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창조주의 권능은 시간, 공간, 지리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다

2018년 07월 03일

창세기 22장 17절에서 18절을 보자.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여러 차례 축복하며 그의 자손을 크게 성하게 하리라고 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된다고 했느냐? 성경 구절처럼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줄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저 형상적인 언어일 뿐이다. 하지만 이 형상적인 언어를 통해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줄 후손이 한둘이 아니고 수천수만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나라를 이룰 정도가 된다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러 나라의 아비가 되리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까지 많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일이냐, 하나님에게 달린 일이냐? 자신의 후손이 얼마가 될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느냐?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느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게 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후손이 몇 명일지조차도 사람은 결정할 수 없다. 누가 자신의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않겠느냐? 하지만 아쉽게도 세상일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되든,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상관없이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예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는 대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적게 주었는데 네가 너무 많이 받게 되는 법은 없다. 하나님이 네게 많이 준다면, 네가 많다고 탓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결정이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으며,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네 씨로 크게 성하게 하리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이다. 이 언약은 ‘무지개 언약’처럼 영원히 지켜질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기도 하다. 이러한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며, 사람이 믿든 안 믿든, 받아들이든 못 받아들이든,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보든,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의지나 생각이 바뀐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변화에 의해 변하는 것도 아니다. 만물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만물이 사라지는 그날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이뤄지는 날이다. 이는 그가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창조주의 권능을 지녔으며, 창조주의 능력이 있고, 만유와 모든 생명을 주관한다. 그는 무에서 유를, 유에서 무를 가능케 하며, 모든 생과 사의 전환을 주관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손을 번성케 하는 것이 하나님께 있어서는 지극히 간단한 일인 것이다. 이 일이 사람이 듣기에는 천일야화나 동화 속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하고자 결정한 일이나 사람에게 약속한 일은 천일야화나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본 사실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체득이 있느냐? 이런 것은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후예가 많지 않으냐? 얼마나 많으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과 같지 않으냐? 각 나라, 각 지역, 세계 각지로 널리 퍼져 있지 않으냐? 이러한 사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냐? 하나님 말씀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난 후,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동안 그 말씀이 계속해서 이뤄지고, 끊임없이 현실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위력이자 하나님 권능의 증거이다.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할 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이는 순식간의 일로,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러한 일의 성취와 응답은 시간 차 없이 즉시 이루어진 경우이다. 이 또한 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한 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 권능의 또 다른 면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또 사람들에게 창조주의 권능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하고, 창조주 권능의 더 실질적이고 더 훌륭한 면도 느끼게 하였다.

밤 하늘의 별,

하나님이 말씀하자마자 하나님의 권능은 그 사역을 주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한 것들이 점차 현실이 되기 시작하였다. 만물의 모든 것들이 다 이로 인해 다양한 변화를 맞았다. 일례로, 봄이 오면 풀이 파릇파릇해지고 꽃이 피고 나무에 싹이 튼다.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고 기러기들이 돌아오며, 논밭에는 사람들의 일손이 분주해진다. 이에 발맞춰 만물도 다시 소생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놀라운 행사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이룰 때, 하늘과 땅의 만물이 다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새로워지고 변화되는데,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이루기 위해 만물이 다 힘쓰며 움직이게 된다. 모든 피조물들이 다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배치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각자의 기능을 다한다. 창조주의 권능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에 범위가 정해져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에 시간적 제약이 있느냐? 하나님 권능의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을 논할 수 있느냐? 크고 작음과 강함과 약함을 논할 수 있느냐? 사람의 기준으로 헤아릴 수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은 사라졌다 나타나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 아니며, 아무도 그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없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축복하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지 간에 그의 그 축복은 지속된다. 그 지속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하고, 인류에게 창조주가 가진 영원불멸의 생명력이 수없이 재현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권능이 나타날 때마다 그의 말씀을 완전하게 구현해 내어 만물과 인류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의 권능으로 이뤄진 일마다 더없이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완전무결하다. 그의 생각, 그의 말씀, 그의 권능과 그가 이룬 일마다 전부 그 어떤 것도 비할 수 없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그 의의와 가치는 인류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한 후에는,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든, 무엇을 하든, 약속받기 전후의 그의 사정이 어떻든, 그의 생존 환경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든, 하나님은 그것을 다 환히 알고 있다. 하나님이 한 말씀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하나님이 보기에는 다 방금 일어난 것과 같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한 모든 약속을 추진하고 주관하고 실현시키는 능력과 권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약속이 무엇이든 간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그 약속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요소, 예를 들면 시간, 장소, 종족 등과 같은 요소의 범위가 얼마나 넓든, 그 약속은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하나님께 있어서 전혀 힘들지 않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 주관하는 범위는 우주 전체, 인류 전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빛을 만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빛만 관리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물을 만들었으니 물만 관리하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한다면 오해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일이 몇백 년이 지난 뒤에는 사람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그 약속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고,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 기간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권능을 행하였는지, 만물은 또 어떻게 하나님에 의해 배치되었는지,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 얼마나 훌륭한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인류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행사에서 나타난 탁월한 면면들은 만물 가운데 전해지고 칭송되고 있다. 만물은 또한 창조주의 놀라운 행사를 나타내며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하는 갖가지 미담들은 만물을 통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은 만물에게 하나님이 어디에나 다 존재하고 항상 존재함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 너는 하나님은 어디에나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은 시간, 지리, 공간, 그리고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범위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며, 사람이 헤아릴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어려우며, 영원히 다 알 수 없는 것이다.

