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좋은 교회를 찾으려면 꼭 알아야 하는 2가지 조건

2018년 10월 27일

세계 각지에서 재난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주님의 재림의 예언이 대다수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현재 교계 전반이 황량해졌고, 신도의 믿음과 사랑은 보편적으로 약하며, 많은 신도들이 세속에 물들어 바쁘게 사느라 주님을 위해 사역할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목사와 장로 사이에도 암투를 벌이고,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며, 심지어 패거리를 짓고, 편을 가르며, 헌금을 횡령하고, 문란한 남녀 관계를 맺는 일 등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영적으로 깨어있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각성하기 시작했고, 본인이 속한 교회가 이미 성령의 역사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사방으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교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러 교파가 난립하여 서로 본인이 믿는 교회가 주님의 뜻에 가장 합당한 교회라고 말합니다. 그럼 대체 어떤 교회가 진정으로 주님의 뜻에 합당한 참 교회일까요? 어떤 사람은 참 교회를 판단하려면 교회 인원수가 얼마인지 봐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는지 봐야 한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무슨 교파인지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각자가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참 교회를 찾는데 필요한 두 가지 원칙에 대해서 교제해 보겠습니다.

초기 성전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던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역대하 7:16)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항상 성전에 충만했기 때문에, 당시의 사람들은 성전에서 언제나 공손한 태도로 하나님을 섬기고, 누구도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성전에 뛰어 들어가면, 이스라엘의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역대하 26장 참조)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실 때, 성전은 뜻밖에도 ‘도둑의 소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돈을 바꾸고, 소, 양, 비둘기를 암거래하는데도 하나님의 징계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이유를 다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미 성전을 떠나시고 예수님으로 오시어 성전 밖에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똑같은 성전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성전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진정으로 합당한 성전이며, ‘도둑의 소굴’이 되어 버린 성전은 이미 하나님의 미움을 받아 더 이상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있는가 없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참 교회이고, 그 반대는 거짓 교회가 틀림없습니다.

좋은 교회를 찾는 방법,

참과 거짓 교회를 판단하는 두 번째 원칙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생명이 점점 성장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목사와 장로가 진리를 사랑하는지, 진리를 추구하는지, 성령의 역사가 있는지, 진실로 진리를 이해하고 실행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를, 진리가 장악하고 있는지 아니면 적그리스도가 장악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장악하는지 아니면 악인과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장악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 장로의 설교와 사역이 신도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고, 신도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도록 인도할 수 있다면, 그들의 설교를 통해서 신도는 하나님에 대해 점점 더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갈수록 정상화되며, 하나님과도 점점 가까워집니다. 또한 사탄의 성품에서 점차 벗어나서 갈수록 정상적인 인성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효과들을 이룬다면 목사와 장로는 성령의 역사가 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분명한 것입니다. 좋은 목자의 인도로 신도의 생명도 점점 자라납니다. 만약 목사와 장로가 성경의 글귀만 해석하거나, 규례를 가지고 신도를 단속하고 옭아매려 한다면 진리를 나눌 수 없고, 오랫동안 설교해도 신도는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성경 글귀와 영적인 이론만 있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앎이 없으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실생활에서 정상인의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 목사와 장로는 오랫동안 사역을 해도 신도는 생명의 공급을 조금도 얻지 못합니다. 그들은 신도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신의 지위와 밥줄을 위해,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를 찾아 나가는 신도를 가로막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전혀 없고 완전히 하나님과 대적하는 악한 종임을 증명합니다.

또한, 진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기울이고, 진리를 묵상하고 구하며, 맹목적으로 목사와 장로를 따르지 않고, 목사와 장로가 하는 말과 행동이 진리에 합당한지,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지,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가 있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목사와 장로의 말과 행동에 대해 진리에 합당하면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자리가 있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력이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만약 흐리멍덩하게 따라다니다가 복만 받으려 하고, 쓸데없이 소란을 피우는 사람인데 진리를 증오하고 미워하기까지 한다면, 이런 사람은 모두 마귀가 분장을 하고 교회에 들어간 가라지이며, 결국에는 불태워지는 대상입니다.(마태복음 13:30 참조)

만약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면, 그 교인들은 모두 정상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생명이 차츰 자라서 갈수록 진리를 이해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점점 알게 됩니다. 그럼 그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참 교회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 교회가 틀림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17~20)

결론적으로, 참 교회인지 거짓 교회인지를 판단하는 관건은 그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있는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인지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을 분별해 낼 수 있고, 이러한 원칙 및 교회 현황을 근거로 판단하면 어렵지 않게 참과 거짓 교회를 분별해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님 뜻에 맞는가

