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다

2018년 08월 30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창 6:9~14)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18~22)

그 시대에 하나님은 노아를 불러 아주 중요한 일을 하려고 했다. 왜 그 일을 하려고 했을까? 당시 하나님의 마음속에 한 가지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계획은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것이었다. 왜 세상을 멸하려고 했을까?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는 말씀에서 사람은 무엇을 보았느냐? 세상과 인류가 극도로 타락할 때 땅에는 한 가지 현상이 생긴다. 그것은 ‘강포가 땅에 충만’해지는 것이다. ‘강포가 충만’해지는 것을 지금의 말로 표현하자면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모든 분야에 질서가 없어 무척 혼란스럽고 관리가 잘 되지 않는다. 반면 하나님이 보기에는 이 세상의 인류가 너무 타락했다. 어느 정도까지 타락한 것일까? 하나님이 더 이상 볼 수 없고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을 정도까지 타락하고, 하나님이 멸해야겠다고 결심할 정도까지 타락한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멸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한 사람을 찾아 방주를 짓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뒤 하나님은 노아를 택하고 그 일을 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한 것이다. …

노아의 방주,

노아가 부름을 받은 일은 단순한 사실이지만, 이 기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본질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는지를 알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본질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부른 사람은 하나님이 보기에 어떤 사람일까? 분명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의 명령대로 행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다해야 할 책임과 본분으로 여겨 완수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어야 할까? 아니다. 당시 노아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받지 못했고, 하나님의 사역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너무 적었다. 성경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과연 노아가 하나님의 본체를 본 적이 있을까? 분명히 말하지만 본 적이 전혀 없었다! 당시 사람에게 임한 것은 하나님의 사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말을 하고 일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전달한 것일 뿐이었다. 하나님의 본체가 직접 사람에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 이 성경 말씀에서 기본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노아라는 사람이 해야 할 일과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나타내고 있는 본질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세밀하게 계획되어 있다. 발생한 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해 그에게는 가늠하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에 따라 그는 그런 일과 현상에 대해 어떻게 계획하고 처리할 것인지 혹은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는 모든 일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느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였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멸하려고 한 대상이 사람뿐이라고 했느냐?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혈육 있는 생물을 모두 멸하겠다고 하였다. 왜 멸하려고 했을까? 여기에서 또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다. 즉, 하나님이 인류의 타락, 모든 혈육 있는 자의 더러움과 강포, 패역을 대할 때 그의 인내에는 한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한도는 어디까지일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여기에서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는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적이 있는 사람, 말로만 하나님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찬미하기까지 하는 사람을 포함해 모든 살아 있는 존재, 이들의 깊이 타락한 행실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한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와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타락을 어느 정도까지 인내한다는 것이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그들이 바른길을 가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인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류가 그저 도덕이 부패하고 사악으로 가득 찬 정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재하고 사람에게 광명과 바른길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면 인내하지 않는다. 인류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오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인내하지 않는다. 인류의 타락이 일단 이런 정도에까지 이르면 하나님은 더 이상 인내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더 이상 인내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대체하겠느냐? 바로 임하게 될 하나님의 노와 징벌로 대체한다. 이는 하나님 성품의 일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보기에 의인이 있을까? 하나님이 보기에 완전한 자가 있을까? 하나님의 눈에 이 시대는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타락한 시대가 아니냐? 이 시대에 하나님이 온전케 하려는 사람과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인류 이외에 혈육 있는 자는 모두 하나님 인내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 세상에서 매일 너희 주변에서 발생하는, 너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직접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강포가 가득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보기에 이와 같은 세상과 시대는 끝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지금의 시대적 배경과 노아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완전히 다르지만 인류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이나 하나님의 분노는 그때와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 하나님이 인내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사역 때문이다. 하지만 각종 상황과 조건을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기에 일찍 멸했어야 했다. 홍수로 세상을 멸했던 그 시대의 상황과 비교하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 …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그를 아예 따르지 않거나 본래 그와 적대적이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를 대하고 그에게 대항하는지, 혹은 인류가 어떻게 그를 비방하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그는 오로지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경륜 속에서 그가 구원할 대상이 그에 의해 온전케 되었는지, 그가 흡족해하는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런가 하면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끔 소소한 ‘징계’를 내려 그의 진노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해일, 지진, 화산 폭발 등과 같은 징계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를 잘 따르고 곧 구원받을 사람을 힘써 보살핀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가 온전케 하려는 인류에 대해 엄청난 인내와 관용을 베풀고, 최대한도로 기다린다.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를 따르지 않고 그와 적대적인 사탄의 부류를 극도로 증오하고 혐오한다. 그는 사탄의 부류가 그를 따르는지, 그를 경배할 수 있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사탄의 부류에 대해 인내하는 동시에 증오한다. 또한 사탄 부류의 결말을 정하는 동시에 그의 경륜의 시기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성경 및 하나님이 욥을 평가한 말씀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 먼저 첫 구절을 보자.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욥에 대한 첫 번째 평가이다. 그것은 <욥기> 저자가 욥을 평론한 것이다. 물론,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를 대표하기도 한다. 그 평가는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되어 있다. 계속해서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으니라” (욥 1:8) 이 두 평가 중에 하나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같은 내용의 두 평가이다. 여기서 욥의 행위와 표현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다는 것도 충분히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욥이라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행실이 일치했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행위와 속마음을 항상 하나님 앞에 내놓고 감찰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도 해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기에, 욥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 욥이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표현들 계속해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표현들을 보자. 위와 아래 그 두 구절 외에 1장 5절을 보자.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표현 중 하나이다. 그 표현은 욥이 평소 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는지와 관련된다. 욥에게서 두드러지는 표현은 바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서도 항상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자녀들이 늘 잔치를 벌일 때에 ‘죄를 범하여 마음에서 하나님을 배반할까’ 걱정했다. 그럼 욥은 그 일에서 어떻게 표현했느냐? 본문에는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라고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욥의 이런 표현에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마음속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지, 겉면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은 욥의 평소 생활에서도 항상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욥이 자신만 악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들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걱정했던 것이다. 여기서 보다시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성은 확실한 것이고, 아무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욥은 우연히 그렇게 했을까 아니면 항상 그렇게 했을까? 본문의 마지막 말은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했다. 기술된 이 말의 뜻은, 욥이 우연히 혹은 일시적으로 기쁘면 가서 돌아보는 것이 아니고,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것도 아니라, 항상 자녀들에게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고 하였고,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여기의 ‘항상’은 일조일석이 아니고 잠시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의 표현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인식에만 머물러 있거나 입에만 달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 욥의 마음을 주도하였고, 또 욥의 행위를 지배하였으며, 욥의 마음에서 욥 자신이 생존하는 근본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욥에게는 항상 이런 행위가 있었다. 그것은 욥이 마음속으로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였고, 자기 자녀들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걱정했다는 것을 뜻하며, 욥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길의 가치가 얼마나 컸는지도 뜻한다. 욥이 항상 그렇게 행한 원인은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곧, 자신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였고, 또 자신이 하나님의 길에서 엇나가 하나님을 만족케 하지 못할까 두려워한 동시에, 자녀들을 위해서도 걱정하고 자녀들이 하나님을 거스를까 두려워한 것이다. 이런 것은 바로 욥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난 정상적인 표현들이다. 이런 정상적인 표현들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은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증했으며,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실제를 진정 살아냈다는 것을 실증했다.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는 이 말은 우리에게, 평소에 하나님 목전에서 행한 욥의 모든 행위를 알려 준다. 욥은 항상 그렇게 하였다. 그럼 욥의 행위와 마음은 하나님 앞에 상달된 것이 아니냐?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항상 욥의 마음과 행위를 열납한 것이 아니냐? 즉, 욥은 어떤 정형과 배경하에, 항상 그렇게 행할 수 있었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항상 욥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욥이 악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마 욥이 자신의 가산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하나님을 거슬러서 그로 인해 가산을 잃을까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여러 가지 설들은 사실일까? 분명히 아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욥을 열납하고 가장 귀하다고 하는 부분은, 단지 욥이 ‘항상 그렇게 행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 큰 것은 욥이 사탄에게 넘겨져 시험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목전에서의 태도와 사람 앞에서, 사탄 앞에서의 태도 때문이다. 다음 구절들이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이런 증거에서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진실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속해서 다음의 구절들을 보자.

