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2018년 03월 05일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마 12:1)

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우선 “그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이 구절을 보자.

왜 이 구절을 골랐겠느냐? 이 부분이 하나님의 성품과 어떤 연관이 있겠느냐? 우리는 이 구절에서 먼저 이날이 안식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안식일임에도 밖으로 나갔고, 게다가 제자들을 이끌고 밀밭을 지나갔다. 더욱 ‘대역무도’한 것은 ‘이삭을 잘라 먹었다’는 것이다. 율법시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에는 안식일에 마음대로 외출하지 말고 마음대로 활동하지 말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안식일에는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많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행동은 오랫동안 율법 아래에서 생활한 사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많은 비난을 야기했다. 사람들이 왜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떻게 예수의 행동을 비판했는지는 잠시 차치해 두고, 우선 예수가 왜 하필 안식일을 택해서 이런 일을 했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그리고 그가 이 일을 통해 율법하에서 살고 있는 자들에게 알려 주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보자. 이것이 바로 이 구절과 하나님 성품의 관계에 대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세상에 온 예수는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인류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이미 율법시대에서 나와 새 사역을 시작했으며, 이 새 사역에서는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안식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새 사역에 대한 일종의 맛보기에 불과했다. 진짜 큰 사역은 뒤에서 계속된다. 예수가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율법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였으며, 율법시대에 정한 규례와 원칙을 깨뜨렸다. 그에게서는 율법과 관련된 그 어떤 행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것들을 전부 버리고 지키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지키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예수가 밀밭을 지나간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밖에서 사역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이 행동은 사람의 관념을 깬 것으로서, 그가 이미 율법 아래에서 살지 않으며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새로운 사역 방식으로 사람들 앞에, 사람들 가운데 나타났음을 알린 것이다. 또한,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새 사역을 가져왔으며, 이 새 사역은 율법과 안식일이라는 규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말해 준 것이다. 하나님은 새 사역을 할 때, 더 이상 옛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율법시대의 규례에 신경 쓰지도 않았으며, 지난 시대에 했던 사역에 영향받지도 않았다. 그는 안식일에도 변함없이 사역했으며, 게다가 그의 제자들은 배고프면 이삭을 잘라 먹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정상적인 것이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많은 사역과 말씀을 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 새로운 시작 앞에서 그는 이전에 했던 옛 사역을 더 이상 언급하지도, 지속시키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그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새 사역을 할 때, 즉 사람을 새로운 사역 절차로 인도할 때, 그러니까 그의 사역이 더 높은 단계로 들어갈 때, 사람이 지난날의 관점이나 규례를 계속 지킨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념하지도 칭찬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미 새 사역을 가져왔고, 새로운 사역 단계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새 사역을 가져올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형상과 시각,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고, 사람들에게 그의 다양한 성품과 속성을 보여 준다. 이것은 그가 새 사역을 하는 목적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옛것을 지키지 않고 옛길을 가지 않으며, 그의 사역과 말씀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이런저런 금기가 없다. 하나님은 아무런 매임도 없이 완전히 자유롭고, 그 어떤 금기도 없고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해방과 자유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고, 진정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하나님이지, 목각 인형도, 흙으로 빚은 인형도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모시고 숭배하는 우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이다. 그의 사역과 말씀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전부 다 생명과 광명이며, 자유와 해방이다. 그에게 진리와 생명, 길이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역을 한다.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인류가 그의 새 사역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평가하든, 그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한다. 그는 그 어떤 사람의 관념에도 신경 쓰지 않고, 사람들이 그의 사역과 말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에도 개의치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이 그의 새 사역을 극력으로 반대하고 대적해도 말이다. 피조물 중 그 누구도 사람의 이치나 상상, 지식, 혹은 사람의 도덕관념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평가하거나 규정하고, 헐뜯고, 방해하고, 파괴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일하고 사역하는 데는 어떤 금기도 없고, 그 어떤 사람, 일, 사물의 속박도 받지 않으며, 그 어떤 적대 세력의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의 새 사역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바로 영원히 승리하는 왕이다. 모든 적대 세력과 인류에게서 온 각종 사설이나 그릇된 말들은 다 그의 발등상 아래에 뭉개질 것이다. 그가 어떤 새 사역을 하든지 간에, 그의 사역은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전개될 것이고, 반드시 사람들 가운데서 확장될 것이며, 반드시 전 우주에서 막힘없이 행해지고 대성공을 거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이고,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떳떳하게 안식일에 나가 사역할 수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그 어떤 규례도, 사람에게서 온 그 어떤 지식과 학설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것은 바로 하나님의 새 사역과 하나님의 길이었으며, 그가 행한 사역은 모두 사람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사람을 빛 속에서 살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우상이나 거짓 신을 섬기는 자들은 매일 사탄의 속박과 각종 복잡한 규율에 묶여 오늘은 이것을 금기시하고, 내일은 저것을 금기시하며 살고 있는데, 자유가 조금도 없다. 마치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인 죄수 같아 즐거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금기’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속박을 의미하고 굴레를 의미하며 사악함을 의미한다! 사람이 일단 우상을 섬기게 되면, 다시 말해 거짓 신이나 악령을 섬기게 되면 금기도 뒤따라 온다. 이것도 먹으면 안 되고 저것도 먹으면 안 되며, 오늘은 외출하면 안 되고 내일은 취사할 수 없고 모레는 이사할 수 없다. 관혼상제 때마다 항상 택일해야 하고, 심지어 아이 낳는 것도 날을 가려서 낳아야 한다. 이것들을 뭐라 하느냐? 이것들이 바로 금기이자, 사람에 대한 속박이며, 사탄이나 악령이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마음과 육을 옭아매는 족쇄이다. 하나님에게 이러한 금기가 있느냐? 하나님의 거룩함을 얘기할 때, 너는 먼저 이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하나님께는 어떠한 금기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에는 원칙이 있지만, 어떠한 금기도 없다. 하나님 자신이 바로 진리, 길, 생명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아래의 구절을 보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여기에서 ‘성전’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성전’은 화려하고 거대한 건물을 의미한다. 율법시대에 ‘성전’은 바로 제사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였다.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에서 주 예수가 말하는 ‘이’는 누구를 가리키느냐? 성육신한 주 예수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주 예수만이 성전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사람에게 무엇을 알려 주느냐? 사람에게 성전에서 나와야 함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성전에서 나와 거기서 사역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마땅히 성전 밖에서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고, 새 사역의 발걸음을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이 말씀을 한 이유는 율법하의 사람들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크게 여긴 것, 즉 하나님이 아닌 성전이란 장소를 숭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사람에게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하나님은 지고지상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한 것이다. 예수가 봤을 때, 율법하에 있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오직 제사를 드리는 형식만 차렸을 뿐이었다. 예수는 이 형식을 ‘우상 숭배’로 정한 것이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고 높게 생각했다. 그들 마음속에는 성전만 있을 뿐 하나님은 없었다. 그들은 성전이 없으면 삶터도, 경배할 곳도 없고, 제사를 드릴 수도 없다고 여겼다. ‘삶터’란 그들이 여호와를 경배한다는 명목으로 머무르는 성전을 가리키는데, 자신들의 일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제사를 드리는 일’이란 성전 안에서 섬긴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떳떳하지 못한 수작들을 은폐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당시에 사람들이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생각했던 원인이다. 그들이 성전을 눈가림으로, 제사를 핑계로 삼아 사람을 속이고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이런 말씀으로 사람들을 일깨워 준 것이다. …

