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미혹될까 찾고 구하는 것이 두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019년 04월 23일

안녕하세요! 최근 몇 년간 목사님과 장로님이 줄곧 제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말세의 마지막 시기입니다. 재난이 점점 커지고 있고 주님의 재림에 관한 예언이 대부분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곧 돌아오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여러 이단과 거짓 진리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도드리며 주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 주님께서 돌아오셨다고 전하거든 우리는 그들의 말을 듣지도, 보지도, 받아들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에게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께 내쳐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곤혹스러워하는 형제자매님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미혹될까 두려워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말씀을 모두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며 접하지 않는다면 이건 주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는 있을까요?” 현혹될까 두려워 외부와 단절하는 방식이 옳은 태도인가요? 이 문제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러분의 의견을 교제해 주세요.

광명 형제

광명 형제님!

안녕하세요! 형제님의 메일을 받고 형제님의 질문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건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는지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이는 주님 안에 있는 많은 형제자매님이 같이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우리 함께 의견을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대담하고, 두려움은 사탄에서 온 것이다

말세 주님께서는 반드시 재림하십니다. 그와 함께 여러 이단과 거짓 말씀이 나온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중요한 시기에 우리가 두렵다고 해서 주님께서 돌아오셨다는 것과 관련된 모든 말씀을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접하지 않는다면 물론 거짓 말씀에 미혹될 일은 없겠지만 참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실천은 ‘안전’해 보이지만 사실 여기에는 사탄의 계략이 숨어 있습니다! 사탄이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발자취를 좇아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우리에게 황당한 이론이나 생각을 주입해서 우리를 미혹하고 구속하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소극적인 태도로 누군가 예수님께서 이미 돌아오셨다고 증거해도 이를 구하고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일에 관해 우리가 이단과 거짓 말씀을 방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진리를 알아보는 일에 소홀히 한다면 이건 소탐대실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아무리 이단과 거짓 말씀을 방비하더라도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림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미련한 처녀가 되어 결국 하나님께 내쳐지고 도태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세상만사가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을 겁약하게 말며 이 땅에서 들리는 풍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예레미야 51:46) 그리고 디모데후서 1장 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강인한 마음이고 두려움의 근원은 사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가 있으며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그런데 미혹될까 두려워하고 걱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생각이 있고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단이나 거짓 말씀에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어리석고 생각이 없는 사람들만 이단과 거짓 말씀에 미혹됩니다.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복음을 알아보고 구할 때 우리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을 앙망하며 진리를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분명 우리를 이끌어 주시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고 거짓 말씀에 미혹되지 않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목사나 장로가 우리에게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이야기를 모두 듣지 말고 보지 말고 접하지도 말라고 한 실천 방식은 결코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참 진리를 알아보려는 우리의 앞길을 막고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기회를 빼앗아 갈 뿐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똑똑히 봐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알아보고 구해야 참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서 10:17) 따라서 믿음은 반드시 들음에서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들음을 통해야만 그 말씀이 참 진리인지, 하나님의 현현 사역이 맞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현현 사역 하셨을 때를 돌이켜보면 당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비방하고 정죄하며 예수님의 사역이 참 말씀이라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을 미혹해 구하거나 알아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분별력이 없었던 유대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바리새인의 말을 따랐고 예수님의 설교를 듣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을 따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 마태, 마가, 요한 등 제자들은 바리새인이 퍼뜨리는 소문을 믿지 않았으며 미혹될까 두려운 마음에 주님의 복음을 거부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모하고 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곳이면 예수님을 따라가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모하고 구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서 권능이 있음을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분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메시야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 말씀을 들으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계시록 여러 곳에 예언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계시록 2, 3장)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마태복음 25:6) 예수님은 말세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음성을 발하시고 사람을 통해 ‘음성’을 내심으로써 우리에게 주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 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일에 있어서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주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전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문을 두드려 주시는 것이니 우리는 슬기로운 처녀가 되어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구하고 알아보며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진리가 있는지, 성령의 역사가 있는지 살펴야만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참 진리와 거짓 진리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이 핵심이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때 자발적으로 구해야 하며 소극적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남았습니다. 