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성경 및 하나님이 욥을 평가한 말씀

2018년 08월 31일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1:1)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5)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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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첫 번째 구절을 보자.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말은 성경 기록 중 욥을 평가한 첫 번째 말이다. 이것은 욥에 대한 욥기 저자의 평가로서, 당연히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를 의미한다. 그 평가는 이렇다.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다음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이 두 평가 중 하나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욥의 행위와 모습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칭찬까지 얻었음을 말해 준다. 즉, 욥이 사람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늘 자신의 행위와 마음을 하나님 앞에 놓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 비친 그는 땅에서 유일하게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욥이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모습

욥,악을 멀리하고,하나님을 경외하다,

이어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모습들을 살펴보자. 위와 아래 이 두 성경 구절을 제외하고, 1장 5절을 보자.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사례이다. 이 사례는 평소 생활 속에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는지와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늘 이렇게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이 잔치를 열 때,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욥은 이 일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느냐? 원문에는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라고 묘사되어 있다. 욥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이 결코 외부적인 행동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일상생활 속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악한 일을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늘 아들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는 욥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매우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도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배반할까 걱정했음을 말해 준다.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진실했으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욥은 어쩌다가 한 번씩 그랬느냐, 아니면 항상 그랬느냐? 원문 마지막 구절에는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욥이 가끔, 혹은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을 때 들여다본 것이 아니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 욥이 항상 아들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고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항상’이란 하루 이틀이나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의 태도는 일시적인 것도, 단지 인식상에만 머문 것도, 그저 입으로만 떠든 것도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 그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했으며, 삶의 근본으로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뜻한다. 욥이 항상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항상 두려워했으며, 자신의 자녀들도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걱정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길이 그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욥이 항상 이렇게 행한 이유는 그의 마음속에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악행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두려워했고,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아울러 그는 자녀들을 위해 걱정하며 자녀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두려워했다. 이런 것들은 욥의 일상생활에서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정상적인 모습들이 바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것이 빈말이 아님을 입증하고,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삶을 실제로 살았음을 입증한다. 즉,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라는 말로 욥이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행한 모든 행동을 우리에게 알려 준 것이다. 욥이 항상 그렇게 행함으로 그의 행동과 마음은 늘 하나님 앞에 있지 않았느냐? 다시 말해, 하나님은 늘 그의 마음과 행동을 열납하지 않았느냐? 욥은 어떤 상황과 배경에서 항상 그렇게 했느냐? 혹자는 하나님이 항상 그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하며, 혹자는 욥이 악에서 멀리 떠나고자 하는 사람이었기에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 혹자는 욥이 자신의 재산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면 재산을 잃게 될까 두려워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이 다양한 견해들은 다 사실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욥을 열납하고 귀하게 여긴 이유는 그가 ‘항상 이러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욱이 욥이 사탄에게 넘겨져 시험받았을 때,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탄 앞에서 보인 그의 모습 때문이다. 다음의 구절들이 바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이 증거들을 통해, 우리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욥에 대한 사람들의 많은 오해

욥이 겪은 고통스러운 일은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직접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욥의 고통받은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욥은 자신이 평소에 마음속에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 평소의 행동 원칙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전부 드러냈다. 그것은 다 진실한 것이었다. 