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인류는 서로 다른 생활 방식으로 인해 경계가 생긴 것이다

2018년 08월 14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의 경계를 정했으며, 만물 속에서 여러 가지 생물을 양육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다양한 생존 방식도 예비하였다. 따라서 네가 본 인류의 생존 방식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생존 환경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예비한 여러 가지 먹거리와 수원(水源)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먹거리와 수원은 사람의 육체 생명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곡식을 먹고 사는 것은 아니다. 여러 지리적 환경이 다르고 지리적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인류도 서로 다른 생존 방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생존 방식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류가 경작을 위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농작물을 경작하여 먹거리를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할 세 번째 내용, 즉 인류는 서로 다른 생활 방식으로 인해 경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생활 방식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인류 먹거리의 근원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주로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원 위에 있는 양들,

첫째는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방식이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렇지? 너희들은 모두 현대인이기에 어떻게 사냥을 하는지, 어떻게 총을 잡는지 모를 것이다. 너희들은 모두 땅에서 생산한 양식을 먹거리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무엇을 먹느냐? (야생 동물로 만든 음식을 먹습니다.) 이들은 숲속의 날짐승과 길짐승을 먹는다. ‘야생 동물 요리’라는 말은 현대어로, 사냥꾼들은 그것을 야생 동물 요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먹거리이자 일용할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슴 한 마리를 잡았다고 하자. 그 사람이 사슴을 잡은 것은 농민이 땅에서 식량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농민은 땅에서 식량을 얻고, 이 식량을 보면 기쁘고 든든하다. 먹을 것이 생겨 가족이 배를 곯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놓이고 만족감이 드는 것이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도 포획물을 보면 마음이 든든하고 만족감이 생긴다. 왜냐하면 밥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며, 다음 끼니에 먹을 것이 생겨 배를 곯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 대다수는 농사를 짓지 않고 산속에서 산다. 산속에서는 경작지를 얻기 힘들다. 그래서 이들은 각종 생물과 수렵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일반인들과 다른 첫 번째 생활 방식이다.

둘째는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방식이다.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땅을 경작하느냐? (경작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들은 무엇을 할까? 여기 몽골족이 있다면 너희의 유목 생활에 대해 말해 보아라. (주로 소와 양을 방목하고 농사는 짓지 않습니다. 겨울이 되면 소나 양을 잡아먹고, 소고기와 양고기를 주식으로 삼습니다. 또 밀크티를 마십니다. 유목민들은 1년 사계절 늘 바쁘지만 풍족하게 먹습니다. 우유, 유제품, 육류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몽골인은 주로 소고기나 양고기를 먹고, 소젖이나 양젖을 마신다. 그리고 소나 말을 타고 야외에서 바람 맞고 햇빛을 쬐면서 방목한다. 현대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없고, 매일 드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과 초원을 볼 수 있다.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초원에서 생활하며, 자신들의 유목 생활을 대대손손 이어 나갈 수 있다. 초원에서 살면 조금 적막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생활도 아주 행복한 것이다. 이러한 생활 방식도 좋다!

셋째는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방식이다. 인류 중에 극히 일부만이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거나 바다를 향해 있는 해변이나 작은 섬에서 살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배에서 산다. 이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다.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이들의 먹거리는 어디에서 올까? 여러 가지 생선, 해산물, 해물 요리이다. 그렇겠지? 홍콩이 작은 어촌 마을이었을 당시, 그 작은 어촌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고기잡이로 살아갔다.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매일 물고기를 잡았다. 그들의 주식은 여러 종류의 생선, 해산물이며, 가끔 생선을 쌀, 밀가루, 생필품으로 교환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물가에서 사는 사람들의 또 다른 생활 방식이다. 물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으며, 고기잡이를 생활의 근원이자 먹거리의 근원으로 삼는다.

인류는 농사 외에 주로 위의 세 가지 각기 다른 방식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방목과 고기잡이,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몇 부류 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을 경작하여 생계를 이어 나간다. 경작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땅이다. 경작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채소든 과일이든, 아니면 곡식이든 간에, 땅에서 먹거리와 생활의 필수품을 얻는 것이다.

인류가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여러 가지 생활 환경을 기본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사냥꾼이 숲을 잃고 날짐승과 길짐승을 잃으면, 그의 생활의 근원이 없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숲을 잃어 날짐승과 길짐승이 없어지면, 이들은 생활의 근원을 잃게 된다. 그러면 이런 민족,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미지수이며, 심지어 사라질 수도 있다.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무엇에 의지하느냐? 이들이 진정으로 의지하는 것은 소와 양이 아니라 소와 양의 생존 환경인 초원이다. 초원이 사라지면 이들은 어디에 가서 소와 양을 방목하겠느냐? 소와 양은 무엇을 먹겠느냐? 소와 양이 없어진다면 유목민들의 생활의 근원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생활의 근원이 없어진 민족은 어떻게 되겠느냐? 이들은 생존하기 힘들어질 것이며, 미래가 없을 것이다. 수원이 없어지고 강과 호수가 모두 말라 버린다면 물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각종 물고기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겠느냐?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물과 물고기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겠느냐? 먹거리가 없어지고 생활의 근원이 없어진다면, 이들 민족은 살아갈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들의 생활과 생존이 문제가 되면, 그런 종족은 지속될 수 없다. 어쩌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멸망할 수 있다. 만약 경작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토지를 잃어버린다면 그들은 각종 식물을 경작할 수 없고, 그 식물로부터 먹거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 양식이 없으면 사람은 굶어 죽지 않겠느냐? 사람이 굶어 죽으면 인류는 다 멸망하지 않겠느냐?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각종 생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환경과 생태계를 유지하고, 각종 환경에서 생활하는 여러 생물을 보호하는 단 하나의 목적은 바로 여러 부류의 인류를 양육하고, 서로 다른 지리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양육하기 위함이다.