창조주만의 말씀 방식과 특징은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권능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축복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 17:4~6)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 내가 아브라함을 택한 것은 그로 그의 자식과 권속들에게 나 여호와의 도를 지킬 것을 명함으로 의와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 이로써 내가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것이라”(창 18:18~19, 중국어성경 직역)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욥 42:12) 창조주만의 말씀 방식과 특징은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권능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고 얻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고, 그의 방식대로 사람에게 복을 내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약속을 하고 얼마만큼의 은혜를 베풀어 주는지는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 따라 분배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을 설명할까? 사람에게 그 안에서 무엇을 보게 할까? 여기서 우리는 잠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는지, 하나님이 축복해 주는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접어 두자.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 가는 것을 목표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살펴보자. 즉,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 가는 이 관점으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보자. 이상 네 단락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준 축복에 관한 기록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욥과 같은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 대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고,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내리는 이유와 그 복의 내용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어조, 말씀하는 방식과 하나님이 서 있는 위치와 시각으로부터, 사람은 복을 내리는 자와 받는 자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어조와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위치는 창조주의 신분을 가진 하나님만의 것이다. 그는 권능과 위력은 물론 창조주의 존귀함과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의 위엄을 지니고 있다. 먼저 다음의 말씀을 보자.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 17:4~6).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이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이다. 하나님이 그를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고, 그의 후손을 번성케 하리라 하였다. 또한 나라들이 그를 좇아 일어나고 열왕이 그를 좇아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였다. 너는 이 몇 마디 말씀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지 못했느냐?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 권능의 어떠한 본질을 보았느냐? 이 구절들을 자세히 읽다 보면, 하나님의 권능과 신분이 하나님의 어휘 사용에서 확연히 나타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 될찌라 … 내가 너로 … 하리니” 이 중에서 ‘너는 … 될찌라’, ‘내가 … 하리니’ 등의 표현에서 하나님 신분과 권능이 나타나는 확고한 어휘 사용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창조주의 신실함이요, 또 한편으로는 그것은 모두 창조주의 신분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전용 어휘이자 관용어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축복하기를, 후손이 번성하고 나라들이 그를 좇아 일어나고 열왕이 그를 좇아 일어난다고 했다면, 이는 확실히 하나의 바람일 뿐이지 약속이나 축복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감히 “나는 반드시 너로 하여금 어떠하게 할 것이다. 나는 너를 어떠어떠하게 하겠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러한 결정권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설사 이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빈말일 뿐이고 헛소리일 뿐이며, 사람의 욕망과 야심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사람의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감히 이렇게 큰소리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누구나 좋은 소망을 갖기 마련이어서, 후손들이 모두 출세하고 남보다 뛰어나기를 바란다. ‘만일 황제가 되는 후손이 있을 수 있다면, 그건 크나큰 행운이야! 성장(역주: 도지사급에 해당)만 될 수 있어도 괜찮아. 어쨌든 높은 사람이면 돼!’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의 바람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저 후손을 위해 축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어떤 누군가의 약속을 이루어 줄 수는 없다. 인간에게 거기까지 가능하게 하는 권력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안다. 자신의 일도 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운명을 주관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할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는 그런 권능이 있어서 사람과 약속한 것, 사람에게 축복한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며, 하나님께 있어 사람의 후손을 번성케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가 누군가의 후손을 번성하게 하는 것은 단 한 마디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그는 한 번도 이 때문에 수고한 적이 없다. 또한 이 때문에 머리를 쓰거나 고민해 본 적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자 하나님의 권능이다. 창세기 18장 18절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중국어성경 직역)”라는 말씀을 보고 난 후, 너희는 하나님의 권능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창조주의 비범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창조주의 지고지상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긍정적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필승의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또는 그런 확신이 있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권능을 실증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그의 말씀이 이뤄지도록 내린 명령인 것이다. 여기에 너희가 주목해야 할 두 어휘가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중국어성경 직역)”라고 한 말씀에 어떤 모호한 부분이 있느냐? 걱정하는 부분이 있느냐?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느냐? 그런 것은 인류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사람만이 갖고 있는 요소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반드시’와 ‘필히’ 이 두 어휘 때문이라도, 사람의 그런 요소는 창조주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감히 이러한 어휘를 타인에 대한 축복에 사용하지 못한다. 또한 그 누구도 감히 타인에게 강대한 나라를 주겠다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며, 감히 타인에게 천하 만민이 반드시 그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할수록 증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그런 권능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권능이 이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한다. 또한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임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매우 확실한 것이고, 주저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에 따라 이 모든 일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그 어떤 세력도 이 일의 응답을 바꾸거나 저지하거나 파괴하거나 교란시킬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 말씀의 이룩과 성취를 멈추게 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가 하는 말씀의 위력이며, 부인할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인 것이다! 네가 이 말씀을 다 읽었을 때, 마음속에 의혹이 일겠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능력과 위엄, 권능이 묻어난다. 이러한 위력과 권능, 그리고 일이 필연적으로 성취된다는 것, 이것은 그 어떤 피조물과 비피조물이 이를 수도 초월할 수도 없는 것이다. 창조주만이 이러한 어조로, 이러한 뉘앙스로 인류와 대화할 수 있다. 그의 약속이 빈말이 아니고 허풍이 아니며, 사람과 사물이 모두 초월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권능의 구현이라는 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을 때, 하나님 말씀의 위력과 하나님의 권능을 느꼈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면, 너는 어떤 느낌을 받을 것 같으냐? 