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다

2018년 08월 30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창 6:9~14)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18~22)

그 시대에 하나님은 노아를 불러 아주 중요한 일을 하려고 했다. 왜 그 일을 하려고 했을까? 당시 하나님의 마음속에 한 가지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계획은 홍수로 세상을 멸하는 것이었다. 왜 세상을 멸하려고 했을까?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는 말씀에서 사람은 무엇을 보았느냐? 세상과 인류가 극도로 타락할 때 땅에는 한 가지 현상이 생긴다. 그것은 ‘강포가 땅에 충만’해지는 것이다. ‘강포가 충만’해지는 것을 지금의 말로 표현하자면 혼란스러워지는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는 모든 분야에 질서가 없어 무척 혼란스럽고 관리가 잘 되지 않는다. 반면 하나님이 보기에는 이 세상의 인류가 너무 타락했다. 어느 정도까지 타락한 것일까? 하나님이 더 이상 볼 수 없고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을 정도까지 타락하고, 하나님이 멸해야겠다고 결심할 정도까지 타락한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멸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한 사람을 찾아 방주를 짓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 뒤 하나님은 노아를 택하고 그 일을 하게 하였다. 다시 말해,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한 것이다. …

노아의 방주,

노아가 부름을 받은 일은 단순한 사실이지만, 이 기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본질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본질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부르는지를 알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본질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부른 사람은 하나님이 보기에 어떤 사람일까? 분명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그의 명령대로 행하는 사람이다. 동시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다해야 할 책임과 본분으로 여겨 완수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어야 할까? 아니다. 당시 노아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받지 못했고, 하나님의 사역도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너무 적었다. 성경에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과연 노아가 하나님의 본체를 본 적이 있을까? 분명히 말하지만 본 적이 전혀 없었다! 당시 사람에게 임한 것은 하나님의 사자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해 말을 하고 일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전달한 것일 뿐이었다. 하나님의 본체가 직접 사람에게 나타난 적은 없었다. 이 성경 말씀에서 기본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노아라는 사람이 해야 할 일과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나타내고 있는 본질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세밀하게 계획되어 있다. 발생한 어떤 일이나 현상에 대해 그에게는 가늠하는 기준이 있다. 그 기준에 따라 그는 그런 일과 현상에 대해 어떻게 계획하고 처리할 것인지 혹은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그는 모든 일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느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였다.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멸하려고 한 대상이 사람뿐이라고 했느냐?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혈육 있는 생물을 모두 멸하겠다고 하였다. 왜 멸하려고 했을까? 여기에서 또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다. 즉, 하나님이 인류의 타락, 모든 혈육 있는 자의 더러움과 강포, 패역을 대할 때 그의 인내에는 한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한도는 어디까지일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여기에서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는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적이 있는 사람, 말로만 하나님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찬미하기까지 하는 사람을 포함해 모든 살아 있는 존재, 이들의 깊이 타락한 행실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면 하나님은 그들을 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한계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와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타락을 어느 정도까지 인내한다는 것이냐?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그들이 바른길을 가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인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류가 그저 도덕이 부패하고 사악으로 가득 찬 정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재하고 사람에게 광명과 바른길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면 인내하지 않는다. 인류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오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면 인내하지 않는다. 인류의 타락이 일단 이런 정도에까지 이르면 하나님은 더 이상 인내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더 이상 인내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대체하겠느냐? 바로 임하게 될 하나님의 노와 징벌로 대체한다. 이는 하나님 성품의 일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보기에 의인이 있을까? 하나님이 보기에 완전한 자가 있을까? 하나님의 눈에 이 시대는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타락한 시대가 아니냐? 이 시대에 하나님이 온전케 하려는 사람과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인류 이외에 혈육 있는 자는 모두 하나님 인내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이 세상에서 매일 너희 주변에서 발생하는, 너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직접 경험하는 모든 일들은 강포가 가득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보기에 이와 같은 세상과 시대는 끝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지금의 시대적 배경과 노아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완전히 다르지만 인류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이나 하나님의 분노는 그때와 같은 양상을 띠고 있다. 하나님이 인내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사역 때문이다. 하지만 각종 상황과 조건을 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이 보기에 일찍 멸했어야 했다. 홍수로 세상을 멸했던 그 시대의 상황과 비교하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다. …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그를 아예 따르지 않거나 본래 그와 적대적이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를 대하고 그에게 대항하는지, 혹은 인류가 어떻게 그를 비방하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그는 오로지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경륜 속에서 그가 구원할 대상이 그에 의해 온전케 되었는지, 그가 흡족해하는지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런가 하면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끔 소소한 ‘징계’를 내려 그의 진노를 나타낸다. 예를 들면, 해일, 지진, 화산 폭발 등과 같은 징계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그를 잘 따르고 곧 구원받을 사람을 힘써 보살핀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가 온전케 하려는 인류에 대해 엄청난 인내와 관용을 베풀고, 최대한도로 기다린다.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를 따르지 않고 그와 적대적인 사탄의 부류를 극도로 증오하고 혐오한다. 그는 사탄의 부류가 그를 따르는지, 그를 경배할 수 있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사탄의 부류에 대해 인내하는 동시에 증오한다. 또한 사탄 부류의 결말을 정하는 동시에 그의 경륜의 시기가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넷째 날, 하나님이 또 한 번 권능을 행하자 인류의 절기와 날짜와 연도가 탄생되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창 1:14~15)

욥의 삶의 가치

시련을 겪은 후의 욥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욥 42:7~9)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욥 42:12)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7)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를 귀하게 여기고 우매한 자를 천하게 여긴다 욥기 42장 7절에서 9절에 하나님은 욥을 그의 종이라고 언급했다. 욥에게 사용했던 ‘종’이라는 이 호칭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차지하는 욥의 비중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에 대해 더 높은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을지라도, 이 호칭은 결코 욥이 하나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여기서의 ‘종’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애칭’이다. 하나님이 여러 차례 ‘내 종 욥’이라고 언급한 표현으로부터 하나님이 욥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종’이라는 단어의 함의를 언급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이 말씀 구절에서 ‘종’이라는 단어에 대해 내린 정의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먼저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욥을 시련한 후, 욥의 행동과 말을 열납했음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린 것이며, 처음으로 욥의 행동과 말이 정확하고 옳았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바스 등 친구들의 정확하지 않은 그릇된 논쟁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노한 것이다. 