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2019년 08월 13일

아침을 먹고 나서, 예치는 컴퓨터를 켜고 페이스북에 들어가 친구 리나의 계정을 찾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몇 마디를 입력했습니다.

온라인인가요? 리나와 이야기하고 싶은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아침 영생활을 하던 중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2~23)라는 성경 구절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마음이 조금 곤혹스러웠습니다. 어찌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전도하고, 귀신을 쫓고, 이적을 행하는 자들이 주님의 칭찬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불리게 된 것일까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생각해 보면, 그동안 저도 줄곧 이 사람들처럼 온갖 고생을 하며 뛰어다니고 복음을 전했으며 열심히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십일조도 바쳤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막에는 틀림없이 주님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문제를 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리나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잠시 후, 컴퓨터에서 알림이 울렸습니다. 예치는 리나에게서 온 메시지임을 확인하고 서둘러 열어 보았습니다.

방금 접속해서 메시지를 확인했습니다. 예치가 제기한 이 문제는 확실히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칭찬을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느냐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깨달은 것도 지극히 한정적이어서 그저 약간의 개인적인 견해를 이야기해 보려 하니, 우리 함께 나눠봅시다.

주 안에 있는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받고 대가를 치르며 끝까지 견디면,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고, 주님께서 오실 때에 들림 받아 천국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이 과연 주님의 뜻에 맞을까요? 예전에 바리새인들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리지 않고 혹서와 혹한에도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섬겼으며 좋은 행위도 있었지만, 그들을 주님께서 칭찬하셨나요? 물론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바리새인들이 비록 겉으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하고 대가도 치렀지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예수님의 형상으로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하러 오셨을 때, 그들은 자신의 관념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정죄하며, 심지어 자기의 지위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백성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겉으로 힘들게 대가를 지불하고, 좋은 행동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며, 나아가 이러한 행동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면, 많은 이들이 가정과 일을 버리고 열심히 사역을 하며 많은 고생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일까요? 주님을 위해 사역하면 주님께서 자신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고, 그 집안의 모든 평화를 지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이러한 축복을 받고자 하는 속셈이 있기 때문에 고난이나 시련, 재앙이 닥치면 주님을 오해하고 원망하며, 심하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면서, 항상 자신의 육적인 사욕을 따르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속입니다. 형제자매들 앞에서 자기의 좋은 면만 말하고, 진실된 상황은 전혀 말하지 않으며 허상을 심어 주는 등 사람들을 현혹하고, 기만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자기 이미지와 지위를 위해 설교하고 사역하며, 사람들이 우러러 봐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사람을 모두 자기 앞으로 데리고 와서 형제자매가 모두 그를 숭배하게 하며, 마음속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지위가 없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사역하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내면에 이렇게도 많은 불순물이 있는데, 자기가 한 일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외식하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기만과 모독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복음 7:22~23)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님의 뜻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바치면서, 속으로는 온갖 그릇된 속셈과 불순물을 갖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입니다.

리나가 보내온 메세지를 보고 예치는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바치며, 고생도 하지만, 속에는 온갖 불순물과 옳지 않은 저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제 모습입니다! 비록 열심히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주님께서 축복하시어 집안을 평안하게 지켜 주고 사업이 잘 되게 해 주며, 주님께서 오실 때 들림 받아 천국으로 들어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때론 뜻대로 되지 않는 환경이 임하여 집안이 평안하지 못할 때면 자신이 바친 헌신을 자본으로 생각하여 이를 조건으로 걸고, 주님을 원망하고 거역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고생과 헌신은 절대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본래 주님께서 정죄하신 것은 우리의 외적인 헌신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그릇된 속셈을 혐오하는 것입니다.

잠시 생각한 끝에, 예치는 리나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리나의 답장을 보고 느낀 바가 많습니다. 이제야 왜 주님을 위해 전도를 하고 열심히 뛰는 사람이 도리어 주님의 혐오와 저주를 받게 되는지 이해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너무나 많은 불순물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보아하니, 우리가 그릇된 속셈과 불순물을 가진 채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혐오하는 것이고 주님의 뜻에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실천하면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리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성경 구절 몇 마디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요한복음 8:31),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요한복음 14:23~24),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태복음 22:37~38)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실행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주님의 요구대로 헌신하고 사역하며 모든 일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만족게 해 드리기를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역이나 말씀이 아무리 자기의 생각에 부합되지 않더라도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부탁을 완수하기 위하여 자기의 충심을 바치며, 개인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께 요구하거나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않으며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고,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을 때, 비록 그 요구가 그의 관념에 맞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어떠한 이유도 대지 않고 진심으로 이삭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자 했으며 절대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역시, 평소 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악을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재산과 자식들을 모두 박탈당하는 시련을 겪을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차라리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욥은 거래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든 거두어 가시든 상관없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그는 평생 예수님을 따르며 주님의 당부를 지켰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 양을 치라”(요한복음 21:16)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족게 해 드리기를 추구했으며 엄격히 주님의 뜻과 요구에 따라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최종에는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러 못 박혀 죽기까지 순종했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외와 순종을 지닌 사람들이며, 이런 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겉면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포기하는 정도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족게 하기를 추구하며,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심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실천하고 진입해 나가야 할 것들입니다!

