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2019년 01월 30일

질문:

성경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아울러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여겨 주님께서 오시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런 깨달음이 정확한지 모르겠습니다.

답:

지금 대부분의 신도들이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주님의 이름을 지키고 어떤 환난이 닥쳐와도 끝까지 인내하기만 하면 반드시 구원받아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를 천국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은 도대체 성립됩니까? 진리에 부합되는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 교제해 보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 이 성경 구절은 사도 바울이 한 말임을 우리는 알고 있고, 주님의 말씀과 전혀 부합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라고 말씀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천국 문을 지키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정확하며, 사람의 말은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언급되었는데 “구원받는다”는 것은 단지 죄 사함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즉, 율법에 의해 정죄되거나 죽지 않는다는 말이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 죄악에서 벗어나 정결케 되고 변화되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며, 더욱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우리 안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는 본성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천재지변이 닥치고 인재를 당하며 질병을 얻어 고통스럽고 핍박이나 환난이 닥치는 등,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발생하게 되면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생기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믿지만, 또 세상의 조류를 좇으며 죄악의 쾌락을 누리고 늘 죄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분이기에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한복음 8:34~35) 이처럼 우리가 죄성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즉 믿음으로 구원받아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라고 말씀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표현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게다가 여기에서 실제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까? 우리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을 때는 그들이 죄를 범하기 전이므로 사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구원”이라는 표현이 없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사망이 곧바로 인류에게 임했고, 이때부터 구원이라는 말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게 하여 그들이 바로의 노역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노역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과 계명을 반포하시고 사람을 이끌어 땅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했을 때, 그들이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서 혹시라도 죄를 범하면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 사함을 받았는데, 이것이 곧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시대의 구원은 사람이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여호와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보호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것이며, 사람으로 죄를 알게 하는 효과에 도달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는 사람의 죄짓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시대 말기에 이르러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번제를 드려도 다리 절고 눈멀고 흠이 있는 소와 양을 제물로 바쳤는데, 율법에 따라 정죄되면 그런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들이 율법 아래에서 죽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당시의 배경에 따라 첫 번째로 성육신하셔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친히 사람의 속죄제가 된 것입니다. 그 후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회개하고 자백하면 죄 사함을 받았고, 더 이상 율법에 의해 정죄되어 죽지 않게 되었는데,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시대와 단계를 나누는 것으로, 결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므로 사람이 바짝 따라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못하면 구원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역에 의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때,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사역의 원칙을 알지 못했고, 자신의 관념과 상상 속에 살면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요엘 2:32)라는 성경 글귀만 지켰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 예수님의 새로운 사역에 대해서는 알아보지도 않았고 오히려 거절하고 대적하여 결국 하나님께 징벌과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구원받았다”고 여겼는데, 정말로 구원받은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의 결말을 심사숙고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사실 성경에서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9~10)라고 말한 구원은 은혜시대 죄사함 받은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도달한 효과는 단지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와서 기도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은혜와 진리를 누리지만, 사람의 죄성은 결코 해결되지 않아 사람은 끊임없이 죄를 범할 수 있는데, 진정한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각 교계 각파의 형제자매들 중에 죄 속에 살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교만함과 탐욕, 악독함과 이기심, 간사함 등, 이런 사탄 성품은 우리 안의 곳곳에서 볼 수 있고 이미 습관이 되어 예사로운 일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오랫동안 믿은 사람들이 몸소 체험한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고 명리나 지위를 위해 늘 거짓말을 할 수 있으며, 교만하여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재난이 닥치면 또 하나님을 원망하고 배반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늘 하나님의 존귀와 위대함을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오히려 사람을 숭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위를 위해 스스로 추켜세우고 자신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사람으로 숭배하고 우러러보도록 합니다. 심지어 패거리를 짓고 자신의 파벌을 만들고 독립왕국을 세웁니다. 사람에게는 사탄 본성이 있어 죄사함을 만 번 받아도 천국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는 우리가 여전히 사탄에 속한다는 것을 충분히 증명해 주고, 아직 진정으로 구원받지 못해 하나님의 원수이므로 반드시 하나님께 정죄 받아 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거룩과 공의입니다. 그분은 사람에게 죄성을 벗고 정결케 되고 변화되라고 요구하시는데, 성경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브리서 12:14),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계시록 14:5),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복음 5:48) 이 성경 구절에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죄가 없고 순결하며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처럼 타락되고 더러운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천국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까? 이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은 명확한 답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에는 한 단계의 과정이 생략되었다. 너는 그저 속량되었을 뿐, 변화의 과정은 거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려면 하나님이 친히 사역하여 너를 변화시키고 정결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구속만 될 뿐, 거룩해질 수는 없다. 그리하여 너는 하나님과 함께 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너는 하나님이 사람을 경영하는 사역에서 한 걸음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즉, 변화와 온전케 되는 중요한 한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막 구속된 너 같은 죄인은 하나님의 유업을 곧바로 이어받을 수 없다.』『예수가 당시에 행한 사역은 전 인류를 구속하기 위함이었다. 그를 믿으면 죄 사함 받을 수 있었다. 그를 믿는 자는 구속받았고, 죄에 속하지 않고 벗어났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얻은 것이고,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은 것이다. 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모두 조금씩 벗어 버려야 한다. 구원을 얻었다 함은 예수에게 온전히 얻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죄에 속하지 않고 죄 사함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죄에 속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았지만, 죄의 뿌리는 아직도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마치 아무리 잘라내도 또 자라나는 부추처럼 우리가 죄짓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주관적으로는 그 누구도 죄를 범해 주님께 미움을 사고 싶어 하지 않지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타락 성품이 있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치 성경에서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에베소서 2:8) 이 성경 구절에서 ‘구원을 얻다’는 한 방면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사람에게 임한 것이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사람의 믿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우리에게 임하면 반드시 믿고 따라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사탄에게 속하여 패역 성품으로 가득 찼고 더럽기 그지없는데, 이는 정결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은 육체적 누림을 너무 많이 탐하고, 육체를 너무 많이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육체를 극히 증오한다. 사람은 사탄의 더러움과 타락된 것에서 벗어나면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된다. 하지만 사람이 계속 더러움과 타락함을 벗어 버리지 못한다면 여전히 사탄의 권세 아래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아귀다툼, 궤사, 교활, 이런 것들은 모두 사탄의 것에 속한다. 너를 구원하는 것은 너로 하여금 이런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틀릴 리가 없는데, 사람을 흑암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네가 어느 정도까지 믿으면 육체의 이런 타락에서 벗어날 수 있고 육체 타락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되는데, 그것이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겠느냐? 네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면 하나님을 선명하게 나타낼 수 없고, 더러운 것에 속하여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 없다. 네가 정결케 되고 온전케 되고 나면, 성결한 사람이고 정상적인 사람이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기쁨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천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리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세 심판 형벌 사역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정결케 되고 구원받아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에만 만족한다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이 단계 사역은 시대를 끝마치고 사람을 종류별로 나누고 상선벌악하는 사역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마지막 한 단계 사역이자 또한 마무리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합하지 않는 사람과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인들은 다 멸망되는데 이것은 그 어떤 사람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역이 끝난 뒤에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멸망하는 것도 있고 살아남는 것도 있다. 이것은 경영 사역의 필연적인 추세이며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악을 행하는 자는 모두 살아남을 수 없고, 끝까지 순종하고 따르는 사람은 틀림없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인류를 경영하는 사역인 만큼, 어떤 자는 남겨지고 어떤 자는 내쳐진다. 이것은 각 부류의 사람이 맞이하는 서로 다른 결말로서 피조물에 대한 가장 적합한 배정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역이 끝날 때 멸망되는 피조물이 있고 살아남는 피조물이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미 전 우주의 사역을 전부 거둬들여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인 한 무리의 사람에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받아들이며, 타락 성품을 벗고 정결케 되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 되어 더는 하나님께 거역하고 대적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하는 원칙