그들도 욥처럼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도,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도 않는 상황에서 생활했지만, 욥이 하나님에 대해 그토록 정확한 인식을 가졌던 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엉뚱하게 추측하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염증을 느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욥의 행동과 말을 열납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엘리바스 등 친구들에게 그들이 속죄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이 우매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번제를 드려 과오를 만회해야만 했던 것이다. 보통 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번제는 욥에게 드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번제가 다른 것과 차별화된 부분이다. 욥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을 증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열납되었다. 동시에, 욥의 친구들은 욥이 시험을 받던 기간에 다 드러났다. 그들은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정죄받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 이 ‘징벌’이 바로 욥 앞에서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과 노를 풀어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이 욥의 순전함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행동을 열납하지 않으나 욥의 행동은 흔쾌히 열납하고 기뻐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사람은 하나님께 열납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고,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죄를 지어 하나님 눈에 천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이 두 측면은 하나님이 두 부류 사람에 대해 내린 정의이고, 이 두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이다. 또한 이 두 부류 사람의 값어치와 지위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욥을 종이라 불렀을지라도 이 ‘종’이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에게서 권세를 받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과오를 사해 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또한,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고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보다 지위가 높고 존귀한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한 ‘종’의 진정한 함의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이런 ‘특별한 영광’을 얻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종’이라 불리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 2가지 완전히 다른 태도는 이 두 부류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하나님께 귀하게 보이는 것이다. 반면, 우매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날 수 없어 하나님이 기뻐 받지 않으며, 늘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하나님의 정죄를 받으며, 하나님께 천하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권세를 주다 욥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다. 욥의 기도에 하나님은 그들의 우매함대로 그들에게 갚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을 벌하지 않고 그들에게 어떤 응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종인 욥이 그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욥의 기도를 열납했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한 것이다. 여기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한 사람을 축복할 때 그에게 많은 것을 내려 주는데,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또 그에게 권세를 주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자격이 있게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그 몇 사람의 과오를 기억하지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욥에게 준 권세이다. ‘욥의 기도로 타인이 하나님께 정죄받지 않는’ 이런 방식으로 그 우매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엘리바스 등 친구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징벌이었다. 욥은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더 이상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은 어떤 말을 했느냐? 바로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던 말이다. 또한 욥기에 기록된 그 많은 분량의 말들이다. 그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말들을 보면, 욥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원망도 의심도 없었으며, 오직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기다림은 바로 그의 순종하는 태도였다. 그의 태도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 한 말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받았다. 그가 시련을 겪을 때,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의 곁에 있었다. 하나님이 곁에 있다고 해서 그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보고자 한 것을 보았고, 듣고자 한 것을 들었다. 욥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 앞에 이르렀고, 그의 모든 말은 하나님 귀에 상달되었다. 하나님은 다 들었고 보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때, 그 시기 하나님에 대한 욥의 앎과 마음속의 생각은 사실 지금 사람들처럼 그렇게 구체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당시의 배경에 따라 그가 말한 것을 인정해 주었다. 그것은 욥의 마음속 생각과 모든 행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것과 드러낸 것들이 이미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욥이 시련을 겪는 동안, 그의 마음속 생각과 다짐을 통해 하나님은 결과를 보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보기에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뒤이어 하나님은 시련을 거두어 갔다. 그 후 욥은 고통 속에서 벗어났으며, 욥의 시련은 그때부터 사라져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욥은 이미 시련을 겪었고 또한 시련 속에서도 굳게 서고 사탄을 완전히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당한 복을 그에게 내린 것이다. 욥기 42장 10절과 12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욥은 또 한 번 하나님의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많이 받았다. 이때, 사탄은 물러가 더 이상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욥은 더 이상 사탄의 방해와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준 것 역시 더 이상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여생을 보냈다 비록 그때의 복은 소와 양, 낙타, 재산 등에 국한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이 욥에게 주고자 했던 복은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하나님이 욥에게 어떤 영원한 약속을 주려 한다는 기록이 있느냐? 욥에 대한 하나님의 복에 결말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또 그 복은 결말과 연관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욥의 비중과 지위가 얼마나 되든지 간에,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에는 매우 적당한 선이 있었다. 그는 결말에 대해 선포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의 결말을 선포할 단계까지 진행되지 않았을 때, 즉 사역을 끝내는 단계가 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물질적인 축복만 좀 주었을 뿐 사람의 결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욥은 여생을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보냈다. 이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점이다. 같은 점은 그도 정상인처럼 늙어 가고 어느 날 세상과 이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7). 여기서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는 무슨 의미이냐? 하나님은 결말을 선포하지 않은 그 시대에 욥에게도 수명을 정해 주었으며, 그 수명이 다 찬 후 욥은 자연스럽게 세상과 이별했다. 그가 두 번째로 복을 받은 후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그에게 그 어떤 고통도 주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 무슨 선고도 아니었고, 정죄도 아니었다. 욥은 그의 살아생전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그가 죽고 난 후에 어떤 결말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았고, 그 어떤 평가도 없었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일할 때 매우 적당한 선이 있다. 그가 하는 말씀과 일의 내용과 원칙은 그의 사역 단계와 사역 시기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욥의 결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나님 마음속에 정해져 있지 않았을까?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지도 않았고 알려 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욥이 기한이 차서 죽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일생이다. 욥의 삶의 가치 욥의 일생은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니냐? 그의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왜 그의 삶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느냐? 사람 쪽에서 볼 때, 그의 가치는 무엇이냐?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를 대표해 사탄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했다. 