만물이 자신의 법칙을 잃게 된다면 만물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만약 만물의 법칙을 잃게 된다면 만물 중의 생물은 계속 살아갈 수 없을 것이며, 인류 역시 생존 환경을 잃게 될 것이다. 인류가 이 모든 것을 잃게 되면 이렇게 한 세대 한 세대 번성하며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공급한 만물이 인류를 양육하기 때문이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류를 양육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류를 양육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는 지금까지, 오늘날까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정된 좋은 생존 환경과 규칙적인 생존 환경이 있기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인류와 종족은 각자 규정된 범위 내에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범위는 그 누구도 넘을 수 없으며, 이 경계 역시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구분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구분하였을까? 이는 전 인류에게 있어 중요하고 또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생물의 범위를 나누고, 여러 인류의 생존 방식을 정하였으며, 지구상의 서로 다른 종족,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나누고 범위를 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으로 이야기할 내용이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참된 회개를 보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대함에 있어 소돔 성 사람들과 전혀 달랐던 니느웨 사람들의 태도 여기서 ‘무너지리라’는 무슨 의미이냐? 사라진다는 뜻이다. 왜 사라질까? 누가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단 말이냐? 물론 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어리석지 않았기에 듣자마자 그 말이 하나님에게서 왔고 하나님이 그 성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악독이 여호와 하나님을 노하게 만들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그들은 성과 함께 멸해질 것임을 알아차렸다. 니느웨 성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들은 후 어떻게 하였느냐? 왕부터 백성까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 성경에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니느웨 성 사람들은 소돔 성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소돔 성 사람들은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항하여 악에 악을 더했지만, 니느웨 성 사람들은 그 선포를 들은 후 외면하거나 대항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신복하고 금식을 선포하였다. 여기서 ‘신복’이란 무슨 의미이냐?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믿고 순종한다는 뜻이다. 니느웨 사람들의 실제 행동에 따라 해석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곧 그렇게 할 것임을 믿고 기꺼이 회개하겠다는 뜻이다. 곧 닥쳐올 재앙을 앞두고 니느웨 사람들은 두려움을 느꼈느냐? 그들은 신복했기 때문에 두려워했다. 그렇다면 니느웨 사람들이 신복하고 두려워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느냐? 성경에 따르면,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니느웨 사람들이 참으로 신복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들은 신복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고,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금식을 하고 굵은 베옷을 입었다. 이는 그들이 회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니느웨 성 사람들이 소돔 성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점은 대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개를 표하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니느웨의 백성뿐만 아니라 왕도 그렇게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니느웨 왕의 회개 소식을 들은 니느웨 왕은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은 후 재에 앉았다. 그리고 니느웨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고 소나 양 같은 가축에게도 풀이나 물을 먹이지 말고, 사람이든 가축이든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고 선포하였다. 니느웨 왕이 행한 일련의 일들을 살펴보면 그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회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보좌에서 일어난 후 왕의 의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다. 이 일련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니느웨의 왕이 왕의 신분을 내려놓고 일반 백성처럼 굵은 베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다시 말해,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후, 왕위에 있을 때 행했던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 권력을 내려놓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다는 것이다. 이때 니느웨 왕은 왕의 신분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였다. 또한 그는 성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처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라고 선포하였으며,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지시하였다. 예를 들어,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라고 하였다. 그는 니느웨 성의 왕으로서 최고 지위와 권세를 갖고 있으므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무시하거나 홀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데에 그칠 수도 있었으며,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를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관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보좌에서 내려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회개했으며, 성안의 사람들과 가축들 또한 그렇게 하도록 명령했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명하였다. 니느웨 왕의 이러한 행동은 왕으로서 진정으로 행해야 할 행동이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왕도 하기 어렵고 하지 못했던 행동이자, 역사상 유례없는 위대한 행동으로, 기념하고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인류 역사에서 왕들은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께 대적하고 대항하게 하였지,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악행을 돌이켜서 여호와 하나님께 사함을 받고 징벌을 피하게 한 자는 없었다. 하지만 니느웨 왕은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께로 마음을 되돌리게 하였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도록 하였으며 왕위를 내려놓았다. 이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은 뜻을 바꾸고 진노를 거두어 성안의 사람들을 멸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니느웨 왕의 행동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보기 드문 기적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타락한 인류가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하고 회개한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참된 회개를 보았다 니느웨 성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후 일련의 일을 했다. 그들의 행동과 그들이 그런 일을 한 성격은 무엇이냐? 즉, 그들이 한 모든 행동의 본질은 무엇이냐? 그들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 하나님의 안중에 그들은 참으로 회개하였다. 하나님께 힘써 부르짖으며 죄를 자백하였고 또한 모든 악행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큰 두려움을 느꼈고,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는 것으로 자신을 돌이키고 더 이상 악행을 저지르지 않을 것임을 표하였고, 여호와 하나님께 진노를 거두어 달라고 간구하였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결정과 내리려 했던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들의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이 이전에 행했던 악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들이 왜 멸망되어야 하는지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히 회개하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완전히 떠나려고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알게 된 후 그들은 다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이상 악을 저지르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증오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았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들의 지난날의 죄악을 용서하고 그들의 과거로 그들을 대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또한 그들은 다시는 악을 행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고자 했으며,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들의 회개는 참되고 철저한 것이었으며, 가식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닌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진노했다는 소식을 들은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이 취한 모든 행동과 태도, 그리고 그들의 결정과 선택은 하나님의 눈에 아주 분명하게 보였다. 하나님은 그들이 보인 행동에 따라 마음이 바뀌었다. 이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느냐? 성경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렸지만 그때 하나님의 마음은 복잡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고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 모두의 마음을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참된 회개를 하고 죄를 자백하고 있고, 마음 깊은 곳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복이 있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음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고, 여호와 하나님이 내릴 처벌을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었음을 보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재앙을 면할 수 있도록 그들에 대한 진노를 거두어 달라는 절실한 간청도 들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실을 살핀 후 조금씩 진노를 거두었다. 전에 얼마나 크게 노했든 간에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참된 회개를 보고 감동받았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았고, 더 이상 노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그들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었고 인도하고 공급해 주었다.

사탄이 다시 욥을 시험하다(온몸에 악창이 나다)

