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예수님께서 돌아오시면 형상을 바꾸실까요

2019년 02월 10일

하나님의 약속 형제자매님:

안녕하세요! 저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해 구하고 싶습니다. 성경 구절에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11)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은 유대인의 복장을 하시고 유대인의 형상으로 승천하셨으므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도 틀림없이 유대인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나실 거라고 줄곧 여겨왔습니다. 하루는 설교를 들었는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형상으로 강림하신다고 명확하게 예언되지 않았고 예언의 비밀은 사람이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상만으로 주님 재림의 형상을 규정할 수 없다고 설교자가 말했습니다. 만일 상상만으로 주님의 형상을 규정하면 주님을 영접할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아주 혼란스러운데,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정말로 유대인의 형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까? 만일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형상을 바꾸시면 어떻게 해야 만이 주님을 알아보고 제때 예수님의 재림을 영접할 수 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 여러분이 해답을 찾아 주시길 바랍니다.

시영

시영:

안녕하세요! 이전에 저 역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형상이 바뀌지 않고 유대인의 형상으로 강림하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성경을 자세히 보고 다른 자료를 살펴본 후에, 저의 이런 인식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시대 하나님은 떨기나무와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1~4 참조) 그리고 은혜시대 예수님은 역사하는 기간에 제자들 앞에서 형상을 바꾸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1에서 2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이 성경 구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바뀔 수 있고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한복음 4:24),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립보서 2:5~7) 여기 성경 구절에서 하나님은 원래 영으로 형상이 없지만, 사역의 필요에 따라 형상을 취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혜시대, 하나님께서는 유대에서 한 단계 인류 구속 사역을 위해 성육신하셔서 유대인의 형상을 취하셨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인류 구속 사역을 더 잘 완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여전히 유대인의 형상으로 강림하실 거라고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형상을 바꾸시는데, 만일 우리가 유대인의 형상을 취하시지 않아서 강림하시는 주님을 보고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쩌면 들림 받을 기회를 놓칠지도 모릅니다! 마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성경 예언에 근거하여 오실 메시야는 왕궁에 태어나고 범상치 않은 풍모를 지녔으며 위대한 형상을 지닌 것으로 여긴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취하신 형상은 보통 인자의 모습이었고, 게다가 예수님의 사역이 그들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되지 않아 예수님은 오실 메시야가 아니라고 규정하여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실패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서 관념과 상상으로 다시 오실 주님의 형상을 제멋대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예수님과 아이들 이미지,