예수님을 믿는 형제자매마다 성경을 아주 중요하게 대하는데,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성경을 보아야 하고 성경을 보아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어느 누구도 성경의 말을 어겨서는 안 되고 성경을 떠나서는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사람 마음속에 있는 성경의 지위는 아주 높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역사─하나님 나라 복음이 중화 대륙에서 확장된 이후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성령의 인솔 하에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공급과 자양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형제자매들은 오히려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성경을 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만 먹고 마시는 데에 대해 관념이 생겨 ‘성경을 보지 않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 수 있는가? 하나님을 믿으면 어찌 성경을 벗어날 수 있는가? 성경을 떠나면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을 받아들이기 싫어합니다. 그럼 성경을 보지 않으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닌지? 성경을 떠나면 정말 주님을 배반한 것인지? 하나님은 성경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성경을 대해야 하나님 뜻에 맞겠는지? 솔직히 말해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깨달아야만 우리는 자신이 행하는 것이 확실히 하나님의 뜻에 부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논하려 한 바에는 반드시 성경의 내막을 알아야 하고 성경의 내용과 성경의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이해와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성경의 구약 부분은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지혜서 및 일부 선지자의 예언서를 포괄하는데, 주로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창세의 사역과 율법시대에 하신 사역입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어떻게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는지, 인류는 어떻게 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을 배반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범죄한 후의 인류를 안배하셨는지, 또 어떻게 홍수로 세상을 멸하신 것인지, 노아의 일가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을 인솔하여 애굽에서 나오도록 하셨는지, 또 어떻게 율법을 반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땅에서 생활하도록 인솔하셨는지, 그리고 일부 선지자의 예언 등등도 기록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서 하신 사역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시대에서 생활한 실제 상황입니다. 신약 성경은 4복음서, 사도행전 및 성도들의 일부 서신, 그리고 마지막의 계시록을 포함합니다. 주로 기록된 것은 예수님의 강생, 예수님이 유대 각처에서 어떻게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는지, 또 어떻게 가는 곳마다 전도하시면서 당시의 유대인들을 가르치셨는지,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훼방하고 정죄하고 저버렸는지, 예수님은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힌 후 3일만에 부활하셨는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이 어떻게 전도하고 예수님을 위해 간증하였는지, 어떻게 성령의 인솔 하에 당시의 뭇 교회를 목양하였는지……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이든 아니면 신약 성경이든, 기록된 내용은 모두 전에 하나님이 하셨던 사역과 전에 일어났던 일부 일들에 근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사역을 하시기 전에는 성경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근거하여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은 모든 사람이 다 인정하리라 믿습니다. 예를 들면 신약 성경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300여 년 후에야 사람들이 사도들이 기록한 예수님의 땅에서의 일부 역사와 사도들이 뭇 교회를 목양할 때 쓴 일부 서신 및 주후 90 몇 년에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이상(異象)에 관한 기록을 한데 모아 편집한 것입니다. 그중 사도들의 그런 서신은 다 그들 자신의 경력과 하나님 역사에 대한 인식인데, 그들은 바로 이런 경력과 인식을 통해 당시의 뭇 교회를 목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각 방면의 원인으로 어떤 때는 그들이 직접 어느 교회에 갈 수 없어 서신 방식으로 그곳의 형제자매들을 목양했습니다. 사실, 당시에 사도들이 쓴 그런 서신은 성경에 기록된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중 많은 서신은 수백년 동안 전해 내려오면서 분실되었습니다. 주후 300여 년 즈음에 당시의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서신이 사람에게 매우 도움이 된다고 여기고는 사람들이 읽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전해 내려온 많은 서신 중에서 일부를 골라 한데 정리했습니다. 그 시대에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이런 서신은 사람이 쓴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데에 유익한 점이 있는 편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모두 정확히 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천년 동안 전해지고 또 ≪성경≫, 이 책에 대한 사람의 호감과 예수님에 대한 사람의 애대(愛戴)의 정 때문에 점차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성경에 편성된 이런 서신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고 ‘신성한 언어’로 삼게 되어 어느 누구도 어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당시의 사람은 이런 서신을 어떻게 대한 것인지?’라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조금만 미루어 생각하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 바울, 베드로 등 사도들이 각처에서 교회를 목양하였는데, 뭇 교회에서도 바울, 베드로 등 사도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간혹가다 바울이나 베드로 그들이 서신을 다 쓴 후에는 어떤 사람이 그들의 서신을 교회에 가져가서 “이는 바울 또는 ○○ 형제가 우리 교회에 써 보낸 편지인데 바울 또는 ○○ 형제의 말입니다. 우리가 읽어보고 교통합시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는 절대로 “보십시오,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형제자매님, 빨리 와서 읽어보십시오.”라고 말했을 리가 없습니다. 만일 바울이나 베드로를 잘 아는 사람이 그들의 서신을 보았을 때면 “베드로 형제를 제가 잘 압니다. 바울 형제를 제가 잘 압니다. 이것은 그들이 쓴 편지가 맞습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로 “베드로의 이런 말은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말했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은 모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도의 말이고 그들이 잘 아는 바울이나 베드로 형제가 그들의 교회에 써 보낸 편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들은 모두 바울이나 베드로는 사람이지 예수님이 아니고 하나님 도성육신은 더욱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바울이나 베드로의 말을 사람의 말로 대하고 사람의 경력과 인식으로 삼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단지 후세 사람들이 바울 그들을 숭배하고 또 그들의 경력과 인식이 사람에게 덕이 된다고 이런 말을 성경에 편성하였을 뿐입니다. 사실, 당시에 이런 서신이 성경에 편성되지 않았을 때에, 사람은 모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저 사람의 경력과 인식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 바울이나 베드로 그들과 동시대 형제자매들은 모두 실정을 알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사도들의 서신을 정확히 대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일 그때의 배경을 좀 자세히 돌아보고 상고한다면, 그 사도의 서신은 다 하나님 역사에 대한 그들의 일부 경력과 인식이고 그들이 사역하는 기간에 뭇 교회 형제자매들에 대한 권면과 위로와 격려이지 성령의 직접적인 말씀이 아니고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아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만일 성경의 기타 편(篇)과 장(章)이 형성된 배경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이해가 있다면,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효유한 말씀과 선지자의 예언 및 예수님이 사람에게 가르치신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외에 그 나머지는 다 사람의 경력과 인식, 일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면 우리가 성경을 정확히 대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우리는 성경의 유래와 성경이 생긴 배경에 대해 논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비록 하나님 역사의 진실한 장면이지만 필경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사역이니 하나님의 현시의 역사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성경을 본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것이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의 하나님의 두 단계 역사임을 다 알고 있다. 성경 구약에 기록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歷史)인데, 창세로부터 율법시대가 끝날 때까지 여호와가 어떻게 역사하였는가 하는 것이 기록되었다. 신약 4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예수의 땅에서의 사역이며 신약에 바울의 사역이 기록되었는데, 이것이 모두 역사(歷史) 기록에 속하지 않는가? 지난날의 일을 오늘에 가져오면 모두 역사(歷史)에 속하고, 아무리 진실일지라도 역사(歷史)이다. 역사(歷史)는 현실에 맞출 수 없다.』 하나님은 항상 새로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사역은 부단히 앞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필요에 근거하여 부단히 아주 새롭고 아주 현실적인 사역을 하시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하신 각 시대의 사역은 여태껏 성경에 근거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당시에 여호와께서 역사하실 때 성경에 근거하여 하신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창세기≫에 근거하여 세상을 창조하시고 홍수로 세상을 멸하신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모세가 쓴 ≪출애굽기≫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사람을 인솔하여 애굽에서 나오도록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4복음서’에 근거하여 십자가의 사역을 하신 것입니까? 분명히 다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런 사역을 하시기 전에는 이런 성경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역사하실 때는 구약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전적으로 인류의 현 상태와 그때 사람의 필요에 근거하여 역사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홍수로 세상을 멸하신 것은 그때의 인류가 이미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하고 음란하여 하나님께서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의 인류를 멸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율법을 반포하신 것은 처음 난 인류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어떻게 사람이 되는지를 알지 못하여 율법으로 그들을 인솔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역사하실 때는 이미 구약 성경이 있었지만 예수님이 하신 사역이 어떤 것이 성경에 근거하여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 되어 이름을 ‘예수’라 하였는데 구약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에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라고 요구하셨는데 구약 성경에 사람에게 이렇게 실행하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럴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사람을 교훈한 많은 말씀도 구약 성경에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반포한 율법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 하셨지만(출 21:24) 예수님은 사람에게 남을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18:21-22).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안식일을 지키고 안식일에 무슨 일이든 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셨지만(출 31:12-15) 예수님은 사람에게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해도 된다고 알려주셨습니다(마 12:12). 예수님이 이렇게 하셔야 하는 것도 그때 사람의 필요에 근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시대 후기에 사탄의 패괴로 인하여 사람의 죄가 갈수록 많아져 사람은 이미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율법시대가 계속 지속된다면 사람은 다만 죄 속에서 살면서 더욱 깊이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도 죄의 자손이 되고 귀신의 후대가 될 것입니다. 