1)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 2:6) 2) 사탄의 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4~5) 3) 욥은 시련을 어떻게 대했는가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9~10)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욥 3:3) 욥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길을 귀하게 여겼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사탄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첫 번째 시련에서 보인 욥의 반응과 모습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평가는 사탄의 시험을 당하기 전의 평가와 똑같았다. 즉, 시험이 임하기 전에 욥은 하나님 눈에 순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와 그의 가족을 지켜 주었으며, 그에게 복을 내린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 눈에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시험을 겪은 후,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고 해서 입으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였다. 욥의 실제적인 행동에 하나님은 갈채를 보냈으며, 만점을 부여했다. 욥의 눈에는 모든 재산이든 자녀든 하나님을 버릴 만큼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그 어떤 재산이나 자녀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이 처음의 시험을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사랑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대한 욥의 애정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었다는 것을 보았다. 이번 시련이 욥에게는 단지 여호와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가 다시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게 되는 경험을 한 것일 뿐이었다. 욥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의 마음을 씻는 진실한 체험이었으며, 그의 인생을 충실하게 하는 생명의 세례였다.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과 경외심을 검증하는 한 차례의 풍성한 잔치였다. 이번의 시험으로 욥은 부자의 신분에서 무일푼의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으며, 동시에 사탄으로부터 해를 입었다. 욥은 자신이 무일푼이 되었다고 해서 사탄을 증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탄의 졸렬한 행위로 인해 사탄의 추함과 비열함을 보았으며, 사탄이 하나님께 적대감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영원히 지키겠다고 더욱 굳게 마음먹는 계기가 되었다. 욥은 맹세했다. ‘재산, 자녀, 가족 같은 어떤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저버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며, 절대 사탄의 노예나 재산의 노예, 그 어떤 사람의 노예도 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어떤 누구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욥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다. 시험을 다른 시각으로 봤을 때 역시 욥은 얻은 것이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에게 준 시련에서도 얻은 바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의 인생에서 욥은 여호와 하나님의 행사를 보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내려 준 복을 받았다. 하지만 그러한 복은 욥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고, 더 빚진 마음이 들게 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없는데도 이와 같은 큰 복을 받아 참으로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은 늘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울러,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랐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순종과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이 그의 순종을 검증하고 그의 믿음을 정결케 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욥은 이번에 시련이 임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이런 기회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기에 전혀 태만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욥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소원이 실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회가 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과 경외심이 검증받을 수 있고, 아울러 정결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이로부터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욥은 이와 같은 믿음과 추구가 있었기에 이번 시련에서 더욱 순전해질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또한, 욥은 하나님이 내려 준 복과 은혜에 더욱 감사했으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더욱 찬양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앙망하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위대함과 거룩함을 더 간절히 사모했다. 이때의 욥이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을지라도, 욥의 경험과 체험을 놓고 봤을 때 욥의 믿음과 인식은 엄청난 진보와 발전이 있게 되었다. 그의 믿음은 커졌고, 그의 순종은 목표에 도달했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한층 더 깊어졌다. 비록 이번 시련으로 욥의 마음과 생명이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되었지만 욥은 이로 인해 만족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욥은 이번 시련에서 자신이 얻은 수확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고, 또 자신의 결점과 부족한 부분들을 성찰해 보았다. 아울러, 그는 묵묵히 기도하며 다음 시련을 기다렸다. 욥은 자신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하나님의 또 한 번의 시련을 통해 승화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언행 하나하나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살피고 있다. 욥의 생각은 여호와 하나님의 귀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 다시 한번 예상대로 임했던 것이다.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진정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를 느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에게 질문을 하자, 사탄은 속으로 기뻐했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 눈에 완전한 사람을 공격할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탄에게는 이 얼마나 얻기 힘든 기회인가! 사탄은 이 기회를 틈타 욥의 믿음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렇게 하여 욥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은 언제든지 욥을 자기 수중에서 멋대로 우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자신의 사악한 의도를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을지라도 그의 악독한 본성은 억제할 수 없었다. 그 실상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탄의 대답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4~5). 사탄의 이 말에서 사람은 자연히 사탄의 악독함에 대해 실제적인 인식과 느낌을 갖게 된다. 사탄의 이런 황당무계한 논리를 듣게 되면, 진리를 사랑하고 사악함을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탄의 비열함과 파렴치함을 증오할 것이다. 또한 사탄의 그릇된 논리에 염증과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욥을 위해 기도와 축원을 올릴 것이다. 정직한 자가 더 순전해질 수 있기를 기도할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가 영원히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빛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살기를 바랄 것이다. 또한, 욥의 의로운 행동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을 영원히 편달하고 격려하기를 바랄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사탄의 이러한 말 속에서 사탄의 악독한 속셈을 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아주 흔쾌히 사탄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다만 사탄에게 또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 2:6). 사탄이 이번에는 손을 뻗어 욥의 뼈와 살을 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의 뜻은 욥의 육체를 사탄의 손에 붙이지만 그의 생명은 보존해야 하며, 그의 생명을 앗아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어떠한 방식과 수단으로 욥을 대해도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 사탄은 허둥지둥 욥의 앞에 이르러 손을 뻗어 그의 살가죽을 쳤으며, 그의 온몸에 악창이 나게 했다. 욥은 살가죽의 통증을 느꼈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기묘함과 거룩함을 찬양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사탄은 더 길길이 날뛰었다. 사탄은 사람을 해치는 쾌감을 느꼈기 때문에 손을 뻗어 악창이 난 욥의 살을 움켜쥐어 곪아 터지게 했다. 그 순간 욥은 피와 살에 너무나 큰 통증을 느껴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온몸의 피부와 살을 문질렀다. 마치 그러면 육체의 통증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듯이 말이다. 욥은 하나님이 곁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더 강해지려고 애를 썼다. 그리하여 또 한 번 무릎 꿇고 엎드렸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사람의 고통을 살피시나이다. 당신께서 어이하여 사람의 나약함까지 생각해 주시나이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사탄은 욥이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보았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에 사탄은 급하게 손을 뻗어 욥의 뼈를 쳤다. 욥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욥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을 느꼈다. 마치 살가죽이 뼈에서 벗겨지는 것 같았고, 또 뼈가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화살이 심장을 뚫는 것 같은 통증에 그는 죽는 것보다 못한 느낌이 들었다. 욥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극한에 달했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으며, 몸의 살가죽을 뜯어내 통증을 덜어 내고 싶었다. 그러나 욥은 참고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몸의 살가죽을 뜯어내지도 않았다. 욥은 사탄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욥은 또다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하지만 이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그의 앞에, 그의 뒤에, 그의 좌우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가 아파할 때 아파하는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으며, 그때는 얼굴을 가리고 자신을 숨겼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의미는 고통받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욥은 눈물을 흘렸다. 욥은 몸의 통증은 억지로 참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었다.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존재입니다. 너무 연약하고 무기력하며 여리고 무지합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어찌하여 이처럼 생각해 주고 긍휼히 여기시나이까? 당신께서 저를 치시고 오히려 당신이 고통스러워하시나이다. 사람이 무슨 가치가 있어 당신께서 생각해 주고 마음에 두시나이까?’ 욥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지만, 하나님은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사탄은 수를 다 썼어도 성과가 없자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은 결코 이로 인해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욥에게서 나타낼 큰 능력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는 사탄의 퇴각으로 인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더 멋진 장면은 각 인물의 출현에 따라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또 다른 모습은 범사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이다 욥이 사탄의 온갖 학대를 받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을 때, 가장 먼저 그의 아내가 나서서 사람이 볼 수 있는 사탄의 역할을 하며 욥을 공격했다. 성경 말씀은 이와 같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이것은 사탄이 사람의 모습으로 한 말이었다. 이 말은 공격과 참소의 의미를 띠고 있었고, 유혹과 시험과 훼방의 의미도 띠고 있었다. 사탄은 욥의 육체를 공격해도 소용이 없자 직접 욥의 순전함을 공격하였다. 이를 통해, 욥이 그의 순전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게 하여 계속 살아가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사탄은 또한 이러한 말을 빌려 욥을 유혹하고자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린다면 그 모든 고통을 참지 않아도 되고 그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니라.’ 아내의 권고를 듣고 욥은 이렇게 질책하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이 말은 욥이 오랫동안 쌓아 온 인식이다. 다만 욥이 이 말을 인식한 것에 대한 진실성이 이때 입증되었을 뿐이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권고하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말했다. 그 의미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 대하는데 어찌해서 그 하나님을 버리지 않느냐? 당신이 그렇게 살아서 뭐하냐?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렇게도 불공평한데 당신은 계속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받을지라고 말하다니, 그의 이름을 찬송하는데 왜 당신에게 화를 입게 하느냐? 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버려라. 다시는 그 하나님을 따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당신의 재앙은 사라지리라.’라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이 보고자 했던 욥의 증거가 또다시 나왔다. 이런 증거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며, 우리가 성경의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욥이 이러한 말들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보았다. 단지 하나님은 이번 기회에 욥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맞다는 것을 실증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내의 그런 권고를 듣고도 욥은 자신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버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이 말은 매우 무게가 있지 않으냐? 여기에는 이 말이 매우 무게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딱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칭찬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원하고 듣고 싶어 했던 말이며 보고 싶어 했던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 역시 욥이 증거한 것 중의 정수에 해당한다. 여기서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욥의 귀함은 바로 그가 시험을 받고 온몸에 악창이 났을 때, 즉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의 아내와 친족들의 권고에도 여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시험이나 아무리 큰 환난과 고통이 찾아와도, 설사 죽음이 찾아올지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버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하나님의 자리가 가장 크며,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욥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볼 수 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은 입술로 범죄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은 하나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미움을 사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다. 그의 마음과 입은 일치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본 참된 욥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이 욥을 귀하게 여겨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 번째 관문, 독립