지금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중요한 순간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형상을 바꾸신다면, 어떻게 해야 알아차리고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사역하신 당시를 되돌아봅시다. 당시에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과 신도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역사에서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 즉 오실 메시야라는 것을 점차 알아차린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47에서 49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은 처음에 예수님이 곧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의 상황을 말씀하신 것을 보고 예수님이 곧 오실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또 사마리아 여인은 본래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녀의 은밀한 일, 즉 다섯 남편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듣고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예수님께서 곧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입니다. 또 베드로, 요한, 마태, 마가 등도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곧 메시야라는 것을 알아차려 주님을 따르게 되었고 구원의 은혜를 얻은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과 관련된 성경 구절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한복음 16:12~13),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한복음 10:27),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시록 3:20),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시록 2:29) 이 예언을 보면, 말세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음성을 발하시고 말씀 사역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림 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마태복음 25:6)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는 방식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통해, 혹은 친척들이나 친구들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혹은 인터넷 등등의 많은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고 하나님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현현을 영접하고 싶다면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우리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든, 우리의 상상과 관념에 부합되는지의 여부를 떠나 마땅히 슬기로운 처녀처럼 겸허한 마음으로 구하고 알아보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알아차리고 주님의 재림을 영접하도록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대가로 전 인류를 구속하는 역사를 하시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 주님을 따르는 형제자매들은 다 말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믿고 나서 평안과 기쁨이 생겼다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정과 생활과 사업에서 힘든 일에 부딪혔을 때 주님께 기도하여 해결받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더욱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병이 치유되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을 값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와 축복뿐일까요? 요즘 저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숨어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런 사랑이 우리의 영적 생명에는 유익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 널리 알려진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아들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볼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풀어 주신 아이이고 또한 아브라함이 100살에 얻은 아들이니 아브라함이 그 무엇보다 이삭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었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께선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어. 하나님께선 이삭이 자란 후 번제로 바치게 하시면서 왜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뜻은 뭘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아야 할까?’ 나중에 저는 영적 서적을 보고서야 곤혹이 풀렸습니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때부터,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정말로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그 전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았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어리석었고 무지했으며 하나님을 오해했다 할지라도, 이때만큼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진짜였으며 진실했다. 아브라함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준 이삭을 ― 그의 아들을 ― 하나님께 돌려드리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순종을 보았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사람이 봤을 때,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기이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할 때, 이 ‘지배’는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또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하나님의 검증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에 ― 이삭을 바치라는 것에 ―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즉 자신이 선택한 아브라함이란 사람에 대해 참으로 안심하였고, 그를 진정으로 인정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사람이 자신의 약속과 앞으로의 경륜을 맡아서 실행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된 인물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런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한 일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 경영 계획의 선도자로 택하셨기 때문에,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과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시련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즉, 아브라함이 진실로 순종하여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참되고 정직하다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흡족해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정말로 이삭의 목숨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소중히 여기셨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얻으셨을 때 시련은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마음을 놓고 인정하신 후에야 그에게 더 큰 부탁을 맡겨 줄 수 있었고, 또 아브라함이 구하고 생각한 것보다 더 크나큰 축복을 베풀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책에는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준 일을 통해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이유 하나로 하나님은 그에게 이처럼 큰 복을 내렸다. 