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하나님은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어 인류에게 안정된 생존 환경을 주었다

2018년 08월 16일

…다음으로 말하려는 또 다른 측면은 하나님이 만유를 다스리는 방식이다. 이 방식이란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만든 후 어떻게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주제도 너희에게 조금 벅찰 것이다.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는 일을 사람이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할 수 없다. 사람은 파괴할 줄만 알지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출 줄 모르고, 다스리지도 못한다. 사람에게는 그렇게 큰 권능도, 능력도 없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마찬가지로 인류의 생존과 지대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하려는 모든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생존을 유지시키기 위해, 인류에게 좋은 생존 환경을 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 중요한 일을 하여 인류의 생존을 유지시켜야 한다.

아름다운 풍경,

‘하나님이 만물의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보면 아주 두루뭉술한 주제이지만 일단 사람에게 하나의 개념을 전하고 있다. 바로 만물의 균형을 맞추는 것도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라는 것이다. ‘균형을 맞춘다’는 말의 표면적 의미는 무엇이냐? 우선,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바로 균형을 잃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다들 천칭을 알 것이다. 천칭으로 어떤 물건의 무게를 잴 때 이 물건을 한쪽 접시에 놓고, 다른 쪽 접시에는 추를 놓아 추의 개수에 따라 이 물건의 중량이 결정되는데, 이것을 균형을 맞춘다고 한다. 천칭의 균형을 맞추려면 양쪽의 중량이 반드시 같아야 한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많은 것을 만들었다. 고정된 것, 이동하는 것, 살아 있는 것, 숨 쉬는 것, 숨 쉬지 않는 것, 이 많은 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는 관계가 되는 것이 쉽겠느냐? 분명 여기에는 법칙이 있는데, 아주 복잡하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께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연구하려면 상당히 복잡하다. ‘균형을 맞춘다’는 이 간단한 말을 인류가 연구하고, 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인류의 생물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나아가 역사를 연구하는 그런 인물까지 다 출동한다고 한들 어떤 최종적인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겠느냐? 연구 결과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만물이 너무나 기묘해서 사람은 영원히 측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들 때 만물 간에 법칙을 만들고 서로 다른 생존 방식을 만들어 서로 제약하고, 서로 보완하고, 서로 공급하게 하였다. 각 방식은 단일하고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그래서 사람이 머리와 배운 지식, 자신이 본 현상들을 통해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는 법칙을 증명하거나 연구하려면 알아내기가 매우 어렵고 또 결과를 얻어 내기도 매우 힘들다. 결과를 얻기 어려운데 인류의 머리와 지식으로 하나님이 만든 만물을 다스린다면 인류는 그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류가 만물의 생존 법칙을 모른다면 이런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만물을 관리하고 다스리게 한다면 인류는 쉽게 이 균형을 깨뜨릴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균형이 깨지면 인류의 생존 환경도 파괴되고, 생존 환경의 파괴와 함께 인류의 생존에 위기가 생기고 재앙이 따라올 것이다. 인류가 재앙 속에 살 때 인류의 앞날은 어떠하겠느냐? 가늠하기 어려운 예측 불허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겠느냐? 우선, 지구상에 어떤 곳은 일 년 내내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지만, 어떤 곳은 겨울이 없고 사계절이 모두 봄과 같아서 얼음이나 눈을 볼 수 없다. 이것이 하나의 방식이고, 이는 큰 기후적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산은 보기에 식물이 무성하다. 각종 식물로 뒤덮인 땅에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심지어 사람이 그 안을 걸으면 해를 못 볼 정도다. 반면, 저 산은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황량한 산봉우리만 겹겹이 쌓여 있다. 겉보기에는 둘 다 흙이 쌓여 생긴 산인데, 한쪽은 삼림이 무성하고, 다른 한쪽은 풀 한 포기 없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방식이다. 세 번째로, 이쪽은 푸른 초원이 한없이 펼쳐져 있지만, 저쪽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 생물은커녕 수원도 안 보이고, 모래바람만 세차게 불고 있다. 네 번째로, 이쪽은 해수로 뒤덮여 있고 수역도 넓은데, 저쪽은 샘 하나 보기 힘들다. 다섯 번째로, 이쪽 땅은 늘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고, 공기도 촉촉하지만, 저쪽 땅은 늘 뜨거운 태양이 떠 있고, 비 한 방울 보기가 아주 힘들다. 여섯 번째로, 이쪽은 공기가 희박하고 호흡이 곤란한 고원이지만, 저쪽은 각종 철새가 서식하는 늪지와 습지다. 이것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기후 혹은 서로 다른 지리적 환경에 상응하는 기후나 환경이다. 즉, 하나님은 큰 환경의 틀에서 기후부터 지리적 환경에 이르기까지, 토양의 다양한 성분부터 수원의 양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기본적인 생존 환경을 균형 있게 맞추어 사람이 사는 곳의 공기, 온도, 습도의 균형을 이루어 낸다. 이런 대조적인 지리 환경이 있기에 인류에게 균형 잡힌 공기가 있고, 균형 잡힌 계절별 온도와 습도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류가 예전과 다름없이 이런 생존 환경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선 큰 환경에서의 균형은 서로 다른 지리적 위치와 형세, 그리고 서로 다른 기후의 변천으로 상호 제약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균형을 이루게 하고, 인류가 필요로 하는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것은 큰 환경에서 한 이야기다.

