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하나님이 각종 날짐승과 길짐승, 어류, 곤충 및 각종 식물에게 경계를 나누다

2018년 08월 13일

하나님이 이러한 경계를 정했기 때문에 여러 지리적 형태에 따라 다양한 생존 환경이 생겼다. 이러한 생존 환경은 여러 날짐승과 길짐승에게 편리함과 생존 공간을 가져다주었다. 이로써 여러 생물들의 생존 환경에 경계가 생기게 된 것이다.

노을,날아가는 새,

두 번째 내용이다. 여러 날짐승과 길짐승, 곤충은 어디에서 생활하느냐? 숲이나 작은 수림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냐? 그곳은 그들의 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러 지리적 환경에 경계를 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날짐승과 길짐승, 물고기, 곤충 및 식물을 위해서도 경계를 나누고 법칙을 정하였다. 여러 가지 지리적 환경이 서로 다르고, 여러 지리적 환경이 존재하기 때문에 각종 날짐승과 길짐승, 물고기, 곤충 및 식물 역시 다양한 생활 환경이 생겼다. 날짐승과 길짐승, 곤충은 여러 식물 속에서 살아가고, 각종 물고기는 물속에서 생활하며, 각종 식물은 땅에서 자란다. 이 ‘땅’은 큰 산, 평원, 구릉 등 각종 지대를 포함한다. 그래서 날짐승과 길짐승은 자신만의 정해진 집이 있게 되면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집은 숲이며, 큰 산이다. 어느 날 그들의 집이 파괴된다면 이 질서는 무너질 것이다. 질서가 무너지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느냐? 가장 먼저 누가 피해를 입겠느냐? (인류입니다.)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것은 인류이다! 하나님이 정한 이런 법칙과 범위에서 너희들은 이상한 현상을 본 적이 있느냐? 예를 들어, 코끼리가 사막에서 한가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정말 이를 본 적이 있다면 이는 정말 이상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코끼리가 생활하는 환경은 숲속이기 때문이다. 이 숲은 하나님이 예비해 준 생활 환경이자 생존 환경이다. 코끼리에게 자신의 생존 환경이 있고 정해진 집이 있는데도 이리저리 돌아다니겠느냐? 사자나 호랑이가 해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없겠지? 사자의 집은 들판이고, 호랑이의 집은 산속이다. 바다에 있던 고래나 상어가 사막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없겠지? 고래와 상어의 집은 바다다. 사람의 생활 환경에서 사람과 큰 불곰이 함께 생활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안팎이 항상 공작새나 여러 종류의 새로 둘러싸인 집을 본 적이 있느냐? 독수리나 기러기가 원숭이와 어울려 노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것은 특이한 일이다. 내가 이렇게 너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이 움직일 수 없는 것이든, 아니면 숨을 쉬는 것이든, 다 자신만의 생존 법칙을 갖고 있음을 너희들이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생물들을 창조하기 전에 일찍이 그들의 집과 생존 환경을 예비하였다. 그 생물들에게는 자신만의 정해진 생존 환경과 먹거리가 있게 되었고, 자신만의 정해진 집이 있게 되었으며, 자신의 생존에 적합한 정해진 장소, 혹은 생존에 적합한 온도의 지역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제멋대로 돌아다니지 않고, 인류의 생존을 파괴하거나 인류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만물을 관리하며,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생존 환경을 제공한다. 만물 중의 생물들은 각자의 생존 환경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먹거리를 갖고 있다. 이러한 먹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고유한 생존 환경에 정해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생존 환경에서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만든 법칙에 따라 생존하고 번식하며,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법칙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해 놓았기 때문에 만물과 인류는 화목하게 어울려 살고, 서로 의지하는 것이다.

