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예수가 부활한 후 떡을 먹으며 사람에게 성경을 풀어 주다

2018년 05월 09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0~32)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눅 24:36~43)

이어서 위의 구절들을 보자. 첫 번째 구절은 예수가 부활한 후 떡을 먹은 것과 성경을 풀어 준 것에 관한 기록이다. 두 번째 구절은 예수가 생선을 먹은 것에 관한 기록이다. 이 두 구절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에 어떤 도움이 될까? 예수가 떡과 생선을 먹은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너희는 어떤 장면이 연상되느냐? 예수가 너희 앞에 서서 떡을 먹는다면 너희는 어떤 느낌이겠느냐? 혹은 예수가 너희와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사람과 함께 생선과 떡을 먹는다면,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만약 예수가 아주 가깝고 친근하다고 느꼈다면 그 느낌은 맞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부활한 후 사람들과 마주 앉아 떡과 생선을 먹음으로써 얻으려는 효과이다. 만일 예수가 부활한 후, 사람과 대화만 나누고, 사람은 그의 뼈와 살을 느끼지 못하고 멀리 있어 닿을 수 없는 혼 같은 존재라고 느낀다면 어떠하겠느냐? 사람은 실망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실망감을 느끼면 버려진 기분이 들지 않겠느냐? 주 예수 그리스도와 거리감을 느끼지 않겠느냐? 그 거리감은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고, 존경하면서도 멀리할 것이다. 이로써 사람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는 단절되어 은혜시대 이전의 관계, 하늘의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사람이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영체는 하나님에 대한 친근감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동시에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지낼 때 쌓아 놓은 사람과의 거리감 없는 친근한 관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영체가 두려워 피하려 들거나 그저 바라만 볼 뿐,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대화를 나누지도 못할 것이다. 그를 따르고 의지하고 앙망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를 피하고 멀리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사람이 그를 알고 다가오고, 그와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너의 가족과 자녀가 너를 만나도 알아보지도, 다가오지도 않고 늘 너를 피할 때, 그들을 위해 네가 행한 모든 것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어떤 심정이겠느냐?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을 피할 때 하나님이 느끼는 심정이다. 그래서 예수는 부활한 뒤에도 여전히 뼈와 살이 있는 형상으로 사람에게 나타났고, 사람과 함께 먹고 마셨다. 사람을 가장 가까운 존재로 여기는 하나님은 사람들 역시 하나님을 가장 친한 존재로 여겨 주길 바랐다. 이렇게 해야 하나님은 진정으로 사람을 얻고,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게 된다. 이제 내가 왜 부활한 예수가 떡을 먹고 사람들에게 성경을 풀어 준 부분과 제자들이 예수에게 구운 생선을 드린 구절들을 골랐는지 이해가 되느냐?

예수는 부활 후, 각별히 마음을 쓰면서 일련의 일들을 하고 말을 했다. 거기에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가득하고, 육신으로 지낸 기간에 사람과 쌓은 친밀한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깊은 애정도 담겨 있다. 그리고 육신에 거하던 기간에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했던 생활에 대한 그리움과 기대도 녹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와 거리감을 느끼는 것을 원치 않았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더구나 사람들이 부활한 예수님은 영계로, 사람이 영원히 볼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더 이상 사람에게 친근했던 주님이 아니고, 더 이상 사람과 함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에게 지위의 차이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따르고 싶어 하면서도 멀리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이 그와 아주 멀고, 그가 사람의 마음을 얻기 몹시 어려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영체로 나타난다면, 또 한 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거리가 생길 터였다. 사람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너무 높은 존재이고 사람과 같은 부류가 아니므로 더 이상 함께 식탁에서 밥을 먹지 않을 것이라 오해할 것이다. 또한 사람은 죄가 있고 더러워 영원히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없다고 오해할 것이다. 