세부적인 부분을 보도록 하자. 어떻게 식물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균형 잡힌 생존 환경 속에서 식물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생존해 나가도록 할 수 있을까? 바로 각종 식물의 수명과 생장 속도와 번식 속도를 주관함으로써 식물의 생존 환경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가령 작은 풀은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꽃을 피우며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 그 풀은 죽는다. 이듬해가 되면 작은 풀의 씨앗이 이어서 싹을 틔우며 같은 규칙을 지속한다. 작은 풀의 수명은 무척 짧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은 봄, 여름, 가을이라는 시간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각종 나무도 각기 수명이 다르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주기도 각기 다르다. 어떤 나무는 30에서 50년을 살다가 죽는다. 수명이 30년에서 50년인 것이다. 그 나무의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 그 열매가 다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렇게 또 30년에서 50년을 산다. 나무에게는 이런 주기가 있다. 늙은 나무가 죽으면 어린 나무가 자란다. 그래서 늘 숲속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무들도 정상적인 순환과 생사의 과정이 있다. 어떤 나무는 천 년 이상 살고 심지어는 3천 년을 살기도 한다. 어떤 종류의 식물이든 그것의 수명이 몇 년이든 결국 하나님은 그것의 수명과 번식 능력, 속도, 수량, 빈도에 따라 식물의 균형을 주관한다. 그렇게 해서 식물들이 작은 풀에서 큰 나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생장하고 번식하면서 균형 잡힌 생태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한다. 그래서 지구에서 네가 보는 숲속의 나무든, 작은 풀이든 그것들은 자신의 규칙대로 끊임없이 번식하고 생장하고 있다. 사람의 어떠한 도움도 필요치 않고, 사람이 따로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다. 이런 균형이 있었기에 식물은 그들만의 생존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알맞은 생존 환경이 주어졌기에 그렇게 많은 숲과 초원이 지구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을 양육하고 또 대대로 숲과 초원에서 서식하는 각종 생물을 양육한다. 날짐승과 길짐승과 곤충에서 각종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한편 하나님은 각종 동물들의 균형도 주관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떻게 주관할까? 식물과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번식 능력과 수와 빈도에 따라, 동물 중에서 맡은 역할에 따라 균형을 주관해 동물들의 수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사자는 얼룩말을 잡아먹는다. 그런데 사자의 수가 얼룩말의 수를 초과한다면 얼룩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얼룩말은 멸종될 것이다. 만일 얼룩말의 번식 수가 사자보다 한참 부족하다면 얼룩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역시 멸종될 것이다. 그래서 얼룩말의 수는 반드시 사자의 수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 얼룩말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사자의 생존을 위해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각 얼룩말은 얼룩말 무리의 한 구성원이지만 그와 동시에 사자 입에 들어갈 먹잇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자의 번식 속도가 영원히 얼룩말을 앞설 수 없기 때문에 사자의 수도 영원히 얼룩말의 수를 초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래야만 사자의 먹잇감이 보장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자는 얼룩말의 천적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같은 땅에서 한가롭게 서식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얼룩말은 사자의 사냥감이 되었다는 이유로 수가 감소하거나 멸종하지 않는다. 사자도 자신의 ‘왕위’로 인해 가족 구성원의 수를 확대하지 않는다. 이런 균형은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각종 동물 간에도 균형의 법칙을 정해 그런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는 사람들이 종종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룩말의 천적은 사자뿐일까? 그렇지 않다. 악어도 얼룩말을 먹는다. 악어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장면도 무척 끔찍하다. 얼룩말은 참으로 미약한 동물로 보인다. 얼룩말에게는 사자와 같은 포악한 성질도 없다. 사자처럼 강력한 적을 만나면 얼룩말은 그저 달아날 줄밖에 모르고 심지어 반항조차 못 한다. 사자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면 사자에게 잡혀 먹힐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은 동물 세계에서 종종 목격되는 장면이다. 너희는 이런 장면을 봤을 때 어떤 느낌이 들지 않았느냐? 얼룩말이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았느냐? 사자가 가증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느냐? 얼룩말은 생김새가 참 보기 좋다. 그런데 사자는 호시탐탐 얼룩말을 노린다. 얼룩말은 멍청하게 멀리 떠나지도 않는다. 그늘 밑에서 더위를 식히며 자신을 노리고 있는 사자를 보고 있는 얼룩말은 그 사자가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얼룩말은 그 땅을 떠나지 못한다. 기이한 일이다. 이 기이한 일 속에 하나님이 정한 운명이 있고 하나님의 주재가 있다. 너는 불쌍한 얼룩말을 보면서도 구해 줄 수 없고 가증스러운 사자를 보면서도 사자를 멸할 수 없다. 얼룩말은 하나님이 사자를 위해 예비한 먹이인 것이다. 하지만 사자가 아무리 얼룩말을 잡아먹어도 얼룩말은 멸종하지 않는다. 사자는 번식 수가 아주 적고 번식도 매우 느리다. 그래서 사자가 얼룩말을 아무리 잡아먹어도 사자의 수는 얼룩말을 앞지르지 않는다. 바로 이렇게 균형이 맞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균형을 유지시키는 목적은 무엇일까? 이는 사람의 생존 환경과도 관련이 있고 사람의 생존과도 관련이 있다. 만일 얼룩말이나 사슴과 같은 다른 모든 사자의 사냥감들의 번식이 너무 느리고 사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다면 인류는 어떤 위험에 직면하게 될까? 사람이 기르는 닭, 오리, 거위, 개가 우선적으로 사자의 사냥감이 된다. 이것들은 집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사자의 먹이로 충분할까? 어떤 집에서 돼지 두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사자가 산에서 내려와 그 돼지 두 마리를 잡아먹었다고 가정해 보자. 사자는 그것을 다 먹고 나서 떠날까? 사자는 ‘산에 먹을 것도 없어. 여기에 있자. 이 집에 사람도 몇 명 있으니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자는 사람이 문을 나서기를 기다렸다가 달려들어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인류에게는 어떠한 반항할 힘도 없다.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니냐?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면 어떨까? 참극이다. 이런 참극은 하나님이 정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재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것도 아니다. 인류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기에 만물의 균형은 인류의 생존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마땅히 갖춰야 할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식물과 동물, 산천과 호수로 인류에게 아주 정상적인 생태 환경을 예비해 주었다. 인류에게 이런 균형 잡힌 생태 환경이 있어야만 인류는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다. 만일 거목이나 작은 풀의 번식 능력이 떨어지고 번식 속도가 무척 느리다면 토양은 수분을 잃게 되지 않겠느냐? 수분을 잃은 토양은 병에 걸리지 않겠느냐? 식생과 수분을 잃은 토양은 빠르게 유실된다. 그러면서 아주 빨리 사막화가 이루어진다. 토양이 변해 버리면 인류의 생존 환경도 파괴되고 동시에 재난이 도래한다. 