하나님은 인류의 각 종족에게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구분하였을까? 그 일은 인류에게 있어 아주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은 각종 생물의 생존 범위를 나누고, 여러 부류 인류의 생존 방식을 정해 놓은 동시에 지구상의 각기 다른 종족과 각기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나누었고, 그 범위도 정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네 번째, 하나님은 인류의 각 종족에게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지구상에는 백인종, 흑인종, 갈색 인종 그리고 황인종이 있는데, 이는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들에게도 생활하는 범위를 정해 놓았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리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있어야 할 생존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백인종을 예로 들어 보자, 백인들은 대부분 어느 지역에서 살고 있느냐? 대부분 유럽과 미국, 이런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흑인종이 생활하는 지역은 주로 아프리카이다. 갈색 인종은 어떤 지역 범위에서 생활하고 있느냐? 주로 동남아인데, 태국, 인도,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와 같은 동남아 지역이다. 황인종은 주로 아시아에서 생활하는데, 예를 들면 중국이나 일본, 한국, 이런 나라들이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여러 인종을 다 적합하게 분포시켜 그 서로 다른 인종들이 지구의 각기 다른 지역에 분포되게 하였다. 하나님은 지구의 각기 다른 지역에 있는 서로 다른 인종을 위해 일찍이 그들에게 적합한 생존 환경을 예비해 놓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토양의 색상과 토양의 성분 같은 이런 생존 환경을 예비해 놓았다. 즉, 백인의 체내 성분은 흑인의 체내 성분과 서로 다르고, 다른 유색 인종의 체내 성분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들 때 이미 그런 생존 환경을 예비해 놓았는데, 예비해 놓은 목적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생육하기 시작하고 많아지기 시작할 때 그런 범위에 정해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류를 만들기 전에 그곳을 백인종에게 남겨 두어 백인종이 발전하고 살아가도록 미리 생각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땅을 만들 때, 이미 목적 있게, 목표 있게, 그 땅에 무엇을 더할지, 그 땅에 어떤 것을 기를지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그 땅에 어떤 높은 산들이 있어야 하는지, 평원이 얼마나 있고 수원(水源)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어떤 날짐승과 길짐승이 있어야 하는지, 어떤 어류가 있고 어떤 식물이 있어야 하는지를 하나님은 미리 예비해 놓은 것이다. 즉, 인류를 위해, 한 인종을 위해 생존 환경을 예비할 때, 하나님은 여러 방면의 많은 문제를 생각해야 했다. 지리 환경, 토양의 성분, 날짐승과 길짐승의 종류, 그리고 각종 어류의 크기와 성분, 수질의 다른 점, 또한 각종 식물의 유형… 이런 것들을 하나님은 일찍이 예비해 놓았다. 그런 환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백인종에게 예비해 준 고유의 생존 환경이다. 너희는 마땅히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많은 심혈을 기울였고, 계획적으로 일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는 다 알았겠지?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부류의 인류를 위해 세심하게 생각하셨다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각 부류 인류의 생존 환경에 어떤 날짐승과 길짐승과 각종 어류를 예비해야 하고, 높은 산과 평원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전부 다 빈틈없이, 아주 정밀하게 생각하셨다는 걸 보았습니다.) 백인종의 경우, 먹는 음식물은 대부분 무엇을 위주로 하느냐? (주로 고단백질 음식입니다. 각종 육류와 유제품과 밀가루 음식입니다.) 백인들이 먹는 음식은 아시아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백인들이 먹는 주식은 대부분 육류, 계란, 우유, 가금류이다. 빵이나 쌀밥 같은 곡물 음식은 기본적으로 접시의 한쪽에 놓는 부식이다. 야채를 샐러드로 먹는다고 해도 구운 소고기나 닭고기를 조금 첨가한다. 밀가루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치즈, 계란, 육류 등을 곁들여 먹는다. 즉, 그들의 주식은 대부분 밀가루 음식이나 쌀 종류의 음식이 아니라 고기와 치즈를 많이 먹는다. 그들이 먹는 음식은 열량이 매우 높다. 그리하여 그들은 항상 얼음물을 마신다. 식사할 때가 되면, 음식이 다 차려지지도 않았는데 얼음물부터 한 컵씩 마신다. 그래서 백인종은 아주 건장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예비해 준 생활 근원이고 생활 환경인데, 그들에게 그런 생활 방식이 있게 한 것이다. 그 생활 방식은 다른 유색 인종의 생활 방식과 다르다. 그런 생활 방식은 옳고 그름이 없이 타고난 것이고, 하나님이 정한 것이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로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인종에게 그런 생활 방식과 생활 근원이 있게 된 것은 그들의 인종으로 인한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그들에게 예비해 준 생존 환경으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이 백인종을 위해 예비한 생존 환경과 그들이 그 생존 환경에서 얻게 되는 일용할 양식은 매우 풍부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다른 인종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생존 환경을 예비하였다. 그 다른 인종에는 흑인도 있다. 흑인종은 어디에 분포되어 있느냐? 주로 아프리카의 중남부에 분포되어 있다. 그런 생활 환경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예비해 주었느냐? 열대 우림, 각종 날짐승과 들짐승, 또한 사막도 있고 각종 식물도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수원이 있고, 생활 근원이 있고, 또한 음식물 근원도 있는데, 하나님은 그들이라고 차별 대우 하지 않았다. 그들이 전에 무엇을 한 적이 있든, 그들이 생존하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도 지구의 한 지역에서 일정한 위치와 일정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황인종에 대해 말해 보자. 황인종은 주로 지구의 동방에 분포되어 있다. 동방은 환경이나 지리 위치가 서방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그 땅은 대부분 아주 기름지고, 물질 자원도 풍부하며, 지하자원도 풍부하다. 