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성경 및 하나님이 욥을 평가한 말씀

2018년 08월 31일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1:1)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5)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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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첫 번째 구절을 보자.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말은 성경 기록 중 욥을 평가한 첫 번째 말이다. 이것은 욥에 대한 욥기 저자의 평가로서, 당연히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를 의미한다. 그 평가는 이렇다.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다음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이 두 평가 중 하나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욥의 행위와 모습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칭찬까지 얻었음을 말해 준다. 즉, 욥이 사람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늘 자신의 행위와 마음을 하나님 앞에 놓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 비친 그는 땅에서 유일하게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욥이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모습

욥,악을 멀리하고,하나님을 경외하다,

이어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모습들을 살펴보자. 위와 아래 이 두 성경 구절을 제외하고, 1장 5절을 보자.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사례이다. 이 사례는 평소 생활 속에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는지와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늘 이렇게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이 잔치를 열 때,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욥은 이 일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느냐? 원문에는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라고 묘사되어 있다. 욥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이 결코 외부적인 행동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일상생활 속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악한 일을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늘 아들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는 욥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매우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도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배반할까 걱정했음을 말해 준다.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진실했으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욥은 어쩌다가 한 번씩 그랬느냐, 아니면 항상 그랬느냐? 원문 마지막 구절에는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욥이 가끔, 혹은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을 때 들여다본 것이 아니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 욥이 항상 아들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고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항상’이란 하루 이틀이나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의 태도는 일시적인 것도, 단지 인식상에만 머문 것도, 그저 입으로만 떠든 것도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 그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했으며, 삶의 근본으로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뜻한다. 욥이 항상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항상 두려워했으며, 자신의 자녀들도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걱정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길이 그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욥이 항상 이렇게 행한 이유는 그의 마음속에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악행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두려워했고,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아울러 그는 자녀들을 위해 걱정하며 자녀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두려워했다. 이런 것들은 욥의 일상생활에서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정상적인 모습들이 바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것이 빈말이 아님을 입증하고,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삶을 실제로 살았음을 입증한다. 즉,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라는 말로 욥이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행한 모든 행동을 우리에게 알려 준 것이다. 욥이 항상 그렇게 행함으로 그의 행동과 마음은 늘 하나님 앞에 있지 않았느냐? 다시 말해, 하나님은 늘 그의 마음과 행동을 열납하지 않았느냐? 욥은 어떤 상황과 배경에서 항상 그렇게 했느냐? 혹자는 하나님이 항상 그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하며, 혹자는 욥이 악에서 멀리 떠나고자 하는 사람이었기에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 혹자는 욥이 자신의 재산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면 재산을 잃게 될까 두려워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이 다양한 견해들은 다 사실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욥을 열납하고 귀하게 여긴 이유는 그가 ‘항상 이러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욱이 욥이 사탄에게 넘겨져 시험받았을 때,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탄 앞에서 보인 그의 모습 때문이다. 다음의 구절들이 바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이 증거들을 통해, 우리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욥의 삶의 가치