사람의 이러한 오해를 풀기 위해 예수는 육신에 거할 때 늘 했던 일들을 하였다. 예를 들면, 성경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라고 기록된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전에 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기도 했다. 예수가 행한 이 모든 것을 본 사람들은 주님이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원래의 예수임을 느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지라도 부활했고, 사람을 떠나지 않고 다시 돌아왔으며, 그의 모든 것은 변하지 않았다고 느꼈다. 사람들 눈앞에 서 있는 인자는 여전히 원래의 예수였던 것이다. 그의 행동과 말씀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변함없이 자비와 은혜와 포용으로 충만했으며, 여전히 사람을 자신처럼 사랑하고,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는 예수였던 것이다. 예전처럼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었고, 함께 성경을 나누기도 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예전처럼 피와 살이 있어 사람이 만질 수도 볼 수도 있었다. 사람은 이러한 인자를 아주 친근하고 편하게 느꼈고,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사람의 죄를 사해 줄 수 있는 인자를 마음 놓고 의지하고, 확신에 차서 앙망하기 시작했다. 또한, 망설임 없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은혜와 축복, 평안과 기쁨을 얻기 위해 더 나아가 그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기 위해 기도했고,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예수가 부활하여 제자들과 떡을 먹다,예수 부활,

예수가 육신으로 사역하던 기간에, 그를 따랐던 대다수 사람은 그의 신분과 말씀에 대해 완전히 확신하지 못했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그를 따르던 자들은 그저 관망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사람들은 크게 실망하였다. 이 기간, 사람들은 예수가 육신에 거한 기간에 했던 말씀에 회의감을 보이다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예수가 무덤에서 나와 사람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를 직접 보거나 부활 소식을 들은 대다수 사람은 부인하던 마음이 점차 반신반의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다 부활한 예수가 도마에게 그의 옆구리를 만져 보라고 하고 사람들 앞에서 떡과 구운 생선을 먹어서야 사람들은 예수가 성육신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바로 앞에서 뼈와 살이 있는 영체를 보고, 모든 이들은 마치 꿈에서 깬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앞에 서 있는 이 인자가 바로 태고부터 계셨던 그분이구나. 형체도, 뼈와 살도 있는 그가 오랜 시간 사람과 함께 먹고 함께 생활하셨고…’라고 말이다. 이때 사람들은 그의 존재가 정말 참되고 아름답고 오묘하게 느껴졌다. 또 그 마음에 참된 기쁨과 행복, 감동이 가득 차게 되었다. 예수가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나자 사람들은 진정 그가 지극히 낮췄음을 알게 되었으며, 그의 친근함과 사람에 대한 염려와 애틋함을 느끼게 되었다. 예수와의 짧은 해후는 그를 본 사람들에게 마치 딴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상실감으로 막연하고 불안하며 초조하던 마음, 그리움으로 가득하고 무감각해져 버린 마음에 위안을 준 것이다. 사람은 더 이상 의심하고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는 희망과 의지처가 생겼고, 눈앞에 서 있는 인자가 바로 영원하고 든든한 요새요, 견고한 망대요, 피난처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부활했지만, 그의 마음과 사역은 사람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현현을 통해 사람에게 그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든지 간에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곁에 있으며, 사람과 동행하고 함께한다고 알려 주었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사람에게 공급하고 사람을 목양하며, 사람이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게 하며,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끼지 않게 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예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늘 염려해 주고 그들과 함께할 것임을 알려 주고 싶었다. 하나님이 사람의 영원한 의지처이고, 그를 따르는 모든 자의 가족이며, 사람이 그를 의지하면 더 이상 외롭지 않고 무기력하지 않으며, 그를 받아들여 자신의 속죄제로 삼은 자는 더 이상 죄의 속박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었다. 예수가 부활하고 나서 했던 이러한 사역들이 사람에게는 소소한 일처럼 보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 참으로 큰 의미와 가치가 있는 매우 중요한 일들이다.