이러면 인류는 모두 사탄에게 삼켜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류의 필요에 근거하여 말씀이 육신 되어 친히 사람을 구원하러 오셔서 사람에게 풍부한 은혜와 물질적 축복을 베풀어주시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사람의 죄를 담당하고 사해주심으로써 사람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속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사람은 사탄에게 철저히 노략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셔서 여전히 성경에 따라 역사하시고 여전히 여호와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다면, 만일 사람이 지킬 수 없어 사람을 저주하고 격살한다면, 사람은 다 하나님께 격살될 것인데, 누가 또 속죄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또 하나님 앞에 올 기회가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미 땅끝까지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부터 풍부한 은혜를 누렸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비록 사람이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기는 하였지만, 사람의 죄성이 아직도 사람 안에 깊이 뿌리박혀 죄의 매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아직도 죄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언제나 어쩔 수 없이 범죄하고 있고, 게다가 정결케 되어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지는 데에 달하지 못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도 여전히 성경에 따라 역사하시고 줄곧 사람을 용서하시고 사람의 죄를 사하신다면, 사람은 영원히 범죄하고는 죄를 자백하고 죄를 자백하고는 범죄하는 이런 반복적인 상황에서 살지 않겠습니까? 이러면 사람이 어느 때에야 완전히 죄성을 벗어버리고 정결케 되어 하나님께 얻어지는 데에 달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이렇게 역사한다면 사람을 구원하는 효과에 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세에 하나님은 인류의 필요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사역의 기초에서 또 한 단계 더 새롭고 더 현실적인 사역을 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사탄의 손아귀에서 구속해 낸 인류를 변화시키고 정결케 하여 죄악에서 완전히 벗어나 거룩한 사람이 되어 진정 하나님께 얻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현재는 시대가 변하고 하나님의 사역이 또 앞으로 발전하였으므로, 형벌ㆍ심판에 의하여 사람의 패역을 벗겨버리고 사람 안의 불결한 것들을 벗겨버린다. 그 단계는 구속이므로, 그가 반드시 그렇게 하여 사람에게 넉넉한 은혜를 베풀어 사람으로 하여금 누리게 해야만 사람을 죄에서 구속해 낼 수 있었으며, 은혜에 의하여 사람의 죄가 사함을 받도록 하였다. 이 단계는 형벌과 심판에 의하여, 말씀의 격타(擊打)에 의하여, 말씀의 징계와 폭로에 의하여, 사람 안의 불의한 것들을 드러낸 후 구원받는 데에 달하게 하는 것인데, 구속보다 더 심화된 사역이다.』 하나님 말씀에서 보다시피, 하나님의 이번 역사는 주로 말씀을 발표하는 것인데, 말씀의 형벌 심판에 의해 사람 안의 모든 불의한 것들을 드러내어 사람에게 자기 안에 깊이 뿌리박힌 사탄의 패괴 성정에 대하여 인식이 있게 하고 또한 완전히 변화될 수 있게 하며,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 매임에서 철저히 벗어나 진정 하나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께 완전히 얻어질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구속보다 더 심화된 사역이고 하나님이 이전에 하신 적이 없던 사역이니, 당연히 성경에 기록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역사는 완전히 인류의 필요에 근거한 것이고 하나님의 경영 계획에 근거한 것이지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역사든, 예수의 역사든 아니면 오늘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든, 성경의 기초 위에 세워진 시대의 사역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사역 및 사람에 대한 그분의 교훈이 설마 구약 성경에 조금도 차이가 없이 다 기록되었습니까? 누가 이런 능력과 선견(先見)이 있어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사역을 다 성경에 앞당겨 기록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구약 율법을 벗어난 새 사역을 하셨어도 우리는 예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할 수 있었지만, 오늘 전능하신 하나님이 새로운 사역을 전개하시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성경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요구합니까? 무엇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성경의 범위를 벗어났다 하여 하나님의 역사임을 부인합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사역이 비록 성경을 벗어났지만, 그분의 역사는 성령 역사의 동향을 대표할 수 있으며, 낡은 시대를 끝마치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할 수 있으며, 인류의 패역을 심판하고 인류의 불의를 형벌하고 인류의 패괴 성정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하나님의 소시를 발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분의 역사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극대한 사랑을 인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공의롭고 거룩한 성품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한 것에 의해 하나님이 곧 진리, 길, 생명이며, 하나님만이 사람을 변화시키시고 정결케 하시고 온전케 하실 수 있으며, 사람을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철저히 구원해내실 수 있으며, 하나님만이 인류 생존의 기탁이시고 인류의 유일한 의뢰이시며, 하나님만이 사람이 사랑하고 경배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진정 인식하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이런 효과에 달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바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심을 충분히 증명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신 것이 성경을 벗어났다 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너무 우매하고 너무 황당무계하지 않습니까? 현재 각종 적그리스도와 거짓 그리스도들이 사람을 미혹할 때 모두 성경 장절을 인용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그들이 성경을 떠나지 않았다 하여 그들을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비록 하나님 역사의 실제 기록이지만 성경이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고 더욱이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대표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물의 주재이시고 지고지상한 분이시고 전능하고 지혜로운 분이시며, 하나님의 행사는 한량없고 무진장하기 때문입니다. 시초부터 현재까지 하나님 역사는 성경의 제한을 받은 적이 없으며, 그분은 인류의 필요에 근거하고 그분의 경영 계획에 따라 역사하신 것입니다.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예수 시대에, 예수는 그때 성령이 그의 몸에 하는 사역에 따라 그 유대인들을 인솔하였고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인솔하였다. 그가 한 것은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고 그의 사역에 따라 말씀하였다. 그는 성경에서 어떻게 말하였든, 성경에서 길을 찾는 것으로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인솔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하기 시작하자 회개의 도를 전하였다. 그러나 ‘회개’라는 이 두 글자는 구약의 그렇게 많은 예언에 아예 언급되지도 않았다. 그는 성경에 근거하여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 새로운 길을 이끌어 내었고 더 새로운 사역을 하였다. 그는 여태껏 성경을 참고하여 전도하지 않았다.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그의 이적은 율법시대에 아무도 나타낼 수 없었고 그의 사역, 그의 교훈, 그의 권세도 율법시대에 아무도 행한 적이 없었다. 그는 다만 그의 더 새로운 사역을 하였을 뿐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성경으로써 그를 정죄하고 심지어 구약 성경으로써 그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지만, 그의 사역은 오히려 성경 구약을 초과하였다. 만일 이렇지 않았다면, 사람이 또 어찌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었겠는가? 그래 그의 교훈과 병 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능력이 구약에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가 한 사역은 모두 더 새로운 길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이지, 일부러 성경과 ‘싸움’을 하거나 일부러 구약 성경을 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그의 직분을 하여 그의 새로운 사역을 그를 간절히 사모하고 찾고 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는 구약을 해석하거나 구약의 사역을 수호하는 것이 아니며, 그가 역사한 것은 율법시대가 계속 발전해 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역사하는 데는 성경의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다만 그가 해야 할 사역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구약의 예언을 해석하지 않았고 구약 율법시대의 말씀대로 사역하지도 않았다. 구약에 어떻게 말하였든, 그의 것과 맞든 그의 것과 맞지 않든, 그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구약 선지자의 예언으로써 그를 정죄하였을지라도, 다른 사람이 그의 사역을 어떻게 인식하든, 그의 사역을 어떻게 정죄하든, 그는 줄곧 그가 해야 할 사역만 하였을 뿐이다. 사람이 보기에 그가 역사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도 없었고 또한 성경의 기록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모두 사람의 착오가 아닌가? 하나님이 역사하는 데에도 규례에 맞출 필요가 있겠는가? 하나님이 역사하는 데에도 선지자의 예언에 근거해야 하는가? 도대체 성경이 큰가 아니면 하나님이 큰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함에 있어서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야 하는가? 설마 하나님 자신은 성경을 벗어날 어떠한 권리도 없단 말인가? 하나님이 성경을 떠나서 따로 역사할 수 없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는가? 만일 그가 안식일에 따라, 구약의 그런 계명에 따라 실행한다고 하면, 그는 무엇 때문에 와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으나 발을 씻고 머리에 쓰며 또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셨는가? 이런 것은 모두 구약에 없는 계명이 아닌가? 그가 구약대로 한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규례들을 타파하였는가? 하나님이 먼저 있었는지 아니면 성경이 먼저 있었는지를 너는 알아야 한다! 그가 안식일의 주인일 수 있으면 성경의 주인일 수는 없는가?』 하나님 역사가 모두 성경을 참고하지 않고 성경을 근거로 하지 않고 단지 본시대에 해야 할 사역만 하신 이상,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역사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어야 하지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예로부터 하나님을 믿은 많은 사람들도 성경을 보지 않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안중에 진정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전혀 성경을 보지 않았는데, 물론 그때는 볼 성경도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성실한 마음으로써 여호와를 경배하였고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동시에 여호와의 요구대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홍수로 세상을 멸할 때에 오직 노아의 일가 여덟 식구만이 은혜를 입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들도 성경을 보지 않았는데, 물론 볼 성경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배한 것은 여호와의 지시와 요구에 근거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면 그들이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호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은혜시대에 예수님을 따른 그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충만하여 각처에서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부활의 도를 간증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게 하였고,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주고 안수 기도해주었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금식하고 떡을 떼고 포도주를 마시고 머리에 쓰고 발을 씻게 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것은 모두 예수님의 새 시대에서의 역사이고 하나님이 새로운 시대에 사람에게 실행하고 지키라고 요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비록 성경이 있었지만 그들이 전한 것은 구약 성경에 근거한 것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받쳐들고 여호와의 도를 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적만 말하고 천국의 복음만 전하였으며 예수님이 개척하신 은혜시대의 도만 간증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은 것은 모두 성경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시의 역사와 하나님의 새로운 요구를 실행하고 순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이 성경을 보지 않았다 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성경을 떠났다 하여 주님을 배반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확실히 성경만 붙잡고 성경만 말하면서 매사마다 성경과 대조하였지만 나중에 성경에 근거하여 인자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성경을 떠나지 않았다 하여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런 관점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지키는 “하나님을 믿으면 성경을 보아야 하고 성경을 보아야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성경을 떠나면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황당하고 그릇된 것이지 진리에 부합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도 부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인솔하시는 것은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사역도 역시 부단히 발전하고 부단히 심화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때는 하나님께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사역이 있고 새로운 말씀으로 사람의 생명을 공급합니다. 