비록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일은 아주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를 귀히 여기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진심을 보이는 자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보기에 이는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하나님께 드린 가장 진귀한 첫 번째 ‘제물’이었다. 이 ‘제물’은 하나님이 그토록 힘들게 기다렸던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처음 피조물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선물로 간주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을 보셨을 때, 마음이 기뻤고 감동받았으며 또한 매우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현재 아브라함의 후손은 온 땅에 가득합니다. 이스라엘만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 몇 십 개 나라들도 모두 그의 후손인데, 여기에는 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마다 그 속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과 고심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련하신 이 일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바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택하시면 그 사람에게 부탁이 있으시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조건이 갖춰져 있는지를 확인하실 때 시련을 통해 그 사람의 진심과 순복을 검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우리에게는 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난처하게 하고 고생하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역사를 잘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에 대해 진심과 순복이 있어야 시련을 거쳐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또 모세가 광야에서40년 양을 방목한 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사람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게 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광야는 기후도 아주 나쁜 데다가 야수까지 출몰하고 게다가 광야에는 사람도 없는데 모세 혼자 동반자도 없이 40년 동안 양을 방목했으니, 매일 양 말고도 별과 달과 마주한 그 날들은 틀림없이 아주 고생스러웠을 거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는데 왜 모세를 광야에 있게 하셨을까? 그것도 40년이나 말이야.’ 그 책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혼자 어떻게 광야에서 40년을 생존하였을까? 참된 믿음이 없다면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 하나님에 대한 이런 참된 인식이 있으면 그 믿음은 어떠냐? 크지 않으냐? (큽니다.) 하늘을 찌를 만큼 크다, 그렇지? 그러므로 모세가 광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였느냐? (모세에게 애굽 왕 바로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쓰기 위해 먼저 그의 믿음을 연단하였다. 보아라, 하나님은 말씀을 하지 않았고, 사역을 하지 않았으며, 진리를 공급하지 않았고, 설교도 하지 않았다. 또한 모세에게는 책과 서류들도 없었고,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그저 혼자 광야에서 지내왔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은 모세의 참된 믿음을 이루었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 일을 했을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였고, 그를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크게 쓰려고 했고, 하나님은 하려고 하는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를 단련시켰다. 무엇을 단련시켰느냐? (믿음입니다.) 모세의 믿음은 얻으려고 했던 것이지, 단련시킨 것이 아니다. 무엇을 단련시켰느냐? (모세의 의지와 의지력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렇다, 의지력이다.』 이 말씀을 보고서야 저는 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양을 방목한 거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열악한 환경을 통해 모세의 믿음을 연단하고 또 그의 내면에 있는 열심과 좋은 마음과 혈기에 속하는 것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래야 그를 크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의 그런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모세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고통스러운 환난을 겪어야 생기게 됩니다. 안일한 상황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앙망하는 게 쉽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는 것을 다 압니다. 반대로 열악한 상황에 있을수록, 마음의 고통이 클수록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이 더 강해지고, 고통스러울수록 힘껏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며, 또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진실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동안 광야에 있게 하신 것이 사람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으로 모세를 단련시켜 그에게 참된 믿음과 의지력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여 그러한 조건을 갖추게 한 뒤에야 하나님은 모세를 크게 써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중임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면서 부딪힌 여러 가지 고난과 시험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의지력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주신 부탁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도 증명되다시피, 오직 모세만이 그 중임을 감당할 수 있었고, 그 부탁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모세가 비록 연단의 고통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아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또 모세를 통해 율법과 계명을 반포하셨고, 또한 그를 120 살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매사마다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들고 때로는 우리로 고통받게 할 때도 있지만 그 뒤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저는 우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깊고 크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도 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실질이 사랑이기에 우리를 괴롭히거나 혹은 일부러 우리를 고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매사마다 다 하나님의 계획과 고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런 깨달음이 있었을 때, 저의 마음은 감동으로 차 넘쳤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진심과 순복이 너무 적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느꼈고 아울러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인해 저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짐을 느꼈고,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람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더욱더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멘! 이묘

