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하나님을 믿으면 평안과 복받는 것만 구해서는 안 된다

2019년 01월 01일

관련된 하나님 말씀:

『오늘날 실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반드시 정상 궤도에 진입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복받기만을 구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알기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깨우침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생기고 하나님에 대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사랑이 있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너의 사랑이 가장 진실한 것이어서 아무도 너의 그 사랑을 파괴할 수도 없고 가로막을 수도 없다면, 이때 바로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인데, 이것은 네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너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께 점유되어 더 이상 너를 점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너의 체험과 너의 대가로 말미암아, 또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너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연히 생길 수 있는데, 이때면 너는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되고 하나님 말씀의 빛 속에서 살게 되며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래야 하나님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이 목표를 향해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너희 각 사람의 직책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 이상 진리를 위해 살아야 한다>에서 발췌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고, 더 많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인해 고난받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이상, 하나님의 형벌도 누려야 한다. 이런 것을 다 체험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깨우쳐 준 것을 체험할 수 있고, 하나님이 너에게 훈계하고 심판한 것도 체험할 수 있다면, 너는 전면적으로 체험한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심판 사역을 한 적이 있고, 형벌 사역도 한 적이 있으며, 하나님이 말씀으로 너를 훈계한 적도 있지만, 여전히 너에게 깨우쳐 주었고 빛 비춰 주었으며, 네가 도망가려고 할 때에도 하나님의 손이 너를 끌어당겼다. 이 모든 역사를 통해 너에게 사람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지배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고난받는 것이거나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이거나 육체가 평안한 것이거나 모든 것이 다 순조롭고 안일한 것이라고 여긴다면,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데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네가 이렇게 믿는다면, 너의 관점은 올바르지 않고 너는 전혀 온전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공의 성품,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기묘와 난측(難測),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네 인식을 통해 네 마음속에 있는 자신의 요구, 자신의 소망, 자신의 관념을 제거하게 된다. 이런 것을 제거해야만 하나님이 요구한 조건을 갖출 수 있다. 이것을 통해야만 생명이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이 요구한 성정을 살아내기 위한 것이며, 자격이 없는 이 한 무리 사람들을 통해 그의 행사와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정확한 관점이고, 또한 추구 목표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믿는 관점을 바로잡고 하나님의 말씀 얻기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진리를 살아낼 수 있고, 더욱이 하나님의 실제 행사를 볼 수 있고, 전 우주에서의 하나님의 기묘한 행사를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실제적인 사역도 볼 수 있다. 사람은 실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도대체 어떻게 하는지를 체험하게 되고, 사람에게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는지를 체험하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사탄의 패괴 성정을 벗어 버리기 위한 것이다. 네 안의 불결한 것과 불의한 것을 벗어 버리고 너의 틀린 속셈을 벗어 버리면,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믿음이 생기게 된다. 이런 진실한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기초에서라야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다. 네가 그를 믿지 않는다면 그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 흐리멍덩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받는 것을 보기만 하면 열의가 일어나고, 연단받는 것을 보기만 하면 열의가 없어지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고분고분 순종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아직도 요구가 있고, 아직도 많은 종교 관념을 버릴 수 없고 자신의 이익을 버릴 수 없고, 아직도 육체가 복받기를 추구하면서 하나님으로 너의 육체와 영혼을 구원하게 한다면, 이것은 모두 관점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의 표현이다. 종교를 신앙하는 사람은 비록 하나님을 믿을지라도 성정 변화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지 않으며, 자신의 육체적인 이익만 추구한다. 너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믿음법은 종교 신앙에 속하는데, 그것은 아예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을 마음과 자기를 버릴 심지를 갖추어야 한다. 이 2가지를 갖추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고, 성정이 변화될 수도 없다. 참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는 사람,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에서 발췌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피조물이 해야 할 본분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다. 반드시 하나님은 사랑스러운 분이고 경외할 만한 분임을 인식해야 하고,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하는 사역은 구원이고 온전케 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주로 육체적인 삶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며, 천성적인 것으로 살던 삶에서 하나님의 소시 안에서 사는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나와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 아래에서 사는 것이며, 하나님께 순복하고 육체에 순복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너의 온 마음을 얻고 너를 온전케 하도록 하여 사탄의 패괴 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큰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을 너에게서 나타나게 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며 사탄 앞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표적과 기사를 보기 위한 것이 아니고 너 자신의 육체를 위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께 순복하되 베드로처럼 죽기까지 순복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주로 이렇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말씀이 모든 것을 성취한다>에서 발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따르면서 오직 자신이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재난을 피할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경영을 언급하기만 하면, 침묵을 지키고 전혀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무미건조한’ 문제는 안다고 해도 자신의 생명을 자라게 할 수 없고, 어떤 유익한 것도 얻을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설령 하나님의 경영에 관한 말을 들었을지라도, 그것을 건성으로 대할 뿐 보배로 받아들이지 않고, 생명의 일부분으로는 더욱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는 목적은 아주 간단한데, 그것은 단 하나의 목표, 즉 복을 받는 것이다. 그것 외에 그들은 자신의 목표와 전혀 상관없는 일은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어 복을 받는 것은 가장 정당한 목적이고, 또한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가치라고 여긴다. 만약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의 현 상태이다. 그들의 목적과 속마음은 듣기에는 아주 정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동시에 다 헌신하고 봉헌하고 본분을 하고 있으며, 또한 청춘을 바치고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심지어 오랜 세월 밖에서 동분서주하며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종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취향을 바꾸고, 자신의 인생관을 바꾸었으며, 심지어 자신의 추구 방향도 바꾸었지만, 하나님을 믿는 목적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길이 얼마나 멀든, 도중에 얼마나 많은 위험과 어려움이 있든, 흔들리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뛰어다닌다. 어떤 힘이 그들을 그렇게 계속 바칠 수 있게 하였을까? 그들의 양심인가? 그들의 위대하고 고상한 인격인가? 사악한 세력과 끝까지 맞서려고 하는 그들의 의지인가?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고도 보수를 바라지 않는 그들의 믿음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하는 그들의 충성심인가? 아니면 자신의 지나친 요구가 전혀 없는 그들의 봉헌 정신인가?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토록 많은 심혈과 대가를 바칠 수 있다니, 그야말로 대단한 기적이다! 그런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나 바쳤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잠시 논하지 말자. 하지만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우리가 해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그토록 많은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그 속에 사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이익을 제외하고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우리는 사람이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즉, 사람은 하나님을 단지 적나라한 이익 관계로, 복을 받는 자와 복을 베푸는 자의 관계로 대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피고용인과 고용인의 관계일 뿐이다. 피고용인이 수고하는 것은 다만 고용인이 주는 삯을 받기 위한 것이다. 그러한 이익 관계에는 혈육 같은 친밀한 정은 없고 거래만 있으며, 주고 받는 사랑은 없고 베풀어 주고 불쌍히 여기는 것만 있으며, 이해는 없고 어쩔 수 없이 참으면서 기만하는 것만 있으며, 친밀한 사이는 없고 영원히 넘어갈 수 없는 깊은 골만 있을 뿐이다. 일이 이미 그 지경에 이르렀는데, 누가 그런 흐름을 되돌릴 수 있겠는가? 또 그런 관계가 위급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내가 확신하는데, 사람이 모두 복받는 즐거운 분위기 속에 빠져 있을 때는 아무도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처럼 민망하고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음을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인류가 하나님을 믿는 데에 있어 가장 슬픈 일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 중에서 자신의 경영을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경영을 본체만체하는 것이며, 가장 크게 실패한 일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경배하기를 추구하면서 그와 동시에 자신이 바라는 처소의 꿈을 만들어 가고 있고, 어떻게 해야 가장 큰 복과 가장 좋은 처소를 얻을 수 있겠는지를 계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경영 안에 있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에서 발췌

시련,믿음의 시련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 자신의 병을 고침받기 위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다만 나의 능력으로 자신들의 몸에 있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기 위한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단지 나의 평안과 기쁨을 얻기 위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단지 내게서 더 많은 물질적인 부를 얻어 내기 위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단지 금생에서 무사히 지내고 내세에서도 별고 없기를 구하기 위한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지옥의 고통을 피하고 천당의 복을 얻기 위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믿는 것은 단지 잠시 평안하기 위한 것이지 내세에 무엇을 얻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람에게 분노를 쏟았을 때, 사람에게 원래 있었던 기쁨과 평안을 거두어 갔을 때, 사람은 모두 의심하였다. 내가 사람에게 지옥의 고통을 주고 천당의 복을 거두어 갔을 때, 사람은 분한 나머지 화를 내었다. 사람이 나에게 병을 고쳐 달라고 했을 때, 내가 오히려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혐오했더니, 사람은 나를 멀리 떠나 더러운 사술을 행하는 술객의 술법을 찾아다녔다. 사람이 내게서 얻어 낸 것을 내가 다시 거두어 갔을 때, 사람은 모두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나를 믿는 까닭은 나의 은혜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고, 나를 믿어서 얻는 좋은 점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믿음’에 대해 너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서 발췌