다시 말하면, 지상과 지하의 각종 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하나님은 일부분의 사람들, 그 인종을 위해서도 그 인종에게 적합하고 알맞은 토양과 기후 그리고 각종 지리 환경을 예비해 주었다. 비록 그 지리 환경이 서방과는 크게 다르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필요한 음식물, 사람의 생활 근원, 생존 근원을 예비하였는데, 단지 서방의 백인종과 생활 환경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일깨워 주고 알려 주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동방에 있는 이 인종의 수는 비교적 많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땅에 서방과 다른 성분을 많이 더해 주었는데, 지구의 그 지역에 서방과 다른 풍경과 각종 풍부한 물질을 많이 더해 주었다. 여기의 산물은 아주 풍부하고, 지리 형세도 천태만상이고 다양하여 이 방대한 수의 동방 인종을 양육하기에 충분하다. 서방과 다른 점은 동방의 땅이 남에서 북까지, 동에서 서까지 기후가 서방보다 좋다는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온도가 적합할 뿐만 아니라, 산물도 매우 풍부하고, 천연적인 경치와 천연적인 각종 지리 형세가 서방보다 훨씬 좋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했을까? 바로 백인종과 황인종 사이에 아주 합리적인 균형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할까? 백인종은 여러 면에서 황인종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린다. 먹고 쓰는 것도 황인종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떤 인종도 차별 대우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황인종에게 더 아름답고 더 좋은 생존 환경을 주었다. 바로 이런 균형인 것이다. 이제는 알았겠지? 하나님이 어느 부류 사람들에게 어느 땅에서 성장하라고 정했으면, 인류는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아주 기묘한 일이다! 설령 서로 다른 시기나 어떤 특별한 시기에 전쟁이나 침략하는 일이 있었을지라도 그 침략이나 전쟁은 절대로 하나님이 각 인종에게 정해 놓은 생존 환경을 파괴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 부류 사람들을 지구의 한 지역에 정해 놓으면, 그들은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설령 인류가 어떤 야심이 있어서 영토를 바꾸거나 확장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루기가 매우 힘들고, 성공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예를 들면, 백인들은 전에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일부 국가들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전에 독일 사람들이 일부 국가들을 침략한 적이 있었고, 영국도 인도를 점유한 적이 있었는데, 최종 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결국에는 모두 실패했다. 그 실패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자신이 정해 놓은 일을 사람이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이 영토를 확장하려는 그 기세가 얼마나 컸든, 마지막에는 철수해야 했다. 그 땅은 여전히 인도에 속하고, 그 땅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도 여전히 인도 사람이지 영국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歷史)를 연구하거나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영국이 실패한 원인에 대해 결론을 내렸는데, 그들은 그 민족이 정복될 수 없기 때문이거나 사람의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은 다 진정한 원인이 아니다. 진정한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다. 즉,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민족을 어느 땅에서 살게 하고 어디에 정착시켜 이동하지 못하게 하면, 그들은 영원히 이동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범위를 정해 주면, 그들은 그 범위에서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런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범위를 뚫고 나가지 못하는데, 그것은 매우 확실한 것이다. 침략자의 세력이 얼마나 크든, 침략당하는 자의 세력이 얼마나 미약하든, 최종 결과가 성공인지의 여부는 하나님이 결정하고,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이므로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각 인종들이 서로 다르게 분포되도록 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은 각 인종들이 서로 다르게 분포될 수 있도록 어떤 일을 하였을까? 우선 큰 지리 환경, 큰 환경을 예비했는데, 그들에게 좋은 장소를 나누어 주어 조상 대대로 거기에서 생존하도록 정해 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존 범위가 정해진 것이다. 그다음,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과 그들의 생활, 즉 그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는지, 무엇을 생업으로 하는지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일찍이 정해 놓았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을 만들 때,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각기 다르게 예비해 놓았다. 토양의 성분이 서로 다르고, 기후가 서로 다르며, 각종 식물이 서로 다르고, 각종 지리 환경도 서로 다르며, 심지어 각지에는 각지의 서로 다른 날짐승과 길짐승이 있고, 물의 각 영역에는 각 영역의 서로 다른 어류와 수산물들이 있다. 심지어 하나님은 곤충까지도 모두 그 종류를 정해 놓았다. 예를 들면, 아시아에는 까치가 있고, 미국에는 까치가 없다. 그것은 아주 특이하다. 그리고 미국의 참새도 중국 대륙의 참새와는 다르다. 아메리카에서 자라는 것들은 다 아주 크고, 아주 높고, 매우 튼튼하다. 숲 속의 나무들이 뿌리는 아주 얕게 내리지만 매우 높게 자라는데, 심지어 30m 이상 자라기도 한다. 하지만 아시아의 숲 속의 나무는 대부분 그렇게 높지 않다. 너희는 다 알로에를 알고 있겠지? 일본의 알로에는 가늘고 약하지만, 미국의 알로에는 매우 굵다. 차이가 있지 않으냐? 같은 종류의 식물이고 이름도 같지만, 아메리카 지역에서 자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크다. 그리고 확실히 구별된다. 각 방면의 차이를 사람은 보지 못할 수도 있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할 때 이미 다 나누어 놓았다. 서로 다른 인종을 위해 각기 다른 지리 환경과 지리 형세와 각종 생물을 예비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은 각 부류의 인류를 만들었기 때문에 각 부류 인류의 필요와 생활 방식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은 것은 다 아주 좋은 것이다. 이제는 분명히 알았겠지?