이런 생태 균형이 없어지고 이런 생태 환경이 사라지면 인류는 만물의 불균형으로 인해 종종 재난의 습격을 받게 된다. 가령 환경의 불균형으로 인해 개구리의 생태 환경이 파괴되어 개구리가 한곳에 모여 들게 되면 수가 급증할 수도 있다. 심지어 수많은 개구리가 도시의 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많은 수의 개구리가 사람의 생존 환경을 점거하면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할까? 재난이라고 한다. 왜 재난이라고 할까? 인류에게 무척 유익한 작은 동물이 자신에게 적합한 곳에 있으면 인류에게 유익하고 인류의 생존 환경 균형도 보호하고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일단 재난이 되면 그것은 사람의 생활 질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개구리 몸에 지니고 있는 것들이나 여러 가지 성분이 사람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심지어 인체의 어떤 기관에 침입할 수도 있다. 이는 재난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도 인류는 대량의 메뚜기 떼가 출몰하는 상황을 종종 겪었다. 이것도 재난이 아니냐? 아주 무서운 재난이다. 사람이 비행기와 대포,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아무리 큰 능력이 있어도 메뚜기 떼의 습격에 인류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그 상황에서 대포를 사용하여 쫓아 버릴 수 있을까? 기관총을 사용하여 쫓아 버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농약을 살포해 쫓아낼 수 있을까? 그것도 어렵다. 이 조그마한 메뚜기들이 왜 왔을까? 오로지 농작물과 양식을 먹으러 온 것이다. 그래서 메뚜기 떼가 지나간 곳에는 농작물이 전부 사라진다. 그렇게 농사짓는 사람의 한 해 먹을 양식이 메뚜기의 습격에 눈 깜짝할 새 전부 사라져 버릴 수 있다. 이처럼 메뚜기의 습격은 인류에게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재난이 되기까지 한다. 대량의 메뚜기 떼가 출몰하는 것이 재난이라면 쥐는 어떨까? 각종 매가 쥐를 잡아먹지 않는다면 쥐의 번식 속도는 매우 빨라질 것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말이다. 쥐라는 놈이 범람하면 인류는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 부딪히게 될까? (전염병입니다.) 전염병뿐일까? 쥐는 무엇이든 다 마구 갉아 버린다. 나무도 갉아 버린다. 한 집 안에 쥐가 두 마리 있다면 그 집 사람들 모두 불편을 겪는다. 때로 쥐는 기름을 훔쳐 먹기도 하고 양식을 갉아먹기도 한다. 쥐는 자기가 먹지 못하는 것도 갉아서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옷, 신발, 가구 등 무엇이든 다 갉아 버린다. 어떤 때는 그릇장에 기어올라 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그 그릇을 사용할 수 있겠느냐? 소독을 했다 하더라도 속으로 께름칙해서 그 그릇을 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쥐가 사람에게 주는 고민거리다. 조그마한 쥐일지라도 사람은 어찌할 방법이 없고 분을 참아야 한다. 그러니 쥐가 무리를 이루면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두 마리 쥐라도 사람에게 큰 방해가 된다. 그것이 재난이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작디작은 개미일지라도 재난이 된다면 인류에게 가하는 해 역시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개미가 집을 갉아 집이 무너진 사례도 많다. 이처럼 개미의 힘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개미가 말을 잡아먹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커다란 말도 개미 떼가 달라붙어 휩쓸고 가면 그 말은 뼈대만 남는다. 무서운 일이 아니냐? 말을 탔던 사람이 그 장면을 보고 어디로 도망쳤을까? 옆에 호수가 있는 것을 보고 거기로 뛰어들어 호수 건너편으로 헤엄쳐 도망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 장면을 목격한 뒤로 작은 개미가 그렇게 큰 위력을 가지고 있고 하마터면 자신도 먹힐 뻔했다는 사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말이 없었다면 개미가 먼저 먹어 치울 대상은 분명 그 사람이었을 것이다. 물에 가로막히고 개미가 곧바로 다리를 놓고 건너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먹어 치우지 못한 것이다. 만일 물이 없었다면 말과 사람은 함께 개미에게 먹혔을 것이다. 이처럼 개미의 위력도 무시할 수 없다. 각종 조류가 재난이 된다면 두려운 일이 아니냐? (두렵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동물이나 생물이든 일단 균형을 잃으면 불규칙적이고 법칙이 없는 테두리 안에서 자라고 번식하면서 인류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다주게 된다. 인류의 생존과 생활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재난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심지어 인류에게 치명적인 재난을 당하게 하거나 멸망의 운명을 맞게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할 때 여러 가지 방식과 형식으로 만물의 균형을 이루었고, 산천과 호수의 생존 환경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식물의 생존 상태의 균형을 이루었다. 또한 각종 동물과 조류, 곤충의 생존 상태의 균형도 이루었다. 그 목적은 각종 생물이 하나님이 정한 법칙 속에서 번식하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물은 이런 법칙을 벗어날 수 없고 깨뜨릴 수도 없다. 이런 기본적인 환경 속에서 인류는 비로소 안전하게 대대로 번성할 수 있다. 어떤 생물이든 하나님이 정한 수와 범위를 초과하고 하나님이 주재하는 생장 속도와 생장 빈도와 생장 수를 초과하면 인류의 생존 환경은 각기 다른 정도로 파괴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도 위협을 받게 된다. 한 종의 생물의 수가 급증하면 그 생물은 인류의 식량을 빼앗고 인류의 수원을 파괴하며 인류의 삶의 터전도 파괴하게 된다. 그러면 인류의 번성과 생존 상황이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은 만물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하다. 만일 쥐, 개미, 메뚜기, 개구리 등 각종 동물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 그에 따라 그들의 물 섭취량도 증가한다. 그들의 물 섭취량이 증가하면 고정된 식수원과 수역 범위 안에서 사람의 식수량과 수원은 감소하게 되고 인류에게 물이 부족하게 된다. 인류의 식수가 파괴되고 오염된다. 또한 급증하는 각종 동물로 인해 식수난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열악한 생존 환경에서 인류의 생존은 엄청난 위협을 받게 된다. 만일 한 종의 생물이나 몇 종의 생물이 정해진 수를 초과하게 되면 인류가 생존하는 공간의 공기, 온도, 습도에서 공기의 함량까지 모두 각기 다른 해독을 입고 파괴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태에서 인류의 생존과 운명은 당연히 그런 생태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런 균형을 잃으면 인류가 호흡하는 공기는 파괴되고 인류가 마시는 물은 오염되며 인류에게 필요한 온도도 각기 다른 정도로 변화를 맞고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인류 고유의 생존 환경은 엄청난 영향과 도전을 받게 된다. 인류의 기본적인 생존 환경이 파괴된 그런 상황에서 인류의 운명과 앞날은 어떻게 되겠느냐?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은 만물이 인류를 위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알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만물이 각기 어떤 역할을 하고,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인류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지도 알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계산을 하면서 자신이 창조한 만물의 여러 면을 주관하고 있다. 그래서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무척 중요하고 매우 필요하다. 그러므로 네가 만물 속의 생태 현상을 보았든, 만물 속의 자연법칙을 보았든 너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의 필요성에 대해 더 이상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또한 무지한 말로 하나님이 만물을 마련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류에게 공급하는 것을 멋대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의 법칙에 대해서도 멋대로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기본적인 생존 환경 ― 기류