시련을 겪은 후의 욥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욥 42:7~9)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욥 42:12)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7)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를 귀하게 여기고 우매한 자를 천하게 여긴다 욥기 42장 7절에서 9절에 하나님은 욥을 그의 종이라고 언급했다. 욥에게 사용했던 ‘종’이라는 이 호칭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차지하는 욥의 비중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에 대해 더 높은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을지라도, 이 호칭은 결코 욥이 하나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여기서의 ‘종’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애칭’이다. 하나님이 여러 차례 ‘내 종 욥’이라고 언급한 표현으로부터 하나님이 욥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종’이라는 단어의 함의를 언급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이 말씀 구절에서 ‘종’이라는 단어에 대해 내린 정의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먼저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욥을 시련한 후, 욥의 행동과 말을 열납했음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린 것이며, 처음으로 욥의 행동과 말이 정확하고 옳았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바스 등 친구들의 정확하지 않은 그릇된 논쟁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노한 것이다. 그들도 욥처럼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도,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도 않는 상황에서 생활했지만, 욥이 하나님에 대해 그토록 정확한 인식을 가졌던 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엉뚱하게 추측하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염증을 느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욥의 행동과 말을 열납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엘리바스 등 친구들에게 그들이 속죄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이 우매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번제를 드려 과오를 만회해야만 했던 것이다. 보통 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번제는 욥에게 드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번제가 다른 것과 차별화된 부분이다. 욥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을 증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열납되었다. 동시에, 욥의 친구들은 욥이 시험을 받던 기간에 다 드러났다. 그들은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정죄받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 이 ‘징벌’이 바로 욥 앞에서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과 노를 풀어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이 욥의 순전함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행동을 열납하지 않으나 욥의 행동은 흔쾌히 열납하고 기뻐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사람은 하나님께 열납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고,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죄를 지어 하나님 눈에 천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이 두 측면은 하나님이 두 부류 사람에 대해 내린 정의이고, 이 두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이다. 또한 이 두 부류 사람의 값어치와 지위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욥을 종이라 불렀을지라도 이 ‘종’이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에게서 권세를 받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과오를 사해 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또한,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고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보다 지위가 높고 존귀한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한 ‘종’의 진정한 함의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이런 ‘특별한 영광’을 얻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종’이라 불리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 2가지 완전히 다른 태도는 이 두 부류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하나님께 귀하게 보이는 것이다. 반면, 우매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날 수 없어 하나님이 기뻐 받지 않으며, 늘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하나님의 정죄를 받으며, 하나님께 천하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권세를 주다 욥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다. 욥의 기도에 하나님은 그들의 우매함대로 그들에게 갚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을 벌하지 않고 그들에게 어떤 응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종인 욥이 그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욥의 기도를 열납했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한 것이다. 여기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한 사람을 축복할 때 그에게 많은 것을 내려 주는데,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또 그에게 권세를 주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자격이 있게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그 몇 사람의 과오를 기억하지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욥에게 준 권세이다. ‘욥의 기도로 타인이 하나님께 정죄받지 않는’ 이런 방식으로 그 우매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엘리바스 등 친구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징벌이었다. 욥은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더 이상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은 어떤 말을 했느냐? 바로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던 말이다. 또한 욥기에 기록된 그 많은 분량의 말들이다. 그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말들을 보면, 욥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원망도 의심도 없었으며, 오직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기다림은 바로 그의 순종하는 태도였다. 그의 태도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 한 말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받았다. 그가 시련을 겪을 때,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의 곁에 있었다. 하나님이 곁에 있다고 해서 그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보고자 한 것을 보았고, 듣고자 한 것을 들었다. 욥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 앞에 이르렀고, 그의 모든 말은 하나님 귀에 상달되었다. 하나님은 다 들었고 보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때, 그 시기 하나님에 대한 욥의 앎과 마음속의 생각은 사실 지금 사람들처럼 그렇게 구체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당시의 배경에 따라 그가 말한 것을 인정해 주었다. 그것은 욥의 마음속 생각과 모든 행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것과 드러낸 것들이 이미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욥이 시련을 겪는 동안, 그의 마음속 생각과 다짐을 통해 하나님은 결과를 보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보기에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뒤이어 하나님은 시련을 거두어 갔다. 