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길 잃은 양의 비유

2018년 03월 06일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2~14)

이것은 비유이다. 이 구절의 말씀은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느냐? 여기에서 비유의 표현 방식은 인류 언어에 있는 수사법의 일종으로, 인류의 지식 범주 안의 것이다. 만일 율법시대에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했다면, 사람은 이러한 말씀이 하나님의 신분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은혜시대에 인자가 한 것이라 사람들은 아주 편하고 따뜻하며, 친근하게 느꼈다. 성육신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 인성에서 아주 적절한 비유로 그의 마음의 소리를 표현했다. 이 마음의 소리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대표하고, 하나님이 그 시대에 하고자 했던 사역을 대표하며, 또한 하나님 자신이 은혜시대에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대표한다.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양으로 비유했다. 만일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그는 어떤 대가라도 치르고 찾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그때 성육신 하나님의 사람에게 사역하는 한 가지 원칙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유로 당시 사역에 대한 결심과 태도를 설명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한 하나님의 ‘우월함’이다. 즉, 그는 사람의 지식을 이용해서 인간적인 언어로 사람에게 말하고, 그의 뜻을 표현했다. 심오해서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신적 언어를 인간적인 언어와 방식으로 사람에게 해석하거나 ‘번역’해 준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람이 그의 뜻과 그가 하려는 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한편, 그는 또 사람의 눈높이에서, 사람의 언어로, 그리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람과 대화할 수 있었다. 나아가 사람의 언어와 지식으로 말씀하고 사역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친근하고 가까이할 수 있는 존재로 느꼈고, 하나님의 마음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말씀하고 사역하는 데에 금기가 있느냐?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지식으로, 또는 사람의 언어나 대화 방식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씀과 사역을 할 수 없고, 하나님 자신의 뜻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상상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비유를 이용했으며, 사람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진실함과 진심, 그 기간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았다. 이 비유는 율법하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을 꿈속에서 깨어나게 했고, 또한 대대로 은혜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격려하였다. 이 비유의 말씀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진심을 알게 되었으며, 사람이 하나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의 사랑,길 일은 양의 비유,

계속해서 마지막 구절을 보자.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 자신이 말한 것이냐, 아니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말씀한 것이냐? 겉보기에는 예수가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뜻은 하나님 자신의 뜻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그가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고 말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은 그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보낸 사람일 뿐,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대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이 확실히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말의 진실성과 정확성을 느끼게 하기 위해 반드시 그 말을 보충해야만 했다. 그것은 아주 간단한 말이지만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고, 자신을 지극히 낮추고 드러내지 않는 예수의 성품을 드러냈다. 성육신하든 영계에서 사역을 하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필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사람이 무엇을 걱정하고 곤혹스러워하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말을 보충했던 것이다. 이 말은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던 문제, 즉 인자가 하는 말씀에 반신반의하는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다시 말해, 예수는 반드시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라는 전제를 추가해야만 말씀의 성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말씀의 정확성을 믿게 함으로써 말씀의 신뢰도를 제고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평범한 인자가 되었을 때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얼마나 어색했는지, 인자의 처지가 얼마나 난감했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가 차지하는 지위가 얼마나 미미한 것이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는 이 말씀으로 ‘절대 걱정하지 마라. 내가 말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너희 마음속에 자리한 그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메시지를 사람에게 전해 준 것이었다. 이 말이 사람에게 주는 풍자적 의미가 크지 않으냐? 성육신으로 사역하면 하나님의 본체에 없는 유리한 조건을 많이 가질 수 있었지만, 사람에게 의심받고 버림받는 것을 참아야 했으며, 또한 사람의 무감각과 둔감함을 감내해야 했다. 인자의 사역 과정은 사람에게 버림받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또한 사람이 그와 겨루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이고, 몸소 실천하면서 자신의 속성과 본질로 끊임없이 사람의 신뢰를 얻고, 계속 사람을 정복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사탄과 실제로 전쟁을 했다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평범한 사람이 되어 그를 따르는 자들과 지략 대결을 펼쳤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대결에서 인자는 자신을 지극히 낮춤으로써, 자신의 속성과 사랑과 지혜로써 사역을 완성하였으며, 얻고자 한 사람을 얻었다. 또한 그에게 있어야 할 신분과 지위를 얻고 그의 보좌로 ‘돌아간’ 것이다.

