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하나님께 응답 받는 기도는 어떻게 드려야 되는가

2018년 09월 28일

반짝이는 뭇별들이 새까만 하늘을 수놓으며 밤하늘을 아름답게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유신은 이 아름다운 야경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고통스럽고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두 무릎을 땅에 꿇은 채 예수님께 기도했다. “인자하신 구세주 예수님, 요즘 저는 머리가 터질 듯이 아픕니다. 또 항상 어지럽고 눈도 침침합니다. 물건도 잘 보이지 않고 조금만 불편해도 구토를 합니다. 의사의 말로는 제가 뇌수종에 걸렸다고 합니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저의 병을 치료해 주세요. 저는 지금 정말 너무 고통스러워 당신께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신의 이런 기도는 벌써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는 며칠에 한번씩 증세가 발작해서 한순간도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었고, 항상 간절하게 주님께 치료해 달라고 기도했다. 형제자매들도 새벽 예배 때 그를 위해 기도했고, 교회 안의 명망 있는 설교자도 그를 위해 기도했지만 병세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고 발작은 계속됐다. 유신은 속으로 아주 곤혹스러웠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주님은 우리가 어떤 난관에 부딪히든지 주님께 기도하기만 하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째서 병 치료를 위해 구하는 나를 치료해 주지 않으실까? 설마 주님이 나를 버리시는 것일까? 여기까지 생각하자 유신의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 이때 그의 머리가 또 아프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참을 수 없어서 또다시 주님께 병을 치료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심지어 자신이 이렇게 병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는 말까지 했다. 유신은 이렇게 기도할수록 마음은 초조해졌다. 날로 수척해진 그는 남들과 말도 하기 싫어 졌고 생활에 대한 자신감마저 잃어버렸다. 자기가 사는 것이 쓸모없는 짐처럼 느껴지고 너무 고통스러웠다.

하루는 점심을 먹고 나니 머리가 또 아파오기 시작해서 침대에 누워 쉴 수밖에 없었다. 이때 친한 친구 조유리가 그를 보러 왔다. 조유리가 유신에게 최근 건강 상태를 묻자 유신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쏟아냈다. 유신은 조유리에게 그동안의 고초와 곤혹을 털어놓으며 말을 할수록 괴로워했다. 주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니 자기를 버리신 게 아닐까 조유리에게 끊임없이 물어보았다.

조유리는 티슈 두 장을 뽑아 유신에게 넘겨주며 진지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저도 자매님과 똑같았어요. 무엇을 구하든지 우리에게 주신다고 예수님이 약속하신 줄 알았어요. 그래서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나면 얼른 주님께 기도드리며 길을 열어달라고 빌었어요. 기도를 드린 후, 주님이 복을 주시면 저는 기뻐서 주님께 감사를 드렸고, 응답을 받지 못하면 소극적이고 연약해 졌어요. 마음속으로는 주님이 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 오해하고 원망했어요. 예전에 저는 이렇게 하는 게 잘못된 줄도 몰랐어요. 하지만 최근에 책 한 권을 봤는데 이런 기도는 주님 앞에서 이성이 없고 주님의 뜻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말을 들은 유신은 놀라서 조유리의 나눔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깊은 생각에 빠졌고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항상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보호와 축복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그 무엇보다 크고, 주님의 능력은 모든 것을 이깁니다. 주님은 우리가 기도로 구하기만 하면 받을 수 있다고 약속하셨습니다.”라고 하셨다. ‘게다가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그렇게 구하고 주님의 축복을 받았는데 이런 기도가 어찌 주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유리는 유신의 얼굴에 나타난 ‘이상한’ 표정을 알아차리고 얼른 유신에게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유신이 자기 생각을 말하자 조유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의문이 생기는 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24) 그 의문은 이 말씀의 진짜 의미를 몰라서예요. 사실 주님의 사역과 말씀은 다 당시의 배경이 있어요. 그때 예수님이 막 사역을 시작하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뒤따랐지만 주님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어요. 예수님이 성육신의 하나님인지도 몰랐지요. 그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이 그들에게 말했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1:22)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의 큰 능력을 보고 주님이 오실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거예요. 주님을 병 고치는 의사로 보고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우리는 작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 드릴 때는 이성이 있어야 하고,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져야 해요. 질병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아야만 합당한 기도예요! 이 부분에 대해 제가 며칠 전에 몇 구절 적어둔 것이 있는데 읽어 드릴게요!”