만일 욥에게 시험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에게 시련을 주기 전에, 욥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욥이 매우 위선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아주 많은 재산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만일 욥이 시련을 받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욥이 큰소리치기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그가 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는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이 임하면 분명 하나님의 이름을 버릴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아 하고, 자신에게 임하지 않았으면 하며, 임할까 봐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차마 볼 수 없었던 그런 지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여전히 그의 순전함을 지킬 수 있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의 그때의 반응에, 공리공론을 즐기며 글귀만 늘어놓기 좋아하던 자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지만 하나님에게서 오는 시련을 받아들인 적이 없던 자들은 욥이 지켜 낸 순전함에 의해 정죄받았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지킬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 자들도 욥의 증거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행동과 그의 말을 두고 혹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혹자는 질투를 하며, 혹자는 의혹을 품는다. 심지어 무시하는 태도로 욥의 증거에 대해 코웃음 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욥이 시련 속에서 받았던 고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욥이 했던 말도 들었고, 시련이 임했을 때 그가 보여 준 인간성의 ‘나약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나약함’은 그들이 생각하는 욥의 이른바 순전함 중의 순전하지 않은 부분인 동시에, ‘하나님 안중의 순전한 자’의 흠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순전한 자’는 ‘완벽한 사람’, 즉 흠도 없고 오점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나약함이 없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며, 또한 아파하고 슬퍼하는 정서도 없고, 증오도 없으며, 과격한 행동도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이 진정으로 순전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많은 행동들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욥은 사람들의 상상처럼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고 대성통곡한 것이 아니다. 그의 이러한 ‘예상을 벗어난 행동’은 사람들에게 그를 냉혈 인간으로 보이게 했던 것이다. 그에게서는 눈물도 혈육의 정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처음에 욥이 사람들에게 남긴 ‘나쁜 인상’이었다. 이어지는 욥의 일련의 행동들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겉옷을 찢는’ 행동을 하나님에 대한 불경한 행동으로 보았으며, ‘머리털을 미는’ 행동을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께 대드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욥이 말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 말 외에 사람들은 욥에게서 하나님이 칭찬한 그 어떤 의로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그저 이해되지 않아 하거나 오해하거나 의심하거나 정죄하거나 도리적으로 인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욥에 대해 위와 같은 인상을 받은 데다가 욥의 의로움에 한층 더 의구심을 품었다. 욥이 했던 것과 성경에 기록된 그의 행동은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도 울릴 만큼 큰 감동을 선사할 것이라는 사람의 상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장거’를 이룩하기는커녕, 고작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던 것이다. 이 행동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욥의 의로움에 의혹을 품게 하고, 심지어는 부정하는 태도를 갖게 하였다. 욥은 몸을 긁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맹세한 적이 없었고, 통곡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사람들은 욥에게서 그의 나약한 모습만 보았을 뿐, 다른 것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욥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지라도 그 말에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거나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었으며, 욥의 말에서 그의 의로움을 볼 수 없었다. 시련의 고통을 겪고 있던 욥이 사람들에게 준 인상은 대체로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 이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보지 못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과 그가 어떤 원칙으로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고 있는지를 보지 못했다. 그의 비굴하지도 않고 거만하지도 않은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이 그저 빈말일 뿐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 역시 그저 전설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그의 ‘나약함’에 대해서는 인상이 깊었다. 또한 그 ‘나약함’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의했던 순전하고 정직한 자를 ‘다시 보게’ 되었으며, 심지어 ‘새롭게 이해’하기까지 했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때, 내가 말한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과 ‘새로운 이해’가 여기에서 입증되었다. 아무도 욥이 고통받은 정도를 상상하거나 느낄 수 없지만, 욥은 ‘대역무도’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몸의 고통을 줄여 보고자 성경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뿐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욥 3:3). 아무도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다. 너희가 보기에 이 말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뜻이 있느냐? 이 말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뜻이 있느냐? 나는 너희 대부분이 욥의 이 말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너희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라면 그 어떤 나약함을 보여서도 안 되고 슬퍼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탄의 모든 공격에 직면해야 하고, 심지어 웃으면서 사탄의 시험을 마주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사탄이 욥의 육체에 어떤 고통을 가해도 욥은 마땅히 아무런 반응도 없어야 하고, 자신이 느꼈던 어떤 것도 표현하지 말아야 하며, 심지어 하나님께 더 강력한 시련을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강직한 자가 마땅히 보여 주고 갖춰야 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욥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그저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을 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뜻은 더욱 없었다. 이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진짜로 행하기는 아주 어렵다. 예부터 지금까지 욥과 같은 시험을 받아 본 자가 없을뿐더러, 욥과 같은 상황을 겪어 본 자도 없기 때문이다. 왜 욥과 같은 시험을 받은 자가 아무도 없겠느냐? 이는 하나님이 보기에 이러한 책임과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으며, 욥이 해낸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욥처럼 이러한 고통이 임했을 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지금 욥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욥의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냐? 의인인 자, 이처럼 하나님을 증거한 자, 사탄으로 하여금 머리를 감싸고 도망쳐 다시는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지 못하게 한 자를 칭찬한다고 해서 안 될 게 뭐가 있느냐? 설마 너희의 요구 기준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것이냐? 너희는 시련이 닥쳤을 때 욥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나님도 칭찬했는데 너희가 무슨 이견이 있느냐?