하나님이 무지개를 사람과 맺은 언약의 증거로 삼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1~13)

사탄이 욥을 다시 시험하다

1) 하나님이 한 말씀 (욥 2:3)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 2: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2) 사탄이 한 말 (욥 2:4~5)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3) 욥은 어떻게 시련을 대하였는가 (욥 2:9~10)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 3:3)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욥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도를 귀하게 여겼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이렇게 기록하였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 2:3)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사탄에게 똑같은 것을 반복하여 물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욥이 첫 번째 시련에서 나타낸 것과 살아낸 것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은 긍정적인 평가를 주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평가는 욥이 사탄의 시험을 겪기 전에 받은 평가와 똑같은 것이다. 즉, 시험이 임하기 전에, 욥은 하나님 안중의 순전한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이 그와 그의 집을 지켜 주고, 그에게 복도 베풀어 준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시험이 끝난 후, 욥은 가산과 자녀들을 잃었다고 해서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고, 오히려 여전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했다. 욥의 실제 표현으로, 하나님은 욥에게 갈채를 보내며 만점을 주었다. 왜냐하면 욥의 눈에는 모든 가산과 자녀 중에 아무것도 하나님을 저버릴 수 있는 이유로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욥의 마음속에서 그 어떤 가산이나 자녀들도 하나님의 지위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이 처음 시험을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욥이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귀중히 여겼다는 것을 보았다. 그 한 차례 시련에서, 욥은 단지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상을 얻고 또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모든 가산과 자녀를 빼앗긴 경력이 있게 되었을 뿐이다. 욥에게는 그것이 심령을 씻어 내는 한 차례 진실한 체험이자, 자신의 인생을 충실케 하는 한 차례 생명의 세례였고,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순복과 경외심을 검증하는 한 차례 풍성한 잔치였다. 그 시험으로, 욥의 신분은 부자에서 단 한 푼도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또 사람에 대한 사탄의 참해도 겪게 되었다. 욥은 자신이 단 한 푼도 없게 되었다고 사탄을 증오하지는 않았지만, 사탄의 그런 악랄한 행위에서 사탄의 추하고 비열한 모습을 보았고, 사탄이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배반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영원히 지키려고 하는 마음을 더욱더 불러일으킨 것이다. 욥은 ‘절대로 가산이나 자녀와 가족과 같은 그 어떤 외부의 요소 때문에 하나님을 욕하거나 하나님의 도를 등지지 않을 것이고, 또한 절대로 사탄의 노예, 가산의 노예, 그 어떤 사람의 노예도 되지 않을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라고 맹세했다. 이것은 욥의 마음의 소리였다. 그리고 시험의 다른 한 면에서도, 욥은 마찬가지로 수확이 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욥에게 준 시련에서, 욥이 얻은 것 또한 상당히 풍성했다는 것이다. 지나간 몇십 년의 삶 속에서, 욥은 여호와의 행사를 보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도 받았다. 그런 축복에 욥은 더욱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더욱더 빚진 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욥이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그토록 큰 축복을 받고, 그토록 많은 은혜를 누리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은 마음속으로 항상 기도하면서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랐고, 그와 동시에 또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거할 기회도 있기를 바랐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순복과 믿음을 인정할 때까지, 자신의 순복을 검증하고 더욱이 자신의 믿음을 정결케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때, 그 시련이 닥친 것인데, 욥은 스스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었다고 인정하고, 그런 기회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욥은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욥의 평생의 가장 큰 소원이 실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회가 온 것은 욥의 순복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검증을 받을 수 있고, 동시에 정결함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하며, 더욱이 욥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뜻한다. 욥은 그런 믿음과 추구가 있었기에, 그 시련에서 더욱 순전하게 되었고, 또한 그 시련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깨닫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욥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에 더욱더 감사했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더욱더 찬송했으며, 또한 더욱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앙망했고,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위대함과 거룩함을 간절히 사모했다. 비록 욥이 그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지만, 욥의 경력과 체험을 놓고 말하면, 욥의 믿음과 인식은 이미 아주 큰 진보가 있었고, 전의 것을 초월해 있었다. 즉, 욥의 믿음은 증가되었고, 순복에는 목표가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는 더 깊은 진보가 있게 되었다. 비록 그 시련으로, 욥의 심령과 생명은 새롭게 되었지만, 욥은 결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욥은 그 시련에서 자신이 얻은 수확을 헤아려 보았고, 자신의 부족함과 결점도 성찰해 보았다. 그와 동시에, 욥은 또 묵묵히 기도하면서 다음으로 올 시련을 기다렸다. 그 이유는 욥이 자신의 믿음과 순복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경외심이,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시련에서 승화되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일언일행 그리고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고 있으므로, 욥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도 여호와의 귀에 상달되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욥에 대한 하나님의 또 한 차례의 시련이 예정대로 임하게 된 것이다.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돌봐 주시는 마음을 진실로 체험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에게 물어본 후, 사탄은 속으로 기뻐했다. 왜냐하면 사탄은 또 한 번, 하나님이 보기에 순전한 사람을 공격할 수 있는 허락을 받게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탄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 기회인가! 사탄은 그 기회를 빌어 철저히 욥의 믿음을 무너뜨리려고 하였는데, 이로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게 하여,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더 이상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면 사탄에게 틈탈 기회가 생겨 언제 어디서나 욥을 자기 손아귀에 넣고 우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탄은 비록 자기의 사악한 의도를 빈틈없이 감추었지만, 자기의 악랄한 본성을 억제하기는 어려웠다. 그 진상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답하는 사탄의 말에서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 2:4~5) 사탄의 그 말에서, 사람은 저도 모르게 사탄의 악랄함에 대해 실질적인 인식과 느낌이 있게 된다. 사탄의 그 황당무계한 논리를 들은 후, 진리를 사랑하고 사악을 증오하는 모든 사람은 다 사탄의 비열함과 무치함을 더욱 증오할 것이고, 또한 사탄이 퍼뜨린 황당무계한 논리와 그릇된 주장에 대해 혐오감과 역겨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또 욥을 위해 깊은 기도와 축원을 해 줄 것이다. 정직한 사람이 순전함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할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영원히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내어 빛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살기를 축원할 것이며, 또한 욥의 의로운 행위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추구하는 각 사람을 영원토록 채찍질하고 격려해 줄 수 있기를 축원할 것이다. 비록 사탄의 그 말 속에서 사람들도 다 사탄의 악랄한 속셈을 알아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사탄의 ‘청구’에 시원하게 승낙해 주었다. 하지만 사탄에게 다시 한번 조건을 하나 주었을 뿐이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욥 2:6) 이번에는 사탄이 손을 펴서 욥의 뼈와 살을 치겠다고 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고 말씀했다. 그 말씀의 뜻은, 욥의 육체를 사탄에게 넘기지만, 생명은 보존하고 빼앗아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외에는 사탄이 욥을 그 어떤 방식과 수단으로 대해도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 사탄은 급히 욥에게 가서 가죽에 상처를 입혀 온몸에 악창이 나도록 손을 뻗치자, 욥은 피부의 아픔을 느꼈다. 