바로 반드시 참 진리와 거짓 진리를 분별하는 원칙을 파악해야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 진리와 거짓 진리를 분별하는 원칙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역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다> 여기에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참 진리를 구하는 데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그 말씀에 성령 역사가 있는지, 그 말씀에 진리가 있는지, 누구를 증거하였는지, 너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참 진리와 거짓 진리를 분별하려면 몇 가지 상식이 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상식은 성령의 역사가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본질은 사실 하나님의 영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믿는 이유도 그 육신이 하나님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즉, 그렇게 믿는 것은 역시 영을 믿는 것이다. 영과 육신이 서로 구별되긴 하지만, 그 육신은 영에서 비롯된 것이고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믿는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고유한 본질이다. 그러므로 참 진리를 구별하려면 먼저 성령의 역사가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다음 그 말씀에 진리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진리란 정상적인 인성이 지닌 생명 성품이다. 즉, 하나님이 태초에 사람을 지을 때 사람에게 요구한 것으로, 모든 정상적인 인성(이성, 식견, 지혜, 사람됨의 상식)을 말한다. 다시 말해, 그 말씀을 통해 사람이 정상적인 인성 생활로 들어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가 말씀한 진리가 정상적인 인성의 실제에 따라 요구한 것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또한 그 진리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지, 가장 시기적절한 것인지도 살펴봐야 한다. 진리가 있다면, 사람은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체험을 할 수 있으며 갈수록 정상이 된다. 또한 사람의 인성과 이성은 갈수록 온전해지고, 사람의 육체 생활과 영적 생활이 갈수록 질서를 갖추게 되며, 사람의 희로애락이 갈수록 정상이 된다. 이것들이 두 번째로 살펴봐야 할 내용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봐야 할 것은 사람이 갈수록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는지, 그리고 그런 사역과 진리를 체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올 수 있는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갈수록 가까워지는지 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참 진리의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 말씀이 초자연적이 아닌 현실적인 것인지,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이 몇 가지를 갖춘다면 그 말씀이 참 진리인지 확신할 수 있다.』, 『성령의 사역이라면 사람이 갈수록 정상이 되고, 또한 인성이 갈수록 정상이 되며, 사탄에 의해 타락한 사람의 성품과 사람의 본질에 대해 갈수록 더 잘 알게 되며, 갈수록 더 진리를 사모하게 된다. 다시 말해, 사람의 생명은 갈수록 더 성장하고, 사람의 타락 성품은 갈수록 더 변화된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는 본래의 뜻이다. 그 말씀이 사람의 본질적인 것들을 드러낼 수 없고, 사람의 성품을 변화시킬 수도 없으며, 더욱이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올 수 없다면, 그리고 하나님을 참되게 알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갈수록 더 인성이 나빠지게 하고 이성이 비정상이 되게 한다면, 그것은 참 진리가 아니라 악령의 역사거나 옛 말씀일 것이다. 어쨌든 성령의 현실 역사는 아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참 진리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고 그것이 바로 참 진리와 거짓 진리를 분별하는 중요한 기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참 진리에는 하나님 자신의 역사가 있으니 당연히 성령의 수호를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러 오셨을 때 율법시대를 끝내고 은혜시대를 여시며 회개의 말씀을 가져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와 진심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고 주님께서 사람에게 베풀어 주신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죄를 저지른 사람이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드리면 그의 죄는 사함 받을 수 있고 마음은 평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어떠한 어려움이나 문제에 직면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천으로 옮기면 마음의 해방과 자유를 느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마음속에 책망으로 가득 차 주님께 죄스러운 기분이 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사역을 계속 체험하면서 주님을 향한 사람들의 믿음과 사랑은 점점 커집니다. 주님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로마 정부와 유대교의 정죄와 핍박을 받았음에도 예수님의 복음은 유대인의 지역에서 활기차게 퍼져 나갔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현현을 갈망한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의 앞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2천년이 흘렀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고 많은 국가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 낸 성과입니다. 이와 반대로 거짓 진리는 성령께서 이끌어 주시거나 지켜 주지 않습니다. 이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이나 사랑이 없습니다. 게다가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열정적으로 보이는 사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열정이 사라지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반드시 망하고 하나님에게서 난 것은 반드시 흥한다’ 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 역사의 유무를 통해 어떤 것이 참 진리인지 분별해 낼 수 있습니다.