이와 동시에 성경도 곧 새 시대의 도래에 따라 낡고 때가 지난 역사(歷史)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께서 새로운 사역을 개척하시고 새로운 시대를 가져오시고 새로운 말씀을 발표하실 때, 성령께 택함받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형제자매들은 더 이상 성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가장 새롭고 현시적인 역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가장 새로운 생명 말씀의 공급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각처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래를 간증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합니다. 이것은 당시에 예수님이 은혜시대의 역사를 개척하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사를 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모두 더는 성경을 보지 않았지만 똑같이 성령의 서로 다른 시대에서의 역사와 말씀을 간증하였는데,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성경의 내막을 이해하고 당시에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구약 성경대로 역사하지 않으셨는지,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의 역사와 말씀만 전하였는지를 알면,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신약 성경대로 역사하시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더는 성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 복음만 간증하는가에 대해 관념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사역은 한 단계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두 단계로 사람의 죄를 다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반드시 제3단계 사역을 통해야만 사람을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철저히 구원해내어 철저히 변화시키고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역사가 인류를 구원하는 완정(完整)한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고 성령 역사의 동향을 찾고 구해야 하며 성경을 정확히 대해야 하고 자기의 관념에서 나와 어린양의 발자취를 바짝 따라 하나님의 최신 역사를 따라가야 합니다. 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역사(歷史)를 회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하니, 네가 성경만 알 뿐 하나님의 현재 하려는 사역을 알지 못하고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령의 역사를 찾지 않으면, 너는 무엇을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라 하는지를 모른다. 네가 만약 성경을 보는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歷史)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고 즉 하나님이 온 천지를 창조한 역사(歷史)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 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알기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죽은 글귀 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역사(歷史)를 알려고 추구하는 사람도 아닌 이상, 너는 하나님의 현시의 뜻을 찾고 구해야 하고 성령 역사의 동향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하고 성령의 현시 역사를 인식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만일 성경을 볼 줄만 알고 성령의 새 시대의 역사를 찾고 구하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성령의 현시 역사의 흐름에 도태될 것이고 심지어 성경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새 역사를 대적한 탓에 하나님께 정죄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역사 서적에 속한다. 네가 만약 성경 구약을 은혜시대에 가져다 먹고 마시며 구약시대에 요구한 것을 가지고 은혜시대에서 실행한다면, 예수가 너를 저버릴 것이고 너를 정죄할 것이다. 네가 구약으로써 예수가 한 사역에 맞춘다면, 너는 바리새인이다. 네가 만약 현재 신약과 구약을 함께 먹고 마시고 실행한다면, 오늘의 하나님이 너를 죄로 정할 것이며, 너는 오늘의 성령의 역사를 따라갈 수 없다! 네가 구약도 먹고 신약도 먹는다면, 너는 성령 흐름 이외의 사람에 속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보다시피, 성경을 지키고 성령의 새 시대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다 성령의 흐름 이외의 사람이고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며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마치 당시의 그 제사장, 서기관, 장로와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은혜시대의 사역을 개척하시고 사람에게 새 시대의 실행의 길을 가져다주셨을 때, 그들은 여전히 한사코 구약 성경을 지키고 여호와의 요구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으로써 예수님의 역사를 가늠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들의 관념에서는 하나님이 성경 이외에서 역사하실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최종에 예수님이 구약 율법을 지키지 않고 메시아로 불리지 않은 것을 죄명으로 본래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범하여 하나님께 징벌받고 저주받은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이와 같은 비참한 결말을 얻었는데, 설마 우리가 경계할 만한 가치가 없단 말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실패한 까닭은 무작정 성경을 지키면서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을 중요시하지 않고 하나님의 현실의 역사에 순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유대의 그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으로써 예수를 정죄하였다. 그들은 오늘날의 예수와 어떻게 합할 것인가를 찾고 구하지 않고 매 구절의 율법을 진지하게 대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들은 결국에는 예수가 구약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죄명으로 본래 무죄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다. 그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로 그들이 진리와 합하는 도를 찾고 구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그들은 ‘경문’의 한 글자 한 구절에만 유심하였을 뿐, 나의 뜻과 나의 역사 절차와 역사 방식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진리를 찾고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글귀를 사수하는 사람이며,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을 믿는 사람이다. 좀 더 투철하게 말하면, 그들은 모두 성경을 지키는 노예들이다. 성경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하여, 성경의 존엄을 수호하기 위하여, 성경의 명망을 수호하기 위하여, 그들은 결국 인자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다만 성경의 편을 들기 위한 것이었고, 다만 사람 마음속에 있는 성경의 한 글자 한 구절의 지위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의 앞길을 망칠지언정, 속죄제를 얻지 못할지언정, 경문의 규정에 맞지 않는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설마 그들이 모두 매 구절 경문의 앞잡이가 아니란 말인가?』 사실, 성경의 원래 가치는 다만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앞 두 단계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와 인식이 있게 할 뿐이고, 다만 하나님의 이전의 역사를 위해 증거할 뿐입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현실의 생명 공급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요 5:39-40)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보다시피, 성경에는 전혀 영생이 없고 더욱이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최신 역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최신 인솔을 따라야만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행할 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진리, 길,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생명의 실질을 갖추었고,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생명의 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끊임없이 솟아 흐르는 생명수의 원천이라고 한다.』 『말세의 그리스도가 가져온 것은 생명이고 가져온 것은 장구하고 영원한 진리의 도이다. 이 진리가 바로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경로이며,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칭찬받게 되는 유일한 경로이다. 네가 만약 말세의 그리스도가 공급하는 생명의 도를 찾고 구하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예수의 칭찬을 받을 수 없고, 영원히 천국의 대문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너는 역사(歷史)의 괴뢰이고 역사의 죄수이기 때문이다. 규례에, 글귀에, 역사의 멍에에 제어된 사람은 영원히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영원히 영구한 생명의 도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얻은 것은 몇천 년 동안 지켜온 더러운 물일 뿐, 보좌 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수의 공급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시체이고 영원히 사탄의 노리개이며 영원히 지옥의 자식이다. 이러한데, 그래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말세의 그리스도가 가져오신 것은 생명이고 가져오신 것은 장구한 진리의 도입니다. 이 진리가 바로 오늘 전능하신 하나님이 발하신 음성이자 역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따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여야만 하나님께로부터 진리와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 구원받는 데에 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여전히 성경을 고수하면서 언제나 성경으로써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가늠하고 단지 성경의 범위 내에서만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령의 새 시대의 역사를 홀시하고 말세의 그리스도─전능하신 하나님(즉 재림하신 예수님)을 저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원받을 기회를 놓칠 것이고, 최종에 생명을 얻기는커녕 성경의 글귀에 망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 성경을 숭배하던 바리새인의 잘못을 다시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범위에서 나의 존재를 신앙하며, ‘나’와 ‘경’을 동등하게 보고, ‘경’이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경’이 없다고 한다. 그들은 나의 존재나 나의 행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매 구절 경문에는 아주 특별히 관심을 둔다. 심지어 더욱 많은 사람들은 경문의 예언이 없다면 내가 하고자 하는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그들은 경문을 너무나도 중요하게 보는데, 그들이 글귀를 너무 중요하게 본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성경의 장절로써 나의 매 마디 말을 가늠하고 성경의 장절로써 나를 정죄하기까지 한다. 그들이 찾고 구하는 것은 나와 합하는 도가 아니고 진리와 합하는 도가 아니라, 성경의 글귀와 서로 부합될 수 있는 도를 찾고 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무릇 성경과 맞지 않는 것은 모두 나의 역사가 아니라고 여기는데, 이 사람들은 모두 바리새인의 효자 효손들이 아닌가?』 오늘 우리가 이렇게 교통하는 것은 성경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정죄하는 것도 아니라 사람에게 성경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있게 함으로써 성경을 미신하지 않고 성경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규정하여 하나님을 성경 속에 제한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사람을 동반한 지 몇천 년 역사(歷史)가 되었고 또한 사람은 모두 그것을 하나님으로 삼아 대하였으며, 심지어 말세에 이르러 사람은 성경으로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매우 싫어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한가한 시간에 하나님은 성경의 내막과 그 기원을 하나하나 분명히 밝히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 마음 속에 있는 성경의 지위가 여전히 하나님을 대체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은 모두 성경의 글귀로써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정죄하고 가늠한다. 하나님이 성경의 실질, 구조와 그 속의 허점을 해석하는 것은 결코 성경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을 정죄하는 것도 아니라 거기에 적합하고 타당한 논법을 설명하고 성경의 본체를 복원하고 성경에 대한 사람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 모든 사람에게 성경에 대해 정확한 견해가 있게 하는 것이며, 더는 성경을 숭배하지 말고 더는 방향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성경을 미신하면서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라고 잘못 여기는 것, 심지어 성경의 실제 배경과 그 속의 허점에 감히 직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모두 성경에 대해 순수하고 올바른 인식이 있은 후에야 조금도 꺼림없이 그것을 방치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주려는 진리는 바로 어떠한 이론이나 사실도 하나님의 현실의 역사와 말씀을 대체할 수 없고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위치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만일 성경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영원히 하나님 앞에 올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오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마음속의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한다. 