예치는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며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주님을 믿은 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오늘에 이르러서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치는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게 되어 기쁘면서도, 자신이 주님을 위해 사역을 함에 있어 너무 많은 불순물이 섞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속셈을 배반하고, 욥과 베드로를 본받아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실행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추구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한 예치는 리나에게 흐뭇한 미소를 띄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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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하나님 말씀: 『하나님은 본래 이름이 없었는데, 사역을 해야 하고 인류를 경영해야 했기에, 하나의 이름이나 두 개의 이름 또는 더 많은 이름을 취했을 뿐임을 너는 알아야 한다. 그가 어느 이름으로 불리든 다 그 자신이 자유로 선택한 것이 아닌가? 또 너, 피조물이 규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나님 자신의 이름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데에 따라, 인류의 언어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다. 하지만 그 이름을 사람이 개괄할 수 없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그러므로 각 시대에 하나님 자신이 친히 역사하려고 할 때, 그는 시대에 부합되는 이름으로 자신이 하려는 사역을 개괄하고, 시대적 의의를 갖춘 특정된 그 이름으로 그 시대의 하나님 성품을 대표하는데, 하나님이 인류의 언어로 하나님 자신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예수, 이 이름,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대표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 대해 명확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을 바꿀 리가 없기에 하나님은 예수라고 할 수밖에 없고 더 이상 다른 이름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말이야말로 모독인 것이다! 네가 말해 봐라, 단지 ‘예수’라는 이름,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완전하게 대표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많은 이름으로 불릴 수 있지만, 그 많은 이름 중에서 어느 이름도 하나님의 전부를 다 개괄할 수는 없고, 어느 이름도 하나님을 완전히 대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많지만, 그 많은 이름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전부 명확히 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너무나 풍부해서 그야말로 다 인식할 수가 없다. 사람은 인류의 언어로 하나님을 전부 다 개괄할 수가 없다. 인류는 다만 얼마간의 유한한 어휘로써 사람이 인식한 하나님의 성품, 즉 위대, 존귀, 기묘, 난측(難測), 지고지상, 거룩, 공의, 지혜 등등을 개괄할 뿐이다. 너무나도 많다! 이 몇 개의 유한한 단어만으로는 사람이 본 유한한 하나님의 성품을 다 묘사해 낼 수도 없다. 후에 또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 격정을 한층 더 표현할 수 있는 얼마간의 말을 더하였는데, 즉 “하나님은 너무나 위대하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다! 하나님은 너무나 사랑스럽다!”라는 것이다. 현재에 이르러, 이러한 것과 유사한 인류의 언어가 절정에 이르렀어도 사람은 여전히 분명하게 표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보기엔 하나님에게 많은 이름이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는 또 이름이 하나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소시가 매우 많지만 사람의 언어가 또한 너무 결핍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특정된 단어와 특정된 이름만으로는 전혀 하나님의 전부를 대표할 수 없다. 그러면 네가 말해 봐라, 하나님의 이름이 고정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이처럼 위대하고 거룩한데, 너는 그가 시대마다 그의 이름을 바꾸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는가?』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러면 왜 여호와의 이름이 또 예수가 되었는가? 메시아가 오리라고 하였는데 어째서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왔는가? 하나님의 이름이 어찌 바뀔 수 있었는가? 그런 것은 이미 했던 사역이 아닌가? 설마 하나님이 오늘날 새로운 사역을 할 수 없단 말인가? 어제의 사역도 바뀔 수 있었고, ‘여호와’의 역사도 ‘예수’가 이을 수 있었는데, ‘예수’의 사역을 또 다른 사역으로 바꾸어 이어 갈 수 없겠는가? ‘여호와’의 이름이 ‘예수’로 바뀔 수 있었는데, ‘예수’의 이름도 바뀔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다. 다만 사람의 머리가 너무 단순한 탓에 초래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다. 그의 역사가 어떻게 변하든, 또한 그의 이름이 어떻게 변하든, 그의 성품과 지혜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면 너의 식견은 너무나 부족한 것이다. 너는 예수, 이 이름이 영원히 하나님의 이름이니 하나님은 영원히 예수라고 해야 하고 다시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너는 ‘예수’, 이 이름이 율법시대를 끝마치고 마지막 시대도 끝마치는 이름이라고 자신 있게 확정할 수 있겠는가? 누가 ‘예수’의 은혜가 시대를 끝마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관념’ 속에 규정해 놓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겠는가?>에서 발췌 『가령 하나님이 각 시대에서 하는 사역이 다 같고 다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면, 사람은 어떻게 인식하겠는가? 하나님이 여호와라고만 불려야 하고, 여호와라고 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인식할 것이다. 혹은 하나님이 예수일 수밖에 없고, 예수란 이름 외에는 하나님이 더 이상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없고, 예수 외에는 여호와도 하나님이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도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하는 하나님이라고 여긴다. 또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하는 하나님이기에 그를 예수라고 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면 너는 규례를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을 한 범위 내에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시대에서 하나님이 하는 사역, 불리는 이름, 지니는 형상, 하는 각 단계의 사역은 지금까지 조금도 규례를 지키지 않고 조금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여호와이지만 또한 예수이고 또한 메시아이며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의 사역이 차츰차츰 바뀌고 그의 이름도 상응하게 바뀌므로, 어느 한 이름도 그를 완전하게 대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릇 그가 불리는 이름은 다 그를 대표할 수 있으며, 각 시대에 그가 하는 사역은 다 그의 성품을 대표한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하나님은 각 시대에 새로운 사역을 하고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가 어찌 다른 시대에 같은 사역을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어찌 옛것을 지키겠는가? ‘예수’, 이 이름은 구속 사역으로 인해 불린 이름인데, 말세에 예수가 재림하여 또 그 이름으로 불리겠는가? 또 구속 사역을 하겠는가? 왜 여호와와 예수는 하나인데 오히려 다른 시대에 다른 이름으로 불렸는가? 모두 사역하는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단 하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전부를 다 대표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이름으로 시대를 바꾸고 이름으로 시대를 대체하는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떤 한 이름도 하나님 자신을 완전히 대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하나님의 시대성을 갖춘 성품만 대표할 뿐이고, 사역을 대표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성품에 적합한 하나의 이름을 택하여 전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그러므로 한 번 오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고, 하나의 시대를 대표하며, 하나의 새로운 출로를 개척하는데, 하나의 이름은 한 단계의 새로운 출로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항상 새로운 분이고, 그의 사역은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한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歷史)는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하고, 하나님의 사역도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한다. 6천년 경영 계획을 끝마치려면 반드시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해야 한다. 날마다 새로운 사역을 하고, 해마다 새로운 사역을 해야 하며, 새로운 출로를 개척하고 신기원을 개척하고 더 새로운 사역과 더 큰 사역을 개척해야 한다. 그에 따라 새로운 이름을 가져오고 새로운 사역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역사 이상 (3)>에서 발췌

어떻게 성경을 대할 것인가