또한, 참 말씀에는 진리와 생명의 선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4:6)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진리를 선포하실 수 있으며 우리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시고 우리가 현실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실행의 길을 가리켜 주며 우리의 모든 문제와 혼란, 그리고 어려운 점을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 율법시대 말기, 사람들이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게 되고 속죄제를 지낼 수 있는 충분한 속죄 제물이 없어 율법으로 정죄당하고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 사람의 필요에 따라 인류를 구속하시는 사역을 펼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진리를 선포하시고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고 포용하고 인내하며 원수를 사랑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심령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고 이들은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외식하며 남을 속이고 진리를 증오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미워하고 정죄하는 대상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요구 사항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으며 진심과 정직으로 주님을 경배하고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정직한 사람이 되는 등과 같은 요구 사항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과 요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과 사람을 대하는 방법 등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실천하면 우리의 어려움과 문제 및 혼란이 모두 해결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깨달을수록 인성은 점점 정상적으로 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가까워집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서 이뤄 낸 성과입니다. 참 말씀에는 진리와 생명의 선포가 있으며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수요를 공급해 줄 수 있고 새로운 실천의 길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사람에게 진리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새로운 실천의 길도 가리켜 주지 못한다면 단지 과거 하나님께서 하셨던 사역과 말씀을 반복하거나 그럴듯한 도리를 깨우치게 하며, 예전의 규칙을 고수하는 것은 참 진리가 아니고 옛 진리 혹은 거짓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탄 악령이 하나님의 과거 사역을 모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참 진리를 판단하는 세 번째 원칙은 바로 그 말씀이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게 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사역하실 때 반드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에 관한 진실한 인식을 갖게 됩니다. 율법시대처럼 말입니다. 당시 하나님께서 율법과 계명을 반포하시고 사람들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제사장이건 일반 백성이건 율법과 계명을 따르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동하면 하나님의 축복과 칭찬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만약 제사장이 율법과 계명을 따르지 않으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그들을 태워 죽였습니다. 일반 백성 중 누구든 율법과 계명을 어기면 다른 사람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바로 영이시며 어디에나 계시고 하나님께서 전 우주를 지켜보시고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품은 주로 위엄, 진노, 저주, 불사름으로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은혜시대 하나님께서는 육신으로 땅에 오셔서 인류를 구속하는 한 단계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 주셨으며 사람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포용과 인내, 원수를 사랑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몸소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위엄, 저주, 불사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긍휼도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영으로 사역을 하실 수 있으며 육신으로 오시어 스스로 낮추시고 사람이 되실 수도 있고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실 수도 있으며, 사람에게 사랑과 포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사역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가져다주었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낮추심과 사랑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겪을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람의 보잘것없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공의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성품에 관한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외하며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진리를 살아내기를 갈망하고 하나님과 한마음 한뜻인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참 진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더 많은 인식을 가져다주고 하나님의 성품을 한층 더 이해하게 해주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갖게 해 줍니다. 그리고 거짓 진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진실하고 실제적인 인식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긍정적인 성과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유발할 수도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가 바로 참 진리와 거짓 진리를 분별해 낼 수 있는 원칙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7) 우리가 진심으로 구하고 주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먼저 알아보고 앞서 말한 세 가지 원칙에 따라 가늠하고 분별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우리에게 빛 비춤을 주시어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우리가 거짓 진리에 미혹되는 것이 두려워 무조건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며 접하지 않는 태도로 문을 굳게 잠그면 이런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태도로는 영원히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광명 형제님, 제 답변이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네요. 혹시 다른 질문이 있다면 언제든 함께 이야기 나눠요!