이러면 하나님의 만족에 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관념에서 나와 성경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고 구하며 하나님의 최신 역사를 따르고 하나님의 최신 인솔에 순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실행해야 하나님 뜻에 맞고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진리를 얻고 가장 현시적인 생명 공급을 얻을 수 있습니다. 江蘇省 謝恩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이루었다”라고 하실 때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대가로 전 인류를 구속하는 역사를 하시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 주님을 따르는 형제자매들은 다 말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믿고 나서 평안과 기쁨이 생겼다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정과 생활과 사업에서 힘든 일에 부딪혔을 때 주님께 기도하여 해결받으면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고, 더욱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병이 치유되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축복을 값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는데,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와 축복뿐일까요? 요즘 저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숨어 있을 때도 있지만 그런 사랑이 우리의 영적 생명에는 유익한 점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 널리 알려진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사실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아들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볼 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풀어 주신 아이이고 또한 아브라함이 100살에 얻은 아들이니 아브라함이 그 무엇보다 이삭을 사랑한 것은 틀림없었을 거야. 그런데 하나님께선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어. 하나님께선 이삭이 자란 후 번제로 바치게 하시면서 왜 이삭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뜻은 뭘까?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알아야 할까?’ 나중에 저는 영적 서적을 보고서야 곤혹이 풀렸습니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한 때부터,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정말로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던 그 전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마음을 보았다. 이전에 아브라함이 어리석었고 무지했으며 하나님을 오해했다 할지라도, 이때만큼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진짜였으며 진실했다. 아브라함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준 이삭을 ― 그의 아들을 ― 하나님께 돌려드리려고 하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서 그의 순종을 보았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한 것이었다.사람이 봤을 때, 하나님이 행하는 많은 일들이 이해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기이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지배하고자 할 때, 이 ‘지배’는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으며, 또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자, 하나님의 검증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때,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요구에 ― 이삭을 바치라는 것에 ―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즉 자신이 선택한 아브라함이란 사람에 대해 참으로 안심하였고, 그를 진정으로 인정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그 사람이 자신의 약속과 앞으로의 경륜을 맡아서 실행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된 인물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런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게 한 일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 경영 계획의 선도자로 택하셨기 때문에,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과 부탁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시련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말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고 할 때 즉, 아브라함이 진실로 순종하여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마음이 참되고 정직하다는 것을 보신 하나님은 흡족해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정말로 이삭의 목숨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고 소중히 여기셨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얻으셨을 때 시련은 끝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마음을 놓고 인정하신 후에야 그에게 더 큰 부탁을 맡겨 줄 수 있었고, 또 아브라함이 구하고 생각한 것보다 더 크나큰 축복을 베풀어 주실 수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라고 기록되어 있고, 그 책에는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준 일을 통해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이유 하나로 하나님은 그에게 이처럼 큰 복을 내렸다. 비록 표면적으로 볼 때 이 일은 아주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처럼 보이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를 귀히 여기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에게 진심을 보이는 자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보기에 이는 인류가 창조된 이래로 하나님께 드린 가장 진귀한 첫 번째 ‘제물’이었다. 이 ‘제물’은 하나님이 그토록 힘들게 기다렸던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제물을 처음 피조물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선물로 간주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에서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진심과 순종을 보셨을 때, 마음이 기뻤고 감동받았으며 또한 매우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현재 아브라함의 후손은 온 땅에 가득합니다. 이스라엘만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이 아니라 이슬람교 몇 십 개 나라들도 모두 그의 후손인데, 여기에는 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마다 그 속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과 고심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련하신 이 일에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와 바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택하시면 그 사람에게 부탁이 있으시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조건이 갖춰져 있는지를 확인하실 때 시련을 통해 그 사람의 진심과 순복을 검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 우리에게는 다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를 난처하게 하고 고생하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역사를 잘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에 대해 진심과 순복이 있어야 시련을 거쳐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또 모세가 광야에서40년 양을 방목한 후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이스라엘 사람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게 하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광야는 기후도 아주 나쁜 데다가 야수까지 출몰하고 게다가 광야에는 사람도 없는데 모세 혼자 동반자도 없이 40년 동안 양을 방목했으니, 매일 양 말고도 별과 달과 마주한 그 날들은 틀림없이 아주 고생스러웠을 거야.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는데 왜 모세를 광야에 있게 하셨을까? 그것도 40년이나 말이야.’ 그 책에는 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혼자 어떻게 광야에서 40년을 생존하였을까? 참된 믿음이 없다면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 … 하나님에 대한 이런 참된 인식이 있으면 그 믿음은 어떠냐? 크지 않으냐? (큽니다.) 하늘을 찌를 만큼 크다, 그렇지? 그러므로 모세가 광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였느냐? (모세에게 애굽 왕 바로를 찾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쓰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쓰기 위해 먼저 그의 믿음을 연단하였다. 보아라, 하나님은 말씀을 하지 않았고, 사역을 하지 않았으며, 진리를 공급하지 않았고, 설교도 하지 않았다. 또한 모세에게는 책과 서류들도 없었고,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며, 그저 혼자 광야에서 지내왔는데, 마지막에 하나님은 모세의 참된 믿음을 이루었다. 그럼 하나님은 왜 그 일을 했을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일을 맡기려고 하였고, 그를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크게 쓰려고 했고, 하나님은 하려고 하는 사역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를 단련시켰다. 무엇을 단련시켰느냐? (믿음입니다.) 모세의 믿음은 얻으려고 했던 것이지, 단련시킨 것이 아니다. 무엇을 단련시켰느냐? (모세의 의지와 의지력을 단련시켰습니다.) 그렇다, 의지력이다.』 이 말씀을 보고서야 저는 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모세가 광야에서 40년 양을 방목한 거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열악한 환경을 통해 모세의 믿음을 연단하고 또 그의 내면에 있는 열심과 좋은 마음과 혈기에 속하는 것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래야 그를 크게 사용할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 사람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의 그런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모세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이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고통스러운 환난을 겪어야 생기게 됩니다. 안일한 상황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앙망하는 게 쉽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참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다는 것을 다 압니다. 반대로 열악한 상황에 있을수록, 마음의 고통이 클수록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마음이 더 강해지고, 고통스러울수록 힘껏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며, 또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진실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40년 동안 광야에 있게 하신 것이 사람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으로 모세를 단련시켜 그에게 참된 믿음과 의지력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모세에게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게 하여 그러한 조건을 갖추게 한 뒤에야 하나님은 모세를 크게 써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중임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오면서 부딪힌 여러 가지 고난과 시험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의지력으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주신 부탁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도 증명되다시피, 오직 모세만이 그 중임을 감당할 수 있었고, 그 부탁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모세가 비록 연단의 고통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아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또 모세를 통해 율법과 계명을 반포하셨고, 또한 그를 120 살까지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매사마다 겉보기에는 이해하기 힘들고 때로는 우리로 고통받게 할 때도 있지만 그 뒤에는 다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온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저는 우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깊고 크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 해도 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실질이 사랑이기에 우리를 괴롭히거나 혹은 일부러 우리를 고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매사마다 다 하나님의 계획과 고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런 깨달음이 있었을 때, 저의 마음은 감동으로 차 넘쳤습니다. 저는 하나님에 대한 진심과 순복이 너무 적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느꼈고 아울러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으로 인해 저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짐을 느꼈고,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람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더욱더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멘! 이묘