여섯째 날, 창조주가 말씀하니 그의 생각 속 각종 생물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4~25)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기본적인 생존 환경에서 인류에 대한 공급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조절하는 인류 생존의 5가지 기본 조건을 통해 하나님이 인류에게 공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으냐?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류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관리하고 주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류 탄생 후 몇천 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의 생존 환경을 바꾸어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 생존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인류는 정상적인 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유지되겠느냐? 다시 말해 언제까지 하나님이 이러한 환경을 제공하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다. 그때 하나님은 어쩌면 같은 방식 또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인류의 생존 환경을 변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람이 진정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인류의 생존 환경을 관리하고, 보호하고,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하나님의 선민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만물도 하나님의 주재 덕분에 계속해서 생존하고 인류 전체도 이와 같은 공급 덕분에 앞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방금 이야기를 들으며 새롭게 느낀 점이 있느냐? 이제는 하나님과 인류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도대체 누가 만물의 주인이냐?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만물을 대할 때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만물을 주재하고 배치하시고,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누립니다.) 너희는 이 말을 인정하겠지? 하나님과 인류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은 만물을 주재하고 공급하고 있으며, 또 그 모든 것의 근원이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만물을 공급할 때 그것을 누린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이 만물에게 베푼 생명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만물을 누리는 것이다. 사람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성과를 누리는 자이고, 하나님은 주재자이다. 그렇다면 만물에게 있어 하나님과 인류는 무엇이 다를까? 하나님은 만물의 성장 법칙을 분명히 알고 있고 이를 주관하고 주재한다. 즉,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안중에 있으며 하나님의 감찰 범위 안에 있다. 하지만 사람은 만물을 볼 수 없다. 사람은 볼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눈앞의 것만 볼 수 있다. 산에 오르면 그 산만 볼 수 있을 뿐, 산 너머의 것은 볼 수 없다. 해변에 가면 바다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 바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볼 수 없다. 숲속에 들어가면 주변의 식물만 볼 수 있을 뿐, 더 먼 곳은 볼 수 없다. 사람은 더 높은 곳, 더 먼 곳, 더 깊은 곳은 보지 못하고 눈앞의 것, 시야 내에 있는 것만 볼 수 있다. 사람이 1년 사계절과 만물 성장의 법칙을 안다 하더라도 만물을 관리하고 주재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만물을 자신이 손수 만든 기계처럼 다루며, 모든 절차, 원리, 법칙 그리고 용도가 무엇인지 명확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인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과학을 연구하고 만물의 법칙을 탐구한다 해도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이 만유를 주관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무한한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아주 작은 일을 사람에게 연구하라고 한다면, 평생의 시간을 쏟아도 진정한 성과를 얻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따라서 네가 배운 지식으로 하나님을 연구한다면 영원히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영원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진리를 찾는 방식과 하나님께 구하는 방식으로 또 하나님을 알아 가는 측면으로 하나님을 대한다면, 어느 날 하나님의 행사가 어디에나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왜 만물의 주재자라고 하는지, 왜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생길수록 하나님을 만물의 주재자라고 칭하는 이유를 알게 되고, 너를 포함한 만물 모두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만물의 생존을 주재하고 관리하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과 그 본질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생겼을 때, 너는 하나님이 곧 너의 하나님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너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여 너의 하나님이 되게 하고 너의 주재자가 되게 할 것이다. 그런 인식이 생기고 생명이 그런 경지에 이르면, 하나님은 두 번 다시 너에게 시련을 주거나 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네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고 관리하는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요한 이유이다. 이는 하나님의 행사를 인정하게 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실제적으로 알고, 더 많이 이해하고 알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려고 하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창 18:26)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18:29) “아브라함이 가로되 …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18:30)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18: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18:32) 이 몇 구절의 말씀은 내가 성경에서 고른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문장 그대로는 아니다. 