예수가 이적과 기사를 행하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요 11:43~44)

넷째 날, 하나님이 또 한 번 권능을 행하자 인류의 절기와 날짜와 연도가 탄생되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창 1:14~15)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1~13) 만물을 창조한 후, 창조주의 권능이 ‘무지개 언약’으로 또 한 번 입증되고, 나타나다 창조주의 권능은 언제나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나타나고 행사된다. 그는 만물의 운명을 주재할 뿐만 아니라, 그가 친히 빚은 인류, 즉 다른 구조와 형식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특별한 피조물 역시 주재하고 있다. 만물을 창조한 후에도 창조주는 그의 권능과 능력을 나타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만물과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권능을 본격적으로 행한 것은 인류가 그의 손에 의해 탄생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인류를 경영하고 주재하기로 하였고, 인류를 구원하기로 하였다. 또한 진정으로 인류를 얻고자 하였는데, 바로 만물을 관리할 수 있는 인류를 얻고자 한 것이다. 그는 그러한 인류가 그의 권능 아래에 살아가며, 그의 권능을 알고 그의 권능에 순종하게 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으로 그의 권능을 나타내고, 그의 권능으로 자신의 말씀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권능은 어디서든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좀 더 친숙한 일부 특별 사례들만을 뽑았다. 이것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유일무이함과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권능을 이해하고 알게 하겠다. 창세기 9장 11절에서 13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기록과 관련된 말씀과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다른 부분도 있다. 유사한 부분은 무엇일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행한 것이다. 다른 부분이라면 이 단락의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라는 점이다. 이 대화는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사람에게 언약에 대해 알려 주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그때 권능을 행한 것은 사람과의 대화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인류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와 명령이었으며, 그가 만들고자 하는 피조물에게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대상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사람과의 대화이며, 또한 그가 인류에게 하는 당부와 훈언이고, 그가 만물에게 하달하는 권능을 지닌 명령이었던 것이다.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일들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느냐? 거기에는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세우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더 이상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을 것임을 알려 주고, 또한 이를 위해 하나님이 증거를 세운다고 하였다. 그 증거는 무엇이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이것은 창조주가 인류에게 한 원래의 말씀이다. 그가 말씀함과 동시에 무지개가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너희는 다 무지개를 본 적이 있을 텐데, 무지개를 보았을 때, 이 무지개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고 있느냐? 과학으로는 이 사실을 논증할 방법이 없다. 과학으로는 그 근원을 찾지 못했으며, 그것의 행방도 찾지 못했다. 이것은 창조주가 사람과 세운 언약의 증거이기 때문에, 과학적 근거는 필요 없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말씀이 있고 난 후, 권능이 지속되는 결과인 것이다. 창조주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과 세운 언약과 약속을 지켜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무지개를 출현시켜 하나님이 세운 언약의 증거로 삼은 것은 창조주에게나 창조된 인류에게 있어,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천상의 규율이자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변함없이 지속되는 이 법칙은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난 후 그의 권능이 또 한 번 진정으로 구현된 것이며, 창조주의 권능과 능력이 무한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지개’를 그 언약의 증거로 삼은 것은 창조주 권능의 지속과 연장선인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이 또 한 번 말씀으로 행한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세운 언약의 증거이다. 이는 그가 무엇을 이루고자 결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이루고, 어떤 방식으로 성취하겠다고 하면, 그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말씀이 있고 난 몇천 년 후인 오늘날에도 인류는 하나님이 말씀한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인해, 그 일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 무지개를 없어지게 할 수 없고, 그것의 규칙을 바꿀 수도 없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인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면 반드시 책임지고, 책임지는 이상 반드시 이루며,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영원까지 지속된다.” 이 말은 여기서 아주 명확하게 구현되는데, 바로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확실한 증거이자 특징이다. 이러한 증거와 특징은 그 어떤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고, 그 어떤 피조물에게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어떤 비피조물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와 특징은 유일무이한 하나님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 특유의 신분과 본질을 피조물과 구분시켜 준다. 아울러, 그것은 하나님 자신 이외의 모든 피조물과 비피조물이 영원히 초월할 수 없는 증거이자 특징인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사람과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그는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줌과 동시에 그의 뜻도 알려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특별한 증거를 사용해서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그 증거로 그가 사람과 세운 언약에 확신을 준 것이다. 이 ‘언약’을 세웠다는 것이 하나의 큰 사건이 아니냐? 얼마나 큰 사건일까? 바로 그 ‘언약’의 특별함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약이 아니며, 또 단체와 단체 간의 언약도 아니다. 더욱이 한 국가와 또 다른 국가 간에 세운 언약도 아니며, 창조주가 인류 전체와 세운 언약이다. 이 ‘언약’의 유효 기간은 창조주가 만물을 폐기하는 그날까지이며, 이 ‘언약’의 시행자는 창조주이고, 그것의 수호자 역시 창조주이다. 요컨대, 인류와 세운 ‘무지개 언약’의 모든 것은 창조주와 사람의 대화에 따라 응하고 이루어졌으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권능에 순종하고, 따르고, 신뢰하며, 그 권능을 깨닫고 목도하고 칭송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느냐? 유일무이한 하나님 이외에 이러한 언약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매번 무지개가 나타나는 가운데, 그것은 인류에게 창조주가 사람과 세운 ‘언약’을 알려 주고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창조주가 인류와 세운 언약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가운데, 그것이 인류에게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은 ‘무지개’와 ‘언약’ 자체가 아니라, 창조주의 영원불변의 권능인 것이다. 무지개의 출현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창조주가 은밀한 곳에서 행하는 놀랍고도 오묘한 행사이며, 창조주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변치 않는 권능의 생생한 구현이다. 이런 것들은 창조주의 또 다른 면에서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권능의 구현이 아니냐?

