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성경 및 하나님이 욥을 평가한 말씀

2018년 08월 31일

(욥 1:1)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욥 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 1: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

먼저 첫 구절을 보자.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말은 성경에 기록된, 욥에 대한 첫 번째 평가이다. 그것은 <욥기> 저자가 욥을 평론한 것이다. 물론,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를 대표하기도 한다. 그 평가는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되어 있다. 계속해서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으니라” (욥 1:8) 이 두 평가 중에 하나는 사람에게서 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같은 내용의 두 평가이다. 여기서 욥의 행위와 표현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다는 것도 충분히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욥이라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행실이 일치했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행위와 속마음을 항상 하나님 앞에 내놓고 감찰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도 해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기에, 욥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

욥이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표현들

욥,악을 멀리하고,하나님을 경외하다,

계속해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표현들을 보자. 위와 아래 그 두 구절 외에 1장 5절을 보자.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표현 중 하나이다. 그 표현은 욥이 평소 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는지와 관련된다. 욥에게서 두드러지는 표현은 바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것을 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서도 항상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자녀들이 늘 잔치를 벌일 때에 ‘죄를 범하여 마음에서 하나님을 배반할까’ 걱정했다. 그럼 욥은 그 일에서 어떻게 표현했느냐? 본문에는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라고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욥의 이런 표현에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마음속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지, 겉면의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은 욥의 평소 생활에서도 항상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욥이 자신만 악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들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걱정했던 것이다. 여기서 보다시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성은 확실한 것이고, 아무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욥은 우연히 그렇게 했을까 아니면 항상 그렇게 했을까? 본문의 마지막 말은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했다. 기술된 이 말의 뜻은, 욥이 우연히 혹은 일시적으로 기쁘면 가서 돌아보는 것이 아니고, 또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것도 아니라, 항상 자녀들에게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고 하였고,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여기의 ‘항상’은 일조일석이 아니고 잠시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의 표현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인식에만 머물러 있거나 입에만 달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 욥의 마음을 주도하였고, 또 욥의 행위를 지배하였으며, 욥의 마음에서 욥 자신이 생존하는 근본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욥에게는 항상 이런 행위가 있었다. 그것은 욥이 마음속으로 항상, 자신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였고, 자기 자녀들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걱정했다는 것을 뜻하며, 욥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길의 가치가 얼마나 컸는지도 뜻한다. 욥이 항상 그렇게 행한 원인은 마음속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곧, 자신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하였고, 또 자신이 하나님의 길에서 엇나가 하나님을 만족케 하지 못할까 두려워한 동시에, 자녀들을 위해서도 걱정하고 자녀들이 하나님을 거스를까 두려워한 것이다. 이런 것은 바로 욥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난 정상적인 표현들이다. 이런 정상적인 표현들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은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증했으며,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실제를 진정 살아냈다는 것을 실증했다.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는 이 말은 우리에게, 평소에 하나님 목전에서 행한 욥의 모든 행위를 알려 준다. 욥은 항상 그렇게 하였다. 그럼 욥의 행위와 마음은 하나님 앞에 상달된 것이 아니냐?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항상 욥의 마음과 행위를 열납한 것이 아니냐? 즉, 욥은 어떤 정형과 배경하에, 항상 그렇게 행할 수 있었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항상 욥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욥이 악에서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아마 욥이 자신의 가산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하나님을 거슬러서 그로 인해 가산을 잃을까 두려워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여러 가지 설들은 사실일까? 분명히 아니다.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욥을 열납하고 가장 귀하다고 하는 부분은, 단지 욥이 ‘항상 그렇게 행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더 큰 것은 욥이 사탄에게 넘겨져 시험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목전에서의 태도와 사람 앞에서, 사탄 앞에서의 태도 때문이다. 다음 구절들이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이런 증거에서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진실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계속해서 다음의 구절들을 보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창 17:15~17)