너희가 온전한 문장을 보고자 한다면 성경에서 찾아보면 된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부분적인 내용은 빼 버렸다. 중요한 단락과 구절만 선별하고 몇 구절을 빼긴 했지만, 오늘 우리가 교제하는 것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교제하려는 모든 장절과 내용에서 당시 발생했던 사건의 세부적인 사항과 사람에게서 드러난 것들은 제쳐 놓고, 당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보고,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에서 진실한 하나님 자신을 보았다면 목표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의 명령대로 따르는 사람만 보살핀다 이 단락의 내용에 몇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숫자다. 우선, 여호와 하나님은 성안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용서할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50명의 의인이 있었느냐? 없었다. 이어서 아브라함은 또 하나님과 어떤 대화를 나눴느냐? 만일 40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었다. 하나님은 그래도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시 아브라함이 30명이면 어찌 되는지 물었다. 하나님은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20명이 있으면? 역시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10명이면? 역시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성안에 의인이 10명이라도 있었느냐? 10명은 없었지만 한 명은 있었다. 그 한 명의 의인이 누구냐? 그 사람은 롯이었다. 당시 성안에는 의인이 한 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숫자에 대해 까다롭고 엄격하게 말씀했느냐?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라고 질문하며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라고 하기까지 했다. 하나님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했다. 이 10은 아주 안타까운 숫자였다. 그러나 사실 소돔 성안에는 의인이 10명조차도 없었다. 이로써 그 성안 사람들의 죄악과 사악함은 이미 하나님이 보기에 멸해야만 할 정도까지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의인이 50명 있어도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 말씀은 무슨 뜻이냐? 그런 숫자는 하나님께 있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하나님이 원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성에 의인이 한 명밖에 없더라도, 하나님은 성을 멸할 때 그 의인이 피해를 보는 일은 없게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 성을 멸하고자 했든 안 했든, 그 성에 의인이 몇 명 있었든, 그 죄악의 성은 하나님이 보기에 저주받아야 할 곳이었고, 마땅히 멸망되어 하나님 눈앞에서 사라져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의인은 마땅히 살아남아야 할 대상이었다.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인류가 어느 시대까지 발전했는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이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그는 사악한 것을 증오하며, 그의 눈에 보이는 의인을 보살핀다. 하나님의 명확한 이 태도는 하나님 본질의 진정한 발현이다. 성안에는 의인이 한 명뿐이었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최종적인 결과는 바로 그 성은 반드시 멸망되고야 만다는 것이다. 여기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그 시대에 하나님은 성안에 의인이 50명 있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을 수 있었으며, 의인이 10명 있었어도 그 성을 멸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로 인해 인류를 용서하고 관용을 베푸는 결정이나 그들을 인도하는 사역을 할 수도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로운 행동을 아주 중히 여기고, 그를 경배하는 사람을 귀히 여기며, 그의 앞에 선행을 쌓은 자들을 귀하게 여긴다. 하나님은 그가 보살피는 자에게는 크게 긍휼을 베풀고,혐오하여 포기하는 자에게는 크게 노한다 성경 기록을 볼 때, 소돔 성에 하나님의 종이 10명이라도 있었느냐? 없었다! 하나님께 그 성은 남겨 둘 가치가 있었느냐? 성에서는 롯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자를 영접했다. 이는 그 성에 하나님의 종이 한 사람뿐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롯만 구원하고 소돔 성을 멸한 것이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화가 보기에는 아주 간단하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매우 원칙 있게 일을 한다는 것이다. 결정 하나를 내리기 전에 장기간의 감찰과 생각의 과정을 거치며, 때가 되지 않으면 그 어떤 결정이나 판단도 단호하게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소돔 성을 멸하는 그 결정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일찍이 성안에는 의인이 40명도, 30명도, 20명도 없으며, 10명조차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안의 의인은 롯 한 명뿐이었다. 성에서 일어나는 일, 성안의 상황에 대해 하나님은 감찰하고 있었으며,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결정은 잘못될 리가 없었다. 그에 비하면, 하나님의 전능 앞에서 사람은 매우 무감각하며, 더없이 우매하고 무지하며, 근시안적인 존재라는 것이 더 두드러진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에서 우리가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발현되어 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 숫자는 아주 간단하며 어떤 문제도 설명하지 않지만,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의인이 50명 있다면 그 성을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관용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냐? 