또한 그는 피조물이 해야 할 본분을 다 이행했고,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본보기가 되어 인류에게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탄을 완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볼 때, 욥의 삶의 가치는 그가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고 찬양하여 하나님께 위안을 안겨 드리고 기쁨을 얻게 한 것에 있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의 삶의 가치는 또한 욥이 살아생전에 겪은 그 시련에서 사탄을 이겼고, 사탄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한 데에 있다. 그리고 인류 중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얻게 하였고, 하나님께 위안을 안겨 드렸으며, 절박한 마음을 가진 하나님께 결과를 보게 하고 희망을 보게 한 데에 있다. 그의 증거는 하나님의 인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고 사탄을 부끄럽게 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러한 것이 욥의 삶의 가치가 아니냐? 그는 하나님께 마음의 위안을 얻게 하고 영광받은 기쁨을 미리 맛보게 했으며, 하나님의 경륜이 거기서 완벽한 시작을 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욥의 이름은 이로부터 하나님이 영광을 얻은 상징이 되었으며, 인류가 사탄을 이긴 표징이 되었다. 욥의 삶과 그가 사탄을 이긴 위업은 하나님께 영원히 소중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후세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는 완전무결하고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여섯째 날, 창조주가 말씀하니 그의 생각 속 각종 생물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4~25)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기본적인 생존 환경 ― 소리

셋째는 무엇일까? 이 또한 인류의 정상적인 생존 환경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할 때 반드시 조절해야 할 일이었다. 그 일은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지 않았다면 인류의 생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육체와 생활에 지장이 생겨 그러한 환경에서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모든 생물이 그러한 환경에서는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소리이다.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하였고, 만유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살아가며, 만물은 하나님의 눈 아래에서 움직이고 살아가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각자 생존 가치가 있고, 존재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 존재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안중에는 모든 것이 다 살아 있는 것이다. 모두가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게 된다. 예를 들어, 지구는 끊임없이 회전하고, 태양도 달도 끊임없이 회전하며, 만물은 살아 움직임과 동시에 계속해서 소리를 낸다. 지구상의 만물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예를 들어, 산의 밑부분은 활동하며 이동하고 있고, 심해의 생물들도 움직이며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생물들, 하나님 안중의 만물들은 끊임없이, 정상적으로,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발생하고 움직이는 이러한 것들로 인해 무엇이 생길까? 바로 강한 소리이다. 지구 밖의 천체들도 계속해서 회전하고, 천체의 생명체도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생명이 있든 없든 모두가 하나님의 눈 아래에서 계속 앞으로 움직이면서 소리를 낸다. 하나님은 그 소리를 조절하였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당연히 알고 있겠지? 비행기에 가까이 갔을 때 들리는 엔진 소리는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 오래 있으면 귀가 먹먹해질 것이다. 심장이 견딜 수 있느냐? 심장이 약한 사람은 견디기 힘들고, 심장이 강한 사람이라도 오래되면 견디기 힘들다. 소리는 귀나 심장과 같은 인체에 많은 영향을 주며, 너무 큰 소리는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따라서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한 후, 움직이는 소리를 적절히 조절하였다. 이 또한 하나님이 인류를 위한 환경을 창조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들 중 하나였다. 첫째, 지구의 지면과 대기층의 거리는 소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둘째, 토양의 밀도도 소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셋째, 다양한 지리적 환경의 조합도 소리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소리를 조절하여 사람이 귀와 심장이 견딜 수 있는 환경에서 살게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소리로 인해 생존에 커다란 지장을 받게 되고, 삶에 큰 불편을 겪게 된다. 그것은 인류에게 곤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땅과 대기층 그리고 지리적 환경을 창조할 때,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이고 하나님의 지혜를 담았다. 이에 대해 사람이 자세히 알 필요는 없다. 그저 거기에 하나님의 행사가 있다는 것을 알면 된다. 그럼 너희들이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행한 일, 즉 소리를 정교하게 조절하여 인류의 생존 환경을 유지시키고, 인류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일이 필요하지 않으냐? (필요합니다.)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이런 방식을 통해 만물에게 공급해 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안정된 환경을 창조하고 제공하여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고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공급하는 방식 중 하나가 아니냐? 하나님이 행한 일이 중요하지 않으냐? (중요합니다.) 매우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느냐? 비록 이것이 하나님의 행사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하나님이 그때 어떻게 일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필요성은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지혜와 애쓰심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정도라도 느낄 수 있으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람은 만물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많은 행사를 느끼지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 여기에서 내가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단서들을 통해 너희는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알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욥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1)

욥이 겪은 시련의 전 과정을 알고 난 후, 대다수의 사람들이 욥과 관련된 정보에 관심을 보일 것이라 믿는다. 특히, 욥이 어떻게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되었는지, 그 ‘비결’에 더욱 관심을 보일 것이다. 오늘 여기서 욥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도록 하자. 욥의 일상생활에서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음을 보았다 욥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하려면,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먼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여기서 말하는 ‘순전하고 정직하다’를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느냐? 욥이 아주 완벽하고 강직하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이것은 문자적인 해석과 이해이다. 욥이라는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실생활을 떠나서는 안 된다. 단지 문자적으로, 책에서, 그리고 도리상만으로는 그 어떤 답도 찾을 수 없다. 먼저 욥의 일상생활이 어땠는지 살펴보자. 즉, 그의 삶에서 보편적인 모습은 어땠는지 보자. 이것들을 통해 욥의 삶의 원칙과 인생 목표를 알아보고, 또 욥의 인성과 품격, 그가 추구한 것이 어땠는지 알아보자. 성경의 욥기 1장 3절의 마지막 구절을 보도록 하자.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이 구절은 그 당시 욥의 지위와 신분이 아주 높았음을 말해 준다. 여기에서 그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인 이유가 많은 재산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이기 때문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어쨌든, 욥의 지위와 신분은 사람들에게 존중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욥에 대한 첫인상이다. 즉, 욥은 순전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고, 엄청난 재산과 고귀한 지위를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 환경과 조건을 가진 정상인이라면, 그가 평소에 먹고 마시는 것, 생활의 질, 개인 생활의 각 부분은 절대다수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다음 성경 구절들을 계속 봐야 한다.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4~5). 이 구절에는 2가지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는 욥의 자녀들이 자주 잔치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일은 욥이 항상 번제를 드렸는데, 이는 자녀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늘 걱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2가지 일은 두 부류 사람의 서로 다른 삶의 내용에 대한 기록이다. 하나는 욥의 자녀들이 생활이 풍족하여 늘 잔치를 베풀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으며, 풍부한 물질이 가져다주는 높은 질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나날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늘 죄를 짓고, 늘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를 성결케 하지 않고, 이를 위해 번제를 드리지 않았다. 이것으로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더욱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욥의 자녀들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중점은 이러한 일들이 임했을 때 욥은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성경 구절에 기록되어 있는 다른 한 가지 일이다. 이 일은 욥이라는 사람의 인성과 본질, 그의 일상생활과 관련된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욥의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 때 욥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욥의 자녀들만 항상 함께 먹고 마셨던 것이다. 