예수가 육신으로 사역했던 기간 동안 어려움과 고난이 가득했지만, 결국 뼈와 살이 있는 영체로 나타남으로써 성육신하여 인류를 구속하는 사역을 완전하고 완벽하게 이루었다. 그는 성육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직분을 시작했고, 또 성육신 형상으로 사람에게 나타나 자신의 직분을 마무리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은혜시대를 열고 그 시대가 시작되게 했다. 또 그리스도의 신분으로 은혜시대의 사역을 펼쳤으며,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의 믿음을 공고히 하고 이끌었다. 하나님의 사역은 확실히 시작과 끝이 있고 절차와 계획이 있으며, 하나님의 지혜와 전능, 기묘한 행사로 충만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가득하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이어주는 주요 끈은 바로 사람에 대한 보살핌과 하나님의 떨쳐 버릴 수 없는 염려의 마음이었다. 이 성경 구절에, 부활한 예수가 했던 모든 일에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변치 않는 기대와 염려, 세심한 관심과 보호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지금까지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너희는 이것들을 보았느냐? 이를 보았을 때, 너희 마음은 부지불식간에 하나님과 친근해지지 않겠느냐? 만일 너희가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예수가 부활한 후에 너희 앞에 나타나고, 형상이 있어 너희가 볼 수 있었다면, 그가 너희 앞에 앉아 떡과 생선을 먹고 너희에게 성경을 풀어 주고 너희와 얘기를 나누었다면, 너희는 어떤 느낌을 받았겠느냐? 기쁘지 않았겠느냐? 가책을 느끼지 않았겠느냐? 전에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피하려는 마음, 반발심, 그리고 의심들이 다 사라지지 않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좀 더 정상적이 되지 않았겠느냐?

너희는 위에서 교제한, 얼마 되지 않은 성경 구절을 통해 하나님 성품의 어떤 작은 흠이라도 발견했느냐? 하나님의 사랑에 불순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더냐?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에 어떤 간사함이나 사악함이 있더냐? 전혀 없다! 그럼 이제 너희는 하나님이 거룩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희로애락이 다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의 발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느냐? 나는 너희가 이런 말씀을 보고 깨달은 것들이 앞으로 너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데에 유익과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 말씀들이 너희에게서 갈수록 더 좋은 성과를 거둬 너희가 추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과도 가까워지길 바란다. 더 이상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 싫증 내지 않고, 진리와 성품 변화를 추구하는 일이 귀찮고 불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의 발현과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이 너희에게 동기 부여가 되어 광명과 정의를 갈망하며,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고, 하나님께 얻어지는 사람, 진정한 사람이 되기를 희망한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육류, 물과 약재를 예비해 주었다

곡물류, 채소, 과일, 견과류는 채식에 포함된다. 식물성 식품이지만 영양소가 풍부하여 인체에 필요한 성분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겐 이런 것만 주면 되니 이런 것만 먹게 하자!”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여기에 더해 더욱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예비하였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보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 각종 고기와 생선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예비해 준 고기와 생선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어류는 물속에서 서식하고 육질이 육지 고기와 다르며, 인체에 또 다른 영양소를 공급할 수 있다. 어류의 성질은 인체의 냉열을 조절할 수도 있기 때문에 몸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이라도 과도하게 섭취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시기에 따라 알맞은 양을 베풀어 주어 사람이 계절과 시기에 맞춰 음식을 정상적이고 적절하게 섭취하도록 하였다. 조류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조류에는 닭, 메추라기, 비둘기 등이 있고 사람들이 즐겨 먹는 오리나 거위도 있다. 이런 육류는 하나님이 예비한 것이지만 하나님 선민에 대해서는 요구가 있었고, 율법시대에는 일정한 범위를 정해 주었다. 그러나 그 범위가 이제는 사람들 개개인의 입맛과 제 나름의 이해에 달렸다. 육류는 인체에 다양한 영양소를 공급하는데, 단백질, 철분, 혈액을 보충해 주기도 하고, 뼈와 근육을 튼튼하게 하여 기력을 보충해 주기도 한다. 어떤 요리법으로 만들어 먹든 사람의 입맛과 식욕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배를 든든하게 채워 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일상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식량을 예비할 때 고려해 둔 것이다. 채식도 있고 육식도 있으니 먹을 수 있는 것이 매우 풍부하지 않으냐?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식량을 예비해 줄 때의 본뜻이 무엇이었는지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물질적인 음식을 탐하라는 뜻이었겠느냐?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만 빠져 있으면 사람은 어떻게 될까? 영양 과잉 상태가 되지 않겠느냐? 영양 과잉이 되면 몸에 각종 질병이 생기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시간에 따라 양을 정해 놓았고, 시기와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식량을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나면 체내에는 열기와 습하고 건조한 기운이 쌓이는데, 이때 가을철에 나는 과일들을 먹으면 습하고 건조한 기운이 제거된다. 또한 이 시기는 소와 양이 살찌는 계절이기 때문에 육식을 통해 몸보신을 할 수 있다. 다양한 고기로 몸에 에너지와 열량이 축적되면 매서운 추위에도 버틸 수 있고 겨울을 잘 보낼 수 있게 된다. 