사탄이 다시 욥을 시험하다(온몸에 악창이 나다)

1)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 2:6) 2) 사탄의 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4~5) 3) 욥은 시련을 어떻게 대했는가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9~10)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욥 3:3) 욥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길을 귀하게 여겼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사탄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첫 번째 시련에서 보인 욥의 반응과 모습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평가는 사탄의 시험을 당하기 전의 평가와 똑같았다. 즉, 시험이 임하기 전에 욥은 하나님 눈에 순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와 그의 가족을 지켜 주었으며, 그에게 복을 내린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 눈에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시험을 겪은 후,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고 해서 입으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였다. 욥의 실제적인 행동에 하나님은 갈채를 보냈으며, 만점을 부여했다. 욥의 눈에는 모든 재산이든 자녀든 하나님을 버릴 만큼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그 어떤 재산이나 자녀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이 처음의 시험을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사랑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대한 욥의 애정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었다는 것을 보았다. 이번 시련이 욥에게는 단지 여호와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가 다시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게 되는 경험을 한 것일 뿐이었다. 욥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의 마음을 씻는 진실한 체험이었으며, 그의 인생을 충실하게 하는 생명의 세례였다.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과 경외심을 검증하는 한 차례의 풍성한 잔치였다. 이번의 시험으로 욥은 부자의 신분에서 무일푼의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으며, 동시에 사탄으로부터 해를 입었다. 욥은 자신이 무일푼이 되었다고 해서 사탄을 증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탄의 졸렬한 행위로 인해 사탄의 추함과 비열함을 보았으며, 사탄이 하나님께 적대감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영원히 지키겠다고 더욱 굳게 마음먹는 계기가 되었다. 욥은 맹세했다. ‘재산, 자녀, 가족 같은 어떤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저버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며, 절대 사탄의 노예나 재산의 노예, 그 어떤 사람의 노예도 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어떤 누구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욥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다. 시험을 다른 시각으로 봤을 때 역시 욥은 얻은 것이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에게 준 시련에서도 얻은 바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의 인생에서 욥은 여호와 하나님의 행사를 보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내려 준 복을 받았다. 하지만 그러한 복은 욥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고, 더 빚진 마음이 들게 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없는데도 이와 같은 큰 복을 받아 참으로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은 늘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울러,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랐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순종과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이 그의 순종을 검증하고 그의 믿음을 정결케 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욥은 이번에 시련이 임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이런 기회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기에 전혀 태만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욥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소원이 실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회가 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과 경외심이 검증받을 수 있고, 아울러 정결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이로부터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욥은 이와 같은 믿음과 추구가 있었기에 이번 시련에서 더욱 순전해질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또한, 욥은 하나님이 내려 준 복과 은혜에 더욱 감사했으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더욱 찬양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앙망하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위대함과 거룩함을 더 간절히 사모했다. 이때의 욥이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을지라도, 욥의 경험과 체험을 놓고 봤을 때 욥의 믿음과 인식은 엄청난 진보와 발전이 있게 되었다. 그의 믿음은 커졌고, 그의 순종은 목표에 도달했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한층 더 깊어졌다. 비록 이번 시련으로 욥의 마음과 생명이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되었지만 욥은 이로 인해 만족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욥은 이번 시련에서 자신이 얻은 수확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고, 또 자신의 결점과 부족한 부분들을 성찰해 보았다. 아울러, 그는 묵묵히 기도하며 다음 시련을 기다렸다. 욥은 자신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하나님의 또 한 번의 시련을 통해 승화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언행 하나하나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살피고 있다. 욥의 생각은 여호와 하나님의 귀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 다시 한번 예상대로 임했던 것이다.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진정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를 느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에게 질문을 하자, 사탄은 속으로 기뻐했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 눈에 완전한 사람을 공격할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탄에게는 이 얼마나 얻기 힘든 기회인가! 사탄은 이 기회를 틈타 욥의 믿음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렇게 하여 욥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은 언제든지 욥을 자기 수중에서 멋대로 우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자신의 사악한 의도를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을지라도 그의 악독한 본성은 억제할 수 없었다. 그 실상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탄의 대답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4~5). 사탄의 이 말에서 사람은 자연히 사탄의 악독함에 대해 실제적인 인식과 느낌을 갖게 된다. 사탄의 이런 황당무계한 논리를 듣게 되면, 진리를 사랑하고 사악함을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탄의 비열함과 파렴치함을 증오할 것이다. 또한 사탄의 그릇된 논리에 염증과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욥을 위해 기도와 축원을 올릴 것이다. 정직한 자가 더 순전해질 수 있기를 기도할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가 영원히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빛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살기를 바랄 것이다. 또한, 욥의 의로운 행동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을 영원히 편달하고 격려하기를 바랄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사탄의 이러한 말 속에서 사탄의 악독한 속셈을 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아주 흔쾌히 사탄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다만 사탄에게 또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 2:6). 