유신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조유리가 가방 속에서 작은 노트 하나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할 때, 어떻게 말해야 이지가 있는 것인지, 어떻게 말해야 정형을 경건한 위치로 조절하여 겸손하고 낮아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 후에 다시 기도하면 좋아질 것이고, 기름을 바른 것 같을 것이다…예수의 기도를 보아라(예수의 기도를 언급하는 것은 사람이 꼭 예수의 그 각도에, 그 위치에 서서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고 기도하였는데, 즉 만약 할 수 있으면이라는 뜻으로 상의한 것이지 “해 주소서”라고 하지 않았다. 예수는 순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순복하는 상황에서 기도하였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두 번째도 이렇게 기도하였고, 세 번째도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였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더듬어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완전히 순복할 수 있었고, 자신의 선택은 조금도 없었다. 예수가 “만일 할 만하시거든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둘 때까지 피 흘릴 것을 생각하니 매우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에 관련되는 일이고 또한 그가 아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더듬지는 못한 전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한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고통스러울 것을 생각했음에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주아주 순복한 것이다. 그의 기도는 정상인데, 조건을 따지려고 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지나가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한 것이다. 첫 번째로 기도할 때는 깨닫지 못하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했는데, 순복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두 번째도 그렇게 기도했는데, 모두 세 번 기도하였다(물론 세 번 기도한 시간은 3일만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할 때,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닫고 그 후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처음 두 번 기도할 때는 모두 찾고 구하였는데, 역시 순복하는 상황에서 찾고 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 어떻게 어떻게 해 주시고, 저를 어떻게 어떻게 인도해 주시고, 저에게 조건을 예비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너에게 적합한 조건을 마련해 주지 않고 너로 반드시 그 고통을 받게 할 수도 있다. 만약 사람이 기도할 때 늘 “하나님, 저에게 마련해 주시고,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런 기도는 얼마나 이지가 없는 것이냐! 너는 기도할 때 이지가 있어야 하고, 순복하는 전제하에서 기도해야 하며, 정해 놓아서는 안 된다. 기도하기 전에 벌써 ‘하나님께 간구하여 어떻게 어떻게 해 달라고 구해야지.’라고 정해 놓는데,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이지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이 그렇게 기도하면 그 영이 전혀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기도해도 무미건조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찾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이지 있는 기도이고 어떤 것이 이지 없는 기도인지는 네가 스스로 한동안 체험하면 알게 된다. 예컨대, 네가 이번에 기도한 후 성령이 네 기도대로 하지 않고 그렇게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면, 다음에 기도할 때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이전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강요하거나 자기 뜻대로 그렇게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다음에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 모든 것이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네가 이 방면을 중시하여 한동안 모색한다면 이지가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조유리는 책의 내용을 다 읽고 나서 나눔을 이어갔다. “이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인간적인 연약함이 있었지만 하나님께 그러한 고통을 옮겨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평소에 아프고 재난을 당할 때를 생각해봐요. 한번도 이런 일에서 주님의 뜻이 뭔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지는 구하지 않고 항상 주님께 은혜를 달라고 하고 긍휼히 여겨 달라고만 했어요. 그 본질은 주님을 압박해서 본인의 요구대로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거죠. 우리의 이런 모습은 너무 이성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겠어요. 그래서, 우리가 무슨 병에 걸리거나, 재난이나 불안한 일이 닥쳐서 기도할 때는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주님께 우리의 뜻대로 해 달라고만 요구해서는 안 돼요. 반드시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해요. 욥이 시련을 당할 때, 온 산의 소와 양을 강도에게 빼앗기고, 자녀는 무너진 집에 깔려 죽고, 순식간에 막대한 재산과 모든 자녀를 잃었어요. 그런 갑작스러운 재난은 누구나 견디기 힘든 것이에요. 하지만 욥은 그런 소식을 듣고도 하나님께 재난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의 뜻을 구했어요. 결국에는 그가 이 모든 재난이 임한 것은 사람의 뜻이 아니고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한 시련임을 알았어요.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했어요.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욥기 1:21) 또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형제자매는 그가 성을 빠져나가도록 도왔고 막 성 밖에 나왔을 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타나서 다시 가서 십자가에 못박히라고 하셨어요.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의 뜻을 이해했고, 예수님에게 어떤 무리한 요구도 하지 않고 로마 성으로 돌아가 자발적으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어요. 베드로와 욥이 시련 중 보인 모습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이성이 있고, 자신의 육체적 만족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뜻을 구했던 것을 알 수 있어요. 구하고 나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계획에 순종할 수 있었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이성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에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늘 질병이라는 시련을 받고 있지만 계속 하나님께 어서 우리 병을 낫게 해 달라고만 요구할 수는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께 이성이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해요. 자신의 병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질병의 고통 속에서만 살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유신은 이런 나눔을 듣고 그제서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마가복음 11: 24)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지 하나님께 무리한 요구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병이 났을 때 주님께 끊임없이 기도하며 병을 어서 치료해 달라고만 구했지 주님의 뜻을 구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렇게 이성이 없는 기도를 주님이 어찌 들어주실 수 있겠는가? 유신은 질병이 본인에게 닥쳤을 때 이성있는 기도를 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이러한 기도라야 주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기도하는 방법,크리스천이 해야하는 기도,