그 후 욥은 고통 속에서 벗어났으며, 욥의 시련은 그때부터 사라져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욥은 이미 시련을 겪었고 또한 시련 속에서도 굳게 서고 사탄을 완전히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당한 복을 그에게 내린 것이다. 욥기 42장 10절과 12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욥은 또 한 번 하나님의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많이 받았다. 이때, 사탄은 물러가 더 이상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욥은 더 이상 사탄의 방해와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준 것 역시 더 이상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여생을 보냈다 비록 그때의 복은 소와 양, 낙타, 재산 등에 국한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이 욥에게 주고자 했던 복은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하나님이 욥에게 어떤 영원한 약속을 주려 한다는 기록이 있느냐? 욥에 대한 하나님의 복에 결말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또 그 복은 결말과 연관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욥의 비중과 지위가 얼마나 되든지 간에,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에는 매우 적당한 선이 있었다. 그는 결말에 대해 선포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의 결말을 선포할 단계까지 진행되지 않았을 때, 즉 사역을 끝내는 단계가 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물질적인 축복만 좀 주었을 뿐 사람의 결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욥은 여생을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보냈다. 이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점이다. 같은 점은 그도 정상인처럼 늙어 가고 어느 날 세상과 이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7). 여기서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는 무슨 의미이냐? 하나님은 결말을 선포하지 않은 그 시대에 욥에게도 수명을 정해 주었으며, 그 수명이 다 찬 후 욥은 자연스럽게 세상과 이별했다. 그가 두 번째로 복을 받은 후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그에게 그 어떤 고통도 주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 무슨 선고도 아니었고, 정죄도 아니었다. 욥은 그의 살아생전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그가 죽고 난 후에 어떤 결말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았고, 그 어떤 평가도 없었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일할 때 매우 적당한 선이 있다. 그가 하는 말씀과 일의 내용과 원칙은 그의 사역 단계와 사역 시기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욥의 결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나님 마음속에 정해져 있지 않았을까?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지도 않았고 알려 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욥이 기한이 차서 죽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일생이다. 욥의 삶의 가치 욥의 일생은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니냐? 그의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왜 그의 삶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느냐? 사람 쪽에서 볼 때, 그의 가치는 무엇이냐?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를 대표해 사탄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했다. 또한 그는 피조물이 해야 할 본분을 다 이행했고,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본보기가 되어 인류에게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탄을 완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볼 때, 욥의 삶의 가치는 그가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고 찬양하여 하나님께 위안을 안겨 드리고 기쁨을 얻게 한 것에 있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의 삶의 가치는 또한 욥이 살아생전에 겪은 그 시련에서 사탄을 이겼고, 사탄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한 데에 있다. 그리고 인류 중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얻게 하였고, 하나님께 위안을 안겨 드렸으며, 절박한 마음을 가진 하나님께 결과를 보게 하고 희망을 보게 한 데에 있다. 그의 증거는 하나님의 인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고 사탄을 부끄럽게 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러한 것이 욥의 삶의 가치가 아니냐? 그는 하나님께 마음의 위안을 얻게 하고 영광받은 기쁨을 미리 맛보게 했으며, 하나님의 경륜이 거기서 완벽한 시작을 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욥의 이름은 이로부터 하나님이 영광을 얻은 상징이 되었으며, 인류가 사탄을 이긴 표징이 되었다. 욥의 삶과 그가 사탄을 이긴 위업은 하나님께 영원히 소중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후세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는 완전무결하고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기본적인 생존 환경 ― 기류

다섯 번째는 무엇일까? 다섯 번째는 모든 사람의 하루하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도 아주 관련이 크다. 사람의 육체가 이 물질세계에서 생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바로 기류이다. ‘기류’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무엇을 기류라고 하느냐? 공기의 흐름을 기류라고 할 수 있다. 기류는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람이고 기체가 이동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려는 기류는 주로 무엇을 가리킬까? 내가 설명하면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지구의 산과 강과 바다를 비롯하여 만물은 모두 회전하며, 회전할 때는 속도가 있다. 사람이 지구의 회전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지구는 여전히 회전하고 있다. 지구의 회전은 무엇을 일으키느냐? 달릴 때 귓가에 바람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지지 않느냐? 사람이 달릴 때도 바람이 생기는데, 하물며 지구가 회전할 때 어떻게 바람의 힘이 없을 수 있겠느냐? 지구와 만물은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고 운동하며 지구상의 만물은 끊임없이 번식하고 발전한다. 따라서 일정한 속도에서는 자연스럽게 기류가 발생하는데, 그런 기류를 말한다. 이 기류가 어느 정도 사람의 몸에 영향을 주지 않겠느냐? 통상적으로 태풍이 기껏해야 얼마나 강하겠느냐? 그런데도 사람들은 똑바로 서 있지 못한다. 또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걸을 때면 걸음을 내딛기조차 힘겨워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바람이 너무 강하니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뭔가를 의지해 잡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류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중 하나이다. 