『너는 하나님을 믿은 후 평안 얻기를 추구하는데, 자식에게 병이 없고, 남편에게 좋은 직업이 있고, 아들이 좋은 배우자를 찾고, 딸이 좋은 가문에 시집가고, 너의 우마가 밭갈이를 잘하고, 일 년 내내 농사하기에 날씨가 좋은 이런 것만 바란다. 너는 사는 것이 편안하여 집에 일이 생기지 않고, 바람도 네 몸에는 불지 않고, 모래도 네 얼굴은 때리지 않고, 홍수가 나도 너의 집 곡식은 잠기지 않고, 재난은 다 너에게 미치지 않고, ‘하나님의 품속’에서 살고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기를 추구한다. 너같이 못난 놈은 무턱대고 육체만 추구하는데, 네가 말해 보아라. 너에게 마음이 있는가, 영이 있는가? 너는 짐승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참 도를 값없이 베풀어 주었는데 추구하지 않는다면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진정한 인생을 베풀어 주었는데도 추구하지 않는다면 너는 개돼지 따위가 아닌가? 돼지는 인생을 추구하지 않고, 깨끗함을 추구하지 않으며, 인생이란 무엇인지를 모르고 날마다 실컷 배불리 먹고는 잠만 잔다. 참 도를 베풀어 주었어도 네가 얻지 못하고 두 손이 텅 비어 있는데, 너는 돼지와 같은 그런 삶이 계속되길 바라는가? 그런 사람이 살아 있어도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삶이 비열하고 저속하며, 더러움과 음란 속에서 살면서 추구하는 목표가 조금도 없는데, 너의 일생은 가장 비천한 일생이 아닌가? 또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뵙겠는가? 그렇게 체험해 나가면 여전히 아무런 소득도 없는 것이 아닌가? 참 도를 베풀어 주었는데, 최종에 네가 얻을 수 있는지는 너 자신의 추구에 달렸다.』

<베드로의 체험― 형벌과 심판에 대한 인식>에서 발췌

『네가 하나님의 은혜만 누리고 가정이 평안하거나 물질적 축복만 받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얻었다고 할 수 없고 하나님을 믿음에 성과가 있다고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육신에 와서 은혜 사역도 하였는데, 사람에게 확실히 어느 정도 물질적 축복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은혜만 있고 자비와 긍휼만 있어서는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다. 사람은 체험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도 어느 정도 체험하였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도 보았다. 그러나 한동안 체험한 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없고, 사람 안의 패괴된 것들을 폭로할 수 없고, 패괴 성정도 벗어 버리게 할 수 없고, 사람의 사랑을 온전케 할 수 없고, 사람의 믿음도 온전케 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 사역은 한 단계의 사역이니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것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어야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알게 된다>에서 발췌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얻었는가? 너는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인식하였는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너는 어느 정도로 변화되었는가? 지금 너희가 모두 알다시피,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영혼이 구원을 얻고 육체가 평안을 얻기 위한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신의 생활을 충실케 하는 것 등을 위한 것도 아니다. 현재를 놓고 보면, 만일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육체의 평안을 얻기 위한 것이고 잠깐의 누림을 위한 것이라면, 설사 네가 마지막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최고봉에 이르러 더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네가 추구하는 이 ‘사랑’은 여전히 불순물이 있는 사랑이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기의 따분한 생활을 충실케 하고 마음속의 공허함을 메우는데, 이러한 사람은 안일을 탐하고 누리는 사람이지 하나님 사랑하기를 진실로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사랑은 마지못해 하는 것이고 정신적 누림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이 필요 없다. 그러면 너의 사랑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너는 어떤 원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현재 너에게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성분은 얼마나 있는가? 너희 중의 대다수 사람들의 사랑은 모두 위에서 언급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기껏해야 현 상태만 유지할 수 있을 뿐, 영구불변함에 이를 수 없고 사람 안에 뿌리박을 수도 없다. 이러한 사랑은 단지 꽃에 속하므로, 꽃이 피었다가 시들고 나면 열매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네가 이렇게 한번 하나님을 사랑한 후에, 만일 아무도 더 이상 너의 앞길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너는 넘어지게 될 것이다. 기껏해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대에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후에 너의 생명 성정에 변화가 없다면, 너는 여전히 흑암 권세의 뒤덮임 아래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여전히 사탄의 지배와 사탄의 우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 완전하게 얻어질 수 없으며, 최후에는 영ㆍ혼ㆍ체가 여전히 사탄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완전하게 얻어질 수 없는 사람은 모두 그 원위치로 복귀되는데, 바로 사탄에게 돌아가고 유황불못에 던져져 하나님의 다음 단계 징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 얻어진 사람은 사탄을 배반하고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정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자민(子民)이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자민의 유래이다. 너는 이러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얻어지기를 원하는가? 너는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는가? 현재 너는 사탄에게 속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자민에 속하는가? 이런 일은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니,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에서 발췌

『네가 하나님께 온전케 되어 마지막에 복받을 수 있기만 추구한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관점은 순수하지 않다. 너는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행사를 볼 것인지를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너에게 나타날 때 어떻게 그를 만족게 할 것인지를 추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기묘와 하나님의 지혜를 어떻게 증거하고, 너에게 임한 하나님의 징계와 훈계를 어떻게 발표할 것인지를 추구해야 한다. 이런 것은 모두 지금 네가 상고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단지 하나님께 온전케 된 후 하나님과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으로는 아직 부족하고 아직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한다. 너는 하나님의 행사를 실제적으로 증거할 수 있고, 그의 요구를 실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으며, 사람에게 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실제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고난을 받든, 눈물을 흘리든, 괴롭든, 실제적으로 체험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다 네가 하나님의 증인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너는 지금 도대체 무엇의 지배를 받아 고난받고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느냐?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냐? 육체의 복을 받기 위한 것이냐, 아니면 이후의 앞날을 위한 것이냐? 너는 속마음, 동기, 자신의 추구 목표를 바로잡아야 하고, 자기의 뜻에 따라 해서는 안 된다. 만약 한 사람은 복을 받기 위해, 왕이 되어 권력을 잡기 위해 온전케 되기를 추구하고, 다른 한 사람은 오히려 온전케 되어 하나님을 만족게 함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실제적으로 증거하기를 추구한다면, 너는 이 2가지 추구법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네가 첫 번째 것을 택한다면 하나님의 기준과 아직도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나의 행사를 전 우주에 공개하고, 내가 전 우주에서 왕이 되어 권력을 잡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너희에 대한 부탁은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라는 것이지 왕이 되어 전 우주에 나타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행사를 우주 궁창에 가득 나타내어 각 사람에게 보게 하고 시인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놓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지금 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되느냐? 너는 하나님을 얼마나 증거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후, 그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려야 하겠느냐? 네가 온전케 되기를 원하고 또한 자신의 살아냄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기 원한다면, 너에게 이런 동력이 있다면 모든 어려움은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다. 지금은 사람에게 믿음이 있어야 한다. 너에게 이런 동력이 있다면 그 무슨 소극적인 것, 피동적인 것, 육체적인 나태, 육체적인 관념, 처세 철학, 패역 성정, 감정 등등을 모두 쉽게 버릴 수 있다.』

<온전케 될 사람은 모두 연단을 겪어야 한다>에서 발췌

성육신이란 무엇일까요? 성육신의 실질은 또 무엇일까요?

