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당신은 참으로 조물주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까?

이전에 공익 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지금까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합니다.

광고의 내용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제 1막

어떤 젊은 아버지가 작은 사내 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그 아이는 이제 막 옹알옹알 말을 배우기 시작한 단계여서 이 세계에 대하여 호기심으로 가득했고 무엇이든 마냥 신기해 하기만 했습니다. 두 부자는 공원에 와서 벤치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작은 꼬마는 그 신기한 주변 환경을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마치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눈 속에 넣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 꼬마가 한 가지 신기한 것을 보고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이게 뭐에요?” 젊은 아버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고 사랑스런 눈빛으로 귀여운 아들을 바라보며 매번 상냥하고 인내성 있게 아들의 물음에 답해 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한 쌍의 작은 새를 보고 심지어 7~8번 물었는데도 젊은 아버지의 눈빛에는 짜증스러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 작은 생명을 너무나 사랑했고 이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마냥 좋기만 했고 사랑스럽기만 했습니다……

제 2막

여전히 그 부자 둘이었습니다. 다만 지금은 아들이 아버지를 데리고 왔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이미 연로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전처럼 나란히 벤치에 앉았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위치가 바뀌어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을 뿐입니다. 노인이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이때 한 쌍의 새가 날아와 풀밭에 앉았습니다. 노인은 너무 놀라고 기뻐서 장난조로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아, 이게 뭐지?” 아들은 인내성 있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노인이 또 물었습니다. “아들아, 이건 뭐야?” 젊은 아들은 여전히 인내성 있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노인이 세 번째 물어보았을 때 아들은 짜증을 냈고 잔소리로 받아들이며 싫어했습니다.

노인은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네가 어렸을 때, 이렇게 나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단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서 잠시 멍해 있다가 눈물을 글썽거렸는데 마치 무엇을 깨달은 것 같았습니다. 또 마치……

저는 이 공익 광고가 다시 생각나서 자신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아들이 잘 자라도록 세심하게 보살펴 주었고 가장 좋은 것을 다 아들에게 주었지만 아버지가 아들의 이해와 보살핌이 필요할 때, 그가 얻은 것은 오히려 아들의 냉랭한 낯빛이었습니다. 둘 사이에 왜 이렇게 큰 차이가 날까요? 그래 아들이 여태껏 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단 말입니까? 그게 아니라 그가 마음을 다른 것에 빼앗겨 아버지가 있어야 할 자리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입니다. 저는 이전에 읽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을 지은 후 그들을 벗으로 삼고 그들의 유일한 가족이 되어 그들의 생활을 보살펴 주고 그들의 의식주행도 보살펴 주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담, 하와의 부모의 신분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이 한 이 일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높고 크심을 볼 수 없었고 하나님의 지고지상함도 볼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신비함도 볼 수 없었고 더욱이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도 볼 수 없었으며 다만 하나님의 낮춤, 자비를 보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 책임과 보호를 보았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대한 태도와 방식은 마치 사람의 부모가 자기 자녀를 염려하는 것처럼, 또 인류의 부모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보살피고 배려하는 것처럼 실제적이어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조물주께서는 가장 진실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었고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삼아 사랑하고 돌보고 관심을 가지고 염려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자라나 어른이 될 때까지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실제적이고 하나님은 생생하게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옆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이런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하기에 너무나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다! 왜 우리들이 이것을 마음으로 체득하려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매번 하나님이 슬퍼할 때 하나님이 마주한 것은 전혀 그를 아랑곳하지 않는 인류이고 마주한 것은 그를 따르고 입으로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전혀 그의 어떠한 느낌도 아랑곳하지 않는 인류인데, 그의 마음이 어찌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역사 경영 중에서 비록 하나님이 진실하게 각 사람을 향해 역사하고 말씀하며 조금도 남김없이, 조금도 숨김없이 사람과 대면하지만 이와 정반대로 그를 따르는 각 사람은 다 그를 향해 봉한 것이고, 주동적으로 그를 가까이하고 주동적으로 그의 마음을 알아가고 그의 느낌을 이해하려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하나님의 지기(知己)’가 되고 싶어 하는 그 사람들도 그를 가까이하려 하지 않고 그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지 않으며 그를 알아가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할 때, 즐거워할 때 그의 즐거움을 그와 함께 나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해받을 때 그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마음이 아픔을 느낄 때 그가 털어놓는 것을 들어주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몇천 년 동안의 하나님의 역사 경영 중에서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하나님의 희로애락을 이해하고 느끼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더욱이 하나님의 곁에서 함께하며 그의 희로애락을 그와 함께 나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하나님은 외로웠다. 하나님은 외로웠다! 하나님의 외로움은 패괴된 인류가 그와 대립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욱이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이해하기를 추구하는 그 사람들, 심지어 그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까지도 그의 마음을 모르고 그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그의 희로애락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지불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죄가 없는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자신의 생명으로 전 인류를 구속하셨습니다. 오늘날, 주님이 다시 육신으로 돌아와 말씀을 발표하고 정결케 하는 사역을 하여 우리들을 구원하시는데, 주님이 받은 것은 오히려 사람의 냉담과 무관심이었습니다. 아무도 주동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 않고 아무도 주동적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찾고 구하지 않으며 아무도 주동적으로 하나님의 발걸음과 하나님의 나타남을 찾지 않고 아무도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고심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을 체득하려 하지 않고 아무도 하나님의 아픔을 체득하려 하지 않습니다……사람이 믿는 것은 여전히 막연 중의 하나님이고 자신의 머리로 상상해낸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참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거들떠보지 않으면 어떻게 조물주의 사랑을 인식할 수 있겠습니까? 조물주가 그래 우리가 사랑할 가치가 없는 분이란 말입니까?

온라인 예배는 어떻게 참석할 수 있나요?

주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았어도 늘 죄짓는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죄성을 벗어 버려 정결케 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온라인 예배에 참석해 정결케 되어 구원받는 방법을 찾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