토록 취약하여 일시적 충동으로 빚어낸 것은 자기에 대한 포기와 가족에게 주는 상처인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 사람들의 냉담과 조소 그리고 생명 경시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런 뉴스는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 간에 인정미가 조금도 없고 진정한 관심과 도움도 없으며 모두 “자신과 무관한 일이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각자가 자기 일에만 신경을 쓰고 남의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역경에 처하면 도리어 남의 재앙을 보고 기뻐하며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격입니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처음의 순진함을 잃었습니까? 왜 우리가 이토록 냉담해졌습니까? 어떤 고통이 당신에게 이런 선택을 하게 했습니까? 당신은 누군가 당신을 격려해주고 이해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당신은 이런 결과일 줄 생각지 못했습니까? 어디가 당신의 귀숙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시초에 하나님이 창조한 아담ㆍ하와는 거룩한 사람이었다. 즉 에덴 동산에서 그들은 성결하였고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 충성하였다. 그들은 여호와를 배반할 줄을 몰랐다. 왜냐하면 사탄 권세의 방해가 없었고 사탄의 독소가 없었으며, 그들은 가장 성결한 인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났는데, 더러움이 그들을 더럽히지 못하였고 육체가 그들을 점유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였는데, 후에 사탄의 유혹을 받아 독사의 독소가 있게 되었고 여호와를 배반하는 마음이 있게 되었으며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 그들은 시초에 성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였는데, 이야말로 사람인 것이다. 후에 사탄의 유혹을 받은 다음, 선악과나무의 실과를 먹고서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되었으며, 사탄에게 점점 패괴되어 사람의 원래 형상이 없게 되었다. 시초의 인류는 여호와의 생기가 있었으며, 패역이 조금도 없었고 사람 마음속에 사악이 없었는데, 그때의 사람이 진정한 인류인 것이다. 사람은 사탄에게 패괴되어 짐승으로 되었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전부 다 악이고 다 더러운 것이며, 선이 없고 거룩함이 없다. 이것은 사탄이 아닌가?』 『사람의 패괴 성정의 근원은 사람이 이미 사탄의 독해를 받고 이미 사탄에게 짓밟혀 사람의 사상, 사람의 도덕, 사람의 견식, 사람의 이지가 모두 사탄에게 심히 파괴됨으로 인한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사람의 근원적인 것들이 이미 사탄에게 패괴되어 전혀 하나님이 본래 창조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정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사람의 사상, 사람의 견식, 사람의 이지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켜야 하고, 또한 진리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가장 심하게 패괴된 곳에서 태어난 사람은 무엇을 하나님이라 하는지, 무엇을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하는지를 더욱더 모르며, 심하게 패괴된 사람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심하게 패괴된 사람일수록 더욱 이지와 견식이 부족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근원은 모두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된 까닭이다. 사탄의 패괴로 인하여 사람의 양심이 마비되었고 도덕이 패괴되었고 사상이 부패하게 되었고 정신 면모가 낙후하게 되었다.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은 사람은 본래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었고, 본래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순복하는 사람이었으며, 본래 이지와 양심이 건전한 사람이었고, 본래 인성이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된 후에 사람의 원래 이지, 원래 양심, 원래 인성이 모두 마비되었고 모두 사탄에게 파괴되었다. 이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마저도 다 잃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시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은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았고 마음속에 사악이 없었기에 그때의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인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의 사람은 사탄의 독해를 받아 사탄이 권세잡고 있는 이 흑암하고 사악한 세상에서 살기에 사회 기풍이 날로 나빠지고 도덕이 부패해지고 세상이 음험하고 잔인하며 인정세태가 야박해지고 사람 간에 진정이 없고 따스함이 없습니다. 여기서 알다시피, 우리가 악한 자에게 침해받고 하나님의 보호와 지킴을 떠났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럽고 무기력하고 냉담해지고 이기적이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 변화될 수 있습니까? 어떤 인생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것인데, 함께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봅시다. 『국도(國度)는 나의 말의 완선(完善)함에 따라 땅에서 차츰 형성되고 사람도 차츰 정상을 회복하여 땅에서 나의 마음속의 국도를 세운다. 국도에서 모든 자민은 다 정상 사람의 생활을 회복한다. 더는 쌀쌀한 겨울이 아니라 사계절이 봄 날씨 같은 세상이다. 사람은 더 이상 인간 세상의 쓸쓸함을 접촉하지 않고 더 이상 인간 세상의 냉랭함을 이겨내지 않는다. 사람 간에 다투지 않고 나라 간에 싸우지 않으며, 더 이상 참살하는 상태가 없고 더 이상 참살하여 흐르는 피가 없으며, 온 땅에는 즐거움이 넘치고 곳곳마다 인간 세상의 따스함이 넘쳐 흐른다. 나는 온 땅에서 다니고, 나는 보좌 위에서 누리며, 나는 뭇별 가운데서 생활한다. 천사는 나에게 새 노래와 새 춤을 바치고 더 이상 자신의 ‘취약’함 때문에 눈물로 볼을 적시지 않는다. 나의 앞에서는 더 이상 천사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아무도 나를 향해 고충을 하소연하지 않는다. 오늘은 너희가 모두 나의 앞에서 생활하고 내일은 너희가 모두 나의 나라에서 생존하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사람에게 베풀어준 가장 큰 축복이 아닌가? 오늘의 대가로 인하여 장래의 복을 이어받을 것이고 나의 영광 속에서 생활할 것이다. 너희는 설마 여전히 나의 영의 실질을 접촉하기 싫단 말인가? 설마 여전히 자신을 참살하기를 원한단 말인가? 설사 보이는 약속이 잠시라 해도 사람은 모두 그것을 추구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설사 내일의 약속이 영원까지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바로 내가 멸하려는 것이고, 사람이 만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내가 이루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점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면 꼭 그대로 하시고 그대로 하시면 꼭 이루시며 이루시면 꼭 영원까지입니다! 믿건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미 답을 찾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