성경 참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 14:9~11)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 10:30) 관련된 하나님 말씀: 『성육신이란 바로 하나님이 육신에서 나타난 것이고, 하나님이 육신의 형상으로 피조된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라고 한 이상, 일단은 반드시 육신이어야 하고, 그것도 정상 인성을 갖춘 육신이어야 한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것이다. 사실,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의 함의는 바로 육신에서 역사하고 육신에서 생활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실질이 육신이 되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정상 인성이 있는 그리스도는 영이 실제화되어, 정상 인성이 있고 정상 이지가 있으며 두뇌의 사유가 있는 그런 육신이다. ‘실제화’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고, 영이 육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좀 더 명확하게 말하면, 바로 하나님 자신이 정상 인성이 있는 육신에 거하는 것이고, 정상 인성이 있는 육신을 통해 자신의 신성의 역사를 발표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제화’, 즉 말씀이 육신 된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하나님 성육신을 그리스도라고 칭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를 베풀어 줄 수 있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칭하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하나님의 실질이 있고,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의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없으면서도 그리스도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짜이다. 그리스도란 땅에서 창현(彰顯)되는 하나님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땅에서 사역을 전개하여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역사를 완성하는 하나님만의 특유한 육신을 가리킨다. 이 육신은 아무나 대신할 수 있는 육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땅에서 하는 사역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육신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할 수 있는 육신이며, 하나님을 충분히 대표할 수 있는 육신이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육신이다.』 <말세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베풀어 줄 수 있다>에서 발췌 『바로 그가 하나님의 실질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피조된 어떤 인류보다 높고, 하나님의 사역을 할 수 있는 어떤 사람보다 높다. 이런 연고로 그와 같이 사람의 외형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인성이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오직 그만이 성육신한 하나님 자신이며 그를 제외하고는 모두 피조된 인류이다. 똑같이 인성을 구비했지만 피조된 사람은 인성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 성육신은 다르다. 그의 육신에서 인성 외에 가장 주요한 것은 바로 신성이다. 인성은 육신의 외관상으로 볼 수 있고, 또한 일상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신성은 사람에게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신성은 인성이 있는 전제하에서라야 발표하는 것이고, 또한 사람의 상상처럼 그렇게 비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가장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신성이다. ……하나님이 성육신 되었다고 한 이상, 그의 실질은 바로 인성과 신성의 결합이다. 이 결합을 하나님 자신이라 칭하고, 또한 땅에 있는 하나님 자신이라 칭한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그가 성육신하여 생활하고 역사한 것은 모두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직분을 시작하기 전의 생활인데, 보통 사람의 가정에서 생활하고 극히 정상적인 인성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사람의 정상 생활의 윤리와 법칙 그리고 사람의 정상적인 필요(먹고, 입고, 자고, 거하는 것)가 있고, 사람의 정상적인 연약이 있으며, 정상인의 희로애락이 있다. 즉, 첫 번째는 신성이 아닌 완전히 정상적인 인성에서 생활하면서 정상인의 모든 활동에 종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직분을 시작한 이후의 생활인데, 여전히 정상 인성의 외형이 있는 보통 인성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그는 외적으로 초자연적인 것들이 전혀 없고, 직분하는 것을 생활로 한다. 이때의 정상 인성은 완전히 신성의 정상적인 역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직분을 할 때의 정상 인성이 이미 충분히 직분을 할 수 있는 인성으로 성숙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생활은 정상 인성에서 직분을 하는 생활이다. 즉,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의 생활이다. 첫 번째 생활을 완전하고 평범한 인성에서 한 까닭은 그때의 인성이 결코 신성의 모든 역사를 유지할 수 없고 성숙되지 않은 인성이어서 반드시 인성이 성숙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즉 직분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는 인성이어야만 비로소 그가 해야 할 직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육신인 이상, 반드시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 생활은 단지 정상 인성에서 하는 생활이다. 그러나 두 번째 생활은 인성이 이미 충분히 사역을 담당하여 직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성육신 하나님이 직분을 하는 기간의 생활은 바로 인성과 완전한 신성에서 하는 생활이다. 만일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이 강생하자마자 정식으로 직분을 시작하고, 또 모두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를 나타낸다면 육신의 실질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의 인성은 육신의 실질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인성이 없는 육신은 존재하지 않고, 또한 인성이 없는 사람은 비인류이다. 그리하여 육신의 인성은 말씀으로 된 하나님 육신의 고유한 속성이 되었다. 누가 “하나님이 육신이 되면 오직 신성만 있고 인성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논법이고, 또한 성육신이 되는 원칙에도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는 직분을 시작한 후에도 여전히 인성의 외형이 있는 신성에서 살면서 역사하는데, 그때의 인성은 전적으로 신성이 그 정상 육신에서 역사할 수 있도록 수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하는 것은 인성 속에 있는 신성이고, 신성이 역사하는 것이지 인성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신성은 인성에 가려진 신성이기에 그 실질은 여전히 완전한 신성이 역사하고 있는 것이지 인성이 역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하는 것은 이 육신이므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육신에서 살고 있는 하나님이 되어 사람의 외형과 사람의 실질이 있고, 더욱이 하나님의 실질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예수가 땅에서 한 생활도 모두 육신의 정상 생활이었고, 육신의 정상 인성에서 생활한 것이다. 역사하고 말씀하는 권병(역주: 권세)이든지, 병 고치고 귀신 쫓는 권병이든지, 이런 비범한 일들은 그가 직분을 시작하기 전에는 기본적으로 없었다. 그가 29세 이전, 즉 직분을 시작하기 전에는 그를 단지 정상 육신이라고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정상 육신인 데다가 또 직분을 하지 않아 사람은 그에게서 하나님이라는 낌새는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를 정상 사람이나 보통 사람으로 보았을 뿐이다. 이는 당시에 사람들이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여긴 것과 같다. 사람이 보기에 그는 보통 사람의 아들이었기에 그가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임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비록 그가 직분을 할 때에 많은 표적을 나타냈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모두 그가 정상 인성의 외형을 갖춘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그의 정상 인성과 그가 한 사역, 이 두 방면은 첫 번째로 말씀이 육신 된 의의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하나님이 이미 완전히 육신에 왔고 극히 평범한 사람이 되었음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역사하기 전에 그에게 정상 인성이 있는 것도, 그 후에 그가 사역을 한 것도 여전히 그가 평범한 육신임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그가 표적과 기사를 나타냈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든, 모두 정상 인성의 육신에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표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까닭은 그의 육신이 하나님의 권병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의 육신은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그런 권병이 있음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그가 육신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그가 해야 할 직분 내의 사역이고, 인성으로 가리워진 신성의 발표이다. 그가 어떻게 표적을 나타내든지, 어떻게 그의 권병을 분명히 나타내든지, 그는 여전히 정상 인성에서 생활했고, 여전히 정상적인 육신이었다. 그가 십자가에 오르고 죽음에서 부활하기 전에는 계속 정상적인 육신에서 살고 있었다. 사람에게 은혜를 주고 사람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모두 직분 내의 일이었고, 모두 정상적인 육신에서 역사한 것이었다. 그가 십자가에 오르기 전에 어떻게 했든지 그는 정상 인성이 있는 육신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그가 하나님 자신이고 행한 것이 하나님 자신의 사역일지라도 그는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이기 때문에 식사도 하고 옷도 입었으며, 그에게 정상 인성의 요구도 있었고 정상인의 이지(理智)와 사유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은 그가 정상적인 사람임을 증명하고, 그 정상적인 사람은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이 정상 인성이 있는 육신이지 결코 비범한 육신이 아님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성육신의 인성은 육신에서 하는 신성의 정상적인 역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정상 인성을 유지하는 것이고 또한 육신의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는 바로 육신에서 하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육신에 정상 인성의 사유가 없다면 하나님이 육신에서 역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가 육신에서 해야 할 사역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 성육신 하나님은 비록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가 있지만, 그의 역사에는 사람의 사유가 전혀 뒤섞여 있지 않다. 그는 정상 사유가 있는 인성에서 역사하고, 사유가 있는 인성의 전제하에서 역사하는 것이지, 결코 정상적인 두뇌의 사유를 발휘하여 역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거하고 있는 육신의 사유가 얼마나 높든, 그의 역사에는 여전히 논리학이나 사유학이 뒤섞여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그의 사역은 육신의 사유로 상상해 낸 것이 아니라 신성의 역사가 인성에서 직접 발표된 것이다. 그의 사역은 모두 그가 해야 할 직분이고, 어느 단계도 그의 머리로 궁리해 낸 것이 아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과 같은 것은 머리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고, 또한 두뇌 사유가 있는 그 어떤 사람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복 사역도 마찬가지로 성육신 하나님이 해야 할 직분이다. 그러나 이 사역은 결코 사람의 뜻이 아니다. 이 사역은 모두 신성이 해야 할 사역이고, 혈기에 속한 사람은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은 반드시 두뇌의 정상적인 사유가 있어야 하고, 정상 인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반드시 정상 사유가 있는 인성에서 역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 역사의 실질이자 성육신 하나님의 실질이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성육신 된 인자는 인성을 통해 하나님의 신성을 발표하여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해 주었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하는 것을 통해,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계에 있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그리하여 사람은 형상이 있고 뼈와 살이 있는 하나님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육신 된 인자는 하나님 자신의 신분, 지위, 형상, 성품, 소유소시 등등을 모두 구체화하고 인성화하였다. 비록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말하면, 인자의 겉모습은 어느 정도 국한성이 있지만 인자의 실질과 소유소시는 완전히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표할 수 있는데, 단지 발표하는 형식상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인자의 인성이든 아니면 신성이든 다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대표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은 그 기간에 육신의 방식으로 역사하고, 육신의 각도에서 말씀하고, 인자의 신분과 지위에 서서 인류를 마주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서 하는 실제적인 말씀과 역사를 접촉하고 체험하는 기회가 있게 하였을 뿐이다. 또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신성과 자신을 낮춘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여 주고, 그와 동시에 또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실과 실제에 대해 기초적인 인식과 기초적인 정의도 있게 하였을 뿐이다.』 <하나님의 역사,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에서 발췌 『비록 하나님 성육신의 겉모습이 사람과 똑같고 또한 사람의 지식도 배우고, 사람의 언어로 말하며, 심지어 어떤 때는 사람의 방식을 쓰거나 사람의 논법을 인용하여 자신의 뜻을 표현하였지만, 인류를 대하고 일을 대하는 그의 실질은 패괴된 인류와 절대로 같지 않고, 또한 그가 서는 각도와 높이는 그 어떤 패괴된 인류도 설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입은 육신도 하나님 자신의 실질을 구비하고 있고, 그의 마음과 인성에서 발표해 낸 것도 다 진리이다. ……하나님의 그 성육신이 얼마나 평범하든, 얼마나 정상적이든, 얼마나 낮든, 심지어 사람들이 얼마나 업신여기든 그의 생각과 인류를 향한 태도는 아무도 구비할 수 없고 모방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영원히 신성의 각도에 서서, 조물주의 높이에 서서 인류를 관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실질로, 하나님의 마음 상태로 인류를 대하고 있다. 그는 절대로 보통 사람의 높이에서, 패괴된 사람의 각도에서 인류를 대할 리가 없다. 사람은 인간의 안목으로 인류를 바라보고, 사람의 지식과 사람의 규례, 사람의 학설 등등을 가늠 기준으로 삼아 인류를 바라본다. 그 범위는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범위이고, 패괴된 인류가 닿을 수 있는 범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안목과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소유소시를 가늠 기준으로 인류를 바라본다. 그 범위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범위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육신과 패괴된 인류가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다. 그 다른 점은 각자의 실질로 인해 결정된 것인데, 바로 그 다른 실질로 각자의 신분과 지위가 결정된 것이고, 사물을 대하는 각자의 각도와 높이도 결정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 자신 3>에서 발췌 『그가 역사하고 음성을 발하는 것은 직접 영을 대표한다. 그가 하는 사역은 영이 하는 것이고 하는 말씀도 영이 하는 것인데, 다만 말씀으로 된 육신에 의해 발표할 뿐이다. 실제상 바로 영의 발표이고 그가 하는 사역과 말씀은 그의 실질을 대표한다.』 <실행 (7)>에서 발췌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육신이다. 하나님의 영은 지고지상하고 하나님의 영은 전능하고 거룩하고 공의롭다. 그러면 마찬가지로 그의 육신도 지고지상하고 전능하고 거룩하고 공의로운 것이다. 이러한 육신은 공의로운 일만 하고 인류에게 유익한 일만 하며 거룩하고 휘황하고 위대한 일만 할 뿐, 진리와 도의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 영을 배반하는 일은 더욱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아주 엄중한 문제―배반 (2)>에서 발췌 『성육신한 하나님을 그리스도라고 칭한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인데, 이 육신은 육체에 속하는 그 어떤 사람과도 같지 않다. 같지 않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혈기에 속하지 않는 영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정상 인성과 완전한 신성이 있는데, 그의 신성은 어떤 사람에게도 없는 것이다. 그의 정상 인성은 육신에서의 모든 정상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신성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다. 인성이든 신성이든 다 천부의 뜻에 순복한다. 그리스도의 실질은 영이자 신성이므로, 그의 실질 자체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실질이다. 이 실질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방해할 리가 없으며, 그는 자신의 사역을 허무는 일을 할 리가 없고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말을 할 리도 없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경영에 방해되는 사역을 할 리가 없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성령 역사의 실질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 자신의 경영을 위한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역사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성육신 된 이상 그의 실질을 육신에 실제화하여 그의 육신이 족히 사역을 담당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 된 기간에는 그리스도의 역사가 하나님 영의 모든 역사를 대신하고, 게다가 말씀이 육신 된 기간의 전체 사역은 그리스도의 역사를 핵심으로 한다. 그 외에 어느 한 시대의 사역도 섞여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 된 이상 육신의 신분으로 역사하고, 육신에 온 이상 육신에서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완성한다. 하나님의 영이든 그리스도이든 어쨌든 다 하나님 자신이므로,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하고, 자신이 해야 할 직분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실질 그 자체가 권병(역주: 권세)을 지니고 있지만 그는 또 자신의 권병에서 비롯된 모든 것에 순복할 수 있는데, 영의 역사이든 아니면 육신의 역사이든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만물의 권병이고, 하나님의 실질이 있는 육신도 권병을 지니고 있지만, 육신에 있는 하나님은 또 천부의 뜻에 순복하는 모든 사역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사람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고, 또한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권병이지만 그의 육신은 또 자신의 권병에 순복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한다”는 데에 내포된 뜻이다. 하나님은 영이어도 구원 사역을 할 수 있고, 사람이 되어도 마찬가지로 구원 사역을 할 수 있다. 어떻게 말씀하든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사역을 하는데, 그는 방해하거나 가로막지도 않고, 더욱이 서로 모순되는 사역은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과 육신이 하는 사역의 실질은 같은 것이며, 영이든 육신이든 모두 하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고 하나의 사역을 경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영과 육신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두 가지 속성이 있지만 그 실질은 모두 같은 것으로, 다 하나님 자신의 실질과 신분이 있다. 하나님 자신에게는 패역의 성분이 없고, 하나님의 실질은 선한 것이다. 그는 모든 미와 선의 발표이고, 또한 모든 사랑의 발표이다. 설령 육신에 있는 하나님이라고 해도 아버지 하나님께 거역하는 일을 하지 않고, 그 자신을 희생한다고 해도 기꺼이 원하며 아무런 선택도 없다. 하나님에게는 독선적이거나 자고(自高)한 성분이 없고, 교만하고 자대(自大)하거나 간사한 성분도 없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그런 것은 모두 사탄에게서 온 것이고, 사탄은 모든 추함과 악함의 근원이다. 사람에게 사탄과 같은 속성이 있게 된 까닭은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되고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사탄에게 패괴되지 않았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속성만 있고 사탄의 속성은 없다. 하나님이 육신에 거할 때, 사역이 얼마나 힘들고 육신이 얼마나 연약하든지 그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에 방해되는 일을 할 리가 없고, 더욱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거역할 리도 없으며, 차라리 육신이 고통을 받을지언정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않는다. 마치 예수가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과 같다. 사람에게는 자신의 선택이 있지만, 그리스도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선택이 없다. 비록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 있지만 여전히 육신의 각도에 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육신의 각도에 서서 아버지 하나님의 부탁을 완성한다. 이것은 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사탄에게서 온 것이면 하나님의 실질이 있을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실질만 있기에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하지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복하지도 못한다. 그리스도 외의 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할 수 있고, 또한 아무도 하나님이 부탁한 사역을 직접 담당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경영을 자기가 해야 할 본분으로 삼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실질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사탄의 속성이다. 이 두 가지 속성은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사탄의 속성이 있는 자라면 그리스도라고 칭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을 대신할 수 없는 까닭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실질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고 이후의 앞날을 위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역사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그가 비록 육신으로 있지만, 그의 인성은 육체에 속한 사람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그에게는 특정된 성격이 있는데, 이 성격 또한 신성의 제약을 받는다. 신성은 연약이 없다. 여기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연약이란 그의 인성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 연약은 어떤 상황에서는 신성을 제한하기도 하지만 범위가 있고 기한이 있는 것이지 끝없이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신성의 사역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인성이 어떠한지를 상관치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히 신성의 지배를 받는다. 인성에서의 정상 생활을 제외하고 인성에서의 모든 활동은 신성의 영향을 받고 있고, 또한 신성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리스도에게 인성이 있다고 해도 신성의 사역과 서로 방해되지 않는 까닭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이 인성은 비록 처세에 미숙한 인성이지만, 신성의 정상 사역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의 인성이 패괴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직접 신성의 지배를 받고, 또한 그에게 일반 사람보다 높은 이지(理智)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인성은 신성이 지배하여 역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성이고, 신성의 사역을 가장 잘 발표할 수 있는 인성이며, 신성의 사역에 가장 잘 순복할 수 있는 인성이다. 하나님은 육신에서 역사해도 여전히 육신에 있는 사람이 해야 할 본분을 잃지 않고 진심으로 하늘의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실질이 있으며, 그의 신분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다. 단지 그가 땅에 와서 피조물이 되어 피조물의 외형을 갖게 되었고 원래보다 인성이 더 있게 되었을 뿐이다. 그가 하늘의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소시(所是)로서 사람이 모방할 수 없다. 그의 신분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육신의 각도에 서서 경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늘의 하나님을 경배한다”라는 이 말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도 그의 소시인데, 사람에게 요구하기 전에 그는 이미 그렇게 행하였다. 그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만 요구하고 자신은 오히려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행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다 그의 소시이기 때문이다. 그가 어떻게 역사하든지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가 있을 수 없고, 사람에 대한 그의 요구가 어떠하든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다 그의 경영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모든 사람보다 높으므로 그는 피조물 중에서 최고의 권병인데, 그 권병은 바로 신성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소시이다. 이 성품과 소시로 그의 신분이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이 얼마나 정상이든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신분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고, 그가 어느 각도에 서서 말씀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든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우매무지한 사람은 흔히 그리스도의 정상 인성을 그리스도의 결점으로 본다. 그가 어떻게 신성의 소시를 표현하고 유로(역주: 흘러나옴)하든지 사람은 그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또한 그리스도가 순복과 낮춤을 표현할수록 우매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더욱 경시하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해 배척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위대한 형상이 있는 ‘위인’들을 책상 위에 놓고 공양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근본 원인은 바로 하나님이 성육신 된 실질이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데에 있고, 그리스도의 정상 인성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근원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인성으로 가려지지 않고, 피조물의 각도에 서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으며, 비범한 인성을 갖고 있다면, 아마 모든 사람들이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항상 하늘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 좋아하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에게는 인성이 없고 피조물의 속성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늘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항상 새로운 시선으로 보고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언제나 경멸하는 태도를 갖는다. 