욥이 여호와 하나님의 기묘함과 거룩함을 찬송하자, 사탄은 그것을 보고 더욱 기고만장하였다. 사탄은 사람을 해치는 쾌감을 맛보았기에, 욥의 살을 뜯어 악창이 헐도록 손을 뻗쳤다. 곧바로, 욥은 피와 살의 더없는 아픔과 고통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온몸의 피부와 살을 주물렀는데, 그렇게 하면 육체의 아픔으로 심령에 가져다주는 충격을 감소시킬 수 있을 듯싶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스스로 굳세지도록 노력하면서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고통스러운 처지를 살펴보시나이다. 어찌하여 사람의 연약함까지도 염려하시나이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사탄은 아픔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욥의 모습을 보았지만, 욥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탄은 욥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지 못해 한스러워하면서 급히 손을 뻗쳐 욥의 뼈를 상하게 했다. 순식간에, 욥은 마치 살이 뼈에서 찢겨 떨어지고 또 뼈가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은, 전에 없던 고통을 느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그 아픔은, 욥에게 죽기보다 못한 느낌을 주었다…… 욥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다…… 욥은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고, 살을 찢어 아픔을 감소시키고 싶었지만, 외치고 싶은 것을 참았고 살을 찢지도 않았다. 그 까닭은 욥이 사탄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보여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욥은 또다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때, 욥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자신의 앞에도 계셨고 뒤에도 계셨고 자신의 좌우에도 계셨지만, 하나님이 사람을 만든 의의가 결코 사람을 고통받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욥이 아파할 때, 그 아파하는 모습을 전혀 구경한 적이 없으며, 반대로 얼굴을 가리고 감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 욥은 눈물을 흘렸다. 욥은 몸의 통증을 억지로 참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사람이 일격에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연약하고 무력하며 나약하고 무지한데, 당신은 왜 그렇게도 염려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나이까? 당신께서 저를 치시면서도 스스로 아파하시는데, 사람이 어찌 당신이 염려하시고 마음에 두실 만한 가치가 있겠나이까?” 욥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지만, 하나님은 침묵하고 그저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사탄은 온갖 수단을 다 부려도 결과가 없자 조용히 물러갔다. 하지만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은 결코 그것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하나님이 욥에게서 나타낸 큰 능력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욥의 이야기는 결코 사탄이 물러간 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각 인물들의 출현으로 더 다채로운 장면이 계속 연출되고 있었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다른 한 면에서 나타난 표현은 범사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이다 욥이 사탄의 참해를 수없이 겪으면서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지 않을 때, 그의 아내가 처음으로 나서서, 사람이 볼 수 있는 사탄의 역할을 맡아 욥을 공격했다. 본문은 이렇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 2:9) 이것은 사탄이 사람의 대역을 맡아 한 말이다. 그 말에는 공격과 참소가 섞여 있고 유혹과 시험 그리고 비방도 섞여 있다. 사탄은 욥의 육체를 공격해도 소용없자, 또 직접 욥의 순전함을 공격하여, 욥이 자신의 순전함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욕하고 더 이상 계속 살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사탄은 또, “만약 여호와의 이름을 욕하면 이 모든 고통을 참을 필요가 없고, 이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말로 욥을 유인하려고 했다. 아내의 권고에 욥은 이렇게 질책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 2:10) 이 말은 욥이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인식이다. 단, 욥이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는 진실성이 그때에 실증되었을 뿐이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권고하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했는데, 그 뜻은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그렇게 대하는데, 왜 아직도 욕하지 않는 거예요? 계속 살아서 뭐해요? 당신의 하나님이 그렇게 불공평한데도 계속 여호와의 이름은 찬송받아야 한다고 하네요? 당신이 그 이름을 찬송하는데, 왜 화를 당하게 하는 거예요? 얼른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고 더 이상 따르지 마세요. 그러면 당신한테 닥친 재앙이 사라질 거예요.”라는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욥의 간증이 또 생겼다. 그 간증은 일반인에게는 없는 것이고, 또한 우리가 성경에 있는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욥이 그런 말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그 간증을 보았다. 하나님은 단지 그 기회에 욥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옳은 분임을 실증해 보여 주려고 했을 뿐이다. 아내의 권고에 욥은 순전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욕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말했다. 그 말은 참 무게가 있지 않느냐?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만이 그 말이 매우 무게가 있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다. 그 말이 무게가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칭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듣고자 했던 말이며, 하나님이 보기를 바랐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욥의 간증에서 정수(精髓)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욥의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실이 실증을 얻었다. 욥을 귀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시험을 받고 더 나아가 온몸에 악창까지 났을 때,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 아내와 친지들이 모두 권고한 그때에도 여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욥은 어떤 시험이 오든, 얼마나 큰 환난과 고통이 닥치든, 설령 죽음이 닥친다 해도 하나님은 저버릴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는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보다시피, 욥의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의 위치가 가장 중요했고, 오직 하나님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는 욥에 대한 평론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욥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노를 사는 일도 하지 않았다. 욥은 마음과 하는 말이 일치하였는데, 입으로만 찬송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본 욥의 진정한 모습이고, 또한 하나님이 욥을 귀하게 여긴 원인이기도 하다.

사탄이 처음으로 욥을 시험하다

1) 하나님이 한 말씀 (욥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 1:1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2) 사탄의 대답 (욥 1:9~11)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한 것은 욥의 믿음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이다 <욥기> 1장 8절, 이 말씀은 우리가 본, 성경에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과 사탄의 첫 대화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했느냐? 본문에는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욥을 평가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고 했다. 하나님과 사탄의 그 대화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하여 욥을 시험하게 하려고 뜻을 굳혔다. 즉, 욥을 사탄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한편으로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과 평가가 정확하여 틀림이 없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고, 욥의 간증으로 인해 사탄을 수치당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경외심을 온전케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탄이 하나님 앞에 왔을 때, 하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직설적으로 사탄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물은 것이다. 하나님의 질문에는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다. 즉, 하나님은 사탄이 이리저리 빈둥거리며 늘 하나님의 종, 욥을 엿보고 또 항상 욥을 시험하고 공격하고 있었고, 또 한 가지 방식을 써서 욥을 무너뜨려, 욥의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심은 굳게 서지 못하는 것임을 실증하려고 시도하고 있었고, 또한 제멋대로 욥을 해쳐 하나님을 욕하게 만들어, 하나님 손에서 욥을 빼앗아 가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의 마음을 감찰하기에,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보았고,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도 보았다. 