주님을 믿는 형제자매들은 모두가 성경을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게다가 성경은 아주 권위있는 서적이기에 사람 마음속에서의 지위가 매우 높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으면 반드시 성경을 봐야 하고 성경을 봐야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그 어떤 사람도 성경의 말씀을 어겨서는 안 되고 모두 성경을 떠나서는 안 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논하려면 반드시 성경의 내막을 잘 알아야 하고 성경의 내용과 성경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요해와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구약과 신약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있습니다. 성경의 구약 부분은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지혜서 그리고 일부 선지자의 예언서로 되어 있는데, 주로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창세 사역과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에 하신 사역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어떻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는지, 인류가 어떻게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배반하게 된 것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범죄한 후의 인류를 인솔하셨고 또 어떻게 홍수로 세상을 멸하셨는지, 노아 일가는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후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셨고 또 어떻게 율법을 반포해 이스라엘 백성을 땅에서 생활하도록 인솔하셨는지, 그리고 또 일부 선지자들의 예언 등등이 기록되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구약 성경에 기록된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서 하신 사역과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시대에서 생활한 실상입니다. 신약 성경에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및 성도들의 일부 서신 그리고 마지막의 계시록이 있습니다. 주로 예수님의 강생, 예수님이 유대 각지에서 어떻게 표적과 기사를 행하셨고 또 어떻게 각지에서 전도하시면서 당시의 유대인들을 가르치셨는지,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비방하고 정죄하고 저버렸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3일 후에 부활하셨는지, 예수님 부활 후 예수님의 제자와 사도들이 어떻게 전도했고 예수님을 위해 간증했는지, 나중에 또 어떻게 성령의 인도 하에 그때의 교회들을 목양했는지……등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성경이든 신약성경이든 기록된 내용이 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셨던 사역과 일부 발생된 일에 근거한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런 사역을 하시기 전에는 결코 성경이 없었고 하나님은 성경에 근거하여 역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모든 사람이 다 인정하리라 믿습니다. 또 예를 들면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지 300여 년 후에야 예수님이 땅에서 하신 역사를 사도들이 기록한 것과 교회들을 목양할 때 사도들이 쓴 서신 그리고 주후 90여 년 후에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이상(異象)을 사람들이 한데 모아 편집한 것입니다. 그중 사도의 서신은 모두 그들 자신의 경력과 하나님 역사에 대한 인식인데, 그들은 이런 경력과 인식을 통해 당시의 교회들을 목양했습니다. 하지만 각 방면의 원인으로 인해 그들은 어떤 때에 직접 교회에 갈 수 없어서 서신의 방식으로 그곳의 형제자매들을 목양했습니다. 사실 당시 그 사도들이 쓴 서신은 성경에 기록된 그 내용만이 아니라 그중 많은 서신이 수백 년 동안 전해내려오면서 유실되었습니다. 주후 300여 년 후에 당시의 일부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서신이 사람에 대해 매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어 사람들이 읽기 편하도록 전해내려온 많은 서신 중에서 일부를 골라 한데 정리했습니다. 위에서 우리는 성경의 유래와 성경이 산생된 배경을 논했는데, 그중에서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비록 하나님 역사의 진실한 정경이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 이미 하셨던 사역이기에 결코 하나님의 현시의 역사를 대체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성경을 본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것이 율법시대와 은혜시대의 하나님의 두 단계 역사임을 다 알고 있다. 성경 구약에 기록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歷史)인데, 창세로부터 율법시대가 끝날 때까지 여호와가 어떻게 역사하였는가 하는 것이 기록되었다. ……성경에는 신ㆍ구 시대에 여호와ㆍ예수를 섬긴 사람의 경력과 인식이 기록되고 수집되었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이 이 책에서 많은 깨우침ㆍ빛비춤과 실행의 길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이 어느 한 영적 위인의 저작보다 훌륭한 까닭은 바로 영적 위인의 어떠한 저작도 다 성경에서 취재한 것이며 그들의 경력이 다 성경에서 온 것이고 또한 성경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사 사람이 어느 한 영적 위인의 책에서 공급받을 수 있을지라도 사람이 숭배하는 것은 여전히 성경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보기에는 성경이 너무나 높고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비록 성경에 ‘바울의 서신’ ‘베드로의 서신’ 이 부류의 책과 같은 일부분 생명의 말씀의 책들이 수집되었고 또한 사람이 이런 책에서 공급받고 도움받을 수도 있었지만 이런 책들은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책이고 여전히 옛 시대의 책이다. 그들의 이런 책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한 시기에만 적응될 수 있을 뿐 영원토록 남아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사역은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하기에 바울ㆍ베드로 그 시대에만 머물러있을 수 없고 즉 영원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은혜시대에만 머물러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말하니, 이런 책은 은혜시대에만 적응될 뿐 마지막 때의 국도시대에는 적응될 수 없으며, 은혜시대의 신도에게만 공급할 수 있을 뿐 국도시대의 성도에게는 공급할 수 없으며,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바로 여호와의 창세의 사역처럼, 또 여호와의 이스라엘에서의 사역처럼, 사역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시대에 뒤떨어지고 지나갈 때가 있다. 또 하나님의 사역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끝날 때가 있는 것처럼, 영원히 창세의 사역에 머물러있을 수 없고 영원히 십자가의 사역에 머물러있을 수도 없다. 십자가의 사역이 어떻게 설득력이 있고, 사탄을 패배시키는 효과에 어떻게 달할 수 있든지 사역은 어쨌든 사역이고 시대는 또 어쨌든 시대이다. 사역은 언제나 한 기초에 머물러있을 수 없고 시대도 영구불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세가 있으면 꼭 말세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에서 발췌) 하나님은 항상 새로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사역은 끊임없이 앞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필요에 근거해 가장 새롭고 가장 현실적인 사역을 계속 하고 계시며, 하나님이 하신 각 시대의 사역은 여태껏 성경에 근거한 적이 없는데,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입니다. 성경은 단지 하나님께서 이전에 하신 사역에 대해 증언한 것일 뿐이지 결코 사람에게 현실적인 생명 공급을 가져다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5:39, 40)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4:6) 보다시피, 성경에는 전혀 영생이 없고 더욱이 사람들에게 생명을 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최신 역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최신 인솔을 따라야만 진리를 얻고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행할 길이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진리, 길,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생명의 실질을 갖추었고,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생명의 도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의 근원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끊임없이 솟아흐르는 생명수의 원천이라고 한다.』 『말세의 그리스도가 가져온 것은 생명이고 가져온 것은 장구하고 영원한 진리의 도이다. 이 진리가 바로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는 경로이며, 사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칭찬받게 되는 유일한 경로이다. 네가 만약 말세의 그리스도가 공급하는 생명의 도를 찾고 구하지 않는다면 너는 영원히 예수의 칭찬을 받을 수 없고, 영원히 천국의 대문으로 들어갈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너는 역사(歷史)의 괴뢰이고 역사의 죄수이기 때문이다. 규례에, 글귀에, 역사의 멍에에 제어된 사람은 영원히 생명을 얻을 수 없고, 영원히 영구한 생명의 도를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얻은 것은 몇천 년 동안 지켜온 더러운 물일 뿐 보좌 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수의 공급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시체이고 영원히 사탄의 노리개이며 영원히 지옥의 자식이다. 이러한데, 그래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에서 발췌) 말세의 그리스도가 가져오신 것은 생명이고 가져오신 것은 장구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진리가 바로 오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발하신 음성이고 즉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관념 속에서 나오고 성경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발자취를 찾고 구하며 하나님의 최신 역사를 따르면서 하나님의 최신 인도에 순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따르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여야만 진정 하나님께로부터 진리를 얻을 수 있고 가장 현시적인 생명 공급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사탄의 시험과 하나님의 시련의 차이점을 논하다