너희는 하나님의 이 부분의 성품을 보았느냐? 더 나아가 의인이 10명밖에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의인 10명으로 인해 그 성을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관용과 사랑이 아니냐? 하나님은 그 의인들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고, 그들을 염려하여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용이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본 결과는 무엇이냐? 아브라함이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멸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였다. 그 후, 아브라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성에는 그가 말한 의인이 10명도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소돔 성을 멸하기로 뜻을 정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어떤 결정을 하였느냐? 그 성에 의인이 10명도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성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으며, 반드시 그 성을 멸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노가 아니냐? 그 ‘노’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변하지 않느냐? 그 성품은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의 발현이 아니냐? 사람이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본질의 발현이 아니냐? 하나님은 의인이 10명도 없다는 것이 확정되면 반드시 그 성을 멸할 것이며, 게다가 그 성에 있던 사람들을 엄하게 벌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했고 또한 그들이 너무 더럽고 타락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이 대화들을 분석할까? 이 간단한 몇 구절에 크게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의인을 귀하게 여기고 긍휼히 여기며 관용으로 대하고 염려하는 동시에, 그 성안의 모든 타락한 자들을 마음속 깊이 증오하였다. 이것이 크게 긍휼을 베풀기도 하고 크게 노하기도 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그 성을 멸하였느냐? 불로 멸하였다. 하나님은 왜 불태우는 방법으로 그 성을 멸했을까? 네가 어떤 물건이 불에 타는 것을 볼 때, 혹은 네가 어떤 것을 불태워 버리려고 할 때, 너는 그 물건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 왜 그것을 불태우느냐? 더는 필요 없고, 더 이상 그 물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담겨 있지 않으냐? 그것을 포기한다는 의미가 있지 않으냐? 하나님이 불로 태우는 방식에는 포기한다는 의미가 있고, 증오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불로 소돔 성을 멸할 때 바로 이런 심정이었다. 불태우는 방식은 하나님의 노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확실히 존재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노할 때에도 사람에게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의 면을 보여 준다.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은 크게 긍휼을 베푼다. 사람이 심히 타락하고 하나님을 매우 적대시하고 대적할 때 하나님은 크게 노한다. 그리고 그 노는 어느 정도로 분출될까? 그 사람의 대적과 악행이 더 이상 하나님께 보이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 눈앞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노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노가 사라지게 된다. 즉, 누구를 막론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만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의 몸과 생각이 외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따르고 순종하고 싶든지 간에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의 노는 끝없이 분출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사람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었을 때, 하나님이 크게 노할 때, 하나님의 노는 걷잡을 수 없이 계속 분출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에게는 영원히 더 이상의 긍휼도 관용도 베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 성품의 일면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성 하나를 멸하려고 했을 때, 그 일이 사람에게는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 성이 죄악으로 가득하고, 하나님의 눈에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고 남아 있을 수 없으니 하나님이 그 성을 멸하는 것은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소돔 성을 멸하기 전후에 발생한 일들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보았다. 그는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관용과 긍휼을 베풀며, 악한 것과 죄에 속한 것, 사악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노하며, 그 노가 끊이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 성품의 가장 주된 부분이자 가장 두드러지고, 더욱이 하나님이 시종 나타내고 있는 주요 2가지 측면이다. 즉, 크게 긍휼을 베풀고 크게 노하는 것이다. 너희들 대다수는 하나님의 긍휼은 어느 정도 느낀 적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노를 체험한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일찍이 크게 긍휼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 중 그 어떤 사람이나 일부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크게 노한 경우는 아주 드물고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급해하지 마라! 하나님의 노는 조만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 왜 그런 것이냐?