하나님은 묻는 방식으로,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니, 영원히 하나님을 욕하거나 사탄을 따르는 일은 없다는 것을 사탄에게 알려 주었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듣고, 사탄은 더욱 악에 받쳐 한시 급히 욥을 빼앗아 가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사탄은 사람이 ‘순전하고 정직’할 수 있다는 것을 아예 믿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도 믿지 않으며, 그와 동시에 또 사람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증오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을 증오하기 때문이다. <욥기> 1장 9~11절에 있는 것처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악랄한 본성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또한 사탄이 욥을 해할 방도를 모색하고 음모를 꾸민 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것도 환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은 재차 사탄에게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고 알려 주어, 사탄으로 고분고분 복종하게 하여―그것의 정체를 드러내게 하여―욥을 공격하고 시험하게 하려고 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일부러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고 강조하였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사탄에게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 때문에 증오하고 분노하여 욥을 공격하게 하였다. 따라서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으로 사탄을 부끄럽게 하여 사탄이 철저히 수치당하고 실패하게 함으로써, 그로부터 더 이상 욥의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을 의심하거나 참소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시련과 사탄에게서 오는 시험을 피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시련을 감당할 수 있고 사탄의 시험을 견뎌 낼 수 있는 적임자는 오직 욥뿐이었다. 그런 대화가 있고 나서, 사탄은 허락을 받고 욥을 시험하러 갔다. 그것이 사탄의 일차 공격이었다. 일차 공격 목표는 욥의 가산이었다. 사탄이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이렇게 욥을 참소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도록 허락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탄과 대화한 목적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탄에게 요구가 하나 있었다. 즉, <욥기> 1장 12절,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하고, 욥을 사탄의 손에 넘겨준 후, 제기한 조건이다. 즉, 하나님이 사탄에게 준 최저선인데, 욥을 해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인정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목전에 있는 욥의 정직함과 순전함은 그 검증을 견딜 수 있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탄에게 범위를 하나 주었다. 곧, 욥의 모든 재산을 다 빼앗아 가도 되지만, 욥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그때,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완전히 넘겨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탄이 욥을 어떻게 시험하든, 어떤 방식을 쓰든 다 되지만, 욥을 해쳐서는 안 되고,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관하고, 사람이 죽을지 살지는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지, 사탄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그 말씀을 하자마자, 사탄은 바로 쫓아가 갖은 수단으로 욥을 시험했다. 그렇게 되어 욥은 즉시 온 산의 우양을 잃게 되었고, 하나님이 베풀어 준 모든 가산을 잃게 되었다…… 하나님의 시련은 그렇게 욥에게 임한 것이다. 비록 우리는 성경에서 욥이 겪은 시험의 유래를 알게 되었지만, ‘당사자’ 욥은 그 일을 알고 있었을까? 욥은 한낱 평범한 사람이니 자신의 배후에서 발생한 이야기를 당연히 몰랐다. 단지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과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으로, 욥은 하나님의 시련이 자신에게 임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을 뿐이다. 욥은 영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고, 또 그 시련의 배후에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욥은 어떤 일이 닥치든, 순전함과 정직함을 지켜야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 일을 대하는 욥의 태도와 반응을 분명히 보고 있었다. 하나님이 본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본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의 마음이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시련을 받기까지, 욥의 마음이 늘 하나님에게 열려 있었고, 하나님 앞에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포기하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버리지도 않았고 등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가장 기쁘고 위안이 되는 부분이다. 이어서 우리 함께 욥이 어떤 시험을 겪었는지, 시련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자. 계속해서 성경을 읽어 보자. 3) 욥의 반응 (욥 1:20~21)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욥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돌려 드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말씀한 후, 사탄은 물러갔다. 뒤이어, 욥에게 갑작스러운 맹렬한 공격이 들이닥쳤다. 먼저, 소와 나귀를 빼앗기고, 종들이 살해되었으며, 이어 양떼와 종들이 불에 타 죽었고, 그다음 낙타를 빼앗기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으며, 나중에 자녀들도 목숨을 빼앗겼다. 그 일련의 공격들은 욥이 처음으로 시험을 겪으면서 받은 고통이다. 그 공격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분부대로 단지 욥의 가산과 자녀만 겨냥하고, 욥은 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욥은 거액의 가산을 소유한 부자에서 한순간에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청천벽력 같은 그 타격은 어떤 사람도 감당할 수 없고, 올바로 대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욥은 오히려 비범한 면을 나타냈다. 성경에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욥이 여러 가지 가산과 자녀들을 잃은 것을 들은 후의 첫 반응이다. 일단, 욥은 놀라움을 표하지 않았고, 당황스러움도 표하지 않았으며, 분노나 증오는 더욱 표하지 않았다. 보다시피, 욥은 속으로 이미 그 모든 재앙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더욱이 보응이나 징벌이 임한 것도 아니라, 자신에게 여호와의 시련이 임한 것이고, 여호와께서 재산과 자녀들을 거두어 가려고 한 것임을 확신했다. 그때의 욥은 마음이 아주 평온했고, 또한 아주 맑았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이 있었기에, 자신에게 임한 재앙에 대해 이성적으로, 자연적으로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하게 표현했던 것이다.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겉옷을 찢었다’는 것은 그가 적신(원문: 赤身肉體)이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뜻하고,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욥이 신생아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왔다는 것을 뜻하며,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는 것은 욥이 알몸으로 세상에 왔으니, 여전히 아무것도 없어 신생아처럼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임한 그 모든 일을 대하는 욥의 그 같은 태도는, 그 어떤 피조물도 해낼 수 없는 것이다. 여호와에 대한 욥의 믿음은 신뢰의 범위를 뛰어넘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그의 경외와 순복이었다. 욥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것에 감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거두어 가는 것에도 감사를 드릴 수 있었고, 더더욱 자신의 목숨을 포함해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자발적으로 돌려 드릴 수도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와 순복은 인류 가운데서 본보기가 되고,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사람이 갖추어야 할 인성의 최고봉에 이른 것이다. 욥은 비록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진실한 존재를 체험했다. 욥은 자신의 체험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했고, 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가도 어떤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그 시각 자신의 육체를 거두어 가도 기꺼이 원하고, 아무런 원망도 없다고 아뢸 수 있었다. 욥의 그 모든 표현은 다 욥의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으로 인한 것이다. 다시 말해, 욥은 단순하고 성실하고 착했기 때문에, 자신이 체험하고 느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굳게 믿고, 동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기초에서 욥은 하나님이 인도한 것이나 자신이 만물 중에서 본 하나님의 행사에 따라 자신에게 요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과 행위, 표현과 일처리하는 원칙을 규범화했다. 오랜 시일이 지나, 욥은 자신의 경력(역주: 체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해 진실하고 실제적인 경외심이 생겼고, 그와 동시에 악에서 떠나게 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것이 욥이 지킨 ‘순전함’의 유래이다. 욥은 성실하고 단순하고 착한 인성을 갖추었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악에서 떠나는 실제 경력과 ‘주신 자도 여호와, 취하신 자도 여호와’라는 인식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욥은 사탄의 그런 악랄한 공격에서 간증을 굳게 설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시련이 올 때에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하나님에게 만족스러운 답변을 드릴 수 있었다. 