다섯 번째는 무엇일까? 다섯 번째는 모든 사람의 하루하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도 아주 관련이 크다. 사람의 육체가 이 물질세계에서 생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바로 기류이다. ‘기류’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무엇을 기류라고 하느냐? 공기의 흐름을 기류라고 할 수 있다. 기류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람이고 기체가 이동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기류는 주로 무엇을 가리킬까? 내가 설명하면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지구의 산과 강과 바다를 비롯하여 만물은 모두 회전하며, 회전할 때는 속도가 있다. 사람이 지구의 회전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지구는 여전히 회전하고 있다. 지구의 회전은 무엇을 일으키느냐? 달릴 때 귓가에 바람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지지 않느냐? 사람이 달릴 때도 바람이 생기는데, 하물며 지구가 회전할 때 어떻게 바람의 힘이 없을 수 있겠느냐? 지구와 만물은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고 운동하며 지구상의 만물은 끊임없이 번식하고 발전한다. 따라서 일정한 속도에서는 자연스럽게 기류가 발생하는데, 그런 기류를 말한다. 이 기류가 어느 정도 사람의 몸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통상적으로 태풍이 기껏해야 얼마나 강하겠느냐? 그런데도 사람들은 똑바로 서 있지 못한다. 또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걸을 때면 걸음을 내딛기조차 힘겨워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바람이 너무 강하니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뭔가를 의지해 잡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류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중 하나이다. 만약 지구 전체가 평지라면, 사람의 몸은 지구가 회전하고 만물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기류를 절대 견딜 수 없고 대응하기도 힘들다. 그런 상태에서 기류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 즉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양한 지리적 환경을 조성하여 기류가 약화되도록 하였고 기류의 방향, 속도, 강도를 조절하여 기류 문제를 해결하였다. 따라서 사람은 산천, 산맥, 평원, 구릉, 분지, 협곡, 고원, 하천 등의 다양한 지리적 환경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지리적 환경을 통해 기류의 속도, 방향, 강도를 변화시키고 그런 방식으로 약화시키거나 처리하여 적절한 풍속, 풍향, 풍력을 만들어 주었고, 이로써 사람에게 정상적인 생존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으냐? (필요합니다.) 이는 사람이 보기에 어려운 일 같지만 하나님께는 간단한 일이다. 하나님의 눈이 늘 만물을 감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알맞은 기류와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하나님께 매우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한 이 환경 속의 만물 중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고 모두 존재의 가치가 있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사탄과 타락된 인류는 이 원리를 모르고 끊임없이 개발하고 파괴한다. 산천을 평지로 바꾸고, 협곡을 평평하게 메우고, 평원에 고층 건물을 지어 콘크리트 숲을 만들려는 망상에 빠져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예비한 최적화된 환경에서 사람이 매일 행복하게 생활하고 성장하길 바라기 때문에 인류의 생존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전혀 소홀하지 않았다. 온도에서 공기, 소리에서 빛까지 하나님은 정밀하게 배치하여 인류의 생존 환경과 사람의 몸이 어떤 자연 조건 속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번식하고 또 만물과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에게, 더 나아가 인류에게 공급하는 모든 것이다.