조물주의 공의 성품은 생생하게 유로하고 창현하고 나타난다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얻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참된 회개이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노가 그때 얼마나 컸든지, 니느웨 성 사람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은 그 순간, 하나님은 마음이 점차적으로 누그러져 뜻을 돌이키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성을 멸할 것이라고 선포하기 직전, 즉 그들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 바로 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노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일련의 회개를 한 후,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노는 점차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긍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이 두 가지 방면의 성품이 한 가지 일에서 동시에 유로되었는데 이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의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느냐? 이 두 가지 확연히 다른 실질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전후에 하나님에게서 나타나고 유로되어 사람은 하나님의 실질이 참되고 사람이 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음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태도로 사람에게 알려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기 싫어하는 것도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진실로 회개하는 것이 드물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진정으로 떠나는 것이 드물다고 알려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노할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참된 회개가 있기를 바라고, 사람의 참된 회개를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을 아낌없이 베풀어 줄 것이다. 즉, 사람의 악행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회개하는 사람에게 베풀어 주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사람에게 베풀어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을 대한 일에서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명확하게 유로되었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고, 하나님은 사람의 진실한 회개를 원하며, 사람이 악한 길과 강포에서 떠나기만 하면 마음을 돌이키고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것이다. 조물주의 공의 성품은 생생하게 유로하고 창현하고 나타난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에 대해 마음을 돌이켰을 때, 그의 긍휼과 관용이 가상이더냐? 물론 아니다! 그러면 한 가지 일에서 하나님의 이 두 가지 방면의 성품이 전환된 것을 통해 너는 무엇을 보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완전한 것이지 분열된 것이 결코 아니며, 그가 노하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관용하든, 그것은 모두 그의 공의 성품이 발표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생생하게 나타난다. 그는 사물의 발전에 근거해 그의 마음과 태도를 바꾼다. 그가 니느웨 사람에 대해 태도를 바꾼 것은 그에게 마음과 생각이 있고, 그는 로봇이나 돌부처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나님 자신이기에 니느웨 사람에게 노할 수도 있고, 또 그들의 태도로 인해 그들의 과거를 용서할 수도 있으며, 니느웨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할 수도 있고, 그들의 회개로 인해 그의 결정을 바꿀 수도 있음을 인류에게 알려 준다. 사람은 규례에 맞추기를 좋아하고, 또 규례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하나님을 정의하기를 좋아하며, 또 공식에 맞춰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상 영역에서 사람은 하나님이 생각할 줄 모르고 하나님께 실질적인 생각이 없다고 여긴다. 사실상, 사물의 변화로 인해, 환경의 변화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도 끊임없이 전환된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또 다른 방면의 실질을 유로할 것이다. 전환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인류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또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생생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의 진실한 유로로 인류에게 그의 진노, 그의 긍휼과 자비, 그의 관용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임을 실증하고 있다. 그의 실질은 사물의 발전으로 인해 언제 어디서나 유로될 것이다. 그에게는 수사자와 같은 진노가 있고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긍휼과 관용도 있다. 그의 공의 성품은 그 어떤 사람이 의심하거나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그 어떤 사람이 바꾸고 곡해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만사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 성품, 즉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긍휼은 언제 어디서나 유로될 수 있으며, 그는 만물의 구석구석에 생생하게 발표하고 있고 시시각각 생생하게 시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에 따라 기계적으로 발표되고 유로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언제 어디서나 발표되고 유로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켜 더 이상 진노를 발하지 않고 더 이상 니느웨 성을 멸하지도 않은 것을 보았을 때, 너는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진노가 빈말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진노를 크게 발하고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일 때, 네가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진실한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악행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를 크게 발하는데, 하나님의 진노에는 흠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회개로 감동받고 사람의 회개로 마음을 돌이킨다. 그가 감동받고 마음을 돌이키고 사람을 관용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에는 모두 어떤 흠도 없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순결하며, 어떤 뒤섞임도 없다. 하나님은 관용한다면 곧 관용하고, 긍휼을 베푼다면 곧 긍휼을 베푼다. 사람의 회개와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인해 그의 성품에서 진노가 유로되고 긍휼과 관용도 발표된다. 그가 유로하고 발표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다 순결하고 직접적이며, 그 어떤 피조물의 실질과도 다르다. 