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노를 표출할 때, 다시 말해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크게 노할 때는 하나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그 사람을 혐오하고 버렸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존재를 증오하며 더 이상 그 사람의 존재를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노가 임하면, 그 사람이 소멸됨을 의미한다. 지금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직 그 정도까지 진행되지 않았다. 하나님이 크게 노하면, 너희 중에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이 이 시대에 너희 모든 사람에게 크게 긍휼을 베풀어 주었을 뿐, 아직 크게 노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의 노가 임하기를 구해도 된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노와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이 정말 존재하는지를 체험해 보면 된다. 너희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

인류에 대한 창조주의 진심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항상 말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항상 자신의 행사를 나타내어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류와의 대화를 멈추지 않았고, 인류를 피해 숨은 적이 없으며, 자신의 마음과 생각, 말씀과 행사를 인류에게 다 공개하였다. 그러므로 인류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기만 한다면 여러 가지 경로와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 인류는 계속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인류를 피하고, 인류에게 숨고, 사람이 알고 이해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으며, 더욱이 창조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창조주가 무엇을 말씀하고 무엇을 행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틈날 때만이라도 창조주의 말씀이나 행사에 관해 관심을 두고 알려고 하고, 창조주의 생각과 마음의 소리에 주의를 조금이라도 기울인다면, 창조주의 모든 생각과 말씀과 행사가 공개적이고 투명하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창조주가 항상 인류와 함께 있고, 만물과 대화하고 인류와 대화하고 있으며, 매일같이 새로운 행사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의 본질, 그의 성품은 인류와의 대화에서 나타나고, 그의 마음과 생각은 그의 행사에서 빠짐없이 나타난다. 그는 늘 인류와 함께하며 인류를 관찰하고 있으며, 무언의 언어로 조용히 만물과 인류에게 알려 준다. ‘나는 하늘 위에 있다. 나는 만물 중에 있다. 나는 수호하고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나는 바로 너의 곁에 있다.’ 그의 두 손은 따뜻하고 힘이 있으며, 그의 발걸음은 가볍다. 그의 음성은 감미로우며, 그의 그림자는 끊임없이 사람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그의 얼굴은 아름답고 온화하다. 그는 떠난 적도 사라진 적도 없고, 줄곧 그림자처럼 인류와 함께하였다. 인류를 보살피는 정성과 인류에 대한 특별한 ‘감정’, 그리고 진실한 염려와 사랑은 그가 니느웨 성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나타났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은 요나와의 대화에서 창조주가 손수 만든 인류에 대한 연민의 정을 완전하게 나타냈다. 여기서 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을 깊이 느낄 수 있다. 요나 4장 10절에서 1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내용은 여호와 하나님의 원래 말씀으로, 요나와의 대화이다. 짧고 간결한 이 대화에 인류를 아끼고 염려하는 창조주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피조물에 대한 진실한 태도와 감정을 나타냈고, 또한 인류가 들어 보기 어려운, 명확한 언어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심을 표현했다. 이 대화는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 준다. 어떤 태도일까? 회개하기 전후의 니느웨 성의 사람들에 대한 태도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도 있고 하나님의 성품도 있다. 이 대화에서 하나님의 어떤 마음을 볼 수 있느냐?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하나님이 ‘아낀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태도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아낀다’라는 단어를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첫째, 보살피고 불쌍히 여긴다. 둘째, 몹시 사랑한다. 셋째, 너무 아까워서 차마 상처를 줄 수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이 단어는 몹시 어여삐 여기고 몹시 귀여워하며 내버리지 못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인류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 대화에서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와 인류에 대한 태도를 남김없이 표현하였다. 니느웨 성 사람들도 소돔 성 사람들처럼 타락하고 사악하고 아주 폭력적이었지만 그들이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렸고 그들을 멸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를 대하는 태도는 소돔 성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순종하고 회개하였고, 그리고 여러 면에서 진실하고 간절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끼는 마음이 우러나 상을 주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상을 주고 아끼는 마음을 갖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 그리고 인류에 대한 진심은 그 누구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네가 생각하는 위인이나 슈퍼맨 중에 높은 위치, 즉 위인의 입장이나 지고한 위치에 서서 인류나 피조물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느냐? 인류 중에 누가 인류의 생존 현황을 손금 보듯 환히 알 수 있겠느냐? 누가 인류의 생존에 부담과 책임감을 가질 수 있겠느냐? 누가 성을 멸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겠느냐? 또 누가 성의 죄를 사할 자격이 있겠느냐? 누가 자신이 창조한 만물을 아낀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오직 창조주밖에 없다.