두 번째 관문, 성장

한 사람이 어떤 가정 환경에서 어떤 가정 교육을 받는지는 그 사람이 태어난 가정에 의해 좌우되며, 이는 성장 배경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일생에서 두 번째로 거치게 되는 중요한 관문이다. 이 관문 역시 사람이 선택할 수 없으며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

욥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2)

욥의 이성 욥은 실제 체험이 있었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이성적인 선택은 그가 평소에 추구했던 것과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했기 때문에 만물은 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그 믿음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기를 원했고, 또 순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더 진실하게 경외할 수 있었으며, 그 경외심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실제적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온전해진 것이다. 그의 온전함은 그를 지혜롭게 만들었으며, 그를 가장 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성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문자적 해석은 이성과 생각이 논리에 맞아 터무니없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적절한 언행과 판단, 적절한 규범을 가진 도덕적 기준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욥의 ‘이성적’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석될 말이 아니다. 여기서 욥이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인성과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보인 행동과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재를 믿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할 수도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욥은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한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을 통해, 욥은 자신에게 임한 일을 더욱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하며 정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것들을 더욱 정확하고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즉, 그의 언행과 일 처리 원칙과 방침은 맹목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았고, 매우 규범적이고 명확하며 아주 구체적이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임하든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았고, 각종 복잡한 사건의 관계들을 어떻게 균형 잡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알았다. 또한, 마땅히 지켜야 할 길을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할지도 알았으며, 더욱이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줄 때와 거두어 갈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이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욥은 육체에 극심한 고통이 닥치고, 가족과 친구들의 권고가 임하고,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실제적인 행동으로 또다시 자신의 진실한 면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욥의 진정한 모습: 진실하고 순박하며 위선적이지 않음 욥기 2장 7~8절을 보자.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이것은 욥이 몸에 악창이 난 후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때, 욥은 재 가운데 앉아 몸의 통증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치료해 주는 이가 없었고, 그의 육체적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이도 없었다. 그는 혼자서 기와 조각으로 악창이 난 상처를 긁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것은 욥이 고통받던 기간 중 한 장면에 불과해 욥의 인성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욥은 이 기간에 그 어떤 말로도 이때의 심정과 생각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의 행동과 반응은 그의 인성을 진정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앞의 1장의 기록에서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라는 구절을 보았다. 그리고 2장의 이 구절에서는 이 동방 사람 중 가장 큰 자가 뜻밖에도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앞뒤의 2가지 묘사는 아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느냐? 이 대비를 통해, 우리는 욥의 본모습을 보게 되었다. 욥은 신분과 지위가 대단했지만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소중히 여기지도 않고,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보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자신의 행동이 자기 신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위의 복을 탐하지 않았고, 지위와 신분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후광을 즐기지도 않았다. 욥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만 신경 썼을 뿐이다. 욥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욥의 본질이었다. 그는 명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명리를 위해 살지 않았다. 그는 진실하고 순박하며 위선적이지 않았다. 애증이 분명한 욥 욥이 아내와 나눈 대화에서 욥의 또 다른 면의 인성이 모두에게 보여졌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9~10). 욥의 아내는 욥이 그런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고 욥에게 권고함으로써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호의’는 욥의 칭찬을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욥을 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순종을 부인하는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욥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을 용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은 어떻겠느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모욕하는 말을 내뱉는 것을 보고 그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느냐? 그래서 욥은 아내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한 것이다. 욥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는 분노와 증오가 담겨 있었고, 책망과 질책도 담겨 있었다. 이것은 애증이 분명한 욥의 인성의 자연스런 발현이자, 그의 정직한 인성이 사실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욥은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의감이 있었기에 사악한 풍조와 추세를 증오했으며, 그릇된 사설과 황당무계하고 터무니없는 말들을 증오하고 정죄하고 밀어냈다. 또한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자신의 정확한 원칙과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다. 욥의 선함과 성실함 욥의 다양한 행동에서 욥의 인성을 볼 수 있다면,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일에서는 또 욥의 어떤 인성을 볼 수 있을까? 이것이 다음으로 내가 이야기할 주제이다. 앞에서 나는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원인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그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만일 욥이 마음이 강퍅하고 사랑도 없고, 아주 냉혹하고 무정하며, 인간성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림으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증오했겠느냐? 다시 말해, 욥의 마음이 강퍅하고 인간성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으로 인해 마음 아파했겠느냐?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마음 아파한 것 때문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겠느냐?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답이다. 욥은 마음씨가 착했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기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욥은 마음이 착했기에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을 느끼게 되어 더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기에 자신의 생일을 증오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모든 행동은 사람이 배울 만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일만큼은 사람들에게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들거나 다양한 평가를 내놓게 만들었다. 사실, 욥의 이 행동이야말로 욥의 인성과 본질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의 인성과 본질에는 숨기거나 과장된 것이 없었으며, 사람에 의해 가공된 것도 없었다. 그의 이 행동들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선함과 성실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넘치는 샘물같이 맑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욥이란 사람의 면면을 알고 난 후에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인성과 본질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하나님이 ‘순전하고 정직하다’라고 한 말씀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고 진일보한 실제적인 앎과 깨달음이 있으리라 믿는다. 또 그러한 앎과 깨달음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홍수 후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1~6)

사탄이 욥을 처음으로 시험하다(가축은 약탈당하고, 자녀는 화를 입다)