하나님이 발표한 일하는 원칙,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하나님이 내린 그 어떤 결정이나 하나님의 그 어떤 행동에서도 그 어떤 흠이나 오점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결정하고 어떻게 하는 이상 그대로 이루는데, 그 결과는 모두 정확하여 틀림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근원은 흠이 없고 오점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흠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 역시 피조물이 구비하지 못한 것이고, 또한 거룩하고 흠 없는 것이며, 어떻게 고찰하고 알아보고(원문: 推敲) 체험해 본다 해도 검증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각 종족에게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구분하였을까? 그 일은 인류에게 있어 아주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은 각종 생물의 생존 범위를 나누고, 여러 부류 인류의 생존 방식을 정해 놓은 동시에 지구상의 각기 다른 종족과 각기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나누었고, 그 범위도 정해 놓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음에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네 번째, 하나님은 인류의 각 종족에게 경계를 나누어 주었다. 지구상에는 백인종, 흑인종, 갈색 인종 그리고 황인종이 있는데, 이는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들에게도 생활하는 범위를 정해 놓았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관리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있어야 할 생존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넘어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백인종을 예로 들어 보자, 백인들은 대부분 어느 지역에서 살고 있느냐? 대부분 유럽과 미국, 이런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흑인종이 생활하는 지역은 주로 아프리카이다. 갈색 인종은 어떤 지역 범위에서 생활하고 있느냐? 주로 동남아인데, 태국, 인도,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와 같은 동남아 지역이다. 황인종은 주로 아시아에서 생활하는데, 예를 들면 중국이나 일본, 한국, 이런 나라들이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여러 인종을 다 적합하게 분포시켜 그 서로 다른 인종들이 지구의 각기 다른 지역에 분포되게 하였다. 하나님은 지구의 각기 다른 지역에 있는 서로 다른 인종을 위해 일찍이 그들에게 적합한 생존 환경을 예비해 놓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토양의 색상과 토양의 성분 같은 이런 생존 환경을 예비해 놓았다. 즉, 백인의 체내 성분은 흑인의 체내 성분과 서로 다르고, 다른 유색 인종의 체내 성분과도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들 때 이미 그런 생존 환경을 예비해 놓았는데, 예비해 놓은 목적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 생육하기 시작하고 많아지기 시작할 때 그런 범위에 정해 놓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류를 만들기 전에 그곳을 백인종에게 남겨 두어 백인종이 발전하고 살아가도록 미리 생각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땅을 만들 때, 이미 목적 있게, 목표 있게, 그 땅에 무엇을 더할지, 그 땅에 어떤 것을 기를지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그 땅에 어떤 높은 산들이 있어야 하는지, 평원이 얼마나 있고 수원(水源)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 어떤 날짐승과 길짐승이 있어야 하는지, 어떤 어류가 있고 어떤 식물이 있어야 하는지를 하나님은 미리 예비해 놓은 것이다. 즉, 인류를 위해, 한 인종을 위해 생존 환경을 예비할 때, 하나님은 여러 방면의 많은 문제를 생각해야 했다. 지리 환경, 토양의 성분, 날짐승과 길짐승의 종류, 그리고 각종 어류의 크기와 성분, 수질의 다른 점, 또한 각종 식물의 유형… 이런 것들을 하나님은 일찍이 예비해 놓았다. 그런 환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백인종에게 예비해 준 고유의 생존 환경이다. 너희는 마땅히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많은 심혈을 기울였고, 계획적으로 일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는 다 알았겠지?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부류의 인류를 위해 세심하게 생각하셨다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각 부류 인류의 생존 환경에 어떤 날짐승과 길짐승과 각종 어류를 예비해야 하고, 높은 산과 평원이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전부 다 빈틈없이, 아주 정밀하게 생각하셨다는 걸 보았습니다.) 백인종의 경우, 먹는 음식물은 대부분 무엇을 위주로 하느냐? (주로 고단백질 음식입니다. 각종 육류와 유제품과 밀가루 음식입니다.) 백인들이 먹는 음식은 아시아 사람들이 먹는 음식과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백인들이 먹는 주식은 대부분 육류, 계란, 우유, 가금류이다. 빵이나 쌀밥 같은 곡물 음식은 기본적으로 접시의 한쪽에 놓는 부식이다. 야채를 샐러드로 먹는다고 해도 구운 소고기나 닭고기를 조금 첨가한다. 밀가루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치즈, 계란, 육류 등을 곁들여 먹는다. 즉, 그들의 주식은 대부분 밀가루 음식이나 쌀 종류의 음식이 아니라 고기와 치즈를 많이 먹는다. 그들이 먹는 음식은 열량이 매우 높다. 그리하여 그들은 항상 얼음물을 마신다. 식사할 때가 되면, 음식이 다 차려지지도 않았는데 얼음물부터 한 컵씩 마신다. 그래서 백인종은 아주 건장하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예비해 준 생활 근원이고 생활 환경인데, 그들에게 그런 생활 방식이 있게 한 것이다. 그 생활 방식은 다른 유색 인종의 생활 방식과 다르다. 그런 생활 방식은 옳고 그름이 없이 타고난 것이고, 하나님이 정한 것이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로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인종에게 그런 생활 방식과 생활 근원이 있게 된 것은 그들의 인종으로 인한 것이고, 또한 하나님이 그들에게 예비해 준 생존 환경으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이 백인종을 위해 예비한 생존 환경과 그들이 그 생존 환경에서 얻게 되는 일용할 양식은 매우 풍부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다른 인종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생존 환경을 예비하였다. 그 다른 인종에는 흑인도 있다. 흑인종은 어디에 분포되어 있느냐? 주로 아프리카의 중남부에 분포되어 있다. 그런 생활 환경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예비해 주었느냐? 열대 우림, 각종 날짐승과 들짐승, 또한 사막도 있고 각종 식물도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수원이 있고, 생활 근원이 있고, 또한 음식물 근원도 있는데, 하나님은 그들이라고 차별 대우 하지 않았다. 그들이 전에 무엇을 한 적이 있든, 그들이 생존하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도 지구의 한 지역에서 일정한 위치와 일정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황인종에 대해 말해 보자. 황인종은 주로 지구의 동방에 분포되어 있다. 동방은 환경이나 지리 위치가 서방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 그 땅은 대부분 아주 기름지고, 물질 자원도 풍부하며, 지하자원도 풍부하다. 다시 말하면, 지상과 지하의 각종 자원이 매우 풍부하다. 하나님은 일부분의 사람들, 그 인종을 위해서도 그 인종에게 적합하고 알맞은 토양과 기후 그리고 각종 지리 환경을 예비해 주었다. 비록 그 지리 환경이 서방과는 크게 다르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필요한 음식물, 사람의 생활 근원, 생존 근원을 예비하였는데, 단지 서방의 백인종과 생활 환경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일깨워 주고 알려 주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동방에 있는 이 인종의 수는 비교적 많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땅에 서방과 다른 성분을 많이 더해 주었는데, 지구의 그 지역에 서방과 다른 풍경과 각종 풍부한 물질을 많이 더해 주었다. 