즉, 욥은 잔치를 베풀지도, 자녀들과 함께 즐기지도 않았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부유하고, 각종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호사를 부리지 않았다. 그는 부유하다고 해서 질 높은 생활 환경에 빠져 살지 않았고, 육체적 쾌락을 탐하지도 않았으며, 번제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욱이 부유하다고 해서 마음으로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는 일이 없었다. 여기서 욥은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준 복으로 인해 탐욕스러워지거나 향락에 빠지지 않았고, 생활의 품격을 중시하지도 않았으며, 일을 함에 겸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사람됨에서 그가 허세를 부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조심스럽고 신중했으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생각했고,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 이것은 욥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욥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했고, 그의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도 대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일상에서 행한 것이 자녀들을 위한 것이든 자신을 위한 것이든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과 관련이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단지 입술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실행에 옮겨졌으며,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드러났다. 욥의 이와 같은 실제 모습에서 우리는 욥의 정직함을 보았으며, 정의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그의 본질을 보았다. 그가 항상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했다’는 것은 자녀들의 행동을 지지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싫어하고 그들을 정죄했다는 뜻이다. 그는 자녀들의 행위가 여호와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자복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욥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 우리는 욥의 인성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욥은 항상 죄를 일삼으며 하나님께 범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았고, 그들을 멀리하고 피했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그는 혈연관계에 연연해 사람됨의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정에 이끌려 그들의 죄에 관용을 베푸는 일도 없었다. 대신, 그들이 죄를 자백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도록 권고하고, 그들이 향락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욥이 사람을 대하는 원칙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원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는 하나님이 열납하는 것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과 악행을 저지르거나 하나님께 죄를 짓는 자들은 혐오했다. 그의 애증은 그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드러났다. 이것이 곧 하나님 눈에 보인 욥의 정직함이었다. 물론 이 역시 우리가 알아야 할, 욥이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보인 진정한 인성과 삶의 모습이다. 시련 속에서 보여진 욥의 인성(시련 속에서 보인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에 대해 알아보다) 이상 우리가 말한 것은 다 시험을 당하기 전 욥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난 인성의 여러 측면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면에서 보여지는 욥의 모습을 통해 욥의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악에서 떠나는 것에 대해 일차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알고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일차적’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인성과 품격, 욥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추구하는 정도에 대해 아직 진정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절대다수의 사람은 성경에서 알게 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한 욥의 이 두 구절을 통해 욥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조금 갖게 된 것 외에는 깊이 있는 앎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하나님이 주는 시련을 받아들일 때 어떤 인성을 보였는지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이 욥의 진정한 인성을 완전히 볼 수 있다. 욥은 재산을 약탈당하고, 자녀들이 목숨을 잃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욥 1:20). 이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욥이 이 소식을 듣고 난 후 놀라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으며, 소식을 알리러 온 종을 꾸짖지도 않았다. 더욱이 현장에 가서 조사하지도 않았고, 어떤 상황인지 사실 확인을 해서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잃은 재산을 아까워하거나 그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자녀와 가족들을 잃은 것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 욥의 이러한 행동은 일반 사람들의 행동과 달랐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안겨 주었으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가 ‘냉혈 인간’이라는 비난을 사게 되었다. 재산이 순식간에 사라져 아무것도 없게 될 때, 일반 사람들은 괴로움이나 절망감을 느낄 것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에게 재산은 사람이 일생 동안 흘린 피땀이며, 사람이 생존을 위해 의지해야 하는 것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희망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재산이 사라졌다는 것은 자신의 피땀 흘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고, 희망이 사라지고 심지어는 미래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정상인들이 재산을 대하는 태도이고, 재산과 사람의 밀접한 관계이다. 또한 사람이 재산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다수의 사람은 욥이 재산을 대하는 이러한 냉담한 태도에 대해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오늘 욥의 마음을 해석함으로써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혹을 풀어 가도록 하자.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욥에게 풍부한 재산을 주었으니 욥은 재산을 잃고 하나님께 죄송한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하나님이 준 재산을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했고, 보살피지도 못했으며, 지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산이 약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욥의 첫 번째 반응은 마땅히 현장으로 달려가 각종 물건을 철저히 점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죄를 자백했어야 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모든 것은 다 본인이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받게 된 복을 삶의 근거로 삼는 대신 자기가 지켜야 할 길을 전심전력으로 지키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베풀어 준 복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더 많은 복을 탐하거나 더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재산을 대하는 태도였다. 욥은 복받기 위해 무엇을 하지는 않았으며, 복이 없거나 복을 잃었다고 걱정하거나 상심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베풀어 준 복으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모든 것을 망각하는 일이 없었고, 항상 복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길을 소홀히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일도 없었다. 재산을 대하는 욥의 태도를 통해, 사람들은 욥의 참된 인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욥은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물질생활에 대한 요구 기준이 아주 낮았다. 둘째,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거두어 갈까 걱정한 적도 없고 두려워한 적도 없다. 이것은 그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태도이다. 즉, 하나님이 언제 거두어 가든 혹은 하나님이 거두어 가든 가지 않든, 어떤 요구도 원망도 없었다. 그는 이유도 묻지 않았고, 하나님의 배치에 순종하기만을 구했다. 셋째, 욥은 본인의 재산은 하나님이 준 것이라고 생각했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이다. 즉, 욥의 확신을 가리킨다. 욥에 대한 이상의 3가지 개괄을 통해 욥의 인성과 그가 평소에 진실로 추구한 것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욥이 재산을 잃었을 때 그처럼 냉정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욥의 그러한 인성과 그의 추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욥은 평소에도 그렇게 추구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준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량과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욥이 한 이 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그가 갑작스러운 생각이 떠올라 만들어 낸 말도 아니다. 이는 그가 오랜 인생의 경험에서 보고 얻은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기만 하고, 하나님이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며 원망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욥의 순종은 아주 실제적이지 않으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만 믿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은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욥은 아주 성실하고 정직하지 않으냐?