3가지 원칙으로 그릇된 주장과 황당무계한 논리를 쉽게 간파하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길에서 우리가 분별의 원칙을 장악하지 못하면, 수시로 사이비의 그릇된 주장과 황당무계한 논리에 미혹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런 시험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그릇된 주장과 황당무계한 논리를 분별하는 몇 가지 실행 원칙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실까요? 아마 많은 분들은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의문을 자세히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시련ㆍ연단 사역을 하시는 의의

관련된 하나님 말씀: 『시련은 사람의 어떤 영적 상태를 겨냥한 것인가?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없는 사람의 패역 성품을 겨냥해 말한 것이다. 사람 안에는 불순물이 많고 외식하는 요소가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시련하여 그 시련으로 사람을 정결케 하려고 한다. …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다. 하나님이 모든 성품을 사람에게 나타내면 너의 육체에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사람에게 나타내면, 사람의 육체는 반드시 많은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런 고통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수 없고, 하나님께 진실한 사랑을 바칠 수도 없다. 하나님이 만일 너를 온전케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너에게 그의 모든 성품을 나타낼 것이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성품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말세에 하나님은 그가 예정하고 선택한 이 무리 사람들에게 그의 모든 성품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사람을 온전케 할 때를 빌어 그의 성품을 나타내는데, 이를 통해 한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한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체험함에 있어서 사람은 큰 고통을 겪고 높은 대가를 치러야만, 마지막에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고, 최종에 진실한 사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도 만족을 얻게 된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케 되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려고 하고 진실한 사랑을 하나님께 완전히 바치려고 한다면, 반드시 많은 고통과 환경의 시달림을 겪어야 한다. 너를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해야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참된 마음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 있다. 한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이 있는지는 바로 고난과 연단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사랑을 순결하게 하는 것도 고난과 연단을 통해야 비로소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에서 발췌 『사람의 상태에 비추어,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에 비추어, 하나님은 새로운 사역을 하여 사람에게 그에 대한 인식과 순복이 있게 하고, 사랑과 간증도 있게 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려면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연단을 겪어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훈계, 책망을 겪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영원히 알지 못하고, 영원히 진실한 사랑과 진실한 간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을 연단하는 것은 한 방면의 효과만 위한 것이 아니라 여러 방면의 효과를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람의 심지와 사랑이 하나님께 온전케 되도록 진리를 찾고 구하는 사람들에게 연단 사역을 하게 되었다. 이런 연단은 진리를 찾고 구하려 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의의 있는 일이 되었고,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람이 그리 쉽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므로 어쨌든 사람과 같은 성품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기 쉽지 않다. 진리는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갖춰져 있는 것이 아니고, 사탄에 의해 타락된 사람이 쉽사리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진리가 갖춰져 있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려는 심지도 갖춰져 있지 않다. 사람이 고난과 연단을 받지 않고 심판받지 않는다면, 사람의 심지는 영원히 온전케 될 수 없다. 연단은 각 사람에게 있어 상당히 고통스러운 것이고, 상당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연단 속에서 사람에게 자신의 공의 성품을 나타내고, 연단 속에서 사람에게 자신의 요구를 공개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연단 속에서 사람에게 더 많이 깨우쳐 주고, 더 많이 실제적으로 책망하고 훈계하며, 사실과 진리의 대조를 통해 사람에게 더욱 자신을 알게 하고, 진리를 인식하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한다. 이런 것을 통해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더 참되고 더 순수한 사랑이 있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연단 사역을 하는 목적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는 모든 사역에는 그 목적과 의의가 있다. 그는 의의 없는 사역을 하지 않고, 사람에게 불리한 사역을 하지 않는다. 연단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없애 버리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지옥에 멸하려는 것도 아니라, 연단 속에서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속셈과 낡은 관점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변화시키고, 사람의 모든 삶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연단은 사람에게 있어 실제적인 검증이고, 실제적인 훈련이다. 