창조주만의 말씀 방식과 특징은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권능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축복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 17:4~6)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 내가 아브라함을 택한 것은 그로 그의 자식과 권속들에게 나 여호와의 도를 지킬 것을 명함으로 의와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 이로써 내가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것이라”(창 18:18~19, 중국어성경 직역)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욥 42:12) 창조주만의 말씀 방식과 특징은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권능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고 얻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고, 그의 방식대로 사람에게 복을 내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약속을 하고 얼마만큼의 은혜를 베풀어 주는지는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 따라 분배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을 설명할까? 사람에게 그 안에서 무엇을 보게 할까? 여기서 우리는 잠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는지, 하나님이 축복해 주는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접어 두자.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 가는 것을 목표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살펴보자. 즉,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 가는 이 관점으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보자. 이상 네 단락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준 축복에 관한 기록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욥과 같은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 대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고,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내리는 이유와 그 복의 내용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어조, 말씀하는 방식과 하나님이 서 있는 위치와 시각으로부터, 사람은 복을 내리는 자와 받는 자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어조와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위치는 창조주의 신분을 가진 하나님만의 것이다. 그는 권능과 위력은 물론 창조주의 존귀함과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의 위엄을 지니고 있다. 먼저 다음의 말씀을 보자.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 17:4~6).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이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이다. 하나님이 그를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고, 그의 후손을 번성케 하리라 하였다. 또한 나라들이 그를 좇아 일어나고 열왕이 그를 좇아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였다. 너는 이 몇 마디 말씀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지 못했느냐?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 권능의 어떠한 본질을 보았느냐? 이 구절들을 자세히 읽다 보면, 하나님의 권능과 신분이 하나님의 어휘 사용에서 확연히 나타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 될찌라 … 내가 너로 … 하리니” 이 중에서 ‘너는 … 될찌라’, ‘내가 … 하리니’ 등의 표현에서 하나님 신분과 권능이 나타나는 확고한 어휘 사용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창조주의 신실함이요, 또 한편으로는 그것은 모두 창조주의 신분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전용 어휘이자 관용어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축복하기를, 후손이 번성하고 나라들이 그를 좇아 일어나고 열왕이 그를 좇아 일어난다고 했다면, 이는 확실히 하나의 바람일 뿐이지 약속이나 축복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감히 “나는 반드시 너로 하여금 어떠하게 할 것이다. 나는 너를 어떠어떠하게 하겠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러한 결정권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설사 이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빈말일 뿐이고 헛소리일 뿐이며, 사람의 욕망과 야심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사람의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감히 이렇게 큰소리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누구나 좋은 소망을 갖기 마련이어서, 후손들이 모두 출세하고 남보다 뛰어나기를 바란다. ‘만일 황제가 되는 후손이 있을 수 있다면, 그건 크나큰 행운이야! 성장(역주: 도지사급에 해당)만 될 수 있어도 괜찮아. 어쨌든 높은 사람이면 돼!’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의 바람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저 후손을 위해 축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어떤 누군가의 약속을 이루어 줄 수는 없다. 인간에게 거기까지 가능하게 하는 권력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안다. 자신의 일도 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운명을 주관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할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는 그런 권능이 있어서 사람과 약속한 것, 사람에게 축복한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며, 하나님께 있어 사람의 후손을 번성케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가 누군가의 후손을 번성하게 하는 것은 단 한 마디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그는 한 번도 이 때문에 수고한 적이 없다. 또한 이 때문에 머리를 쓰거나 고민해 본 적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자 하나님의 권능이다. 창세기 18장 18절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중국어성경 직역)”라는 말씀을 보고 난 후, 너희는 하나님의 권능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창조주의 비범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창조주의 지고지상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긍정적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필승의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또는 그런 확신이 있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권능을 실증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그의 말씀이 이뤄지도록 내린 명령인 것이다. 여기에 너희가 주목해야 할 두 어휘가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중국어성경 직역)”라고 한 말씀에 어떤 모호한 부분이 있느냐? 걱정하는 부분이 있느냐?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느냐? 그런 것은 인류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사람만이 갖고 있는 요소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반드시’와 ‘필히’ 이 두 어휘 때문이라도, 사람의 그런 요소는 창조주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감히 이러한 어휘를 타인에 대한 축복에 사용하지 못한다. 또한 그 누구도 감히 타인에게 강대한 나라를 주겠다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며, 감히 타인에게 천하 만민이 반드시 그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할수록 증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그런 권능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권능이 이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한다. 또한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임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매우 확실한 것이고, 주저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에 따라 이 모든 일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그 어떤 세력도 이 일의 응답을 바꾸거나 저지하거나 파괴하거나 교란시킬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 말씀의 이룩과 성취를 멈추게 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가 하는 말씀의 위력이며, 부인할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인 것이다! 