만약 지구 전체가 평지라면, 사람의 몸은 지구가 회전하고 만물이 움직일 때 발생하는 기류를 절대 견딜 수 없고 대응하기도 힘들다. 그런 상태에서 기류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생존할 수 없는 환경, 즉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양한 지리적 환경을 조성하여 기류가 약화되도록 하였고 기류의 방향, 속도, 강도를 조절하여 기류 문제를 해결하였다. 따라서 사람은 산천, 산맥, 평원, 구릉, 분지, 협곡, 고원, 하천 등의 다양한 지리적 환경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각기 다른 지리적 환경을 통해 기류의 속도, 방향, 강도를 변화시키고 그런 방식으로 약화시키거나 처리하여 적절한 풍속, 풍향, 풍력을 만들어 주었고, 이로써 사람에게 정상적인 생존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이런 것이 필요하지 않으냐? (필요합니다.) 이는 사람이 보기에 어려운 일 같지만 하나님께는 간단한 일이다. 하나님의 눈이 늘 만물을 감찰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알맞은 기류와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하나님께 매우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한 이 환경 속의 만물 중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고 모두 존재의 가치가 있고 필요성이 있다. 하지만 사탄과 타락된 인류는 이 원리를 모르고 끊임없이 개발하고 파괴한다. 산천을 평지로 바꾸고, 협곡을 평평하게 메우고, 평원에 고층 건물을 지어 콘크리트 숲을 만들려는 망상에 빠져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예비한 최적화된 환경에서 사람이 매일 행복하게 생활하고 성장하길 바라기 때문에 인류의 생존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전혀 소홀하지 않았다. 온도에서 공기, 소리에서 빛까지 하나님은 정밀하게 배치하여 인류의 생존 환경과 사람의 몸이 어떤 자연 조건 속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정상적으로 번식하고 또 만물과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에게, 더 나아가 인류에게 공급하는 모든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이 사실을 어떻게 대하고 인식할 것인가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쉽게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으며, 모든 사람은 능동적 또는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받아들인다. 사람이 살면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어도, 결국에는 창조주가 배정해 놓은 운명의 길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이며, 또한 창조주가 권능으로 만물을 주재하고 다스리는 방식이다. 그 덕분에 만물이 질서 정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인류는 아무런 방해 없이 끊임없는 윤회를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이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매일, 매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너희들은 이러한 사실에 눈을 뜨고 어느 정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진리에 대한 너희들의 경험과 인식,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따라 많이 느낄 수도, 적게 느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진리의 실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만큼 체험했는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가 사람의 순종 여부에 의해 결정되느냐? 하나님의 권능이 사람의 순종 여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권능은 언제나 존재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의 생각과 뜻에 따라 모든 사람의 운명과 만물을 주재하고 배치한다. 이는 사람의 변화나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 지리적인 변화로 인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알고 받아들이고, 그의 주재에 순종하느냐로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갖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과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의 운명은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를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의 권능은 변함없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은 사람의 의지와 기호, 선택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천지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의 권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유일무이한 권능을 갖고 있다. 그의 권능은 사람이나 사물, 공간, 지리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변함없이 권능을 행하고 큰 능력을 나타낸다. 그는 경영 사역을 계속하며 만물을 주재하고, 만물에게 공급하며, 만물을 지배한다. 이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사실이며 태고부터 변함없는 진리이다! 하나님의 권능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실행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에 대해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고 알아야 할까? 이는 모든 사람이 직면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네가 삶에서 문제에 맞닥뜨릴 때 하나님의 권능과 주재를 어떻게 느끼고 깨달아야 할까?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여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어떻게 체험해야 하는지 모를 때, 네가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는 마음과 소원, 실제가 있다는 것을 어떤 태도로 분명하게 보여야 할까? 우선 너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다음 구할 줄 알아야 하며, 그런 후에는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때, 즉 하나님이 배정한 사람과 일과 사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점차적으로 너에게 나타나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배치해 놓은 사람과 일, 사물을 통해 하나님의 고심을 살피고 깨닫는 것이다. 그 속에 있는 진리를 깨닫고, 사람이 행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성과와 맺고자 하는 열매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배정한 사람과 일, 사물을 받아들이고, 그의 주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창조주가 어떻게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어떻게 그의 생명과 진리를 공급해 주는지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배정과 주재 아래에서 모든 일은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간다. 