왜 하나님의 재림에는 은밀히 강림하는 것과 공개적으로 나타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중화 대륙 즉 홍콩ㆍ타이완 동포들이 말하는 내륙에서 말씀이 육신 되었다.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땅에 올 때는 하늘 위ㆍ하늘 아래에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은밀히 재림한다는 참뜻이기 때문이다. 』

기도의 실행에 관하여

너희는 일상생활 속에서 기도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다. 사람은 모두 기도하는 이 일을 소홀히 하였다. 이전의 기도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대충대충 하여 속인 것이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마음을 완전히 하나님 앞에 바쳐 진실한 기도를 한 적이 없고, 다만 일이 있어야 하나님께 부르짖을 뿐이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너는 하나님께 진실한 기도를 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할 때가 있었느냐?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인식할 때가 있었느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며 기도를 해 본 적이 있느냐? 기도는 천천히 훈련하는 것이다. 평소에 집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교회에서 기도할 수가 없고, 평소에 소예배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대예배에서도 기도할 수가 없다. 평소에 하나님을 가까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기도할 때에 할 말도 없고, 설사 기도한다고 해도 입술뿐이지 진실한 기도가 아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기도일까? 바로 하나님께 마음속 말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더듬으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면, 하나님과 아주 가깝다고 느끼게 되고, 하나님이 바로 네 앞에 있다고 느끼게 되며, 하나님께 할 말이 있다고 느끼게 되고, 마음속이 아주 환하게 되며, 하나님이 매우 사랑스럽다고 느끼게 되고, 특별히 격려받게 되며, 형제자매들이 듣고는 누림이 있어 네가 하는 말이 곧 그의 마음속 말이고 그가 하려는 말이라고 느끼게 되고, 네가 하는 말이 곧 그가 하려는 말을 대신한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것이 진실한 기도이다. 네가 진실한 기도를 하고 나면 마음속에 평안을 얻게 되고 누림이 있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이 일어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의 있는 일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것은 너의 기도가 효과가 있음을 증명한다. 너는 이러한 기도를 한 적이 있느냐? 기도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네 속의 진실한 정형과 성령이 역사하는 데에 따라 한 걸음씩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기도를 훈련할 때에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 더듬기를 구하지 말고 마음속 말을 하나님께 고할 수 있기만을 구하여라. 너는 하나님 앞에 와서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는 전에 당신을 거역했습니다. 오늘에야 제가 정말 패괴되어 가증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시간을 헛되이 보냈지만, 지금부터는 당신을 위해 살고,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어 당신의 마음을 만족게 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영이 늘 저에게 역사하시고, 늘 빛 비춰 주시고 깨우쳐 주셔서 당신 앞에서 굳세고 드높은 간증을 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탄이 우리에게서 당신의 영광을 보고, 당신의 간증을 보고, 당신이 이긴 증거를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면, 너의 마음이 완전히 해방받을 것이다. 네가 이런 기도를 하고 나면 너의 마음은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다. 네가 항상 이렇게 기도할 수 있으면, 성령은 반드시 너에게 역사할 것이다. 언제나 이렇게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서 심지(心志)를 세우면, 언젠가 너의 심지가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 있고, 너의 마음과 전인(全人)까지도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으며, 나중에 너는 하나님께 온전케 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는 너희에게 있어 정말 너무나 중요하다. 네가 기도하여 성령 역사를 얻으면, 너의 마음은 하나님께 감동받을 것이고 네 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이 생길 것이다. 네가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고, 마음을 털어놓고 하나님과 교통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할 수가 없다. 만약 네가 기도로 마음속 말을 다 한 후에도 하나님의 영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네가 속으로 격려받지 못하였다면, 너의 마음이 간절하지 않고 너의 말이 진실하지 않으며 아직도 불순물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네가 기도한 후에 누림을 얻게 되었다면, 너의 기도는 하나님께 열납된 것이고, 하나님의 영도 너에게 역사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기도가 부족해서는 안 된다. 네가 정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의의 있고 가치 있는 일로 본다면, 기도를 포기할 수 있겠느냐? 누구든지 하나님과의 교통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기도가 부족하면 육체 속에서 살게 되고, 사탄의 결박 속에서 살게 되며, 진실한 기도가 없으면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된다.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날마다 진실한 기도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효과가 있어야 한다. 잠을 적게 자고 적게 누리면서 새벽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고 싶지 않으냐? 이렇게 청결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먹고 마시면 더욱 하나님께 열납될 것이다. 네가 아침마다 이렇게 실행하고, 날마다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을 하여 하나님과 교통하고 사귀면,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은 반드시 많아질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더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 저는 저의 본분을 하기 원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우리 이 무리 사람들에게서 간증을 누리시도록 당신만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바치겠습니다.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우리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만족게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당신을 추구 목표로 삼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너에게 이런 부담이 있게 될 때면, 하나님은 꼭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 너는 자신만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런 기도는 가장 진실하다. 너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냐? 이전에 너희는 기도할 줄 몰랐고, 게다가 기도하는 이 일을 소홀히 하였다. 지금은 기도하는 것을 잘 훈련해야 한다. 네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이 생기지 않는다면, 너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겠느냐?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는 마음으로 당신을 진실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하지만 힘이 없습니다. 이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께서 저의 영적 눈을 열어 주시기를 원하고, 당신의 영이 제 마음을 감동시켜 당신 앞에서 모든 소극적인 정형에서 벗어나 어떤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의 통제도 받지 않게 해 주시고, 당신 앞에서 제 마음을 완전히 털어놓게 하셔서 저의 전인(全人)이 완전히 당신 앞에 봉헌되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당신께서 저를 어떻게 시련하셔도 좋습니다. 지금 저는 앞날이 있는지 없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죽음의 통제도 받지 않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생의 길을 찾기 원합니다. 만사만물이 다 당신의 수중에 있고, 저의 운명도 당신의 수중에 있으며, 저의 일생은 더욱 당신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습니다. 지금 저는 당신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며, 당신이 저로 사랑하게 하시든 아니하시든, 사탄이 어떻게 방해하든, 저는 꼭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이런 일에 맞닥뜨리면 이렇게 기도하여라. 네가 날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힘이 점차 일어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진실한 기도에 진입하는가? 기도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안정된 마음과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진실하게 교통하고 기도하라는 것이지, 듣기 좋은 말로 하나님을 속이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루려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너를 많이 깨우치고 빛 비추어 달라고 기도하여라. 하나님께 세운 심지와 자신의 실제 정형과 어려움을 하나님 앞에 가져와 기도하여라. 기도는 형식을 갖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께 찾고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너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 앞에 안정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너에게 배치해 준 환경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증오하고 배반할 수 있도록, 너의 마음을 보호해 달라고 구하여 하나님과 정상 관계가 있게 하고,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기도의 의의는 무엇인가?