며칠 후, 유신은 혼자서 방 청소를 하다가 갑자기 또 머리가 아프고 현기증이 났다. 그는 천천히 벽을 붙잡고 소파로 가서 앉아 예전처럼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 저의 병을 치료해 주세요. 주님…” 기도를 다 드린 그는 갑자기 며칠 전 조유리와 나눴던 말이 생각났다. 『기도할 때에는 마땅히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너에게 일이 임할 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면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일이 임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게 하기를 원하고, 당신의 뜻을 찾고 구하기를 원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뜻은 다 당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당신을 대적하는 것이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임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하기만을 원합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런 어조의 기도는 적합하다.』

그래서 유신은 다시 주님께 기도드렸다. “주님, 욥은 온몸에 부스럼이 났을 때 주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병에 걸렸을 때 주님께 계속 고쳐달라고만 구했습니다. 병이 완치되지 않아 항상 주님을 원망하고 오해하며 부정적이고 연약한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 오늘 비로소 제가 너무 이성이 없고,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저는 이 질병을 당신의 손에 맡기기 원합니다. 욥처럼 주님의 주재에 순종하고 주님에 대한 믿음을 지켜 사탄이 철저히 부끄럼 당하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기오니 당신께 순종하게 해주세요.” 기도를 마친 유신은 머리가 여전히 어지러웠지만 마음은 아주 편안했다.

그후 유신은 머리가 어지러울 때마다 이렇게 기도드렸다. “주님. 저를 사랑하시든 아니든, 저에게 은혜를 주시든 아니든, 저의 병이 좋아지든 아니든 저는 당신을 따르고, 사랑하며, 조건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뜻밖에도, 유신이 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을 때 머리가 어지러운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그도 질병 속에서 어떻게 이성있는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지 배우게 되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이 이미 우리를 깨끗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히 구별되어 죄에 속하지 않으므로 더는 정결케 하는 사역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논법이 왜 틀렸습니까?

『너는 예수가 말세에 강림하리라는 것만 알고 있는데, 도대체 그는 어떻게 강림하는가? 너희 이러한 죄인들이 갓 구속되어왔는데, 변화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지 않고서 하나님의 뜻에 맞을 수 있겠는가? 현재의 너 옛 사람, 예수가 너를 구원해온 것은 틀림없다. 네가 죄에 속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것이지만 너에게 죄가 없고 더러움이 없다고는 증명할 수 없다. 네가 변화되지 않고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겠는가? 너의 안이 아직도 더러움뿐이고 이기적이고 비열하면서도 네가 예수와 함께 강림하고 싶어하는데, 그렇게 좋은 일이 있겠는가? 네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한 단계의 과정이 적은데, 다만 구속되었을 뿐 변화되지 않은 것이다.』

왜 하나님은 서로 다른 시대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가? 하나님 이름의 의의는 무엇인가?