사랑의 쉼터

분별과 비판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라고는 하셨지만 분별할 줄은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셨습니다. 분별과 비판은 자신의 판단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별과 비판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실행해야만이 진리에 부합되고 예수님의 뜻에 부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번 성육신은 무엇 때문에 여성입니까?

하나님 말씀 답: 『하나님이 하는 매 단계 사역은 다 실제적 의의가 있다. 당시에 예수가 올 때는 남성이었고, 이번에 올 때는 여성이다. 여기로부터 너는 하나님이 남자를 만들고 여자를 만든 것은 모두 그의 사역을 위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께는 성별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영이 와서 마음대로 하나의 육신을 입을 수 있는데, 이 육신은 그를 대표할 수 있다. 성별이 남자든 여자든 그가 말씀으로 된 육신이기만 하면, 하나님을 대표할 수 있다. 가령 예수가 와서 여성의 신분으로 나타난다면, 다시 말해서 당시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여자 아기이고 남자 아기가 아니라 해도, 그 단계의 사역을 여전히 완성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현재 이 단계의 사역을 남성으로 바꾸어서 해야 하는데 역시 마찬가지로 사역을 완성한다. 어느 단계에 한 것이든 다 의의가 있으며, 두 단계 사역은 중복되지 않지만 모순되지도 않는다. 당시에 예수가 역사할 때 독생자라 하였는데, ‘자’라 하면 남성이다. 이 단계에는 무엇 때문에 독생자라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역의 필요에 따라 예수와 다른 성별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성별의 구분이 없다.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며, 그가 사역을 하는 데는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고 아주 자유롭다. 하지만 어느 단계든지 다 실제 의의가 있다.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된 것은 두 차례인데, 말할 것 없이 말세에는 최후 한차례이다. 그는 와서 그의 모든 행사를 나타낸다. 가령 이 단계에서 도성육신으로 친히 역사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목도하게 하지 않는다면, 사람 관념에서 사람은 하나님이 다만 남성이지 여성이 아니라고 영원히 여긴다. 이 이전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남성일 수밖에 없고 여성을 하나님이라고 칭할 수 없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남자를 여자의 권세로 삼았고, 여자가 권세를 담당해서는 안 되고 남자만이 담당할 수 있다고 여겼으며, 또한 남자를 여자의 머리라 하였고, 여자는 남자에게 순복해야 하고 남자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전에 남자를 여자의 머리라고 한 것은 뱀의 유혹을 거친 아담과 하와를 놓고 말한 것이지, 여호와가 시초에 만든 남자와 여자를 놓고 말한 것이 아니다. 물론, 여자로서는 반드시 자기의 남편에게 순복해야 하고 자기의 남편을 사랑해야 하며, 남편으로서는 반드시 식구를 먹여 살릴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인류가 땅에서 생활할 때 준수해야 할 여호와가 정한 율례와 규례이다. 여호와가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이 말을 한 것은 다만 인류(바로 남자와 여자)가 여호와의 권세 아래에서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다만 인류가 순서있게 생활할 수 있고 관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에 대하여, 여자에 대하여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여호와는 모두 적합한 규정을 하였다. 이것은 다만 땅에서 생활하는 모든 피조물에게 말한 것일 뿐, 하나님이 말씀으로 된 육신과는 결코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어찌 피조물과 같을 수 있겠는가? 그가 말씀한 것은 단지 피조된 인류에게 말씀한 것인데, 피조된 인류의 정상 생활을 위해 남자에 대하여, 여자에 대하여 모두 규정이 있게 된 것이다. 여호와가 시초에 인류를 만들 때 남성과 여성 두 유별의 사람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가 말씀으로 된 육신도 곧 남성과 여성에 따라 구분하였다. 그는 그가 아담과 하와에게 한 말씀에 근거하여 자신의 사역을 정한 것은 아니다. 그가 두 차례 말씀이 육신 된 것은 완전히 시초에 그가 인류를 만들 때의 생각에 근거하여 정한 것이다. 바로 패괴되지 않은 남성과 여성에 근거하여 그의 두 차례 도성육신의 사역을 완성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여호와가 당시에 ‘뱀의 유혹을 거친 하와와 아담’에게 한 말씀대로 하나님 도성육신의 사역에 맞춘다면, 예수도 ‘사모해야 할 아내를 사모’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면, 하나님이 그래 하나님인가? 이와 같다면 그가 그의 사역을 완성할 수 있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말씀으로 된 육신이 여성인 것이 착오라면, 하나님이 여자를 만든 것도 크나큰 착오가 아닌가? 만일 사람이 여전히 하나님 도성육신이 여성인 것이 착오라고 여긴다면, 예수는 아내를 얻지도 않았고 자기 아내를 사모하는 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러면 예수는 오늘의 도성육신과 사람이 말한 대로 똑같이 착오가 아닌가? 