성경에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약 1:13) 그럼 사탄의 시험과 하나님의 시련에는 어떤 차이가 있고 우리는 어떻게 분별해야 할까요?

목사와 장로를 따르면 정말 구원받을 수 있을까

많은 크리스천들은 목사와 장로들이 성경을 숙독하고 신학 이론들도 풍부하여, 목사와 장로를 따르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거라 믿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이 맞을까요? 자신의 관점이 하나님의 뜻에 맞을지 찾고 구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성육신이란 무엇일까요? 성육신의 실질은 또 무엇일까요?

성경 참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 14:9~11)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30) 관련된 하나님 말씀: 『성육신이란 바로 하나님이 육신에서 나타난 것이고, 하나님이 육신의 형상으로 피조된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라고 한 이상, 일단은 반드시 육신이어야 하고, 그것도 정상 인성을 갖춘 육신이어야 한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이다. 사실,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의 함의는 바로 육신에서 역사하고 육신에서 생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실질이 육신이 되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정상 인성이 있는 그리스도는 영이 실제화되어, 정상 인성이 있고 정상 이지가 있으며 두뇌의 사유가 있는 그런 육신이다. ‘실제화’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고, 영이 육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바로 하나님 자신이 정상 인성이 있는 육신에 거하는 것이고, 정상 인성이 있는 육신을 통해 자신의 신성의 역사를 발표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화’, 즉 말씀이 육신 된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하나님 성육신을 그리스도라고 칭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줄 수 있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실질이 있고,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면서도 그리스도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짜이다. 그리스도란 땅에서 창현(彰顯)되는 하나님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땅에서 사역을 전개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역사를 완성하는 하나님만의 특유한 육신을 가리킨다. 이 육신은 아무나 대신할 수 있는 육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육신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할 수 있는 육신이며, 하나님을 충분히 대표할 수 있는 육신이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육신이다.』 <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베풀어 줄 수 있다>에서 발췌 『바로 그가 하나님의 실질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피조된 어떤 인류보다 높고,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는 어떤 사람보다 높다. 이런 연고로 그와 같이 사람의 외형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인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오직 그만이 성육신한 하나님 자신이며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 피조된 인류이다. 똑같이 인성을 구비했지만 피조된 사람은 인성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성육신은 다르다. 그의 육신에서 인성 외에 가장 주요한 것은 바로 신성이다. 인성은 육신의 외관상으로 볼 수 있고, 또한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신성은 사람에게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신성은 인성이 있는 전제하에서라야 발표하는 것이고, 또한 사람의 상상처럼 그렇게 비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가장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신성이다. ……하나님이 성육신 되었다고 한 이상, 그의 실질은 바로 인성과 신성의 결합이다. 이 결합을 하나님 자신이라 칭하고, 또한 땅에 있는 하나님 자신이라 칭한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그가 성육신하여 생활하고 역사한 것은 모두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직분을 시작하기 전의 생활인데, 보통 사람의 가정에서 생활하고 극히 정상적인 인성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사람의 정상 생활의 윤리와 법칙 그리고 사람의 정상적인 필요(먹고, 입고, 자고, 거하는 것)가 있고, 사람의 정상적인 연약이 있으며, 정상인의 희로애락이 있다. 즉, 첫 번째는 신성이 아닌 완전히 정상적인 인성에서 생활하면서 정상인의 모든 활동에 종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직분을 시작한 이후의 생활인데, 여전히 정상 인성의 외형이 있는 보통 인성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그는 외적으로 초자연적인 것들이 전혀 없고, 직분하는 것을 생활로 한다. 이때의 정상 인성은 완전히 신성의 정상적인 역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직분을 할 때의 정상 인성이 이미 충분히 직분을 할 수 있는 인성으로 성숙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생활은 정상 인성에서 직분을 하는 생활이다. 즉,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의 생활이다. 첫 번째 생활을 완전하고 평범한 인성에서 한 까닭은 그때의 인성이 결코 신성의 모든 역사를 유지할 수 없고 성숙되지 않은 인성이어서 반드시 인성이 성숙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즉 직분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인성이어야만 비로소 그가 해야 할 직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육신인 이상, 반드시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 생활은 단지 정상 인성에서 하는 생활이다. 그러나 두 번째 생활은 인성이 이미 충분히 사역을 담당하여 직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성육신 하나님이 직분을 하는 기간의 생활은 바로 인성과 완전한 신성에서 하는 생활이다. 만일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이 강생하자마자 정식으로 직분을 시작하고, 또 모두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를 나타낸다면 육신의 실질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의 인성은 육신의 실질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인성이 없는 육신은 존재하지 않고, 또한 인성이 없는 사람은 비인류이다. 그리하여 육신의 인성은 말씀으로 된 하나님 육신의 고유한 속성이 되었다. 누가 “하나님이 육신이 되면 오직 신성만 있고 인성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논법이고, 또한 성육신이 되는 원칙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는 직분을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인성의 외형이 있는 신성에서 살면서 역사하는데, 그때의 인성은 전적으로 신성이 그 정상 육신에서 역사할 수 있도록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하는 것은 인성 속에 있는 신성이고, 신성이 역사하는 것이지 인성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신성은 인성에 가려진 신성이기에 그 실질은 여전히 완전한 신성이 역사하고 있는 것이지 인성이 역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하는 것은 이 육신이므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육신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이 되어 사람의 외형과 사람의 실질이 있고, 더욱이 하나님의 실질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예수가 땅에서 한 생활도 모두 육신의 정상 생활이었고, 육신의 정상 인성에서 생활한 것이다. 역사하고 말씀하는 권병(역주: 권세)이든지, 병 고치고 귀신 쫓는 권병이든지, 이런 비범한 일들은 그가 직분을 시작하기 전에는 기본적으로 없었다. 그가 29세 이전, 즉 직분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를 단지 정상 육신이라고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정상 육신인 데다가 또 직분을 하지 않아 사람은 그에게서 하나님이라는 낌새는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를 정상 사람이나 보통 사람으로 보았을 뿐이다. 이는 당시에 사람들이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여긴 것과 같다. 사람이 보기에 그는 보통 사람의 아들이었기에 그가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임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직분을 할 때에 많은 표적을 나타냈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모두 그가 정상 인성의 외형을 갖춘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그의 정상 인성과 그가 한 사역, 이 두 방면은 첫 번째로 말씀이 육신 된 의의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하나님이 이미 완전히 육신에 왔고 극히 평범한 사람이 되었음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역사하기 전에 그에게 정상 인성이 있는 것도, 그 후에 그가 사역을 한 것도 여전히 그가 평범한 육신임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그가 표적과 기사를 나타냈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든, 모두 정상 인성의 육신에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표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육신이 하나님의 권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의 육신은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런 권병이 있음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그가 육신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그가 해야 할 직분 내의 사역이고, 인성으로 가리워진 신성의 발표이다. 그가 어떻게 표적을 나타내든지, 어떻게 그의 권병을 분명히 나타내든지, 그는 여전히 정상 인성에서 생활했고, 여전히 정상적인 육신이었다. 그가 십자가에 오르고 죽음에서 부활하기 전에는 계속 정상적인 육신에서 살고 있었다.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사람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모두 직분 내의 일이었고, 모두 정상적인 육신에서 역사한 것이었다. 그가 십자가에 오르기 전에 어떻게 했든지 그는 정상 인성이 있는 육신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그가 하나님 자신이고 행한 것이 하나님 자신의 사역일지라도 그는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이기 때문에 식사도 하고 옷도 입었으며, 그에게 정상 인성의 요구도 있었고 정상인의 이지(理智)와 사유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은 그가 정상적인 사람임을 증명하고, 그 정상적인 사람은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이 정상 인성이 있는 육신이지 결코 비범한 육신이 아님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성육신의 인성은 육신에서 하는 신성의 정상적인 역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정상 인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또한 육신의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바로 육신에서 하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육신에 정상 인성의 사유가 없다면 하나님이 육신에서 역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육신에서 해야 할 사역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 성육신 하나님은 비록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가 있지만, 그의 역사에는 사람의 사유가 전혀 뒤섞여 있지 않다. 그는 정상 사유가 있는 인성에서 역사하고, 사유가 있는 인성의 전제하에서 역사하는 것이지, 결코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를 발휘하여 역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거하고 있는 육신의 사유가 얼마나 높든, 그의 역사에는 여전히 논리학이나 사유학이 뒤섞여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그의 사역은 육신의 사유로 상상해 낸 것이 아니라 신성의 역사가 인성에서 직접 발표된 것이다. 그의 사역은 모두 그가 해야 할 직분이고, 어느 단계도 그의 머리로 궁리해 낸 것이 아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과 같은 것은 머리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고, 또한 두뇌 사유가 있는 그 어떤 사람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복 사역도 마찬가지로 성육신 하나님이 해야 할 직분이다. 그러나 이 사역은 결코 사람의 뜻이 아니다. 이 사역은 모두 신성이 해야 할 사역이고, 혈기에 속한 사람은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은 반드시 두뇌의 정상적인 사유가 있어야 하고, 정상 인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반드시 정상 사유가 있는 인성에서 역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 역사의 실질이자 성육신 하나님의 실질이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성육신 된 인자는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발표하여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해 주었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하는 것을 통해,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계에 있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형상이 있고 뼈와 살이 있는 하나님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육신 된 인자는 하나님 자신의 신분, 지위, 형상, 성품, 소유소시 등등을 모두 구체화하고 인성화하였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말하면, 인자의 겉모습은 어느 정도 국한성이 있지만 인자의 실질과 소유소시는 완전히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표할 수 있는데, 단지 발표하는 형식상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인자의 인성이든 아니면 신성이든 다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표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은 그 기간에 육신의 방식으로 역사하고, 육신의 각도에서 말씀하고, 인자의 신분과 지위에 서서 인류를 마주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하는 실제적인 말씀과 역사를 접촉하고 체험하는 기회가 있게 하였을 뿐이다. 또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성과 자신을 낮춘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여 주고, 그와 동시에 또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실과 실제에 대해 기초적인 인식과 기초적인 정의도 있게 하였을 뿐이다.』 <하나님의 역사,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에서 발췌 『비록 하나님 성육신의 겉모습이 사람과 똑같고 또한 사람의 지식도 배우고, 사람의 언어로 말하며, 심지어 어떤 때는 사람의 방식을 쓰거나 사람의 논법을 인용하여 자신의 뜻을 표현하였지만, 인류를 대하고 일을 대하는 그의 실질은 패괴된 인류와 절대로 같지 않고, 또한 그가 서는 각도와 높이는 그 어떤 패괴된 인류도 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입은 육신도 하나님 자신의 실질을 구비하고 있고, 그의 마음과 인성에서 발표해 낸 것도 다 진리이다. ……하나님의 그 성육신이 얼마나 평범하든, 얼마나 정상적이든, 얼마나 낮든, 심지어 사람들이 얼마나 업신여기든 그의 생각과 인류를 향한 태도는 아무도 구비할 수 없고 모방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신성의 각도에 서서, 조물주의 높이에 서서 인류를 관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실질로, 하나님의 마음 상태로 인류를 대하고 있다. 그는 절대로 보통 사람의 높이에서, 패괴된 사람의 각도에서 인류를 대할 리가 없다. 사람은 인간의 안목으로 인류를 바라보고, 사람의 지식과 사람의 규례, 사람의 학설 등등을 가늠 기준으로 삼아 인류를 바라본다. 그 범위는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범위이고, 패괴된 인류가 닿을 수 있는 범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안목과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가늠 기준으로 인류를 바라본다. 그 범위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범위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육신과 패괴된 인류가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다. 그 다른 점은 각자의 실질로 인해 결정된 것인데, 바로 그 다른 실질로 각자의 신분과 지위가 결정된 것이고, 사물을 대하는 각자의 각도와 높이도 결정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에서 발췌 『그가 역사하고 음성을 발하는 것은 직접 영을 대표한다. 그가 하는 사역은 영이 하는 것이고 하는 말씀도 영이 하는 것인데, 다만 말씀으로 된 육신에 의해 발표할 뿐이다. 실제상 바로 영의 발표이고 그가 하는 사역과 말씀은 그의 실질을 대표한다.』 <실행 (7)>에서 발췌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육신이다. 하나님의 영은 지고지상하고 하나님의 영은 전능하고 거룩하고 공의롭다. 그러면 마찬가지로 그의 육신도 지고지상하고 전능하고 거룩하고 공의로운 것이다. 이러한 육신은 공의로운 일만 하고 인류에게 유익한 일만 하며 거룩하고 휘황하고 위대한 일만 할 뿐, 진리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 영을 배반하는 일은 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아주 엄중한 문제―배반 (2)>에서 발췌 『성육신한 하나님을 그리스도라고 칭한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인데, 이 육신은 육체에 속하는 그 어떤 사람과도 같지 않다. 같지 않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혈기에 속하지 않는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있는데, 그의 신성은 어떤 사람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에서의 모든 정상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인성이든 신성이든 다 천부의 뜻에 순복한다. 그리스도의 실질은 영이자 신성이므로, 그의 실질 자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실질이다. 이 실질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방해할 리가 없으며, 그는 자신의 사역을 허무는 일을 할 리가 없고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말을 할 리도 없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경영에 방해되는 사역을 할 리가 없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성령 역사의 실질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 자신의 경영을 위한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역사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 된 이상 그의 실질을 육신에 실제화하여 그의 육신이 족히 사역을 담당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 된 기간에는 그리스도의 역사가 하나님 영의 모든 역사를 대신하고, 게다가 말씀이 육신 된 기간의 전체 사역은 그리스도의 역사를 핵심으로 한다. 그 외에 어느 한 시대의 사역도 섞여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 된 이상 육신의 신분으로 역사하고, 육신에 온 이상 육신에서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완성한다. 하나님의 영이든 그리스도이든 어쨌든 다 하나님 자신이므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자신이 해야 할 직분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실질 그 자체가 권병(역주: 권세)을 지니고 있지만 그는 또 자신의 권병에서 비롯된 모든 것에 순복할 수 있는데, 영의 역사이든 아니면 육신의 역사이든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만물의 권병이고, 하나님의 실질이 있는 육신도 권병을 지니고 있지만, 육신에 있는 하나님은 또 천부의 뜻에 순복하는 모든 사역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사람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고, 또한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권병이지만 그의 육신은 또 자신의 권병에 순복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다”는 데에 내포된 뜻이다. 하나님은 영이어도 구원 사역을 할 수 있고, 사람이 되어도 마찬가지로 구원 사역을 할 수 있다. 어떻게 말씀하든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사역을 하는데, 그는 방해하거나 가로막지도 않고, 더욱이 서로 모순되는 사역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과 육신이 하는 사역의 실질은 같은 것이며, 영이든 육신이든 모두 하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고 하나의 사역을 경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영과 육신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두 가지 속성이 있지만 그 실질은 모두 같은 것으로, 다 하나님 자신의 실질과 신분이 있다. 하나님 자신에게는 패역의 성분이 없고, 하나님의 실질은 선한 것이다. 그는 모든 미와 선의 발표이고, 또한 모든 사랑의 발표이다. 설령 육신에 있는 하나님이라고 해도 아버지 하나님께 거역하는 일을 하지 않고, 그 자신을 희생한다고 해도 기꺼이 원하며 아무런 선택도 없다. 하나님에게는 독선적이거나 자고(自高)한 성분이 없고, 교만하고 자대(自大)하거나 간사한 성분도 없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런 것은 모두 사탄에게서 온 것이고, 사탄은 모든 추함과 악함의 근원이다. 사람에게 사탄과 같은 속성이 있게 된 까닭은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되고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았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속성만 있고 사탄의 속성은 없다. 하나님이 육신에 거할 때, 사역이 얼마나 힘들고 육신이 얼마나 연약하든지 그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에 방해되는 일을 할 리가 없고, 더욱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거역할 리도 없으며, 차라리 육신이 고통을 받을지언정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 마치 예수가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과 같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있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선택이 없다. 비록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 있지만 여전히 육신의 각도에 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육신의 각도에 서서 아버지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한다. 이것은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사탄에게서 온 것이면 하나님의 실질이 있을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실질만 있기에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하지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복하지도 못한다. 그리스도 외의 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아무도 하나님이 부탁한 사역을 직접 담당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경영을 자기가 해야 할 본분으로 삼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실질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사탄의 속성이다. 이 두 가지 속성은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사탄의 속성이 있는 자라면 그리스도라고 칭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할 수 없는 까닭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실질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후의 앞날을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역사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그가 비록 육신으로 있지만, 그의 인성은 육체에 속한 사람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특정된 성격이 있는데, 이 성격 또한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신성은 연약이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연약이란 그의 인성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 연약은 어떤 상황에서는 신성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범위가 있고 기한이 있는 것이지 끝없이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신성의 사역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인성이 어떠한지를 상관치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히 신성의 지배를 받는다. 인성에서의 정상 생활을 제외하고 인성에서의 모든 활동은 신성의 영향을 받고 있고, 또한 신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인성이 있다고 해도 신성의 사역과 서로 방해되지 않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 인성은 비록 처세에 미숙한 인성이지만, 신성의 정상 사역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의 인성이 패괴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직접 신성의 지배를 받고, 또한 그에게 일반 사람보다 높은 이지(理智)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인성은 신성이 지배하여 역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성이고, 신성의 사역을 가장 잘 발표할 수 있는 인성이며, 신성의 사역에 가장 잘 순복할 수 있는 인성이다. 하나님은 육신에서 역사해도 여전히 육신에 있는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을 잃지 않고 진심으로 하늘의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실질이 있으며, 그의 신분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다. 단지 그가 땅에 와서 피조물이 되어 피조물의 외형을 갖게 되었고 원래보다 인성이 더 있게 되었을 뿐이다. 그가 하늘의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소시(所是)로서 사람이 모방할 수 없다. 그의 신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육신의 각도에 서서 경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늘의 하나님을 경배한다”라는 이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도 그의 소시인데, 사람에게 요구하기 전에 그는 이미 그렇게 행하였다. 그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만 요구하고 자신은 오히려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행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다 그의 소시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역사하든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가 있을 수 없고, 사람에 대한 그의 요구가 어떠하든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다 그의 경영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모든 사람보다 높으므로 그는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권병인데, 그 권병은 바로 신성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소시이다. 이 성품과 소시로 그의 신분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이 얼마나 정상이든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고, 그가 어느 각도에 서서 말씀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든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우매무지한 사람은 흔히 그리스도의 정상 인성을 그리스도의 결점으로 본다. 그가 어떻게 신성의 소시를 표현하고 유로(역주: 흘러나옴)하든지 사람은 그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또한 그리스도가 순복과 낮춤을 표현할수록 우매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더욱 경시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해 배척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위대한 형상이 있는 ‘위인’들을 책상 위에 놓고 공양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근본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 성육신 된 실질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데에 있고, 그리스도의 정상 인성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근원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인성으로 가려지지 않고, 피조물의 각도에 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으며, 비범한 인성을 갖고 있다면, 아마 모든 사람들이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항상 하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 좋아하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에게는 인성이 없고 피조물의 속성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늘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항상 새로운 시선으로 보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언제나 경멸하는 태도를 갖는다. 