그리스도가 땅에 와서 비록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여 역사할 수 있지만 그가 땅에 온 목적은 사람에게 그의 육신의 형상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고, 그에 대한 식견을 넓히게 하려는 것도 아니라, 사람이 그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아 새로운 시대에 진입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신의 기능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육신에서의 사역을 위한 것이지 결코 사람에게 그의 육신의 실질을 완전하게 알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떻게 역사하든 육신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며, 모두 정상 인성이 있는 육신에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본래 모습을 전부 나타내어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또한 육신이 하는 사역은 지금까지 사람이 상상한 대로 그렇게 초자연적이거나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가 육신에서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고 또한 하나님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친히 하고 있지만, 그는 하늘의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사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지도 않고 육신에서 비미은장한다. 그리스도가 아닌, 그리스도라고 사칭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그리스도의 속성이 없다. 거짓 그리스도의 교만방자하고 스스로를 높이는 성정으로부터 도대체 어떠한 육신이라야 그리스도인지를 대조해 낼 수 있다. 거짓 그리스도일수록 더욱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고, 더욱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사람을 미혹한다. 거짓 그리스도라면 하나님의 속성이 없고, 그리스도라면 거짓 그리스도의 성분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다. 하나님이 성육신 된 것은 단지 육신에서의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사람에게 자신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행하는 사역으로 자신의 신분을 실증하고, 자신의 유로로 자신의 실질을 실증한다. 그의 실질은 근거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신분은 자신이 빼앗아 온 것이 아니라 그가 행한 사역과 그의 실질로 결정되는 것이다. 비록 그에게 하나님 자신의 실질이 있고, 게다가 그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그는 영과 다른 육신이고, 영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육신의 외형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정상적이든, 어떻게 연약하든, 또한 어떻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든, 그의 신성을 부인할 수 없다. 성육신 하나님께는 정상 인성과 정상 인성의 연약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성의 기묘와 난측(難測) 그리고 육신의 모든 행사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는 인성과 신성이 다 아주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있기에 조금도 공허하지 않고, 조금도 초자연적이지 않다. 그가 땅에 온 주요 목적은 역사하는 것이다. 땅에서 역사하려면 반드시 정상 인성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성의 위력이 얼마나 크든지 그의 고유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인성이 비록 매우 중요하지만 인성은 결코 그의 실질이 아니다. 그의 실질은 신성이다. 그러므로 그는 땅에서 직분을 시작할 때 자신의 신성의 소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의 인성은 다만 육신의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여 신성이 육신에서 정상적으로 역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역의 전부를 지배하는 것은 신성이다. 그가 사역을 완성하면 그는 자신의 직분을 다한 것이며, 사람이 인식해야 할 것은 바로 그의 모든 역사인데, 역사하는 것으로 사람에게 그를 알게 한다. 역사하는 과정에서 그는 신성의 소시를 아주 완전하게 발표하는데, 인성이 섞여 있는 성품이 아니고 사유와 인위적인 것이 섞여 있는 소시도 아니다. 그의 모든 직분이 다 끝날 때에 그는 이미 자신이 발표해야 할 성품을 완전무결하게 다 발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역사는 어떠한 사람의 지시도 받지 않고, 그의 성품의 발표 역시 상당히 자유로운데, 두뇌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사유로 가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유로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도 해내지 못한다. 설사 환경이 열악하거나 조건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적당한 시간에 자신의 성품을 발표한다. 그리스도이면 그리스도의 소시를 발표하고, 그리스도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성품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대적하거나 그에 대해 관념이 있다고 할지라도 누구도 사람의 관념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발표한 성품이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라고 부인하지 못한다. 무릇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의 신성의 발표로 인하여 그가 그리스도임을 인정할 것이고, 절대로 어느 한 방면이 사람의 관념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사람이 모두 매우 미련할지라도 사람은 도대체 무엇이 사람의 뜻에서 비롯된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인지를 알고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속셈으로 인하여 고의로 그리스도를 대적할 뿐이다. 만일 이런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인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발표한 신성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가 한 사역은 사람의 육안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발표가 그의 실질을 결정한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부탁을 완성할 수 있고, 진심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으며, 진심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할 수 있다. 이것은 모두 그의 실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의 자연적인 유로도 그의 실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자연적인 유로라고 하는 까닭은 그가 발표한 것이 모방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교육하거나 수년간 양성한 결과가 아니며, 그 자신이 배운 것이나 꾸며 낸 것도 아니라 원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의 사역과 그의 발표를 부인하고, 그의 인성을 부인하며, 정상 인성의 모든 생활을 부인하지만, 누구도 그가 진심으로 하늘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고, 천부의 뜻을 완성하러 온 것을 부인하지 못하며, 누구도 그가 아버지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비록 그의 형상이 그다지 사람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고, 비록 그가 말을 함에 있어 비범한 기개를 갖추지 못했으며, 비록 그의 역사가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천지개벽하게 하거나 세상을 뒤흔들지는 못했지만, 그는 정말 진심으로 천부의 뜻을 이루고, 천부에게 완전히 순복하며, 죽기까지 순복하는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그의 실질은 바로 그리스도의 실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모두 믿기 어려우나 또 확실히 존재하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직분을 모두 다 마치고 나면 사람은 그의 역사에서 그의 성품을 볼 수 있고, 그의 소시가 모두 하늘의 하나님의 성품과 소시를 대표한다는 것도 볼 수 있다. 그때 그가 행한 모든 사역을 종합해 보면 그는 바로 ‘말씀’으로 된 ‘육신’이지 혈기에 속한 사람과 같은 육신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실질은 천부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다>에서 발췌 『그는 우리를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고, 우리를 위하여 침식도 편하게 하지 못했으며, 그는 우리 때문에 울고, 우리 때문에 탄식하며, 우리 때문에 병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우리의 귀숙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는 굴욕을 참고 있었지만, 우리의 무감각, 우리의 패역은 그의 마음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피를 흘리게 하였다. 이러한 소시소유는 보통 사람에게 없는 것이고, 또한 패괴된 어떠한 사람도 구비하지 못하고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일반인에게 없는 관용과 인내가 있으며, 그의 사랑은 그 어떤 피조물도 구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분 외에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우리의 본성과 실질에 대해 손금 보듯이 알 수 있는 사람도 없으며, 인류의 패역과 인류의 패괴를 심판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하늘의 하나님을 대표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이렇게 역사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분 외에는 하나님의 권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존엄을 갖춘 사람이 없으며,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는 그에게서 남김없이 발표되었다. 그분 외에는 우리에게 길을 가리켜 주고 광명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분 외에는 하나님이 창세로부터 오늘날까지 아직 공개하지 않은 심오한 비밀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그분 외에는 우리를 구원하여 사탄의 매임에서 벗어나고 패괴 성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의 부탁을 발표하고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는 새 시대와 새 기원을 개척하고 새 하늘과 새 땅, 새 역사를 가져와 우리에게 희망을 가져다주었으며, 막연함 중에서 지내던 우리의 삶을 끝냈고, 우리(원문: 我們全人)로 하여금 구원받는 길을 철저히 보게 하였다. 그는 우리(원문: 我們全人)를 정복하고 우리의 마음을 얻었다. 그 시각부터, 우리의 마음은 지각이 있게 되었고, 우리의 영도 소생한 듯하였다. ‘이 평범한 사람, 이 작디작은 사람, 우리 가운데 생활하고 계시면서 우리에게 오랫동안 버림받았던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늘 그리워하고 밤낮으로 바라던 주 예수가 아닌가? 그분이다! 바로 그분이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다! 그분이 바로 진리ㆍ길ㆍ생명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중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았다>에서 발췌 『하나님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 성육신하든, 그가 육신에서 역사하는 원칙은 변할 수 없다. 그는 말씀으로 된 육신이지만 또 육신을 벗어나서 역사할 수 없고, 더욱이 말씀이 육신 되었으나 또 육신의 정상 인성에서 역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성육신은 의의가 없게 되고, 더욱이 ‘말씀’이 육신 된 의의가 조금도 없게 된다. 더구나 하나님이 성육신 된 것은 오직 하늘의 아버지(즉, 영)만 알고, 그 외는 육신 자신마저도 모르고 하늘의 사자도 모른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역사는 더욱 정상적이 되었고, 또한 확실히 ‘도’가 육신 된 것이고 ‘말씀’이 육신 된 것임을 더욱 나타낼 수 있으며, 그의 육신은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임을 의미한다.』 <성육신의 심오한 비밀 (1)>에서 발췌 『이 육신은 사람이자 하나님이고,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이자 완전한 신성이 있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 육신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 또한 영과 크게 다르더라도 사람을 구원하는 이는 여전히 성육신한 하나님 자신이고, 영이자 육신이다. 어떻게 칭하든, 결국은 하나님 자신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과 육신은 갈라놓을 수 없고, 사역은 육신이 하는 것이자 하나님의 영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영의 신분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신분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패괴된 인류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의 구원이 더욱 필요하다>에서 발췌 『영의 발표에는 몇 방면이 포함되는가? 어떤 때는 인성에서 역사하고 어떤 때는 신성에서 역사하는데, 어쨌든 다 영의 지배를 받는다. ……오늘 말하는 실제의 하나님 자신은 인성에서도 역사하고 신성에서도 역사한다. 실제의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을 통해 정상 인성의 역사도 있고 정상 인성의 생활도 있고 완전한 신성의 역사도 있게 되어 인성과 신성이 일체로 연결되었다. 또한 이것은 다 말씀으로 이룬 것인데, 인성에서든 신성에서든 모두 말씀하고 음성을 발한다. 인성에서의 역사는 인성의 언어로 말하기 때문에, 사람이 접촉하기 쉽고 깨닫기 쉬우며 통속적이고 알기 쉬워 모든 사람에게 공급할 수 있으므로, 지식이 있는 자든 학력이 낮은 자든 다 받아들일 수 있다. 신성에서의 역사도 여전히 말씀으로 하는데, 공급이 가득하고 생명이 가득하며, 사람의 뜻이 섞여 있지 않고 인성의 취향과 연관되지 않으며, 인성의 제한이 없고 어떠한 정상 인성의 구속도 받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전히 육신 중에서 역사하지만 영의 직접적인 발표이다. ……‘하나님’이 ‘육신’에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영의 모든 역사와 말씀을 정상 인성에 의해 하는 것이고, 성육신에 의해 하는 것인데, 바로 하나님의 영이 인성 역사를 지배할 뿐만 아니라 육신 중에서 신성의 사역도 하는 것이다. 성육신의 하나님에게서 너는 하나님의 인성에서의 역사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신성 역사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더 실제적인, 하나님이 육신에서 나타난 실제 의의이다. 네가 만약 이것을 꿰뚫어 보았다면 너는 하나님의 각 부분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으며, 신성 역사를 너무 지나치게 중요시하지도 않고 인성에서의 역사를 너무 가볍게 보지도 않으며, 극단으로 가지도 않고 굽은 길을 걷지도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실제 하나님이란 함의는 영의 지배를 받는 인성 역사와 신성 역사를 육신 중에서 발표하는 것을 말하는데, 사람으로 하여금 생생하고 생동하게 형상적으로 창현(彰顯)하고 유로(역주: 흘러나옴)하는 것을 보게 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보게 한다.』 <너는 실제의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에서 발췌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확정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역사하여 사람을 구원하십니까?