관련된 하나님 말씀: 『하나님은 본래 이름이 없었는데, 사역을 해야 하고 인류를 경영해야 했기에, 하나의 이름이나 두 개의 이름 또는 더 많은 이름을 취했을 뿐임을 너는 알아야 한다. 그가 어느 이름으로 불리든 다 그 자신이 자유로 선택한 것이 아닌가? 또 너, 피조물이 규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데에 따라, 인류의 언어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다. 하지만 그 이름을 사람이 개괄할 수 없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그러므로 각 시대에 하나님 자신이 친히 역사하려고 할 때, 그는 시대에 부합되는 이름으로 자신이 하려는 사역을 개괄하고, 시대적 의의를 갖춘 특정된 그 이름으로 그 시대의 하나님 성품을 대표하는데, 하나님이 인류의 언어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예수, 이 이름,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대표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 대해 명확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바꿀 리가 없기에 하나님은 예수라고 할 수밖에 없고 더 이상 다른 이름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말이야말로 모독인 것이다! 네가 말해 봐라, 단지 ‘예수’라는 이름,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대표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많은 이름으로 불릴 수 있지만, 그 많은 이름 중에서 어느 이름도 하나님의 전부를 다 개괄할 수는 없고, 어느 이름도 하나님을 완전히 대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많지만, 그 많은 이름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전부 명확히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너무나 풍부해서 그야말로 다 인식할 수가 없다. 사람은 인류의 언어로 하나님을 전부 다 개괄할 수가 없다. 인류는 다만 얼마간의 유한한 어휘로써 사람이 인식한 하나님의 성품, 즉 위대, 존귀, 기묘, 난측(難測), 지고지상, 거룩, 공의, 지혜 등등을 개괄할 뿐이다. 너무나도 많다! 이 몇 개의 유한한 단어만으로는 사람이 본 유한한 하나님의 성품을 다 묘사해 낼 수도 없다. 후에 또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 격정을 한층 더 표현할 수 있는 얼마간의 말을 더하였는데, 즉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다!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다!”라는 것이다. 현재에 이르러, 이러한 것과 유사한 인류의 언어가 절정에 이르렀어도 사람은 여전히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보기엔 하나님에게 많은 이름이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는 또 이름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시가 매우 많지만 사람의 언어가 또한 너무 결핍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특정된 단어와 특정된 이름만으로는 전혀 하나님의 전부를 대표할 수 없다. 그러면 네가 말해 봐라, 하나님의 이름이 고정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이처럼 위대하고 거룩한데, 너는 그가 시대마다 그의 이름을 바꾸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는가?』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러면 왜 여호와의 이름이 또 예수가 되었는가? 메시아가 오리라고 하였는데 어째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왔는가? 하나님의 이름이 어찌 바뀔 수 있었는가? 그런 것은 이미 했던 사역이 아닌가? 설마 하나님이 오늘날 새로운 사역을 할 수 없단 말인가? 어제의 사역도 바뀔 수 있었고, ‘여호와’의 역사도 ‘예수’가 이을 수 있었는데, ‘예수’의 사역을 또 다른 사역으로 바꾸어 이어 갈 수 없겠는가? ‘여호와’의 이름이 ‘예수’로 바뀔 수 있었는데, ‘예수’의 이름도 바뀔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다만 사람의 머리가 너무 단순한 탓에 초래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다. 그의 역사가 어떻게 변하든, 또한 그의 이름이 어떻게 변하든, 그의 성품과 지혜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면 너의 식견은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너는 예수, 이 이름이 영원히 하나님의 이름이니 하나님은 영원히 예수라고 해야 하고 다시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너는 ‘예수’, 이 이름이 율법시대를 끝마치고 마지막 시대도 끝마치는 이름이라고 자신 있게 확정할 수 있겠는가? 