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아끼고, 이 인류를 사랑하며, 창조주에게만이 이 인류를 내버리지 못하는 참된 마음이 있다. 또 창조주만이 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모든 피조물을 아낀다. 그의 마음은 인류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끌린다. 그는 인류의 사악하고 타락한 모습에 분노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인류가 회개하고 신복하는 모습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마음을 되돌리고 축하한다. 그의 모든 마음과 생각은 인류를 위해 생기고 움직이며, 그의 속성(원문: 所是所有)은 인류를 위해 발현된다. 또한 그의 희로애락은 인류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인류를 위해 조용하게 자신의 생명을 모두 바치며, 인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의 일분일초를 기여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은 아낄 줄 몰랐지만 자신이 손수 창조한 인류는 늘 아껴 왔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인류에게 주었다. 그가 조건도 보상도 없이 긍휼과 관용을 베푸는 것은 오로지 인류가 그의 눈 아래에서, 그의 생명의 공급 아래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언젠가 인류가 다시 그의 앞에 돌아와 그가 바로 인류에게 생존을 위한 자양분을 공급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 ― 주의 사랑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마18:21~22)

다섯 번째 관문, 자녀

사람은 결혼 후 자녀를 양육하게 된다. 어떤 자녀를 몇 명 둘지는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운명과 창조주의 배치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거쳐야 할 다섯 번째 관문이다. 한 사람의 출생이 자녀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두 가지 역할이 바뀌면서 인생의 각 시기를 경험하게 되고, 다양한 인생 경험을 하게 된다. 다양한 인생 경험을 하면서 창조주의 변함없는 주재를 체험하게 되고, 또한 창조주가 정한 운명에서 벗어나거나 이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1. 자녀의 일은 사람이 결정할 수 없다 [caption id="attachment_18380" align="aligncenter" width="615"] 글과 관련이 없는 자료사진입니다[/caption]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출생, 성장, 결혼에 불만을 가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가정이나 외모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모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성장 환경에 큰 불만을 터뜨리고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결혼만큼 불만스러운 것은 없다. 출생, 성장, 결혼에 있어 여의찮은 일이 얼마나 많았든 경험자는 출생 시점과 장소, 외모, 부모, 배우자를 사람이 선택할 수 없고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사람은 자녀를 양육할 때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모든 꿈을 자녀를 통해 이루고 남은 미련을 해소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자녀에게 터무니없는 욕심을 가지게 된다. 딸은 예쁘고 아들은 잘생기기를 바란다. 딸은 예술적인 재능을 두루 갖추고, 아들은 공부와 운동에 능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지길 바란다. 딸은 부드럽고 현명하며 교양과 지성을 겸비하기를 바라고, 아들은 똑똑하고 유능하며 이해심이 많기를 바란다. 딸과 아들 모두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를 살뜰히 챙기는, 모두에게 사랑과 칭찬을 받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이처럼 인생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짐과 동시에 더 많은 욕심을 부리게 된다. 변변찮은 능력 탓에 이번 생에서는 더 이상 성공의 기회와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자신이 못 이룬 꿈과 희망을 자녀에게 맡기고 대신 이뤄 주기를 바란다. 자녀가 가문을 빛내거나 높은 위치에 오르기를 바라고, 큰 부자나 유명인이 되기를 바란다. 자녀가 출세만 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여긴다. 사람의 계획과 생각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한들 부모가 자녀의 수, 그리고 그 자녀의 외모나 능력 등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더군다나 자녀의 운명은 부모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자신의 운명도 어쩌지 못하면서 자녀의 운명을 바꾸려 들고, 자신의 운명에서 한 발짝도 옴짝달싹 못 하면서 자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하냐?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으냐? 사람은 자녀를 위해 온갖 심혈을 기울이지만 어떤 자녀를 몇 명 두게 될지는 계획이나 바람처럼 되지 않는다. 즉, 무일푼임에도 많은 자녀를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부자임에도 슬하에 자식이 없는 사람도 있다. 딸이나 아들을 간절히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자녀 덕분에 복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를 입는 사람도 있다. 부모는 똑똑한데 자녀는 어리석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부지런한 부모와는 달리 자녀가 게으른 경우도 있다. 정직하고 선한 부모가 간사하고 악한 자녀를 두는가 하면 건강한 부모가 장애아를 두는 경우도 있다. 평범한 부모가 비범한 아이를 두는 경우도 있고,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낮지만 자녀가 대성하는 경우도 있다. 2. 다음 세대를 키운 후 사람은 운명을 새로이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서른 즈음에 결혼을 하지만, 삶의 그 지점에서 운명에 대한 이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고 그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세대 역시 이전 세대의 삶과 모든 경험들을 되풀이하는 것을 목격한다. 아이들의 삶과 경험 속에 비치는 자신의 과거를 보며, 그들은 자신의 삶이 꼭 그랬듯 다음 세대가 걸어가는 길 또한 계획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러한 사실과 마주하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운명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임을 인정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망을 차츰 내려놓게 된다. 