비록 욥은 첫 번째 시험에서 아주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후세 사람들은 욥의 그런 ‘간단’한 것을 일생 동안 심혈을 기울여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고, 욥보다 더 높은 표현을 할 수 있을지는 더욱 모를 일이다. 오늘날, 욥의 그 ‘간단’한 표현을 마주하여, 그것을 다시, 오늘날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표명한 “절대적으로 순복하고 죽기까지 충성하자”라는 구호나 결심과 대조해 본다면, 너희는 부끄러워 진땀이 나지 않겠느냐? 네가 성경에 기록된 욥의 집에 닥친 그 모든 불행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이 있겠느냐? 많은 생각들이 연이어 떠오르지 않겠느냐? 아주 놀랍지 않겠느냐? 욥에게 닥친 시련은 ‘보기만 해도 끔찍하다’라는 단어로 묘사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욥에게 시련이 왔을 때, 그 모습은 문자를 통해서도 이미 비참하여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묘사되었는데, 하물며 실제 모습이야 더 말할 나위 있을까? 보다시피, 욥에게 임한 것은 ‘훈련’이 아니라 ‘실전’이었다. 욥에게 임한 그 시련은 도대체 누가 직접 조종한 것일까? 당연히 사탄이 한 것이고, 사탄이 직접 손을 쓴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어떤 방식으로 시험하라고 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단지 사탄에게 조건만 하나 주었다. 그리하여 그 시험이 곧 욥에게 임한 것이다. 그 시험이 욥에게 임했을 때, 사람들에게 사탄의 사악함과 추함, 사탄의 악랄함과 사람에 대한 증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적대심을 느끼게 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 그때 시험의 잔인한 정도는 글로 묘사할 수 없는 정도였다. 다시 말해, 사탄이 사람을 해치는 악랄한 본성과 추한 몰골은 그때에 여지없이 폭로된 것이다! 사탄은 그런 기회를 빌어, 하나님이 허락한 기회를 빌어, 욥에 대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광폭하게 해쳤는데, 그 수단과 잔인한 정도는 지금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자 전혀 견뎌 낼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욥이 사탄의 시험을 겪고 시험 속에서 간증을 굳게 섰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준 시련 속에서 사탄과 자신의 순전함, 정직함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는 대결을 펼쳤다고 하는 편이 더 낫다. 그 대결에서, 욥은 온 산의 우양과 모든 가산을 잃었고 자녀들도 잃었지만,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포기하지 않았다. 즉, 욥은 사탄과의 대결에서 자신의 가산과 자녀들을 잃을지언정,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지키고 사람됨의 근본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성경에는 욥이 가산을 잃은 전 과정이 간단하게 기록되었고, 또한 욥의 표현과 태도도 기록되었다. 간명하게 핵심을 찌른 문자적 기록은 사람들에게 마치 욥이 그 시험을 아주 ‘가볍게’ 대한 것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정말 사실의 진실한 장면을 원상 복귀하고, 또 사탄의 악랄한 본성에 결부시키면, 그 몇 마디로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고 가벼운 것이 아니며, 진실한 장면은 그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인류를,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을 해치고 증오하는 정도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해하지 말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면, 사탄은 틀림없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욥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지 않고, 또한 하나님 눈에 있는 의인,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계속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사탄을 멀리하고 사탄을 배반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한 그 기회를 빌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모든 분노와 증오를 다 욥에게 쏟은 것이다. 보다시피, 욥이 몸과 마음에서부터 육체까지, 외부에서 마음속까지 받은 고통은 그토록 너무나 심각했던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 당시의 장면을 볼 수 없기에, 성경의 기록에서 욥이 고통받을 때의 그 심정을 약간이나마 느낄 수밖에 없다. 욥이 지킨 순전함에 사탄은 수치와 무안을 당하고 허둥지둥 도망가 버렸다 욥이 그런 고통을 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나님은 감찰하고 있었고, 보고 있었으며, 또한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이 감찰하고 보고 있을 때, 하나님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당연히 마음이 몹시 아팠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프다고 하여, 자신이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한 것을 후회했을까? 그 답은 하나님이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지 사탄에게, 하나님 앞에서 지킨 욥의 의(義)를 실증할 기회를 주었고, 또한 사탄에게 그것의 사악함과 비열함을 드러낼 기회도 주었으며, 더욱이 욥에게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사탄을 향해, 나아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향해, 욥의 의를 간증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일을 간증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최종 결과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정확하고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느냐? 사실, 욥은 이미 사탄을 이기지 않았느냐? 여기에 욥의 가장 대표적인 말이 있다. 즉, 욥이 사탄을 이긴 증거이다. 욥은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고 말했다. 그 말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욥의 태도이다. 이어서 욥은 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말했다. 욥의 그런 말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시기에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실증했으며, 하나님의 칭찬은 그른 데가 없고, 하나님이 칭찬한 그 사람은 의인이라는 것을 실증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 말은 욥이 하나님을 위해 한 증거이다. 이런 평범한 말 한마디가 사탄을 매우 두려워하게 했고, 수치와 무안을 당하게 했고, 허둥지둥 도망가게 했으며, 더더욱 속수무책이 되게 했다. 또한 욥의 그 말 한마디에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 행사의 기묘와 위력을 느끼게 되었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도가 권세 잡고 있는 사람의 비범한 매력을 보게 되었으며, 더욱이 작디작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도를 지키기 위해 나타난 강대한 생명력도 보게 되었다. 첫 대결에서 사탄은 그렇게 패하고 말았다. 비록 사탄은 ‘식견을 넓혔지만’ 욥에 대해 그만두려고 하지는 않았고, 그 악랄한 본성도 결코 그 일로 인해 달라지지는 않았다. 사탄은 계속 욥을 공격하려고 시도하였고, 따라서 다시 하나님 앞에 오게 되었다…… 계속해서 욥이 두 번째 시험을 받을 때의 구절들을 보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0~21)

산상수훈 ― 예수의 비유 ― 계명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한 일용할 양식

방금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후 인류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어떤 것을 예비했는지, 즉 큰 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이야기한 5가지는 모두 그 환경에 속한다. 지금부터는 사람의 육체적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육체적 생활에 더 적합하고 부합하는 것인 식량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든 후 살기 적합한 환경에 두었다. 사람에게는 식량과 물이 필요했기에 하나님은 그런 것들도 예비해 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한 모든 사역과 매사를 보면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식량은 사람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식량이 공기보다 중요하냐? 둘 다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냐? 식량, 공기는 모두 인류가 생명과 삶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할 조건이다. 공기가 중요하냐, 물이 중요하냐? 온도가 중요하냐, 음식이 중요하냐? 모두 중요하다. 어느 것만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중에서 하나만 없어도 안 된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선택하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니다. 네가 알지 못해도 하나님은 알고 있다. 지금 너는 음식을 보면, ‘아, 먹을 게 없으면 안 되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처음에 너를 만들고 그곳에 두었을 때 스스로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겠느냐?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있다. 배고플 때 나무 위에 열매가 있고 땅에 작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너는 그제서야 ‘아, 먹을 것이 필요하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목이 말라서 물을 마셔야 할 때 그제서야 ‘아, 마실 물도 필요하구나. 물은 어디에 있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눈앞에 보이는 샘물을 마시고 나서 “맛이 좋네. 이건 뭐지?”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물이고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예비한 것이다. 