그 사람을 너무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가 허풍을 떤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그가 자신을 과시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그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고 그런 권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그러한 일들을 이룰 수 없다. 그가 이렇게 확실하게 약속한다면 단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분명 오만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며, 전형적인 천사장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다면, 네가 오만함을 느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농담이라고 느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이며 사실이다. 그의 말씀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그가 어떤 일을 이루고자 마음먹었을 때,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은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이며,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다. 그 약속은 기정사실이며,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점차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했다고 하나님께 오만한 성품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룰 수 있고,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이며, 그 일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고, 그 일들을 이루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능력 범위의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라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이 나타나고 발현된 것이며,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권능이 완벽하게 구현된 것이고, 창조주 신분에 가장 적합하고 합당한 증거인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는 방식, 어조, 어휘 사용은 바로 창조주 신분의 상징이며, 하나님 자신의 신분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거짓됨도 불순함도 없으며, 확실히 창조주의 본질과 권능이 완벽하게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피조물에게는 이러한 권능도 없고 이러한 본질은 물론 하나님이 부여한 능력도 없다. 만일 사람에게서 이러한 부분들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확실히 타락 성품의 분출이며, 사람의 교만과 야심이 꿈틀거리는 것이고, 전형적인 마귀와 사탄이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사람을 미혹하고 유인하는 악독한 본심의 발현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언어적 노출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과 자리를 다투고 하나님을 사칭하며, 하나님을 대신하고 싶어 한다고 말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말씀하는 어조를 흉내 내는 속셈은 사람들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함이며, 원래 하나님께 속하는 인류를 빼앗고자 함이다. 이것은 분명히 사탄이고, 천사장의 후예가 하는 행위이며, 하늘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너희 중에는 하나님을 모방하여 어떤 방식으로 말을 했던 자가 없느냐? 사람을 오도하고 미혹시킬 마음을 품고, 사람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의 권능과 위력을 가지고 말을 하고 일을 하며, 자신의 본질과 신분은 남다르며, 심지어 어조가 하나님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주려고 했던 자가 없느냐? 너희는 이런 일들을 한 적이 없느냐? 하나님의 말투를 모방해서 말하고, 이른바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손짓을 하며, 하나님의 위력과 권능인 척 가장한 적이 없느냐? 이런 것들은 너희들 대부분이 자주 하거나 하려고 마음먹은 것들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창조주의 권능을 진짜로 보고 느끼고 알게 되었는데, 처음 너희가 행하고 드러냈던 행동들을 돌이켜 보면 역겹게 느껴지지 않느냐? 너희가 비열하고 파렴치했던 모습을 알게 되지 않느냐? 이러한 자들의 성품과 본질을 해부해 보면, 그들은 저주받아 마땅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보통 이런 일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굴욕을 자초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이냐? 사람이 이렇게 하는 본심은 바로 하나님을 모방하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자 함이다. 또한, 사람들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를 없애고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는 하나님을 쫓아내고, 자신이 사람을 통제하고 차지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는 모두 이러한 욕망과 야심이 있다. 사람마다 이렇게 사탄이 타락시킨 본질 속에서 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면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사탄의 본성 속에서 살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에 관련된 주제로 나누었다. 너희는 하나님을 사칭하고 하나님을 모방하고 싶은 욕망과 야심이 아직도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이 능히 모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는 사람이 사칭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네가 하나님 말씀의 어조를 흉내 낼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본질을 모방할 수는 없다. 네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을 사칭할 수는 있을지라도, 영원히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고, 영원히 만물을 주재하거나 주관하는 일은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영원히 그저 아주 하찮은 피조물일 뿐이다. 너의 능력과 재주가 얼마나 뛰어나든, 네가 얼마나 많은 은사를 가졌든, 너의 모든 것은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있는 것이다. 네가 몇 마디 모진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너에게 창조주의 본질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너에게 창조주의 권능이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지,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며, 밖으로부터 더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피조물의 일원으로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본위를 지켜야 하며, 성실한 사람됨으로 분수껏 창조주가 맡겨 준 바를 지켜야 한다. 도에 넘치는 일을 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능력 범위’ 밖의 일을 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이 증오하는 일을 해서도 안 된다. 위대한 사람, 초월적인 존재, 고귀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사람에게 존재하지 말아야 할 ‘소망’이다. 위대한 사람,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일이며,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파렴치한 일이고, 혐오감을 불러오고 버림받을 일이다. 반대로 진정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야말로 귀한 것이고, 피조물이 지켜야 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목표인 것이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마 12:6~8)

하나님은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어 인류에게 안정된 생존 환경을 주었다

…다음으로 말하려는 또 다른 측면은 하나님이 만유를 다스리는 방식이다. 이 방식이란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만든 후 어떻게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는가에 관한 것이다. 이 주제도 너희에게 조금 벅찰 것이다.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는 일을 사람이 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할 수 없다. 사람은 파괴할 줄만 알지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출 줄 모르고, 다스리지도 못한다. 사람에게는 그렇게 큰 권능도, 능력도 없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마찬가지로 인류의 생존과 지대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이 하려는 모든 일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생존을 유지시키기 위해, 인류에게 좋은 생존 환경을 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 중요한 일을 하여 인류의 생존을 유지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만물의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보면 아주 두루뭉술한 주제이지만 일단 사람에게 하나의 개념을 전하고 있다. 바로 만물의 균형을 맞추는 것도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라는 것이다. ‘균형을 맞춘다’는 말의 표면적 의미는 무엇이냐? 우선,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바로 균형을 잃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다들 천칭을 알 것이다. 