사탄이 이번에는 손을 뻗어 욥의 뼈와 살을 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의 뜻은 욥의 육체를 사탄의 손에 붙이지만 그의 생명은 보존해야 하며, 그의 생명을 앗아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어떠한 방식과 수단으로 욥을 대해도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 사탄은 허둥지둥 욥의 앞에 이르러 손을 뻗어 그의 살가죽을 쳤으며, 그의 온몸에 악창이 나게 했다. 욥은 살가죽의 통증을 느꼈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기묘함과 거룩함을 찬양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사탄은 더 길길이 날뛰었다. 사탄은 사람을 해치는 쾌감을 느꼈기 때문에 손을 뻗어 악창이 난 욥의 살을 움켜쥐어 곪아 터지게 했다. 그 순간 욥은 피와 살에 너무나 큰 통증을 느껴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온몸의 피부와 살을 문질렀다. 마치 그러면 육체의 통증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듯이 말이다. 욥은 하나님이 곁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더 강해지려고 애를 썼다. 그리하여 또 한 번 무릎 꿇고 엎드렸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사람의 고통을 살피시나이다. 당신께서 어이하여 사람의 나약함까지 생각해 주시나이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사탄은 욥이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보았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에 사탄은 급하게 손을 뻗어 욥의 뼈를 쳤다. 욥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욥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을 느꼈다. 마치 살가죽이 뼈에서 벗겨지는 것 같았고, 또 뼈가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화살이 심장을 뚫는 것 같은 통증에 그는 죽는 것보다 못한 느낌이 들었다. 욥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극한에 달했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으며, 몸의 살가죽을 뜯어내 통증을 덜어 내고 싶었다. 그러나 욥은 참고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몸의 살가죽을 뜯어내지도 않았다. 욥은 사탄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욥은 또다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하지만 이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그의 앞에, 그의 뒤에, 그의 좌우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가 아파할 때 아파하는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으며, 그때는 얼굴을 가리고 자신을 숨겼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의미는 고통받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욥은 눈물을 흘렸다. 욥은 몸의 통증은 억지로 참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었다.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존재입니다. 너무 연약하고 무기력하며 여리고 무지합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어찌하여 이처럼 생각해 주고 긍휼히 여기시나이까? 당신께서 저를 치시고 오히려 당신이 고통스러워하시나이다. 사람이 무슨 가치가 있어 당신께서 생각해 주고 마음에 두시나이까?’ 욥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지만, 하나님은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사탄은 수를 다 썼어도 성과가 없자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은 결코 이로 인해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욥에게서 나타낼 큰 능력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는 사탄의 퇴각으로 인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더 멋진 장면은 각 인물의 출현에 따라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또 다른 모습은 범사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이다 욥이 사탄의 온갖 학대를 받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을 때, 가장 먼저 그의 아내가 나서서 사람이 볼 수 있는 사탄의 역할을 하며 욥을 공격했다. 성경 말씀은 이와 같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이것은 사탄이 사람의 모습으로 한 말이었다. 이 말은 공격과 참소의 의미를 띠고 있었고, 유혹과 시험과 훼방의 의미도 띠고 있었다. 사탄은 욥의 육체를 공격해도 소용이 없자 직접 욥의 순전함을 공격하였다. 이를 통해, 욥이 그의 순전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게 하여 계속 살아가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사탄은 또한 이러한 말을 빌려 욥을 유혹하고자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린다면 그 모든 고통을 참지 않아도 되고 그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니라.’ 아내의 권고를 듣고 욥은 이렇게 질책하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이 말은 욥이 오랫동안 쌓아 온 인식이다. 다만 욥이 이 말을 인식한 것에 대한 진실성이 이때 입증되었을 뿐이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권고하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말했다. 그 의미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 대하는데 어찌해서 그 하나님을 버리지 않느냐? 당신이 그렇게 살아서 뭐하냐?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렇게도 불공평한데 당신은 계속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받을지라고 말하다니, 그의 이름을 찬송하는데 왜 당신에게 화를 입게 하느냐? 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버려라. 다시는 그 하나님을 따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당신의 재앙은 사라지리라.’라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이 보고자 했던 욥의 증거가 또다시 나왔다. 이런 증거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며, 우리가 성경의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욥이 이러한 말들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보았다. 단지 하나님은 이번 기회에 욥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맞다는 것을 실증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내의 그런 권고를 듣고도 욥은 자신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버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이 말은 매우 무게가 있지 않으냐? 여기에는 이 말이 매우 무게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딱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칭찬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원하고 듣고 싶어 했던 말이며 보고 싶어 했던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 역시 욥이 증거한 것 중의 정수에 해당한다. 여기서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욥의 귀함은 바로 그가 시험을 받고 온몸에 악창이 났을 때, 즉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의 아내와 친족들의 권고에도 여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시험이나 아무리 큰 환난과 고통이 찾아와도, 설사 죽음이 찾아올지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버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하나님의 자리가 가장 크며,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욥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볼 수 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은 입술로 범죄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은 하나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미움을 사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다. 그의 마음과 입은 일치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본 참된 욥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이 욥을 귀하게 여겨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가 바리새인을 꾸짖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막 3:21~22)

하나님은 전능과 지혜로 만물에게 공급해 주고, 인류의 생존을 유지한다.