식량에 관해서는, 사람이 하루에 두세 끼를 먹든 그보다 더 많이 먹든, 결론적으로 식량은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고, 육체의 정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품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식량은 어디에서 오느냐? 토양에서 온다. 토양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한 것으로 나무, 풀 등 각종 식물의 생존에 적합하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류에게 여러 가지 곡물과 각종 씨앗도 예비해 주었고, 적합한 토양을 예비해 주어 사람이 그곳에서 재배하고 식량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식량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식량에 대해서는 잘 알 것이다. 먼저, 다양한 곡물이 있다. 곡물에는 무엇이 있느냐? 밀, 좁쌀, 기장, 조 등 껍질이 있는 곡물이 있다. 밀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보리, 밀, 귀리, 메밀 등 여러 가지의 밀은 남방에서부터 북방까지 각각 다른 지대에서 자란다. 벼 또한 여러 종류가 있다. 남방에서는 남방만의 벼가 자란다. 이 벼는 알갱이가 길고 찰기가 없기 때문에 남방 사람들이 먹기에 적합하다. 남방은 날씨가 덥기에 멥쌀처럼 찰지지 않은 것을 먹어야 한다. 너무 찰져서는 안 된다. 찰기가 많으면 목 넘김이 어렵고 식욕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방 사람들이 먹는 쌀은 찰기가 많은 편이다. 북쪽은 늘 춥기 때문에 찰기가 어느 정도 있는 쌀을 먹어야 한다. 이외에 여러 종류의 콩도 있다. 이런 것들은 다 땅 위에서 자라는 것이다. 또 감자, 고구마, 토란 등 땅 밑에서 자라는 것들도 아주 많이 있다. 감자는 북방에서 자라는데 북방의 감자는 품질이 아주 좋다. 곡물을 먹을 수 없을 때는 감자를 주식으로 삼아 하루 세끼를 때울 수도 있다. 따라서 감자도 곡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고구마는 감자보다 질이 좀 떨어지지만 역시 주식으로 삼아 사람의 하루 세끼를 유지할 수 있고, 곡물 공급이 어려울 때 허기를 달랠 수 있다. 남방 사람들이 자주 먹는 토란 역시 주식으로, 감자나 고구마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다양한 것들은 모두 사람의 식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곡물로 면 요리, 만두, 쌀밥, 쌀국수를 만든다. 이렇게 다양하고 풍부한 양식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푼 것으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첫째는 이 양식이 동서남북의 각기 다른 토양과 기후에서 자라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다양한 종류의 식량 성분과 함량이 체내의 여러 성분 및 함량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양한 종류의 식량을 먹어야만 몸에 필요한 각종 영양소와 필수 성분을 유지할 수 있다. 남쪽과 북쪽에서 나는 식량의 종류는 다르지만 몸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람의 정상적인 생존을 유지시키는 기능은 비슷하다. 따라서 각지에서 여러 종류의 식량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이유는 인체에 필요하기 때문이고, 땅에서 나는 다양한 식량이 신체의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시키고 이를 통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세심한 배려로 사람에게 한두 가지가 아닌 다양한 식량을 베풀어 주었다. 따라서 사람은 밀가루 음식이 먹고 싶을 때는 밀가루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누군가 “나는 면 음식 싫고 밥 먹고 싶어.”라고 한다면 밥을 먹을 수 있다. 쌀도 알맹이가 긴 것, 짧은 것 등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입맛에 맞는 것으로 골라 먹을 수 있다. 따라서 골고루 먹는다면 영양 결핍 없이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식량을 베풀어 준 원래의 취지이다. 사람의 육체에 식량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냐? 이 현실적인 문제를 사람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리 생각하고 예비해 놓았다. 이런 것뿐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채소도 예비해 주었다. 쌀음식을 먹을 때, 계속 밥만 먹는다면 영양이 부족할 수 있다. 밥에 2가지 정도의 요리나 샐러드를 곁들여 먹는다면 비타민과 각종 미량 원소나 영양소 등이 채소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인체에 필요한 요소들을 정상적으로 보충할 수 있다. 밥을 먹지 않을 때는 과일을 먹을 수도 있다. 그렇지? 사람은 수분이 필요할 때도 있고 다른 영양소가 필요할 때도 있으며 또 색다른 맛을 원할 때도 있다. 이럴 때 채소나 과일을 먹으면 된다. 동서남북의 지역은 토양과 기후가 다르기 때문에 채소와 과일의 종류도 다르다. 남방은 날씨가 덥기에 대부분의 채소나 과일에 냉한 기운이 있어 이를 섭취하면 신체에 냉열 균형을 이룰 수 있다. 반면 북방은 채소, 과일 종류가 적은 편이지만 사람들이 먹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최근 사회의 발전, 소위 사회적 진보와 교통, 정보의 발달로 동서남북이 연결되면서 북방 사람들도 남방의 채소, 과일, 특산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1년 내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식욕과 물질적 욕구를 채울 수 있게 되었지만 몸은 오히려 손상되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식량을 예비할 때 남방과 북방 사람들에게 맞는 각각의 곡식과 채소, 과일을 예비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후에 맞는 채소, 과일 등의 식량을 예비했기 때문에 남방에서 태어났다면 그 지역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몸에 잘 맞는다. 마찬가지로 북방에도 북방 사람의 몸에 맞는 식량이 있다. 하지만 먹는 것에 대한 사람의 탐욕과 사회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대세에 휩쓸리게 되면서 이 법칙을 어기게 되었다. 지금 삶의 질이 좋아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사회의 발전은 인체에 눈에 띄지 않는 해를 끼쳤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고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물을 공급하고, 식량과 채소, 과일을 예비한 본래의 취지가 아니었다. 이는 사람 스스로가 하나님이 정한 법칙을 어겨 초래한 것이다. 이외에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것은 풍부하다. 각지에는 각각의 특산물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에는 홍대추(흔히 대추라 불림)가 많이 나고 또 어떤 지역에는 호두가 많이 나며 또 어떤 곳은 땅콩과 견과류가 많다. 이런 것으로 사람은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계절과 시기에 따라 그리고 제때에 적당량을 베풀어 준다. 사람의 육체적 향락에 대한 탐닉과 먹는 것에 대한 탐욕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만든 사람의 정상적인 성장 법칙을 쉽게 위배하고 파괴한다. 다들 알고 있는 앵두를 예로 들어 보자. 앵두는 대략 6월쯤에 생산되며 일반적으로 8월에 수확이 끝난다. 원래 앵두의 유통기한은 2개월 정도지만 지금 사람들은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그 기간을 12개월로, 이듬해에 앵두가 다시 생산될 때까지로 연장시켰다. 따라서 1년 내내 앵두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이 정상이냐? (비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앵두를 먹기에 최적의 시기는 언제냐? 6월부터 8월까지다. 그 시기가 지나면 아무리 신선하게 잘 보관한다 하더라도 그 맛이 나지 않고, 사람 몸에도 불필요하다. 앵두의 유통기한이 이미 지났다면 그 어떤 화학적 방법을 쓴다 해도 그 성분은 자연적인 생장 과정에서 만들어진 성분보다 못하다. 또한 화학 물질로 인한 인체의 손상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하거나 바꿀 수 없다. 알겠느냐? 지금의 시장 경제가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이 무엇이냐? 교통도 편리해져 사시사철 다양한 과일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북쪽에서도 바나나를 먹을 수 있고 남쪽의 모든 음식이나 과일, 특산물 등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사람 삶의 질이 좋아진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려던 것이 아니다. 이런 시장 경제는 사람의 생활에 좋은 점도 가져다줄 수 있지만 해로운 점도 가져다준다. 많은 사람들은 시장에 먹거리가 풍부하다고 마구 먹어 대며 자연법칙을 어긴 바람에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장 경제가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알겠느냐? 지금 시장에서는 포도가 1년 내내 판매되고 있지 않느냐? 포도의 유통기한은 아주 짧다. 수확한 포도를 이듬해 6월까지 보관한다면 그때도 그것을 포도라고 할 수 있겠느냐? 쓰레기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거기에는 포도 본연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포도 표면에는 많은 화학 약품이 뿌려져 있다. 1년의 시간이라면 신선도도 없고, 영양분도 오래전에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포도를 먹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행복할 수가! 30년 전만 해도 이 계절에 포도를 먹을 수 있었겠어? 먹고 싶어도 구경도 못했었지. 지금은 얼마나 좋아!”라고 한다. 정말로 행복한 것일까? 관심이 있다면, 유통기한 연장을 위해 포도에 뿌려진 화학 약품이 무엇인지, 그 성분이 인체에 어떠한 이점이 있는지 확인해 보거라. 율법시대를 보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 주어 먹게 하였다. 하나님이 그것을 저장하라고 일렀느냐?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다음날 먹을 것이 없을까 봐 잔꾀를 부려 “나중을 대비해야지!”라며 저장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느냐? 다음날 악취가 진동했다. 하나님이 여분을 두지 말라고 한 것은 굶지 않도록 예비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여분을 남기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예비해 주는 하나님의 애쓰는 마음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늘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믿을 수가 없어! 하나님이 주실지, 안 주실지 누가 알겠어? 대체 언제 주신다는 말이야?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 돼도 하나님이 주지 않으시면 나는 그냥 굶어야 되잖아. 그럼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겠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믿음은 이렇게도 보잘것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