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아들아, 이제는 계획된 틀에서 너를 놓아주마

2019년 01월 07일

어릴 적부터 선생님은 늘 우리에게 ‘모든 것은 다 하찮은 것이고 오로지 학문만이 고귀한 것이다.’ ‘지식이 운명을 바꾼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고학력자만이 출세할 수 있고 가문을 빛낼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저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만 했고 출세하고자 하는 소망도 허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태어난 후 저는 모든 희망을 아들에게 걸었고 아들이 장차 출세하기를 바랐습니다. 아들이 옹알옹알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저는 아들에게 글자와 당시(唐诗)를 가르쳤습니다. 아들이 어린이집에 다니면서부터, 선생님이 아들 손가락이 길어서 피아노를 치기에 아주 적합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피아노 학원에 등록해 주었습니다. 반년이 지나자 선생님은 아들이 피아노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고 터득 능력도 있으며 배우는 속도가 빠르니 피아노 급수 시험을 한번 보라고 말했습니다. 또 피아노 급수 시험에서 10급을 받으면 나중에 대학 입학시험에서 가산점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아들에 대한 저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했고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만일 아들이 나중에 음악으로 성공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 설령 피아노를 배워 큰 성과가 없다고 할지라도 등급 증명서로 대학 입학시험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잖아.’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내어 아들을 피아노 학원에 데려다주고 아들과 함께 피아노 연습을 하기 위해, 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직서를 내고 집에서 아들의 ‘연습 파트너’가 되어주었습니다. 피아노 연습은 아주 따분했습니다. 매일 몇 곡을 반복적으로 연습해야 했는데 아들은 심하게 짜증을 냈습니다. 특히 주말에 아래층에서 장난치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오면 집중해서 피아노 연습을 할 수가 없었고, 자기도 아래층으로 내려가 친구들과 함께 놀고 싶다고 투정도 부렸습니다. 간절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아들의 표정을 보며 저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피아노 급수 시험이 코앞인 것을 생각하니 아들의 장래를 위해 이런 고통은 반드시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생을 많이 해봐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고생하지 않고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저는 또 영어 학원을 등록해주었습니다. 아들은 날마다 학교와 피아노 학원을 오가며 바쁘게 보냈고, 주말에는 또 영어 학원과 도서관에 가야 했습니다. 말하기 좋아하고 잘 웃던 아들이 서서히 말수가 적어지고, 온종일 언짢은 표정으로 사람들과 말도 하지 않았으며,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않았고, 툭하면 화를 내고, 평소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에게 억지를 부린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제 친구가 집으로 놀러 왔는데 장난삼아 아들에게 “너는 아빠가 좋아 아니면 엄마가 좋아? 누가 더 좋아?”라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아들은 망설임 없이 “누구도 안 좋아, 우리 엄마는 마귀할멈 같아, 마귀할멈이 좋을 수 있겠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친구가 또 말했습니다. “너는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엄마는 매일 네가 피아노 연습할 때 곁에서 자리를 지켜주고, 또 날마다 학교에 데려다주고 고생하시잖아.” 그러자 아들은 화를 내면서 “나는 엄마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이 싫어. 피아노 치는 것도 지겨워. 언젠가는 이 피아노를 부숴버리고 말 거야!”라며 생각지도 못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의 그 말이 마치 힘센 주먹으로 저의 가슴을 강하게 내려친 것처럼 아파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습니다. 아들의 출세를 위해 희생하고, 물질과 정력을 쏟아부었을 뿐만 아니라 직장마저도 포기했는데, 아들은 저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저를 미워할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전에는 저와 말하기를 좋아하고 장난치고 놀기 좋아하던 아들이 지금은 엄마를 마귀할멈 같다고 한 뜻밖의 말에 저는 정말 울고 싶었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온몸에 힘이 쫙 빠졌습니다.