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협력하는 경로이고, 사람이 하나님께 부르짖는 방식이며, 사람이 하나님 영의 감동을 받는 과정이다. 기도가 없는 사람은 영이 없는 죽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감동을 받는 기관이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기도가 없으면 정상적인 영 생활을 할 수 없고, 더욱이 성령의 역사를 따를 수도 없다. 또한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므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기도가 많을수록, 즉 하나님의 감동을 많이 받을수록 그런 사람은 더욱 심지가 있게 되고, 더욱 하나님의 가장 새로운 깨우침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만이 성령께 빨리 온전케 될 수 있다. 기도하여 도달하려는 효과는 무엇인가? 사람이 기도할 수 있고 기도의 의의를 깨달을 수도 있지만, 기도에 효과가 있게 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기도는 형식을 따르고 과정을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도는 말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고,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도는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눔으로 하나님의 감동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기도에 좋은 효과가 있으려면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읽는 것을 토대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도해야만 깨우침과 빛 비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이 제기한 요구에 대해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요구에 도달하기 원하고,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을 증오할 수 있으며, 이 기초에서 인식을 더하여 하나님이 천명한 진리에 흐리멍덩하지 않고 인식이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기도한 후에 심지와 믿음이 있고 인식과 실행의 길이 있어야 진실한 기도라고 한다. 이런 기도라야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누리고, 하나님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찾고 구할 수 있고, 마음이 하나님 앞에 안정될 수 있다면, 이런 기도는 이미 하나님과 진실하게 교통하는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 1. 맹목적으로 마음대로 몇 마디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자신의 마음속에 부담이 있어야 한다. 즉, 반드시 목표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2.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의 기초에서 기도해야 한다. 3. 기도는 늘 하던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낡아빠진 것들을 언급해서는 안 된다. 전적으로 성령의 현실적인 말씀으로 말하기를 훈련해야만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 4. 단체 기도는 반드시 하나의 중심을 둘러싸야 하고, 반드시 성령의 현재 사역이어야 한다. 5. 모든 사람은 다 대표 기도를 할 줄 알아야 하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대표 기도할 부분을 찾아야 하며, 또한 이 기초에서 부담을 가지고 항상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표현이다. 개인의 기도 생활은 기도의 의의와 기도의 상식을 깨달은 기초 위에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항상 자기의 결함 때문에 간구하며 기도하고, 생명 성정이 변화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한 기초에서 기도하여라. 사람마다 자기의 기도 생활을 확립해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수 있기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할 수 있기를 찾고 구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자기의 실제 상황을 하나님 앞에 내놓으며 실사구시하고, 방식을 중요시하지 말라. 가장 중요한 점은 진실한 인식이 있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실제 체험이 있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 생활에 진입하기를 추구하는 사람이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묵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는 등등, 목적 있는 이런 영적 교통의 사역은 모두 정상적인 영 생활에 진입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태가 점점 좋아지게 하고, 생명이 점점 자라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어쨌든,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든, 묵도하거나 큰 소리로 외치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하나님이 네게 이루려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깨닫기 위한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요구한 기준에 도달하여 너의 생명이 한층 더 자라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가장 낮은 기준은 하나님께 마음을 털어놓는 것이다. 사람이 진심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참된 말을 한다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역사하기 원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사람의 교활한 마음이 아니라 단순하고 진솔한 마음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참된 말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고 사람에게 역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참된 말을 하는 것이고, 자신의 결함이나 패역 성정을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털어놓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너의 기도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에게 얼굴을 가릴 것이다. 기도의 제일 낮은 기준은 반드시 너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안정되고,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마 이 단계에서는 너에게 더 새롭고 더 높은 깨달음이 없을 수 있겠지만, 너는 반드시 기도로 현 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 이것은 최소한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 한 가지 조목에도 이르지 못한다면, 이는 너의 영 생활이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였음을 증명한다. 그로 인해, 너는 네게 원래 있던 이상(異象)을 지킬 수 없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며, 심지도 그에 따라 사라진다. 영 생활에 진입한 표징은 너의 기도가 정상 궤도에 진입하였는지의 여부로 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이 실제에 진입해야 하고, 다 의식적인 훈련 사역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소극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성령의 감동을 찾고 구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 진실로 찾고 구하는 사람이다. 너는 처음 기도할 때에 엉뚱한 생각으로 첫술에 배불리려고 하지 말라. 너는 사치한 요구가 있어서는 안 된다. 입을 열자마자 성령께 감동받기를 바라고, 입을 열자마자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며, 입을 열자마자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그가 사람의 기도를 온전케 하는 것에는 모두 때가 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너의 믿음을 시련하여 네가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는지를 본다. 너는 기도할 때에 믿음이 있어야 하고, 의지력이 있어야 하고, 심지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훈련하기 시작할 때에 성령의 감동을 더듬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너는 변함없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성령의 감동 더듬기를 중요시하고, 찾고 구하며 모색하기를 중요시해야 한다. 어떤 때에는 네가 실행하는 길이 틀리고, 어떤 때에는 자신의 속셈과 관념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영이 너를 감동시키지 않으며, 또 어떤 때에는 하나님이 네가 충성하는지를 본다. 어쨌든, 훈련할 때에 너는 대가를 많이 치르거라. 네가 자신이 실행하는 길에 오차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다른 방식으로 바꾸어 기도해도 된다. 네가 진심으로 찾고 구하고 얻기를 간절히 사모하기만 하면, 성령은 꼭 너를 이 실제로 이끌어 들어갈 것이다. 어떤 때에는 네가 진심으로 기도하는데도 별로 감동을 더듬지 못하게 될 텐데, 그때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감찰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기도하는 데에 의지력이 있어야 한다. 진솔한 사람이 되려면 궤사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 수시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면, 너의 성정은 그에 따라 조금씩 변화된다. 진정한 영 생활은 기도하는 생활이고, 성령께 감동받는 생활이다. 성령께 감동받는 과정이 바로 사람의 성정이 변화되는 과정이다. 성령의 감동이 없는 생활은 영 생활이 아니라 여전히 종교 의식에 속한다. 자주 성령의 감동이 있고 성령의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영 생활에 진입한 사람이다. 사람의 성정은 기도에 따라 부단히 변화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될수록 적극적인 성분과 순복의 성분이 더 많아지고, 사람의 마음도 점차 정결함을 받게 되며, 성정도 그에 따라 점차 변화된다. 이것은 진실한 기도로 가져온 효과이다.