어떤 시기에 사람에게 무엇을 예비해 줄지, 어떤 시기에 무엇이 자라고 열매를 맺고 잘 익도록 할지 이 모두는 하나님이 알고 있고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다. 아주 알맞게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을 예비해 주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다양한 식량을 공급하는 것 외에도 물을 제공한다. 사람은 음식을 다 먹은 후에 물을 마셔야 되는데, 과일만 먹어서야 되겠느냐? 과일만 먹어서는 견딜 수 없다. 게다가 어떤 계절에는 과일이 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의 식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은 지상과 지하에 호수, 강, 샘물과 같은 다양한 수원을 예비하였다. 이러한 수원은 오염되거나 사람이 변질시키거나 파괴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 마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육체적 생활에 필요한 식량의 근원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정밀하고, 정확하고, 알맞게 예비하여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그 무엇도 부족함 없게 하였다. 이는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는 사람의 몸에 상처가 나거나 병이 났을 경우 이를 전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동식물이나 각종 풀들도 있다. 예를 들어, 화상을 입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혹은 뜨거운 물에 데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물로 씻어 내면 되느냐? 아무 천으로 감싸면 되느냐? 그러면 곪거나 감염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열이 나고 감기에 걸리거나, 일하다 타박상을 입거나, 무엇을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나거나, 혈관 질환, 심리적 질환, 오장육부에 생긴 질병 등 생활 습관 혹은 각종 정서로 인한 병은 그에 맞는 식물로 치료할 수 있다. 이러한 식물에는 어혈을 풀어 혈액 순환을 촉진시키거나 통증을 없애거나, 지혈이 가능한 것도 있고, 마취를 하거나, 피부의 정상적인 회복을 돕는 것도 있으며, 체내의 어혈과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것도 있다. 이러한 식물 모두는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고 쓸모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위해 예비한, 비상시에 필요한 것들이다. 이들 중에는 사람이 무심코 발견하게 된 것도 있고 또 어떤 특이한 현상이나 사람들을 통해 발견하게 된 것도 있다. 발견한 후 인류에게 전해 내려오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만든 식물 또한 가치와 의미가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모두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의 생존 환경을 창조할 때 사람을 위해 마련하고 자라게 한 것으로 모두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완벽하지 않으냐? 그렇다면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실제적인 면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은 은밀하게 일한다. 사람이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았을 때, 인류와 접촉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만들어 놓았고 인류를 위해, 인류의 생존을 위해 고려하였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예비한 풍요로운 물질세계 속에서 인류가 걱정 없이,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인류는 계속 번성하며 생존하고 있다.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창 6:9~14)

창조주의 신분을 갖춘 하나님만이 유일무이한 권능을 소유한다

사탄의 ‘특별’한 신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여러 면의 행위에 관심을 보인다. 심지어 많은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 외에 사탄도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사탄도 이적을 보이고 인류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외에도 마음속에 사탄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탄을 하나님으로 삼아 숭배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불쌍하기도 하거니와 가증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불쌍한 것은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의 대역무도와 타고난 사악한 본질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너희에게 권능이 무엇인지, 권능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고 대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곧 권능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고지상함과 하나님의 본질을 상징한다. 하나님 자신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사탄은 자기 자신을 감히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탄은 자신이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자신이 또 만물을 주재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을까? 사탄은 만물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지 못한다! 사탄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창조한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생명이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사탄에게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느냐? 물론 없다! 사탄이 행한 일들, 사탄이 보인 이적은 무엇이냐? 능력이 맞느냐? 권능이라 할 수 있느냐? 물론 아니다! 사탄은 사악한 흐름을 주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며 방해하는 짓을 일삼는다. 몇천 년 동안, 사탄은 인류를 부패시키고 해쳤으며, 사람을 유혹해서 타락의 길로 가게 하거나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골짜기로 걸어가게 하였다. 이런 짓 말고, 사탄이 인류에게 행한 것 중에 어느 것 하나 기념하거나 칭찬하고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있느냐?