모든 사람은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성숙해진다. 다음으로 할 일은 성장 단계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부모에게서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다. 성인으로서 독립적으로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고 성인으로서 직면해야 할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하며 자신의 운명에 나타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면서 거쳐야 할 세 번째 관문이다. 1. 사람은 독립 이후 어렴풋이 창조주의 주재를 체험한다 한 사람의 출생과 성장이 그 인생 여정의 준비 기간이자 운명의 기반이라면, 독립은 운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출생과 성장이 운명을 위해 축적한 재산이라면, 독립은 그 재산이 줄어들거나 늘어나기 시작하는 분기점이다.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할 때 어떤 사회 환경에서 어떤 일이나 사업을 하게 될지는 모두 운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이는 부모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어떤 사람은 대학에 진학해서 좋은 전공을 선택하고, 졸업 후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인생 여정에서 첫발을 순조롭게 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기술을 가졌어도 사업을 일으키기는커녕 자기에게 맞는 일이나 자신이 속할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첫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실패를 경험하고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경우이다. 성공과는 연이 없는 운명인 것처럼, 힘들게 공부했지만 대학교 문턱을 밟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첫 희망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 경우, 운명이 변수로 가득 차 있음을 처음 실감하고, 앞길이 순탄할지 험난할지 두려움과 기대를 동시에 갖게 된다.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아도 책을 써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식 없이도 창업을 통해 수익을 내고 밥벌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기로에서 과연 사람은 스스로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의 바람과 결정에 따른 선택이 가능한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적게 일하고 많이 벌길 원하고, 바람과 햇빛을 피할 수 있는 편안한 곳에서 살면서 그럴싸한 옷을 입고 싶어 한다. 또한 남보다 성공해서 가문을 빛내고 싶어 한다. 사람의 소망은 이렇게 ‘완벽’하다. 그러나 인생의 여정에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운명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된다. 또한, 자신의 미래를 대담하게 계획하거나 마음껏 꿈을 키울 수는 있어도 꿈을 실현할 능력과 권력이 없을뿐더러 미래를 결정할 능력이 없음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된다. 사람이 직면한 현실은 언제나 꿈과 괴리가 있고 늘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다. 사람은 그런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의 직업, 앞날을 위해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고,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과 희생을 아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의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영원히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의 숙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능력, 지능,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 앞에서 사람은 나이, 우열, 귀천을 구분할 수 없는 동등한 존재이다. 사람이 평생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 얼마나 많은 부를 가질지는 부모에 의해 좌우되거나 재능, 노력, 욕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는 창조주가 배치한 운명에 달려 있다. 2. 사람은 부모의 품을 떠난 후 인생이란 큰 무대에 올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성숙해지면 부모의 품을 떠나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은 이 시점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불확실했던 현세의 사명도 이 시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형식적으로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현생에서 수행할 역할과 사명은 부모와 아무 관계가 없으므로 부모와 유지했던 친밀한 관계는 독립 후 점점 단절된다. 육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부모를 의존한다. 그러나 성장기를 벗어나면 객관적으로 모든 것이 부모와 완전히 상관없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독립적으로 해내야 한다. 부모는 한 사람의 삶에서 출산과 부양의 책임을 지고,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형식적으로 제공할 뿐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창조주가 배치한 운명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미래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그 누구도 좌지우지할 수 없다. 부모조차 자식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독립적이고 각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의 운명을 막을 수도 없고, 현생에서 맡은 역할에 힘을 보탤 수도 없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성장할지, 이는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 그것이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어떤 운명 속에서 사명을 완수하게 될지도 결정할 수 없다. 따라서 부모는 한 사람이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없고, 가족들 역시 그 사람이 현생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완수하게 될지, 어떤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지는 현생의 운명에 의해 좌우된다. 즉, 창조주의 뜻으로 정해진 모든 사람의 사명은 객관적인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성장 환경에서 성숙해지고, 인생 여정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며, 창조주가 계획해 놓은 운명을 조금씩 실현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삶에서 역할을 짊어지고, 창조주의 정한 운명과 주재에 따라 피조물로서의 책임을 수행한다.