여기의 산물은 아주 풍부하고, 지리 형세도 천태만상이고 다양하여 이 방대한 수의 동방 인종을 양육하기에 충분하다. 서방과 다른 점은 동방의 땅이 남에서 북까지, 동에서 서까지 기후가 서방보다 좋다는 것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온도가 적합할 뿐만 아니라, 산물도 매우 풍부하고, 천연적인 경치와 천연적인 각종 지리 형세가 서방보다 훨씬 좋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했을까? 바로 백인종과 황인종 사이에 아주 합리적인 균형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할까? 백인종은 여러 면에서 황인종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린다. 먹고 쓰는 것도 황인종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어떤 인종도 차별 대우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황인종에게 더 아름답고 더 좋은 생존 환경을 주었다. 바로 이런 균형인 것이다. 이제는 알았겠지? 하나님이 어느 부류 사람들에게 어느 땅에서 성장하라고 정했으면, 인류는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아주 기묘한 일이다! 설령 서로 다른 시기나 어떤 특별한 시기에 전쟁이나 침략하는 일이 있었을지라도 그 침략이나 전쟁은 절대로 하나님이 각 인종에게 정해 놓은 생존 환경을 파괴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 부류 사람들을 지구의 한 지역에 정해 놓으면, 그들은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설령 인류가 어떤 야심이 있어서 영토를 바꾸거나 확장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루기가 매우 힘들고, 성공하기가 매우 힘든 것이다. 예를 들면, 백인들은 전에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일부 국가들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전에 독일 사람들이 일부 국가들을 침략한 적이 있었고, 영국도 인도를 점유한 적이 있었는데, 최종 결과는 어떻게 되었느냐? 결국에는 모두 실패했다. 그 실패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자신이 정해 놓은 일을 사람이 파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이 영토를 확장하려는 그 기세가 얼마나 컸든, 마지막에는 철수해야 했다. 그 땅은 여전히 인도에 속하고, 그 땅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도 여전히 인도 사람이지 영국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역사(歷史)를 연구하거나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영국이 실패한 원인에 대해 결론을 내렸는데, 그들은 그 민족이 정복될 수 없기 때문이거나 사람의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은 다 진정한 원인이 아니다. 진정한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다. 즉,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민족을 어느 땅에서 살게 하고 어디에 정착시켜 이동하지 못하게 하면, 그들은 영원히 이동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범위를 정해 주면, 그들은 그 범위에서 생활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런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범위를 뚫고 나가지 못하는데, 그것은 매우 확실한 것이다. 침략자의 세력이 얼마나 크든, 침략당하는 자의 세력이 얼마나 미약하든, 최종 결과가 성공인지의 여부는 하나님이 결정하고,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이므로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각 인종들이 서로 다르게 분포되도록 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은 각 인종들이 서로 다르게 분포될 수 있도록 어떤 일을 하였을까? 우선 큰 지리 환경, 큰 환경을 예비했는데, 그들에게 좋은 장소를 나누어 주어 조상 대대로 거기에서 생존하도록 정해 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존 범위가 정해진 것이다. 그다음,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과 그들의 생활, 즉 그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는지, 무엇을 생업으로 하는지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일찍이 정해 놓았다. 또한 하나님은 만물을 만들 때,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각기 다르게 예비해 놓았다. 토양의 성분이 서로 다르고, 기후가 서로 다르며, 각종 식물이 서로 다르고, 각종 지리 환경도 서로 다르며, 심지어 각지에는 각지의 서로 다른 날짐승과 길짐승이 있고, 물의 각 영역에는 각 영역의 서로 다른 어류와 수산물들이 있다. 심지어 하나님은 곤충까지도 모두 그 종류를 정해 놓았다. 예를 들면, 아시아에는 까치가 있고, 미국에는 까치가 없다. 그것은 아주 특이하다. 그리고 미국의 참새도 중국 대륙의 참새와는 다르다. 아메리카에서 자라는 것들은 다 아주 크고, 아주 높고, 매우 튼튼하다. 숲 속의 나무들이 뿌리는 아주 얕게 내리지만 매우 높게 자라는데, 심지어 30m 이상 자라기도 한다. 하지만 아시아의 숲 속의 나무는 대부분 그렇게 높지 않다. 너희는 다 알로에를 알고 있겠지? 일본의 알로에는 가늘고 약하지만, 미국의 알로에는 매우 굵다. 차이가 있지 않으냐? 같은 종류의 식물이고 이름도 같지만, 아메리카 지역에서 자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크다. 그리고 확실히 구별된다. 각 방면의 차이를 사람은 보지 못할 수도 있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할 때 이미 다 나누어 놓았다. 서로 다른 인종을 위해 각기 다른 지리 환경과 지리 형세와 각종 생물을 예비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은 각 부류의 인류를 만들었기 때문에 각 부류 인류의 필요와 생활 방식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은 것은 다 아주 좋은 것이다. 이제는 분명히 알았겠지?

하나님이 무지개를 사람과 맺은 언약의 증거로 삼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1~13)

창조주의 신분을 갖춘 하나님만이 유일무이한 권능을 소유한다

사탄의 ‘특별’한 신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여러 면의 행위에 관심을 보인다. 심지어 많은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 외에 사탄도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사탄도 이적을 보이고 인류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외에도 마음속에 사탄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탄을 하나님으로 삼아 숭배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불쌍하기도 하거니와 가증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불쌍한 것은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의 대역무도와 타고난 사악한 본질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너희에게 권능이 무엇인지, 권능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고 대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곧 권능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고지상함과 하나님의 본질을 상징한다. 