1.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하는 진실한 의의는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께 순복하고 경배할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절대 종교 의식을 해서는 안 된다. 2. 반드시 현실의 어려움과 문제에 결부시켜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해야지 실제를 벗어나 빈말과 글귀 도리를 말해서는 안 된다. 3. 반드시 본분을 하는 것과 생명 진입의 모든 문제에서 항상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하며, 진리를 찾고 구하고 깨달아 실제에 진입해야 한다. 4. 간구하고 기도함에 있어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어야 하고 또한 이지가 있어야지, 하나님께 요구하거나 강요하거나 하나님을 이용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 거래해서도 안 된다. 관련된 하나님 말씀은 다음과 같음: 『기도는 형식만 따르고 과정만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좀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말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는 것으로 하나님의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기도여야 한다. 기도에 좋은 효과가 있으려면, 기도가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읽는 그 위에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서 기도해야만 깨우침과 빛 비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이 제기한 요구에 대해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요구에 도달하기 원하고,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은 증오할 수 있으며, 이 기초에서 인식을 더하여 하나님이 천명한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에 흐리멍덩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 기도한 후에 심지와 믿음이 있고 인식과 실행의 길이 있어야 진실한 기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에만 효과가 있게 된다. 그러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누리고 하나님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마음이 하나님 앞에 안정될 수 있다면, 이러한 기도는 이미 하나님과 진실하게 교통하는 경지에 진입한 것이다.』 <기도의 실행에 관하여>에서 발췌 『기도하면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안정시킬 수 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깨우침을 찾고 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듣기 좋은 말을 몇 마디 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한바탕 크게 울며 자신의 빚짐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을 적용하는 것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안정시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을 훈련하여 사람의 마음이 날마다 새로운 빛에 흡인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며, 소극적이지 않고 나태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행실을 중요시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여 생명이 자라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편차적인 면이다.』 <정상적인 영적 생활에 관하여>에서 발췌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가장 낮은 표준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마음을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진심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참말을 한다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역사하기 원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사람의 교활한 마음이 아니라 단순하고 성실한 마음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참말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고 사람에게 역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참말을 하는 것이고, 자신의 결함이나 패역 성정을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털어놓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너의 기도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에게 얼굴을 가릴 것이다.』 <기도의 실행에 관하여>에서 발췌 『사람은 모두 이런 경력(역주: 체험)이 있다. 뜻하지 않은 일이 닥치면 매우 괴로워하는데, 괴로울 때 누구와 말이라도 하면 조금 후에는 괴롭지 않게 된다. 하지만 괴롭지 않아도 자신의 정형은 해결되지 않았다. 때로 사역에 어려움이 생기면 마음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훈계와 책망이 임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 괴로움 속에서 몇 번이나 하나님 앞에 와 기도한 적이 있느냐? 모두 스스로 조절하여 흐리멍덩하게 지나왔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도 마음속에는 아예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 스스로 아무렇게나 하는데, 아무런 가치도 없다. 마치 거지가 쓰레기통에서 이것저것 가득 주워 담아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처럼 모두 제멋대로 한다. 보라, 사람은 항상 바른길에서 벗어나고, 가다가 빗나가게 된다. 여기서도 사람의 본성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 일을 통해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사람의 본성은 배반이다. 사역을 하다가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게 되면, 사람은 또 ‘나는 하나님을 믿는데 왜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지? 나는 아직도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너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사역을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이 일은 가장 깊은 것이다. 네가 이렇게 저렇게 섬겨도 기도마저 없다면 헛되이 섬기는 것이다. 너의 정형이 비정상일수록 더욱 효과가 없게 된다. 기도할 때에는 얼마나 멋진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속의 말을 하고 솔직한 말을 하며 자신의 어려움에 근거해 사실대로 말하고 피조물의 각도에 서서, 순복하는 각도에 서서 말하면 된다. “하나님, 당신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너무 강퍅한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 이 일에서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제가 연약하고 너무 형편없어 당신의 쓰임에 합당치 않음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에게 패역이 있어 사역을 하기만 하면 당신의 사역을 방해하게 되는데, 모두 당신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자신의 사역을 하시기 원합니다. 우리는 다만 협력할 뿐입니다……” 이런 말도 해내지 못하면 너 같은 사람은 끝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도할 때에도 이지적으로 기도했는지 분별해야 하니, 그러면 기도도 할 수 없겠네.’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것은 한동안 훈련하면 되기에 괜찮다. 기도를 하다 보면 어떤 말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직접적인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기도할 때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평소에 네가 일을 할 때 곧바로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할 수 없다. 사람이 무릎 꿇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가까운 때이다.』 <좌담 기록ㆍ기도의 의의와 실행>에서 발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기도가 부족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정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의의 있고 가치 있는 일로 본다면, 너는 기도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교통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만일 기도가 부족하면 너는 육체 속에서 살게 되고 사탄의 매임에서 살게 되며, 진실한 기도가 없으면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된다.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날마다 진실한 기도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효과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잠을 좀 적게 자고 좀 적게 누리면서 새벽 기도를 한 후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고 싶지 않은가? 이렇게 청결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먹고 마시면 더욱 하나님께 열납된다. 네가 아침마다 이렇게 실행하고, 날마다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훈련하여 하나님과 교통하고 사귀면,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은 반드시 많아질 것이고 더욱 하나님의 뜻을 더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 저는 저의 본분을 하기 원합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서 영광을 얻으시도록, 당신께서 우리 이 무리 사람들에게서 간증을 누리시도록, 저는 당신만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바칩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여 우리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만족케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당신을 추구 목표로 삼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여 너에게 이 부담이 있게 될 때면, 하나님은 꼭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 너는 자신만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또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가 가장 진실하다. 너는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인가?』 <기도의 실행에 관하여>에서 발췌 『기도는 의식이 아니라 거기에는 많은 의의가 있다. 사람의 기도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느냐? 사람이 직접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네가 만약 이 일을 의식으로 간주한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기울여 기도하지 않고 진실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 편에서 너는 열외로 취급받는데, 하나님께는 너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너에게 어찌 성령 역사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사람이 사역을 하다가 좌절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후에는 기도하지 않으면 사역도 하지 못한다. 기도로 사역을 가져오고 기도로 섬김을 가져오는 것이다. 네가 인솔자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전혀 기도에 공을 들이지 않고 기도를 참답게 하지 않으면, 이렇게 저렇게 섬기다가 넘어질 것이다. ……사람이 항상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네가 늘 혼자 하고 늘 기도가 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이것저것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영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영을 하면 정죄받는 것이 아니겠느냐? 