창조주의 권능은 시간, 공간, 지리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창세기 22장 17절에서 18절을 보자.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여러 차례 축복하며 그의 자손을 크게 성하게 하리라고 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된다고 했느냐? 성경 구절처럼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줄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저 형상적인 언어일 뿐이다. 하지만 이 형상적인 언어를 통해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줄 후손이 한둘이 아니고 수천수만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나라를 이룰 정도가 된다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러 나라의 아비가 되리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까지 많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일이냐, 하나님에게 달린 일이냐? 자신의 후손이 얼마가 될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느냐?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느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게 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후손이 몇 명일지조차도 사람은 결정할 수 없다. 누가 자신의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않겠느냐? 하지만 아쉽게도 세상일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되든,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상관없이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예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는 대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적게 주었는데 네가 너무 많이 받게 되는 법은 없다. 하나님이 네게 많이 준다면, 네가 많다고 탓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결정이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으며,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네 씨로 크게 성하게 하리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이다. 이 언약은 ‘무지개 언약’처럼 영원히 지켜질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기도 하다. 이러한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며, 사람이 믿든 안 믿든, 받아들이든 못 받아들이든,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보든,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의지나 생각이 바뀐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변화에 의해 변하는 것도 아니다. 만물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만물이 사라지는 그날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이뤄지는 날이다. 이는 그가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창조주의 권능을 지녔으며, 창조주의 능력이 있고, 만유와 모든 생명을 주관한다. 그는 무에서 유를, 유에서 무를 가능케 하며, 모든 생과 사의 전환을 주관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손을 번성케 하는 것이 하나님께 있어서는 지극히 간단한 일인 것이다. 이 일이 사람이 듣기에는 천일야화나 동화 속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하고자 결정한 일이나 사람에게 약속한 일은 천일야화나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본 사실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체득이 있느냐? 이런 것은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후예가 많지 않으냐? 얼마나 많으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과 같지 않으냐? 각 나라, 각 지역, 세계 각지로 널리 퍼져 있지 않으냐? 이러한 사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냐? 하나님 말씀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난 후,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동안 그 말씀이 계속해서 이뤄지고, 끊임없이 현실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위력이자 하나님 권능의 증거이다.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할 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이는 순식간의 일로,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러한 일의 성취와 응답은 시간 차 없이 즉시 이루어진 경우이다. 이 또한 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한 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 권능의 또 다른 면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또 사람들에게 창조주의 권능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하고, 창조주 권능의 더 실질적이고 더 훌륭한 면도 느끼게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자마자 하나님의 권능은 그 사역을 주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한 것들이 점차 현실이 되기 시작하였다. 만물의 모든 것들이 다 이로 인해 다양한 변화를 맞았다. 일례로, 봄이 오면 풀이 파릇파릇해지고 꽃이 피고 나무에 싹이 튼다.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고 기러기들이 돌아오며, 논밭에는 사람들의 일손이 분주해진다. 이에 발맞춰 만물도 다시 소생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놀라운 행사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이룰 때, 하늘과 땅의 만물이 다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새로워지고 변화되는데,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이루기 위해 만물이 다 힘쓰며 움직이게 된다. 모든 피조물들이 다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배치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각자의 기능을 다한다. 창조주의 권능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에 범위가 정해져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에 시간적 제약이 있느냐? 하나님 권능의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을 논할 수 있느냐? 크고 작음과 강함과 약함을 논할 수 있느냐? 사람의 기준으로 헤아릴 수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은 사라졌다 나타나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 아니며, 아무도 그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없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축복하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지 간에 그의 그 축복은 지속된다. 그 지속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하고, 인류에게 창조주가 가진 영원불멸의 생명력이 수없이 재현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권능이 나타날 때마다 그의 말씀을 완전하게 구현해 내어 만물과 인류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의 권능으로 이뤄진 일마다 더없이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완전무결하다. 그의 생각, 그의 말씀, 그의 권능과 그가 이룬 일마다 전부 그 어떤 것도 비할 수 없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그 의의와 가치는 인류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한 후에는,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든, 무엇을 하든, 약속받기 전후의 그의 사정이 어떻든, 그의 생존 환경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든, 하나님은 그것을 다 환히 알고 있다. 하나님이 한 말씀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하나님이 보기에는 다 방금 일어난 것과 같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한 모든 약속을 추진하고 주관하고 실현시키는 능력과 권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약속이 무엇이든 간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그 약속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요소, 예를 들면 시간, 장소, 종족 등과 같은 요소의 범위가 얼마나 넓든, 그 약속은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하나님께 있어서 전혀 힘들지 않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 주관하는 범위는 우주 전체, 인류 전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빛을 만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빛만 관리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물을 만들었으니 물만 관리하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한다면 오해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일이 몇백 년이 지난 뒤에는 사람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그 약속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고,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 기간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권능을 행하였는지, 만물은 또 어떻게 하나님에 의해 배치되었는지,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 얼마나 훌륭한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인류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행사에서 나타난 탁월한 면면들은 만물 가운데 전해지고 칭송되고 있다. 만물은 또한 창조주의 놀라운 행사를 나타내며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하는 갖가지 미담들은 만물을 통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은 만물에게 하나님이 어디에나 다 존재하고 항상 존재함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 너는 하나님은 어디에나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은 시간, 지리, 공간, 그리고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범위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며, 사람이 헤아릴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어려우며, 영원히 다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한 일용할 양식