네가 여호와가 하와에게 한 말씀으로써 오늘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된 이 사실을 가늠한 이상, 너는 여호와가 아담에게 한 말씀으로써 은혜시대에 말씀이 육신 된 주 예수를 가늠해야 하는데, 이것은 모두 같은 것이 아닌가? 네가 뱀의 유혹을 거치지 않은 남성으로써 주 예수를 가늠한 이상, 너는 뱀의 유혹을 거친 여성으로써 오늘 말씀이 육신 된 이 사실을 가늠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다! 네가 만일 이렇게 가늠한다면 너에게 이지(理智)가 없음을 증명한다. 여호와가 말씀으로 된 두 차례 육신의 성별은 뱀의 유혹을 거치지 않은 남성ㆍ여성과 연결되는 것이고, 뱀의 유혹을 거치지 않은 남성ㆍ여성에 따라서 두 차례로 말씀이 육신 된 것이다. 너는 예수의 남성을 뱀의 유혹을 거친 후의 아담의 남성으로 여기지 말라. ‘그’와 ‘그’는 조금도 관련이 없으며, 다른 성질의 두 남성이다. 설마 예수가 남성이라 하여 그를 모든 여자의 머리이고 모든 남자의 머리는 아니라고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모든 유대 사람(남자와 여자를 포괄함)의 왕이 아닌가? 그는 하나님의 자신이고 여자의 머리일 뿐만 아니라 남자의 머리이며, 그는 모든 피조물의 주이자 모든 피조물의 머리이다. 네가 어찌 예수의 남성을 여자의 머리의 상징이라고 정하겠는가? 이것은 모독이 아닌가? 예수는 패괴되지 않은 남성이다. 그는 하나님이고 그리스도이고 주인데, 그가 어찌 패괴된 후의 아담의 남성일 수 있겠는가? 예수는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인데, 네가 어찌 그를 아담의 남성을 구비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면, 하나님의 사역이 다 틀리지 않겠는가? 여호와가 그래 유혹을 거친 아담의 남성을 예수 안에 더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도성육신은 예수와 다른 성별이면서도 성질이 같은 도성육신의 다른 한차례 역사가 아닌가? 네가 또 여자가 먼저 뱀의 유혹을 받았기에 하나님 도성육신은 여성일 수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네가 또 여자는 가장 더럽고 인류의 패괴된 기원이어서 하나님 도성육신이 여성으로 될 수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네가 또 감히 “여자는 영원히 남자에게 순복하고 여자는 영원히 하나님의 창현(彰顯)이 될 수 없고 직접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다”라는 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 만약 예수 그 단계 사역만 하고 말세에 이 단계를 보충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관념에서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즉 하나님은 아들 하나뿐이고 이후에 또 하나의 이름으로 오면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고 더욱이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 영원히 여길 것이다. 사람은 관념에서 무릇 속죄제로 되는 자라면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무릇 하나님을 위하여 정권을 담당하는 자, 온 인류를 구속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여긴다. 또 어떤 사람은 무릇 남성이라면 하나님의 독생자라 할 수 있고 즉 하나님을 대표한다고 여긴다. 심지어 또 어떤 사람은 예수를 여호와의 아들이라 하고 그의 독생자라고 한다. 이것은 사람의 크나큰 관념이 아닌가? 만일 마지막 시대에 이 단계 사역을 하러 오지 않는다면, 온 인류는 하나님에 대하여 음영을 덮어씌우게 된다. 이러면, 남자는 스스로 여자보다 높다고 여기게 되고, 여자는 영원히 머리도 들지 못하게 된다. 그때에, 무릇 여성은 누구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늘 하나님이 남자라고 여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언제나 여자를 혐오하고 하나님이 여자를 구원 얻게 할 리도 없다고 여긴다. 이렇다면, 여호와가 만든 또 마찬가지로 패괴된 모든 여자는 구원받을 기회가 영원히 없지 않겠는가? 그러면 여호와가 여자를 만든 것, 바로 하와를 만든 것도 역시 의의 없는 일로 되지 않겠는가? 여자는 또한 영원히 멸망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말세의 이 단계 사역은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여자만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전 인류를 위한 사역이지 여자만 위한 것은 아니다. 만일 사람이 이렇게 여긴다면, 사람은 더욱 어리석은 것이다! 예수와 나는 한 분의 영으로부터 왔다. 비록 육신은 관계가 없지만 영은 한 분이다. 역사한 내용이 같지 않고 담당한 사역이 같지 않지만 실질은 같은 것이다. 육신이 취한 형상이 같지 않은 그것은 시대가 같지 않음으로 인하여, 사역의 필요로 인하여 같지 않은 것이다. 직분이 같지 않으므로 가져온 사역도 같지 않고 사람에게 나타낸 성품도 같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이 오늘 본 것과 터득한 것은 이전과 같지 않은데, 이것은 모두 시대의 같지 않음으로 인하여 있게 된 것이다. 비록 그들의 육신의 성별은 다르고 형상도 다르며 한 가족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더욱이 동일한 시기에 태어난 것도 아니지만 그들의 영은 한 분이다. 비록 그들의 육신은 어떠한 혈통 관계도 없고 어떠한 육체 관계도 없지만 이런 것으로는 그들이 하나님의 서로 다른 두 시기에서의 말씀으로 된 육신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된 육신, 이것은 미룰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혈연이 아니고 공통의 인류의 언어도 없다(한 분은 유태어를 할 줄 아는 남성이고 한 분은 중국 한어만 말하는 여성이다). 