나중에 저는 이런 방송 기사를 보았습니다. ‘모 학교 한 여학생이 자신에 대한 부모의 기대가 너무 높은 데다,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로 심적인 부담을 이기지 못해 고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이 방송을 본 저는 놀랍고 두려웠습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높은 기대가 이런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고, 또한 아들이 언젠가 그 여학생처럼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습니다. 순간 저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막막했습니다. 그동안 아들을 훌륭하게 길러 인재로 만드는 것이 제 삶의 목표였고 원동력이었는데, 이제는 아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대해야 할지 정말로 몰랐습니다!

자녀 교육

고통스럽고 막막해 할 때, 언니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변변찮은 능력 탓에 이번 생에서는 더 이상 성공의 기회와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자신이 못 이룬 꿈과 희망을 자녀에게 맡기고 대신 이뤄 주기를 바란다. 자녀가 가문을 빛내거나 높은 위치에 오르기를 바라고, 큰 부자나 유명인이 되기를 바란다. 자녀가 출세만 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여긴다. 사람의 계획과 생각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한들 부모가 자녀의 수, 외모, 능력 등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더군다나 자녀의 운명은 부모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자신의 운명도 어쩌지 못하면서 자녀의 운명을 바꾸려 들고, 자신의 운명에서 한 발짝도 옴짝달싹 못 하면서 자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하냐?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으냐?』

하나님의 말씀은 구구절절 제 속의 생각들을 들추어내셨습니다. 그동안 제가 출세하지 못하고 가문을 빛내려는 꿈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인해 모든 희망을 아들에게 걸지 않았습니까? 아들이 옹알옹알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글자를 가르쳤고, 학교에 입학한 후부터는 또 많은 학원에 등록시켜 주었으며, 나중에 아들을 인재로 만들기 위해 심지어 직장을 사직하면서까지 아들이 공부하도록 재촉하고, 노는 시간마저 빼앗지 않았습니까?

저는 말끝마다 아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천진난만하고 근심 걱정 없이 자라야 할 아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훈련하게 한 것입니다. 아들을 인재로 키우지도 못했고 오히려 성격이 괴팍해져 저와 말조차 하기 싫어했으며, 심지어 저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가득 차서 저를 마귀할멈 같다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저는 ‘모든 것은 다 하찮은 것이고 오로지 학문만이 고귀한 것이다.’ ‘지식은 운명을 바꾼다.’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 ‘가문을 빛냄’이라는 사탄의 철학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사탄 철학에 농락당한 아이는 힘든 생활을 했고 저 역시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사람의 운명이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입니까? 자신의 운명도 장악할 수 없으면서 아들의 운명을 장악하고 통제하려 했으니 그야말로 분수를 몰랐습니다. 저는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무리한 요구로 아이들이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고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기사를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부모들이 사탄의 독소에 따라 자녀들을 교육하면서 한결같이 부모의 교육 방식에 따라 공부하고 살아갈 것을 강요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지 않아 결국 아이들은 과중한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함으로써 그런 비극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내적 상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존의 삶의 방식과 인생 목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생활 방식과 인생관, 추구, 소망과 꿈을 정리하고 분석한 다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요구에 대조해 자신의 생존 방식과 인생관 등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에 맞는 것이 있는지, 올바른 인생의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진리를 점점 더 깨닫는 삶을 살고 인성 있게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게 하는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기존의 인생관을 버리고 여러 함정을 멀리하며, 하나님께 삶을 맡겨 배치하고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에 순종하기만을 구하며, 자신의 선택이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이전에 사탄의 생존 법칙에 따라 살아왔던 저 자신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저는 줄곧 가문을 빛내고 출세하는 것만을 추구했지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참된 순종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결국 저의 희생은 당연히 받아야 할 보답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들과 저의 사이만 낯설어졌고 사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에게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사탄의 생존 법칙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행하고 아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하나님의 주재와 배정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사실, 아들이 나중에 어떤 운명일지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결정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이 배정해 놓으셨습니다.