천칭으로 어떤 물건의 무게를 잴 때 이 물건을 한쪽 접시에 놓고, 다른 쪽 접시에는 추를 놓아 추의 개수에 따라 이 물건의 중량이 결정되는데, 이것을 균형을 맞춘다고 한다. 천칭의 균형을 맞추려면 양쪽의 중량이 반드시 같아야 한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많은 것을 만들었다. 고정된 것, 이동하는 것, 살아 있는 것, 숨 쉬는 것, 숨 쉬지 않는 것, 이 많은 것들이 서로 의지하고 상생상극 작용을 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는 관계가 되는 것이 쉽겠느냐? 분명 여기에는 법칙이 있는데, 아주 복잡하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께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연구하려면 상당히 복잡하다. ‘균형을 맞춘다’는 이 간단한 말을 인류가 연구하고, 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인류의 생물학자, 천문학자, 물리학자, 화학자, 나아가 역사를 연구하는 그런 인물까지 다 출동한다고 한들 어떤 최종적인 연구 결과를 얻을 수 있겠느냐? 연구 결과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만물이 너무나 기묘해서 사람은 영원히 측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만들 때 만물 간에 법칙을 만들고 서로 다른 생존 방식을 만들어 서로 제약하고, 서로 보완하고, 서로 공급하게 하였다. 각 방식은 단일하고 단순한 방식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그래서 사람이 머리와 배운 지식, 자신이 본 현상들을 통해 하나님이 만물을 주관하는 법칙을 증명하거나 연구하려면 알아내기가 매우 어렵고 또 결과를 얻어 내기도 매우 힘들다. 결과를 얻기 어려운데 인류의 머리와 지식으로 하나님이 만든 만물을 다스린다면 인류는 그 균형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류가 만물의 생존 법칙을 모른다면 이런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만물을 관리하고 다스리게 한다면 인류는 쉽게 이 균형을 깨뜨릴 것이다. 그리고 일단 균형이 깨지면 인류의 생존 환경도 파괴되고, 생존 환경의 파괴와 함께 인류의 생존에 위기가 생기고 재앙이 따라올 것이다. 인류가 재앙 속에 살 때 인류의 앞날은 어떠하겠느냐? 가늠하기 어려운 예측 불허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만물의 관계를 균형 있게 맞추겠느냐? 우선, 지구상에 어떤 곳은 일 년 내내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지만, 어떤 곳은 겨울이 없고 사계절이 모두 봄과 같아서 얼음이나 눈을 볼 수 없다. 이것이 하나의 방식이고, 이는 큰 기후적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두 번째로, 이 산은 보기에 식물이 무성하다. 각종 식물로 뒤덮인 땅에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심지어 사람이 그 안을 걸으면 해를 못 볼 정도다. 반면, 저 산은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황량한 산봉우리만 겹겹이 쌓여 있다. 겉보기에는 둘 다 흙이 쌓여 생긴 산인데, 한쪽은 삼림이 무성하고, 다른 한쪽은 풀 한 포기 없는 것이다. 이것이 두 번째 방식이다. 세 번째로, 이쪽은 푸른 초원이 한없이 펼쳐져 있지만, 저쪽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 생물은커녕 수원도 안 보이고, 모래바람만 세차게 불고 있다. 네 번째로, 이쪽은 해수로 뒤덮여 있고 수역도 넓은데, 저쪽은 샘 하나 보기 힘들다. 다섯 번째로, 이쪽 땅은 늘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고, 공기도 촉촉하지만, 저쪽 땅은 늘 뜨거운 태양이 떠 있고, 비 한 방울 보기가 아주 힘들다. 여섯 번째로, 이쪽은 공기가 희박하고 호흡이 곤란한 고원이지만, 저쪽은 각종 철새가 서식하는 늪지와 습지다. 이것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기후 혹은 서로 다른 지리적 환경에 상응하는 기후나 환경이다. 즉, 하나님은 큰 환경의 틀에서 기후부터 지리적 환경에 이르기까지, 토양의 다양한 성분부터 수원의 양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기본적인 생존 환경을 균형 있게 맞추어 사람이 사는 곳의 공기, 온도, 습도의 균형을 이루어 낸다. 이런 대조적인 지리 환경이 있기에 인류에게 균형 잡힌 공기가 있고, 균형 잡힌 계절별 온도와 습도가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류가 예전과 다름없이 이런 생존 환경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선 큰 환경에서의 균형은 서로 다른 지리적 위치와 형세, 그리고 서로 다른 기후의 변천으로 상호 제약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균형을 이루게 하고, 인류가 필요로 하는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것은 큰 환경에서 한 이야기다. 세부적인 부분을 보도록 하자. 어떻게 식물들이 균형을 이루도록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균형 잡힌 생존 환경 속에서 식물이 어떻게 지속적으로 생존해 나가도록 할 수 있을까? 바로 각종 식물의 수명과 생장 속도와 번식 속도를 주관함으로써 식물의 생존 환경을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가령 작은 풀은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꽃을 피우며 가을에 열매를 맺는다.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 그 풀은 죽는다. 이듬해가 되면 작은 풀의 씨앗이 이어서 싹을 틔우며 같은 규칙을 지속한다. 작은 풀의 수명은 무척 짧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은 봄, 여름, 가을이라는 시간에 불과하다. 그런가 하면 각종 나무도 각기 수명이 다르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주기도 각기 다르다. 어떤 나무는 30에서 50년을 살다가 죽는다. 수명이 30년에서 50년인 것이다. 그 나무의 열매가 땅에 떨어지면 그 열매가 다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렇게 또 30년에서 50년을 산다. 나무에게는 이런 주기가 있다. 늙은 나무가 죽으면 어린 나무가 자란다. 그래서 늘 숲속에서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무들도 정상적인 순환과 생사의 과정이 있다. 어떤 나무는 천 년 이상 살고 심지어는 3천 년을 살기도 한다. 어떤 종류의 식물이든 그것의 수명이 몇 년이든 결국 하나님은 그것의 수명과 번식 능력, 속도, 수량, 빈도에 따라 식물의 균형을 주관한다. 그렇게 해서 식물들이 작은 풀에서 큰 나무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생장하고 번식하면서 균형 잡힌 생태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한다. 그래서 지구에서 네가 보는 숲속의 나무든, 작은 풀이든 그것들은 자신의 규칙대로 끊임없이 번식하고 생장하고 있다. 사람의 어떠한 도움도 필요치 않고, 사람이 따로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다. 이런 균형이 있었기에 식물은 그들만의 생존 환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알맞은 생존 환경이 주어졌기에 그렇게 많은 숲과 초원이 지구에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사람을 양육하고 또 대대로 숲과 초원에서 서식하는 각종 생물을 양육한다. 날짐승과 길짐승과 곤충에서 각종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한편 하나님은 각종 동물들의 균형도 주관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떻게 주관할까? 식물과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번식 능력과 수와 빈도에 따라, 동물 중에서 맡은 역할에 따라 균형을 주관해 동물들의 수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사자는 얼룩말을 잡아먹는다. 그런데 사자의 수가 얼룩말의 수를 초과한다면 얼룩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얼룩말은 멸종될 것이다. 만일 얼룩말의 번식 수가 사자보다 한참 부족하다면 얼룩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역시 멸종될 것이다. 그래서 얼룩말의 수는 반드시 사자의 수보다 훨씬 많아야 한다. 얼룩말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사자의 생존을 위해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각 얼룩말은 얼룩말 무리의 한 구성원이지만 그와 동시에 사자 입에 들어갈 먹잇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자의 번식 속도가 영원히 얼룩말을 앞설 수 없기 때문에 사자의 수도 영원히 얼룩말의 수를 초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래야만 사자의 먹잇감이 보장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자는 얼룩말의 천적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이 같은 땅에서 한가롭게 서식하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얼룩말은 사자의 사냥감이 되었다는 이유로 수가 감소하거나 멸종하지 않는다. 사자도 자신의 ‘왕위’로 인해 가족 구성원의 수를 확대하지 않는다. 이런 균형은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각종 동물 간에도 균형의 법칙을 정해 그런 균형을 이루게 하였다. 이는 사람들이 종종 목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얼룩말의 천적은 사자뿐일까? 그렇지 않다. 악어도 얼룩말을 먹는다. 악어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장면도 무척 끔찍하다. 얼룩말은 참으로 미약한 동물로 보인다. 얼룩말에게는 사자와 같은 포악한 성질도 없다. 사자처럼 강력한 적을 만나면 얼룩말은 그저 달아날 줄밖에 모르고 심지어 반항조차 못 한다. 사자보다 빨리 달리지 못하면 사자에게 잡혀 먹힐 수밖에 없다. 이런 것은 동물 세계에서 종종 목격되는 장면이다. 너희는 이런 장면을 봤을 때 어떤 느낌이 들지 않았느냐? 얼룩말이 불쌍하게 여겨지지 않았느냐? 사자가 가증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느냐? 얼룩말은 생김새가 참 보기 좋다. 그런데 사자는 호시탐탐 얼룩말을 노린다. 얼룩말은 멍청하게 멀리 떠나지도 않는다. 그늘 밑에서 더위를 식히며 자신을 노리고 있는 사자를 보고 있는 얼룩말은 그 사자가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얼룩말은 그 땅을 떠나지 못한다. 기이한 일이다. 이 기이한 일 속에 하나님이 정한 운명이 있고 하나님의 주재가 있다. 너는 불쌍한 얼룩말을 보면서도 구해 줄 수 없고 가증스러운 사자를 보면서도 사자를 멸할 수 없다. 얼룩말은 하나님이 사자를 위해 예비한 먹이인 것이다. 하지만 사자가 아무리 얼룩말을 잡아먹어도 얼룩말은 멸종하지 않는다. 사자는 번식 수가 아주 적고 번식도 매우 느리다. 그래서 사자가 얼룩말을 아무리 잡아먹어도 사자의 수는 얼룩말을 앞지르지 않는다. 