네가 이 말씀을 다 읽었을 때, 마음속에 의혹이 일겠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능력과 위엄, 권능이 묻어난다. 이러한 위력과 권능, 그리고 일이 필연적으로 성취된다는 것, 이것은 그 어떤 피조물과 비피조물이 이를 수도 초월할 수도 없는 것이다. 창조주만이 이러한 어조로, 이러한 뉘앙스로 인류와 대화할 수 있다. 그의 약속이 빈말이 아니고 허풍이 아니며, 사람과 사물이 모두 초월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권능의 구현이라는 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을 때, 하나님 말씀의 위력과 하나님의 권능을 느꼈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면, 너는 어떤 느낌을 받을 것 같으냐? 그 사람을 너무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가 허풍을 떤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그가 자신을 과시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그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고 그런 권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그러한 일들을 이룰 수 없다. 그가 이렇게 확실하게 약속한다면 단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분명 오만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며, 전형적인 천사장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다면, 네가 오만함을 느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농담이라고 느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이며 사실이다. 그의 말씀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그가 어떤 일을 이루고자 마음먹었을 때,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은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이며,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다. 그 약속은 기정사실이며,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점차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했다고 하나님께 오만한 성품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룰 수 있고,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이며, 그 일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고, 그 일들을 이루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능력 범위의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라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이 나타나고 발현된 것이며,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권능이 완벽하게 구현된 것이고, 창조주 신분에 가장 적합하고 합당한 증거인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는 방식, 어조, 어휘 사용은 바로 창조주 신분의 상징이며, 하나님 자신의 신분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거짓됨도 불순함도 없으며, 확실히 창조주의 본질과 권능이 완벽하게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피조물에게는 이러한 권능도 없고 이러한 본질은 물론 하나님이 부여한 능력도 없다. 만일 사람에게서 이러한 부분들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확실히 타락 성품의 분출이며, 사람의 교만과 야심이 꿈틀거리는 것이고, 전형적인 마귀와 사탄이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사람을 미혹하고 유인하는 악독한 본심의 발현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언어적 노출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과 자리를 다투고 하나님을 사칭하며, 하나님을 대신하고 싶어 한다고 말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말씀하는 어조를 흉내 내는 속셈은 사람들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함이며, 원래 하나님께 속하는 인류를 빼앗고자 함이다. 이것은 분명히 사탄이고, 천사장의 후예가 하는 행위이며, 하늘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너희 중에는 하나님을 모방하여 어떤 방식으로 말을 했던 자가 없느냐? 사람을 오도하고 미혹시킬 마음을 품고, 사람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의 권능과 위력을 가지고 말을 하고 일을 하며, 자신의 본질과 신분은 남다르며, 심지어 어조가 하나님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주려고 했던 자가 없느냐? 너희는 이런 일들을 한 적이 없느냐? 하나님의 말투를 모방해서 말하고, 이른바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손짓을 하며, 하나님의 위력과 권능인 척 가장한 적이 없느냐? 이런 것들은 너희들 대부분이 자주 하거나 하려고 마음먹은 것들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창조주의 권능을 진짜로 보고 느끼고 알게 되었는데, 처음 너희가 행하고 드러냈던 행동들을 돌이켜 보면 역겹게 느껴지지 않느냐? 너희가 비열하고 파렴치했던 모습을 알게 되지 않느냐? 이러한 자들의 성품과 본질을 해부해 보면, 그들은 저주받아 마땅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보통 이런 일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굴욕을 자초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이냐? 사람이 이렇게 하는 본심은 바로 하나님을 모방하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자 함이다. 또한, 사람들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를 없애고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는 하나님을 쫓아내고, 자신이 사람을 통제하고 차지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는 모두 이러한 욕망과 야심이 있다. 사람마다 이렇게 사탄이 타락시킨 본질 속에서 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면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사탄의 본성 속에서 살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에 관련된 주제로 나누었다. 너희는 하나님을 사칭하고 하나님을 모방하고 싶은 욕망과 야심이 아직도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이 능히 모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는 사람이 사칭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네가 하나님 말씀의 어조를 흉내 낼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본질을 모방할 수는 없다. 네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을 사칭할 수는 있을지라도, 영원히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고, 영원히 만물을 주재하거나 주관하는 일은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영원히 그저 아주 하찮은 피조물일 뿐이다. 너의 능력과 재주가 얼마나 뛰어나든, 네가 얼마나 많은 은사를 가졌든, 너의 모든 것은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있는 것이다. 네가 몇 마디 모진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너에게 창조주의 본질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너에게 창조주의 권능이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지,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며, 밖으로부터 더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피조물의 일원으로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본위를 지켜야 하며, 성실한 사람됨으로 분수껏 창조주가 맡겨 준 바를 지켜야 한다. 도에 넘치는 일을 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능력 범위’ 밖의 일을 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이 증오하는 일을 해서도 안 된다. 위대한 사람, 초월적인 존재, 고귀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사람에게 존재하지 말아야 할 ‘소망’이다. 위대한 사람,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일이며,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파렴치한 일이고, 혐오감을 불러오고 버림받을 일이다. 반대로 진정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야말로 귀한 것이고, 피조물이 지켜야 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목표인 것이다.