너는 하나님이 주재하고 배치한 모든 것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구할 줄 알아야 하며,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에 순종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이자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너희가 많은 노력을 들여 이런 태도와 소양을 갖춰야만 진정한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모든 정의의 힘과 긍정적인 사물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이 말씀하고 생각하고 행한 이 사례들을 통해 너는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공의로운 성품을 알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이 성품에 대해 사람이 얼마나 알 수 있든 간에 이는 하나님 자신만이 갖고 있는 성품이다.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과 하나님의 위엄은 하나님 자신만의 본질이고,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 자신만의 성품이다. 하나님이 노하는 원칙은 하나님 자신만의 신분과 지위를 뜻하며, 그가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의 본질을 상징한다는 것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의 본질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 않고 지리적 위치로 인해 바뀌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고유의 성품은 하나님의 고유의 본질이다. 그가 누구에게 사역하든 간에 그의 본질과 공의로운 성품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노하게 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 원래의 성품이다. 이때 하나님이 노하는 원칙은 변하지 않고, 그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지위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노하는 이유는 그의 본질에 변화가 생기거나 그의 성품에 다른 요소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사람이 공공연히 하나님께 도발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하나님이 봤을 때,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자 하나님의 노를 시험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할 때, 하나님과 겨룰 때, 계속해서 하나님의 노를 시험할 때가 바로 죄악이 범람할 때이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자연스럽게 발현하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다는 것은 모든 사악한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모든 적대 세력이 멸망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공의로운 성품이고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진노이다. 하나님의 존엄과 거룩함이 도전을 받을 때, 정의의 힘이 저지당하고 사람이 정의를 찾아볼 수 없을 때는 바로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낼 때이다. 하나님의 본질 때문에 땅에서 하나님과 겨루고 대적하고 맞서는 세력들은 모두 사악하고 타락하고 정의롭지 않은 세력이며, 사탄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사탄에 속하는 세력이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흠이 없이 거룩하며 빛이다. 그러므로 사악하고 타락하고 사탄에게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게 되면 모두 소멸될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한 측면의 표현이지만 하나님은 절대 원칙 없이, 대상의 구분 없이 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 쉽게 노하지 않고, 진노와 위엄을 쉽게 나타내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에는 상당한 정도와 기준이 있다. 이는 사람이 화를 내고 울분을 쏟아 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성경에는 사람과 하나님의 대화 내용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이는 하는 말이 깊이가 없고 우매하여 어린아이 같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치지 않았고 정죄하지도 않았다. 특히, 욥이 시련을 겪는 동안 욥의 세 친구와 사람들이 욥에게 한 말을 듣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했느냐? 그들을 정죄했느냐? 그들에게 노했느냐?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욥에게 그들을 위해 간구하고 기도하라 하였고, 그들의 과실을 기억하지 않았다. 이는 타락하고 무지한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주요 태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절대 감정을 표현하거나 감정을 쏟아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화를 총체적으로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나타내는 것은 스스로 감정을 통제하기 힘들어서도, 울분이 극에 달해 쏟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도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의 발현이자 참된 표현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하나님이 진노하는 분이어서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유와 원칙 없이 노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무 이유도 원칙도 없이 함부로 화를 내는 것은 오히려 타락한 인류의 전유물이다. 사람은 어떤 위치에 오르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트집 잡아 분풀이하고 불만을 털어놓으며, 이유 없이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자신의 신분과 지위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한다. 어떤 자리에 오르지 못한 타락한 인류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데, 그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항상 자신의 이익이 침해당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류는 항상 자신의 지위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쏟아 내고 교만한 본성을 드러낸다. 사람이 화를 내고 울분을 표하는 것은 모두 죄악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는 사람이 불만을 표현하는 방식이며, 여기에는 불순함, 음모와 계략, 타락과 사악함, 심지어 야심과 욕망이 가득하다. 정의와 사악의 싸움에서 사람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화내지는 않는다. 바꾸어 말하자면 정의의 힘이 위협당하고 박해당하고 공격당할 때, 사람은 이를 무시하고 회피하거나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사악한 세력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고 비굴하게 굽실거린다. 그러므로 사람이 분풀이하는 것은 사악한 세력의 출구이며, 이는 육에 속한 사람의 악행이 넘쳐 나고 억제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반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때 모든 사악한 세력과 사람을 해하는 죄악은 저지당할 것이고,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막는 모든 적대 세력은 드러나고 분리되고 저주받을 것이며, 하나님을 적대시한 사탄의 모든 공범자들은 징벌받고 완전히 제거될 것이다. 그에 반해 하나님의 사역은 막힘없게 되고, 하나님의 경륜은 정해진 대로 한 단계씩 앞으로 진행된다. 또한 하나님의 선민은 사탄의 교란도 미혹도 받지 않게 되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안정되고 평온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사악한 세력이 더 이상 자생하고 판치지 못하도록 보장하며, 모든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이 존재하고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도록 보장한다.

