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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을 추구하는 삶이 참 인생인가

얼마 전 친구가 같은 동네에 살았던 한 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동네 경로원에 사는 노인은 정신도 멀쩡하고, 몸도 건강했다. 노인의 아들은 일요일마다 노인을 보러 왔고, 또 노인은 일요일마다 아들을 볼 수 있는 것을 자신이 살아가는 유일한 소망이자 희망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다. 아들을 보지 못한 첫 번째 일요일, 사람들은 아들이 일이 바빠 잔업을 해야 한다고 말해줬다. 두 번째 일요일, 노인은 아들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일요일이 되어도 아들은 오지 않았다. 노인은 세 번째 일요일에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노인은 점점 불안해졌고, 여기저기 아들의 소식을 알아봤다. 그러다 아들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된 노인은 살아가야 하는 목적이 없어졌고, 살아갈 희망도 사라져 며칠 후 세상과 긴 작별을 고했다.

이 얘기를 듣자 사촌 오빠가 떠올랐다. 오빠는 내게 몇 년 안에 집을 리모델링하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험을 들어준 후 2000만 원가량을 남겨 아이들 학비에 보탤 것이라 말했다. 이 목표 하나만 갖고 오빠는 열심히 일했지만,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과로사하고 말았다.

시아버지는 손재주가 뛰어나 선반을 만들거나 용접하는 기술 모두 최고였다. 이 손재주로 집안을 먹여 살렸고, 풍족한 중산층의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시아버지에겐 또 다른 목표가 생겨났다. 손재주로는 돈을 빨리 벌 수 없으니 큰 사업을 벌여 빨리, 그리고 많은 돈을 벌자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함께 큰 사업을 진행해 큰돈을 벌려고 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돈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엮이려고 했고,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육체적인 즐거움을 누렸다. 하지만 정작 아내와 자식들에겐 무관심했다. 결국 돈을 벌기는커녕 빚만 떠안았고, 병치레까지 하게 되자 시아버지는 집에 올 면목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마음속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노력한 ‘결과’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궁금해졌다. ‘모두 저마다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왜 행복하지 않고 고통스러우며, 심지어 목숨을 잃기까지 하는 것일까? 이렇게 사는 게 올바른 인생인 건가? 세상에 또 다른 살아가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나는 고민하고, 갈구했다….’

그 후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다. 『‘사람마다 그 일생이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부유한 사람도 있으며, 평민도 있고 엘리트도 있으며, 각 계층의 사람들이 있지만, 사는 것은 매한가지이고, 다 한 가지 방식이구나. 다들 소망에 따라 가는 곳마다 겨루면서 가까스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구나.’』,『사람의 정신적 지주는 어떤 것이냐? 사람은 정신적 지주를 어디에 두느냐? 가족의 화목, 결혼의 행복, 또 물질적 향락, 돈, 명리, 지위, 정(情), 사업, 그리고 다음 세대, 다음 세대의 행복 등, 다 그런 일들에 둔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정도로 두고 있는 정신적 지주는 사실, 다 그런 일들밖에 없다. 자녀가 있는 사람은 자녀, 즉 다음 세대에 걸고, 자녀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사업과 혼인, 사회에서 차지할 자신의 자리와 명리에 둔다. 그러므로 생겨나는 삶의 방식은 다 같은 것이다. 다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고 사탄의 통제하에서 어쩔 수 없이 이름을 위해, 이익을 위해, 자신의 앞날을 위해, 자신의 사업, 결혼, 가정 그리고 다음 세대와 육체의 향락 등, 그 모든 것들을 위해 분투하고 바쁘게 보내는 것이다. 그런 길이 바른길이냐?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신나게 바쁘게 보내고, 사업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고, 더없이 행복한 가정에, 대단한 가문에, 아무리 대단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들 바른길에 들어설 수 있느냐? 명리를 좇고, 세상을 좇고, 업적을 추구한다고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계신다.”라는 이 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렇지?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든, 어떤 길을 가든,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길은 어떠냐? 그것은 바른길이 아니고, 정도(正道)가 아니다. 그런 것은 어떤 길이냐? 그릇된 길이고 사악한 길이며 타락의 길이다. 그렇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달았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게 된 이유, 우리의 모든 것을 주재하시는 분을 모른 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길이 없었고, 명확한 방향성도 없었다. 그래서 가족, 자녀, 사업, 결혼, 지위, 재산, 육체적 즐거움 등을 정신적 지주, 평생 추구해야 하는 목표로 삼았고, 살아가는 희망으로 삼았다. 앞서 언급한 노인의 경우 모든 희망을 아들에게 걸어 아들이 노인의 목숨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래서 아들이 떠났을 때 그의 소망이 사라졌고, 살아가야 하는 희망 또한 무너져버린 것이다. 사촌 오빠의 경우 가족들의 풍족한 삶과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삶을 위해 악착같이 돈 버는 일에 매달렸지만 충분한 돈을 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과로가 오빠의 목숨을 앗아갔다. 시아버지는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사셨고, 큰돈을 벌고 남들이 우러러보며 부러워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셨다. 이러한 생각으로 악착같이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빚더미에 앉은 것은 물론이고 병에 걸려 자신이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집에도 돌아갈 면목이 없어 홀로 밖에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 실제 우리 삶에서 노인, 시아버지, 사촌 오빠 같은 사람이 매우 많다.