겉으로 보기에는 네가 방해하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모독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너는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네가 엇나가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지 않은가? 겉으로 보면 비록 네가 엇나가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성질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좌담 기록ㆍ기도의 의의와 실행>에서 발췌 『본분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 너는 언제나 ‘이 본분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야 한다. 일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통해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 진리를 찾고 구하며, 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면, 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사실, 사람은 그런 일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이런 참된 정형과 이런 소망이 없으면, 그것은 사람이 실행 방면에서 범하는 가장 큰 착오이다. 왜냐하면 네가 하나님을 믿어도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냐?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계속 믿는다면 어떤 효과가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의의가 또 어디에서 실현되겠느냐? …… ……네가 어떤 일을 처리하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하든 아니면 너 자신의 사적인 일을 하든, 너는 그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일이 인성 있는 사람이 해야 할 것인지, 네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이런 것은 네가 마땅히 생각해야 할 바이다. 네가 이렇게 한다면, 너는 바로 진리를 찾고 구하는 사람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이렇게 모든 일과 모든 진리를 참답게 대해야 성정이 변화될 수 있다.』 <좌담 기록ㆍ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며 진리를 최대한으로 실행해야 한다>에서 발췌 『너희에게는 진실한 기도가 아주 적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기도할 줄 모른다. 사실 기도는 주로 마음속 말을 하는 것인데, 평소에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만 하면 위치에 잘못 선다. 하나님의 뜻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께 베풀어 달라고 억지로 구하는데, 그 결과 기도하면 할수록 무미건조해진다. 기도할 때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구하든지, 어떤 것을 사모하든지, 어떤 것을 얻으려고 요구하든지 혹은 어떤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 꿰뚫어 볼 수 없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하든지, 힘을 더해 달라고 하든지, 혹은 하나님께 깨우쳐 달라고 하든지, 이런 말의 표현에도 이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이지 없이 무릎 꿇자마자 “하나님,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 저로 제 본성을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하십시오. 혹은 저에게 무얼 무얼 주십시오. 저를 어떻게 어떻게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 ‘주십시오’ 안에 강박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반드시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네가 스스로 사전에 다 결정한 것이다. 비록 네가 이렇게 기도할지라도 이런 기도에 대해 성령은 ‘네가 이미 스스로 결정하고 그렇게 하려고 한 이상, 이런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라고 여긴다. 기도에는 마땅히 구하고 순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너에게 일이 임할 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면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일이 임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케 하기를 원하고, 당신 앞에서 찾기 원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뜻은 다 당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당신을 대적하는 것이며,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임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하기만을 원합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런 어조의 기도는 적합하다. 만약 네가 ‘하나님, 어떻게 어떻게 해 주시고, 저를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저에게 적합한 환경을 마련해 주시고 합당한 사람을 예비해 주셔서 저로 사역을 잘하게 해 주십시오……’라고만 한다면, 이렇게 기도한 후에도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왜냐하면 너는 하나님께 너의 뜻대로 일을 해 달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는 기도할 때 한 말에 이지가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네가 우매하든지, 일부러 그렇게 했든지 너의 기도에 이지가 없으면 성령이 네게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기도할 때, 이지 있게 말해야 하고 어조가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당신께서 저의 연약함을 아시고 저의 패역을 아십니다. 저에게 힘을 더해 주셔서 이런 환경을 이겨 낼 수 있게 해 주시기만을 구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뜻대로 이루십시오. 저는 그저 이렇게 구할 뿐입니다. 저는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주십시오. 설사 저로 효력을 하게 하시고 안받침물이 되게 하실지라도 저는 기꺼이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힘과 지혜를 더해 주셔서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케 하게 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안배에 순복하기만을 원합니다……” 네가 이렇게 기도하고 나면 매우 편안한 느낌이 들 것이다. 만약 네가 계속 구하기만 한다면 구한 후에도 역시 빈말 무더기뿐이다. 왜냐하면 너의 뜻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너는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당신께서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고 사람의 정형을 아십니다. 이 일에서 저를 깨우쳐 주셔서 당신의 뜻을 알게 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모든 안배에 순복하기를 원하고, 저의 마음이 당신께 순복하기를 원합니다……” 네가 이렇게 기도하면 성령이 너를 감동시킨다. 만약 네가 기도하는 방식이 정확하지 않다면 무미건조하고, 성령이 너를 감동시키지 않는다. 네가 중얼중얼하기만 하고 묵도하거나 눈을 감고 아무렇게나 말하면, 그것은 순전히 대충대충 하여 속이는 것이다. 네가 대충대충 하여 속이는데 성령이 역사할 리가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오면 공손하고 정직해야 하며,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와야 한다. 율법시대를 보면 제사장들은 제물을 바칠 때, 모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도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도 여전히 제멋대로이고 또한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워서 눈을 감고 기도하려고 하는데, 이래도 되겠느냐?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에게 반드시 어떤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사람에게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의 기도에 이지가 없을 때가 너무나 많은데, 모두 “하나님, 당신께서 저를 인솔자가 되게 하신 이상, 제가 모든 것을 합당하게 하고 당신의 사역에 엇나가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꼭 제가 이렇게 하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라는 말투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가? 이런 기도에는 이지가 없지 않으냐? 네가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는 것이 이렇게 이지가 없는데,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하겠느냐? 네가 그리스도 앞에 와서 내게 말할 때 이지가 없는데, 내가 들어줄 수 있겠느냐? 너를 단번에 차버리겠다! 네가 영 앞에 있는 것과 그리스도 앞에 온 것은 다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할 때, 어떻게 말해야 이지가 있는 것인지, 어떻게 말해야 정형을 경건한 위치에까지 조절하여 겸손하고 낮아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 후에 다시 기도하면 좋아질 것이고, 기름을 바른 것 같을 것이다. ……예수의 기도를 보아라(예수의 기도를 언급하는 것은 사람이 꼭 그의 그 각도에, 그 위치에 서서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만일 할 만하시거든……”라고 기도하였는데, 즉 만약 할 수 있으면이라는 이런 뜻으로 상의한 것이지 “해 주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순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순복하는 상황에서 기도하였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두 번째도 같은 말로 기도하였고, 세 번째도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더듬어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완전히 순복할 수 있었고 자신의 선택이 조금도 없었다. 그가 “만일 할 만하시거든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둘 때까지 피 흘릴 것을 생각하니 매우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에 관련되는 일이고 또한 그가 아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더듬지는 못한 전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고통스러울 것을 생각했음에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주아주 순복한 것이다. 그의 기도는 정상인데, 조건을 따지며 말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지나가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한 것이다. 첫 번째로 기도할 때는 깨닫지 못하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했는데, 순복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두 번째도 역시 그렇게 기도했는데, 모두 세 번 기도하였다(물론 세 번 기도한 시간은 3일만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할 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닫고 난 후 더 이상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처음 두 번 기도할 때는 모두 찾고 구하였는데, 역시 순복하는 상황에서 찾고 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 어떻게 어떻게 해 주시고, 저를 어떻게 어떻게 인도해 주시고, 저에게 조건을 예비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아마 너에게 적합한 조건을 마련해 주지 않고 너로 그 고통을 받게 할 수도 있다. 만약 사람이 기도할 때 늘 “하나님, 저에게 마련해 주시고,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런 기도는 얼마나 이지가 없느냐! 너는 기도할 때 이지가 있어야 하고, 순복하는 전제하에서 기도해야 하며, 정해 놓아서는 안 된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간구하여 어떻게 어떻게 해 달라고 구해야지.’라고 정해 놓는데, 이런 기도는 너무나 이지가 없다. 많은 경우에 그 영이 사람의 기도를 전혀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기도해도 무미건조한 것이다.』 <좌담 기록ㆍ기도의 의의와 실행>에서 발췌

우리는 주님의 보혈이 이미 우리를 깨끗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히 구별되어 죄에 속하지 않으므로 더는 정결케 하는 사역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논법이 왜 틀렸습니까?

『너는 예수가 말세에 강림하리라는 것만 알고 있는데, 도대체 그는 어떻게 강림하는가? 너희 이러한 죄인들이 갓 구속되어왔는데, 변화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지 않고서 하나님의 뜻에 맞을 수 있겠는가? 현재의 너 옛 사람, 예수가 너를 구원해온 것은 틀림없다. 네가 죄에 속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것이지만 너에게 죄가 없고 더러움이 없다고는 증명할 수 없다. 네가 변화되지 않고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겠는가? 너의 안이 아직도 더러움뿐이고 이기적이고 비열하면서도 네가 예수와 함께 강림하고 싶어하는데, 그렇게 좋은 일이 있겠는가? 네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한 단계의 과정이 적은데, 다만 구속되었을 뿐 변화되지 않은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의 역사와 영의 역사는 어떤 구별이 있습니까?