치가 떨리고,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올 정도로 부패한 소돔 성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다’, 우선 이 일에 대한 성경 구절부터 보도록 하자.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말라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 들이고 문을 닫으며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창 19:1~11)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창 19:24~25) 성경의 이 구절들을 통해 소돔의 사악함과 부패함이 천인공노할 지경에 이르러 하나님 안중에 반드시 멸해야 할 대상이 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성을 멸하기 전에 어떤 일들이 발생하였고, 그 일들이 사람에게 어떤 점을 시사하였느냐? 그 일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통해 사람에게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여 주고 있느냐? 기록된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고 발생한 일의 전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치가 떨리고,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올 정도로 부패한 소돔 성 그날 밤, 롯은 하나님의 두 사자를 영접하고 식사를 베풀었다. 식사 후 사자들이 아직 눕지 않았을 때, 성안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롯의 집을 둘러싼 후 롯을 불렀다. 성경에는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라고 되어 있다. 이는 누가 한 말이냐? 이 말은 누구에게 한 것이냐? 이 말은 소돔 성 사람들이 롯의 집 밖에서 롯에게 외친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화가 나지 않느냐? 역겹지 않으냐?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느냐? 그 사람들의 외침은 사탄의 행위를 뜻하지 않느냐? 그 외침에서 너는 그 성의 사악함과 어두움이 느껴지지 않느냐? 그들의 외침에서 너는 그들의 행위에서 나오는 야만성과 잔인함이 느껴지지 않느냐? 그 사람들의 행위에서 그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느낄 수 있지 않으냐? 그들이 말한 내용에서 그들의 사악한 본성과 흉악한 성품이 스스로 통제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롯을 제외한 성안 사람들은 모두 사탄과 같아서 사람을 보면 해를 입히고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였다. 여기까지만 말해도 이 성의 음산함과 공포스러움, 죽음의 기운, 사악함과 잔혹함이 절로 느껴진다. 인간성도 없고 사람의 영혼을 집어삼키겠다는 야심으로 가득 찬 폭도들을 보며 롯이 뭐라고 말했느냐? 성경에는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말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롯이 이 말을 한 의도는 그의 두 딸을 포기하더라도 사자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인간의 도리상, 롯이 그런 제안을 했으면 그 무리들은 양보를 하고 두 사자를 가만히 놓아두었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두 사자는 그들과 일면식도 없고 아무 관련이 없으며, 그들의 이익을 침해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악한 본성에 끌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난폭해졌다. 여기서 그들이 나눈 또 다른 대화를 통해 그들의 악독한 본모습을 더한층 알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이 왜 그 성을 멸하려고 했는지도 알고 이해하게 된다. 그다음에 그들이 뭐라고 하였느냐? 성경에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라고 되어 있다. 그들은 왜 문을 부수려 하였을까? 두 사자를 빨리 해치지 못해 안달 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두 사자가 소돔에 간 이유는 무엇일까? 롯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성안의 사람들은 그 두 사자가 법관이 되기 위해 그곳에 왔다고 착각하며 추측만으로 이유도 묻지 않고 해하려 하였다. 그들이 해하려 한 것은 그들과는 전혀 무관한 두 사람이었다. 따라서 소돔 성 사람들이 이미 인간성과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였다는 것과 그들의 광기와 날뛰는 정도가 사람을 해하고 집어삼키는 사탄의 악독한 본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롯에게 두 사람을 내놓으라고 하자 롯은 어떻게 하였느냐? 성경에서 알 수 있듯 롯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롯은 하나님의 두 사자를 알았느냐? 전혀 몰랐다. 그렇다면 그는 왜 두 사람을 구하였느냐? 그는 그들이 무엇을 하러 왔는지 알고 있었느냐? 