하나님 자신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사탄은 자기 자신을 감히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탄은 자신이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자신이 또 만물을 주재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을까? 사탄은 만물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지 못한다! 사탄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창조한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생명이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사탄에게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느냐? 물론 없다! 사탄이 행한 일들, 사탄이 보인 이적은 무엇이냐? 능력이 맞느냐? 권능이라 할 수 있느냐? 물론 아니다! 사탄은 사악한 흐름을 주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며 방해하는 짓을 일삼는다. 몇천 년 동안, 사탄은 인류를 부패시키고 해쳤으며, 사람을 유혹해서 타락의 길로 가게 하거나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골짜기로 걸어가게 하였다. 이런 짓 말고, 사탄이 인류에게 행한 것 중에 어느 것 하나 기념하거나 칭찬하고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있느냐?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하였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해를 입었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길로 나아갔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없다면, 사탄이 행한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겠느냐? 혹자는 사탄의 모든 행위가 보잘것없는 잔재주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나는 사탄에 대한 이런 정의는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인류를 타락시키는 사탄의 악행이 보잘것없는 잔재주일까? 사탄이 욥을 해한 그런 사악한 기세와 욥을 집어삼키려던 강렬한 욕망은 단연코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욥이 소유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소와 양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찰나에 욥의 그 거액의 재산이 모두 사라졌다. 그것이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할 수 있는 것이냐? 사탄이 한 행위의 성격으로 볼 때, 사탄은 파괴, 방해, 파멸, 상해, 사악, 극악, 어둠 등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와 매치되고 어울린다. 그러므로 모든 정의롭지 못하고 사악한 것의 출현은 사탄의 행위와 떼어 놓을 수 없으며, 또한 사탄의 추악한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아무리 거만할지라도, 야심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사탄의 파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사람을 미혹하고 타락시키는 재능이 탁월하다 할지라도, 또한 사람을 협박하는 수법과 권모술수가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무리 변화무쌍할지라도 상관없다. 사탄은 지금까지 생명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만물이 생존하는 법칙과 규율을 정할 수도 없었고,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을 주관할 수도 주재할 수도 없었다. 우주에 사탄에 의해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 존재하는 사람이 없고 그것으로 인해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또한 사탄이 주재하고 주관하는 사람이나 어떤 것은 없다. 반대로, 사탄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지시와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물 한 방울, 모래 한 알도 함부로 만질 수 없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개미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이 만든 인류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눈에 사탄은 산속의 백합만도 못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만도 못하며, 바닷속의 물고기만도 못하고, 땅 위의 구더기만도 못하다. 만물 가운데서 사탄의 역할은 만물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성이 얼마나 악독하고 본질이 얼마나 사악하든지 상관없다. 사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분수껏 자신의 기능을 —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 지키며 부각물*이라는 역할을 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본질이자 본래의 자리인 것이다. 사탄의 본질은 생명과 무관하고, 능력과 무관하며, 권능과 무관하다. 사탄은 하나님 수중에 있는 장난감일 뿐이며,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사탄의 본모습을 알게 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권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권능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권능이든 능력이든 그것은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서, 그 어떤 부정적인 것들과도 무관하며,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과도 무관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생명이 있고 활력이 넘치는 어떤 형식의 것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은 모든 생명체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기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생존하며 지속된다. 그 후에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를 주재하고 주관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틀림이 없었으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갖추지 못한 것이며, 창조주만이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권능이라 부른다. 이것이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그러므로 ‘권능’이라는 이 단어 자체나 권능의 본질은 오직 창조주와 관련이 있다. 이는 그것이 창조주만의 신분과 본질의 상징이기 때문이며, 창조주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창조주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권능’이라는 이 단어와 관련이 있을 수 없다. 이 역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사탄이 욥을 호시탐탐 노렸을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욥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사탄의 본성이 사악하고 잔인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후에는 사탄도 하나님이 지시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욥에게 임할 때, 사나운 늑대가 양 떼에 침입하듯 사납게 날뛰었을지라도, 감히 하나님이 정해 준 범위를 망각할 수 없었고,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사탄은 어떻게 해도 감히 하나님 말씀의 원칙과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냐? 