1)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2) 2) 사탄의 대답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9~11) 하나님이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한 이유는 욥의 믿음을 완전케 하기 위함이었다 욥기 1장 8절은 성경에 처음으로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였느냐? 원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욥에 대해 평가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했다. 하나님과 사탄의 이 대화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해서 욥을 시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바로 욥을 사탄에게 넘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욥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과 평가가 완전히 정확함을 실증할 수 있고, 욥의 증거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수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경외심을 완전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이 하나님 앞에 왔을 때, 하나님은 즉시, 단도직입적으로 사탄에게 질문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의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들어 있다. 사탄이 곳곳을 떠돌며 하나님의 종 욥을 늘 감시하고, 늘 시험하고 공격하며,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무너뜨려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경외심이 굳게 서지 못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어떻게든 욥을 해할 기회를 노리는 사탄이 욥에게 하나님을 배신하게 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그를 빼앗아 가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욥의 마음을 감찰하는 하나님은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보았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도 보았다. 하나님은 질문의 방식으로 사탄에게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여서, 절대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따를 리가 없음을 알려 준 것이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들은 사탄은 점점 더 화가 났으며 그럴수록 욥을 빼앗아 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렬해졌다. 사탄은 사람이 ‘순전하고 정직할’ 수 있다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도 전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탄은 순전하고 정직한 자,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이는 욥기 1장 9~11절에 기록된 바와 같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악독한 본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사탄이 이미 오래전부터 욥을 해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다시 한번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사탄이 순순히 따르도록 ― 욥을 공격하고 시험하려던 본래의 진면목을 드러내도록 ― 하고자 했다. 즉, 하나님은 의식적으로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사탄이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모습’으로 인해 증오하고 분노하여 욥을 공격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의 모습을 통해 사탄을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사탄이 철저히 수치를 당하고 실패하도록 하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이 더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임을 의심하거나 참소하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시련과 사탄으로부터 온 시험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는 시련을 감당할 수 있고,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는 욥이었다. 이 대화를 끝으로, 사탄은 허락을 받고 욥을 시험하였다. 이것이 사탄의 첫 번째 공격이었는데, 그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욥의 재산이었다. 사탄이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욥을 참소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욥의 소유물을 빼앗아 가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탄과 대화한 의도였다. 다만 하나님은 사탄에게 한 가지 요구를 했는데, 욥기 1장 12절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할 때 욥을 사탄에게 넘기면서 제시한 조건이었다. 즉, 하나님은 이렇게 선을 그음으로써 사탄에게 욥을 해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자신 앞에서 보여 준 욥의 정직함과 순전함은 검증을 통과할 수 있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에게 범위를 제한하였다. 욥의 재산은 빼앗아 가도 되지만, 그의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이때, 하나님은 욥을 완전히 사탄의 손에 넘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시험하든 상관하지 않았지만, 욥 본인을 해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즉,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사람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지, 사탄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사탄은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가서 각종 수단을 다 동원해 욥을 시험하였다. 욥은 바로 가득하던 소와 양을 잃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준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이렇게 욥에게 임했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욥이 받았던 시험의 유래를 알고 있지만, 그 ‘당사자’인 욥은 그 일을 알고 있었겠느냐? 욥은 평범한 사람으로, 배후에 있었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단지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순전하고 정직해서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자신에게 임했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이다. 그는 영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으며, 그 시련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욥은 어떤 일이 임하더라도 항상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을 대하는 욥의 태도와 반응을 하나님은 아주 분명하게 보았다. 하나님이 본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을 보았다. 시험을 받기 전부터 시험을 받을 때까지, 욥의 마음은 줄곧 하나님께 열려 있었으며, 하나님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버리지도, 등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있어 가장 기쁘고 위안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어서 욥이 어떤 시험들을 받았는지, 또 그 시련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자. 계속 성경을 읽어 보자. 3) 욥의 반응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욥 1:20~21) 욥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자발적으로 돌려 드린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했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이 말씀이 끝나자 사탄은 물러갔고, 곧이어 욥은 갑작스러운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먼저 소와 나귀를 빼앗기고, 종들이 살해당했다. 이어서 양 떼들과 종들이 불에 타 죽었다. 그 후에 낙타를 약탈당하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자녀들도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욥이 처음으로 받은 시험이었고 이러한 일련의 공격에 그는 고통을 받았다. 이 공격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욥의 재산과 자녀들만 목표로 삼았으며, 욥 본인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욥은 거액의 재산을 가진 엄청난 부자에서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충격은 그 어떤 사람도 감당할 수 없고, 정면으로 직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욥은 비범한 일면을 보여 주었다. 성경에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고 난 후에 보인 첫 번째 반응이었다. 우선, 욥은 놀라지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으며, 분노와 증오는 더더욱 없었다. 여기에서 욥이 마음속으로 이 모든 재앙이 결코 우연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비롯된 일이 아니며, 보응이나 징벌이 임한 것도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자신에게 임한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재산과 자녀를 거두어 간 것임을 확신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욥의 마음은 매우 차분했으며, 정신도 매우 맑았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매우 이성적이고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닥친 재앙에 대해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보통 때와 다른 냉정함을 보여 주었다. 즉,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던 것이다. ‘겉옷을 찢었다’는 것은 그가 벌거숭이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의미하고,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는 것은 그가 벌거숭이로 세상에 왔고 지금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갓난아기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욥이 자신에게 닥친 그 모든 일을 대한 태도는 그 어떤 피조물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믿음의 차원을 넘어섰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와 순종이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린 복에 감사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간 것에 대해서도 감사했으며, 더욱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도 자발적으로 돌려 드릴 수 있었다. 욥이 보여 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은 인류의 모범이다.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사람들이 갖춰야 할 최고 수준의 인성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거두어 가도 전혀 원망하는 바가 없었으며, 게다가 땅에 엎드려 하나님이 자신의 육체를 당장 거두어 가더라도 그 어떤 원망도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욥의 이러한 모든 반응은 그의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즉, 욥은 순수하고 정직하며 선하기 때문에 자신이 체험하고 느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굳게 믿으며 흔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욥은 하나님의 인도와 만물을 통해 보게 된 하나님의 행사에 따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생각과 행실, 태도와 일 처리 원칙을 자신에게 요구하고 규범화했다. 오랜 시간 그렇게 하면서 욥은 자신의 체험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하고 실제적인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악에서 떠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욥이 고수한 ‘순전함’의 유래이다. 욥은 정직하고 단순하며 착한 인성을 갖췄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악에서 떠난 실제 체험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욥은 사탄의 이 같은 공격 속에서도 굳게 설 수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만족스러운 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의 시험에서 욥은 아주 ‘단순’하게 반응했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도 욥이 해냈던 그 ‘단순’한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욥이 보여 준 그 모습도 갖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지금 욥의 그 ‘단순’한 반응을 보고, 오늘날 말로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표명한 ‘절대 순종, 죽기까지 충성’이라는 구호나 결심을 그것에 비교해 보면, 너희는 매우 부끄럽지 않으냐? 너는 성경에 기록된 욥의 집에 닥친 이 모든 상황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이 있었으냐? 많은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 매우 놀라지 않았으냐? 욥이 맞닥뜨린 시련은 ‘끔찍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으냐? 다시 말해서, 글로 묘사된 내용만 봐도 욥에게 시련이 임했을 때의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실제 현장은 어떠했겠느냐? 이로써 욥에게 임한 것은 ‘연습’이 아니라 ‘실제 총탄을 든 정규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임한 그 시련은 도대체 누가 직접 한 것이냐? 물론 사탄이 한 것이다. 사탄이 직접 한 것은 맞으나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어떤 방식으로 욥을 시험하라고 했느냐? 말씀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조건을 하나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욥에게 그런 시험이 임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욥에게 닥친 시험을 통해 사탄의 사악함과 추함과 악독함, 그리고 사탄이 사람을 증오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여기에서 이번 시험의 잔인함 정도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해치는 사탄의 악독한 본성과 추한 몰골이 이때 낱낱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사탄은 이러한 기회, 하나님이 허락한 이러한 기회를 빌미로, 욥에게 가차 없이 미친 듯이 해를 가했다. 그 해치는 수단과 잔인함의 정도는 지금의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하고 전혀 견뎌 내지도 못할 정도였다. 욥이 사탄의 시험을 당하며 그 시험 속에서 굳게 섰다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준 시련 속에서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기 위해 사탄과 대결을 벌였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대결에서 욥은 가득했던 소와 양을 잃었고 재산 전부와 자녀까지 잃었다. 하지만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버리지 않았다. 즉, 그는 사탄과의 대결에서 재산과 자녀를 잃을지언정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지키고, 사람됨의 근본을 지키려고 하였다. 성경에는 욥이 재산을 잃는 전 과정과 욥의 반응과 태도가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간단명료한 묘사에 욥이 그 시험에 아주 ‘쉽게’ 직면했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실제 장면과 사탄의 악독한 본성을 결부시켜 보면, 이 몇 마디로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 장면은 이보다 훨씬 더 처참하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인류를 대하고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을 대하는 잔인함과 증오의 정도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몸에 손대지 말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사탄은 분명 사정없이 욥을 사지로 몰았을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 하나님 눈의 의인이나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다는 것은 사탄을 멀리하고 저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한 이 기회를 이용해서 모든 분노와 증오를 사정없이 욥에게 쏟은 것이다. 이것으로 욥이 육체와 마음, 외적 내적으로 받은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당시의 장면을 볼 수 없고, 그저 성경의 기록을 통해 욥이 고통받았을 당시의 심정을 미미하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욥이 지킨 순전함에 사탄은 수치를 당하고 황급히 도망갔다 욥이 이러한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였을까? 하나님은 감찰하고 살펴보았으며, 또한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감찰하고 살펴보면서 심정이 어땠을까? 당연히 몹시 마음 아팠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파서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라고 허락한 것을 후회했을까?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탄에게 하나님 앞에 있는 욥이 의롭다는 것을 확인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또한, 사탄에게 그것의 사악함과 비루함을 드러낼 기회를 준 것이다. 더욱이 욥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사탄, 나아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궁극적으로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틀림없이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느냐? 사실, 욥이 사탄을 이긴 것이 아니냐? 여기에 욥이 한 가장 멋진 말이 있다. 그 말이 바로 욥이 사탄을 이겼다는 증거이다. 그가 말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욥의 태도이다. 이어서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말했다. 욥에게서 나온 이런 말들로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며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칭찬은 틀리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칭찬한 그 사람이 의인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증언이다. 바로 이처럼 평범한 말 한 마디에 사탄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수치를 당해 황급히 도망가게 되었으며, 속수무책이 되었다. 욥의 이 한 마디에서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의 행사가 얼마나 놀랍고 위력이 있는지 보게 되었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의 길이 권세 잡고 있는 사람의 비범한 매력도 보게 되었고, 보잘것없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기 위해 발산되는 강력한 생명력도 보게 되었다. 첫 번째 대결에서 사탄은 이렇게 패했다. 사탄은 이 사건으로 ‘시야를 넓히게’ 되었지만 욥에 대해 손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사탄의 악독한 본성 역시 이로 인해 변하지는 않았다. 사탄은 계속해서 욥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또 하나님 앞에 오게 되었다. 계속해서 욥이 두 번째 시험을 받을 때의 구절들을 보자.