바로 이렇게 균형이 맞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균형을 유지시키는 목적은 무엇일까? 이는 사람의 생존 환경과도 관련이 있고 사람의 생존과도 관련이 있다. 만일 얼룩말이나 사슴과 같은 다른 모든 사자의 사냥감들의 번식이 너무 느리고 사자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다면 인류는 어떤 위험에 직면하게 될까? 사람이 기르는 닭, 오리, 거위, 개가 우선적으로 사자의 사냥감이 된다. 이것들은 집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들은 사자의 먹이로 충분할까? 어떤 집에서 돼지 두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사자가 산에서 내려와 그 돼지 두 마리를 잡아먹었다고 가정해 보자. 사자는 그것을 다 먹고 나서 떠날까? 사자는 ‘산에 먹을 것도 없어. 여기에 있자. 이 집에 사람도 몇 명 있으니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사자는 사람이 문을 나서기를 기다렸다가 달려들어 사람을 잡아먹을 것이다. 인류에게는 어떠한 반항할 힘도 없다. 그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 아니냐?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사자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면 어떨까? 참극이다. 이런 참극은 하나님이 정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재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인류에게 가져다준 것도 아니다. 인류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기에 만물의 균형은 인류의 생존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마땅히 갖춰야 할 균형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식물과 동물, 산천과 호수로 인류에게 아주 정상적인 생태 환경을 예비해 주었다. 인류에게 이런 균형 잡힌 생태 환경이 있어야만 인류는 안전하게 생존할 수 있다. 만일 거목이나 작은 풀의 번식 능력이 떨어지고 번식 속도가 무척 느리다면 토양은 수분을 잃게 되지 않겠느냐? 수분을 잃은 토양은 병에 걸리지 않겠느냐? 식생과 수분을 잃은 토양은 빠르게 유실된다. 그러면서 아주 빨리 사막화가 이루어진다. 토양이 변해 버리면 인류의 생존 환경도 파괴되고 동시에 재난이 도래한다. 이런 생태 균형이 없어지고 이런 생태 환경이 사라지면 인류는 만물의 불균형으로 인해 종종 재난의 습격을 받게 된다. 가령 환경의 불균형으로 인해 개구리의 생태 환경이 파괴되어 개구리가 한곳에 모여 들게 되면 수가 급증할 수도 있다. 심지어 수많은 개구리가 도시의 거리를 지나가는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다. 많은 수의 개구리가 사람의 생존 환경을 점거하면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할까? 재난이라고 한다. 왜 재난이라고 할까? 인류에게 무척 유익한 작은 동물이 자신에게 적합한 곳에 있으면 인류에게 유익하고 인류의 생존 환경 균형도 보호하고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일단 재난이 되면 그것은 사람의 생활 질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개구리 몸에 지니고 있는 것들이나 여러 가지 성분이 사람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심지어 인체의 어떤 기관에 침입할 수도 있다. 이는 재난 중의 하나이다. 그 밖에도 인류는 대량의 메뚜기 떼가 출몰하는 상황을 종종 겪었다. 이것도 재난이 아니냐? 아주 무서운 재난이다. 사람이 비행기와 대포,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아무리 큰 능력이 있어도 메뚜기 떼의 습격에 인류가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그 상황에서 대포를 사용하여 쫓아 버릴 수 있을까? 기관총을 사용하여 쫓아 버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농약을 살포해 쫓아낼 수 있을까? 그것도 어렵다. 이 조그마한 메뚜기들이 왜 왔을까? 오로지 농작물과 양식을 먹으러 온 것이다. 그래서 메뚜기 떼가 지나간 곳에는 농작물이 전부 사라진다. 그렇게 농사짓는 사람의 한 해 먹을 양식이 메뚜기의 습격에 눈 깜짝할 새 전부 사라져 버릴 수 있다. 이처럼 메뚜기의 습격은 인류에게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재난이 되기까지 한다. 대량의 메뚜기 떼가 출몰하는 것이 재난이라면 쥐는 어떨까? 각종 매가 쥐를 잡아먹지 않는다면 쥐의 번식 속도는 매우 빨라질 것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말이다. 쥐라는 놈이 범람하면 인류는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 부딪히게 될까? (전염병입니다.) 전염병뿐일까? 쥐는 무엇이든 다 마구 갉아 버린다. 나무도 갉아 버린다. 한 집 안에 쥐가 두 마리 있다면 그 집 사람들 모두 불편을 겪는다. 때로 쥐는 기름을 훔쳐 먹기도 하고 양식을 갉아먹기도 한다. 쥐는 자기가 먹지 못하는 것도 갉아서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옷, 신발, 가구 등 무엇이든 다 갉아 버린다. 어떤 때는 그릇장에 기어올라 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그 그릇을 사용할 수 있겠느냐? 소독을 했다 하더라도 속으로 께름칙해서 그 그릇을 버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쥐가 사람에게 주는 고민거리다. 조그마한 쥐일지라도 사람은 어찌할 방법이 없고 분을 참아야 한다. 그러니 쥐가 무리를 이루면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두 마리 쥐라도 사람에게 큰 방해가 된다. 그것이 재난이 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작디작은 개미일지라도 재난이 된다면 인류에게 가하는 해 역시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개미가 집을 갉아 집이 무너진 사례도 많다. 이처럼 개미의 힘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개미가 말을 잡아먹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커다란 말도 개미 떼가 달라붙어 휩쓸고 가면 그 말은 뼈대만 남는다. 무서운 일이 아니냐? 말을 탔던 사람이 그 장면을 보고 어디로 도망쳤을까? 옆에 호수가 있는 것을 보고 거기로 뛰어들어 호수 건너편으로 헤엄쳐 도망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 장면을 목격한 뒤로 작은 개미가 그렇게 큰 위력을 가지고 있고 하마터면 자신도 먹힐 뻔했다는 사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말이 없었다면 개미가 먼저 먹어 치울 대상은 분명 그 사람이었을 것이다. 물에 가로막히고 개미가 곧바로 다리를 놓고 건너갈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먹어 치우지 못한 것이다. 만일 물이 없었다면 말과 사람은 함께 개미에게 먹혔을 것이다. 이처럼 개미의 위력도 무시할 수 없다. 각종 조류가 재난이 된다면 두려운 일이 아니냐? (두렵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동물이나 생물이든 일단 균형을 잃으면 불규칙적이고 법칙이 없는 테두리 안에서 자라고 번식하면서 인류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다주게 된다. 인류의 생존과 생활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재난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심지어 인류에게 치명적인 재난을 당하게 하거나 멸망의 운명을 맞게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할 때 여러 가지 방식과 형식으로 만물의 균형을 이루었고, 산천과 호수의 생존 환경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식물의 생존 상태의 균형을 이루었다. 또한 각종 동물과 조류, 곤충의 생존 상태의 균형도 이루었다. 그 목적은 각종 생물이 하나님이 정한 법칙 속에서 번식하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물은 이런 법칙을 벗어날 수 없고 깨뜨릴 수도 없다. 이런 기본적인 환경 속에서 인류는 비로소 안전하게 대대로 번성할 수 있다. 어떤 생물이든 하나님이 정한 수와 범위를 초과하고 하나님이 주재하는 생장 속도와 생장 빈도와 생장 수를 초과하면 인류의 생존 환경은 각기 다른 정도로 파괴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의 생존도 위협을 받게 된다. 한 종의 생물의 수가 급증하면 그 생물은 인류의 식량을 빼앗고 인류의 수원을 파괴하며 인류의 삶의 터전도 파괴하게 된다. 그러면 인류의 번성과 생존 상황이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은 만물에게 있어서 무척 중요하다. 만일 쥐, 개미, 메뚜기, 개구리 등 각종 동물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 그에 따라 그들의 물 섭취량도 증가한다. 그들의 물 섭취량이 증가하면 고정된 식수원과 수역 범위 안에서 사람의 식수량과 수원은 감소하게 되고 인류에게 물이 부족하게 된다. 인류의 식수가 파괴되고 오염된다. 또한 급증하는 각종 동물로 인해 식수난에 처하게 된다. 이처럼 열악한 생존 환경에서 인류의 생존은 엄청난 위협을 받게 된다. 만일 한 종의 생물이나 몇 종의 생물이 정해진 수를 초과하게 되면 인류가 생존하는 공간의 공기, 온도, 습도에서 공기의 함량까지 모두 각기 다른 해독을 입고 파괴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상태에서 인류의 생존과 운명은 당연히 그런 생태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런 균형을 잃으면 인류가 호흡하는 공기는 파괴되고 인류가 마시는 물은 오염되며 인류에게 필요한 온도도 각기 다른 정도로 변화를 맞고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인류 고유의 생존 환경은 엄청난 영향과 도전을 받게 된다. 인류의 기본적인 생존 환경이 파괴된 그런 상황에서 인류의 운명과 앞날은 어떻게 되겠느냐?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하나님은 만물이 인류를 위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알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이 지은 만물이 각기 어떤 역할을 하고,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며, 인류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줄지도 알고 있다. 그렇게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계산을 하면서 자신이 창조한 만물의 여러 면을 주관하고 있다. 그래서 인류에게 있어 하나님이 행한 모든 일은 무척 중요하고 매우 필요하다. 그러므로 네가 만물 속의 생태 현상을 보았든, 만물 속의 자연법칙을 보았든 너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들의 필요성에 대해 더 이상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다. 