그리스도가 땅에 와서 비록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여 역사할 수 있지만 그가 땅에 온 목적은 사람에게 그의 육신의 형상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고, 그에 대한 식견을 넓히게 하려는 것도 아니라, 사람이 그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아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의 기능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육신에서의 사역을 위한 것이지 결코 사람에게 그의 육신의 실질을 완전하게 알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떻게 역사하든 육신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며, 모두 정상 인성이 있는 육신에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본래 모습을 전부 나타내어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육신이 하는 사역은 지금까지 사람이 상상한 대로 그렇게 초자연적이거나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가 육신에서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고 또한 하나님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친히 하고 있지만, 그는 하늘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지도 않고 육신에서 비미은장한다.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라고 사칭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그리스도의 속성이 없다. 거짓 그리스도의 교만방자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성정으로부터 도대체 어떠한 육신이라야 그리스도인지를 대조해 낼 수 있다. 거짓 그리스도일수록 더욱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고, 더욱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사람을 미혹한다. 거짓 그리스도라면 하나님의 속성이 없고, 그리스도라면 거짓 그리스도의 성분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하나님이 성육신 된 것은 단지 육신에서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사역으로 자신의 신분을 실증하고, 자신의 유로로 자신의 실질을 실증한다. 그의 실질은 근거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신분은 자신이 빼앗아 온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한 사역과 그의 실질로 결정되는 것이다. 비록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실질이 있고, 게다가 그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는 영과 다른 육신이고, 영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육신의 외형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정상적이든, 어떻게 연약하든, 또한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든, 그의 신성을 부인할 수 없다. 성육신 하나님께는 정상 인성과 정상 인성의 연약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성의 기묘와 난측(難測) 그리고 육신의 모든 행사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는 인성과 신성이 다 아주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있기에 조금도 공허하지 않고,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다. 그가 땅에 온 주요 목적은 역사하는 것이다. 땅에서 역사하려면 반드시 정상 인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성의 위력이 얼마나 크든지 그의 고유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인성이 비록 매우 중요하지만 인성은 결코 그의 실질이 아니다. 그의 실질은 신성이다. 그러므로 그는 땅에서 직분을 시작할 때 자신의 신성의 소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의 인성은 다만 육신의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여 신성이 육신에서 정상적으로 역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역의 전부를 지배하는 것은 신성이다. 그가 사역을 완성하면 그는 자신의 직분을 다한 것이며, 사람이 인식해야 할 것은 바로 그의 모든 역사인데, 역사하는 것으로 사람에게 그를 알게 한다. 역사하는 과정에서 그는 신성의 소시를 아주 완전하게 발표하는데, 인성이 섞여 있는 성품이 아니고 사유와 인위적인 것이 섞여 있는 소시도 아니다. 그의 모든 직분이 다 끝날 때에 그는 이미 자신이 발표해야 할 성품을 완전무결하게 다 발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역사는 어떠한 사람의 지시도 받지 않고, 그의 성품의 발표 역시 상당히 자유로운데, 두뇌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사유로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유로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도 해내지 못한다. 설사 환경이 열악하거나 조건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적당한 시간에 자신의 성품을 발표한다. 그리스도이면 그리스도의 소시를 발표하고,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대적하거나 그에 대해 관념이 있다고 할지라도 누구도 사람의 관념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발표한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한다. 무릇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의 신성의 발표로 인하여 그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할 것이고, 절대로 어느 한 방면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사람이 모두 매우 미련할지라도 사람은 도대체 무엇이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인지를 알고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속셈으로 인하여 고의로 그리스도를 대적할 뿐이다. 만일 이런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인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발표한 신성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가 한 사역은 사람의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발표가 그의 실질을 결정한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부탁을 완성할 수 있고, 진심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으며, 진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할 수 있다. 이것은 모두 그의 실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의 자연적인 유로도 그의 실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자연적인 유로라고 하는 까닭은 그가 발표한 것이 모방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교육하거나 수년간 양성한 결과가 아니며, 그 자신이 배운 것이나 꾸며 낸 것도 아니라 원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의 사역과 그의 발표를 부인하고, 그의 인성을 부인하며, 정상 인성의 모든 생활을 부인하지만, 누구도 그가 진심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고, 천부의 뜻을 완성하러 온 것을 부인하지 못하며, 누구도 그가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비록 그의 형상이 그다지 사람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고, 비록 그가 말을 함에 있어 비범한 기개를 갖추지 못했으며, 비록 그의 역사가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천지개벽하게 하거나 세상을 뒤흔들지는 못했지만, 그는 정말 진심으로 천부의 뜻을 이루고, 천부에게 완전히 순복하며, 죽기까지 순복하는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그의 실질은 바로 그리스도의 실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모두 믿기 어려우나 또 확실히 존재하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직분을 모두 다 마치고 나면 사람은 그의 역사에서 그의 성품을 볼 수 있고, 그의 소시가 모두 하늘의 하나님의 성품과 소시를 대표한다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때 그가 행한 모든 사역을 종합해 보면 그는 바로 ‘말씀’으로 된 ‘육신’이지 혈기에 속한 사람과 같은 육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실질은 천부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다>에서 발췌 『그는 우리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고, 우리를 위하여 침식도 편하게 하지 못했으며, 그는 우리 때문에 울고, 우리 때문에 탄식하며, 우리 때문에 병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우리의 귀숙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는 굴욕을 참고 있었지만, 우리의 무감각, 우리의 패역은 그의 마음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피를 흘리게 하였다. 이러한 소시소유는 보통 사람에게 없는 것이고, 또한 패괴된 어떠한 사람도 구비하지 못하고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일반인에게 없는 관용과 인내가 있으며, 그의 사랑은 그 어떤 피조물도 구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분 외에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우리의 본성과 실질에 대해 손금 보듯이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으며, 인류의 패역과 인류의 패괴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하늘의 하나님을 대표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이렇게 역사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분 외에는 하나님의 권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존엄을 갖춘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그에게서 남김없이 발표되었다. 그분 외에는 우리에게 길을 가리켜 주고 광명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분 외에는 하나님이 창세로부터 오늘날까지 아직 공개하지 않은 심오한 비밀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분 외에는 우리를 구원하여 사탄의 매임에서 벗어나고 패괴 성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의 부탁을 발표하고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는 새 시대와 새 기원을 개척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역사를 가져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으며, 막연함 중에서 지내던 우리의 삶을 끝냈고, 우리(원문: 我們全人)로 하여금 구원받는 길을 철저히 보게 하였다. 그는 우리(원문: 我們全人)를 정복하고 우리의 마음을 얻었다. 그 시각부터, 우리의 마음은 지각이 있게 되었고, 우리의 영도 소생한 듯하였다. ‘이 평범한 사람, 이 작디작은 사람, 우리 가운데 생활하고 계시면서 우리에게 오랫동안 버림받았던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늘 그리워하고 밤낮으로 바라던 주 예수가 아닌가? 그분이다! 바로 그분이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다! 그분이 바로 진리ㆍ길ㆍ생명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중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았다>에서 발췌 『하나님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 성육신하든, 그가 육신에서 역사하는 원칙은 변할 수 없다. 그는 말씀으로 된 육신이지만 또 육신을 벗어나서 역사할 수 없고, 더욱이 말씀이 육신 되었으나 또 육신의 정상 인성에서 역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성육신은 의의가 없게 되고, 더욱이 ‘말씀’이 육신 된 의의가 조금도 없게 된다. 더구나 하나님이 성육신 된 것은 오직 하늘의 아버지(즉, 영)만 알고, 그 외는 육신 자신마저도 모르고 하늘의 사자도 모른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역사는 더욱 정상적이 되었고, 또한 확실히 ‘도’가 육신 된 것이고 ‘말씀’이 육신 된 것임을 더욱 나타낼 수 있으며, 그의 육신은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임을 의미한다.』 <성육신의 심오한 비밀 (1)>에서 발췌 『이 육신은 사람이자 하나님이고,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이자 완전한 신성이 있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 육신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 또한 영과 크게 다르더라도 사람을 구원하는 이는 여전히 성육신한 하나님 자신이고, 영이자 육신이다. 어떻게 칭하든, 결국은 하나님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과 육신은 갈라놓을 수 없고, 사역은 육신이 하는 것이자 하나님의 영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영의 신분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신분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패괴된 인류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필요하다>에서 발췌 『영의 발표에는 몇 방면이 포함되는가? 어떤 때는 인성에서 역사하고 어떤 때는 신성에서 역사하는데, 어쨌든 다 영의 지배를 받는다. ……오늘 말하는 실제의 하나님 자신은 인성에서도 역사하고 신성에서도 역사한다. 실제의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을 통해 정상 인성의 역사도 있고 정상 인성의 생활도 있고 완전한 신성의 역사도 있게 되어 인성과 신성이 일체로 연결되었다. 또한 이것은 다 말씀으로 이룬 것인데, 인성에서든 신성에서든 모두 말씀하고 음성을 발한다. 인성에서의 역사는 인성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에, 사람이 접촉하기 쉽고 깨닫기 쉬우며 통속적이고 알기 쉬워 모든 사람에게 공급할 수 있으므로, 지식이 있는 자든 학력이 낮은 자든 다 받아들일 수 있다. 신성에서의 역사도 여전히 말씀으로 하는데, 공급이 가득하고 생명이 가득하며, 사람의 뜻이 섞여 있지 않고 인성의 취향과 연관되지 않으며, 인성의 제한이 없고 어떠한 정상 인성의 구속도 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전히 육신 중에서 역사하지만 영의 직접적인 발표이다. ……‘하나님’이 ‘육신’에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영의 모든 역사와 말씀을 정상 인성에 의해 하는 것이고, 성육신에 의해 하는 것인데, 바로 하나님의 영이 인성 역사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육신 중에서 신성의 사역도 하는 것이다. 성육신의 하나님에게서 너는 하나님의 인성에서의 역사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신성 역사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더 실제적인, 하나님이 육신에서 나타난 실제 의의이다. 네가 만약 이것을 꿰뚫어 보았다면 너는 하나님의 각 부분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으며, 신성 역사를 너무 지나치게 중요시하지도 않고 인성에서의 역사를 너무 가볍게 보지도 않으며, 극단으로 가지도 않고 굽은 길을 걷지도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실제 하나님이란 함의는 영의 지배를 받는 인성 역사와 신성 역사를 육신 중에서 발표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생생하고 생동하게 형상적으로 창현(彰顯)하고 유로(역주: 흘러나옴)하는 것을 보게 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보게 한다.』 <너는 실제의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에서 발췌