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하였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해를 입었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길로 나아갔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없다면, 사탄이 행한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겠느냐? 혹자는 사탄의 모든 행위가 보잘것없는 잔재주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나는 사탄에 대한 이런 정의는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인류를 타락시키는 사탄의 악행이 보잘것없는 잔재주일까? 사탄이 욥을 해한 그런 사악한 기세와 욥을 집어삼키려던 강렬한 욕망은 단연코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욥이 소유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소와 양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찰나에 욥의 그 거액의 재산이 모두 사라졌다. 그것이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할 수 있는 것이냐? 사탄이 한 행위의 성격으로 볼 때, 사탄은 파괴, 방해, 파멸, 상해, 사악, 극악, 어둠 등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와 매치되고 어울린다. 그러므로 모든 정의롭지 못하고 사악한 것의 출현은 사탄의 행위와 떼어 놓을 수 없으며, 또한 사탄의 추악한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아무리 거만할지라도, 야심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사탄의 파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사람을 미혹하고 타락시키는 재능이 탁월하다 할지라도, 또한 사람을 협박하는 수법과 권모술수가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무리 변화무쌍할지라도 상관없다. 사탄은 지금까지 생명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만물이 생존하는 법칙과 규율을 정할 수도 없었고,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을 주관할 수도 주재할 수도 없었다. 우주에 사탄에 의해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 존재하는 사람이 없고 그것으로 인해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또한 사탄이 주재하고 주관하는 사람이나 어떤 것은 없다. 반대로, 사탄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지시와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물 한 방울, 모래 한 알도 함부로 만질 수 없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개미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이 만든 인류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눈에 사탄은 산속의 백합만도 못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만도 못하며, 바닷속의 물고기만도 못하고, 땅 위의 구더기만도 못하다. 만물 가운데서 사탄의 역할은 만물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성이 얼마나 악독하고 본질이 얼마나 사악하든지 상관없다. 사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분수껏 자신의 기능을 지키는 것인데,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 부각물이라는 역할을 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본질이자 본래의 자리인 것이다. 사탄의 본질은 생명과 무관하고, 능력과 무관하며, 권능과 무관하다. 사탄은 하나님 수중에 있는 장난감일 뿐이며,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사탄의 본모습을 알게 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권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권능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권능이든 능력이든 그것은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서, 그 어떤 부정적인 것들과도 무관하며,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과도 무관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생명이 있고 활력이 넘치는 어떤 형식의 것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은 모든 생명체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기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생존하며 지속된다. 그 후에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를 주재하고 주관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틀림이 없었으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갖추지 못한 것이며, 창조주만이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권능이라 부른다. 이것이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그러므로 ‘권능’이라는 이 단어 자체나 권능의 본질은 오직 창조주와 관련이 있다. 이는 그것이 창조주만의 신분과 본질의 상징이기 때문이며, 창조주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창조주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권능’이라는 이 단어와 관련이 있을 수 없다. 이 역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사탄이 욥을 호시탐탐 노렸을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욥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사탄의 본성이 사악하고 잔인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후에는 사탄도 하나님이 지시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욥에게 임할 때, 사나운 늑대가 양 떼에 침입하듯 사납게 날뛰었을지라도, 감히 하나님이 정해 준 범위를 망각할 수 없었고,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사탄은 어떻게 해도 감히 하나님 말씀의 원칙과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냐? 