하나님은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어 인류에게 안정된 생존 환경을 주었다

…다음으로 말하려는 또 다른 측면은 하나님이 만유를 다스리는 방식이다. 이 방식이란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만든 후 어떻게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주제도 너희에게 조금 벅찰 것이다.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는 일을 사람이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할 수 없다. 사람은 파괴할 줄만 알지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출 줄 모르고, 다스리지도 못한다. 사람에게는 그렇게 큰 권능도, 능력도 없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마찬가지로 인류의 생존과 지대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하려는 모든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생존을 유지시키기 위해, 인류에게 좋은 생존 환경을 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 중요한 일을 하여 인류의 생존을 유지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만물의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보면 아주 두루뭉술한 주제이지만 일단 사람에게 하나의 개념을 전하고 있다. 바로 만물의 균형을 맞추는 것도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라는 것이다. ‘균형을 맞춘다’는 말의 표면적 의미는 무엇이냐? 우선,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바로 균형을 잃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다들 천칭을 알 것이다. 천칭으로 어떤 물건의 무게를 잴 때 이 물건을 한쪽 접시에 놓고, 다른 쪽 접시에는 추를 놓아 추의 개수에 따라 이 물건의 중량이 결정되는데, 이것을 균형을 맞춘다고 한다. 천칭의 균형을 맞추려면 양쪽의 중량이 반드시 같아야 한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많은 것을 만들었다. 고정된 것, 이동하는 것, 살아 있는 것, 숨 쉬는 것, 숨 쉬지 않는 것, 이 많은 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는 관계가 되는 것이 쉽겠느냐? 분명 여기에는 법칙이 있는데, 아주 복잡하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께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연구하려면 상당히 복잡하다. ‘균형을 맞춘다’는 이 간단한 말을 인류가 연구하고, 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인류의 생물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나아가 역사를 연구하는 그런 인물까지 다 출동한다고 한들 어떤 최종적인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겠느냐? 연구 결과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만물이 너무나 기묘해서 사람은 영원히 측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들 때 만물 간에 법칙을 만들고 서로 다른 생존 방식을 만들어 서로 제약하고, 서로 보완하고, 서로 공급하게 하였다. 각 방식은 단일하고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그래서 사람이 머리와 배운 지식, 자신이 본 현상들을 통해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는 법칙을 증명하거나 연구하려면 알아내기가 매우 어렵고 또 결과를 얻어 내기도 매우 힘들다. 결과를 얻기 어려운데 인류의 머리와 지식으로 하나님이 만든 만물을 다스린다면 인류는 그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류가 만물의 생존 법칙을 모른다면 이런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만물을 관리하고 다스리게 한다면 인류는 쉽게 이 균형을 깨뜨릴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균형이 깨지면 인류의 생존 환경도 파괴되고, 생존 환경의 파괴와 함께 인류의 생존에 위기가 생기고 재앙이 따라올 것이다. 인류가 재앙 속에 살 때 인류의 앞날은 어떠하겠느냐? 가늠하기 어려운 예측 불허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겠느냐? 우선, 지구상에 어떤 곳은 일 년 내내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지만, 어떤 곳은 겨울이 없고 사계절이 모두 봄과 같아서 얼음이나 눈을 볼 수 없다. 이것이 하나의 방식이고, 이는 큰 기후적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산은 보기에 식물이 무성하다. 각종 식물로 뒤덮인 땅에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심지어 사람이 그 안을 걸으면 해를 못 볼 정도다. 반면, 저 산은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황량한 산봉우리만 겹겹이 쌓여 있다. 겉보기에는 둘 다 흙이 쌓여 생긴 산인데, 한쪽은 삼림이 무성하고, 다른 한쪽은 풀 한 포기 없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방식이다. 세 번째로, 이쪽은 푸른 초원이 한없이 펼쳐져 있지만, 저쪽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 생물은커녕 수원도 안 보이고, 모래바람만 세차게 불고 있다. 네 번째로, 이쪽은 해수로 뒤덮여 있고 수역도 넓은데, 저쪽은 샘 하나 보기 힘들다. 다섯 번째로, 이쪽 땅은 늘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고, 공기도 촉촉하지만, 저쪽 땅은 늘 뜨거운 태양이 떠 있고, 비 한 방울 보기가 아주 힘들다. 여섯 번째로, 이쪽은 공기가 희박하고 호흡이 곤란한 고원이지만, 저쪽은 각종 철새가 서식하는 늪지와 습지다. 이것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기후 혹은 서로 다른 지리적 환경에 상응하는 기후나 환경이다. 즉, 하나님은 큰 환경의 틀에서 기후부터 지리적 환경에 이르기까지, 토양의 다양한 성분부터 수원의 양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기본적인 생존 환경을 균형 있게 맞추어 사람이 사는 곳의 공기, 온도, 습도의 균형을 이루어 낸다. 이런 대조적인 지리 환경이 있기에 인류에게 균형 잡힌 공기가 있고, 균형 잡힌 계절별 온도와 습도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류가 예전과 다름없이 이런 생존 환경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선 큰 환경에서의 균형은 서로 다른 지리적 위치와 형세, 그리고 서로 다른 기후의 변천으로 상호 제약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균형을 이루게 하고, 인류가 필요로 하는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것은 큰 환경에서 한 이야기다. 세부적인 부분을 보도록 하자. 어떻게 식물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균형 잡힌 생존 환경 속에서 식물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생존해 나가도록 할 수 있을까? 바로 각종 식물의 수명과 생장 속도와 번식 속도를 주관함으로써 식물의 생존 환경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가령 작은 풀은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꽃을 피우며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 그 풀은 죽는다. 이듬해가 되면 작은 풀의 씨앗이 이어서 싹을 틔우며 같은 규칙을 지속한다. 