세 번째 관문, 독립

모든 사람은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성숙해진다. 다음으로 할 일은 성장 단계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부모에게서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다. 성인으로서 독립적으로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고 성인으로서 직면해야 할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하며 자신의 운명에 나타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면서 거쳐야 할 세 번째 관문이다. 1. 사람은 독립 이후 어렴풋이 창조주의 주재를 체험한다 한 사람의 출생과 성장이 그 인생 여정의 준비 기간이자 운명의 기반이라면, 독립은 운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출생과 성장이 운명을 위해 축적한 재산이라면, 독립은 그 재산이 줄어들거나 늘어나기 시작하는 분기점이다.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할 때 어떤 사회 환경에서 어떤 일이나 사업을 하게 될지는 모두 운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이는 부모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어떤 사람은 대학에 진학해서 좋은 전공을 선택하고, 졸업 후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인생 여정에서 첫발을 순조롭게 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기술을 가졌어도 사업을 일으키기는커녕 자기에게 맞는 일이나 자신이 속할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첫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실패를 경험하고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경우이다. 성공과는 연이 없는 운명인 것처럼, 힘들게 공부했지만 대학교 문턱을 밟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첫 희망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 경우, 운명이 변수로 가득 차 있음을 처음 실감하고, 앞길이 순탄할지 험난할지 두려움과 기대를 동시에 갖게 된다.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아도 책을 써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식 없이도 창업을 통해 수익을 내고 밥벌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기로에서 과연 사람은 스스로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의 바람과 결정에 따른 선택이 가능한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적게 일하고 많이 벌길 원하고, 바람과 햇빛을 피할 수 있는 편안한 곳에서 살면서 그럴싸한 옷을 입고 싶어 한다. 또한 남보다 성공해서 가문을 빛내고 싶어 한다. 사람의 소망은 이렇게 ‘완벽’하다. 그러나 인생의 여정에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운명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된다. 또한, 자신의 미래를 대담하게 계획하거나 마음껏 꿈을 키울 수는 있어도 꿈을 실현할 능력과 권력이 없을뿐더러 미래를 결정할 능력이 없음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된다. 사람이 직면한 현실은 언제나 꿈과 괴리가 있고 늘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다. 사람은 그런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의 직업, 앞날을 위해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고,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과 희생을 아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의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영원히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의 숙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능력, 지능,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 앞에서 사람은 나이, 우열, 귀천을 구분할 수 없는 동등한 존재이다. 사람이 평생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 얼마나 많은 부를 가질지는 부모에 의해 좌우되거나 재능, 노력, 욕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는 창조주가 배치한 운명에 달려 있다. 2. 사람은 부모의 품을 떠난 후 인생이란 큰 무대에 올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성숙해지면 부모의 품을 떠나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은 이 시점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불확실했던 현세의 사명도 이 시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형식적으로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현생에서 수행할 역할과 사명은 부모와 아무 관계가 없으므로 부모와 유지했던 친밀한 관계는 독립 후 점점 단절된다. 육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부모를 의존한다. 그러나 성장기를 벗어나면 객관적으로 모든 것이 부모와 완전히 상관없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독립적으로 해내야 한다. 부모는 한 사람의 삶에서 출산과 부양의 책임을 지고,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형식적으로 제공할 뿐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창조주가 배치한 운명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미래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그 누구도 좌지우지할 수 없다. 부모조차 자식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독립적이고 각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의 운명을 막을 수도 없고, 현생에서 맡은 역할에 힘을 보탤 수도 없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성장할지, 이는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 그것이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어떤 운명 속에서 사명을 완수하게 될지도 결정할 수 없다. 따라서 부모는 한 사람이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없고, 가족들 역시 그 사람이 현생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완수하게 될지, 어떤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지는 현생의 운명에 의해 좌우된다. 즉, 창조주의 뜻으로 정해진 모든 사람의 사명은 객관적인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성장 환경에서 성숙해지고, 인생 여정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며, 창조주가 계획해 놓은 운명을 조금씩 실현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삶에서 역할을 짊어지고, 창조주의 정한 운명과 주재에 따라 피조물로서의 책임을 수행한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복이 있으면 너는 늘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니느웨 성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바뀌는 과정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모호함도 없었고, 순수한 진노에서 순수한 관용에 이르렀다. 여기서 하나님의 본질이 참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사역에 있어 단 한 번도 우유부단한 적이 없다. 그의 사역 원칙과 목적은 흠 없이 순결하고 투명하며, 여기에는 절대 그 어떤 계략과 음모도 섞여 있지 않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본질에는 어둠과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노한 것은 그들의 악행이 하나님 안중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고 그들에게 다시 관용을 베풀었을 때도 하나님이 나타낸 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었다. 이 모든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로 인해 바뀐 것이다. 그 기간에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은 변하지 않았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본질도 바뀌지 않았다. 