또한 무지한 말로 하나님이 만물을 마련하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류에게 공급하는 것을 멋대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의 법칙에 대해서도 멋대로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기본적인 생존 환경에서 인류에 대한 공급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조절하는 인류 생존의 5가지 기본 조건을 통해 하나님이 인류에게 공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 않으냐?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류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이 관리하고 주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인류 탄생 후 몇천 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의 생존 환경을 바꾸어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 생존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인류는 정상적인 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유지되겠느냐? 다시 말해 언제까지 하나님이 이러한 환경을 제공하겠느냐? 바로 하나님의 경영 사역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다. 그때 하나님은 어쩌면 같은 방식 또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인류의 생존 환경을 변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지금 사람이 진정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인류의 생존 환경을 관리하고, 보호하고,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하나님의 선민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만물도 하나님의 주재 덕분에 계속해서 생존하고 인류 전체도 이와 같은 공급 덕분에 앞으로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방금 이야기를 들으며 새롭게 느낀 점이 있느냐? 이제는 하나님과 인류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도대체 누가 만물의 주인이냐?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만물을 대할 때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만물을 주재하고 배치하시고,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누립니다.) 너희는 이 말을 인정하겠지? 하나님과 인류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은 만물을 주재하고 공급하고 있으며, 또 그 모든 것의 근원이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만물을 공급할 때 그것을 누린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이 만물에게 베푼 생명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만물을 누리는 것이다. 사람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의 성과를 누리는 자이고, 하나님은 주재자이다. 그렇다면 만물에게 있어 하나님과 인류는 무엇이 다를까? 하나님은 만물의 성장 법칙을 분명히 알고 있고 이를 주관하고 주재한다. 즉,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안중에 있으며 하나님의 감찰 범위 안에 있다. 하지만 사람은 만물을 볼 수 없다. 사람은 볼 수 있는 것이 제한되어 눈앞의 것만 볼 수 있다. 산에 오르면 그 산만 볼 수 있을 뿐, 산 너머의 것은 볼 수 없다. 해변에 가면 바다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 바다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는 볼 수 없다. 숲속에 들어가면 주변의 식물만 볼 수 있을 뿐, 더 먼 곳은 볼 수 없다. 사람은 더 높은 곳, 더 먼 곳, 더 깊은 곳은 보지 못하고 눈앞의 것, 시야 내에 있는 것만 볼 수 있다. 사람이 1년 사계절과 만물 성장의 법칙을 안다 하더라도 만물을 관리하고 주재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만물을 자신이 손수 만든 기계처럼 다루며, 모든 절차, 원리, 법칙 그리고 용도가 무엇인지 명확하고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인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과학을 연구하고 만물의 법칙을 탐구한다 해도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이 만유를 주관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무한한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아주 작은 일을 사람에게 연구하라고 한다면, 평생의 시간을 쏟아도 진정한 성과를 얻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따라서 네가 배운 지식으로 하나님을 연구한다면 영원히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영원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진리를 찾는 방식과 하나님께 구하는 방식으로 또 하나님을 알아 가는 측면으로 하나님을 대한다면, 어느 날 하나님의 행사가 어디에나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을 왜 만물의 주재자라고 하는지, 왜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생길수록 하나님을 만물의 주재자라고 칭하는 이유를 알게 되고, 너를 포함한 만물 모두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공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만물의 생존을 주재하고 관리하고 보호할 수 있는 능력과 그 본질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생겼을 때, 너는 하나님이 곧 너의 하나님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너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여 너의 하나님이 되게 하고 너의 주재자가 되게 할 것이다. 그런 인식이 생기고 생명이 그런 경지에 이르면, 하나님은 두 번 다시 너에게 시련을 주거나 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네가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고 관리하는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요한 이유이다. 이는 하나님의 행사를 인정하게 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실제적으로 알고, 더 많이 이해하고 알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욥의 증거가 후세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와 계시

사람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완전히 얻는 전 과정을 깨달은 동시에,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긴 목적과 의미도 알게 되었다. 또 더 이상 욥이 받았던 고난을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고 욥이 받은 고통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이 생겼다. 사람은 더 이상 욥과 같은 시험이 올까 걱정하지 않게 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이 주는 시련에 반발하고 저항하지 않게 되었다. 욥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욥이 사탄을 이긴 증거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도움과 격려가 되었다. 욥에게서 사람들은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사람이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에 의지하면 사탄을 완벽하게 이길 수 있다는 것도 보았다.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고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결심과 믿음만 있다면, 사탄에게 실패와 수치를 안겨 줄 수 있다는 것도 보았다. 또한 목숨을 버릴지언정 굳게 서겠다는 결심과 의지만 있다면, 사탄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져서 황급히 도망간다는 것을 보았다. 욥의 증거는 후세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었다. 이 경고는 사탄을 이기지 못하면 영원히 사탄의 참소와 방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또한 영원히 사탄의 공격과 상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욥의 증거는 또 후세 사람들에게 계시를 주었다. 이 계시를 통해,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만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해야만 영원히 사탄의 통제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에서 살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욥의 인성과 품격, 그가 인생에서 추구한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욥의 일생의 삶과 그가 시련 속에서 보여 준 행동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욥의 증거에서 하나님이 위안을 받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욥은 사랑스러운 자라고 말하면, 너희는 아마도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내가 왜 이러한 일들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너희가 욥과 같은 혹은 비슷한 시련을 겪게 될 때, 너희가 환난을 겪게 될 때,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위해 배치해 놓은 시련을 겪게 될 때, 시험 속에서 사탄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치욕과 고통을 이겨 내게 될 때, 너는 내가 한 이 말들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너는 욥과 비교했을 때 너 자신이 그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며, 욥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얼마나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욥이 말한 그 멋진 말들이 타락한 사람에게 있어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욥이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해내기 힘든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네가 해내기 어렵다고 느낄 때,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얼마나 걱정스러워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하나님이 인류에게 한 것과 인류를 위해 바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교제했으니 너희들은 욥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 마음속에 있는 욥은 진정으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맞느냐?