그는 그 두 사자가 그곳에 온 이유는 몰랐지만 두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들을 영접한 것이다. 롯이 하나님의 종을 주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롯이 평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소돔 성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갔을 때 그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두 종을 영접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또 두 딸을 넘기고 그들을 보호하려 하였다. 이는 롯의 의로운 행위이며, 롯의 본성과 본질을 구체적으로 보여 준 것이기도 하다. 또 이것은 하나님이 종을 보내 그를 구한 이유이기도 하다. 위기가 닥쳤을 때, 롯은 아랑곳 않고 두 종을 보호하였으며, 심지어 자신의 두 딸로 두 종의 안전을 지키려 하였다. 그 성안에 롯이 했던 일을 똑같이 할 수 있는 자가 또 있었느냐? 없다는 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그러므로 롯을 제외한 소돔 사람 모두가 멸해야 할 대상이자 멸망당해야 할 대상이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하나님이 전 인류의 양육을 위해 만물의 경계를 정하다

나는 오늘 ‘하나님이 만물에게 정해 준 이러한 법칙으로 어떻게 전 인류를 양육하는가’를 주제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주제는 광범위하기 때문에 너희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로 나누어 하나씩 이야기하며 분명한 윤곽을 제시해 주고자 한다. 이렇게 하면 너희들이 점차 깨닫게 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할 때 산천, 평원, 사막, 구릉, 강, 호수에 모두 경계를 정하였다. 지구에는 산천, 평원, 사막, 구릉과 여러 수원(水源)이 있는데, 이것들은 각종 지리적 형태가 아니냐? 하나님은 이러한 각종 지리적 형태의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 경계를 분명히 하였다는 것은 산에는 산의 경계가 있고, 평원에는 평원의 경계가 있으며, 사막에는 사막의 범위가 있고, 구릉에는 구릉의 정해진 면적이 있으며, 강과 호수의 물도 모두 정해진 양이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할 때 만물의 경계를 분명하게 정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은 산의 둘레가 몇 백 km인지,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이미 정해 놓았고, 평원의 둘레가 몇 백 km인지,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도 정해 놓았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할 때 사막의 범위도 이미 정해 놓았고, 구릉의 범위와 면적, 경계선까지도 모두 정해 놓았다. 또 강과 호수의 범위도 그것들을 만들 때 다 정해 놓았으며, 모두 경계가 있다. 이 ‘경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방금 우리는 하나님이 만물에게 법칙을 정해 만물을 주재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산천의 범위와 경계는 지구의 회전이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면적이 작아지거나 커지는 것이 아니라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고정’이 하나님의 주재이다. 하나님은 평원의 면적이 얼마이고, 범위가 어디까지이며, 무엇과 접해 있는지까지 이미 정해 놓았다. 여기에는 경계가 있기에 평원에 불쑥 언덕이 생겨나거나 그 평원이 갑자기 산으로 변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방금 이야기한 법칙이란 이를 뜻하며, 경계도 이를 의미한다. 사막과 관련하여 여기서는 사막이나 그 지리적 형태, 지리적 위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그것의 경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사막도 하나님의 주재하에 더 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에 법칙과 범위를 주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것이 얼마나 큰 면적을 갖고 있을지, 그것의 역할은 무엇일지, 무엇과 접해 있을지, 어느 위치에 있을지 이미 다 정해 놓았다. 그러므로 사막은 그 범위를 넘지 않고, 위치를 옮기지 않으며, 마음대로 면적을 넓히지도 않을 것이다. 강과 호수의 물도 비록 질서 있게 끊임없이 흐르고 있지만, 한 번도 그 범위와 경계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들은 규칙적으로 한 방향,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따라 흐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재하는 법칙 속에서 그 어떤 강과 호수도 지구가 회전한다고 해서,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해서 마음대로 물이 말라 버리거나, 흘러가는 방향이 바뀌거나, 물의 양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이 주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 창조한 만물은 모두 정해진 방향과 면적, 범위가 있다. 