이 점에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그 어떤 말도 사탄은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사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고 천상의 법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 뒤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상의 법을 어기며 위반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하나님의 권능을 넘어서고 천상의 법규에 대항한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 결과는 도대체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사탄이 욥, 이 한 사람에게 행한 일은 사탄이 인류를 타락시킨 축소판일 뿐이다. 그리고 사탄이 그 일을 벌일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해 준 범위와 내린 명령은 사탄이 모든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원칙의 축소판일 뿐이다. 또한 사탄이 그러한 일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는 사탄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의 축소판일 뿐이다. 사탄이 욥을 시험하던 그 일에서 보인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사탄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께 감히 대항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축소판일 뿐이다. 이러한 축소판이 너희에게 주는 경고는 무엇이냐? 사탄을 포함한 만물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감히 창조주가 정한 천상의 법칙과 규칙을 어기지 못하며, 그런 법칙과 규칙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저항자에 대한 창조주의 처벌을 바꾸거나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만이 천상의 법칙과 규칙을 정할 수 있고, 창조주만이 그러한 법칙과 규칙을 시행할 능력이 있으며, 창조주의 능력은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만의 권능이며, 이 권능은 만물 가운데 가장 높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크고 사탄이 그다음이다’라는 말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유일무이한 권능을 가진 창조주 외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다. …… 지금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이상의 내용을 나누었으니 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럼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하나님의 권능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만의 지위를 상징하지 않느냐? 만물 가운데 너는 어떠한 일들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느냐? 어떻게 보았느냐? 사람이 경험하는 사계절에서 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에 대한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봄에는 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진다. 이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어느 한 면으로 구현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자 빛이 있었는데, 이 ‘빛’은 지금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의 존재는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이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공기가 지금도 존재하지 않느냐? 인류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기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누가 빼앗아 갈 수 있느냐? 누가 그것의 본질과 기능을 바꿀 수 있느냐? 하나님이 나눈 낮과 밤, 주야를 정한 법칙을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사탄을 포함해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밤이 되었을 때, 잠을 자지 않고 대낮처럼 보낼지라도 역시 밤이다. 네가 너의 생활 규칙을 바꾸었지만, 낮과 밤이 교체되는 법칙은 바꿀 수 없다. 이 사실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사자에게 소처럼 밭을 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코끼리를 나귀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닭을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늑대를 양처럼 풀을 먹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를 육지에서 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그들을 물속에서 살도록 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물속에서 살아야 한다. 육지에서는 살 수 없어 죽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만물은 모두 자기만의 생존 법칙과 범위가 있고, 각각 자기만의 본능이 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창조주가 정한 것으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자는 영원히 사람과 격리된 야생 세계에서 살지, 영원히 소처럼 충직하게 성실하게 사람과 함께하며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없다. 코끼리와 나귀는 다 동물이고 네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숨을 쉬는 피조물이지만, 그들은 다른 종이다. 그들은 각자 하나님에 의해 종류가 구분되고 모두 각자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서로 바뀔 수 없다. 닭도 두 다리를 가지고 있고 독수리처럼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나무 위에 날아오를 수 있을 뿐 영원히 하늘을 날 수 없다. 이것은 닭의 본능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정해진 것이 자명하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발전해 오면서, 인류의 과학은 ‘일취월장’했다고 할 수 있다. 과학 탐구 과정에서 이룩한 성과가 ‘과히 놀랄’ 정도이니, 인류의 재능은 날로 커지고 있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유독 한 가지만은 인간의 과학으로 돌파하지 못한다. 인류는 비행기를 만들고, 항공 모함을 만들고, 원자 폭탄을 만들고, 우주로 날아가고, 달나라에 착륙하고, 인터넷을 발명하여 하이테크 시대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숨 쉴 수 있는 생물은 만들어 내지 못한다. 