성경 참고: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 33:18~20) “여호와께서 시내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 가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출 19:20~21)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출 20:18~19) 관련된 하나님 말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직접 영의 방식으로, 영의 신분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은 사람이 만질 수도, 볼 수도 없고 또한 접근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영의 각도에서 직접 사람을 구원한다면 사람은 그의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이 피조된 사람의 외형을 취하지 않았다면 사람은 역시 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도 여호와의 구름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은 전혀 그에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그가 피조된 사람이 되어야만, 즉 그의 ‘도’를 그가 되려는 육신에 가져와야만 이 ‘도’를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친히 만들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직접 그의 도를 듣고, 보고, 얻어서 완전히 구원받을 수 있게 된다. 만일 하나님이 성육신 되지 않았다면, 무릇 혈기에 속하는 사람은 아무도 이 지극히 큰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없고, 또한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의 영이 직접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한다면, 사람은 모두 격살당할 것이고, 또는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는 연고로 사탄에게 철저히 사로잡혀 갈 것이다.』 <성육신의 심오한 비밀 (4)>에서 발췌 『하나님은 성육신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볼 수도, 접촉할 수도 없는 영이고, 사람은 다 육체에 속한 피조물인 데다가 사람과 하나님은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있고, 또한 서로 다른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은 육체에 속한 사람과 조금도 맞지 않아 전혀 ‘수교’할 수 없다. 거기에다 사람이 영으로 될 수도 없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영이 피조물이 되어 그의 원래 사역을 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높은 곳에 오를 수도 있고, 피조된 사람으로 자신을 낮추어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사람과 함께 생활할 수도 있지만, 사람은 지극히 높은 곳에 올라 영으로 될 수 없고, 더욱이 지극히 낮은 곳에 낮출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역을 해야 한다. 첫 번째 성육신을 예로 들면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사람을 구속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영은 십자가에 못 박혀 사람의 속죄제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직접 육신을 입고 사람의 속죄제가 될 수 있지만, 사람은 직접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비한 속죄제를 가져올 수 없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하늘과 땅 사이를 몇 번 더 왕복해야지’, 그렇다고 사람에게 하늘에 올라가 이 구원의 은혜를 받아 가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타락되었고, 또한 하늘에 전혀 올라갈 수 없으며, 더욱이 속죄제를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친히 사람들 가운데 와서 사람이 전혀 완성할 수 없는 그런 사역을 해야 하였다. 매번 말씀으로 된 육신은 모두 너무나 필요하다. 만일 한 단계라도 하나님의 영이 직접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억울함을 참고 모욕을 당하면서 말씀이 육신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성육신의 심오한 비밀 (4)>에서 발췌 『그럼 영이 역사하고 말씀이 육신 되지 않고 영이 직접 천둥 치며 말씀한다면 사람이 모두 그와 접촉할 수 없는데, 사람이 그의 성품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단지 영이 역사한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할 수 없다. 오직 성육신에 의하여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나고 그의 모든 성품을 육신에 의하여 발표해 내야만 사람이 직접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실제로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고 형상이 있기에 사람이 모두 실제적으로 그의 성품을 접촉하고 그의 소유소시를 접촉한다. 이래야만 사람이 진실로 그를 알 수 있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육신에서 역사하면 비록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운 많은 곤란이 있지만, 육신이 역사하여 최종에 도달하는 효과는 그래도 영이 직접 역사하는 효과를 훨씬 뛰어넘는다. 육신이 역사하면 비록 상당히 많은 어려움이 있고, 결코 영과 같은 위대한 신분이 있을 수 없고 영과 같은 비범한 행사도 있을 수 없으며, 더욱이 영과 같은 권병(역주: 권세)도 있을 수 없지만, 눈에 띄지 않는 이 육신이 역사하는 실질은 영이 직접 역사하는 실질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이 육신 자체는 모든 사람의 필요이다. 구원받는 사람에 대해 말하면, 영의 사용가치는 육신의 사용가치보다 훨씬 못하다. 영의 역사는 전 우주에 보급되고 산천 호수에 파급될 수 있으나, 육신의 역사는 그와 접촉하는 각 사람과 더욱 효과적으로 관련될 수 있고, 또한 형체가 있는 육신은 사람의 이해와 신임을 더욱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하나님의 실제 행사에 대한 인상을 더욱 깊어지게 할 수 있다. 영의 역사는 신묘막측 하여 범속한 사람이 예측하기 어렵고, 보기는 더욱 어려워 다만 근거 없이 상상할 뿐이다. 육신의 역사는 정상적이고 실제적이며 또한 풍부한 지혜가 있는데, 범속한 사람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 지혜를 직접 깨달을 수 있어 풍부한 상상을 펼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육신의 하나님이 역사하는 정확성과 실제적 가치이다. 영은 다만 사람들이 보지도 못하고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들을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영이 깨우쳐 주거나 감동을 주거나 인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유가 있는 사람을 놓고 말하면, 영의 이런 역사는 결코 사람에게 명확한 뜻을 줄 수 없고, 감동이나 대체적으로 비슷한 뜻만 줄 뿐이지 결코 말로 지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역사는 이와 크게 다르다. 육신이 역사하면 정확한 말씀의 인도가 있고, 명확한 뜻이 있고 명확한 요구 목표도 있으므로 사람이 모색할 필요도, 상상할 필요도, 더욱이 추측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육신이 역사하는 명확성인데, 영의 역사와 크게 다르다. 영의 역사는 일부 유한한 범위에만 적합할 뿐, 결코 육신의 역사를 대체할 수 없다. 육신이 역사하여 사람에게 정확한 목표를 요구하고 또 사람이 인식을 얻는 그 실제 가치는 영이 역사하는 정확성과 실제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다. 패괴된 사람에게는 오직 정확한 말씀, 명확한 추구 목표,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역사만이 가장 가치 있는 역사이다. 오직 현실적인 역사와 시기 적절한 인도만이 사람의 취향에 맞고, 오직 실제적인 역사만이 사람을 패괴되고 타락된 성정에서 구원해 낼 수 있다. 이런 것은 오직 성육신 하나님만이 도달할 수 있고, 오직 성육신 하나님만이 사람을 패괴되고 타락된 옛 성정에서 구원해 낼 수 있다. 영은 비록 하나님의 고유한 실질이지만, 이런 사역은 오직 육신으로만 할 수 있다. 영만 단독으로 역사한다면 역사 효과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패괴된 인류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필요하다>에서 발췌 『진리를 찾고 구하고 하나님의 나타남을 간절히 사모하는 각 사람에 대해 말하면, 영의 역사는 사람에게 감동이나 묵시만 줄 뿐이고, 기묘막측(奇妙莫測) 하고 상상하기 어려운 신기한 느낌만 줄 뿐이며, 위대하고 비범하고 사람이 모두 앙모하면서도 도달하지 못하고 닿지 못하는 느낌만 줄 뿐이다. 사람과 하나님의 영은 아득히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어 마치 매우 멀리 떨어져 있고 또한 영원히 서로 같을 수 없는 듯하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간격이 있는 듯하다. 사실상, 이것은 영이 사람에게 주는 착각일 뿐이다. 이 착각은 다만 영과 사람이 동류가 아니고, 영과 사람이 영원히 한 세계에서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 영은 사람이 갖추고 있는 어떤 것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 말하면, 영은 사람의 필요가 전혀 아니다. 그것은 영이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사역을 직접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신의 역사는 사람에게 실제적인 추구 목표를 주고, 명확한 말씀을 주며, ‘실제적이고’ ‘정상적인’ 느낌을 주고, ‘보잘것없고’ ‘평범한’ 느낌을 준다. 사람이 비록 두렵다고 느끼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래도 상당히 접촉하기 쉬운 것이다. 