산상수훈 ― 예수의 비유 ― 계명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인류는 서로 다른 생활 방식으로 인해 경계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의 경계를 정했으며, 만물 속에서 여러 가지 생물을 양육하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다양한 생존 방식도 예비하였다. 따라서 네가 본 인류의 생존 방식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생존 환경도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예비한 여러 가지 먹거리와 수원(水源)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먹거리와 수원은 사람의 육체 생명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곡식을 먹고 사는 것은 아니다. 여러 지리적 환경이 다르고 지리적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인류도 서로 다른 생존 방식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생존 방식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류가 경작을 위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농작물을 경작하여 먹거리를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야기할 세 번째 내용, 즉 인류는 서로 다른 생활 방식으로 인해 경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의 생활 방식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리고 인류 먹거리의 근원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주로 다음의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방식이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그렇지? 너희들은 모두 현대인이기에 어떻게 사냥을 하는지, 어떻게 총을 잡는지 모를 것이다. 너희들은 모두 땅에서 생산한 양식을 먹거리의 근원으로 삼고 있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무엇을 먹느냐? (야생 동물로 만든 음식을 먹습니다.) 이들은 숲속의 날짐승과 길짐승을 먹는다. ‘야생 동물 요리’라는 말은 현대어로, 사냥꾼들은 그것을 야생 동물 요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먹거리이자 일용할 양식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슴 한 마리를 잡았다고 하자. 그 사람이 사슴을 잡은 것은 농민이 땅에서 식량을 얻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농민은 땅에서 식량을 얻고, 이 식량을 보면 기쁘고 든든하다. 먹을 것이 생겨 가족이 배를 곯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놓이고 만족감이 드는 것이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도 포획물을 보면 마음이 든든하고 만족감이 생긴다. 왜냐하면 밥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며, 다음 끼니에 먹을 것이 생겨 배를 곯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 대다수는 농사를 짓지 않고 산속에서 산다. 산속에서는 경작지를 얻기 힘들다. 그래서 이들은 각종 생물과 수렵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일반인들과 다른 첫 번째 생활 방식이다. 둘째는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방식이다.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이 땅을 경작하느냐? (경작하지 않습니다.) 그럼 이들은 무엇을 할까? 여기 몽골족이 있다면 너희의 유목 생활에 대해 말해 보아라. (주로 소와 양을 방목하고 농사는 짓지 않습니다. 겨울이 되면 소나 양을 잡아먹고, 소고기와 양고기를 주식으로 삼습니다. 또 밀크티를 마십니다. 유목민들은 1년 사계절 늘 바쁘지만 풍족하게 먹습니다. 우유, 유제품, 육류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몽골인은 주로 소고기나 양고기를 먹고, 소젖이나 양젖을 마신다. 그리고 소나 말을 타고 야외에서 바람 맞고 햇빛을 쬐면서 방목한다. 현대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없고, 매일 드넓게 펼쳐진 푸른 하늘과 초원을 볼 수 있다.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초원에서 생활하며, 자신들의 유목 생활을 대대손손 이어 나갈 수 있다. 초원에서 살면 조금 적막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생활도 아주 행복한 것이다. 이러한 생활 방식도 좋다! 셋째는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방식이다. 인류 중에 극히 일부만이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거나 바다를 향해 있는 해변이나 작은 섬에서 살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배에서 산다. 이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다.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는 이들의 먹거리는 어디에서 올까? 여러 가지 생선, 해산물, 해물 요리이다. 그렇겠지? 홍콩이 작은 어촌 마을이었을 당시, 그 작은 어촌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고기잡이로 살아갔다.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고 매일 물고기를 잡았다. 그들의 주식은 여러 종류의 생선, 해산물이며, 가끔 생선을 쌀, 밀가루, 생필품으로 교환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물가에서 사는 사람들의 또 다른 생활 방식이다. 물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으며, 고기잡이를 생활의 근원이자 먹거리의 근원으로 삼는다. 인류는 농사 외에 주로 위의 세 가지 각기 다른 방식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방목과 고기잡이,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몇 부류 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땅을 경작하여 생계를 이어 나간다. 경작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땅이다. 경작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채소든 과일이든, 아니면 곡식이든 간에, 땅에서 먹거리와 생활의 필수품을 얻는 것이다. 인류가 서로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여러 가지 생활 환경을 기본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사냥꾼이 숲을 잃고 날짐승과 길짐승을 잃으면, 그의 생활의 근원이 없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숲을 잃어 날짐승과 길짐승이 없어지면, 이들은 생활의 근원을 잃게 된다. 그러면 이런 민족,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미지수이며, 심지어 사라질 수도 있다. 방목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무엇에 의지하느냐? 이들이 진정으로 의지하는 것은 소와 양이 아니라 소와 양의 생존 환경인 초원이다. 초원이 사라지면 이들은 어디에 가서 소와 양을 방목하겠느냐? 소와 양은 무엇을 먹겠느냐? 소와 양이 없어진다면 유목민들의 생활의 근원이 모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생활의 근원이 없어진 민족은 어떻게 되겠느냐? 이들은 생존하기 힘들어질 것이며, 미래가 없을 것이다. 수원이 없어지고 강과 호수가 모두 말라 버린다면 물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각종 물고기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겠느냐?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물과 물고기에 의지하여 생활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겠느냐? 먹거리가 없어지고 생활의 근원이 없어진다면, 이들 민족은 살아갈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들의 생활과 생존이 문제가 되면, 그런 종족은 지속될 수 없다. 어쩌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멸망할 수 있다. 만약 경작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토지를 잃어버린다면 그들은 각종 식물을 경작할 수 없고, 그 식물로부터 먹거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 양식이 없으면 사람은 굶어 죽지 않겠느냐? 사람이 굶어 죽으면 인류는 다 멸망하지 않겠느냐?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각종 생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 가지 환경과 생태계를 유지하고, 각종 환경에서 생활하는 여러 생물을 보호하는 단 하나의 목적은 바로 여러 부류의 인류를 양육하고, 서로 다른 지리적 환경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양육하기 위함이다. 만물이 자신의 법칙을 잃게 된다면 만물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만약 만물의 법칙을 잃게 된다면 만물 중의 생물은 계속 살아갈 수 없을 것이며, 인류 역시 생존 환경을 잃게 될 것이다. 인류가 이 모든 것을 잃게 되면 이렇게 한 세대 한 세대 번성하며 살아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공급한 만물이 인류를 양육하기 때문이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류를 양육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류를 양육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는 지금까지, 오늘날까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정된 좋은 생존 환경과 규칙적인 생존 환경이 있기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인류와 종족은 각자 규정된 범위 내에서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 범위는 그 누구도 넘을 수 없으며, 이 경계 역시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구분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구분하였을까? 이는 전 인류에게 있어 중요하고 또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생물의 범위를 나누고, 여러 인류의 생존 방식을 정하였으며, 지구상의 서로 다른 종족,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나누고 범위를 정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으로 이야기할 내용이다.