어떤 생물의 본능과 생존 법칙 및 각종 생물의 생사윤회에 대해서 인류의 과학은 무능하고 통제할 수 없다. 이로부터 인류의 과학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 달했든 창조주의 생각 하나에도 비할 수 없고, 창조주의 만물 창조의 오묘함과 창조주 권능의 위력은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구상의 바닷물이 그렇게 많아도, 하나님이 각각에게 경계를 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껏 함부로 자신의 범위를 넘어 육지로 올라온 적이 없다. 그들은 정해 준 대로 있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움직이라고 말씀할 때에야 움직일 수 있고, 그들이 어디로 가고 어디에 머무를지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늘 하는 말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 결정할 권리가 있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만물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뀌는 것이지 사람의 의지로는 바뀔 수 없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천지 만물, 우주, 별, 1년 사계절, 사람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은 다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할 당시의 법칙에 따라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 존재하고 운행되며 변화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것의 법칙을 바꿀 수 없으며, 그것 본래의 운행 궤적을 바꿀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소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다. 여기까지 말했는데,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한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하나님의 권능이 어떠한 피조물이나 비피조물이 갖출 수 있는 것이냐? 그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모방하고 따라 하고 대체할 수 있는 것이냐?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다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0~21)

하나님의 진노는 감춰져 알려지지 않았지만,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지몽매한 온 인류를 주로 긍휼과 관용으로 대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대부분의 시간과 사건에서 가려져 있고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보기 아주 어렵고, 하나님의 진노를 알기도 매우 어렵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마지막 사역과 절차로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용서했을 때, 즉 마지막으로 긍휼을 베풀고 경고했을 때도 사람이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조금도 회개하지 않고 돌아서지 않으며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고 인내하지 않는다. 이때 하나님은 반대로 긍휼을 거두고 사람에게 진노만을 발한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의 진노를 표현할 수 있고 사람을 징벌하고 멸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불로 소돔 성을 멸망시켰다. 이 방식은 하나님이 인류나 물체를 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불을 이용해 인류를 멸한 것은 그 육체뿐 아니라 영, 혼, 육 전부를 멸하여 소돔 성 사람들이 물질세계와 사람이 볼 수 없는 세계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진노를 발현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런 발현은 하나님의 진노 본질의 일면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노할 때 더 이상 그 어떤 긍휼과 자비, 관용을 베풀지 않고 인내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어떤 이유도 하나님이 계속 인내하도록 설득할 수 없고, 다시 긍휼과 관용을 베풀도록 설득할 수 없다. 그 대신 하나님은 한시의 지체도 없이 그의 진노와 위엄을 나타내고, 그가 하려는 일을 하고 또한 깔끔하고 마음에 들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나타내는 방식이자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일부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걱정하고 사랑할 때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볼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을 느낄 수 없는데, 이것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는 오직 긍휼, 관용, 사랑만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성을 멸하고 인류를 증오하는 것을 보게 될 때, 인류를 멸하는 그의 노와 위엄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거스름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은 어떤 피조물도 상상할 수 없고, 피조물이 아닌 어떤 것도 간섭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으며, 사칭이나 모방은 더욱 불가하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하나님 성품을 인류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러한 성품을 갖추고 있으며 하나님만이 이런 성품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공의로운 성품을 갖춘 것은 하나님이 사악함, 암흑, 패역, 인류를 타락시키고 집어삼키는 사탄의 온갖 악행을 증오하는 데에서 기인하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든 죄악된 행위를 증오하는 데에서 기인하고 또 하나님의 거룩하고 무결한 본질에서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조물이든 비피조물이든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항하고 하나님과 겨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설령 하나님이 긍휼히 여겼던 자일지라도, 설령 하나님이 택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의 원칙을 거슬렀다면 하나님은 가차 없이, 주저하지 않고 거스를 수 없는 공의로운 성품을 보여 줄 것이다.