사람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노하지만, 사람이 참된 회개를 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려 진노를 거둔다. 그러나 사람이 완고하게 하나님께 계속 대항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멸할 때까지 노를 멈추지 않는데, 하나님의 진노는 그렇게 조금씩 사람에게 가까워진다. 이 또한 하나님 성품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성품이 진노든, 긍휼과 자비이든 모두 사람의 태도와 행동,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난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기인한다. 만약 하나님이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노한다면,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사람이 참된 회개를 하거나 하나님께 ‘머리를 숙인’ 적이 없고 진심으로 신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항상 하나님의 보살핌 안에 있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진실로 신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시한 적이 없을 것이다. 늘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가 늘 임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임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간단한 성경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 본질의 참됨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진노하는 것과 마음을 되돌리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진노할 때와 마음을 되돌릴 때 극명한 대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관용, 두 측면의 본질에 차이와 대비가 크다고 느꼈다. 하지만 니느웨 성 사람들의 회개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보면서 사람은 또 한 번 하나님의 참된 성품의 다른 면을 느낄 수 있었다. 인류는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진실성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으며, 진실하게 발현된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있었다. 인류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전설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진실했고, 마음을 되돌린 것도 진실했으며, 하나님이 확실히 또 한 번 인류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 결말을 바꾼 니느웨 사람들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것과 진노하는 것에 모순이 있느냐? 당연히 없다! 하나님이 관용을 베풀었을 때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그것은 성경에 언급한 ‘각기 악한 길에서 떠나다’와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다’이다. ‘악한 길’은 한두 가지의 악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행한 일의 근원이 사악함을 의미한다. ‘악한 길에서 떠나다’는 더 이상 그렇게 일을 하지 않고 악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하는 방식, 근원, 출발점, 속셈, 원칙 모두를 바꾸어 더 이상 그런 방식과 원칙으로 향유하거나 즐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다’의 ‘떠나다’는 내려놓고 버림으로 과거를 완전히 끊어 내고 다시는 지난 길을 걷지 않는다는 뜻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난 것은 참된 회개를 했음을 증명하고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과 내면을 모두 관찰한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마음으로 참된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살펴보고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제서야 마음을 되돌렸다. 즉, 사람의 행동과 태도, 다양한 모습과 마음에 진실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을 돌리고, 뜻을 바꾸고, 내린 결정을 거두고, 그들을 벌하지 않고, 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의 결말이 바뀌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되찾았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었다.

계속 하나님을 적대시하며 대항했던 소돔 성,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대략적으로 이해했으니, 이제 다시 돌아와 하나님 안중의 죄악의 도시, 소돔 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소돔 성의 본질을 앎으로써 하나님이 왜 이 성을 멸망시키려 하였고, 왜 성이 이렇게 완전히 멸망당했는지 알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사람들 눈에 소돔 성은 인간들의 욕망과 사악함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도시이자 밤마다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요염하고 유혹적인 도시였다. 그 화려함에 사람들은 정신이 팔리고 미치광이가 되었으며, 그 사악함에 사람의 심령은 잠식당하고 미혹당해 타락하였다. 소돔 성에는 더러운 귀신과 악령이 판을 쳤고 죄악과 살육이 가득하였으며, 피비린내와 썩은 내가 진동하였다. 그야말로 등골이 오싹하고 뒷걸음질 치게 만드는 도시였다. 성안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진리를 찾거나 광명을 갈망하는 이가 없었고, 죄악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자도 없었다. 사람은 사탄의 통제와 타락, 농락 속에 살면서 인간성과 이성을 잃고 인간 본연의 생존 목표도 잃어버렸다. 하나님을 대적한 그들의 악행은 수없이 많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였다. 그들의 악행은 그들과 그 성과 성안의 살아 있는 것 모두를 한 걸음씩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 이 두 단락에는 소돔 성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고, 단지 하나님의 두 종이 소돔 성에 도착한 후 사람들이 그들에게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간단한 사실로 소돔 성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고 얼마나 사악한지,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했는지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성안 사람들의 본모습과 본질도 드러났다. 그들은 하나님이 내린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하나님의 징벌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분노를 멸시하였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께 대항하였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든 그들의 악독한 본성은 더 심해졌으며, 하나님을 계속해서 적대시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임함, 하나님의 징벌을 적대시하였고, 하나님이 내린 경고는 더욱 적대시하였다. 그들은 안하무인으로 집어삼키고 해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했으며, 하나님의 종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돔 성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해하려 한 일은 그들이 행한 모든 악행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고, 여기서 드러난 그들의 사악한 본성도 바닷물 중 한 방울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불로 멸할 것을 택하였다. 