사람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므로 아득히 멀리서 바라볼 필요가 전혀 없다. 이 육신은 사람에게 아득히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주고,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다는 느낌을 준다. 왜냐하면 이 육신은 사람과 같은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패괴된 인류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필요하다>에서 발췌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않았을 때, 사람은 하나님이 했던 많은 말씀들을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말씀들은 완전한 신성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 말씀을 했던 각도와 배경은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발표했기 때문에 사람이 볼 수도 없고 닿을 수도 없는 것이며, 그 영계 또한 육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가로지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육신한 후, 인성의 각도에 서서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기에 영계의 범위를 벗어났고 초월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관념 속에서 상상한 것이나 사람의 생활 속에서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일들이나 혹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말이나 인류가 장악하고 있는 지식으로 신성에 가지고 있는 자신의 성품과 뜻 그리고 자신의 태도를 표현하여,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달할 수 있는 정도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에서 역사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비록 하나님이 육신에서 역사하는 방식과 원칙은 인성에 의하거나 인성을 통해(원문: 透過) 더욱 많이 도달하지만, 오히려 신성이 직접 역사하여 도달할 수 없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의 역사,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에서 발췌 『이것이 하나님 성육신의 ‘우세한’ 부분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지식과 인성의 언어를 이용해 사람에게 말씀하여 자신의 바람을 표현할 수 있었고,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신성의 언어를 인성의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에게 해석해 주거나 ‘통역’해 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해 주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데에 유리하다. 그 밖에, 하나님은 또 사람의 각도에서 사람의 언어로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이 알기 쉬운 방식으로 사람과 대화할 수 있으며, 심지어 사람의 언어, 지식으로 말씀하고 역사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이 친절하고 가깝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도 알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역사,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에서 발췌 『영이 하는 사역은 묵시(원문: 隱含)적이고 난측(難測)하며, 또한 사람에게 간담이 서늘케 하여 접근하기 쉽지 않게 하므로 직접 구원 사역을 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고, 직접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데에도 적합하지 않다.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것은 그래도 영의 사역을 사람과 가까이하는 다른 한 가지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즉,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것은 하나님이 정상적인 평범한 사람이 되어 사역을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성육신 되어 영의 사역을 대신해야 한다. 이 역사 방식은 사람에 대해 말하자면 더없이 적합한 것이다.』 <패괴된 인류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필요하다>에서 발췌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직접 말씀한다면, 사람은 모두 ‘음성’ 앞에 순복하게 되고, 말씀으로 드러낼 필요 없이 사람은 모두 엎드러지게 된다. 마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빛 가운데 엎드러진 것과 같다. 하나님이 또 그렇게 한다면, 사람은 영원히 말씀의 심판으로 자신의 패괴를 인식하여 구원받는 목적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오직 성육신 하나님만이 말씀을 각 사람에게 직접 전해 줄 수 있기에, 귀 있는 자들은 모두 그의 말씀을 듣고 말씀의 심판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말씀으로 도달한 효과이다. 영이 나타나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제적이면서도 비범한 사역으로 사람의 깊은 곳에 오랫동안 숨겨져 있었던 옛 성정들을 완전히 들춰내어 인식하게 하고 변화되게 한다. 이런 것은 다 성육신이 하는 실제적인 사역인데, 아주 실제적으로 말씀하고 아주 실제적으로 심판한다. 따라서 말씀으로 사람을 심판하는 효과에 도달한다. 이것이야말로 성육신의 권병이고 성육신 된 의의이다. ……말씀이 육신 된 까닭은 육신도 권병을 지닐 수 있고, 또한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있도록 실제적으로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는 모든 권병을 지닌 하나님의 영이 직접 역사하는 것보다 훨씬 실제적이고 역사 효과도 뚜렷하다. 그것은 말씀으로 된 육신이 실제적으로 말씀하고 역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외형은 권병을 지니고 있지 않아 사람이 가까이할 수 있지만, 그의 실질은 권병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아무도 그의 권병을 보지 못한다. 사람은 그가 말씀하고 역사할 때에도 그의 권병을 발견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그가 실제적으로 역사하는 데에 더욱 유리하다. 그의 이런 실제적인 역사는 모두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는데, 비록 사람은 다 그가 권병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가 거스를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의 진노를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은밀한 권병, 은밀한 진노, 공개한 말씀을 통해 그가 말씀을 하는 효과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말씀의 어조와 말씀의 준엄함, 말씀의 모든 지혜로 사람을 심복구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모두 권병이 없는 듯한 성육신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순복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것 또한 말씀이 육신 된 또 다른 의의이다. 즉, 더 실제적으로 말씀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말씀의 실제가 사람에게서 효과를 보게 하고 하나님 말씀의 위력을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이 이 사역을 하지 않는다면, 전혀 효과를 볼 수 없고, 죄악된 사람을 완전히 구원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성육신의 심오한 비밀 (4)>에서 발췌 『심판하는 것은 패괴된 사람이고 육체에 속한 사람이지 사탄의 영을 직접 심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심판 사역을 영계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서 진행하는 것이다. 사람의 육체가 패괴된 것을 심판하는 사역을 하기에는 오직 육신의 하나님만이 가장 적합하고, 육신의 하나님만이 가장 자격이 있다. 만일 하나님의 영이 직접 심판한다면 주도면밀하게 할 수 없고, 또한 사람이 받아들이기도 어렵다. 그것은 영은 사람과 대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하나만으로도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없고, 더욱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을 분명히 보게 할 수도 없다. 오직 육신의 하나님이 인류의 패괴를 심판해야만 사탄을 철저히 패배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이 사역을 한다면 사탄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영은 본래부터 범속한 인간보다 위대하다. 하나님의 영은 본래부터 거룩한 존재이고, 본래부터 육체를 능가하는 존재이다. 영이 직접 이 사역을 하면 사람의 모든 패역을 심판할 수 없고, 사람의 모든 불의를 드러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심판 사역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관념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도 한데, 사람은 영에 대해 본래부터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은 사람의 불의를 더 잘 드러낼 수 없고, 더욱이 사람의 불의를 확실하게 들춰낼 수도 없다. 성육신 하나님은 그를 알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원수이다. 