연단 속에 있어야만 사람의 사랑이 그 원래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연단을 겪어야 진실한 사랑이 있게 된다>에서 발췌 『하나님은 적극적인 방면에서든 소극적인 방면에서든 다 사람을 온전케 하는데, 그것은 네가 체험할 줄 아는지,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는 사람인지에 달렸다. 네가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를 진정으로 추구한다면, 소극적인 방면에서 손해를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실제적인 것들을 얻을 수 있고, 더욱이 자신의 부족함도 인식할 수 있고 자신의 실제 상태도 파악할 수 있으며, 사람이 일무소유이고 아무것도 아님을 볼 수 있다. 시련을 겪지 않으면 모르고, 시련을 겪지 않으면 늘 자신이 남보다 대단하고 누구보다도 좋다고 여길 것이다. 이런 것을 통해 너는 이전에는 다 하나님이 하였고, 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련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사랑도 없어지고 믿음도 없어지며, 기도도 부족하고 찬양도 할 수 없게 되는데, 부지중에 너는 그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해 사람의 타락 성품을 다루고, 또 여러 가지 일을 통해 사람을 드러낸다. 한 방면으로는 사람을 책망하고, 한 방면으로는 사람을 드러내며, 한 방면으로는 사람을 폭로하는데, 사람 마음 깊은 곳의 ‘비밀’을 다 파헤치고 다 폭로한다. 많은 상태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사람에게 사람의 본성을 보게 한다. 하나님은 폭로와 훈계와 연단을 통해, 또 형벌을 통해 온전케 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이런 것들로 사람에게 하나님이 실제적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실행을 중요시하는 사람만이 온전케 될 수 있다>에서 발췌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사람을 난측(難測)하게 하며, 너의 관념에 너무나도 부합되지 않는다. 너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을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의의 있음을 설명한다. 너의 관념에 부합되면 의의가 없을 것이다. 지금 너는 하나님의 역사가 너무나 기묘함을 느낀다. 기묘할수록 너는 더욱 하나님이 난측하다고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행사가 너무나 위대함을 보게 된다. 만일 그가 건성으로 사역하여 사람을 정복하고는 그만둘 뿐이라면, 사람은 하나님이 역사하는 의의를 보지 못할 것이다. 비록 지금 연단을 좀 받지만 그것은 너의 생명이 자라는 데 아주 유익하다. 그러므로 이 고난을 받는 것은 너희에게 너무나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은 연단을 좀 받지만 후에는 너에게 정말로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있게 한다. 너는 나중에 “하나님의 행사는 참 너무나 기묘하구나!”라고 말할 것인데, 그것은 네 마음속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동안의 연단(힘쓰는 자, 형벌시대)을 겪고는 후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라고 말하였다.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사가 측량하기 어렵다는 것을 설명한다. 하나님이 하는 일은 아주 의의 있고, 아주 가치 있으며, 아주 소중히 여길 만하다! 내가 이렇게 많은 사역을 했어도 네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면, 내가 한 사역이 가치가 있겠느냐? 너에게 반드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정말 쉽지 않구나, 하나님의 행사는 너무나 기묘하구나, 하나님은 정말 지혜롭고 정말 사랑스럽구나!”라는 말을 하게 할 것이다. 네가 한동안 체험하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너에게 한 사역을 네가 이미 얻었음을 증명한다.』 <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에서 발췌 『하나님이 역사하여 사람을 연단하면 사람은 고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클수록, 하나님의 큰 능력이 사람에게서 더 많이 나타난다. 사람이 받는 연단이 작을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작아지고 하나님의 큰 능력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도 작아진다. 받는 연단이 클수록, 받는 고통이 클수록, 받는 시달림이 많을수록, 하나님에 대해 생기는 참된 사랑이 더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이 더 있게 되며,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더 깊어진다. 너는 체험하는 가운데서 연단과 고통을 크게 받는 사람들, 훈계와 징계를 많이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점점 더 깊어지고 점점 더 투철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훈계를 한 번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가 인식하는 것은 아주 얕다. 그는 “하나님은 참 좋아요. 그분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분을 누리게 하시지요.”라고 말할 줄밖에 모른다. 훈계와 징계를 받고 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인식을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하는 사역이 기묘할수록 더욱 가치가 있고 더욱 의의가 있으며, 너로 하여금 측량할 수 없게 할수록,너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을수록, 더욱 너를 정복할 수 있고 너를 얻을 수 있으며 너를 온전케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역사하는 의의는 매우 크다! 사람을 이렇게 연단하지 않고 이 방식대로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역사는 효과가 없을 것이고 의의도 없을 것이다. 말세에 한 무리 사람들을 택하는 것이 평범하지 않다는 함의는 바로 이 때문이다.하나님이 이 한 무리 사람들을 택하여 얻는다고 이전에 말한 적이 있다. 너희에게 한 사역이 클수록 너희의 사랑을 더 깊게 하고 더 순결하게 하며, 하나님이 한 사역이 클수록 사람은 그의 지혜를 더욱 깨달을 수 있고 그에 대한 인식도 더 깊어진다. 』 <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에서 발췌