『망망한 우주 궁창에 많은 생령이 번식하고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생명의 규율을 따르고 있고 하나의 불변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 죽은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가져가고 살아있는 사람은 또 죽은 사람의 역사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다. 인류는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또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는지? 누가 이 세계를 주관하고 있는지? 또 누가 이 인류를 창조하였는지? 설마 정말로 대자연의 조화는 아니겠지? 인류가 정말로 자기의 운명을 장악할 수 있는지? ……’』

말세에 하나님이 이미 새로운 사역을 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새 사역을 따라가지 못하고 여전히 은혜시대의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까?

『예수는 사람들 가운데 와서 많은 사역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단지 전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였고 사람의 속죄제로만 되었을 뿐, 사람의 패괴 성정을 다 벗겨버리지는 않았다. 사람을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완전히 구원해내려면, 예수가 속죄제로 되어 사람의 죄를 담당하는 것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더 큰 사역을 하여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의 성정을 완전히 벗겨버리는 것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주님 위해 전도하고 사역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인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세 심판 사역으로 정결케 되고 구원받는가?

성경 참고: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 12:47~48)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 16:12~13) 관련된 하나님 말씀: 『하나님의 이번 성육신의 역사는 주로 형벌과 심판을 위주로 하여 그의 성품을 발표한다. 이 기초 위에서 사람에게 더 많은 진리를 가져다주고 더 많은 실행을 가리켜 줌으로써 사람을 정복하고 구원하여 패괴된 성정을 벗겨 버리는 그 목적을 이룬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나라시대에서 사역을 하는 내막이다.』 <앞에 쓴 말씀>에서 발췌 『말세의 그리스도는 아주 많은 방면의 진리로 사람을 교훈하고, 사람의 본질을 드러내며, 사람의 말과 행위를 해부한다. 이런 말씀에는 아주 많은 방면의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의 본분, 사람이 하나님께 어떻게 순복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어떻게 충성해야 하는지, 사람이 어떻게 정상 인성을 살아내야 하는지,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성품 등등이 있다. 이런 말씀은 모두 사람의 본질과 패괴 성정에 초점을 둔 것이다. 특히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저버렸는지를 드러낸 그런 말씀은 더욱 사람이 본래 사탄의 화신이고 하나님의 적대 세력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어 말한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 사역을 하는 것은 두세 마디 말씀으로 사람의 본성을 다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폭로하고 훈계하고 책망하는 것이다. 이 각종 방식의 폭로와 훈계, 책망은 결코 일반적인 말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전혀 없는 진리로 대체하는 것인데, 이러한 방식을 비로소 심판이라고 한다. 이러한 심판이라야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고,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해 심복구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참된 인식도 있게 할 수 있다. 심판 사역이 가져온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본래 모습에 대해 알 수 있게 된 것이고, 사람이 패역 진상에 대해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심판 사역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역 취지에 대해 많이 깨닫게 하였고, 사람이 알 수 없었던 심오한 비밀을 많이 이해하게 하였으며, 또한 사람의 패괴된 실질과 패괴된 근본 원인도 인식하게 하고 알게 하였으며, 사람의 추악한 몰골도 발견하게 하였다. 이런 사역의 효과는 모두 심판 사역이 가져온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 사역의 실질은 사실 하나님의 진리, 길, 생명을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열어 놓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이 사역이 바로 하나님이 하는 심판 사역이다.』 <그리스도는 진리로 심판의 사역을 한다>에서 발췌 『현재 이 시대에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주로 생명의 말씀을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이고, 사람의 본성 실질 및 패괴 성정을 드러내는 것이며, 사람의 종교 관념, 봉건사상, 낡은 사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사람의 지식이나 문화와 같은 이런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러내야 정결함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말세에 말씀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지 결코 표적과 기사로 사람을 온전케 하지 않는다. 말씀으로 사람을 드러내고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고, 온전케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행사를 보게 한다.』 <하나님의 현재 역사에 대한 인식>에서 발췌 『이번 단계 심판, 형벌의 사역으로 사람에게 자기 안에 있는 추하고 패괴된 실질에 대해 철저히 인식하게 하고, 또한 완전히 변화되어 정결함을 받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한다. 이래야 사람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올 자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행하는 이 모든 사역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결케 되고 변화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고, 말씀의 심판과 형벌에 의해, 연단에 의해 패괴를 벗어 버리고 정결함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번 단계 사역을 구원의 사역이라고 하기보다는 정결케 하는 사역이라고 하는 편이 낫다. 사실상, 이번 단계는 정복의 사역이기도 하고, 제2단계 구원의 사역이기도 하다. 사람은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통해 하나님께 얻어지는데, 그것은 말씀으로 연단하고 심판하고 폭로하는 것으로 사람 마음속에 있는 불순물, 관념, 속셈 또는 자신의 소망을 다 드러내는 것이다.』 <성육신의 심오한 비밀 (4)>에서 발췌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도달하는가? 그의 공의로운 성품으로 말미암아 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주로 공의, 진노, 위엄, 심판, 저주인데 그가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은 주로 심판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여 말한다. “왜 심판ㆍ저주를 통해야만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사람을 저주하면 사람이 죽지 않겠는가? 사람을 심판하면 사람이 정죄받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찌 또 온전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 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저주하는 것은 사람의 패역이고 심판하는 것은 사람의 죄이다. 비록 말씀이 엄하여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고 사람 안의 것들을 모두 폭로해 낼 뿐만 아니라 일부 엄한 말씀으로 사람 안의 본질적인 것들을 폭로해 내지만 이러한 심판 방식을 통해 사람으로 하여금 육체의 본질을 깊이 인식하게 하고 따라서 하나님 앞에 순복하게 한다. 사람의 육체는 죄에 속하고 사탄에게 속하며, 육체는 패역한 것에 속하고 하나님이 형벌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알게 하려면 하나님의 심판 말씀이 임하고 또 온갖 연단을 통해야만 하나님의 역사가 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어야 하나님의 사랑스러움을 알게 된다>에서 발췌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케 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각종 상황을 통해 사람의 패괴 성정을 다루고, 또 각종 일을 통해 사람을 드러낸다. 한 방면으로는 사람을 책망하고, 한 방면으로는 사람을 드러내며, 한 방면으로는 사람을 파헤쳐 사람 마음 깊은 곳의 ‘비밀’을 다 파내고 다 폭로한다. 