그에 대한 사람의 관념과 대적을 심판하는 것을 통해 인류의 패역을 모두 들춰냈는데, 육신이 하는 사역은 영이 하는 사역보다 도달하는 효과가 더욱 뚜렷하다. 그러므로 전 인류를 심판하는 사역은 영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것이다. 육신의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육신의 하나님은 사람을 철저히 정복할 수 있다. 사람은 육신의 하나님에 대해 대적에서 순복으로, 핍박에서 수용으로, 관념에서 인식으로, 저버림에서 사랑으로 바뀌는데, 이것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의 역사 효과이다. 사람은 모두 그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 구원을 받게 되고, 모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통해 그를 점차 알게 되며, 모두 대적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정복되고, 모두 그의 형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의 생명의 공급을 받게 된다. 이 모든 사역은 육신의 하나님이 하는 사역이지 결코 하나님이 영의 신분으로 하는 사역이 아니다.』 <패괴된 인류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필요하다>에서 발췌 『그러나 너는 이러한 사실, 즉 사람의 패괴 성정과 거역과 대적은 모두 그리스도를 만날 때 드러나는데, 그때의 거역과 대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완전하고 철저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나 있는가? 그리스도가 인자이기 때문에, 곧 정상 인성이 있는 인자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를 무례하게 대하고, 또 하나님이 육신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패역은 남김없이 생생하게 폭로된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강림이 인류의 패역을 다 끄집어냈고, 인류의 본성을 다 안받침해 냈다고 한다. 이것을 ‘호랑이를 유도하여 산에서 내려오게 하고, 늑대를 유도하여 굴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와 합하지 못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다>에서 발췌 『성육신 하나님의 정상, 실제와 사람의 상상 속에 있는 막연하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이 서로 대립되기 때문에 성육신 하나님이 정식으로 역사할 때는 사람의 관념이 다 드러나게 된다. 성육신 하나님의 안받침에 의해 비로소 사람의 원래 관념이 다 드러나게 되었는데, 성육신 하나님과의 대조가 없었더라면 사람의 관념이 드러나지 않는다. 즉, 실제적인 안받침이 없으면 막연한 것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 사역은 아무도 말로 대체할 수 없고, 역시 아무도 말로 분명하게 표현할(원문: 說透)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사역을 할 수 있지 사람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풍부하든지 하나님의 실제와 정상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이 친히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여 사람들에게 그의 형상과 소시를 전부 공포해야만 사람이 그를 더 실제적으로 알 수 있고,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 효과는 육체에 속한 사람은 아무도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이 역사 효과도 역시 하나님의 영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패괴된 사람을 구원하여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역은 결코 하나님의 영이 직접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 말씀으로 된 육신이 할 수 있는 사역이다.』 <패괴된 인류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필요하다>에서 발췌 『육신에서 역사하는 최대의 장점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말씀과 정확한 부탁을 남길 수 있고, 인류에 대한 그의 정확한 뜻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비로소 그가 육신에서 한 모든 사역과 전 인류에 대한 그의 뜻을 이 도를 받아들이는 각 사람에게 더 정확하고 더 실제적으로 전해 줄 수 있다. 육신의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게 되어서야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하고 함께 생활하는 사실을 참으로 실현하게 되었고, 사람이 모두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듣는 이 소망을 실현하게 되었다. 성육신 하나님은 ‘여호와의 뒷모습만 인류에게 나타내던’ 시대를 끝마쳤고, 인류가 막연한 하나님을 신앙하던 시대도 끝마쳤다. 특히, 마지막 한 차례 성육신 하나님의 역사는 전 인류를 모두 더 현실적이고, 더 실제적이고, 더 아름다운 시대로 이끌어 들어갔다. 율법과 규례의 시대를 끝마쳤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실제적이고 정상적인 하나님, 공의롭고 거룩한 하나님, 경영 계획 사역을 펼치고 인류의 심오한 비밀과 귀숙을 펼쳐 보이는 하나님, 인류를 창조하고 경영 사역을 끝마치는 하나님, 몇천 년이나 숨겨 왔던 하나님을 인류에게 공개하여 막연한 시대를 철저히 끝마치고, 전 인류가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시대를 끝마치고, 전 인류가 사탄을 섬기던 시대를 끝마치고, 전 인류를 참신한 시대로 완전히 이끌어 들어간 것이다. 이런 사역은 모두 육신의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을 대신하여 역사한 성과이다. 하나님이 육신에서 역사해야 그를 따르는 사람이 다시는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런 것들을 찾거나 모색하지 않게 되고, 다시는 막연한 하나님의 뜻을 추측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 육신에서 한 사역을 확장할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가 육신에서 하였던 사역을 다 각종각파(各宗各派)에 전할 것이고, 그의 모든 말씀을 전 인류의 귀에 전할 것이다. 무릇 그의 복음을 받는 사람이 듣게 되는 것은 모두 그가 역사한 사실일 것이며, 사람이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이고 또한 사실이지 뜬소문이 아니다. 이런 사실은 모두 그가 사역을 확장하는 증거(證據)이자 사역을 확장하는 방법이다. 만일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의 복음은 각 지역, 각국에 널리 전파될 수 없다. 사실이 없이 사람의 상상만 있다면 영원히 전 우주를 정복하는 사역을 할 수 없다. 영은 사람이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 영의 역사는 사람에게 더 많은 증거와 역사한 사실을 남겨 놓을 수 없으므로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참모습을 볼 수 없고, 영원히 막연하고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을 신앙할 것이며, 영원히 하나님의 모습을 보지 못할 것이고, 영원히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을 듣지도 못할 것이다. 사람이 상상한 것은 어쨌든 텅 빈 것이어서 결코 하나님의 본래 모습을 대체할 수 없다.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과 그 자신의 역사는 사람이 연기해 낼 수 없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육신 되어 사람들 가운데 와서 친히 역사해야만 하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역사를 땅에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본래 모습을 인식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식인데, 성육신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패괴된 인류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필요하다>에서 발췌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모두 완성된 것을 뜻하나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완성된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다 이루었다”라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정확할까요?

진정한 크리스천이란 어떤 것인가

당신은 진정한 크리스천 입니까? 수많은 사람들 중 크리스천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택하심과 은혜이고 영광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어떻게 해야 진정한 크리스천이 될 수 있고 주님의 칭찬을 받으며, 주님의 뜻에 맞는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성경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했는데, 당신들은 왜 성경이 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합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친히 음성을 발한 전부의 기록은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앞 두 단계 역사의 실제 기록일 뿐이다. 그중 일부분은 선지자 예언의 기록이고, 일부분은 역대에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 써낸 경력과 인식이다. 』

하나님께 응답 받는 기도는 어떻게 드려야 되는가

기도는 항상 많이 하지만 응답 받는 기도가 없으면 아무런 감동과 은혜를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께 응답 받는 기도가 왜 이뤄지지 못하는지 생각해 보고, 어떤 내용의 기도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지 함께 알아봅시다.