목사나 장로는 정말 주님이 세웠을까요?

주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은 사도행전 20장 28절에 기록된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라는 내용을 보고 교계의 목사나 장로는 모두 성령이 세웠다고 여기는데, 성령이 그들로 하여금 무리의 감독자로 두어 그들로 교회를 목양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 받은 사람들이기에 신도들은 마땅히 그들의 말에 따르고 순복해야 하는데, 만약 그들에게 순복하지 않는다면 바로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관점은 과연 진리에 부합될까요? 이 성경 구절은 사도 바울이 한 말일까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일까요? 주님 말씀의 근거가 있습니까? 주님은 정말 인정하는 것일까요? 만약 우리가 주님 말씀의 근거도 없고 성령의 실증도 없이 단지 바울이 한 말에 근거하여 목사나 장로는 바로 주님이 세웠다고 여긴다면, 이런 관점을 고집하는 것이 과연 주님의 뜻에 부합될까요? 여러분,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은 매 시대의 역사 가운데 모두 일부 사람들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역사에 협력하게 합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직접 세우고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직접 안배하며 직접 그들에게 나타나거나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모세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출애굽했을 때, 하나님 말씀의 증거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 9~10절에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세울때 직접 모세에게 나타나 모세를 불렀으며,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사역과 뜻을 모세에게 밝히셨고 동시에 그의 취지도 모세에게 알려주어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출애굽 하라고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분부하여 사역하게 할 때에 꿈이나 계시를 통해 한 것이 아니고 천사나 다른 방식으로 전달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모세 앞에 나타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의 은혜 시대에서 하나님이 세운 베드로는 하나님이 직접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넘겨주고 베드로에게 주님의 양을 목양하게 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태복음 16:18~19), 예수께서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나의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의 양을 치라”(요한복음 21:15~16) 예수님과 베드로가 주고 받은 대화의 내용을 볼 때, 베드로는 주 예수께서 직접 세우고 직접 실증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넘겨주었고 베드로는 하나님으로 부터 온 권병을 갖게 되었으며 주 예수께서는 그의 뜻도 베드로에게 알려 주었고 해야할 사역을 직접 베드로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의 양을 잘 보살피고 교회를 잘 지키도록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러한 부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가 직접 부른 사도일지라도 말입니다. 베드로는 은혜시대에 주 예수의 직접적인 부르심과 세움을 받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세와 베드로의 일에서 한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고 정하신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직접 부르고 증거하고 안배하고, 그런 사람은 직접 하나님이 부탁한 사역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계의 목사나 장로는 사역하는 배경이 모세나 베드로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대부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 졸업장에 의해 목사나 장로가 된 것인데 하나님의 증거와 성령의 실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결코 하나님이 세운 것이 아니며 성령도 그들을 무리의 감독관으로 세우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개척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 쓰임받을 사람을 세운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세우는 뜻과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하는 사역과 다른 사람이 하는 사역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우리 다함께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봅시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하는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이나 성령의 역사에 협력하기 위한 것인데, 그는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킨, 하나님의 모든 선민을 이끌기 위한 사람이고, 또한 하나님이 일으킨 인성 협력 사역을 하는 사람이다. 인성 협력 사역을 할 수 있는 이런 한 사람이 있기에,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요구한 것과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서 하려는 사역을 하나님께 쓰임받는 이 사람을 통해 더 많이 완성하게 된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쓰는 목적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깨닫고, 하나님의 요구에 더 많이 도달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의 뜻을 직접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쓰임받는 한 사람을 일으켜 이런 사역을 한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을 인솔하는 데에 있어서의 매개자이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소통시키는 ‘번역관’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 집에서 일꾼이나 사도가 된 그 어떤 사람과도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똑같이 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다른 일꾼이나 사도와는 사역 실질과 개인적으로 쓰임받는 배경에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사역의 실질과 개인적으로 쓰임받는 배경에서 말하면,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일으킨 사람이고,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을 위해 예비한 사람이며, 하나님 자신의 사역에 협력하는 사람이다. 그의 사역은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이고, 신성의 역사에 반드시 협력해야 할 인성의 사역이다. 