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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왜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을까요

매번 성경《욥기》에서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3:1~4)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욥에 대한 감탄이 저절로 나오곤 했습니다. 그것은 욥이 가산과 자녀를 잃고 온몸에 악창이 나는 시련을 겪고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위해 굳센 간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입으로 범죄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했는데 이런 믿음은 우리가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이 일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의롭다 칭함 받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틀림없이 사람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사람의 출생 또한 더욱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태어난 시간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지 있는 사람이 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다는 말을 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대하여 불만이 있는 걸까요?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일까요?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걸까요?

많은 형제자매는 욥의 이런 행동에 대해 이해할 수 없어 합니다. 그럼 욥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오직 욥 자신과 사람의 폐부를 감찰하시는 하나님만이 아시겠죠!

후에, 저는 한 복음 사이트에서 그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시련을 받을 때의 생각을 밝혀주었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욥이 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손을 뻗쳐 욥의 뼈를 상하게 했을 때, 욥은 마귀의 손아귀에 있었다. 욥은 벗어날 수가 없었고 반항할 힘도 없었으며, 몸과 영혼은 초강도의 극심한 고통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 ‘극심한 고통’은 욥에게 육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미소한 존재라는 것과 무기력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하였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인류를 염려하고 보살피는 그 심정도 깊이 깨닫고 이해했다. 욥은 마귀의 손아귀에 있을 때, 속된 인간이 그토록 무기력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는 허리를 굽혀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마치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고 감춘 것을 느끼는 듯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욥을 완전히 사탄의 손에 넘겼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욥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욥을 위해 더욱 마음 아파하였으며, 욥의 아픔으로 인해 아파하고 욥의 슬픔으로 인해 슬퍼하였다… 욥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고 하나님의 애틋한 마음도 느꼈다… 욥은 더 이상 자신 때문에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자신 때문에 하나님을 눈물 흘리게 하고 싶지 않았으며, 더욱이 자신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받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시각 욥은 그 속된 육체에서 애써 벗어나고만 싶었고, 더 이상 그 육체가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아픔을 참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아픔으로 인해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욥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욥은 육체의 아픔을 참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께 심려를 끼쳐 드릴까’ 염려하는 고통도 참아야 했다. 그 이중적인 아픔은 하나는 육체에서 온 것이고, 하나는 심령에서 온 것이었다. 그것으로 욥은 가슴이 찢어지고 터질 것만 같은 고통을 감당하였고, 또한 속된 인간의 극한이 그토록 사람을 어찌할 수 없게 하고 무기력하게 한다는 것도 느꼈다. 그런 상황에서 욥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강렬해졌고, 따라서 사탄을 증오하는 마음도 더욱 강렬해졌다. 그 시각 욥은 자신이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지언정, 자신이 존재하지 않을지언정,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욥은 자신의 육체를 미워하기 시작했고, 자신을 싫어하고 자신이 태어난 날을 싫어하고 심지어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까지 싫어하기 시작했다. 욥은 더 이상 자신의 생일과 출생에 관련된 모든 것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욥은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욥 3:3~4) 욥의 말에는 자신에 대한 증오가 섞여 있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또 자신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받는 것에 대한 자책감과 빚졌다는 생각도 섞여 있었다.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이 두 구절은 그때의 욥의 심정을 최고로 표현했으며 또한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완벽하게 각 사람에게 나타냈다. 동시에 욥이 소원한 것처럼, 욥의 믿음과 순복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그 시각 진정 승화되었다. 물론 그 ‘승화’는 하나님이 이루려고 예상했던 효과이다.』

욥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다,욥의 시련,

저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그는 사람이 살면서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못한다면 사람이라 칭할 자격이 없고 이런 사람은 살아갈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욥이 시련 속에서 사탄의 잔해를 겪을 때 하나님께서도 마음 아팠던 것입니다. 욥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걱정하시고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이 고통을 받을지언정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각 사람의 일거수일투족과 생각을 감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누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어느 누가 그에 대해 충심이 있는지, 어느 누가 진리를 추구하는지 하나님께서는 똑똑히 보고 계시며 전 인류를 손금보듯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욥의 말과 행동에 관념과 오해가 생기지 않을 것이고 사람의 상상으로 욥의 간증을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상상은 실제적이지 않고 허튼 생각이고 공상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람이 주로 보는 것은 사람의 겉모습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보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욥의 생각과 마음을 알고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욥이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게 되면 나중에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는 일이 닥쳐도 마음대로 사람을 논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논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겉면의 현상으로 사람과 하나님의 사역을 판단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찾고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순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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