은혜시대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목적과 의의

성경 참고: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요 3:17) 관련된 하나님 말씀: 『예수는 은혜시대의 모든 사역을 대표하였는데, 그는 성육신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혔고 또한 은혜시대를 시작하였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혀 구속 사역을 완성하러 온 분이자 율법시대를 끝마치고 은혜시대를 시작한 분이다. 그래서 그를 ‘대원수’, ‘속죄제’, ‘구속주’라고 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한 사역과 여호와가 한 사역은 내용은 같지 않지만 원칙은 같은 것이다. 여호와는 율법시대를 시작하여 땅에서 역사할 근거지, 즉 발원지를 세웠고, 계명도 반포하였다. 이것은 그가 했던 두 가지 사역인데 율법시대를 대표한다. 예수가 은혜시대에 한 사역은 계명을 반포한 것이 아니라 계명을 온전케 한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은혜시대를 가져왔고, 2천년이나 지속된 율법시대를 끝마쳤다. 그는 은혜시대를 시작하고 개척한 선봉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는 가장 주요한 사역은 그래도 구속이다. 그러므로 그가 한 사역도 역시 두 가지로 나뉜다. 다시 말해, 새 시대를 개척하는 것과 십자가에 못 박혀 속죄 사역을 완성한 후 사람을 떠나가는 것이다. 그때부터 인류에게는 율법시대가 끝났고 은혜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가 한 사역은 그때 그 시대 사람의 필요에 따라 한 것이다. 그의 사역에 따라 그는 인류를 구속하고 사람의 죄를 사해 주러 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가져온 모든 성품은 겸손, 인내, 사랑, 경건, 포용, 긍휼, 자비였고, 사람에게 가져온 것은 풍부한 은혜와 축복이었으며, 또한 사람이 누릴 온갖 물질이었다. 사람이 누리게 된 것은 다 평안과 희락이었고, 예수의 관용과 사랑이었으며, 또한 그의 긍휼과 자비였다. 당시에 사람은 구주 예수를 의지했기 때문에 대량의 누릴 물질을 접할 수 있었고, 마음이 평안하고 영적으로 위로를 받았다. 그들이 그런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들이 처한 시대와 관계가 있다. 은혜시대에 사람은 이미 사탄의 패괴를 겪었다. 그러므로 전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하려면 그 사역 효과를 위해 반드시 풍부한 은혜가 있어야 하였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포용과 인내가 있어야 하였으며, 더욱이 사람의 죄를 충분히 사할 수 있는 속죄제도 있어야 하였다. 은혜시대의 사람은 내가 사람의 죄를 사하는 속죄제, 즉 예수라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포용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예수의 긍휼과 자비만 보았는데, 그런 것은 모두 그들이 은혜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속되기 전에 반드시 예수가 베풀어 준 많고 많은 은혜를 누려야 하였다. 그렇게 해야 그들에게 비로소 유익이 있게 된다. 그들이 은혜를 누림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또한 그들에게 베풀어 준 예수의 포용과 인내를 누림으로 속죄의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예수의 포용과 인내로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예수가 베풀어 준 풍부한 은혜를 누릴 자격이 있게 되었다. 마치 예수가 “내가 온 것은 의인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속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한 것과 같다. 만약 예수가 성육신 되어 가져온 성품이 심판과 저주이고 사람이 범하는 것을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영원히 구속될 기회가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사람은 영원히 죄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6천년 경영 계획은 율법시대에 정지되어 그 시대가 6천년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고, 사람의 죄는 점점 많아지고 깊어질 수밖에 없어 인류를 만든 의의가 전부 없어지게 되므로 사람은 율법 아래에서 여호와를 섬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인류의 죄업은 오히려 처음에 만든 인류의 죄업을 넘어섰다. 예수가 인류를 사랑할수록, 사람의 죄를 사해 줄수록,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를 충분히 가져다줄수록, 사람은 예수께 구원받을 자격이 더 있게 되고, 예수가 비싼 값으로 사온 길 잃은 어린양이라 칭함받을 자격이 더 있게 되며, 사탄도 그 사역에 틈탈 곳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가 품속의 갓난아기를 대하듯 하였고, 그들에게 노하지도, 그들을 혐오하지도 않고 오히려 위로하는 마음이 가득하였으며, 또한 예수가 그들 가운데서 진노를 발한 적이 전혀 없었고, 그들의 죄업을 포용해 주고 그들의 우매함과 무지함을 보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도 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그의 마음에 감화되는 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포용으로 인해 비로소 죄 사함을 받게 되었다.』 <구속시대의 사역 내막>에서 발췌 『말씀이 육신 된 예수는 비록 사사로운 감정이 전혀 없었지만, 그는 늘 제자들을 위로해 주고 공급해 주었으며, 도와주고 부축해 주었다. 그는 많은 사역을 하였고 많은 고통을 당했어도 사람에게 지나치게 요구하지 않았고, 계속 사람의 죄를 인내하고 포용하였기 때문에 은혜시대의 사람은 모두 친근하게 그를 ‘사랑스러운 구주 예수’라고 불렀다. 당시에 사람이 보게 된, 즉 모든 사람이 본 예수의 소유소시는 긍휼과 자비였다. 예수는 사람의 과오를 기억하지 않았고, 사람의 과오에 따라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시대가 같지 않았기에, 그는 사람이 배부르도록 늘 풍부한 양식을 베풀어 주었다. 예수가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고 병을 고쳐 주며, 귀신을 쫓아내 주고 죽은 사람을 부활시킨 것은 사람에게 그를 믿게 하기 위한 것이고, 그가 한 모든 것은 다 진실함과 진지함에서 나온 것임을 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썩은 시체를 살려 사람에게 죽은 사람이라도 그의 손에서는 부활될 수 있음을 보게 하였다. 그는 사람들 가운데서 계속 그렇게 묵묵히 인내하면서 그의 구속사역을 하였다. 사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이미 사람의 죄를 담당하였고, 이미 사람의 속죄제가 되었던 것이다.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이미 십자가의 길을 개척하였다. 마지막에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십자가의 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긍휼과 자비와 거룩을 인류에게 베풀어 주었다. 그는 사람에게 한결같이 관용하면서 보복한 적이 전혀 없었고, 사람의 죄를 사해 주었고 회개해야 한다고 가르쳤으며, 인내하고 포용하고 사랑해야 하고, 그가 걸은 길을 걷고 십자가의 길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예수가 형제자매들을 사랑한 것은 마리아를 사랑한 것을 넘어섰다. 그가 한 사역은 모두 사람에게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이런 사역은 모두 그의 구속을 위한 것이었다. 어디를 가든, 그는 무릇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었는데, 가난한 사람은 부유하게, 앉은뱅이는 걷게, 소경은 보게, 귀머거리는 듣게 해 주었다. 심지어 그는 가장 비천했던 궁핍한 그 사람들, 즉 죄인들을 불러 모아 그와 자리를 함께 하게 하였고 그들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계속 인내하면서 “목자가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나중에 찾으면 대단히 기뻐하리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어미 양이 새끼를 사랑하는 것처럼 그를 따르는 사람을 사랑하였다. 그 사람들이 비록 무지몽매하였고, 그의 안중에는 모두 죄인이었으며, 또한 사회 최하층의 비천한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는 오히려 그 죄인들, 즉 남이 업신여기는 그 사람들을 눈동자처럼 여겼고 그들을 마음에 두었기에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또한 예수는 제단 위의 어린양과 같았는데, 그는 그들 가운데서 마치 그들의 종인양 그들에게 마음대로 부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도 무조건 순복하였다. 그는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사랑스러운 구주 예수였지만, 높은 강단에 서서 사람을 훈계하는 바리새인들에게는 긍휼과 자비가 아니라 혐오와 반감이었다. 그가 바리새인들 가운데서 한 사역은 그리 많지 않았는데, 다만 가끔 책망하고 질책하였을 뿐 구속 사역을 하지 않았고, 표적과 기사도 행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긍휼과 자비를 모두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었다. 그는 죄인들을 위하여 끝까지 인내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모든 모욕을 참아내심으로 비로소 전 인류를 완전히 구속하였다. 이것이 그가 한 모든 사역이다. 예수의 구속이 없었으면 사람은 계속 죄에서 살면서 죄의 자손이 되었을 것이고, 귀신의 후손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온 땅은 사탄이 기거하는 땅이 되었을 것이고, 또 사탄이 살아가는 땅이 되었을 것이다. 구속 사역은 반드시 사람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어야만 사람이 사함받을 수 있고, 최종에 비로소 온전케 될 자격이 있게 되며, 완전히 하나님께 얻어질 자격이 있게 된다. 만일 이 단계 사역이 없다면, 6천년 경영 계획은 전개될 수 없다. 만약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 사람에게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는 데에만 그친다면 사람은 여전히 완전한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 그는 땅에 와서 3년 반 동안 사역하여 구속 사역의 절반만 완성하였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죄 있는 육신의 형상이 되고 그 악한 자에게 넘겨져 십자가의 사역을 완성하였고 인류의 운명을 장악하였다. 그를 사탄의 손에 넘겨준 후에야 비로소 인류를 속량할 수 있었다. 예수는 세상에서 33년 반 동안 고통과 조소를 받았고, 훼방과 저버림을 당했는데, 심지어 머리 둘 곳이 없었고 안식할 곳도 없었다. 