이어서 이 구절의 마지막 말을 보자.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이 말씀에 실제적인 면이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 말씀의 실제적인 면을 볼 수 있느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그가 왜 이런 말씀을 했겠느냐? 너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제 너희는 이 말씀의 함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 말을 이해하는 자가 많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은 율법시대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안식일에서 벗어나기가 아주 어려웠고,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안식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것은 다 비물질적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네게 필요한 모든 물질을 공급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너의 물질적 필요가 만족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너의 진리 추구를 대신할 수 있다고 보느냐? 말할 것도 없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교제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속성은 모두 진리의 내용이므로 값나가는 물질 그 무엇으로도 절대 저울질할 수 없고, 그 가치 또한 돈으로 가늠할 수 없다. 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며,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비물질적 진리는 사람들이 귀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다. 그렇지 않겠느냐? 이 말은 너희가 천천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내 말의 요지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모든 것은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것이며, 그 어떤 물질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겠다. 배가 고플 때, 너는 음식물로 배를 채워야 한다. 그 음식이 좋을 수도 있고 별로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배만 채우면 배고플 때의 괴로움은 사라진다. 그러면 너는 안정을 되찾게 되고, 너의 몸도 함께 편해진다. 배고픔은 음식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여겨질 때 네 마음속의 그 공허한 느낌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음식물이 해결해 줄 수 있느냐? 또는 하나님을 따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 느끼는 그런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성품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무엇이 진리인지도 모르며 하나님의 성품 또한 알지 못한다면, 너는 안타깝지 않겠느냐? 마음이 갈급하지 않겠느냐? 이러한 감정 때문에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없지 않겠느냐? 이러한 마음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울 수 있겠느냐?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을 찾아 얘기를 나누며, 어떤 사람들은 한잠 푹 자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읽어 본다. 혹은 본분 이행에 더 노력을 기울이고 더 애를 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너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겠느냐? 너희는 이러한 방법들에 대해 깊이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네가 역부족이라 느낄 때, 진리의 실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깨우쳐 주기를 갈망할 때,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때 네게 필요한 것은 한 끼 밥도, 따뜻한 말 몇 마디도 아니며, 일시적인 육적 안일과 만족은 더더욱 아니다. 네게 필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알려 주는 것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확실하게 깨우쳐 주는 것이다. 아주 조금씩일지라도 이러한 것들을 깨닫고 나면, 너의 마음은 밥 한 끼를 배불리 먹은 것보다 더 만족을 느끼지 않겠느냐? 네 마음이 만족을 느낄 때, 너의 마음은 물론, 온 몸과 마음이 진정한 안식을 얻지 않겠느냐? 내가 이렇게 비유하고 분석해 줬으니, 이제 너희는 내가 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라는 말씀을 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지 않으냐? 이 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모든 것이 네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 사물과 사람을 포함한 그 무엇보다 크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람은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이후의 체험 가운데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왜 이 구절을 보라고 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다 진리이고 생명이다. ‘진리’란 사람의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며, 사람이 한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다 해도, 진리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네 마음에 안식을 선사해 주는 유일한 것이다.

예수가 이적과 기사를 행하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3~44)

욥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1)

욥이 겪은 시련의 전 과정을 알고 난 후, 대다수의 사람들이 욥과 관련된 정보에 관심을 보일 것이라 믿는다. 특히, 욥이 어떻게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되었는지, 그 ‘비결’에 더욱 관심을 보일 것이다. 오늘 여기서 욥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도록 하자. 욥의…

길 잃은 양의 비유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2~14)

예수가 바리새인을 꾸짖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막 3:21~22)

예수가 부활한 후 떡을 먹으며 사람에게 성경을 풀어 주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0~32)

예수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한 말씀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6~29)

산상수훈 ― 예수의 비유 ― 계명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 주의 사랑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18: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