당신은 영생을 얻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라고 하셨기에, 많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지켜 영생을 얻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지켜도 끊임없이 죄짓고 회개하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하는 원칙

1.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하는 진실한 의의는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께 순복하고 경배할 수 있기 위한 것이다. 절대 종교 의식을 해서는 안 된다. 2. 반드시 현실의 어려움과 문제에 결부시켜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해야지 실제를 벗어나 빈말과 글귀 도리를 말해서는 안 된다. 3. 반드시 본분을 하는 것과 생명 진입의 모든 문제에서 항상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하며, 진리를 찾고 구하고 깨달아 실제에 진입해야 한다. 4. 간구하고 기도함에 있어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어야 하고 또한 이지가 있어야지, 하나님께 요구하거나 강요하거나 하나님을 이용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 거래해서도 안 된다. 관련된 하나님 말씀은 다음과 같음: 『기도는 형식만 따르고 과정만 거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좀 외우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는 말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반드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는 것으로 하나님의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기도여야 한다. 기도에 좋은 효과가 있으려면, 기도가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읽는 그 위에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서 기도해야만 깨우침과 빛 비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이 제기한 요구에 대해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요구에 도달하기 원하고, 하나님이 증오하는 것은 증오할 수 있으며, 이 기초에서 인식을 더하여 하나님이 천명한 진리를 인식하고 그것에 흐리멍덩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 기도한 후에 심지와 믿음이 있고 인식과 실행의 길이 있어야 진실한 기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도에만 효과가 있게 된다. 그러나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누리고 하나님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한다.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마음이 하나님 앞에 안정될 수 있다면, 이러한 기도는 이미 하나님과 진실하게 교통하는 경지에 진입한 것이다.』 <기도의 실행에 관하여>에서 발췌 『기도하면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안정시킬 수 있다. 기도를 통해 성령의 깨우침을 찾고 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듣기 좋은 말을 몇 마디 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한바탕 크게 울며 자신의 빚짐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을 적용하는 것을 훈련하기 위한 것이고, 마음을 하나님 앞에 안정시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을 훈련하여 사람의 마음이 날마다 새로운 빛에 흡인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며, 소극적이지 않고 나태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행실을 중요시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여 생명이 자라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편차적인 면이다.』 <정상적인 영적 생활에 관하여>에서 발췌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가장 낮은 표준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에게 마음을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진심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께 참말을 한다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역사하기 원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사람의 교활한 마음이 아니라 단순하고 성실한 마음이다. 사람이 하나님에게 참말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고 사람에게 역사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기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참말을 하는 것이고, 자신의 결함이나 패역 성정을 하나님께 고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털어놓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너의 기도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너에게 얼굴을 가릴 것이다.』 <기도의 실행에 관하여>에서 발췌 『사람은 모두 이런 경력(역주: 체험)이 있다. 뜻하지 않은 일이 닥치면 매우 괴로워하는데, 괴로울 때 누구와 말이라도 하면 조금 후에는 괴롭지 않게 된다. 하지만 괴롭지 않아도 자신의 정형은 해결되지 않았다. 때로 사역에 어려움이 생기면 마음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훈계와 책망이 임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 괴로움 속에서 몇 번이나 하나님 앞에 와 기도한 적이 있느냐? 모두 스스로 조절하여 흐리멍덩하게 지나왔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도 마음속에는 아예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모두 스스로 아무렇게나 하는데, 아무런 가치도 없다. 마치 거지가 쓰레기통에서 이것저것 가득 주워 담아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처럼 모두 제멋대로 한다. 보라, 사람은 항상 바른길에서 벗어나고, 가다가 빗나가게 된다. 여기서도 사람의 본성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 일을 통해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사람의 본성은 배반이다. 사역을 하다가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게 되면, 사람은 또 ‘나는 하나님을 믿는데 왜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지? 나는 아직도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생각한다. 너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사역을 아무리 해도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기도하는 이 일은 가장 깊은 것이다. 네가 이렇게 저렇게 섬겨도 기도마저 없다면 헛되이 섬기는 것이다. 너의 정형이 비정상일수록 더욱 효과가 없게 된다. 기도할 때에는 얼마나 멋진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속의 말을 하고 솔직한 말을 하며 자신의 어려움에 근거해 사실대로 말하고 피조물의 각도에 서서, 순복하는 각도에 서서 말하면 된다. “하나님, 당신께서는 사람의 마음이 너무 강퍅한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 이 일에서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제가 연약하고 너무 형편없어 당신의 쓰임에 합당치 않음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에게 패역이 있어 사역을 하기만 하면 당신의 사역을 방해하게 되는데, 모두 당신의 뜻에 맞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자신의 사역을 하시기 원합니다. 우리는 다만 협력할 뿐입니다……” 이런 말도 해내지 못하면 너 같은 사람은 끝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기도할 때에도 이지적으로 기도했는지 분별해야 하니, 그러면 기도도 할 수 없겠네.’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것은 한동안 훈련하면 되기에 괜찮다. 기도를 하다 보면 어떤 말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직접적인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기도할 때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평소에 네가 일을 할 때 곧바로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할 수 없다. 사람이 무릎 꿇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가까운 때이다.』 <좌담 기록ㆍ기도의 의의와 실행>에서 발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기도가 부족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네가 정말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의의 있고 가치 있는 일로 본다면, 너는 기도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교통이 부족해서는 안 된다. 만일 기도가 부족하면 너는 육체 속에서 살게 되고 사탄의 매임에서 살게 되며, 진실한 기도가 없으면 흑암의 권세 아래에서 살게 된다.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날마다 진실한 기도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므로 반드시 효과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잠을 좀 적게 자고 좀 적게 누리면서 새벽 기도를 한 후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고 싶지 않은가? 이렇게 청결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먹고 마시면 더욱 하나님께 열납된다. 네가 아침마다 이렇게 실행하고, 날마다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기를 훈련하여 하나님과 교통하고 사귀면,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은 반드시 많아질 것이고 더욱 하나님의 뜻을 더듬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 저는 저의 본분을 하기 원합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서 영광을 얻으시도록, 당신께서 우리 이 무리 사람들에게서 간증을 누리시도록, 저는 당신만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바칩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여 우리가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만족케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당신을 추구 목표로 삼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여 너에게 이 부담이 있게 될 때면, 하나님은 꼭 너를 온전케 할 것이다. 너는 자신만을 위해 기도할 것이 아니라 또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도록,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러한 기도가 가장 진실하다. 너는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인가?』 <기도의 실행에 관하여>에서 발췌 『기도는 의식이 아니라 거기에는 많은 의의가 있다. 사람의 기도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느냐? 사람이 직접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네가 만약 이 일을 의식으로 간주한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 마음을 기울여 기도하지 않고 진실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 편에서 너는 열외로 취급받는데, 하나님께는 너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너에게 어찌 성령 역사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사람이 사역을 하다가 좌절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후에는 기도하지 않으면 사역도 하지 못한다. 기도로 사역을 가져오고 기도로 섬김을 가져오는 것이다. 네가 인솔자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전혀 기도에 공을 들이지 않고 기도를 참답게 하지 않으면, 이렇게 저렇게 섬기다가 넘어질 것이다. ……사람이 항상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네가 늘 혼자 하고 늘 기도가 없이 하나님을 등지고 이것저것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영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영을 하면 정죄받는 것이 아니겠느냐? 겉으로 보기에는 네가 방해하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런 모독도 하지 않은 것 같지만, 너는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네가 엇나가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지 않은가? 