그 후에 또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자신(원문: 全人), 즉 거룩하고 무고한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모든 고난을 다 받았다. 집권자들이 그를 희롱하고, 채찍질하고, 심지어 병사들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어도 그는 여전히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였고, 죽기까지 무조건 순복하여 모든 인류를 구속하였다. 그때에야 그는 비로소 안식하게 되었다. 그가 한 사역은 은혜시대만 대표할 뿐 율법시대를 대표하지 않고, 말세 사역도 대체할 수 없다. 이것이 은혜시대에 예수가 한 사역의 실질이며, 인류가 겪게 된 두 번째 시대, 곧 구속시대이다.』 <구속시대의 사역 내막>에서 발췌 『은혜시대에 이르러 예수가 와서는 (단지 이스라엘 사람만이 아닌) 타락된 전 인류를 구속하였다. 그가 사람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었으므로 사람들이 본 은혜시대의 예수는 자비가 충만하였고 항상 사람을 사랑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와서 사람을 죄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었는데, 십자가에 올라 인류를 죄에서 철저히 구속하기까지였다. 그 시기에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었다. 즉, 속죄제가 되어 사람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사람의 죄를 영원히 용서해 준 것이다. 그에게는 긍휼과 자비가 있었고, 또한 인내와 사랑도 있었다. 무릇 예수를 따랐던 은혜시대의 사람은 모두 매사에서 인내하고 사랑이 있었고, 그저 고난을 받았으며, 다른 사람이 때리고 욕하고 돌로 쳐도 반항하지 않았다.』 <두 차례의 성육신은 성육신의 의의를 완전케 하였다>에서 발췌 『예수가 왔을 때에도 일부분 사역을 하였고, 얼마의 말씀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완성한 것은 주로 어떤 사역인가? 그가 주로 완성한 것은 십자가의 사역이다. 죄 있는 육신의 형상으로 십자가의 사역을 완성하여 전 인류를 구속하였는데, 전 인류의 죄를 위하여 속죄제가 된 것이다. 그는 주로 그 사역을 완성하였다.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그 후의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가리켜 주었다. 예수가 온 것은 주로 구속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전 인류를 구속하여 천국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천국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예수 그 뒤로, 사람들은 모두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고 십자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처음에 다른 사역도 조금 하고 말씀도 좀 하여 사람에게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게 하였지만, 그의 직분은 그래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었다. 그가 3년 반 전도한 것 또한 이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예비한 것이었다. 그가 몇 차례 기도한 것도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한 것이었고, 그가 정상 사람의 생활을 하고 33년 반 동안 땅에서 생활한 것도 주로 십자가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사역을 담당할 수 있는 힘이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십자가의 사역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말씀이 모든 것을 성취한다>에서 발췌 『은혜시대에 한 사역에 대해 말하자면, 예수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이다. 그의 소유소시는 은혜, 자비, 긍휼, 포용, 인내, 겸손, 사랑, 관용인데, 그가 와서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한 것은 바로 구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성품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성품은 긍휼과 자비이다. 그의 긍휼과 자비에 의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그가 자신을 전부 바치기까지 사람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사탄은 “네가 사람을 사랑하는 이상, 끝까지 사랑해야 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사람을 십자가에서, 곧 죄에서 구해내야 하고 너 자신을 바쳐서 전 인류를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다. 사탄이 “네가 긍휼 자비의 하나님인 이상,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려면 너 자신을 십자가에 바쳐야 한다”고 이렇게 내기를 걸자, 예수는 “인류를 위한 것이기만 하면 나는 나의 전부를 내놓기 원한다”고 한 후 조금도 서슴없이 십자가에 올라 전 인류를 구속하였다. 은혜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이고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하고, 그의 사랑, 그의 긍휼, 그의 구원으로 각 사람을 동반하고 있다. 사람은 오직 예수 이름을 받아들이고 그의 임재를 받아들여야만, 평안과 희락을 얻을 수 있고, 그의 축복을 받을 수 있으며, 그의 지극히 크고 지극히 많은 은혜를 받을 수 있고, 그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통해 무릇 그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 구원을 받고 죄 사함을 받았다. 은혜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였는데, 은혜시대의 사역은 예수란 이 이름을 위주로 한 사역이었다. 은혜시대에는 하나님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는 구약 성경을 벗어나 한 단계 더 새로운 사역을 하였는데, 그의 사역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으로 끝났다. 이것이 그가 한 사역의 전부이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예수가 당시에 말씀하고 역사할 때, 그는 규례를 지키지 않았고, 성경 구약 율법시대의 사역에 따라 하지도 않았으며, 은혜시대에 해야 할 사역에 따라 하였다. 그는 그가 가지고 온 사역에 따라 한 것이고, 그 자신의 계획에 따라 한 것이며, 그의 직분에 따라 역사한 것이지 구약 율법에 따라 역사한 것은 아니다. 그는 한 가지 일을 할 때마다 구약 율법에 따라 하지 않았다. 그가 역사한 것은 선지자의 말을 응하기 위해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단계마다 사역할 때, 전적으로 옛 선지자의 예언을 응하러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규례를 지키러 오거나 일부러 옛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는 것이 아니지만, 그가 하는 것은 또 옛 선지자의 예언에 엇나가지 않고, 이전에 한 사역에 방해되지도 않는다. 그가 하는 사역의 가장 뚜렷한 점은 바로 어떤 규례도 지키지 않고 그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는 것이다. 그는 선지자가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 ‘실천가’이다. 그는 아주 실제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고, 그의 새로운 기원을 개척하여 새 사역을 전개한다.』 <호칭과 신분에 관한 논법>에서 발췌 『오직 예수는 와서 새로운 사역을 하고 새로운 시대를 전개하고 또한 이전에 이스라엘에서 한 사역을 타파하며 이스라엘에서 여호와가 한 사역에 따라 하지 않고 그의 낡은 규례대로 하지 않으며 어떤 규례에도 맞추지 않고 그가 해야 할 새로운 사역을 하는 수밖에 없다. 이는 새로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시대를 개척하고 또한 하나님이 스스로 시대를 끝마친다. 사람은 시대를 전개하는 사역을 할 수 없고, 시대를 끝마치는 사역도 할 수 없다. 예수가 여호와의 사역을 끝마치지 않았다면, 그는 사람일 뿐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예수가 와서 여호와의 사역을 끝마쳤고, 또한 여호와의 사역을 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사역을 전개하였고, 그의 더 새로운 사역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새로운 시대임을 증명하고, 예수는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증명한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예수가 당시에 한 사역은 전 인류를 구속하는 것이기에, 무릇 그를 믿는 자라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 네가 그를 믿기만 하면 그가 너를 구속하고, 네가 그를 믿기만 하면 죄에 속하지 않고 죄에서 나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구원을 얻은 것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받은 것이다. 하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아직도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을 또 천천히 벗어 버려야 한다. 구원을 얻었다는 것은 사람이 완전히 예수에게 얻어졌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죄에 속하지 않고 죄가 사해졌음을 뜻하는 것이다. 네가 그를 믿기만 하면 영원히 죄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사람이 보기엔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이미 하나님 성육신의 사역을 끝마치고 전 인류를 다 구속해 왔을 뿐만 아니라 음부의 열쇠도 잡은 것이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역이 이미 철저히 이루어졌다고 여기지만, 사실, 하나님이 보기엔 그의 사역을 단지 일부분만 완성한 것이다. 그는 인류를 구속만 하였을 뿐 정복하지 않았고, 더욱이 사람의 사탄의 추한 몰골도 변화시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으로 된 육신이 비록 사망의 고통을 겪었지만 결코 내가 말씀이 육신 된 모든 목적이 아니다. 예수가 나의 사랑하는 아들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그는 나의 사역을 철저히 끝마치지 않고 일부분만 하였다.”라고 말씀하였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또 성육신의 사역을 잇는 두 번째 계획을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최종 뜻은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원해 낸 사람을 다 온전케 하고 얻는 것이다……』 <역사와 진입 (6)>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