하나님은 홍수, 허리케인, 지진, 해일이나 다른 방법이 아닌 불사르는 방식으로 성을 멸하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불태워진다는 것은 성의 완전한 멸망을 뜻하며, 이 성이 지구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영원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멸망’이란 형체나 외형이 사라지는 것만이 아니라 성안의 모든 사람의 영혼까지도 존재하지 않는 것,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이 성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사물이 멸해지고, 그들에게 더 이상 내세와 윤회는 없으며,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된 인류 가운데서 한 번으로 영원히 제거해 버린 것이다. ‘불살랐다’는 것은 죄악이 그곳에서 제지되고 끝나서 다시는 존재하지 않고 파생될 수 없음을 의미하며, 사탄의 사악이 자생할 수 있는 터전을 잃고, 머무르고 기거할 수 있는 무덤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승리했음을 낙인으로 사탄에게 남긴 것이다. 소돔 성의 멸망은 사람을 타락시키고 집어삼킴으로써 하나님께 대항하고자 했던 사탄의 야심이 실패로 끝났음을 보여 준다. 또한 인류 발전사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하고 스스로 타락한 인류의 수치스러운 기호이며, 아울러 실제로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대한 실제 기록이다. 소돔 성이 하나님이 내린 불로 인해 잿더미가 되었다는 것은 다시는 ‘소돔’이라 불리는 성을 볼 수 없고, 성안의 모든 것도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 성은 하나님의 분노에 의해 멸망되었고,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 속에서 사라졌으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인해 상응하는 징벌을 받았고, 그에 걸맞은 결말에 이르렀다. 소돔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소돔의 사악함 때문이고, 하나님이 그 성과 성에서 사는 어떤 사람도, 생장하는 어떤 만물도 다시 보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시 보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이 표현된 것이다. 그 성의 사악함과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그 성에 대해 분노와 미움, 증오심을 갖게 되었고, 더 이상 소돔 성과 성안의 사람 그리고 성안의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결국에는 불로 이 성을 멸하였다. 소돔 성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을 때, 하나님 안중에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소돔에 대한 기억까지도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즉, 하늘에서 내린 불이 태운 것은 온 소돔 성과 성안의 죄악으로 가득 찬 사람, 그리고 죄악으로 더럽혀진 만물뿐만 아니라 인류의 사악함과 하나님을 대적한 기억까지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소돔 성을 불태운 목적이었다. 인류의 부패함이 극에 달하여 누가 하나님인지 모르고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게 될 때,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면 그들은 공격하고 비방하고 모독할 것이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경고를 전달할 때에도 그 타락한 사람들에게서는 회개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악행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며, 반대로 하나님의 종을 함부로 해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에게서 보여지고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을 극히 증오하는 본성과 본질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타락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고, 진상을 모르면서 비방과 조롱을 쏟아 내는 것만도 아니다. 그들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무지몽매해서, 기만당해서, 미혹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공개적으로 제멋대로 하나님과 대립하고 대항하고 소란을 피우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러한 행동은 반드시 하나님을 노하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 사람의 범함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이 그들에게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 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가득 찬 그 성을 가장 빠른 방법으로 멸하고,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그 안의 사람들을 멸함으로 모든 죄악을 멸해 버리려고 했다. 그리하여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하고, 그 안의 죄악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바로 불로 태우는 것이었다. 소돔의 사람들을 상대로 취한 하나님의 태도는 포기하거나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진노, 위엄, 권능으로 그들을 징벌하고 쳐서 완전히 멸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육체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파멸시켜 영구적으로 사라지게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께 있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의 진정한 함의이다.

창조주가 만물 생령을 주관하고 주재하는 사실은 창조주의 권능이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욥기에도 마찬가지로 욥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욥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욥 42:12).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욥에게 베풀어 준 것들은 무엇이냐? 사람의 재산이 아니냐? 이런 재산을 소유한 욥은 그 시대에 아주 부유하지 않았겠느냐? 욥은 그 재산들을 어떻게 소유하게 된 것이냐? 그의 부는 어떻게 생긴 것이냐? 그런 재산은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욥이 그 재산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여기서 우리가 언급할 주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축복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은 모든 사람이 꿈에도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일생 동안 재산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람이 주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재산을 베풀어 주고 축복을 줄 수 있는 권능과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축복에는 원칙이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느냐?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다! 아브라함과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실은 같지만,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축복은 다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모래와 같이, 별과 같이 많으리라고 축복하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준 이 일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은 한 사람의 후손, 한 종족을 강성해지게 한 것이다. 이 일에서 하나님이 권능으로 주재한 것은 만물 생령 중에서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인류이다. 하나님 권능의 주재하에 이 인류는 하나님이 정한 범위와 속도에 따라 종족을 번식하며 생존해 나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들 족속의 생존 능력, 번성 속도, 수명은 다 하나님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것의 원칙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권능의 보호하에 막힘없이 순조롭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대해 말하자면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어떤 시대에서도, 인류가 어떤 재난을 겪어도 아브라함의 후손은 다 죽음이라는 재앙의 위협에서 안전할 것이며, 그 족속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그를 매우 부유하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준 것 가운데, 숨 쉴 수 있는 각종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 생명체의 수, 번식의 속도, 생존율, 얼마나 실할지 등등 이러한 구체적인 사항들도 다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다. 