욕망의 불길도 조금씩 꺼진다. 이 시기는 삶의 중요한 몇 고비를 이미 지나 인생을 새롭게 이해하고,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갖게 되는 시기이다. 그 나이에 사람이 미래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 수 있을까? 아직도 백마 탄 왕자를 꿈꾸는 50세 여성이 있을까? 50세 남성이 아직도 백설 공주를 찾고 있을까? 아직도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 되길 바라는 중년 여성이 있을까? 대부분의 나이 든 남성들이 사업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가 과연 젊은 사람들과 같을까? 한마디로 말해,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정도 나이가 들면 결혼, 가족, 아이들에 대해 비교적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 나이가 되면 거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운명에 도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경험상 그 나이가 되면 사람은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자세를 취하게 된다. ‘사람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해. 자식에게는 자식의 운명이 따로 있지.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하는 거야.’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세상의 갖은 우여곡절과 좌절과 고난을 겪은 많은 사람들은 종종 “다 운명이야!”라는 한 마디로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총결한다. 이 표현은 일생 운명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결론과 깨달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사람의 무력함을 보여 주는데, 투철하고 정확하다 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창조주의 주재를 인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고, 이를 깨달았다고 해서 창조주의 권능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3. 운명을 믿는다고 해서 창조주의 주재를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긴 세월 하나님을 따른 너희는 운명에 대해 세상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너희는 창조주의 예정과 창조주의 주재를 진실로 알게 되었느냐? 어떤 사람들은 “다 운명이야.”라는 표현을 깊이 이해하고 마음으로 느끼지만 하나님의 주재를 전혀 믿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다. 바다에서 어쩔 수 없이 파도에 떠밀려 가야 하는 사람처럼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고, 운명이라 생각하며 단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주재 안에 있음을 인정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주재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 가는 삶,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삶, 더 이상 운명에 맞서지 않는 삶,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 다시 말해,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창조주의 주재에 순종하는 것과는 다르다. 운명을 믿는 것은 창조주의 주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아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믿음은 그저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표면 현상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가 만물의 운명을 주재하는 근원임을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며, 인류의 운명을 다스리는 그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과는 더더욱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이 운명을 믿고 이를 마음 깊이 느낌에도 인류의 운명에 대한 창조주의 주재를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비극일 것이며, 헛되고 공허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돌아오지 못하고, 창조주의 인정을 받는 참다운 인류가 되지 못한다. 진실로 창조주의 주재를 알고 경험한 사람은 소극적이거나 무력하지 않고 적극적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의 운명이 정해져 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삶과 운명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게 된다. 즉, 사람의 일생은 창조주의 주재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살아온 길을 뒤돌아볼 때, 그 여정을 차례차례 떠올려 볼 때, 사람은 힘들었든 평탄했든 걸어온 걸음마다 하나님이 배치하고 인도해 왔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세심한 계획과 배치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늘날까지 오게 되어 창조주의 주재와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어떤 사람이 운명에 대해 수동적 태도를 가진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예비한 모든 것에 대항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순종의 태도가 없다는 증거이다. 어떤 사람이 사람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에 능동적 태도를 가진다면, 삶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주재를 진실로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이 예비한 모든 것에 진정으로 순종하고 싶어질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더 이상 거역하지 않고 더욱 단호한 의지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그의 운명을 다스리게 할 것이다. 