그러나 다른 일꾼이나 사도가 하는 사역은 다만 각 시기에 교회에 대한 여러 방면의 안배를 전달하고 시행하는 것이며, 또는 교회 생활을 수호하는 일부분의 간단한 생명 공급 사역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일꾼이나 사도들은 하나님께 지정된 사람이 아니고, 더욱이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모두 교회에서 선발된 사람으로 한동안의 배양과 훈련을 거쳐 쓰기에 합당한 사람은 계속 남겨서 쓰고, 쓰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은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려보낸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며 하나님께서 직접 일으켜 사람 가운데서 인성 협력의 사역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협력하는 이런 사람이 있기에 하나님의 사역은 수월해 졌으며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터득하지 못하는 많은 것에 대해 하나님은 그가 세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지시하도록 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하고 더욱 나아갈 길이 있게 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의 “번역관”인데,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솔하고 또한 성령의 실증이 있으며 사역할 때에 성령의 수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의 인솔과 목양에 순복해야만 참으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의 인솔과 목양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심하면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됩니다. 구약 시대에 모세를 대적한 250명의 족장과 같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인솔에 순복하지 않은 것은 사실상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러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땅 속에 파묻혀 훼멸되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세운 것이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반포하여 사람으로 지키게 하였고 전체 구약 시대의 사역을 인솔하게 하였기에 모세는 그 어느 사역자와도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250명의 족장은 사람이 선택한 것이기에 적합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만약 심하게 하나님을 거스른다면 하나님께 훼멸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시대에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목양하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권세를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사역할 때에 능력이 충만하고 성령 역사의 인솔이 있었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교계의 목사나 장로는 하나님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간단하게 섬기거나 공급하는 사역은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인솔하는 사역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 일부 은사가 있고 영적인 도리를 좀 말 할수 있어 형제 자매들 가운데서 설교나 교회를 목양하는 사역을 합니다. 만약 목사나 장로가 행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며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솔한 것이라면, 그들에게도 성령 역사를 볼 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도 계속하여 그들을 사용할 것입니다. 만약 목사나 장로가 설교 사역을 할 때에 단지 성경이나 신학을 연구하는 것만 중요시 하고 사람에게 일부 규례와 의식만 지키게 하며 주님의 말씀을 전혀 실행하도록 하지 않고 주님의 계명도 지키게 하지 않는다면, 사역 중에 글귀 도리만 말하는 것으로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간증해 사람들로 자신을 우러러 보게 하여 신도들이 그들의 인솔하에 생명이 전혀 진보가 없고 영적인 공급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전혀 성령 역사의 실증이 없고 성령 역사의 인솔과 인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절대로 성령이 직접 세운 것이 아니며 그들이 한 사역은 결코 하나님이 직접 부탁한 것이 아니며 성령도 그들을 온 무리의 감독자로 세운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계의 목사나 장로는 모두 주님이 세운 것으로 그들에게 순복하지 않는 것은 바로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라는 이런 논법은 단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일 뿐 하나님 말씀의 근거는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이러한 사상 관점의 지배와 속박을 받게 된다면, 우리가 설령 이끄는 자들이 교회에서 마음대로 행패를 부리고 그들이 행한 것이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따르고 순종하고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안된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2천년 전에 유대 백성이 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의 말에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예수님을 대적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믿으면서 주님을 높이고 모든 일에서 주님의 뜻을 찾고 구해야만 합니다. 이래야만 참으로 주님께 순복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나 장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의 문제에서 우리는 마땅히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합니다. 만약 목사나 장로가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에게도 성령의 역사가 있고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우리를 인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목사나 장로라면 우리는 따르고 순복해도 됩니다. 반대로 그들이 만약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게 인솔한 적이 없고, 사역하면서 자신만 높이고, 자신만 증거하고, 자신의 형상만 세우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말을 따르게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들이며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특히 말세에 주님이 오신다는 이런 큰 일에 있어 목사나 장로는 자신의 지위와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진리의 도를 찾고 구하거나 알아보지 않을 뿐더러 미친듯이 훼방하고 정죄하고, 심지어 신도들이 참도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통제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맹목적으로 그들의 말을 믿고 순복하고 따른다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다면 어떻게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쎄언(谢 恩) 추천 문장: 행복한 인생을 얻는 비결

무엇 때문에 사람은 늘 성경으로 하나님을 규정합니까? 하나님을 성경에 제한시키면 왜 그릇됩니까?

『성경이 사람을 동반한 지 몇천 년 역사(歷史)가 되었고 또한 사람은 모두 그것을 하나님으로 삼아 대하였으며, 심지어 말세에 이르러 사람은 성경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는 일이다. ...』

하나님이 예언하신 하나님 나라의 미경은 도대체 어떻게 응하여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이 크게 진노할 때 온 세상은 이로 인하여 각종 재난을 겪게 되는데,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과 같다. 하늘 위에 올라서면 땅 위에 각종 재해가 하루하루 전 인류에게 다가오는 것을 족히 볼 수 있다. 높은 곳에 서서 바라보니, 땅 위는 마치 지진 전의 각종 광경과 같다.』

우리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사람이 순식간에 거룩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왜 하나님이 또 심판, 형벌의 사역을 하셔야 합니까?

『마지막 때에 시대를 끝마치는 사역에서, 하나님의 성품은 형벌과 심판인바, 모든 불의를 드러내어 만민을 공개적으로 심판하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온전케 한다. 이러한 성품이라야 시대를 끝마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