많은 정형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 사람에게사람의 본성을 보게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 또 훈계하고 연단하는 것을 통해, 또 형벌하는 것을 통해 온전케 하는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고 이런 것들로 사람에게 하나님이 실제임을 인식하게 한다.』 <실행을 중시하는 사람만이 온전케 될 수 있다>에서 발췌 『시련은 사람 안의 어떤 정형을 겨냥한 것인가? 사람 안의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없는 패역 성정을 겨냥해 말한 것이다. 사람 안에는 뒤섞임이 많고 외식하는 요소가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시련하여 그 시련으로 사람을 정결케 하려고 한다. 하지만 네가 지금 그를 만족케 할 수 있다면, 이후의 시련은 너에게 있어서 온전케 하는 것이 된다. 만약 지금 그를 만족케 할 수 없다면, 이후의 시련은 너에게 있어서 시험이 되어, 너는 부지중에 넘어지게 된다. 그때가 되면 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데, 그것은 네가 하나님의 사역을 따라오지 못해 실제 분량이 없기 때문이다. …… 네가 하나님의 성품을 알지 못한다면 시련 가운데서 반드시 넘어진다. 왜냐하면 네가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온전케 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온전케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련이 너에게 닥칠 때 너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으면, 너는 서지 못한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다. 하나님이 모든 성품을 사람에게 나타내면 너의 육체에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을 사람에게 나타내면, 사람의 육체는 반드시 많은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런 고통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에 의해 온전케 될 수 없고, 하나님께 진실한 사랑을 바칠 수도 없다. 하나님이 만일 너를 온전케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너에게 그의 모든 성품을 나타낼 것이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성품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말세에 하나님은 그가 예정하고 선택한 이 무리 사람들에게 그의 모든 성품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사람을 온전케 할 때를 빌어 그의 성품을 나타내는데, 이를 통해 한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한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이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경력함에 있어서 사람은 큰 고통을 겪고 높은 대가를 치러야만, 최후에 하나님께 얻어질 수 있고, 최종에 진실한 사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도 만족을 얻게 된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케 되려고 하고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려고 하고 진실한 사랑을 하나님께 완전히 바치려고 한다면, 반드시 많은 고통과 환경의 시달림을 겪어야 한다. 너를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해야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참된 마음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 있다.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참된 사랑이 있는지는 바로 고난과 연단 가운데서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사랑을 순결하게 하는 것도 고난과 연단을 통해야 비로소 도달하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에서 발췌 『현재 너희 이 사람들은 바울의 이지마저도 갖추지 못하고 바울의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아는 능력도 없으며 바울의 양심도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너희를 언제나 좀 짓누르고 언제나 형벌하고 심판해야만 너의 영을 일깨울 수 있다. 너의 생명에 가장 유익한 것은 그래도 형벌과 심판이다. 필요할 때는 또 사실이 임하는 형벌을 좀 해야 너희가 철저히 탄복하게 된다. 너희의 본성은 형벌과 저주가 없으면 굴복하려고 하지 않고, 탄복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눈에 보이는 사실이 없으면 효과에 도달할 수 없다. 너희의 인격은 너무나 비천하고 무가치하다!』 <실행 (6)>에서 발췌 『나는 큰 붉은 용 국가에 강림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우주를 향하였는데, 온 궁창까지 다 진동한다. 나의 심판을 받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느냐? 내가 쏟은 재난 속에서 살지 않는 곳이 어디 있겠느냐? 발길이 닿는 곳마다 각종 ‘재난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이것은 내가 역사하는 방식이고, 사람에게는 의심의 여지도 없이 구원이고, 또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여전히 자비이다.』 <하나님이 전 우주를 향해 발한 음성ㆍ제10편 말씀>에서 발췌 『하나님께 정복되는 과정은 마치 한차례의 승자전과 같다. 하나님 말씀은 마디마다 우리의 급소를 찔러 우리를 슬프게 하고 두렵게 하였다. 그는 우리의 관념과 상상을 드러냈고 우리의 패괴 성정을 드러냈다. 일언일행, 일거일동에서 마음과 생각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본성 실질을 그의 말씀 가운데서 드러나게 하여 우리를 두려워 떨게 하였고 몸 둘 바를 모르게 하였다. 우리의 모든 행위, 우리의 속셈과 목적, 심지어 우리 스스로도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패괴 성정까지도 그는 일일이 우리에게 알려 주어 우리를 만신창이가 되게 하였고, 게다가 심복구복하게 하였다. 그는 그에 대한 우리의 대적을 심판하고 그에 대한 우리의 모독과 정죄를 형벌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의 눈에서는 우리가 옳은 게 하나도 없고 우리가 바로 숨 쉬고 있는 사탄임을 느끼게 하였다. 우리의 희망은 깨지고 말았다. 우리는 더 이상 그에 대해 감히 그 어떤 무리한 요구나 의도를 갖지 못하게 되었고, 심지어 우리의 꿈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사실이다. 일순간 우리의 마음은 평형점을 잃어 앞길을 어떻게 걸어 나가야 할지 몰랐고,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몰랐다. 마치 우리의 신앙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하였고, 또 마치 우리는 주 예수와 ‘만난 적도, 알고 지낸 적도’ 없는 듯하였다. 눈앞의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망연자실하게 하였고, 우리를 방황하게 하였다. 우리는 낙심하였고 실망하였으며,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굴욕이 생겼다. 우리는 쏟아 내려고 시도했고, 다른길을 찾으려고 시도했으며, 더욱이 우리의 구주 예수를 계속 기다렸다가 그에게 속사정을 하소연하려고도 시도했다. 때로는 우리의 겉모습은 대범하였지만 마음은 전례 없이 낙담되었고, 때로는 우리의 겉모습은 아주 침착해 보였지만 마음은 바다가 뒤집어지듯이 갑절로 괴로움을 받았다. 그의 심판과 형벌로 우리는 모든 꿈과 희망이 빼앗겨 더는 지나친 욕망을 갖지 못하였고, 그가 바로 우리의 구주이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의 심판과 형벌로 말미암아 그와 우리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겼는데, 심지어 아무도 넘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심판과 형벌로 말미암아 우리는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큰 좌절을 겪고 이렇게 큰 굴욕을 받았다. 그의 심판과 형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거스를 수 없고 존귀한데, 이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비천하고 얼마나 더러운지를 느끼게 하였다. 그의 심판과 형벌은 우리에게 처음으로 우리의 오만과 자대(自大)를 알게 하였고, 또한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과 동등할 수 없고 같이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그의 심판과 형벌은 우리로 하여금 더는 이러한 패괴 성정 가운데서 살지 않고 하루속히 이러한 본성 실질에서 벗어나 더는 그에게 미움받지 않고 혐오 받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구하게 하였다. 그의 심판과 형벌은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그의 말씀에 순복하고 그의 말씀을 듣게 하였으며, 더는 그의 지배와 안배를 거역하지 않게 하였다. 그의 심판과 형벌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삶의 희망을 주었고, 우리로 하여금 달갑게 그를 받아들여 우리의 구주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정복 사역에서 걸어 나왔고, 지옥에서 걸어 나왔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걸어 나왔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이 무리의 사람들을 얻으셨다! 그는 사탄을 이기셨고 모든 원수들을 패배시켰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중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았다>에서 발췌