그 후 저는 더는 아들에게 학원에 가서 피아노 연습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아들 뜻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무엇을 배우고 싶다거나 혹은 어떤 것에 흥미가 있으면 저는 격려하고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서서히 밝아졌고 이전처럼 더는 제멋대로 억지를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와의 관계도 점점 더 좋아졌고, 어떤 고민이 있거나 학교에서 즐거운 일, 불쾌한 일이 있으면 집으로 돌아와 항상 저에게 말을 했습니다. 아들은 학원에 다니지 않았지만, 성적은 오히려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아서 시험을 칠 때마다 반 석차가 상위권이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자랑스럽게 저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학교 친구들이 나를 아주 많이 부러워해. 자기들 엄마도, 우리 엄마 같았으면 좋겠다고 다들 말을 해.” 저는 왜 그런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들은 “우리 반 친구들은 날마다 학원에 가는데, 자유 시간이 전혀 없고 재미도 없다고 말을 해. 하지만 난 오히려 내 흥미에 따라 선택할 수 있어서 매일 자유롭고 유쾌하게 지낼 수 있지. 내 생각에는 엄마가 하나님을 믿고 나서 바뀐 것 같아. 이전에는 항상 엄마 스케줄에 따라야 했고 엄마 뜻대로 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를 냈는데, 지금은 무엇이나 나와 상의하고 내 생각을 물어보잖아. 나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데 이제야 내 엄마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의 말에 저는 너무 감동되어 “ 엄마가 더는 너에게 이것저것을 배우라고 강요하지 않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변화시켜 주었기 때문이야.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드려야 해. 우리에게 인생의 바른길을 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김정

신고를 당한 후 …...