이런 것으로 인하여, 그들이 서로 다른 국가에 분포되어 또한 서로 다른 시기에서 각자가 해야 할 사역을 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은 한 분의 영이고 즉 같은 실질을 갖고 있을지라도 그들의 육신의 외각은 아예 완전히 비슷한 데가 없으며, 다만 같은 인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육신의 모습ㆍ출생은 서로 다르다. 이런 것은 각자의 역사에 영향을 주지 않고 사람이 그들을 인식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쨌든 한 분의 영이기에 누구도 그들을 갈라놓을 수 없으며, 비록 그들이 혈연 관계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영이 그들의 전인(全人)을 지배하여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사역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또한 그들의 육신은 한 혈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여호와의 영이 예수의 영의 아버지가 아니듯이, 또한 예수의 영이 전혀 여호와의 영의 아들이 아니듯이, 그들은 한 분의 영이다. 마치 오늘의 도성육신인 하나님과 예수처럼, 혈통은 서로 연결이 없으나 그들은 본래 하나이다. 이것은 바로 그들의 영이 원래 한 분이기 때문이다. 그는 긍휼 자애의 사역을 할 수 있고, 공의로운 심판의 사역도 할 수 있으며, 사람을 형벌하는 사역도 할 수 있고, 사람을 저주하는 사역도 할 수 있으며, 최종에는 또 세상을 멸하고 악인을 징벌하는 사역을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두 그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이 아닌가?』 ≪두 차례의 성육신으로 성육신의 의의가 완전케 되었다≫에서 발췌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기묘,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위엄, 이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소유소시(所有所是), 이것은 영원불변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자면, 부단히 앞으로 발전하고 부단히 심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항상 새로운 분이기 때문이다. 각 시대마다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기 마련이고, 각 시대마다 하나님은 새로운 사역을 하기 마련이며, 각 시대마다 하나님은 피조물로 하여금 그의 새로운 뜻과 새로운 성품을 보게 하기 마련이다. 만약 새로운 시대에 사람이 새로운 성품의 발표를 보지 못한다면, 사람은 하나님을 영원히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 아닌가? 이것은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닌가? 가령 하나님 도성육신이 다만 남성이라면, 사람은 하나님을 남성으로 정하고 남자의 하나님으로 정할 것이며, 언제나 여자의 하나님이라고는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 남자는 하나님을 남자와 같은 성별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바로 남자의 머리일 것인데, 여자는 또 어떠할 것인가?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다. 이것은 사람을 차별 대우 하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하나님이 구원하는 자가 모두 그와 같은 남자라면 여자는 구원을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할 때는 아담을 창조하고 하와도 창조하였다. 그는 아담만 창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한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역시 여자의 하나님이다. 말세에 하나님은 한 단계 새로운 사역을 하여 그의 더 많은 성품을 나타내려 하는데, 예수 그때의 긍휼ㆍ자애가 아니다. 또 새로운 사역이 있게 된 이상, 이 새로운 사역이 새로운 성품을 가져온 것이다. 그럼 영이 역사하고 말씀이 육신 되지 않고 영이 직접 천둥 치며 말씀한다면 사람이 모두 그와 접촉할 수 없는데, 사람이 그의 성품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단지 영이 역사한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할 수 없다. 오직 도성육신에 의하여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나고 그의 모든 성품을 육신에 의하여 발표해내야만 사람이 직접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실제로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고 형상이 있기에 사람이 모두 실제적으로 그의 성품을 접촉하고 그의 소유소시를 접촉한다. 이래야만 사람이 진실로 그를 알 수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하나님이 남자의 하나님이자 여자의 하나님이다”라는 이 사역도 완성하게 되고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되는 전부의 사역도 완성하게 된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실까요? 아마 많은 분들은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의문을 자세히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좋은 교회를 찾으려면 꼭 알아야 하는 2가지 조건