이 생명체 또한 언어 능력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창조주의 지배하에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배하는 원칙은 욥에게 약속한 축복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욥에게 준 축복에 대해 말하자면, 약속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날지라도 만물 생령을 주재하는 창조주의 권능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 아브라함과 욥에 대한 서로 다른 약속과 축복 가운데에서 구현되고, 또 한 번 인류에게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의 상상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세부적 내용은 또 한 번 인류에게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가운데서만 하나님의 권능을 알 수 있다고 알려 준다.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능에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궁창이 있으라 하니 궁창이 생겼고 뭍이 드러나라 하니 뭍이 드러났다’는 이런 말씀에서만 구현된 것이 아니다. 더 많은 부분은 하나님이 어떻게 빛을 지속시키고, 궁창이 사라지지 않게 하며, 뭍을 영원히 물과 나뉘게 하느냐에서 구현된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빛, 궁창, 뭍과 같은 피조물들을 주재하고 관리하느냐의 구체적인 내용에서 구현된다. 인류에게 준 하나님의 축복에서 너희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과 욥에게 복을 준 후에, 하나님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권능이 이제 막 행해지기 시작하였고, 그가 자신이 한 모든 말씀을 현실로 이루고, 자신이 한 말씀의 모든 세부 사항을 실현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후의 세월 속에서 그가 하고자 한 모든 일들을 계속하였다. 어쩌면 사람은 하나님께 권능이 있기 때문에 말씀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만사만물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이런 상상은 황당한 면이 없지 않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만일 네가 단편적으로만 보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주재하는 만물이 생존하는 각종 현상과 사실들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너의 이해는 공허하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러한 상상은 하나님에 대한 앎이 이미 미궁에 빠져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상상 속 하나님은 명령만 내리는 기계일 뿐, 권능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욥의 사례를 통해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실제적인 면을 보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욥을 축복한 후에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고, 사자에게만 시키고 자신은 결과만 기다린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마자 만물은 하나님 권능의 인도하에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는 사역에 협력하여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과 사물을 예비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하나님의 권능은 온 땅에서 행해졌고, 아브라함과 욥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 응답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진행될 각각의 절차와 모든 중요한 부분에 필요한 것들을 다 계획하고 예비하였다. 그 기간에 하나님이 움직인 것은 하나님의 사자들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하나님의 권능이 행해진 범위는 하나님의 사자들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만물을 움직여서 하나님이 이루려는 사역에 협력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권능을 구체적으로 행하는 방식이다.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권능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셋째 하늘이나 어떤 고정된 자리에 계시면서 그 어떤 구체적 사역을 행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다 생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그저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이 그러냐? 확실히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권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의 권능은 진실하고 실제적인 것이지 절대로 공허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진정성과 실제성의 단면은 그가 만물을 창조하고 만유를 주관하며, 그가 인류를 인도하고 경영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나타나고 구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각각의 방식, 각각의 관점, 각각의 세부 내용과 그가 이룬 모든 사역, 그리고 만물에 대한 그의 이해는 확실히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 공허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의 권능과 능력은 항상 모든 일에서 나타나고 구현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 실제로 존재함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시시각각 자신의 권능과 능력으로 계속 사역하며, 만물을 주관하고 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능력과 권능은 천사와 하나님의 사자를 포함해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축복을 주고, 욥에게는 또 어떤 것을 축복하였는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며,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된 것이다. 설사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이나 욥에게 직접 임했을지라도, 그들이 한 것은 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한 것이며, 모두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경 기록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임한 것을 보았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무엇을 하였는지 보지 못했을지라도, 사실상 진정한 능력과 권능으로 행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설사 네가 천사나 사자에게 큰 능력이 있어 그들이 이적과 기사를 행하거나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고 일련의 일을 행하는 것을 보았을지라도, 그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일 뿐, 절대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창조주의 권능을 가진 사람이나 사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창조주의 권능을 행하거나 나타낼 수 없다. 창조주의 권능은 영원히 바뀌지 않고 거스를 수 없다 ……하나님은 권능과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일할 때는 매우 신중하고 원칙이 있으며 신용을 지킨다. 그의 신중함과 그가 일하는 원칙은 거스를 수 없는 창조주의 성품과 뛰어넘을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지고지상한 권능을 가지고 있고, 만물이 모두 그의 권세 아래에 있을지라도, 그가 만물을 주재하는 능력을 갖추었을지라도 단 한 번도 자신의 계획을 파괴한 적도 방해한 적도 없다. 그는 권능을 행할 때마다 항상 자신의 원칙을 엄격하게 지키며, 그가 말씀한 대로, 그가 계획한 절차와 목표대로 정확하게 진행한다.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는 만물 역시 하나님 권능의 행사 원칙을 따르고 있다. 