이야기 2. 큰 산과 시냇물, 광풍, 거대한 파도

시냇물이 구불구불 천천히 흘러 산자락에 다다랐다. 큰 산이 시냇물의 길을 막자 시냇물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 줘! 내 앞길을 막았어. 내가 갈 방향을 막았단 말이야.” 산이 물었다. “넌 어디를 가느냐?” 시냇물이 답했다. “내 고향을 찾아갈 거야.” 산이 말했다. “좋다. 내 몸을 넘어가거라!” 하지만 시냇물은 너무 약하고 여려서 아무리 애를 써도 큰 산을 넘어가지 못했고, 결국 산자락을 따라 계속 흐를 수밖에 없었다. 광풍이 모래와 자갈, 잡다한 것들을 휩쓸며 큰 산 앞에 다다라 으르렁댔다. “비켜!” 산이 물었다. “넌 어디를 가느냐?” 광풍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난 저 너머로 갈 테다!” 산이 말했다. “좋다! 네가 내 허리를 꺾을 수 있다면 지나가거라!” 광풍은 울부짖으며 한번 또 한번 도전했다. 하지만 아무리 울부짖고 애를 써도 큰 산의 허리를 꺾을 수 없었다. 광풍은 지쳐 발걸음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산 저편에서는 미풍이 조금씩 불어왔고 사람들은 쾌적감을 느꼈다. 그것은 큰 산이 사람들에게 건네는 안부 인사였다. 해안가에 포말이 넘실거리며 해변의 암석을 가볍게 때리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몰아친 거대한 파도가 포효하며 큰 산 앞에 다다라 외쳤다. “비켜!” 산이 물었다. “넌 어디를 가느냐?” 걸음을 멈출 수 없었던 거대한 파도는 계속해서 포효하며 답했다. “난 내 영토를 넓히고 내 팔을 펼칠 거야.” 산이 말했다. “좋다! 네가 내 머리를 넘어갈 수 있다면 길을 내주겠다.” 거대한 파도는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큰 산을 넘을 수 없었고, 결국 천천히 물러났다. 수천 년 동안 시냇물은 산자락을 따라 계속 그렇게 조용히 흘렀다. 시냇물은 큰 산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 고향에 도착해 강이 되고 바다가 되었다. 큰 산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시냇물은 방향을 잃지 않았다. 시냇물과 큰 산은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했다. 수천 년 동안 광풍은 으르렁대는 습성을 바꾸지 않았다. 광풍은 모래와 자갈을 휩쓸며 늘 큰 산을 ‘방문’했고 큰 산을 위협했지만 산허리를 꺾지는 못했다. 큰 산과 광풍은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했다. 수천 년 동안 거대한 파도 또한 쉰 적이 없었다. 거대한 파도는 땅을 넓히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큰 산을 향해 거듭 포효했다. 하지만 큰 산은 거대한 파도의 포효에 눌려 몸을 비키지는 않았다. 산은 계속 바다를 지켜봤고, 바닷속 만물은 그렇게 번식하고 성장했다. 큰 산과 거대한 파도는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우선 내가 한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라. 일단 큰 산이 있었다. 또 시냇물, 광풍, 거대한 파도가 있었다. 그럼 첫 부분에서 시냇물과 큰 산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왜 시냇물과 큰 산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큰 산이 시냇물을 지켜 주었기 때문에 시냇물은 한 번도 방향을 잃지 않았습니다. 산과 시냇물은 서로 의지한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시냇물 입장에서 큰 산은 보호자냐, 방해꾼이냐? (보호자입니다.) 그럼 방해꾼이 아니란 말이냐? 큰 산과 시냇물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 줬다. 큰 산은 시냇물의 보호자이자 방해꾼이기도 하다. 큰 산은 시냇물이 강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게 보호해 줬고, 동시에 곳곳으로 흘러넘치지 않게 막아 주었다. 그래서 그것이 인류에게 재해를 입히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주된 내용이 아니냐? 큰 산의 보호 덕에, 시냇물의 장벽 역할을 한 큰 산 덕분에 인류의 보금자리도 보호받게 되었다. 시냇물은 산자락을 따라 강으로,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이것은 시냇물의 생존 법칙이 아니냐? 시냇물이 강으로, 바다로 흘러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덕분이냐? 큰 산 덕분이 아니냐? 산의 보호와 방해 덕분이다. 이것이 핵심이 아니냐? 여기서 시냇물에게 큰 산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저 높고 낮은 산을 창조한 데에 목적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이는 시냇물과 산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이 창조한 두 사물의 존재 가치와 의미, 그리고 이 두 사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두 번째 부분에서 언급한 것은 무엇이냐? (광풍과 큰 산입니다.) 바람이 있으면 좋으냐? (네.) 꼭 그렇지는 않다. 어떤 때 바람이 너무 세면 재해가 된다. 네가 광풍 속에 있으면 어떤 느낌이겠느냐? 물론 풍속 등급을 봐야겠지? 아주 약한 미풍이거나 3, 4급 정도라면 견딜 만하다. 기껏해야 눈을 못 뜨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어 토네이도가 된다면 견딜 수 있겠느냐? 못 견딘다. 그러니 사람의 입장에서 바람이 완전히 좋다고 말하는 것도 틀리고, 완전히 나쁘다고 말하는 것도 틀리다. 일단 얼마나 센 바람인지 봐야 한다. 그럼 큰 산은 여기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 바람을 거르는 역할을 하지 않느냐? 큰 산은 불어오는 광풍을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미풍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는 곳에서 대다수 사람이 맞고 느끼는 것은 광풍이냐, 미풍이냐? (미풍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큰 산을 창조한 목적이자 의도가 아니냐? 광풍이 늘 모래와 자갈을 몰고 와 아무런 방해나 여과 없이 사람에게 불어닥친다면 사람이 사는 곳이 어떻게 되겠느냐? 모래가 날리고 돌이 굴러다닌다면 사람이 이 땅에서 살 수 있겠느냐? 아마도 돌에 맞거나 모래에 눈이 흐려져 앞을 못 볼 것이다. 사람이 바람에 휩쓸려 제대로 서지 못하거나 공중으로 날아갈 수도 있고, 집이 파손될 수도 있다. 각종 재난이 닥칠 것이다. 그렇다면 광풍은 존재 가치가 없느냐? 바람이 나쁘다고 말하니 사람들은 바람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미풍으로 변하면 광풍도 가치가 있지 않으냐? 무덥다고 느낄 때, 숨 막히는 공기를 느낄 때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가장 필요한 것은 미풍이다. 그 미풍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사람의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도 좋아지고 상쾌해진다. 예를 들어, 너희가 지금 방 안에 앉아 있는데 사람이 많아서 공기가 답답하다면,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미풍입니다.) 공기가 혼탁한 곳에 가면 공기에 들어 있는 더러운 것이 사람의 사고를 느리게 하고 혈액 순환을 늦추고 머리도 흐리게 만든다. 공기가 통하게 환기를 시키면 공기가 신선해질 것이고 사람의 느낌이 달라질 것이다. 시냇물이나 광풍은 재난이 될 수 있지만, 큰 산의 존재로 인해 이런 재난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렇지 않으냐? 세 번째 부분에서 언급한 것은 무엇이냐? (큰 산과 거대한 파도입니다.) 큰 산과 거대한 파도이다. 이는 산 아래의 해안가에서 벌어진 장면으로, 우리는 큰 산과 포말, 거대한 파도를 보았다. 거대한 파도의 입장에서 큰 산은 무엇이냐? (보호자이자 장벽입니다.)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 큰 산은 보호자이자 장벽이다. 보호의 목적은 바다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바다가 사라지지 않으면 바닷속 만물이 번식하고 생존할 수 있다. 또한 거대한 파도의 장벽으로서 해수가 범람하여 재해가 되지 못하게 하고, 인류의 보금자리를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거대한 파도에게 있어 큰 산은 보호자이자 장벽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큰 산과 시냇물, 큰 산과 광풍, 큰 산과 거대한 파도가 서로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조화를 이루고 서로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사물들은 각자의 생존 법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어떤 행사를 보았느냐?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한 후 그냥 내버려 뒀느냐? 어차피 사물 각각에 법칙과 기능을 정해 줬으니 그만이라는 식으로 그냥 내버려 두었느냐?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은 계속 관리했다. 물, 바람, 파도를 관리하며 그들이 제멋대로 날뛰어 인류의 터전을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사람이 이 땅에서 계속 번성하며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할 때 만유의 생존 법칙을 정하고, 이들을 인류에게 이롭게 함과 동시에 인류에게 부담을 주거나 재앙을 가져오지 못하게 관리해야 했다. 하나님이 관리하지 않는다면 물이 멋대로 흐르지 않겠느냐? 바람이 멋대로 불지 않겠느냐? 이들에게 법칙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관리하지 않는다면 법칙이 없어 바람은 멋대로 불고, 물은 아무렇게나 흘러 사방으로 범람할 것이다. 거대한 파도가 산을 넘는다면 그 바다가 존재할 수 있겠느냐? 그 바다는 존재할 수 없다. 큰 산이 거대한 파도보다 높지 않다면 바다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산도 그 존재 가치와 의미를 잃을 것이다. ……… 방금 했던 큰 산과 시냇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큰 산의 역할은 무엇이냐? 큰 산에도 만물이 생장한다. 큰 산은 그 자체로 존재 가치가 있으며, 동시에 시냇물이 제멋대로 흘러 인류에게 재난을 일으키지 못하게 막기도 한다. 그렇지 않으냐? 큰 산은 자신의 방식으로 존재하면서 자신에게 딸린 만물을 ― 나무와 풀, 산속의 각종 동식물을 ― 생장시키고 있다. 또한 시냇물에게 방향을 안내하고, 시냇물을 한데 모아 산자락을 따라 흐르게 해 자연스럽게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게 한다. 이런 법칙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할 때 특별히 정해 놓은 것이다. 큰 산과 광풍은 어떠냐? 산 자체도 바람이 필요하고 산에 있는 생물도 바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큰 산은 광풍을 풍해로 번지지 않도록 억제하기도 한다. 이 법칙에는 큰 산의 역할이 들어 있다. 큰 산의 역할에 대한 법칙은 자연스럽게 생겼겠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든 것이다. 큰 산은 큰 산의 역할이 있고, 광풍은 광풍의 역할이 있다. 그렇다면 큰 산과 거대한 파도는 어떠냐? 산이 없다면 물이 방향을 가지고 흐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물도 범람할 것이다. 큰 산은 큰 산대로 존재 가치가 있고, 바다도 바다대로 존재 가치가 있다. 그들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서로 억제한다. 큰 산은 바다가 범람하지 않게 억제하여 인류의 보금자리를 보호하고, 또한 바다가 바닷속 만물을 양육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런 경관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역시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 큰 산은 어디에 둘지, 시냇물은 어디서 흐를지, 광풍은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불지, 거대한 파도의 높이는 얼마나 될지,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할 때 이미 정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행사이다. 그럼 이제는 만물의 면면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볼 수 있지 않겠느냐?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