이는 운명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알지 못한 채 제 뜻대로 안개 속을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사람에게 삶은 너무나 어렵고 가슴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를 알게 되었을 때, 총명한 사람들은 그 주재에 대해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택한다. ‘자신의 두 손으로 좋은 삶을 일구기 위해 애썼던’ 고통스러운 날들, 운명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의 방식으로 소위 삶의 목표를 추구하던 것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주재를 분명하게 알 수 없을 때, 그 하루하루는 의미도 가치도 없으며 아주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디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사람의 삶의 방식과 추구 목표는 끝없는 슬픔과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어 지나온 길을 돌아볼 수조차 없게 한다. 오로지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그의 섭리에 순종하고, 참된 삶을 추구할 때, 사람은 차츰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풀려나고 삶의 공허함을 떨쳐 버릴 수 있다. 4. 창조주의 주재에 순종해야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주재를 알지 못하는 탓에 늘 반항심과 패역한 태도로 운명과 마주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과 주재, 그리고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 그들이 처한 상황과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헛된 바람일 뿐, 언제나 좌절을 맛보게 된다. 영혼 깊은 곳의 몸부림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그 고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낭비되고 있다. 그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주재 탓이냐, 아니면 사람의 운명이 나쁜 탓이냐? 분명히 둘 다 틀렸다. 한마디로 말해, 사람들이 선택한 길,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할 때, 하나님이 너를 위해 주재하고 배치한 모든 것이 큰 은혜와 보호임을 알게 될 때, 고통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며 자유롭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에서 벗어나 예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창조주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것이 실제로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갖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창조주의 주재에 대해 진정으로 인정하지도, 순종하지도 못한다. 창조주의 섭리를 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창조주가 사람의 운명과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창조주의 권세에 진정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운명과 창조주의 권능에 극력 대항하여 초래되는 고통을 떨쳐 버리기 또한 쉽지 않다. 물론 참된 자유를 얻기 어렵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이 내적 상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존의 삶의 방식과 인생 목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생활 방식과 인생관, 추구, 소망과 꿈을 정리하고 분석한 다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요구에 대조해 자신의 생존 방식과 인생관 등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에 맞는 것이 있는지, 올바른 인생의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진리를 점점 더 깨닫는 삶을 살고 인성 있게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게 하는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다양한 삶의 목표와 방식을 반복적으로 살피고 자세히 분석해 보면, 창조주가 인류를 창조할 당시의 뜻에 들어맞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창조주의 주재와 보살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고, 사람을 타락시키고 지옥으로 이끄는 함정임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기존의 인생관을 버리고 여러 함정을 멀리하며, 하나님께 삶을 맡겨 배치하고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에 순종하기만을 구하며, 자신의 선택이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쉽게 들릴지 몰라도 어려운 일이다.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기꺼이 협력하고 어떤 이는 꺼린다. 꺼리는 사람들에게는 협력하려는 생각과 의지가 없다. 하나님의 주재를 알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다스리고 배치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들은 벗어나려 하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기를 원치 않는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배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두 손으로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하고, 자신의 힘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권능과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보려고 한다. 사람에게 슬픔이 생기는 것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명예와 이익을 좇기 때문도, 운명에 맞서 안개를 뚫고 힘겹게 나아가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존재를 알고 나서도,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고집하고 수렁 밖으로 발을 빼지 못하며, 강퍅하고 끈질기게 실수를 계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전히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고 완고하게 창조주의 주재와 겨루고 끝까지 대항하면서 전혀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부서지고 피 흘리며 쓰러질 때에야 포기하고 되돌아선다. 이것이 사람의 슬픔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순종을 선택한 자는 현명하고, 도망치려는 자는 우매하고 완고하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