그의 권능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없고, 그의 권능의 행사 원칙을 바꿀 수 있는 존재도 없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복받는 자는 그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게 되고, 저주받는 자 역시 그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 권능의 주재하에, 하나님 권능의 시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없으며, 하나님 권능의 행사 원칙을 바꿀 수 있는 존재도 없다. 창조주의 권능은 그 어떤 요인의 변화로도 바뀌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권능의 행사 원칙 역시 그 어떤 원인에 의해서도 바뀌지 않는다. 천지가 격변한다 하더라도 창조주의 권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만물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창조주의 권능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영원히 바뀌지 않고 거스를 수 없는 창조주 권능의 본질인 것이다. 이 역시 창조주의 유일성인 것이다!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 2:6) 사탄이 감히 창조주의 권능을 초월하지 못하기에 만물이 규율 속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욥기에서 발췌한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그’는 욥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짧을지라도 많은 문제들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것은 하나님이 영계에서 사탄과 나눈 구체적인 대화로서,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상인 사탄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이고 명령이다. 그 명령의 세부적인 사항은 욥의 목숨과 관련되며,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해 준 욥을 대하는 마지노선에 관련된다. 즉, 오직 욥의 생명은 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먼저 이것이 하나님이 사탄에게 한 말이며, 또한 욥기의 원문과 연관시켜 볼 때 하나님이 어떠한 배경에서 이러한 말씀을 했는지도 알 수 있다. 사탄은 욥을 참소하고자 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동의를 얻어야 욥을 시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사탄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사탄에게 이러한 조건을 걸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였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이 말씀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느냐? 확실히 이것은 지시이고 명령이다. 이 말씀의 성격을 파악하면, 너는 이 명령의 선포자가 하나님이며, 명령을 받아들이는 자는 사탄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양자의 관계는 이 명령을 통해 이 말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보여진다. 물론 이 역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영계에서의 하나님과 사탄의 관계이며, 하나님과 사탄의 신분과 지위의 차이이다. 또한 지금까지 인류가 구체적인 사례와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과 사탄의 신분과 지위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 기록이 인류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아는 데에 있어 중요한 문헌이며, 이 기록에서 인류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받았고, 영계에서의 창조주와 사탄의 대화를 통해 창조주 권능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씀으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이 또 한 번 입증되었다. 겉으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은 사탄과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는 태도와 서 있는 위치가 사탄보다 높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명령하는 어조로 사탄에게 지시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탄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알려 주고, 욥을 사탄의 손에 붙였으니 그를 마음대로 대할 수는 있으나 욥의 생명을 취할 수는 없음을 알려 주었다. 그 함축적 의미는 비록 욥을 사탄의 손에 붙였으나 욥의 생명까지 붙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서 욥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태도는 사탄에게 한 이 명령에서 아주 명확하게 나타난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과 대화할 때 서 있던 위치 역시 이 명령에서 나타났다. 여호와 하나님이 서 있는 위치에서 볼 때 그는 빛과 공기를 만들고 만물 생령을 만든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만물 생령을 주재하는 하나님이고, 인류를 주관하고 음부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며, 모든 생명체의 생과 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인 것이다. 영계에서 하나님을 제외하고 누가 감히 사탄에게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또한 왜 사탄에게 친히 명령을 내린 것일까? 이는 욥의 목숨을 포함해서 사람의 생명은 모두 하나님이 주관하고, 하나님은 사탄이 침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욥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했을 때에도 욥의 생명을 앗아 가서는 안 된다는 이 특별한 명령을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탄은 하나님의 권능을 감히 넘어설 수 없으며, 하나님의 명령과 구체적인 지시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스럽게 명령에 복종하고 따르며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 물론 사탄은 또한 마음대로 하나님의 어떤 명령도 바꿀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준 범위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감히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 권능의 위력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권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냐? 사탄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고, 자기가 속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인류보다 훨씬 잘 안다. 그러기에 사탄은 하나님의 지위와 권능에 대해 영계에서 확실하게 보았고, 하나님 권능의 위력과 하나님의 권능이 행사되는 원칙에 대해 깊이 느꼈다. 그래서 감히 태만하거나 그 어떤 것도 전혀 거스르지 못하며, 감히 하나님의 권능을 벗어나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그 어떤 도전도 감히 하지 못한다. 사탄은 본성이 사악하고 교만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해 준 한계와 범위를 감히 벗어나지 못한다. 천만년 동안, 사탄은 엄격하게 그 한계를 지켰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지시와 명령을 준수하였으며, 지금껏 감히 한계선을 넘어갈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사탄이 악독하긴 하지만 타락한 인류보다 훨씬 ‘현명’하다. 사탄은 창조주의 신분을 알고 자신의 한계를 안다. ‘규율을 지키는’ 사탄의 행위로부터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은 사탄이 뛰어넘을 수 없는 천상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해 만물이 법칙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인류가 하나님이 정한 코스 속에서 번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이 규율을 깰 수 없고 이 법칙을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창조주의 손에서 나온 것이고, 창조주의 결정에서 온 것이며, 창조주의 권능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관문, 성장

한 사람이 어떤 가정 환경에서 어떤 가정 교육을 받는지는 그 사람이 태어난 가정에 의해 좌우되며, 이는 성장 배경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일생에서 두 번째로 거치게 되는 중요한 관문이다. 이 관문 역시 사람이 선택할 수 없으며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