방금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후 인류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어떤 것을 예비했는지, 즉 큰 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이야기한 5가지는 모두 그 환경에 속한다. 지금부터는 사람의 육체적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육체적 생활에 아주 적합하고 잘 맞는 것인 식량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든 후 살기 적합한 환경에 두었다. 사람에게는 식량과 물이 필요했기에 하나님은 그런 것들도 예비해 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한 모든 사역과 매사를 보면 빈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식량은 사람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식량이 공기보다 중요하냐? 둘 다 중요하다. 식량, 공기는 모두 인류가 생명과 삶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할 조건이다. 공기가 중요하냐, 물이 중요하냐? 온도가 중요하냐, 음식이 중요하냐? 모두 중요하다. 어느 것만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이 중에서 하나만 없어도 안 된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선택하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니다. 네가 알지 못해도 하나님은 알고 있다. 지금 너는 음식을 보면, ‘아, 먹을 게 없으면 안 되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처음에 너를 만들고 그곳에 두었을 때 스스로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겠느냐?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알고 있다. 배고플 때 나무 위에 열매가 있고 땅에 작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너는 그제서야 먹을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목이 말라서 물을 마셔야 할 때 그제서야 마실 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예비한 것이다. 식량에 관해서는, 사람이 하루에 두세 끼를 먹든 그보다 더 많이 먹든, 결론적으로 식량은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고, 육체의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품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식량은 어디에서 오느냐? 토양에서 온다. 토양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한 것으로 나무, 풀 등 각종 식물의 생존에 적합하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류에게 여러 가지 곡물과 각종 씨앗도 예비해 주었고, 적합한 토양을 예비해 주어 사람이 그곳에서 재배하고 식량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식량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식량에 대해서는 잘 알 것이다. 먼저, 다양한 곡물이 있다. 곡물에는 무엇이 있느냐? 밀, 좁쌀, 기장, 조 등 껍질이 있는 곡물이 있다. 밀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보리, 밀, 귀리, 메밀 등 여러 가지의 밀은 남방에서부터 북방까지 각각 다른 지대에서 자란다. 벼 또한 여러 종류가 있다. 남방에서는 남방만의 벼가 자란다. 이 벼는 알갱이가 길고 찰기가 없기 때문에 남방 사람들이 먹기에 적합하다. 남방은 날씨가 덥기에 멥쌀처럼 찰지지 않은 것을 먹어야 한다. 너무 찰져서는 안 된다. 찰기가 많으면 목 넘김이 어렵고 식욕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방 사람들이 먹는 쌀은 찰기가 많은 편이다. 북쪽은 늘 춥기 때문에 찰기가 어느 정도 있는 쌀을 먹어야 한다. 이외에 여러 종류의 콩도 있다. 이런 것들은 다 땅 위에서 자라는 것이다. 또 감자, 고구마, 토란 등 땅 밑에서 자라는 것들도 아주 많이 있다. 감자는 북방에서 자라는데 북방의 감자는 품질이 아주 좋다. 곡물을 먹을 수 없을 때는 감자를 주식으로 삼아 하루 세끼를 때울 수도 있다. 따라서 감자도 곡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고구마는 감자보다 질이 좀 떨어지지만 역시 주식으로 삼아 사람의 하루 세끼를 유지할 수 있고, 곡물 공급이 어려울 때 허기를 달랠 수 있다. 남방 사람들이 자주 먹는 토란 역시 주식으로, 감자나 고구마와 같은 역할을 한다. 이 다양한 것들은 모두 사람의 식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곡물로 면 요리, 만두, 쌀밥, 쌀국수를 만든다. 이렇게 다양하고 풍부한 양식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푼 것으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첫째는 이 양식이 동서남북의 각기 다른 토양과 기후에서 자라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다양한 종류의 식량 성분과 함량이 체내의 여러 성분 및 함량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양한 종류의 식량을 먹어야만 몸에 필요한 각종 영양소와 필수 성분을 유지할 수 있다. 남쪽과 북쪽에서 나는 식량의 종류는 다르지만 몸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람의 정상적인 생존을 유지시키는 기능은 비슷하다. 따라서 각지에서 여러 종류의 식량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이유는 인체에 필요하기 때문이고, 땅에서 나는 다양한 식량이 신체의 정상적인 활동을 유지시키고 이를 통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세심한 배려로 사람에게 한두 가지가 아닌 다양한 식량을 베풀어 주었다. 따라서 사람은 밀가루 음식이 먹고 싶을 때는 밀가루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누군가 면 음식을 싫어하여 밥을 먹고 싶어 한다면 밥을 먹을 수 있다. 쌀도 알맹이가 긴 것, 짧은 것 등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입맛에 맞는 것으로 골라 먹을 수 있다. 따라서 골고루 먹는다면 영양 결핍 없이 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식량을 베풀어 준 원래의 취지이다. 사람의 육체에 식량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는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냐? 이 현실적인 문제를 사람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미리 생각하고 예비해 놓았다. 이런 것뿐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채소도 예비해 주었다. 쌀음식을 먹을 때, 계속 밥만 먹는다면 영양이 부족할 수 있다. 밥에 2가지 정도의 요리나 샐러드를 곁들여 먹는다면 비타민과 각종 미량 원소나 영양소 등이 채소에 들어 있기 때문에 인체에 필요한 요소들을 정상적으로 보충할 수 있다. 밥을 먹지 않을 때는 과일을 먹을 수도 있다. 그렇지? 사람은 수분이 필요할 때도 있고 다른 영양소가 필요할 때도 있으며 또 색다른 맛을 원할 때도 있다. 이럴 때 채소나 과일을 먹으면 된다. 동서남북의 지역은 토양과 기후가 다르기 때문에 채소와 과일의 종류도 다르다. 남방은 날씨가 덥기에 대부분의 채소나 과일에 냉한 기운이 있어 이를 섭취하면 신체에 냉열 균형을 이룰 수 있다. 반면 북방은 채소, 과일 종류가 적은 편이지만 사람들이 먹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최근 사회의 발전, 소위 사회적 진보와 교통, 정보의 발달로 동서남북이 연결되면서 북방 사람들도 남방의 채소, 과일, 특산물을 먹을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1년 내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식욕과 물질적 욕구를 채울 수 있게 되었지만 몸은 오히려 손상되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식량을 예비할 때 남방과 북방 사람들에게 맞는 각각의 곡식과 채소, 과일을 예비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기후에 맞는 채소, 과일 등의 식량을 예비했기 때문에 남방에서 태어났다면 그 지역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몸에 잘 맞는다. 마찬가지로 북방에도 북방 사람의 몸에 맞는 식량이 있다. 하지만 먹는 것에 대한 사람의 탐욕과 사회의 발전으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대세에 휩쓸리게 되면서 이 법칙을 어기게 되었다. 지금 삶의 질이 좋아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사회의 발전은 인체에 눈에 띄지 않는 해를 끼쳤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고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물을 공급하고, 식량과 채소, 과일을 예비한 본래의 취지가 아니었다. 이는 사람 스스로가 하나님이 정한 법칙을 어겨 초래한 것이다. 이외에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것은 풍부하다. 각지에는 각각의 특산물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지역에는 홍대추(흔히 대추라 불림)가 많이 나고 또 어떤 지역에는 호두가 많이 나며 또 어떤 곳은 땅콩과 견과류가 많다. 이런 것으로 사람은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계절과 시기에 따라 그리고 제때에 적당량을 베풀어 준다. 사람의 육체적 향락에 대한 탐닉과 먹는 것에 대한 탐욕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할 때 만든 사람의 정상적인 성장 법칙을 쉽게 위배하고 파괴한다. 다들 알고 있는 앵두를 예로 들어 보자. 앵두는 대략 6월쯤에 익으며 일반적으로 8월에 수확이 끝난다. 원래 앵두의 유통기한은 2개월 정도지만 지금 사람들은 과학적 방법을 이용하여 그 기간을 12개월로, 이듬해에 앵두가 다시 생산될 때까지로 연장시켰다. 따라서 1년 내내 앵두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이 정상이냐? (비정상입니다.) 그렇다면 앵두를 먹기에 최적의 시기는 언제냐? 6월부터 8월까지다. 그 시기가 지나면 아무리 신선하게 잘 보관한다 하더라도 그 맛이 나지 않고, 사람 몸에도 불필요하다. 앵두의 유통기한이 이미 지났다면 그 어떤 화학적 방법을 쓴다 해도 그 성분은 자연적인 생장 과정에서 만들어진 성분보다 못하다. 또한 화학 물질로 인한 인체의 손상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하거나 바꿀 수 없다. 지금의 시장 경제가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이 무엇이냐? 교통도 편리해져 사시사철 다양한 과일을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북쪽에서도 바나나를 먹을 수 있고 남쪽의 모든 음식이나 과일, 특산물 등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사람 삶의 질이 좋아진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려던 것이 아니다. 이런 시장 경제는 사람의 생활에 좋은 점도 가져다줄 수 있지만 해로운 점도 가져다준다. 많은 사람들은 시장에 먹거리가 풍부하다고 마구 먹어 대며 자연법칙을 어긴 바람에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장 경제가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알겠느냐? 지금 시장에서는 포도가 1년 내내 판매되고 있지 않느냐? 포도의 유통기한은 아주 짧다. 수확한 포도를 이듬해 6월까지 보관한다면 그때도 그것을 포도라고 할 수 있겠느냐? 쓰레기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거기에는 포도 본연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포도 표면에는 많은 화학 약품이 뿌려져 있다. 1년의 시간이라면 신선도도 없고, 영양분도 오래전에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포도를 먹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행복할 수가! 30년 전만 해도 이 계절에 포도를 먹을 수 있었겠어? 먹고 싶어도 구경도 못했었지. 지금은 얼마나 좋아!”라고 한다. 정말로 행복한 것일까? 관심이 있다면, 유통기한 연장을 위해 포도에 뿌려진 화학 약품이 무엇인지, 그 성분이 인체에 어떠한 이점이 있는지 확인해 보거라. 율법시대를 보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 주어 먹게 하였다. 하나님이 그것을 저장하라고 일렀느냐? 어떤 이들은 다음날 먹을 것이 없을까 봐 잔꾀를 부려 나중을 대비하려고 저장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느냐? 다음날 악취가 진동했다. 하나님이 여분을 두지 말라고 한 것은 굶지 않도록 예비하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항상 스스로 여분을 남기고 사람에게 모든 것을 예비해 주는 하나님의 애쓰는 마음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늘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믿을 수가 없어! 하나님이 주실지, 안 주실지 누가 알겠어? 대체 언제 주신다는 말이야?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 돼도 하나님이 주지 않으시면 나는 그냥 굶어야 되잖아. 그럼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겠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믿음은 이렇게도 보잘것없다!