이 점에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그 어떤 말도 사탄은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사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고 천상의 법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 뒤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상의 법을 어기며 위반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하나님의 권능을 넘어서고 천상의 법규에 대항한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 결과는 도대체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사탄이 욥, 한 사람에게 행한 일은 사탄이 인류를 타락시킨 축소판일 뿐이다. 그리고 사탄이 그 일을 벌일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해 준 범위와 내린 명령은 사탄이 모든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원칙의 축소판일 뿐이다. 또한 사탄이 그러한 일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는 사탄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의 축소판일 뿐이다. 사탄이 욥을 시험하던 그 일에서 보인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사탄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께 감히 대항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축소판일 뿐이다. 이러한 축소판이 너희에게 주는 경고는 무엇이냐? 사탄을 포함한 만물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감히 창조주가 정한 천상의 법칙과 규칙을 어기지 못하며, 그런 법칙과 규칙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저항자에 대한 창조주의 처벌을 바꾸거나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만이 천상의 법칙과 규칙을 정할 수 있고, 창조주만이 그러한 법칙과 규칙을 시행할 능력이 있으며, 창조주의 능력만이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만의 권능이며, 이 권능은 만물 가운데 가장 높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크고 사탄이 그다음이다’라는 말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유일무이한 권능을 가진 창조주 외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다. … 지금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이상의 내용을 나누었으니 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럼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하나님의 권능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만의 지위를 상징하지 않느냐? 만물 가운데 너는 어떠한 일들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느냐? 어떻게 보았느냐? 사람이 경험하는 사계절에서 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에 대한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봄에는 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진다. 이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어느 한 면으로 구현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자 빛이 있었는데, 이 ‘빛’은 지금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의 존재는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이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공기가 지금도 존재하지 않느냐? 인류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기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누가 빼앗아 갈 수 있느냐? 누가 그것의 본질과 기능을 바꿀 수 있느냐? 하나님이 나눈 낮과 밤, 주야를 정한 법칙을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사탄을 포함해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밤이 되었을 때, 잠을 자지 않고 대낮처럼 보낼지라도 역시 밤이다. 네가 너의 생활 규칙을 바꾸었지만, 낮과 밤이 교체되는 법칙은 바꿀 수 없다. 이 사실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사자에게 소처럼 밭을 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코끼리를 나귀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닭을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늑대를 양처럼 풀을 먹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물속의 물고기를 육지에서 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왜 없을까? 하나님이 그들을 물속에서 살도록 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물속에서 살아야 한다. 육지에서는 살 수 없어 죽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만물은 모두 자기만의 생존 법칙과 범위가 있고, 각각 자기만의 본능이 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창조주가 정한 것으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자는 영원히 사람과 격리된 야생 세계에서 살지, 영원히 소처럼 충직하게 성실하게 사람과 함께하며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없다. 코끼리와 나귀는 다 동물이고 네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숨을 쉬는 피조물이지만, 그들은 다른 종이다. 그들은 각자 하나님에 의해 종류가 구분되고 모두 각자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서로 바뀔 수 없다. 닭도 두 다리를 가지고 있고 독수리처럼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나무 위에 날아오를 수 있을 뿐 영원히 하늘을 날 수 없다. 이것은 닭의 본능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정해진 것이 자명하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발전해 오면서, 인류의 과학은 ‘일취월장’했다고 할 수 있다. 과학 탐구 과정에서 이룩한 성과가 ‘과히 놀랄’ 정도이니, 인류의 재능은 날로 커지고 있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유독 한 가지만은 인간의 과학으로 돌파하지 못한다. 인류는 비행기를 만들고, 항공 모함을 만들고, 원자 폭탄을 만들고, 우주로 날아가고, 달나라에 착륙하고, 네트워크를 발명하여 하이테크 시대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숨 쉴 수 있는 생물은 만들어 내지 못한다. 어떤 생물의 본능과 생존 법칙 및 각종 생물의 생사윤회에 대해서 인류의 과학은 무능하고 통제할 수 없다. 이로부터 인류의 과학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 달했든 창조주의 생각 하나에도 비할 수 없고, 창조주의 만물 창조의 오묘함과 창조주 권능의 위력은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구상의 바닷물이 그렇게 많아도, 하나님이 각자에게 경계를 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껏 함부로 자신의 범위를 넘어 육지로 올라온 적이 없다. 