작은 풀의 수명은 무척 짧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은 봄, 여름, 가을이라는 시간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각종 나무도 각기 수명이 다르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주기도 각기 다르다. 어떤 나무는 30에서 50년을 살다가 죽는다. 수명이 30년에서 50년인 것이다. 그 나무의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 그 열매가 다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렇게 또 30년에서 50년을 산다. 나무에게는 이런 주기가 있다. 늙은 나무가 죽으면 어린 나무가 자란다. 그래서 늘 숲속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무들도 정상적인 순환과 생사의 과정이 있다. 어떤 나무는 천 년 이상 살고 심지어는 3천 년을 살기도 한다. 어떤 종류의 식물이든 그것의 수명이 몇 년이든 결국 하나님은 그것의 수명과 번식 능력, 속도, 수량, 빈도에 따라 식물의 균형을 주관한다. 그렇게 해서 식물들이 작은 풀에서 큰 나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생장하고 번식하면서 균형 잡힌 생태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한다. 그래서 지구에서 네가 보는 숲속의 나무든, 작은 풀이든 그것들은 자신의 규칙대로 끊임없이 번식하고 생장하고 있다. 사람의 어떠한 도움도 필요치 않고, 사람이 따로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다. 이런 균형이 있었기에 식물은 그들만의 생존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알맞은 생존 환경이 주어졌기에 그렇게 많은 숲과 초원이 지구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을 양육하고 또 대대로 숲과 초원에서 서식하는 각종 생물을 양육한다. 날짐승과 길짐승과 곤충에서 각종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한편 하나님은 각종 동물들의 균형도 주관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떻게 주관할까? 식물과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번식 능력과 수와 빈도에 따라, 동물 중에서 맡은 역할에 따라 균형을 주관해 동물들의 수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사자는 얼룩말을 잡아먹는다. 그런데 사자의 수가 얼룩말의 수를 초과한다면 얼룩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얼룩말은 멸종될 것이다. 만일 얼룩말의 번식 수가 사자보다 한참 부족하다면 얼룩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역시 멸종될 것이다. 그래서 얼룩말의 수는 반드시 사자의 수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 얼룩말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사자의 생존을 위해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각 얼룩말은 얼룩말 무리의 한 구성원이지만 그와 동시에 사자 입에 들어갈 먹잇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자의 번식 속도가 영원히 얼룩말을 앞설 수 없기 때문에 사자의 수도 영원히 얼룩말의 수를 초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래야만 사자의 먹잇감이 보장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자는 얼룩말의 천적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같은 땅에서 한가롭게 서식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얼룩말은 사자의 사냥감이 되었다는 이유로 수가 감소하거나 멸종하지 않는다. 사자도 자신의 ‘왕위’로 인해 가족 구성원의 수를 확대하지 않는다. 이런 균형은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각종 동물 간에도 균형의 법칙을 정해 그런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는 사람들이 종종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룩말의 천적은 사자뿐일까? 그렇지 않다. 악어도 얼룩말을 먹는다. 악어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장면도 무척 끔찍하다. 얼룩말은 참으로 미약한 동물로 보인다. 얼룩말에게는 사자와 같은 포악한 성질도 없다. 사자처럼 강력한 적을 만나면 얼룩말은 그저 달아날 줄밖에 모르고 심지어 반항조차 못 한다. 사자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면 사자에게 잡혀 먹힐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은 동물 세계에서 종종 목격되는 장면이다. 너희는 이런 장면을 봤을 때 어떤 느낌이 들지 않았느냐? 얼룩말이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았느냐? 사자가 가증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느냐? 얼룩말은 생김새가 참 보기 좋다. 그런데 사자는 호시탐탐 얼룩말을 노린다. 얼룩말은 멍청하게 멀리 떠나지도 않는다. 그늘 밑에서 더위를 식히며 자신을 노리고 있는 사자를 보고 있는 얼룩말은 그 사자가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얼룩말은 그 땅을 떠나지 못한다. 기이한 일이다. 이 기이한 일 속에 하나님이 정한 운명이 있고 하나님의 주재가 있다. 너는 불쌍한 얼룩말을 보면서도 구해 줄 수 없고 가증스러운 사자를 보면서도 사자를 멸할 수 없다. 얼룩말은 하나님이 사자를 위해 예비한 먹이인 것이다. 하지만 사자가 아무리 얼룩말을 잡아먹어도 얼룩말은 멸종하지 않는다. 사자는 번식 수가 아주 적고 번식도 매우 느리다. 그래서 사자가 얼룩말을 아무리 잡아먹어도 사자의 수는 얼룩말을 앞지르지 않는다. 바로 이렇게 균형이 맞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균형을 유지시키는 목적은 무엇일까? 이는 사람의 생존 환경과도 관련이 있고 사람의 생존과도 관련이 있다. 만일 얼룩말이나 사슴과 같은 다른 모든 사자의 사냥감들의 번식이 너무 느리고 사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다면 인류는 어떤 위험에 직면하게 될까? 사람이 기르는 닭, 오리, 거위, 개가 우선적으로 사자의 사냥감이 된다. 이것들은 집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사자의 먹이로 충분할까? 어떤 집에서 돼지 두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사자가 산에서 내려와 그 돼지 두 마리를 잡아먹었다고 가정해 보자. 사자는 그것을 다 먹고 나서 떠날까? 사자는 ‘산에 먹을 것도 없어. 여기에 있자. 이 집에 사람도 몇 명 있으니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자는 사람이 문을 나서기를 기다렸다가 달려들어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인류에게는 어떠한 반항할 힘도 없다.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니냐?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면 어떨까? 참극이다. 이런 참극은 하나님이 정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재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것도 아니다. 인류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기에 만물의 균형은 인류의 생존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마땅히 갖춰야 할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식물과 동물, 산천과 호수로 인류에게 아주 정상적인 생태 환경을 예비해 주었다. 인류에게 이런 균형 잡힌 생태 환경이 있어야만 인류는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다. 만일 거목이나 작은 풀의 번식 능력이 떨어지고 번식 속도가 무척 느리다면 토양은 수분을 잃게 되지 않겠느냐? 