인류는 타락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창조주 권능의 주재하에서 살아간다

사탄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타락시키면서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대대로 사람들을 미혹하였으며, 인간 세상에서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 또 사람을 해치고 미혹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유혹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는 등의 악행이 가득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는 만물 생령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정한 법칙과 규율을 따르고 있다. 하나님의 권능과 비교할 때, 사탄의 사악한 본성과 그것이 날뛰는 것은 추하기 그지없으며, 사람을 역겹게 하고 염증이 나게 한다. 또한 보잘것없고 일격에도 견디지 못한다. 비록 사탄이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할지라도, 사탄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그 어떤 사람, 일, 사물도 변화시킬 수 없다. 수천 년이 지나도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내려 준 빛과 공기를 누리고 있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친히 불어넣어 준 생기로 숨을 쉬고 있고, 하나님이 만든 꽃과 새, 물고기와 곤충들을 누리며, 하나님이 공급해 준 만물을 누리고 있다. 낮과 밤은 여전히 끊임없이 교체되고, 사계절 역시 변함없이 순환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는 올겨울에 떠나가서 내년 봄에 다시 돌아온다. 물속의 물고기는 그들의 집인 강과 호수를 떠나 본 적이 없다. 땅 위의 매미는 여름날 마음껏 자기들만의 노래를 부른다. 풀 속의 귀뚜라미들은 가을날 가을바람을 따라 노래한다. 기러기는 무리를 이루고 매는 외롭게 지낸다. 사자 무리는 사냥하며 살아가고, 사슴들은 꽃과 풀밭을 떠나지 않는다. 만물 가운데의 각종 생령들은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 다시 가며 찰나 속에서 변화무쌍하다. 하지만 그들 각자의 본능과 생존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자양분을 받아 생존한다. 그 누구도 그들의 본능을 바꿀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들의 생존 법칙을 파괴할 수 없다. 만물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하고 미혹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이 만든 물과 공기와 만물을 떠날 수 없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만든 이 공간 속에서 번성하며 살아간다. 인류의 본능은 변화가 없으며, 인류는 여전히 두 눈으로 바라보고, 두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하며, 마음으로 깨닫고, 두 다리와 두 발로 걸으며, 두 손으로 일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본능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가 하나님과 협력하는 기관은 변하지 않았고, 피조물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기관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 심령의 필요는 변하지 않았으며, 인류가 뿌리를 찾아 돌아가려는 소망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가 창조주의 구원을 얻고자 하는 소원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 살아가면서 사탄의 피비린내 나는 학대를 견디고 있는 인류의 현주소다. 비록 사탄의 엄청난 유린을 당한 인류가 더 이상 태초에 창조한 아담과 하와가 아니고, 지식과 상상, 고정 관념 등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들이 가득하고 사탄의 타락 성품이 가득한 인류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만든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와 섭리하에 있고, 하나님이 정한 코스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기에 사탄에 의해 타락한 인류는 단지 외관상 더럽고 굶주리고 반응도 조금 느리고 기억력도 조금 감퇴되고 나이가 조금 많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기능과 본능은 오히려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이런 인류가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이다. 이런 인류는 창조주의 부름을 듣고 창조주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바로 일어나 그 음성의 근원을 찾아 달려간다. 이런 인류는 창조주의 그림자를 보기만 하면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창조주를 위해 헌신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친다. 인류의 마음과 영이 창조주의 마음의 소리를 깨닫게 될 때, 인류는 사탄을 버리고 창조주의 곁으로 온다. 인류가 완전히 몸의 더러움을 씻어 내고 창조주가 다시 공급해 주는 자양분을 얻게 될 때, 인류의 기억은 회복된다. 그때의 인류는 진정 창조주의 권세 아래로 돌아온 것이다.

예수가 부활한 후 떡을 먹으며 사람에게 성경을 풀어 주다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0~32)