처음에 우리는 사람의 생존 환경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생존 환경을 주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무엇을 예비했는지, 무엇을 처리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예비한 만물 간의 관계는 어떠한지, 그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여 만물이 인류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하나님은 만물이 가져온 여러 요소가 인류 환경에 초래한 부정적인 영향을 해결하여 만물이 각각의 역할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또 인류에게 유익한 환경과 다양한 요소를 만들어 인류가 이런 환경에 잘 적응하고 정상적인 종족 번식을 이루면서 윤회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음으로는 인체에 필요한 먹거리, 즉 일상의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 또한 인류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갖춰져야 할 조건이다. 사람의 육체는 숨만 쉬면서 살 수 없고 햇빛만 보며 살 수 없고 바람만 쐬며 살 수도 없으며 적절한 온도만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배를 채울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하다. 배를 채우는 음식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단 하나의 부족함도 없도록 예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식량의 유래이다. 풍부한 산물인 식량의 유래를 알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인류에게 공급하고, 만물에게 공급하는 근원이라 할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할 때 나무나 풀만 만들거나 각종 생물만 만들었고, 그 생물과 식물이 오로지 소, 양, 얼룩말, 사슴 같은 동물들의 먹이밖에 되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사자는 얼룩말이나 사슴 등을 잡아먹고 호랑이는 돼지나 양 등을 잡아먹지만 이것들 중 사람이 먹기에 적합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괜찮겠느냐? 안 된다. 그렇다면 사람의 육체는 살 수 없다. 사람이 나뭇잎만 먹고 살 수 있겠느냐? 양에게 예비한 풀을 사람에게 먹으라고 하면 되겠느냐? 한 번쯤 맛보는 정도는 괜찮겠지만 계속해서 먹는다면 사람은 위가 견디지 못할 것이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어떤 것은 동물이 먹으면 괜찮지만 사람이 먹으면 독이 된다. 동물이 먹었을 때는 아무 이상이 없어도 사람이 먹으면 안 되는 유독 물질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었기 때문에, 인체의 원리와 구조, 인체에 무엇이 필요한지는 하나님이 제일 잘 안다. 하나님은 인체의 성분과 함량, 인체에 어떤 것이 필요한지, 오장육부는 어떻게 활동하는지, 어떻게 흡수하고 배출하며, 신진대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은 스스로 잘 알지 못하면서도 때로는 제멋대로 먹고 제멋대로 관리하는 바람에 지나친 몸보신으로 영양의 균형을 잃기도 한다. 하나님이 예비한 대로 정상적으로 먹고 누린다면 아무 탈도 나지 않는다. 가끔 기분이 상하는 일 때문에 기와 혈이 막히는 일이 생긴다 해도 괜찮다. 한 가지 식물을 먹으면 막혔던 혈이 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예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중에 인류는 다른 어떤 생명체보다도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은 식물을 위해 생존 환경을 예비하였고, 동물을 위해 먹이와 생존 환경을 예비하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사람의 생존 환경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가장 엄격한 잣대로 임했고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류가 정상적인 발전과 종족 번식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어쩌면 너는 이미 봤거나 누리고 있지만 보잘것없다고 여겼던 것, 혹은 원래부터 있었거나 당연히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가치를 느끼기 힘들겠지만 이는 이미 오래전에 하나님이 자신의 지혜로 너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류에게 불리한 모든 것과 인체에 해를 줄 수 있는 나쁜 요소들을 최대한 제거하고 해결하였다. 이는 무엇을 설명할까? 인류를 창조할 때의 하나님의 태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태도는 어떠하냐? 하나님은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임했으며 하나님 외의 어떤 적대 세력이나 요소, 조건의 간섭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인류를 창조하고 나아가 인류를 경영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태도는 어떠하냐? 사람이 누리는 생활 환경과 생존 환경, 식량과 일상에 필요한 것에 이르기까지, 여기에서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한 다음 인류를 위해 책임감 있는 태도로 임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결심도 볼 수 있다.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참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기묘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예측 불가능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전능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은 전능하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전 인류에게 공급하고 있고, 나아가 만물에게도 공급하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이제 하나님이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 말은 매우 확실하다. 이에 대해 어떠한 의혹도 없느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해 주는 일에서, 하나님이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만물이 생존하고, 성장하고, 번식하며, 지속할 수 있도록 공급하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생존 환경이든,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이든, 인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고 있으며, 심령에 진리를 공급하기까지 한다. 모든 면에서 봤을 때, 하나님의 신분이나 지위로 봤을 때, 인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만물 생명의 근원이다. 이 말이 맞느냐? (맞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이 물질세계의 주관자이고 주재자이며 공급자이다. 이는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의 신분이 아니란 말이냐? 이는 거짓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하늘을 나는 새를 볼 때, 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생명체는 물속에서 헤엄치며 각각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또 땅에서 사는 나무와 식물은 봄에 싹이 트고, 가을에 열매를 맺고 잎이 떨어지며, 겨울에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겨울을 보내는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생존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은 각각의 형태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고, 각각의 방식으로 그것의 생명력과 생명의 형태를 나타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모두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다. 하나님이 각각 다른 생명 형태를 가진 생물과 생명체를 주재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인류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법칙을 주관하고 있는 것은 다 인류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의 생존이 하나님께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창조주의 신분을 갖춘 하나님만이 유일무이한 권능을 소유한다