그들은 정해 준 대로 있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움직이라고 말씀할 때에야 움직일 수 있고, 그들이 어디로 가고 어디에 머무를지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늘 하는 말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 결정할 권리가 있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만물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뀌는 것이지 사람의 의지로는 바뀔 수 없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천지 만물, 우주, 별, 1년 사계절, 사람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은 다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할 당시의 법칙에 따라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 존재하고 운행되며 변화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것의 법칙을 바꿀 수 없으며, 그것 본래의 운행 궤적을 바꿀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소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다. 여기까지 말했는데,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한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하나님의 권능이 어떠한 피조물이나 비피조물이 갖출 수 있는 것이냐? 그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모방하고 따라 하고 대체할 수 있는 것이냐?

예수가 바리새인을 꾸짖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막 3:21~22)

둘째 날, 하나님이 권능으로 물을 지배하고 궁창을 창조함으로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 공간이 만들어졌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창 1:6~7)

욥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고 화복을 따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성경에 기록된 욥의 이야기에서 언급한 적이 없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중점이다. 욥은 비록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귀로 듣지도 못했지만, 욥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위치가 있었다. 욥은 하나님을 어떤 태도로 대했을까? 바로 앞에서 말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것과 같다. 이 ‘찬송’은 조건이 없고 배경이 없고 그 어떤 원인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욥이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주관하게 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욥의 마음에서 생각한 것과 작정한 것과 계획한 것은 다 하나님에게 봉해져 있지 않고 열려 있었으며, 마음은 하나님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욥은 하나님에게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 달라고, 무엇을 베풀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을 그렇게 경배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지나친 욕망도 품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에게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토색하지도 않았다. 욥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은,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자신이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든 화를 입든,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은 바뀔 수 없기에,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하나님의 이름은 당연히 찬송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화를 입는 것도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은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하고 있으며, 조석으로 변하는 사람의 화복은 모두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의 창현(彰顯)이며, 어느 각도에서 보든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것은 욥이 한평생 체험하고 인식한 것이다. 욥의 그런 모든 마음과 행위는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고, 하나님 앞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은 그것을 귀히 여겼다. 하나님은 욥의 그런 인식을 소중히 여겼고, 욥에게 있게 된 그런 마음도 소중히 여겼다. 그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에게 임하게 될 모든 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욥은 하나님에게 요구가 없었다. 욥이 자신에게 요구하여 행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안배를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마주하고, 순복하는 것이었다. 욥은 이것을 자신의 직책으로 여겼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이 원했던 것이기도 하다.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거나, 무엇을 분부하거나, 무엇을 가르치거나, 무엇을 타이르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다. 지금의 말로 하면 바로 하나님이 그 어떤 진리 방면에 관해 깨우쳐 주고 인도하고 공급해 주지도 않은 상황에서, 욥에게 그런 인식이 있고 하나님을 대하는 그런 태도가 있게 된 것은 매우 대견스러운 일이다. 욥의 그런 표현들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족한 것이며, 욥의 간증은 하나님이 칭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욥은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들은 적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욥의 마음과 그 본인은, 하나님 앞에서 심오한 도리만 말하고 큰소리만 치고 제물을 바치는 말만 할 뿐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참된 인식도 없고 하나님에 대해 참된 경외가 없는 그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소중하다. 그것은 욥의 마음이 순결하고 하나님에게 숨기는 것이 없으며, 욥의 인성이 성실하고 착하며 정의와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성을 갖추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권병과 큰 능력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다. 그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다. 그것은 그런 사람이 화복을 따지지 않기 때문이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장악되어 있기에 사람의 걱정은 무지몽매한, 이지 없는 표현이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에 대해 의심의 태도를 갖고 있는 표현이자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욥의 이런 인식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다. 지금 보면,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이론적 인식은 너희가 알고 있는 만큼 많았느냐? 