성도들에게 좋은 교회를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좋은 교회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그럼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 일까요? 좋은 교회를 찾고 있는 당신에게 꼭 알아야 할 2가지 조건을 알려드립니다.

은혜시대의 하나님의 역사는 2천년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말세에 옛 시대를 끝마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개척하시는 사역은 얼마나 걸립니까?

『비록 지금은 이미 말세이지만, 너희들은 마땅히 ‘말세’는 단지 한 개 시대의 대명사이고 한 개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며,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처럼 전체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지 마지막의 몇 년이나 최종의 몇 개월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지금 저는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으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당신들은 왜 제가 이렇게 믿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까?

성경 참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5-16)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하나님 말씀 답: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나 의인으로 온전케 되려는 것이 그렇게 쉬운가? “세상에는 의인이 없고 의인은 세상에 있지 아니하나니”란 이것은 참말이다. 너희들은 하나님 앞에 와서 너희들이 입은 옷을 좀 보고 너희들의 일언일행, 일거일동, 매 하나의 마음과 생각을 좀 살펴 보아라. 너희들이 날마다 꾸는 꿈마저도 자기를 위한 것인데, 이것이 실정이 아닌가? ‘의’란 사람에게 구제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말다툼하지 않고 빼앗지도 않고 훔치지도 않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부탁을 자신의 임무로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함을 천직(天職)으로 할 수 있는 것인데, 마치 주 예수가 한 모든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하는 의이다. 롯이 의인으로 칭함받을 수 있었던 것은 롯이 자기의 득실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낸 두 천사를 구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당시에 한 일을 의롭다고 칭할 수 있을 뿐, 그를 의인이라고는 칭할 수 없다. 롯이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자기의 두 딸을 두 천사와 바꾸려 하였지만, 그가 이전에 행한 것이 다는 의를 대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에 의인이 없다”고 한다.』 ≪악인은 반드시 징벌받는다≫에서 발췌 『너희 이러한 죄인들이 갓 구속되어왔는데, 변화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지 않고서 하나님의 뜻에 맞을 수 있겠는가? 현재의 너 옛 사람, 예수가 너를 구원해온 것은 틀림없다. 네가 죄에 속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것이지만 너에게 죄가 없고 더러움이 없다고는 증명할 수 없다. 네가 변화되지 않고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겠는가? 너의 안이 아직도 더러움뿐이고 이기적이고 비열하면서도 네가 예수와 함께 강림하고 싶어하는데, 그렇게 좋은 일이 있겠는가? 네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한 단계의 과정이 적은데, 다만 구속되었을 뿐 변화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맞으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친히 역사하여 너를 변화시키고 정결케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구속되기만 하고 거룩함에 달할 수 없다. 이러면 너는 하나님과 함께 복을 누릴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너는 하나님이 사람을 경영하는 사역 중의 한 단계에서, 바로 변화되고 온전케 되는 관건적인 한 단계에서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갓 구속받은 너 같은 죄인은 하나님의 산업을 직접 이어받을 수 없다.』 ≪호칭과 신분에 관한 논법≫에서 발췌 『정결케 하는 사역이라야 인류의 불의를 다 정결케 하며, 형벌ㆍ심판의 사역이라야 인류 중의 그 패역한 것들을 다 드러내어 구원할 만한 사람과 구원할 수 없는 사람을 다 분별해내고 존류할 만한 사람과 존류할 수 없는 사람을 다 분별해낸다. 사역이 끝날 때, 존류할 만한 사람은 다 정결함을 받고 인류의 더 높은 경지에 들어가 인류의 땅에서의 더 아름다운 두 번째 생활을 누릴 것이며, 머지않아 인류의 안식의 날에 들어가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다. 존류할 수 없는 사람은 형벌ㆍ심판을 거친 후 원형이 철저히 드러나고 그 후에 다 훼멸되어 사탄과 마찬가지로 더는 땅에서 생존할 수 없다. 이후의 인류 가운데 더는 이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류의 사람들은 최후의 안식의 땅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고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누리는 안식의 날에 들어갈 자격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징벌받을 대상이고 악한 자이지 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에서 발췌 『어떤 사람들은 최종에 “제가 당신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하였는데, 공로는 없다 하더라도 고생은 했으니 하다못해 천당에 들어가 생명 과실을 먹게 해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너는 알아야 한다. 국도에 더러운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허용치 않고 더러운 사람이 성지(聖地)를 더럽히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네가 비록 많은 사역을 하였고 네가 비록 다년간 사역하였지만 결국은 여전히 더럽기 짝이 없으면서도 나의 국도에 들어가려 하는데, 그것은 이치로써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창세부터 오늘까지 나는 사적인 감정을 바치는 어느 한 사람에게도 이런 편리한 문을 열어놓은 적이 없다. 이것은 천규이니 누구도 타파할 수 없다!』 ≪성공 여부는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다≫에서 발췌 『무릇 성령의 현실 말씀에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복이 있는 사람이다. 이전에 사람이 어떠했는가에 개의치 않고 이전에 사람 몸에 성령이 어떻게 역사했는가에 개의치 않고 최신 역사를 얻은 사람은 다 가장 복이 있는 사람이다. 오늘 최신 역사를 따르지 못하는 사람은 다 도태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은 새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며, 최신 역사를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사람이다. 무엇 때문에 정결한 처녀로 되어야 한다고 하는가? 바로 성령의 역사를 찾고 구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한 낡은 관념을 버릴 수 있고 하나님의 오늘의 역사에 순복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의 최신 역사를 받아들이는 이 무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만세전의 예정이고 가장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최신 역사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르라≫에서 발췌