사탄의 ‘특별’한 신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여러 면의 행위에 관심을 보인다. 심지어 많은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 외에 사탄도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사탄도 이적을 보이고 인류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외에도 마음속에 사탄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탄을 하나님으로 삼아 숭배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불쌍하기도 하거니와 가증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불쌍한 것은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의 대역무도와 타고난 사악한 본질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너희에게 권능이 무엇인지, 권능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고 대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곧 권능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고지상함과 하나님의 본질을 상징한다. 하나님 자신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사탄은 자기 자신을 감히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탄은 자신이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자신이 또 만물을 주재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을까? 사탄은 만물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지 못한다! 사탄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창조한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생명이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사탄에게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느냐? 물론 없다! 사탄이 행한 일들, 사탄이 보인 이적은 무엇이냐? 능력이 맞느냐? 권능이라 할 수 있느냐? 물론 아니다! 사탄은 사악한 흐름을 주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며 방해하는 짓을 일삼는다. 몇천 년 동안, 사탄은 인류를 부패시키고 해쳤으며, 사람을 유혹해서 타락의 길로 가게 하거나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골짜기로 걸어가게 하였다. 이런 짓 말고, 사탄이 인류에게 행한 것 중에 어느 것 하나 기념하거나 칭찬하고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있느냐?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하였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해를 입었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길로 나아갔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없다면, 사탄이 행한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겠느냐? 혹자는 사탄의 모든 행위가 보잘것없는 잔재주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나는 사탄에 대한 이런 정의는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인류를 타락시키는 사탄의 악행이 보잘것없는 잔재주일까? 사탄이 욥을 해한 그런 사악한 기세와 욥을 집어삼키려던 강렬한 욕망은 단연코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욥이 소유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소와 양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찰나에 욥의 그 거액의 재산이 모두 사라졌다. 그것이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할 수 있는 것이냐? 사탄이 한 행위의 성격으로 볼 때, 사탄은 파괴, 방해, 파멸, 상해, 사악, 극악, 어둠 등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와 매치되고 어울린다. 그러므로 모든 정의롭지 못하고 사악한 것의 출현은 사탄의 행위와 떼어 놓을 수 없으며, 또한 사탄의 추악한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아무리 거만할지라도, 야심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사탄의 파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사람을 미혹하고 타락시키는 재능이 탁월하다 할지라도, 또한 사람을 협박하는 수법과 권모술수가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무리 변화무쌍할지라도 상관없다. 사탄은 지금까지 생명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만물이 생존하는 법칙과 규율을 정할 수도 없었고,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을 주관할 수도 주재할 수도 없었다. 우주에 사탄에 의해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 존재하는 사람이 없고 그것으로 인해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또한 사탄이 주재하고 주관하는 사람이나 어떤 것은 없다. 반대로, 사탄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지시와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물 한 방울, 모래 한 알도 함부로 만질 수 없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개미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이 만든 인류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눈에 사탄은 산속의 백합만도 못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만도 못하며, 바닷속의 물고기만도 못하고, 땅 위의 구더기만도 못하다. 만물 가운데서 사탄의 역할은 만물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성이 얼마나 악독하고 본질이 얼마나 사악하든지 상관없다. 사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분수껏 자신의 기능을 지키는 것인데,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 부각물이라는 역할을 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본질이자 본래의 자리인 것이다. 사탄의 본질은 생명과 무관하고, 능력과 무관하며, 권능과 무관하다. 사탄은 하나님 수중에 있는 장난감일 뿐이며,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사탄의 본모습을 알게 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권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권능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권능이든 능력이든 그것은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서, 그 어떤 부정적인 것들과도 무관하며,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과도 무관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생명이 있고 활력이 넘치는 어떤 형식의 것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은 모든 생명체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기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생존하며 지속된다. 그 후에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를 주재하고 주관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틀림이 없었으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갖추지 못한 것이며, 창조주만이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권능이라 부른다. 이것이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그러므로 ‘권능’이라는 이 단어 자체나 권능의 본질은 오직 창조주와 관련이 있다. 이는 그것이 창조주만의 신분과 본질의 상징이기 때문이며, 창조주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창조주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권능’이라는 이 단어와 관련이 있을 수 없다. 이 역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사탄이 욥을 호시탐탐 노렸을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욥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사탄의 본성이 사악하고 잔인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후에는 사탄도 하나님이 지시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욥에게 임할 때, 사나운 늑대가 양 떼에 침입하듯 사납게 날뛰었을지라도, 감히 하나님이 정해 준 범위를 망각할 수 없었고,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사탄은 어떻게 해도 감히 하나님 말씀의 원칙과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냐? 