누가 ‘예수’의 은혜가 시대를 끝마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관념’ 속에 규정해 놓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겠는가?>에서 발췌 『가령 하나님이 각 시대에서 하는 사역이 다 같고 다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면, 사람은 어떻게 인식하겠는가? 하나님이 여호와라고만 불려야 하고, 여호와라고 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인식할 것이다. 혹은 하나님이 예수일 수밖에 없고, 예수란 이름 외에는 하나님이 더 이상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없고, 예수 외에는 여호와도 하나님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하는 하나님이라고 여긴다. 또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하는 하나님이기에 그를 예수라고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면 너는 규례를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을 한 범위 내에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시대에서 하나님이 하는 사역, 불리는 이름, 지니는 형상, 하는 각 단계의 사역은 지금까지 조금도 규례를 지키지 않고 조금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여호와이지만 또한 예수이고 또한 메시아이며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의 사역이 차츰차츰 바뀌고 그의 이름도 상응하게 바뀌므로, 어느 한 이름도 그를 완전하게 대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릇 그가 불리는 이름은 다 그를 대표할 수 있으며, 각 시대에 그가 하는 사역은 다 그의 성품을 대표한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하나님은 각 시대에 새로운 사역을 하고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가 어찌 다른 시대에 같은 사역을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어찌 옛것을 지키겠는가? ‘예수’, 이 이름은 구속 사역으로 인해 불린 이름인데, 말세에 예수가 재림하여 또 그 이름으로 불리겠는가? 또 구속 사역을 하겠는가? 왜 여호와와 예수는 하나인데 오히려 다른 시대에 다른 이름으로 불렸는가? 모두 사역하는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단 하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전부를 다 대표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이름으로 시대를 바꾸고 이름으로 시대를 대체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떤 한 이름도 하나님 자신을 완전히 대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시대성을 갖춘 성품만 대표할 뿐이고, 사역을 대표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성품에 적합한 하나의 이름을 택하여 전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그러므로 한 번 오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고, 하나의 시대를 대표하며, 하나의 새로운 출로를 개척하는데, 하나의 이름은 한 단계의 새로운 출로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항상 새로운 분이고, 그의 사역은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歷史)는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하고, 하나님의 사역도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한다. 6천년 경영 계획을 끝마치려면 반드시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해야 한다. 날마다 새로운 사역을 하고, 해마다 새로운 사역을 해야 하며, 새로운 출로를 개척하고 신기원을 개척하고 더 새로운 사역과 더 큰 사역을 개척해야 한다. 그에 따라 새로운 이름을 가져오고 새로운 사역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바리새인은 왜 예수님을 정죄하고 대적했는가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하실 때, 바리새인들은 미친 듯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여 결국 하늘에 사무치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럼 바리새인이 왜 예수님을 정죄하고 대적해야만 했는지 알고 계시나요?