목사와 장로를 따르면 정말 구원받을 수 있을까

많은 크리스천들은 목사와 장로들이 성경을 숙독하고 신학 이론들도 풍부하여, 목사와 장로를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거라 믿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이 맞을까요? 자신의 관점이 하나님의 뜻에 맞을지 찾고 구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목사나 장로는 정말 주님이 세웠는가

많은 분들이 목사나 장로는 모두 성령이 세웠기에 신도들은 마땅히 그들의 말에 따르고 순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관점은 과연 진리에 부합될까요? 주님 말씀의 근거가 있을까요?

진정으로 들림받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성경 참고: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마 25:6)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계 19:9) 관련된 하나님 말씀: 『‘들림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상상한 대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옮긴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크게 틀린 것이다. ‘들림받는다’는 것은 내가 예정한 후에 또 택하는 이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예정하고 또 택한 모든 사람을 겨냥해 말한 것이다…… 이 하나가 사람의 관념에 가장 부합되지 않는다. 무릇 나의 이후에 집에서 분깃이 있는 자는 모두 내 앞에 들림받은 자이다. 이것은 아주 확실한 일이고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이니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이것은 사탄에 대한 반격이다. 무릇 내가 예정한 자라면 내 앞에 들림받는다.』 <제104편 말씀>에서 발췌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미 형성되었는데, 전부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 굳게 믿고 흔들리지 않고 영정(靈程)에 오른다. 유일한 참 하나님이 이미 말씀이 육신 되고 우주의 통치자가 만유를 주관한다고 확신하는 것은 성령의 입증이고 철 같은 증거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 오늘 당신께서 뭇 교회―빌라델비아 교회를 완성하셨고, 당신께서 6천년의 경영 계획을 이미 이루셨나이다. 뭇 성도는 당신 앞에 겸손히 순복할 수 있으며 영 안에서 서로 통하고 사랑 안에서 서로 따르며 원천에 연결되나이다. 생명수는 쉼없이 솟아흘러 교회의 흙탕물을 깨끗이 제거하여 재차 당신의 성전을 정결케 하나이다. 실제의 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말씀 속에서 행하며 자기의 기능과 본분을 알고 최대한 모두 교회를 위해 화비하고 있나이다. 항상 당신 앞에 안정하고 성령 사역에 주의를 기울여 당신의 뜻이 우리 몸에서 가로막음을 받지 않게 하리이다. 성도 간에 서로 사랑이 있고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나이다. 늘 영 안에서 행할 수 있고 성령이 빛 비춰 주고 깨우쳐 주어 진리를 깨달으면 즉시 실행하고 새 빛을 따르고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르나이다. ………… 적극적으로, 주동적으로 하나님과 협력하고 협력과 섬김이 하나로 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고 하루속히 거룩한 영체로 되어 사탄을 짓밟고 사탄의 운명을 끝마친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 앞에 들림받고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나타난다.』 <제2편 말씀>에서 발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경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부한 은혜를 누리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섬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보살핌과 보호 아래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자주 연약해지기도 하고 또 자주 강건해지기도 하면서 모든 행위는 다 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또 천부의 뜻대로 행하는 길을 이미 걷고 있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었다. 주 예수의 재림을 간절히 바라며, 주 예수의 영광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땅에서의 생활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모든 것이 <계시록>에 예언한 것처럼 ‘주님이 오실 때 재난을 가져오고 상선벌악(賞善罰惡)하며, 그를 따르는, 그의 돌아옴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공중에 끌어올려 주님과 만나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은 감개무량하였고, 자신이 말세에 태어나 운 좋게 주님의 강림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다행스러워하였다. 비록 박해는 당하지만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바꿔 올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큰 복인가! 이 모든 간절한 바람과 주님이 베풀어 준 은혜는 우리로 항상 깨어서 기도하고 다그쳐 예배하게 하였다. 혹시 내년에, 혹시 내일에, 또 혹시 더욱 빠른, 사람이 예상치도 못한 때에 주님이 홀연히 강림하여 그를 절박하게 기다리는 한 무리 사람들 가운데 나타날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다투며 누구도 뒤떨어지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주님의 나타남을 제일 먼저 보는 자가 되기 위해서였고, 주님께 들림받는 자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해서였다 …………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고 우리에게 나타나지도 않았지만, 그의 사역은 지금까지 멈춘 적이 없다. 그는 온 땅을 감찰하고 만유를 주관하며 사람의 일언일행, 일거일동을 친히 보고 있다. 그는 계획 있게, 절차 있게 그의 경영을 진행하고 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하고, 천지가 진동하는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발걸음은 한 걸음씩 인류에게 다가와 번개처럼 신속히 우주 가운데 그의 심판대를 펼쳤고, 그의 보좌도 곧이어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 그것은 얼마나 위엄 있는 장면인가! 그것은 얼마나 장엄하고 엄숙한 광경인가! 그 영은 마치 비둘기처럼 또 포효하는 사자처럼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 그는 지혜이고, 그는 공의이고 위엄이며, 권병(역주: 권세)을 지니고 자비와 긍휼을 만재(滿載)하고 조용히 우리 가운데 강림하였다. 그가 오신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오신 것을 영접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더욱이 그가 하려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의 생활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소의 마음, 평소의 세월이다. 하나님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장 작은 따르는 자로서, 평범한 신자로서 우리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다. 그에게는 자신의 추구와 목표가 있고, 더욱이 보통 사람에게 없는 신성도 있다. 아무도 그의 신성의 존재를 주의하지 못하였고, 또 아무도 그의 실질이 사람과 구별이 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 …… 하지만 사람들 가운데서 은밀히 거하고 있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 사람이 우리를 구원하는 새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설명하거나 온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지도 않고 다만 그의 계획과 절차에 따라 그가 하려는 사역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발하는 음성과 말씀은 갈수록 빈번해졌는데, 위로, 권면, 일깨움, 경고에서 책망, 징계에 이르기까지, 어조가 부드럽고 자상하던 데에서 언사가 격렬하고 위엄 있는 데까지 모두 사람으로 한껏 긍휼을 받게 하고 또 매우 두려워하게 하였다. 그의 말씀은 모두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비밀을 적중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그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영을 찔러 아프게 하였고, 우리를 몸 둘 바 모르게 하고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게 하였다. …… 부지중에 우리는 그 작디작은 사람에게 이끌려 하나님의 하나 또 하나의 역사 절차에 들어가 수많은 시련과 수많은 채찍질을 겪었으며 죽음의 시험도 겪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롭고 위엄 있는 성품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도 누리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큰 능력과 지혜를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절실한 마음도 보게 되었다. 그 평범한 사람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으며, 사람의 본성 실질도 인식하게 되었고, 구원받고 온전케 되는 길도 보게 되었다. 그의 말씀은 우리로 죽게 하였고 또 부활하게 하였으며, 그의 말씀은 우리로 위로받게 하였고 또 갑절로 가책받고 갑절로 빚졌다고 느끼게 하였으며, 그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었고 우리를 매우 고통스럽게도 하였다. 때로 우리는 그의 손의 어린 양과 같아서 그에게 목숨을 맡겼으며, 때로 우리는 그의 눈동자와 같아서 그의 사랑을 누렸으며, 때로 우리는 그의 원수와 같아서 그의 눈에서 그의 노기에 의해 재가 되었다. 우리는 그가 구원하는 인류이고, 우리는 그의 눈에 구더기이며, 우리는 또 그가 밤낮 생각하며 되찾으려는 잃어버린 양이다. 그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며, 우리를 혐오하며, 우리를 끌어올리며, 우리를 위로하고 권면하며, 우리를 인도하며, 우리에게 깨우쳐 주며, 그는 또 우리를 책벌하고 징계하며, 심지어 우리를 저주하기도 하였다. 그는 우리를 밤낮으로 걱정하고 밤낮으로 보살피고 보호하면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우리를 위하여 모든 심혈과 대가를 기울였다. 우리는 그 작고 평범한 육신이 하신 말씀 중에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누렸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귀숙도 보았다. …… 하나님은 계속 그의 음성을 발하고 있었으며, 여러 가지 방식과 여러 가지 각도로 우리가 해야 할 바를 훈계해 주는 동시에 그의 마음의 소리도 표현하고 있었다. 그의 말씀은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 우리에게 행할 길을 보여 주었고, 우리로 무엇이 진리인지도 깨닫게 하였다. 우리는 그의 말씀에 끌리기 시작하였고, 그의 말씀하는 어조와 방식에 주의하기 시작하였으며, 눈에 띄지 않는 그 사람의 마음의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고, 우리를 위하여 침식도 편하게 하지 못했으며, 그는 우리 때문에 울고, 우리 때문에 탄식하며, 우리 때문에 병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우리의 귀숙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는 굴욕을 참고 있었지만, 우리의 무감각, 우리의 패역은 그의 마음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피를 흘리게 하였다. 이러한 소시소유는 보통 사람에게 없는 것이고, 또한 패괴된 어떠한 사람도 갖추지 못하고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일반인에게 없는 관용과 인내가 있으며, 그의 사랑은 그 어떤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분 외에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우리의 본성과 실질에 대해 손금 보듯이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으며, 인류의 패역과 인류의 패괴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하늘의 하나님을 대표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이렇게 역사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분 외에는 하나님의 권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존엄을 갖춘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그에게서 남김없이 발표되었다. 그분 외에는 우리에게 길을 가리켜 주고 광명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분 외에는 하나님이 창세로부터 오늘날까지 아직 공개하지 않은 심오한 비밀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분 외에는 우리를 구원하여 사탄의 매임에서 벗어나고 패괴 성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의 부탁을 발표하고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는 새 시대와 새 기원을 개척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역사를 가져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으며, 막연함 중에서 지내던 우리의 삶을 끝냈고, 우리(원문: 我們全人)로 하여금 구원받는 길을 철저히 보게 하였다. 그는 우리(원문: 我們全人)를 정복하고 우리의 마음을 얻었다. 그 시각부터, 우리의 마음은 지각이 있게 되었고, 우리의 영도 소생한 듯하였다. ‘이 평범한 사람, 이 작디작은 사람, 우리 가운데 생활하고 계시면서 우리에게 오랫동안 버림받았던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늘 그리워하고 밤낮으로 바라던 주 예수가 아닌가? 그분이다! 바로 그분이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다! 그분이 바로 진리ㆍ길ㆍ생명이다!’ 그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였고, 우리로 광명을 보게 하였으며, 우리의 마음이 더는 떠돌아다니지 않게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하나님 보좌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우리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얼굴을 보게 되었고 앞길을 보게 되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이미 완전히 그에게 정복되어 더 이상 그의 신분을 의심하지 않았고, 더 이상 그의 역사와 말씀을 저촉하지 않았고, 온 몸과 마음이 그의 앞에 엎드러졌으며, 오로지 이 한평생 하나님의 발자취를 따르기만을 원하였고, 그에 의해 온전케 되어 그의 은총에 보답하고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에 보답하며 그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하고 그의 역사에 협력하며 최선을 다해 그의 부탁을 완성하기만을 원하였다. ………… 우리는 사탄의 패괴 성정을 가지고 있는 이런 한 무리 평범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만세 전에 예정해 놓은 사람들이며, 하나님이 거름 더미에서 끌어올린 궁핍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정죄하였지만 오히려 하나님께 정복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얻었고 영생의 도를 얻었다. 하늘 끝이든 바다 끝이든, 핍박이든 환난이든,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떠날 수 없다. 이는 그가 우리의 조물주이고 우리의 유일한 구속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중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았다>에서 발췌

도대체 어떻게 성경을 대하고 사용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성경의 고유한 가치는 무엇인가?

『네가 오늘날의 새 길을 가려면 성경에서 나와야 하고, 성경에 기록된 예언서나 역사서의 범위에서도 나와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새로운 길을 잘 갈 수 있고, 새로운 경지와 새로운 사역에도 진입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