이 점에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그 어떤 말도 사탄은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사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고 천상의 법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 뒤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상의 법을 어기며 위반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하나님의 권능을 넘어서고 천상의 법규에 대항한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 결과는 도대체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사탄이 욥, 이 한 사람에게 행한 일은 사탄이 인류를 타락시킨 축소판일 뿐이다. 그리고 사탄이 그 일을 벌일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해 준 범위와 내린 명령은 사탄이 모든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원칙의 축소판일 뿐이다. 또한 사탄이 그러한 일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는 사탄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의 축소판일 뿐이다. 사탄이 욥을 시험하던 그 일에서 보인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사탄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께 감히 대항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축소판일 뿐이다. 이러한 축소판이 너희에게 주는 경고는 무엇이냐? 사탄을 포함한 만물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감히 창조주가 정한 천상의 법칙과 규칙을 어기지 못하며, 그런 법칙과 규칙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저항자에 대한 창조주의 처벌을 바꾸거나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만이 천상의 법칙과 규칙을 정할 수 있고, 창조주만이 그러한 법칙과 규칙을 시행할 능력이 있으며, 창조주의 능력은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만의 권능이며, 이 권능은 만물 가운데 가장 높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크고 사탄이 그다음이다’라는 말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유일무이한 권능을 가진 창조주 외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다. …… 지금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이상의 내용을 나누었으니 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럼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하나님의 권능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만의 지위를 상징하지 않느냐? 만물 가운데 너는 어떠한 일들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느냐? 어떻게 보았느냐? 사람이 경험하는 사계절에서 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에 대한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봄에는 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진다. 이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어느 한 면으로 구현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자 빛이 있었는데, 이 ‘빛’은 지금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의 존재는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이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공기가 지금도 존재하지 않느냐? 인류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기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누가 빼앗아 갈 수 있느냐? 누가 그것의 본질과 기능을 바꿀 수 있느냐? 하나님이 나눈 낮과 밤, 주야를 정한 법칙을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사탄을 포함해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밤이 되었을 때, 잠을 자지 않고 대낮처럼 보낼지라도 역시 밤이다. 네가 너의 생활 규칙을 바꾸었지만, 낮과 밤이 교체되는 법칙은 바꿀 수 없다. 이 사실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사자에게 소처럼 밭을 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코끼리를 나귀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닭을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늑대를 양처럼 풀을 먹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를 육지에서 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그들을 물속에서 살도록 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물속에서 살아야 한다. 육지에서는 살 수 없어 죽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만물은 모두 자기만의 생존 법칙과 범위가 있고, 각각 자기만의 본능이 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창조주가 정한 것으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자는 영원히 사람과 격리된 야생 세계에서 살지, 영원히 소처럼 충직하게 성실하게 사람과 함께하며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없다. 코끼리와 나귀는 다 동물이고 네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숨을 쉬는 피조물이지만, 그들은 다른 종이다. 그들은 각자 하나님에 의해 종류가 구분되고 모두 각자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서로 바뀔 수 없다. 닭도 두 다리를 가지고 있고 독수리처럼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나무 위에 날아오를 수 있을 뿐 영원히 하늘을 날 수 없다. 이것은 닭의 본능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정해진 것이 자명하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발전해 오면서, 인류의 과학은 ‘일취월장’했다고 할 수 있다. 과학 탐구 과정에서 이룩한 성과가 ‘과히 놀랄’ 정도이니, 인류의 재능은 날로 커지고 있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유독 한 가지만은 인간의 과학으로 돌파하지 못한다. 인류는 비행기를 만들고, 항공 모함을 만들고, 원자 폭탄을 만들고, 우주로 날아가고, 달나라에 착륙하고, 인터넷을 발명하여 하이테크 시대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숨 쉴 수 있는 생물은 만들어 내지 못한다. 어떤 생물의 본능과 생존 법칙 및 각종 생물의 생사윤회에 대해서 인류의 과학은 무능하고 통제할 수 없다. 이로부터 인류의 과학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 달했든 창조주의 생각 하나에도 비할 수 없고, 창조주의 만물 창조의 오묘함과 창조주 권능의 위력은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구상의 바닷물이 그렇게 많아도, 하나님이 각각에게 경계를 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껏 함부로 자신의 범위를 넘어 육지로 올라온 적이 없다. 그들은 정해 준 대로 있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움직이라고 말씀할 때에야 움직일 수 있고, 그들이 어디로 가고 어디에 머무를지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늘 하는 말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 결정할 권리가 있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만물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뀌는 것이지 사람의 의지로는 바뀔 수 없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천지 만물, 우주, 별, 1년 사계절, 사람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은 다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할 당시의 법칙에 따라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 존재하고 운행되며 변화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것의 법칙을 바꿀 수 없으며, 그것 본래의 운행 궤적을 바꿀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소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다. 여기까지 말했는데,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한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하나님의 권능이 어떠한 피조물이나 비피조물이 갖출 수 있는 것이냐? 그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모방하고 따라 하고 대체할 수 있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