하나님을 믿으면 평안과 복받는 것만 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고, 더 많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인해 고난받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이상, 하나님의 형벌도 누려야 한다. 이런 것을 다 체험해야 한다. ... 』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해야만 구원받고 온전케 될 수 있습니까?

『진리를 추구해야 성정 변화에 달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이 반드시 깨달아야 할 바이고 이런 일을 모두 꿰뚫어보아야 한다. 진리를 너무 적게 깨달으면 쉽게 착오가 생기고 치우친 길에 들어선다.』

성경 안에 하나님의 말세 역사에 관한 예언이 있습니까? 왜 아무도 성경을 풀 수 없습니까?

하나님 말씀 답: 『“우리가 먼저 맞추지 말고 성령이 어떻게 하는가를 좀 봅시다. 진리로써 우리가 걷는 길이 성령의 사역인가를 대조해보고, 성령 사역으로써 우리가 걷는 길이 옳은가를 검증해 봅시다. 어느 마디 말씀이 응하지 않았고 어느 마디 말씀이 응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사람은 참견하지 말고, 우리가 가장 좋기는 그래도 성령이 하는 사역을 말해보고 하나님의 현재의 최신 사역을 말해 봅시다. 성경은 당시에 선지자가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이 쓴 말이니,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그런 말씀을 해석할 수 있고, 오직 성령만이 그런 말씀의 뜻을 드러낼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그 일곱 인을 뗄 수 있고 그 책을 펼칠 수 있지요. 당신도 당신을 하나님이 아니라 하고 저도 하나님이 아닌데, 누가 감히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감히 그 말씀을 해석할 수 있습니까? 설사 선지자 예레미야가 오고, 요한이 오고, 엘리야가 오더라도 그들은 감히 그런 말씀을 해석할 수 없지요. 그것은 그들이 다 어린양이 아니며, 오직 어린양 자신만이 그 일곱 인을 뗄 수 있고 그 책을 펼칠 수 있으며, 그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분의 말씀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말세는 다만 말세이고 하나님나라시대일 뿐, 은혜시대를 대표하지 않고 율법시대도 대표하지 않는다. 단지 말세에서만 6천년 경영 계획의 모든 사역을 너희에게 나타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비밀을 풀어놓은 것이다. 이런 비밀은 어떤 사람도 풀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성경에 대하여 아무리 이해한다 해도 글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성경의 실질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성경을 보고는 혹시 얼마간의 진리를 터득하거나 얼마간의 글귀를 해석할 수 있고 유명한 장절을 파고들 수도 있겠지만 이런 글귀에 포함된 뜻은 사람이 영원히 풀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본 것은 모두 죽은 글귀이지 여호와가 역사한 장면과 예수가 역사한 장면이 아니며, 사람은 또 이런 사역의 비밀을 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천년 경영 계획의 비밀은 최대의 비밀이고 가장 은밀한 것이어서, 사람은 아예 완전히 측량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누구도 직접 깨달을 수 없다. 반드시 그가 친히 사람에게 해석해야 하고 사람에게 풀어놓아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것이 사람에게는 영원히 ‘수수께끼’이고 영원히 폐쇄되어 있는 비밀이다. 종교계의 인사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만일 오늘 너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너희들마저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바로 이 6천년의 사역은 모든 선지자의 그런 예언보다 더 심오하고, 창세부터 현재까지의 최대의 비밀이며, 역대의 선지자도 완전히 측량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비밀은 오직 마지막 시대에서만 풀어놓았고 이 이전에는 풀어놓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만일 이 비밀을 깨닫고 전부 터득할 수 있다면, 모든 종교 인사들도 이 비밀에 의해 정복될 것이다. 오직 이것이야말로 최대의 이상이고, 사람이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면서도 사람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육신의 비밀 (4)≫에서 발췌 『당시에 유대인들은 다 구약 성경을 보았다. 그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한 남자 아기가 구유에 강생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예언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예수를 핍박하였는가? 이것은 모두 그들의 패역한 본성과 성령 사역을 인식하지 못한 연고가 아닌가? 당초의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한 것이 그들이 알고 있는 예언의 남자 아기와 같지 않다고 여겼다. 오늘의 사람도 성육신인 하나님이 성경에 따라 역사하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저버리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실질은 다 같은 것이 아닌가? 무릇 성령 사역이라면 너는 일률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성령 사역이라면 ‘흐름’이 옳은 것인즉, 너는 조금도 고려없이 받아들여야 하지 골라가며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몸에서 네가 더 많은 견식을 넓히고 딴 속셈을 갖는데, 이것은 부질없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는 더 많은 성경의 근거를 찾지 말아야 하고, 성령의 사역이기만 하면 받아들여야 한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기에, 너는 하나님을 고찰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나에 대하여 더 많은 근거를 찾아서 내가 너의 하나님임을 증명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내가 너에게 유익한 점이 있는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관건적인 것이다. 