성경 안에 하나님의 말세 역사에 관한 예언이 있습니까? 왜 아무도 성경을 풀 수 없습니까?

하나님 말씀 답: 『“우리가 먼저 맞추지 말고 성령이 어떻게 하는가를 좀 봅시다. 진리로써 우리가 걷는 길이 성령의 사역인가를 대조해보고, 성령 사역으로써 우리가 걷는 길이 옳은가를 검증해 봅시다. 어느 마디 말씀이 응하지 않았고 어느 마디 말씀이 응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사람은 참견하지 말고, 우리가 가장 좋기는 그래도 성령이 하는 사역을 말해보고 하나님의 현재의 최신 사역을 말해 봅시다. 성경은 당시에 선지자가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이 쓴 말이니,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그런 말씀을 해석할 수 있고, 오직 성령만이 그런 말씀의 뜻을 드러낼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그 일곱 인을 뗄 수 있고 그 책을 펼칠 수 있지요. 당신도 당신을 하나님이 아니라 하고 저도 하나님이 아닌데, 누가 감히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감히 그 말씀을 해석할 수 있습니까? 설사 선지자 예레미야가 오고, 요한이 오고, 엘리야가 오더라도 그들은 감히 그런 말씀을 해석할 수 없지요. 그것은 그들이 다 어린양이 아니며, 오직 어린양 자신만이 그 일곱 인을 뗄 수 있고 그 책을 펼칠 수 있으며, 그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분의 말씀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말세는 다만 말세이고 하나님나라시대일 뿐, 은혜시대를 대표하지 않고 율법시대도 대표하지 않는다. 단지 말세에서만 6천년 경영 계획의 모든 사역을 너희에게 나타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비밀을 풀어놓은 것이다. 이런 비밀은 어떤 사람도 풀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성경에 대하여 아무리 이해한다 해도 글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성경의 실질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성경을 보고는 혹시 얼마간의 진리를 터득하거나 얼마간의 글귀를 해석할 수 있고 유명한 장절을 파고들 수도 있겠지만 이런 글귀에 포함된 뜻은 사람이 영원히 풀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본 것은 모두 죽은 글귀이지 여호와가 역사한 장면과 예수가 역사한 장면이 아니며, 사람은 또 이런 사역의 비밀을 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천년 경영 계획의 비밀은 최대의 비밀이고 가장 은밀한 것이어서, 사람은 아예 완전히 측량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누구도 직접 깨달을 수 없다. 반드시 그가 친히 사람에게 해석해야 하고 사람에게 풀어놓아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것이 사람에게는 영원히 ‘수수께끼’이고 영원히 폐쇄되어 있는 비밀이다. 종교계의 인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만일 오늘 너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너희들마저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 6천년의 사역은 모든 선지자의 그런 예언보다 더 심오하고, 창세부터 현재까지의 최대의 비밀이며, 역대의 선지자도 완전히 측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비밀은 오직 마지막 시대에서만 풀어놓았고 이 이전에는 풀어놓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만일 이 비밀을 깨닫고 전부 터득할 수 있다면, 모든 종교 인사들도 이 비밀에 의해 정복될 것이다. 오직 이것이야말로 최대의 이상이고, 사람이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면서도 사람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육신의 비밀 (4)≫에서 발췌 『당시에 유대인들은 다 구약 성경을 보았다. 그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한 남자 아기가 구유에 강생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예언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예수를 핍박하였는가? 이것은 모두 그들의 패역한 본성과 성령 사역을 인식하지 못한 연고가 아닌가? 당초의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한 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예언의 남자 아기와 같지 않다고 여겼다. 오늘의 사람도 성육신인 하나님이 성경에 따라 역사하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저버리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실질은 다 같은 것이 아닌가? 무릇 성령 사역이라면 너는 일률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성령 사역이라면 ‘흐름’이 옳은 것인즉, 너는 조금도 고려없이 받아들여야 하지 골라가며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몸에서 네가 더 많은 견식을 넓히고 딴 속셈을 갖는데, 이것은 부질없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는 더 많은 성경의 근거를 찾지 말아야 하고, 성령의 사역이기만 하면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기에, 너는 하나님을 고찰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나에 대하여 더 많은 근거를 찾아서 내가 너의 하나님임을 증명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내가 너에게 유익한 점이 있는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관건적인 것이다. 설사 성경에서 더 많은 확실한 증거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너를 완전히 내 앞에 이끌어올 수 없다. 너는 성경 속에서 사는 사람일 뿐, 내 앞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성경에 비록 한 남자 아기가 강생하리라고 예언하였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도 그 예언이 누구의 몸에 응할 것인가를 꿰뚫어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바리새인들이 모두 예수를 대적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하는 것이 사람에게 모두 유익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언제나 나와 예수는 서로 다른 일이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예수는 당시에 은혜시대의 제자들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 어떻게 집회해야 하는가, 어떻게 기도하고 간구해야 하는가,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가 등등 일련의 은혜시대의 도만 말하였다. 그가 한 것은 은혜시대의 사역이다. 그는 다만 당시에 제자들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 당시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를 논하였다. 그는 당시에 은혜시대의 사역만 하였지 말세의 사역은 하지 않았다. 율법시대에 여호와가 구약 율법을 제정하였는데, 그는 어째서 은혜시대의 사역을 하지 않았는가? 그는 어째서 은혜시대의 사역을 미리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가? 이러면 사람이 받아들이는 데에 유익하지 않겠는가? 그는 다만 한 남자 아기가 강생하여 정사를 담당하리라고 예언하였을 뿐, 은혜시대의 사역을 앞당겨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매 시대의 사역을 하는 데는 상당히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는 본시대의 사역만 할 뿐, 다음 단계 사역을 앞당겨 하지 않는다. 이래야만 그의 매 시대에서의 대표적인 역사를 두드러지게 할 수 있다. 예수는 당시에 말세에 무슨 징조가 있다는 것만 말하였고 당시에 어떻게 인내하는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어떻게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고 십자가를 지고 고통받아야 하는가만 말하였지, 말세의 사람이 어떻게 진입하고 어떻게 추구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있는가는 말하지 않았다. 이러한데, 네가 만일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세의 역사를 찾는다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닌가? 네가 성경만을 받쳐들고 무엇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성경 해석가든지, 설교자든지 누가 미리 오늘의 사역을 꿰뚫어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관념’ 속에 규정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겠는가?≫에서 발췌 『하나님은 매 단계 사역에서, 전적으로 옛 선지자의 예언을 응하러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규례를 지키러 오거나 일부러 옛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한 것은 또 옛 선지자의 예언에 엇나가지 않았고 그의 이전의 사역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역사한 뚜렷한 점은 바로 어떤 규례도 지키지 않고 그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한 것이다. 그는 선지자가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 ‘실천가’이다. 그는 아주 실제적으로 그가 해야 할 사역을 하였고, 그의 새로운 기원을 개척하여 그의 새 사역을 전개하였다. 물론, 예수가 와서 사역한 것도 적지 않은 구약의 옛 선지자의 말을 응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에 하는 사역도 구약의 옛 선지자의 예언을 응하는 것이다. 다만 오늘 너와 그 ‘노황력(老黃歷)’을 펼치지 않을 따름이다. 내가 더 많은 사역을 해야 하고 더 많은 말씀을 너희에게 해야 하기에, 이런 사역과 이런 말씀은 그 성경 장절을 해석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 사역은 너희들에 대하여 말하면 별로 큰 의의와 별로 큰 가치가 없기에 너희들을 도울 수 없고 너희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내가 새로운 사역을 하려는 것은 성경의 어느 장절을 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가령 하나님이 땅에 와서 역사하는 것이 단지 성경의 옛 선지자의 말을 응하기 위한 것뿐이라면 네가 말해봐라, 도대체 성육신인 하나님이 큰가 아니면 옛 선지자가 큰가? 도대체 옛 선지자가 하나님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옛 선지자를 지배하는가? 이 말을 너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는가?』 ≪호칭과 신분에 관한 논법≫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