첫 번째 관문, 탄생

어디에서 또는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는지, 어떤 성별과 외모로 태어나는지, 언제 태어나는지, 이것은 모든 사람이 삶에서 거쳐야 할 첫 번째 관문과 관련된 몇 가지 내용이다. 첫 번째 관문은 창조주가 운명으로 정해 놓은 것으로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외부 환경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인위적인 요인은 창조주가 운명을 배치한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한 사람의 탄생은 창조주가 그 사람의 운명에 대한 첫 번째 단계를 완성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창조주가 운명으로 정해 놓은 것이므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앞으로의 운명과 상관없이 사람이 어떤 배경에서 태어날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따라서 출생 배경은 삶의 운명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창조주가 삶의 운명에 행사하는 주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1.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창조주의 배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첫 번째 관문과 관련된 출생지, 태어날 가정, 성별, 외모, 출생 시간 중에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시점에, 어떤 곳이나 어떤 가정에서, 어떤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다. 얼떨결에 한 가정의 일원, 한 가정의 자녀가 된다. 삶의 첫 번째 관문에서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창조주의 배치하에 정해진 환경에서 태어난다. 태어날 가정, 성별, 외모뿐만 아니라 사람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출생 시간 역시 정해져 있다. 이 중요한 관문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출생과 관련해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새로운 생명이 이 세상에 올 때 창조주의 예정과 인도가 없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서 머물러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고, 가족, 귀속, 진정한 가정도 없게 될 것이다. 창조주의 세심한 배치하에 머무를 곳을 찾고 부모, 귀속, 가족을 얻어 인생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창조주의 배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새로운 생명이 가지게 될 모든 것은 창조주가 부여하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표류체에서 조금씩 피와 살이 있고 모양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그 생명은 사고를 하고 숨을 쉴 수 있다. 따뜻함과 냉정함을 느끼고 물질세계의 여느 피조물과 다를 바 없이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또한, 창조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세상만사를 경험하게 된다. 창조주가 한 사람의 탄생을 배치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사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사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주로부터 선사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또 다른 형태로 창조주로부터 필요한 것을 공급받고 그의 주재 아래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사람의 출생 배경이 각양각색인 이유 다시 태어나면 명문가에서 태어나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많다. 여성의 경우, 공주 같은 외모로 모두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 한다. 남성의 경우, 먹고 살 걱정 없이 떵떵거리며 사는 왕자를 꿈꾼다. 이렇게 원하는 출생 배경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시에 태어난 가정부터 외모, 성별, 심지어 출생 시간까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것에 큰 불만을 느낀다. 그런데 사람은 왜 이런 가정에 태어났는지, 왜 이런 외모를 타고났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어디에서 태어나든, 어떤 외모로 태어나든, 사람은 창조주의 경영을 위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고 정해진 사명을 완수하는 이 근본 취지는 영원히 바뀔 수 없다. 창조주의 눈으로 보면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떤 성별로 태어나고, 어떤 외모를 가지는지는 잠시 스쳐 가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런 것은 창조주가 인류 전체와 삶의 각 시기를 경영하기 위해 사용하는 작은 기호나 상징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진정한 종착지와 결말은 한 시기의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매번 사명과 창조주의 경륜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창조주가 내리는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탄생은 전생, 금생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번 윤회의 끝이라면 한 사람의 탄생은 당연히 새로운 윤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간 윤회가 전생이라면 새로운 윤회는 금생으로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탄생이 전생, 금생과 관계가 있다면 그 사람이 태어난 곳, 가정, 성별, 외모 등 모든 요인 역시 전생, 금생과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사람의 출생과 관련된 모든 요인이 전생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금생의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출생 배경이 각양각색인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명문가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남쪽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북쪽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사막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오아시스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환호, 웃음, 축하를 동반하는 탄생이 있는가 하면 슬픔, 불운, 걱정을 유발하는 탄생도 있다. 태어날 때부터 집안의 복덩이로 불리는 사람도 있고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사람도 있다. 외모가 반듯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목구비가 조화롭지 않은 사람도 있다. 외모가 준수한 사람도 있고 부족한 사람도 있다. 한밤중인 자시에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오시에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제각각인 출생 배경은 창조주가 배치한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금생의 운명, 금생에서의 다양한 역할과 사명도 결정된다. 이 모든 것이 창조주의 주재와 예정하에 이루어지며, 아무도 그가 정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출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길 잃은 양의 비유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2~14)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 주의 사랑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18:2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