설사 성경에서 더 많은 확실한 증거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너를 완전히 내 앞에 이끌어올 수 없다. 너는 성경 속에서 사는 사람일 뿐, 내 앞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성경에 비록 한 남자 아기가 강생하리라고 예언하였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도 그 예언이 누구의 몸에 응할 것인가를 꿰뚫어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바리새인들이 모두 예수를 대적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하는 것이 사람에게 모두 유익한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언제나 나와 예수는 서로 다른 일이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긴다. 예수는 당시에 은혜시대의 제자들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 어떻게 집회해야 하는가, 어떻게 기도하고 간구해야 하는가,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가 등등 일련의 은혜시대의 도만 말하였다. 그가 한 것은 은혜시대의 사역이다. 그는 다만 당시에 제자들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 당시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가를 논하였다. 그는 당시에 은혜시대의 사역만 하였지 말세의 사역은 하지 않았다. 율법시대에 여호와가 구약 율법을 제정하였는데, 그는 어째서 은혜시대의 사역을 하지 않았는가? 그는 어째서 은혜시대의 사역을 미리 분명히 말하지 않았는가? 이러면 사람이 받아들이는 데에 유익하지 않겠는가? 그는 다만 한 남자 아기가 강생하여 정사를 담당하리라고 예언하였을 뿐, 은혜시대의 사역을 앞당겨 하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매 시대의 사역을 하는 데는 상당히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는 본시대의 사역만 할 뿐, 다음 단계 사역을 앞당겨 하지 않는다. 이래야만 그의 매 시대에서의 대표적인 역사를 두드러지게 할 수 있다. 예수는 당시에 말세에 무슨 징조가 있다는 것만 말하였고 당시에 어떻게 인내하는가,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어떻게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고 십자가를 지고 고통받아야 하는가만 말하였지, 말세의 사람이 어떻게 진입하고 어떻게 추구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있는가는 말하지 않았다. 이러한데, 네가 만일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세의 역사를 찾는다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닌가? 네가 성경만을 받쳐들고 무엇을 알아낼 수 있겠는가? 성경 해석가든지, 설교자든지 누가 미리 오늘의 사역을 꿰뚫어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관념’ 속에 규정하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겠는가?≫에서 발췌 『하나님은 매 단계 사역에서, 전적으로 옛 선지자의 예언을 응하러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규례를 지키러 오거나 일부러 옛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한 것은 또 옛 선지자의 예언에 엇나가지 않았고 그의 이전의 사역도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역사한 뚜렷한 점은 바로 어떤 규례도 지키지 않고 그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한 것이다. 그는 선지자가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 ‘실천가’이다. 그는 아주 실제적으로 그가 해야 할 사역을 하였고, 그의 새로운 기원을 개척하여 그의 새 사역을 전개하였다. 물론, 예수가 와서 사역한 것도 적지 않은 구약의 옛 선지자의 말을 응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에 하는 사역도 구약의 옛 선지자의 예언을 응하는 것이다. 다만 오늘 너와 그 ‘노황력(老黃歷)’을 펼치지 않을 따름이다. 내가 더 많은 사역을 해야 하고 더 많은 말씀을 너희에게 해야 하기에, 이런 사역과 이런 말씀은 그 성경 장절을 해석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 사역은 너희들에 대하여 말하면 별로 큰 의의와 별로 큰 가치가 없기에 너희들을 도울 수 없고 너희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 내가 새로운 사역을 하려는 것은 성경의 어느 장절을 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가령 하나님이 땅에 와서 역사하는 것이 단지 성경의 옛 선지자의 말을 응하기 위한 것뿐이라면 네가 말해봐라, 도대체 성육신인 하나님이 큰가 아니면 옛 선지자가 큰가? 도대체 옛 선지자가 하나님을 지배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옛 선지자를 지배하는가? 이 말을 너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겠는가?』 ≪호칭과 신분에 관한 논법≫에서 발췌

복음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복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복음이란” 쉽게 말하자면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열심히 전하긴 했지만 당신은 복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성경 예언에는 마지막에 영원한 복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영원한 복음을 위해 우리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돌아오시면 형상을 바꾸실까요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예수님의 형상은 당시 유대인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거라고 여겨왔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유대인의 형상이라고 예언하지 않았기에, 만약 예수님의 형상이 바뀐다면 어떻게 해야 주님을 알아보고 제때 영접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