창조주의 신분을 갖춘 하나님만이 유일무이한 권능을 소유한다

사탄의 ‘특별’한 신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여러 면의 행위에 관심을 보인다. 심지어 많은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 외에 사탄도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사탄도 이적을 보이고 인류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외에도 마음속에 사탄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탄을 하나님으로 삼아 숭배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불쌍하기도 하거니와 가증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불쌍한 것은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의 대역무도와 타고난 사악한 본질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너희에게 권능이 무엇인지, 권능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고 대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곧 권능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고지상함과 하나님의 본질을 상징한다. 하나님 자신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사탄은 자기 자신을 감히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탄은 자신이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자신이 또 만물을 주재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을까? 사탄은 만물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지 못한다! 사탄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창조한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생명이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사탄에게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느냐? 물론 없다! 사탄이 행한 일들, 사탄이 보인 이적은 무엇이냐? 능력이 맞느냐? 권능이라 할 수 있느냐? 물론 아니다! 사탄은 사악한 흐름을 주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며 방해하는 짓을 일삼는다. 몇천 년 동안, 사탄은 인류를 부패시키고 해쳤으며, 사람을 유혹해서 타락의 길로 가게 하거나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골짜기로 걸어가게 하였다. 이런 짓 말고, 사탄이 인류에게 행한 것 중에 어느 것 하나 기념하거나 칭찬하고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있느냐?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하였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해를 입었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길로 나아갔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없다면, 사탄이 행한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겠느냐? 혹자는 사탄의 모든 행위가 보잘것없는 잔재주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나는 사탄에 대한 이런 정의는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인류를 타락시키는 사탄의 악행이 보잘것없는 잔재주일까? 사탄이 욥을 해한 그런 사악한 기세와 욥을 집어삼키려던 강렬한 욕망은 단연코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욥이 소유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소와 양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찰나에 욥의 그 거액의 재산이 모두 사라졌다. 그것이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할 수 있는 것이냐? 사탄이 한 행위의 성격으로 볼 때, 사탄은 파괴, 방해, 파멸, 상해, 사악, 극악, 어둠 등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와 매치되고 어울린다. 그러므로 모든 정의롭지 못하고 사악한 것의 출현은 사탄의 행위와 떼어 놓을 수 없으며, 또한 사탄의 추악한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아무리 거만할지라도, 야심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사탄의 파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사람을 미혹하고 타락시키는 재능이 탁월하다 할지라도, 또한 사람을 협박하는 수법과 권모술수가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무리 변화무쌍할지라도 상관없다. 사탄은 지금까지 생명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만물이 생존하는 법칙과 규율을 정할 수도 없었고,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을 주관할 수도 주재할 수도 없었다. 우주에 사탄에 의해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 존재하는 사람이 없고 그것으로 인해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또한 사탄이 주재하고 주관하는 사람이나 어떤 것은 없다. 반대로, 사탄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지시와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물 한 방울, 모래 한 알도 함부로 만질 수 없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개미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이 만든 인류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눈에 사탄은 산속의 백합만도 못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만도 못하며, 바닷속의 물고기만도 못하고, 땅 위의 구더기만도 못하다. 만물 가운데서 사탄의 역할은 만물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성이 얼마나 악독하고 본질이 얼마나 사악하든지 상관없다. 사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분수껏 자신의 기능을 지키는 것인데,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 부각물이라는 역할을 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본질이자 본래의 자리인 것이다. 사탄의 본질은 생명과 무관하고, 능력과 무관하며, 권능과 무관하다. 사탄은 하나님 수중에 있는 장난감일 뿐이며,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사탄의 본모습을 알게 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권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권능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권능이든 능력이든 그것은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서, 그 어떤 부정적인 것들과도 무관하며,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과도 무관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생명이 있고 활력이 넘치는 어떤 형식의 것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은 모든 생명체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기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생존하며 지속된다. 그 후에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를 주재하고 주관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틀림이 없었으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갖추지 못한 것이며, 창조주만이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권능이라 부른다. 이것이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그러므로 ‘권능’이라는 이 단어 자체나 권능의 본질은 오직 창조주와 관련이 있다. 이는 그것이 창조주만의 신분과 본질의 상징이기 때문이며, 창조주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창조주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권능’이라는 이 단어와 관련이 있을 수 없다. 이 역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사탄이 욥을 호시탐탐 노렸을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욥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사탄의 본성이 사악하고 잔인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후에는 사탄도 하나님이 지시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욥에게 임할 때, 사나운 늑대가 양 떼에 침입하듯 사납게 날뛰었을지라도, 감히 하나님이 정해 준 범위를 망각할 수 없었고,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사탄은 어떻게 해도 감히 하나님 말씀의 원칙과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냐? 이 점에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그 어떤 말도 사탄은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사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고 천상의 법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 뒤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상의 법을 어기며 위반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하나님의 권능을 넘어서고 천상의 법규에 대항한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 결과는 도대체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사탄이 욥, 이 한 사람에게 행한 일은 사탄이 인류를 타락시킨 축소판일 뿐이다. 그리고 사탄이 그 일을 벌일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해 준 범위와 내린 명령은 사탄이 모든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원칙의 축소판일 뿐이다. 또한 사탄이 그러한 일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는 사탄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의 축소판일 뿐이다. 사탄이 욥을 시험하던 그 일에서 보인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사탄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께 감히 대항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축소판일 뿐이다. 이러한 축소판이 너희에게 주는 경고는 무엇이냐? 사탄을 포함한 만물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감히 창조주가 정한 천상의 법칙과 규칙을 어기지 못하며, 그런 법칙과 규칙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저항자에 대한 창조주의 처벌을 바꾸거나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만이 천상의 법칙과 규칙을 정할 수 있고, 창조주만이 그러한 법칙과 규칙을 시행할 능력이 있으며, 창조주의 능력은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만의 권능이며, 이 권능은 만물 가운데 가장 높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크고 사탄이 그다음이다’라는 말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유일무이한 권능을 가진 창조주 외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다. …… 지금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이상의 내용을 나누었으니 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럼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하나님의 권능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만의 지위를 상징하지 않느냐? 만물 가운데 너는 어떠한 일들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느냐? 어떻게 보았느냐? 사람이 경험하는 사계절에서 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에 대한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봄에는 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진다. 이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어느 한 면으로 구현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자 빛이 있었는데, 이 ‘빛’은 지금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의 존재는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이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공기가 지금도 존재하지 않느냐? 인류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기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누가 빼앗아 갈 수 있느냐? 누가 그것의 본질과 기능을 바꿀 수 있느냐? 하나님이 나눈 낮과 밤, 주야를 정한 법칙을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사탄을 포함해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밤이 되었을 때, 잠을 자지 않고 대낮처럼 보낼지라도 역시 밤이다. 네가 너의 생활 규칙을 바꾸었지만, 낮과 밤이 교체되는 법칙은 바꿀 수 없다. 이 사실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사자에게 소처럼 밭을 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코끼리를 나귀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닭을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늑대를 양처럼 풀을 먹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를 육지에서 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그들을 물속에서 살도록 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물속에서 살아야 한다. 육지에서는 살 수 없어 죽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만물은 모두 자기만의 생존 법칙과 범위가 있고, 각각 자기만의 본능이 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창조주가 정한 것으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자는 영원히 사람과 격리된 야생 세계에서 살지, 영원히 소처럼 충직하게 성실하게 사람과 함께하며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없다. 코끼리와 나귀는 다 동물이고 네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숨을 쉬는 피조물이지만, 그들은 다른 종이다. 그들은 각자 하나님에 의해 종류가 구분되고 모두 각자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서로 바뀔 수 없다. 닭도 두 다리를 가지고 있고 독수리처럼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나무 위에 날아오를 수 있을 뿐 영원히 하늘을 날 수 없다. 이것은 닭의 본능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정해진 것이 자명하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발전해 오면서, 인류의 과학은 ‘일취월장’했다고 할 수 있다. 과학 탐구 과정에서 이룩한 성과가 ‘과히 놀랄’ 정도이니, 인류의 재능은 날로 커지고 있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유독 한 가지만은 인간의 과학으로 돌파하지 못한다. 인류는 비행기를 만들고, 항공 모함을 만들고, 원자 폭탄을 만들고, 우주로 날아가고, 달나라에 착륙하고, 인터넷을 발명하여 하이테크 시대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숨 쉴 수 있는 생물은 만들어 내지 못한다. 어떤 생물의 본능과 생존 법칙 및 각종 생물의 생사윤회에 대해서 인류의 과학은 무능하고 통제할 수 없다. 이로부터 인류의 과학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 달했든 창조주의 생각 하나에도 비할 수 없고, 창조주의 만물 창조의 오묘함과 창조주 권능의 위력은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구상의 바닷물이 그렇게 많아도, 하나님이 각각에게 경계를 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껏 함부로 자신의 범위를 넘어 육지로 올라온 적이 없다. 그들은 정해 준 대로 있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움직이라고 말씀할 때에야 움직일 수 있고, 그들이 어디로 가고 어디에 머무를지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늘 하는 말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 결정할 권리가 있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만물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뀌는 것이지 사람의 의지로는 바뀔 수 없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천지 만물, 우주, 별, 1년 사계절, 사람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은 다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할 당시의 법칙에 따라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 존재하고 운행되며 변화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것의 법칙을 바꿀 수 없으며, 그것 본래의 운행 궤적을 바꿀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소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다. 여기까지 말했는데,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한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하나님의 권능이 어떠한 피조물이나 비피조물이 갖출 수 있는 것이냐? 그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모방하고 따라 하고 대체할 수 있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