하나님이 그때 했던 사역과 말씀은 아주 적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려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욥에게 그런 성과가 있게 된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욥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한 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는데, 하나님에 대해 그런 태도가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욥의 인성과 그 자신의 추구로 말미암아 도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욥의 인성과 추구는 지금 사람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때, 그 시대에, 하나님은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서 벌써 욥을 그렇게 평가하고 있었고 그런 결론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물며 지금이야 더 말할 것이 있을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감추고 있지만 만물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사는 충분히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력하지도 못했지만,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과 시련 속에서 한 간증은 누구나 다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기쁨과 칭찬을 받았으며, 사람들의 부러움과 인정을 받았고, 더욱이 사람들로부터 찬탄도 받았다. 욥의 일생은 평범하였고 위대하지 않았다. 여느 평범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그 평범한 몇십 년의 세월에서, 욥은 일반 사람들이 얻지 못한 하나님의 도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고, 일반인이 체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큰 능력과 하나님의 주재도 체험하고 깨달았던 것이다. 욥은 그 어떤 일반인보다 총명하지 않았고, 초강력 생명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더욱이 사람이 볼 수 없는 ‘특이한 재능’도 없었다. 하지만 욥은 대부분의 일반인들이 갖추지 못한, 성실하고 착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인성 품격을 갖추었으며,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고 굳세고 의연하고 생각이 세밀하였다. 그러므로 욥은 평범한 나날에서 하나님이 행한 모든 비범한 일들을 보았고, 하나님의 위대함,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공의로움도 보았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과 은총과 보호를 보았으며, 지고지상한 하나님의 존귀와 권병도 보았다. 욥이 일반인이 얻지 못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원인은, 순결한 마음이 있고, 마음이 하나님께 속하고, 마음이 조물주에게 끌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원인은 욥이 추구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은 완벽한 사람이 되고, 순전한 사람이 되고, 하늘의 뜻에 따르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악에서 떠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했던 것이다. 욥이 갖춘 것과 추구한 것은 모두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지 못한 배경에서 한 것이다. 욥은 비록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방식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지혜도 느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지 못했지만, 사람에게 베풀어 주고 사람에게서 거두어 가는 일은 다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욥이 보낸 세월은 보통 사람들과 별다른 점이 없었다. 하지만 평범한 삶은 욥이,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일을 알아가는 것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걷는 것에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욥의 눈에는 하나님의 행사가 만물의 운행 법칙 가운데 충만했고, 하나님의 주재도 사람의 생활 속에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행사가 어디에나 다 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다. 욥은 자신의 평범한 나날 속에, 생활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비범하고 기묘한 행사를 보고 체험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기묘한 안배도 볼 수 있었다. 하나님이 ‘감추고’ ‘침묵’하는 것은 결코 욥이 하나님의 행사를 체험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욥의 일생은, 평범한 삶 속에서 만물 가운데 숨겨진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를 체험한 것이다. 욥은 평범한 나날을 보내면서, 만물 가운데서 침묵을 지키지만 또 만물의 운행 법칙을 주재하면서 발표하는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깨달음을 얻었다. 보다시피, 사람이 욥과 같은 인성을 갖추고 욥처럼 추구한다면, 욥과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고 그런 인식을 얻을 수 있으며, 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일에 대한 깨달음과 인식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지 않고 말씀하지도 않았지만, 욥은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고 말씀하지 않은 전제하에서, 만물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일은, 충분히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을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큰 능력과 하나님의 권병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이 욥 같은 그런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따르는 일반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비록 논리적으로 추리한 것일지라도 사물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상이 마음 같지는 않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은 마치 욥, 한 사람만의 특허인 듯,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을 언급하면 욥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욥’이라는 딱지가 붙여져 있어 다른 사람과는 무관한 것 같다. 이런 결과가 초래된 원인은 아주 분명하다. 욥만이 성실하고, 착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인성 품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욥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너희도 틀림없이 깨달았을 것이다. 즉, 모든 사람들은 성실하고, 착하고, 정직하고, 공평과 공의를 좋아하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인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악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늘 하나님의 기쁨을 얻지 못하고, 시련에서도 굳게 서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욥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다 여전히 사탄에게 얽매이고, 사탄의 올무에 걸려 있다. 그들은 다 사탄이 참소하고 공격하고 해치고 삼킬 대상들이고, 다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며, 다 사탄에게 감금된 죄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