수분을 잃은 토양은 병에 걸리지 않겠느냐? 식생과 수분을 잃은 토양은 빠르게 유실된다. 그러면서 아주 빨리 사막화가 이루어진다. 토양이 변해 버리면 인류의 생존 환경도 파괴되고 동시에 재난이 도래한다. 이런 생태 균형이 없어지고 이런 생태 환경이 사라지면 인류는 만물의 불균형으로 인해 종종 재난의 습격을 받게 된다. 가령 환경의 불균형으로 인해 개구리의 생태 환경이 파괴되어 개구리가 한곳에 모여 들게 되면 수가 급증할 수도 있다. 심지어 수많은 개구리가 도시의 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많은 수의 개구리가 사람의 생존 환경을 점거하면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할까? 재난이라고 한다. 왜 재난이라고 할까? 인류에게 무척 유익한 작은 동물이 자신에게 적합한 곳에 있으면 인류에게 유익하고 인류의 생존 환경 균형도 보호하고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일단 재난이 되면 그것은 사람의 생활 질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개구리 몸에 지니고 있는 것들이나 여러 가지 성분이 사람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심지어 인체의 어떤 기관에 침입할 수도 있다. 이는 재난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도 인류는 대량의 메뚜기 떼가 출몰하는 상황을 종종 겪었다. 이것도 재난이 아니냐? 아주 무서운 재난이다. 사람이 비행기와 대포,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아무리 큰 능력이 있어도 메뚜기 떼의 습격에 인류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그 상황에서 대포를 사용하여 쫓아 버릴 수 있을까? 기관총을 사용하여 쫓아 버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농약을 살포해 쫓아낼 수 있을까? 그것도 어렵다. 이 조그마한 메뚜기들이 왜 왔을까? 오로지 농작물과 양식을 먹으러 온 것이다. 그래서 메뚜기 떼가 지나간 곳에는 농작물이 전부 사라진다. 그렇게 농사짓는 사람의 한 해 먹을 양식이 메뚜기의 습격에 눈 깜짝할 새 전부 사라져 버릴 수 있다. 이처럼 메뚜기의 습격은 인류에게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재난이 되기까지 한다. 대량의 메뚜기 떼가 출몰하는 것이 재난이라면 쥐는 어떨까? 각종 매가 쥐를 잡아먹지 않는다면 쥐의 번식 속도는 매우 빨라질 것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말이다. 쥐라는 놈이 범람하면 인류는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 부딪히게 될까? (전염병입니다.) 전염병뿐일까? 쥐는 무엇이든 다 마구 갉아 버린다. 나무도 갉아 버린다. 한 집 안에 쥐가 두 마리 있다면 그 집 사람들 모두 불편을 겪는다. 때로 쥐는 기름을 훔쳐 먹기도 하고 양식을 갉아먹기도 한다. 쥐는 자기가 먹지 못하는 것도 갉아서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옷, 신발, 가구 등 무엇이든 다 갉아 버린다. 어떤 때는 그릇장에 기어올라 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그 그릇을 사용할 수 있겠느냐? 소독을 했다 하더라도 속으로 께름칙해서 그 그릇을 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쥐가 사람에게 주는 고민거리다. 조그마한 쥐일지라도 사람은 어찌할 방법이 없고 분을 참아야 한다. 그러니 쥐가 무리를 이루면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두 마리 쥐라도 사람에게 큰 방해가 된다. 그것이 재난이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작디작은 개미일지라도 재난이 된다면 인류에게 가하는 해 역시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개미가 집을 갉아 집이 무너진 사례도 많다. 이처럼 개미의 힘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개미가 말을 잡아먹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커다란 말도 개미 떼가 달라붙어 휩쓸고 가면 그 말은 뼈대만 남는다. 무서운 일이 아니냐? 말을 탔던 사람이 그 장면을 보고 어디로 도망쳤을까? 옆에 호수가 있는 것을 보고 거기로 뛰어들어 호수 건너편으로 헤엄쳐 도망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 장면을 목격한 뒤로 작은 개미가 그렇게 큰 위력을 가지고 있고 하마터면 자신도 먹힐 뻔했다는 사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말이 없었다면 개미가 먼저 먹어 치울 대상은 분명 그 사람이었을 것이다. 물에 가로막히고 개미가 곧바로 다리를 놓고 건너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먹어 치우지 못한 것이다. 만일 물이 없었다면 말과 사람은 함께 개미에게 먹혔을 것이다. 이처럼 개미의 위력도 무시할 수 없다. 각종 조류가 재난이 된다면 두려운 일이 아니냐? (두렵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동물이나 생물이든 일단 균형을 잃으면 불규칙적이고 법칙이 없는 테두리 안에서 자라고 번식하면서 인류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다주게 된다. 인류의 생존과 생활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재난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심지어 인류에게 치명적인 재난을 당하게 하거나 멸망의 운명을 맞게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할 때 여러 가지 방식과 형식으로 만물의 균형을 이루었고, 산천과 호수의 생존 환경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식물의 생존 상태의 균형을 이루었다. 또한 각종 동물과 조류, 곤충의 생존 상태의 균형도 이루었다. 그 목적은 각종 생물이 하나님이 정한 법칙 속에서 번식하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물은 이런 법칙을 벗어날 수 없고 깨뜨릴 수도 없다. 이런 기본적인 환경 속에서 인류는 비로소 안전하게 대대로 번성할 수 있다. 어떤 생물이든 하나님이 정한 수와 범위를 초과하고 하나님이 주재하는 생장 속도와 생장 빈도와 생장 수를 초과하면 인류의 생존 환경은 각기 다른 정도로 파괴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도 위협을 받게 된다. 한 종의 생물의 수가 급증하면 그 생물은 인류의 식량을 빼앗고 인류의 수원을 파괴하며 인류의 삶의 터전도 파괴하게 된다. 그러면 인류의 번성과 생존 상황이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은 만물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하다. 만일 쥐, 개미, 메뚜기, 개구리 등 각종 동물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 그에 따라 그들의 물 섭취량도 증가한다. 그들의 물 섭취량이 증가하면 고정된 식수원과 수역 범위 안에서 사람의 식수량과 수원은 감소하게 되고 인류에게 물이 부족하게 된다. 인류의 식수가 파괴되고 오염된다. 또한 급증하는 각종 동물로 인해 식수난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열악한 생존 환경에서 인류의 생존은 엄청난 위협을 받게 된다. 만일 한 종의 생물이나 몇 종의 생물이 정해진 수를 초과하게 되면 인류가 생존하는 공간의 공기, 온도, 습도에서 공기의 함량까지 모두 각기 다른 해독을 입고 파괴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태에서 인류의 생존과 운명은 당연히 그런 생태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런 균형을 잃으면 인류가 호흡하는 공기는 파괴되고 인류가 마시는 물은 오염되며 인류에게 필요한 온도도 각기 다른 정도로 변화를 맞고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인류 고유의 생존 환경은 엄청난 영향과 도전을 받게 된다. 인류의 기본적인 생존 환경이 파괴된 그런 상황에서 인류의 운명과 앞날은 어떻게 되겠느냐?