즉,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이미 그 경계를 정하였으며, 그 모든 것은 제멋대로 변경되거나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멋대로’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날씨, 온도 그리고 지구의 회전 속도에 따라 제멋대로 움직이고, 확장하고, 자신의 원래 모습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산을 예로 들어 보면, 그 산의 높이가 얼마일지, 산기슭의 면적이 얼마일지, 해발이 얼마일지, 식물이 얼마나 많을지는 하나님이 모두 계획하고 계산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산은 제멋대로 그 높이와 면적을 바꿀 수 없다. 인류의 대다수는 평원에서 살고 있다. 평원도 기후의 변화에 따라 면적이 바뀌거나 존재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하나님이 창조한 여러 지형, 지리적 환경은 모두 그것이 갖고 있는 바를 제멋대로 바꿀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막의 경우, 사막의 성분, 사막 아래에 있는 자원, 사막의 모래 함량, 사막의 모래 색깔, 사막 모래층의 두께, 이런 것은 모두 제멋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재하고 관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각기 다른 모든 지리적 형태와 지리적 환경에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계획적이고 규칙적으로 관리한다. 따라서 이 모든 지리적 환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지 수천 년, 수만 년이 지난 후에도 그대로 존재하며, 여전히 각자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언제 화산이 분출하고, 언제 지진이 일어나 땅이 크게 이동된다고 해도 하나님은 절대로 그 어떤 지리적 형태도 그 고유의 기능을 잃지 않게 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관리하고 이러한 법칙을 주재하고 주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누리는 모든 것들과 사람들이 보는 모든 것들이 규칙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러한 방식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리적 형태를 관리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여러 지리적 환경 속에서 생존하는 생물들이 안정적인 환경을 갖게 하고, 그런 안정된 환경에서 번식하게 하기 위함이다. 움직일 수 있거나 움직일 수 없는 모든 만물, 즉 숨을 쉴 수 있거나 그럴 수 없는 모든 만물로 인류의 생존을 위한 특별한 환경이 만들어졌으며, 그러한 환경에서 비로소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들이 양육되고, 대대손손 평안하게 생존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방금 말한 그 내용은 좀 크다. 어쩌면 너희가 듣기에 거리가 아주 멀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겠지?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이 법칙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물이 이 법칙 속에서 생장할 수 있는 요소는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재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재로 인해, 하나님의 주재하에서 만물은 모두 자신의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산천은 숲을 양육하며, 숲은 여러 날짐승과 길짐승을 양육하고 보호한다. 평원은 인류의 경작과 여러 날짐승, 길짐승을 위해 예비한 장소이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평한 땅에서 살 수 있게 하여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준다. 평원에는 넓은 초원도 포함된다. 초원은 지구의 식생이며, 그것은 토지를 보호하고, 초원에서 자라는 소, 양, 말을 양육한다. 사막도 자신의 기능을 발휘한다. 사막은 사람들이 거주하라고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사막의 기능은 습한 기후를 건조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러 강과 호수의 물이 흐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을 편하게 마실 수 있다. 물이 흐르는 곳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실 물이 있게 되고, 물이 필요한 만물에 물을 쉽게 제공할 수도 있다. 이는 하나님이 여러 지리적 형태에 정해 놓은 경계이다.

여섯째 날, 창조주가 말씀하니 그의 생각 속 각종 생물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