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마 분명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욥이 했던 그런 일들은 사탄을 포함한 그 어떤 사람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들은 욥이 사탄을 이긴 가장 유력한 증거이다. 이 증거는 욥에게서 만들어진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얻은 첫 번째 증거이다. 그러므로 욥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을 증거했을 때, 하나님은 욥에게서 희망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마음 역시 욥으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창세부터 욥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처음으로 무엇이 위안인지, 무엇이 사람으로부터 위안을 받는다는 것인지 진정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은 무엇이 진정으로 그를 증거하는 것인지를 보았고 또 그것을 얻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의 증거와 욥에 대한 다방면적인 설명을 듣고 난 후, 자신 앞에 펼쳐진 길에 대해 계획이 생겼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그동안 우려와 공포로 가득했던 많은 사람들이 점차 심신이 편안해지기 시작했고, 조금씩 안심하게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복이 있으면 너는 늘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니느웨 성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바뀌는 과정에서 일말의 망설임도, 모호함도 없었고, 순수한 진노에서 순수한 관용에 이르렀다. 여기서 하나님의 본질이 참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사역에 있어 단 한 번도 우유부단한 적이 없다. 그의 사역 원칙과 목적은 흠 없이 순결하고 투명하며, 여기에는 절대 그 어떤 계략과 음모도 섞여 있지 않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본질에는 어둠과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노한 것은 그들의 악행이 하나님 안중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고 그들에게 다시 관용을 베풀었을 때도 하나님이 나타낸 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었다. 이 모든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로 인해 바뀐 것이다. 그 기간에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성품은 변하지 않았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본질도 바뀌지 않았다. 사람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진노하지만, 사람이 참된 회개를 하면 하나님은 마음을 되돌려 진노를 거둔다. 그러나 사람이 완고하게 하나님께 계속 대항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멸할 때까지 노를 멈추지 않는데, 하나님의 진노는 그렇게 조금씩 사람에게 가까워진다. 이 또한 하나님 성품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나타내는 성품이 진노든, 긍휼과 자비이든 모두 사람의 태도와 행동, 그리고 진심에서 우러난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 기인한다. 만약 하나님이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노한다면, 그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 사람이 참된 회개를 하거나 하나님께 ‘머리를 숙인’ 적이 없고 진심으로 신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누군가 항상 하나님의 보살핌 안에 있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다면, 그 사람은 분명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진실로 신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적대시한 적이 없을 것이다. 늘 하나님 앞에서 참된 회개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가 늘 임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임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간단한 성경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 본질의 참됨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진노하는 것과 마음을 되돌리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진노할 때와 마음을 되돌릴 때 극명한 대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관용, 두 측면의 본질에 차이와 대비가 크다고 느꼈다. 하지만 니느웨 성 사람들의 회개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보면서 사람은 또 한 번 하나님의 참된 성품의 다른 면을 느낄 수 있었다. 인류는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진실성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으며, 진실하게 발현된 하나님의 본질을 알 수 있었다. 인류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전설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진실했고, 마음을 되돌린 것도 진실했으며, 하나님이 확실히 또 한 번 인류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참된 회개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어 결말을 바꾼 니느웨 사람들 하나님이 마음을 되돌리는 것과 진노하는 것에 모순이 있느냐? 당연히 없다! 하나님이 관용을 베풀었을 때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그것은 성경에 언급한 ‘각기 악한 길에서 떠나다’와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다’이다. ‘악한 길’은 한두 가지의 악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행한 일의 근원이 사악함을 의미한다. ‘악한 길에서 떠나다’는 더 이상 그렇게 일을 하지 않고 악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하는 방식, 근원, 출발점, 속셈, 원칙 모두를 바꾸어 더 이상 그런 방식과 원칙으로 향유하거나 즐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다’의 ‘떠나다’는 내려놓고 버림으로 과거를 완전히 끊어 내고 다시는 지난 길을 걷지 않는다는 뜻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난 것은 참된 회개를 했음을 증명하고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과 내면을 모두 관찰한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마음으로 참된 회개를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살펴보고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제서야 마음을 되돌렸다. 즉, 사람의 행동과 태도, 다양한 모습과 마음에 진실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태도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을 돌리고, 뜻을 바꾸고, 내린 결정을 거두고, 그들을 벌하지 않고, 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의 결말이 바뀌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되찾았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었다.

예수가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한 말씀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6~29)

이야기 1. 씨앗, 대지, 나무, 햇빛, 새, 그리고 사람

한 톨의 씨앗이 땅에 떨어졌다. 큰비가 지나간 후 씨앗은 새싹을 틔웠고, 천천히 땅에 뿌리를 내렸다. 새싹은 비바람을 견디고 맑고 흐린 날씨를 견디며 점점 자라났다. 여름에는 대지가 수분을 공급해 주며 뜨거운 날씨를 견디게 해 주었다. 대지 덕에 새싹은 뜨거움을 느끼지 않고 무더위를 넘겼다. 겨울이 되자 대지는 따뜻한 품으로 새싹을 꼭 껴안으며 따뜻한 기운을 전해 주었다. 그렇게 새싹은 혹한을 견디며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을 넘겼다. 새싹은 대지의 보호로 즐거워졌고, 용감해졌다. 또한 대지의 아낌없는 공급으로 튼튼해졌다. 새싹은 빗속에서 기뻐 노래하고 바람 속에서 한들거리고 춤을 추었으며, 즐겁게 성장했다. 새싹과 대지는 서로 기대고 의지했다. 몇 년 후 새싹은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커다란 나무가 되었다. 잎은 무성하고 기둥은 굵고 단단했다. 나무는 여전히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 뿌리는 땅속 깊이 자리를 잡았다. 다만 원래 새싹을 보호하던 땅이 이제는 나무의 기반이 되었다. 한 줄기 햇빛이 나무를 비췄다. 나무는 몸을 흔들고 팔을 뻗으며 햇빛의 기운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나무 발아래에 있던 땅은 나무의 리듬에 따라 호흡했고, 대지는 상쾌함을 느꼈다. 순식간에 나무에서 신선한 기류가 퍼져 나오면서 나무는 기운 넘치고 생기 있게 변했다. 나무와 햇빛은 서로 기대고 의지했다. 나무 그늘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는 사람들이 이따금 맑은 향기를 느꼈다. 이 향기는 사람의 심장과 폐를 깨끗하게 하고 피를 깨끗하게 했다. 사람의 몸은 이제 축 처지거나 답답해지지 않았다. 사람과 나무는 서로 기대고 의지했다. 새들이 지지배배 노래하며 날아와 나무에 앉았다. 어쩌면 천적을 피하기 위해서, 어쩌면 다음 세대를 낳아 기르기 위해서, 어쩌면 잠깐의 휴식을 위해서일 수도 있다. 새와 나무는 서로 기대고 의지했다. 나무는 땅속 깊이 얼기설기 뒤얽히며 뿌리를 내렸다. 나무는 자신의 몸으로 대지를 위해 바람과 비를 막았고, 팔을 펼쳐 발아래의 대지를 보호했다. 