겉으로 보면 비록 네가 엇나가지 않은 것 같지만, 그 성질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좌담 기록ㆍ기도의 의의와 실행>에서 발췌 『본분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할 때, 너는 언제나 ‘이 본분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라고 생각해야 한다. 일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통해 일을 처리하는 원칙과 진리를 찾고 구하며, 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면, 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사실, 사람은 그런 일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이런 참된 정형과 이런 소망이 없으면, 그것은 사람이 실행 방면에서 범하는 가장 큰 착오이다. 왜냐하면 네가 하나님을 믿어도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냐?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계속 믿는다면 어떤 효과가 있겠느냐? 하나님을 믿는 의의가 또 어디에서 실현되겠느냐? …… ……네가 어떤 일을 처리하든,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하든 아니면 너 자신의 사적인 일을 하든, 너는 그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일이 인성 있는 사람이 해야 할 것인지, 네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실지, 이런 것은 네가 마땅히 생각해야 할 바이다. 네가 이렇게 한다면, 너는 바로 진리를 찾고 구하는 사람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이렇게 모든 일과 모든 진리를 참답게 대해야 성정이 변화될 수 있다.』 <좌담 기록ㆍ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며 진리를 최대한으로 실행해야 한다>에서 발췌 『너희에게는 진실한 기도가 아주 적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기도할 줄 모른다. 사실 기도는 주로 마음속 말을 하는 것인데, 평소에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기만 하면 위치에 잘못 선다. 하나님의 뜻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께 베풀어 달라고 억지로 구하는데, 그 결과 기도하면 할수록 무미건조해진다. 기도할 때 네가 마음속으로 어떤 것을 구하든지, 어떤 것을 사모하든지, 어떤 것을 얻으려고 요구하든지 혹은 어떤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 꿰뚫어 볼 수 없어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하든지, 힘을 더해 달라고 하든지, 혹은 하나님께 깨우쳐 달라고 하든지, 이런 말의 표현에도 이지가 있어야 한다. 만약 네가 이지 없이 무릎 꿇자마자 “하나님,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 저로 제 본성을 보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하십시오. 혹은 저에게 무얼 무얼 주십시오. 저를 어떻게 어떻게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 ‘주십시오’ 안에 강박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반드시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네가 스스로 사전에 다 결정한 것이다. 비록 네가 이렇게 기도할지라도 이런 기도에 대해 성령은 ‘네가 이미 스스로 결정하고 그렇게 하려고 한 이상, 이런 기도가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라고 여긴다. 기도에는 마땅히 구하고 순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너에게 일이 임할 때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면 너는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저에게 이런 일이 임했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케 하기를 원하고, 당신 앞에서 찾기 원하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의 뜻대로 하지 않고 당신의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뜻은 다 당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고, 당신을 대적하는 것이며,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임을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하기만을 원합니다. 저를 깨우쳐 주시고 이 일에서 인도해 주셔서 당신을 거스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런 어조의 기도는 적합하다. 만약 네가 ‘하나님, 어떻게 어떻게 해 주시고, 저를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저에게 적합한 환경을 마련해 주시고 합당한 사람을 예비해 주셔서 저로 사역을 잘하게 해 주십시오……’라고만 한다면, 이렇게 기도한 후에도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왜냐하면 너는 하나님께 너의 뜻대로 일을 해 달라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는 기도할 때 한 말에 이지가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네가 우매하든지, 일부러 그렇게 했든지 너의 기도에 이지가 없으면 성령이 네게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기도할 때, 이지 있게 말해야 하고 어조가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당신께서 저의 연약함을 아시고 저의 패역을 아십니다. 저에게 힘을 더해 주셔서 이런 환경을 이겨 낼 수 있게 해 주시기만을 구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뜻대로 이루십시오. 저는 그저 이렇게 구할 뿐입니다. 저는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주십시오. 설사 저로 효력을 하게 하시고 안받침물이 되게 하실지라도 저는 기꺼이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힘과 지혜를 더해 주셔서 이 일에서 당신을 만족케 하게 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안배에 순복하기만을 원합니다……” 네가 이렇게 기도하고 나면 매우 편안한 느낌이 들 것이다. 만약 네가 계속 구하기만 한다면 구한 후에도 역시 빈말 무더기뿐이다. 왜냐하면 너의 뜻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너는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이렇게 말하여라. “하나님, 당신께서 사람의 연약함을 아시고 사람의 정형을 아십니다. 이 일에서 저를 깨우쳐 주셔서 당신의 뜻을 알게 해 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모든 안배에 순복하기를 원하고, 저의 마음이 당신께 순복하기를 원합니다……” 네가 이렇게 기도하면 성령이 너를 감동시킨다. 만약 네가 기도하는 방식이 정확하지 않다면 무미건조하고, 성령이 너를 감동시키지 않는다. 네가 중얼중얼하기만 하고 묵도하거나 눈을 감고 아무렇게나 말하면, 그것은 순전히 대충대충 하여 속이는 것이다. 네가 대충대충 하여 속이는데 성령이 역사할 리가 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오면 공손하고 정직해야 하며,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 와야 한다. 율법시대를 보면 제사장들은 제물을 바칠 때, 모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기도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도 여전히 제멋대로이고 또한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워서 눈을 감고 기도하려고 하는데, 이래도 되겠느냐?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에게 반드시 어떤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사람에게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의 기도에 이지가 없을 때가 너무나 많은데, 모두 “하나님, 당신께서 저를 인솔자가 되게 하신 이상, 제가 모든 것을 합당하게 하고 당신의 사역에 엇나가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꼭 제가 이렇게 하도록 해 주셔야 합니다……”라는 말투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가? 이런 기도에는 이지가 없지 않으냐? 네가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는 것이 이렇게 이지가 없는데,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하겠느냐? 네가 그리스도 앞에 와서 내게 말할 때 이지가 없는데, 내가 들어줄 수 있겠느냐? 너를 단번에 차버리겠다! 네가 영 앞에 있는 것과 그리스도 앞에 온 것은 다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할 때, 어떻게 말해야 이지가 있는 것인지, 어떻게 말해야 정형을 경건한 위치에까지 조절하여 겸손하고 낮아질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런 후에 다시 기도하면 좋아질 것이고, 기름을 바른 것 같을 것이다. ……예수의 기도를 보아라(예수의 기도를 언급하는 것은 사람이 꼭 그의 그 각도에, 그 위치에 서서 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만일 할 만하시거든……”라고 기도하였는데, 즉 만약 할 수 있으면이라는 이런 뜻으로 상의한 것이지 “해 주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는 순복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순복하는 상황에서 기도하였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두 번째도 같은 말로 기도하였고, 세 번째도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였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더듬어 “당신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완전히 순복할 수 있었고 자신의 선택이 조금도 없었다. 그가 “만일 할 만하시거든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이겠느냐?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둘 때까지 피 흘릴 것을 생각하니 매우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에 관련되는 일이고 또한 그가 아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더듬지는 못한 전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한 것이다. 그가 그렇게 고통스러울 것을 생각했음에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주아주 순복한 것이다. 그의 기도는 정상인데, 조건을 따지며 말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지나가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아니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한 것이다. 첫 번째로 기도할 때는 깨닫지 못하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했는데, 순복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두 번째도 역시 그렇게 기도했는데, 모두 세 번 기도하였다(물론 세 번 기도한 시간은 3일만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할 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깨닫고 난 후 더 이상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처음 두 번 기도할 때는 모두 찾고 구하였는데, 역시 순복하는 상황에서 찾고 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기도하지 않는다. “하나님, 어떻게 어떻게 해 주시고, 저를 어떻게 어떻게 인도해 주시고, 저에게 조건을 예비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은 아마 너에게 적합한 조건을 마련해 주지 않고 너로 그 고통을 받게 할 수도 있다. 만약 사람이 기도할 때 늘 “하나님, 저에게 마련해 주시고, 저에게 힘을 더해 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이런 기도는 얼마나 이지가 없느냐! 너는 기도할 때 이지가 있어야 하고, 순복하는 전제하에서 기도해야 하며, 정해 놓아서는 안 된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간구하여 어떻게 어떻게 해 달라고 구해야지.’라고 정해 놓는데, 이런 기도는 너무나 이지가 없다. 많은 경우에 그 영이 사람의 기도를 전혀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기도해도 무미건조한 것이다.』 <좌담 기록ㆍ기도의 의의와 실행>에서 발췌

복음이란 무엇인가? 당신은 복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복음이란” 쉽게 말하자면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해 열심히 전하긴 했지만 당신은 복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성경 예언에는 마지막에 영원한 복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영원한 복음을 위해 우리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