일이 바빠 예배하고 말씀 볼 시간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죠

지금 많은 분들은 일에 바빠 예배하고 말씀 볼 시간조차 없어 주님과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주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요?

각 종파마다 자기가 믿는 분이 참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그럼 어느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지를 확정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였기에, 모든 피조물로 하여금 다 그의 권세 아래로 돌아오게 하고 그의 권세 아래에 순복하게 한다. 그는 만유로 하여금 다 그의 수중에 있도록 만유를 주관할 것이다. 무릇 피조물은 동물ㆍ식물ㆍ인류ㆍ산하ㆍ호수를 포괄하여 다 그의 권세 아래로 돌아와야 한다. 하늘 위의 만물과 땅 위의 만물도 그의 권세 아래로 돌아와야 하고, 어떠한 선택도 있어서는 안 되며, 모두 그의 지배에 순복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규정한 것이고 역시 하나님의 권세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있고, 만물을 모두 층차있게 하고 모두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각기 종류대로 하고 각기 자기 위치에 거하게 하기에, 아무리 큰 물질이라도 하나님을 초월할 수 없고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인류를 위하여 복무한다. 어떤 물질도 감히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하나님께 다른 요구를 제기할 수 없다.』

당신은 여러 교단과 교파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저는 어릴 적에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예전에, 인도에 한 왕이 있었는데 그는 많은 코끼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왕이 코끼리의 등에 타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길가에서 쉬고 있는 한 무리의 소경들을 보고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코끼리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 소경들에게 함께 만져 보라고 했습니다. 첫 번째 소경이 손을 내미니 마침 코끼리의 코가 만져졌습니다. 그러자 그 소경은 “아! 이제 보니 코끼리는 구불구불한 끌채(수레의 양쪽에 대는 긴 채)처럼 생겼네요!”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소경은 코끼리의 단단한 상아를 만지고는 바로 “아니야! 코끼리는 쌀을 찧고 옷을 두드릴 때 쓰는 홍두깨(다듬잇방망이) 같아”라고 반박했습니다. 세 번째 장님은 코끼리의 귀를 만진 후 “아니야! 코끼리는 잡동사니를 담는 삼태기처럼 생겼어”라고 말했습니다. 네 번째 소경은 코끼리의 머리를 만지고는 “틀렸어! 코끼리는 향을 피우는 세발 향로 같구만”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섯 번째 장님은 코끼리의 등을 만지고는 “당신들은 다 틀렸어! 코끼리는 울퉁불퉁한 작은 언덕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여섯 번째 장님은 코끼리의 배를 만지고 나서 “사실 코끼리는 뭐 별거 아니네, 두텁고 넓은 벽처럼 생겼어”라고 말했습니다. 일곱 번째 장님은 코끼리의 넓적다리를 만지고는 “아니야! 코끼리는 고목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여덟 번째 소경은 코끼리의 어깨를 만지고는 “코끼리는 기둥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아홉 번째 장님은 코끼리의 발을 만지고 “아니야! 아니야! 코끼리는 움푹 파인 돌절구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장님은 코끼리의 꼬리를 만지고는 “당신들의 말은 다 틀렸어, 코끼리는 밧줄로 엮은 길다란 채찍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장님들은 자신이 만진 것이 맞고 다른 사람의 말은 틀렸다고 하면서 논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 소경들이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던 국왕은 웃으면서 “여러분! 여러분은 크게 틀렸습니다! 여러분이 만진 것은 코끼리 신체의 일부분입니다. 코끼리는 채찍도 돌절구도 아니고, 고목도 담장도 아니며, 작은 언덕도 향로도 아닙니다 …… 코끼리는 그저 코끼리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저는 오늘날 주님을 믿고 있는 여러 교단과 교파가 연상되었습니다. 여러 교파의 크리스천들은 자신이 믿는 것이 옳고 다른 사람이 믿는 것은 틀린 것이라며 의견이 분분한데, 각자가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신청의(以信稱義)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는 칭함을 받았으므로 자신들이 믿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생명파는 성경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했으므로 자신들이 거듭남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파는 성경에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기록되었으므로 자신들이 그 이름을 지키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합니다. 찬미파는 성경에 다윗이 북치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중시하는데, 그렇게 믿어야만 하나님께 칭찬받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안식일파는 여호와 하나님이 십계명을 반포하여 사람들에게 반드시 안식일을 지킬 것을 요구하셨으므로, 오직 안식일을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각 교파 사람들이 다 자신들이 믿는 교파의 관점만 주장하는 것을 보면, 바로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사람이 믿는 것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이런 관점이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인지 누가 알고 있을까요? 우리 함께 고린도전서 1장 10절과 12절 말씀을 봅시다. “형제들아 ……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신 후에, 크리스천들 가운데 서로 다른 믿음의 파(派)가 생기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것은 바울에 속하고, 아볼로가 전한 것은 아볼로에 속하고, 게바가 전한 것은 게바에게 속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의 사도들은 당시의 신도들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분열되면 안되며, 그렇게 믿는 것은 잘못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구속을 받아들인 것이지 사람의 구원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에서 사람을 믿는 데로 나아가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주님의 몸은 오직 하나인데 그렇게 한다면 주님의 몸을 갈라놓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주님의 뜻에 맞을까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예수님의 복음이 여러 세대를 거치며 지금까지 전해져 와서, 처음에 바울에게 속하고, 아볼로에게 속하고, 게바에게 속하던 것이 이제는 이미 2,000개(중국 기준)가 넘는 교파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몇천 년 동안 하나님을 믿어 온 과정은 뜻밖에도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관념 속에서 살면서 흐리멍덩하게 하나님을 믿고, 더군다나 저마다 이치를 말하면서 자신의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인식은 완전치 못합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수많은 교파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된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누가 알고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한 가지 신앙이고, 백 사람이면 백 가지 신앙이 있다. 사람에게 이런 신앙이 있는 것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역사를 보지 못한 연고이며, 모두 사람이 귀로 듣기만 하였지 눈으로 본 것이 아니고 사람이 전설을 듣고 이야기를 들었으나 하나님 역사의 사실에 대한 인식을 매우 적게 들은 까닭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을 한해 믿은 사람도 관념에서 신앙하고,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한평생 믿은 사람도 역시 관념에서 신앙 한다. 사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적 신앙에서 언제나 벗어 나지도 못한다. 사람은 또 자기가 이미 낡은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지에 진입하였다고 여기는데, 어찌 하나님의 진실한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모두 관념이고 소문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각 교파가 생겨난 주원인은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야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저 막연한 하나님만 믿을 뿐,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실질, 하나님의 소유소시, 하나님의 권병,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이 모든 것을 주재하고 만물을 관리하고 공급하는 등등에 대한 인식이 없습니다. 비록 서로 다른 교리를 지키지만 어떤 교파를 막론하고 모두가 자신의 관념과 상상 속의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 자대(自大)하여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더욱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복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화비하는 것으로 주님과 거래하여 맞바꾸려고 하고 천국에 들어가 상을 받고 싶어합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은 날마다 죄짓고 회개하는 거듭되는 악순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주님이 오시면 들림받아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흐리멍덩하게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을 혐오하는지는 지금까지 모르고, 사람들 모두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파가 주님께 가장 인정받는 곳이라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사람이 전하는 말로, 성경의 글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이끄심 아래에서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믿어도 그 믿음이 실제적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그저 바닷물 한 방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맹목적으로 사람을 우러러보고 따랐기 때문에 지금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위의 사실 앞에서 우리는, 오늘날 주를 믿는 사람들이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각자가 자기 것만 고집하고 게다가 또 서로 배척하고, 서로 논단하고, 서로 공격하고 정죄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주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지금의 국면을 전환하지 않고 이렇게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면 그것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이 칭찬하실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9)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에베소서 4:3~6) 이사야서 2장 2절~5절에는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화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 …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우리는 주님의 몸이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하나가 될 수 있는데, 그래야만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세인 지금,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각 교파 사람들은 주님의 몸을 사분오열시켰습니다. 오직 말세에 예수님이 돌아오셔서 하나님 집에서 시작되는 심판 사역을 하셔야 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새 사역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ㆍ형벌 속에서 죄악과 패괴 성정을 벗어버리고 정결케 되어 모두가 하나님께 진실로 순복하고 경배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을 멀리하고, 모두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야만 비로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사람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화목하게 함께 지낼 수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살며,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자민인 것입니다! 말세의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진리를 발표함으로 심판 사역을 하여 한 무리 이기는 자를 정결케 하고 온전케 하였는데, 이 한 무리 사람은 각 교파에서 나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되돌아온 사람들이고, 더군다나 모두가 그리스도와 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말세의 그리스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셔야만 권병과 능력으로 만교(萬敎)가 하나 되는 사역을 하실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교주는 다만 어느 한 종파의 통솔자일 뿐,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고, 천지 만물을 창조한 분을 대표하지 못한다. 교주는 전체 교파의 모든 인사를 통솔할 수는 있지만 천하의 모든 피조물을 통솔할 수는 없다. 이것은 사람마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교주는 다만 하나의 통솔자일 뿐, 하나님(조물주)과 동등할 수 없다. 만물은 모두 조물주의 수중에 있으므로, 최종에는 또 조물주의 수중에 돌아와야 한다. 인류는 본래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어서, 무슨 교파든지 다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돌아와야 한다. 이것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만물 중의 지고자이므로, 피조물 중의 최고 통치자도 그의 권세 아래에 돌아와야 한다. 사람의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하더라도 인류를 적합한 귀숙에 이끌어 들어갈 수 없고, 누구도 만물을 각기 종류대로 되게 할 수 없다. … …왜냐하면 전 우주 아래위에 오직 한 분의 하나님만 존재하고 다른 파별이란 논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를 창조할 수 없으면 세계를 끝마칠 수 없고, 세계를 창조한 분이면 틀림없이 세계를 끝마칠 수 있다. 그러므로 말하니, 시대를 끝마칠 수 없고 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심신을 수양하게 할 수밖에 없는 자는 틀림없이 하나님이 아니고 틀림없이 인류의 주가 아니며, 그는 이렇게 큰 사역을 하지 못한다. 이 사역을 하는 이는 오직 한 분밖에 없다. 무릇 하지 못하는 자라면 틀림없이 하나님 이외의 원수이다. 사교이라면 하나님과 합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합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원수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어떤 교주도 수많은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는 사역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주는 그저 한 종교만 통솔할 수 있을 뿐, 모든 종교를 다 통솔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가 되게 하는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물주는 인류를 창조할 수 있고, 땅에서 인류를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만이 전체 시대를 끝마칠 수 있고, 전 인류를 아름다운 귀숙으로 이끌어 들어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전능하신 하나님은 바로 재림하신 예수님인데, 이미 하나 되게 하는 사역을 이루신 것이 사실에서 증명되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이미 인터넷상에서 전 인류에게 공개되어 각 교파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일부 사람들이 이미 자신들의 교파에서 나와 전능하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의 형제자매들은 서로 다른 교파에서 왔는데, 모두가 방방곡곡에서 모여 하나님의 직접적인 목양과 양육을 받아들이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해 하늘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말세에 사람은 오직 자신의 관념에서 나와야만 주님의 나타남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이끄심을 받아야만 사람은 실제에 진입할 수 있고, 하나님을 참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믿어야 비로소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막연한 가운데서 살지 않게 됩니다.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네가 미국 사람이든 아니면 영국 사람이든 또는 어떤 국적을 가진 사람이든지 간에, 너는 마땅히 자기의 국적 범위에서 벗어나 자아를 초월하여 하나의 피조물의 신분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대해야 한다. 이러면 너는 하나님의 발자취를 한 범위에 제한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많은 사람들은 관념에서 하나님이 어느 한 국가나 어느 한 민족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역사 하는 의의가 그토록 심오하고 하나님의 나타남이 또한 그토록 중요한데, 어찌 사람의 관념과 사유로써 가늠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네가 너의 국적과 민족 관념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나타남을 찾고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래야만 네가 관념의 속박을 받지 않을 것이고, 이래야만 네가 하나님의 나타남을 영접할 자격을 갖출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영원히 흑암 속에 있는 사람이고 영원히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方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