대지는 나무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나무와 대지는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살고 영원히 함께했다. …… 방금 언급한 모든 사물은 너희가 본 적이 있는 것들이다. 씨앗은 알고 있을 것이다. 씨앗이 나무로 변하는 과정은 자세히 못 봤겠지만 너도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안다. 그렇지? 대지, 햇빛도 알고 있다. 그럼 새가 나무에 앉아 있는 장면은 다들 본 적이 있지 않으냐? 나무 아래서 바람을 쐬는 사람은 본 적이 있느냐? (네.) 그럼 이 몇 가지 사물을 한 장면에 두니 어떤 느낌이 드느냐? (조화롭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장면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됐으니 하나님은 이 사물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의의와 가치를 알고 있다.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할 때, 각각의 사물을 예비하고 만들 때 다 그만의 의도가 있었으며, 하나님이 각각의 사물을 창조했을 때 그들은 모두 생명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이런 생존 환경, 다시 말해 방금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대지와 씨앗은 서로 기대고 의지하고, 대지는 씨앗을 키워 주고, 씨앗도 대지를 떠날 수 없는 둘 사이의 이런 관계는 하나님이 창조할 때에 정해 놓은 것이다. 나무, 햇빛, 새와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도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창조한 생존 환경이다. 우선, 나무는 대지를 떠날 수 없고, 햇빛도 떠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무를 창조한 목적은 무엇이냐? 단순히 대지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느냐? 단순히 새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느냐? 단순히 사람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그들의 관계는 어떠하냐? 그들은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사는 관계이자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다시 말해, 대지, 나무, 햇빛, 새와 사람 사이의 관계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공급하는 관계다. 나무는 대지를 보호하고, 대지 또한 나무를 키워 준다. 햇빛은 나무를 비추고, 나무 또한 햇빛에서 신선한 기운을 얻어 대지를 뜨겁게 달구는 햇빛의 열기를 약화시킨다. 최종의 수혜자는 누구냐? 최종의 수혜자는 인류다. 그렇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류의 생존 환경을 만든 원칙이자 초심이다. 평범해 보이는 장면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정성이 담겨 있다. 사람은 대지를 떠날 수 없고, 나무도 떠날 수 없고, 햇빛과 새도 떠날 수 없다. 그렇지? 이 장면은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천지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준 생존 환경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류를 위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생존 환경을 만들었다. 먼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말한 핵심은 만물이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또한 이런 원칙하에서 인류의 생존 환경이 보존되고 지속되며, 이런 생존 환경이 있기에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은 나무, 대지, 햇빛, 새, 그리고 사람이 있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 하나님이 있느냐? 보지 못했다. 그렇지? 하지만 이 장면 속에서 만물이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사는 법칙을 보았고, 이 법칙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주재를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원칙과 법칙으로 만물의 생존과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방식으로 만물과 인류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그럼 이 이야기는 우리가 말하려는 주제와 관계가 있느냐? 겉보기에는 무관한 것 같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만물의 법칙을 창조한 것, 더 나아가 하나님이 만유를 주재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과 불가분의 중대한 관계가 있다. 이제는 조금 느낄 수 있겠지? 하나님은 만유의 운행 법칙과 만물의 생존 법칙을 주관하며, 만유와 만물을 주관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들이 서로 의지하고 더불어 살며 멸망이나 소멸에 이르지 않게 한다. 그래야 인류는 지속될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이런 생존 환경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운행 법칙은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으며, 그 누구도 개입하거나 바꿀 수 없다.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러한 운행 법칙을 알고 있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이 법칙을 관리하고 있다. 나무는 언제 싹을 틔울지, 비는 언제 올지, 대지는 식물에 수분과 영양을 얼마나 공급할지, 낙엽은 어느 계절에 질지, 나무는 어느 계절에 열매를 맺을지, 햇빛이 나무에 양분을 얼마나 줄지, 나무가 햇빛에서 양분을 얻은 후 내쉬는 것은 무엇일지,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할 때 정한 것이다. 이 법칙은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다. 하나님이 창조한 만유, 즉 생명을 지닌 것이든 사람이 봤을 때 생명이 없어 보이는 것이든 모두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고 주재하고 있으며, 그 누구도 이 법칙을 바꿀 수도 깨뜨릴 수도 없다. 즉,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할 때 이런 법칙을 다 정해 놓았다는 뜻이다. 나무는 대지를 떠나 뿌리를 내릴 수도, 싹을 틔울 수도, 자랄 수도 없다. 대지에 나무가 없다면 대지는 말라 버릴 것이다. 나무는 새의 집이 되고 새가 바람을 피하는 장소가 되었다. 나무에게 햇빛이 없으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나무에게 대지만 있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인류와 인류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 인류는 나무로부터 신선한 공기를 얻으며, 나무가 보호하고 있는 이 땅에서 살고 있다. 또한 인류는 햇빛과 여러 가지 생물들을 떠나서 살 수도 없다. 이런 관계가 복잡하지만 네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이 만유의 법칙을 창조한 것은 만물이 서로 의지하며 더불어 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창조한 각각의 사물은 각자의 존재 가치와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만든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공급’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하나님이 매일 나무에 물을 주는 것이냐? 나무가 호흡하는 데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냐? (필요 없습니다.) 여기서 ‘공급’이란 창조 후에 하나님이 관리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법칙을 하나 만들어 그것을 관리하면 되는 것이다. 나무의 씨앗을 대지에 심으면 스스로 자라난다. 씨앗이 자랄 여건은 하나님이 미리 만들어 두었다. 햇빛, 수분, 토양, 공기와 주변의 환경, 바람, 서리, 눈, 비, 일 년 사계절, 이것은 나무가 필요로 하는 생존 조건으로, 하나님이 미리 예비해 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생존 환경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매일 가서 나무에 잎이 몇 장 달렸는지 셀 필요가 있겠느냐? 그럴 필요가 없겠지? 하나님이 나무의 호흡을 도울 필요도 없다. 햇빛도 하나님이 매일 가서 깨울 필요도 없고, “나와서 나무를 비춰라”라고 할 필요도 없다. 햇빛은 법칙에 따라 때가 되면 나와서 나무를 비춘다. 나무는 필요할 때 햇빛을 흡수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 역시 법칙 속에서 살아간다. 너희가 이 현상을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사실은 누구나 볼 수 있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너는 만물의 생존 법칙이 하나님에게서 왔고, 만물의 생장과 존속이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알겠지? 이 이야기 속에 인류가 말하는 비유가 있었느냐? 그럼 말하는 것이 일종의 의인화 기법이었느냐? (아닙니다.) 내가 말한 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주재하에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후 각 사물은 생명이 있게 되었고, 그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각 사물은 자기 생명의 궤적과 법칙을 스스로 준수하고 있으니 사람이 바꿀 필요도, 도울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알겠느냐? 사람이 이런 것들을 알 필요가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여기서 말한 이야기가 생물학과 관계있느냐? 지식이나 과학과 관계가 있느냐? 우리는 여기서 생물을 논하는 것도 아니고 생물학을 연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하려는 요점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만물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만물 속에서 너희는 무엇을 봤느냐? 나무를 봤느냐? 땅을 봤느냐? (네.) 햇빛도 보았다. 그렇지? 새가 나무에 앉아 있는 것을 봤느냐? (네.) 그럼 사람이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겠느냐?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을 ― 통해 인류가 살아가는 터전을 유지하고 보호하고 있으며, 이런 방식으로 인류와 만물에게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