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은 만물이 인류를 위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알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만물이 각기 어떤 역할을 하고,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인류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지도 알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계산을 하면서 자신이 창조한 만물의 여러 면을 주관하고 있다. 그래서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무척 중요하고 매우 필요하다. 그러므로 네가 만물 속의 생태 현상을 보았든, 만물 속의 자연법칙을 보았든 너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의 필요성에 대해 더 이상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또한 무지한 말로 하나님이 만물을 마련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류에게 공급하는 것을 멋대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의 법칙에 대해서도 멋대로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두 번째 관문, 성장

한 사람이 어떤 가정 환경에서 어떤 가정 교육을 받는지는 그 사람이 태어난 가정에 의해 좌우되며, 이는 성장 배경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일생에서 두 번째로 거치게 되는 중요한 관문이다. 이 관문 역시 사람이 선택할 수 없으며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이 사실을 어떻게 대하고 인식할 것인가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쉽게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으며, 모든 사람은 능동적 또는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받아들인다. 사람이 살면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어도, 결국에는 창조주가 배정해 놓은 운명의 길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이며, 또한 창조주가 권능으로 만물을 주재하고 다스리는 방식이다. 그 덕분에 만물이 질서 정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인류는 아무런 방해 없이 끊임없는 윤회를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이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매일, 매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너희들은 이러한 사실에 눈을 뜨고 어느 정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진리에 대한 너희들의 경험과 인식,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따라 많이 느낄 수도, 적게 느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진리의 실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만큼 체험했는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가 사람의 순종 여부에 의해 결정되느냐? 하나님의 권능이 사람의 순종 여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권능은 언제나 존재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의 생각과 뜻에 따라 모든 사람의 운명과 만물을 주재하고 배치한다. 이는 사람의 변화나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 지리적인 변화로 인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알고 받아들이고, 그의 주재에 순종하느냐로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갖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과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의 운명은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를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의 권능은 변함없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은 사람의 의지와 기호, 선택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천지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의 권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유일무이한 권능을 갖고 있다. 그의 권능은 사람이나 사물, 공간, 지리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변함없이 권능을 행하고 큰 능력을 나타낸다. 그는 경영 사역을 계속하며 만물을 주재하고, 만물에게 공급하며, 만물을 지배한다. 이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사실이며 태고부터 변함없는 진리이다! 하나님의 권능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실행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에 대해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고 알아야 할까? 이는 모든 사람이 직면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네가 삶에서 문제에 맞닥뜨릴 때 하나님의 권능과 주재를 어떻게 느끼고 깨달아야 할까?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여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어떻게 체험해야 하는지 모를 때, 네가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는 마음과 소원, 실제가 있다는 것을 어떤 태도로 분명하게 보여야 할까? 우선 너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다음 구할 줄 알아야 하며, 그런 후에는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때, 즉 하나님이 배정한 사람과 일과 사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점차적으로 너에게 나타나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배치해 놓은 사람과 일, 사물을 통해 하나님의 고심을 살피고 깨닫는 것이다. 그 속에 있는 진리를 깨닫고, 사람이 행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성과와 맺고자 하는 열매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배정한 사람과 일, 사물을 받아들이고, 그의 주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창조주가 어떻게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어떻게 그의 생명과 진리를 공급해 주는지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배정과 주재 아래에서 모든 일은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간다. 너는 하나님이 주재하고 배치한 모든 것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구할 줄 알아야 하며,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에 순종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이자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너희가 많은 노력을 들여 이런 태도와 소양을 갖춰야만 진정한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