우리가 추구했던 ‘노후에 기댈 수 있는 삶’,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 ‘남들보다 뛰어난 삶’은 모두 잘못된 것으로 사탄이 우리에게 주입한 생존의 법칙이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그것들을 추구하니 우리의 삶은 나날이 고통스러워지고 행복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수많은 실패 사례에서 우리는 ‘가족, 자녀, 명예, 지위, 사업, 결혼, 육체적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길을 걷는 것이며 인생의 바른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생의 바른길이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어떻게 추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

나는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다. 『무엇을 인생의 바른길이라고 하느냐? 갈수록 인성이 정상이 되게 하고, 선과 악,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알게 하며, 인류의 운명이란 무엇인지, 그 운명은 누가 장악하고 있는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사람은 운명이 어떻게 오는지를 알게 될 때면 운명에 안배된 모든 것에 순응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창조주의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된다. 이것이 바른길이 아니냐? 이것이 바른길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구하면서 창조주가 너에게 배정해 주고 주관해 주는 운명의 궤적에 따라 생활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살아도 명분이 서고 정당하다. 반대로 겨루고, 강탈하고, 창조주의 뜻에 맞서거나 연구하거나 하나님이 너에게 안배해 준 모든 것을 연구하고 대항해서는 안 된다. 너보고 연구하고 대항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래야만 사람은 살아도 명분이 서고 정당하지 않겠느냐?』 이 말씀을 통해 나는 인생의 바른 길을 찾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경영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명정에 따라 이 세상을 살게 되어있다. 또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싸우고, 뺏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깨달아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길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돌아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허무함, 고통, 번뇌, 걱정이 없으며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바른길인 것이다. 욥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욥은 가족, 정감, 자녀, 재산이나 그 어떠한 물질적 즐거움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존경하며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는 것을 인생의 추구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어도 운명에 대적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았으며 인위적인 방법으로 재산을 되찾아오려 하거나 향후 자신의 귀착지에 대한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그저 하나님 앞으로 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 최종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계획하거나 방법을 강구하지 않았고 운명에 대적하려 하지도 않았다. 또한,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바꾸거나 만회하려 하지 않았고, 재산이나 자식을 잃고 독창에 걸렸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거나 하나님을 원망하며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지도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는 길을 택했고, 하나님께서 내린 시련에 감사와 찬미를 보냈으며 하나님을 증거하여 사탄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욥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태도로 남은 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안정적이고 편안했다. 욥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욥이 추구한 것이 인생의 바른길이었기에 그의 삶은 가치 있고, 의미 있었다.

욥의 체험은 우리에게 행복의 길을 알려 준다.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인생의 바른길은 바로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따르는 것이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안정적이고 평온하게 살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창조주의 보살핌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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