“누님, 누님한테 신고가 접수됐어요!" “왜요? 또 어디가 안 깨끗하대요?"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누님, 복도를 깨끗하게 청소하지 않았어요? 물걸레로 바닥을 닦으셨나요?" “바닥은 진공청소기로 하고, 물걸레는 안 썼어요.” 나는 이렇게 해명했다. “직원이 물걸레가 마른 채 있는 것을 보고 누님이 물걸레 쓰는 것을 못 봤다고 신고했어요. 앞으로 바닥을 닦지 않아도 물걸레는 축여서 거기에 놔둬야 해요. 그러면 다시는 누님을 신고하지 않을 겁니다.” 사장의 전화를 끊고,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이미 충분히 깨끗하게 청소했는데 왜 또 신고가 접수된 것일까? 이 환경미화원이라는 일을 맡게 되면서 이미 두 번째로 신고가 접수된 것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처음 접수된 신고는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지 않아서였고, 이번에는 물걸레로 바닥을 닦지 않아서였다. 이런 환경에 처하자 나는 얼른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달라고 구했다. 내가 막 이 청소 일을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소개한 친구가 이곳은 위생에 대한 요구가 높지 않아서 40분이면 일을 끝낼 수 있고, 일당은 2500엔(약 2만5천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처음 출근했을 때, 3시간이 걸려서야 일이 전부 끝났다.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번에는 전부 대청소를 했는데, 주차하는 곳만 물을 뿌려 청소하는데도 40분이 걸렸다. 똑같은 돈으로 이렇게 오래 걸리면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다음에 이곳을 청소하지 않으면 시간이 줄어들겠지. 만약 또 청소할 필요가 없는 곳을 줄이면 걸리는 시간은 더 줄어들 거야. 그러나 나중에 내가 어떻게 노력해도 거의 2시간이 걸려야 일이 끝났다. 가장 빨랐을 때도 1시간 반이 걸렸다. 그래서 나는 항상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40분에 마치자는 목표를 달성하려고 나는 청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곳은 최대한 생략해버렸다. 일을 할 때마다 나는 시간을 보았고, 이번에는 얼마나 걸렸는지 계산했다. 항상 이득을 봤는지 아니면 손해를 받는지 따져야 하니까 정말 피곤했다. 기분이 좋고 나쁨도 이 일에 영향을 받았다. 시간을 절약하려고 구석에 더러운 곳을 봐도 청소하지 않았을 때, 나의 마음도 항상 죄 짓는 듯 불편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책임을 다해 일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시간을 덜 쓸 수 있을까만 고민했다. 시간을 덜 쓸수록 이득이라며 온종일 시간을 덜 들이는 데 온 마음을 기울였다. 그런 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만일 여지를 두고 잔꾀를 부리고 뺀질댄다면 이 사역은 절대 잘할 수 없다. ... “어떤 일이든 보고도 못 본 체하며, 하라고 시키면 좀 하고, 지켜보는 사람이 있으면 좀 잘하고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참답게 하지 않는다. 만일 책망을 받으면 마음을 좀 기울여 하고 책망을 받지 않으면 어쨌든 보는 사람이 없다고 꾸벅꾸벅 졸며 속일 수 있는 데까지 속이려고 든다.”라고들 말한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어떤 사람들은 발견한다. “이 사람은 믿고 신뢰할 수 없어. … ”사람은 그를 간파했다. 그는 자기의 존엄과 인격을 짓밟아 버렸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향해 하는 말 같았고, 구구절절 나의 마음을 찔렀다. 일을 할 때 잔꾀를 부리고, 교활한 짓을 하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거울을 닦을 때는 눈앞에 보이는 부분만 닦았다. 윗부분이 조금 더러워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르는 부분은 닦지 않았다. 변기를 닦을 때는 겉에만 닦았다. 냄새가 나면 여러 번 물을 내렸다. 어떻게든 빨리 끝내려고만 했다. 어쨌든 일을 마치고 검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대충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간이 차츰 흐르면서 발견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 때문에 신고 당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사장이 처음으로 내가 신고 당한 것을 알려주었을 때, 나는 벌금을 물거나 해고를 당하지 않을까만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찾지도 않았다. 두 번째 신고를 당하자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하나님은 이번 일을 통해 나에게 이렇게 인격도 존엄성도 없이 살면 안 된다고 알려준 것이다. 후에 나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다.『이방인이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일하는 태도는 어떤 것이냐, 어떤 상황이냐? 그것은 모든 면에서 다 거래하는 것이다. 나에게 시간당 얼마를 주면 그만한 노동력을 제공하겠다는 것인데, 심지어 돈을 더 많이 받았으면 좋겠고, 더 나아가 노동력은 제공하지 않고 돈만 받고 공짜로 돈을 챙길 수 있다면 더 좋다고 한다. 일이 없으면 차나 마시고, 신문이나 보다가 상사가 오기라도 하면 눈앞에서는 열심히 하면서 조금 신경을 쓰고 힘을 쓴다. 그것은 다 승진을 위한 것이고, 돈을 많이 받고 많이 벌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다 교묘한 수법을 쓰는 것이고, 음험한 수법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 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다 궤계이고 전부 사탄의 철학, 사탄의 악독한 본성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이다.』『이방인들이 일을 하게 되면, 일은 적게 하면서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궁리만 하고, 힘을 적게 들이고 교묘하게 돈을 벌 방법만 늘 생각한다. 그것은 사악한 길이고, 사탄의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는 사탄에게 유혹당해 전혀 사람답지 않게 타락한 나를 보았다. 본성은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 차서 적게 일하고 돈만 많이 벌 생각을 했다. 사장이 곁에서 지켜보면 열심히 일하고, 지켜보지 않으면 대충대충 일했다. 일을 하면서 항상 교묘하게 잔꾀를 부렸다. 오로지 이익만 추구하며 양심과 인격은 내다 버리고, 비열하고 야비하게 살았다. 나는 항상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고 40분 안에 일을 끝내려고 구석의 더러운 곳을 보면 청소하고 싶었지만 시간을 허비할까 봐 다음 번으로 미뤘다. 다음 번에 시간이 길어지면 또 다음을 기약했다. 정말 온갖 궁리를 다해서 어떻게든 빨리 끝내려고만 했다. 최소의 시간으로 최대의 이익을 얻으려고. 사실, 내가 이렇게 해서 몸은 좀 편해졌지만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마음속으로는 항상 불안했다. 집에 있을 때도 고객에게 발각되어 신고당하지는 않을까, 해고 당하지는 않을까만 걱정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조금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살았다는 것이 정말 가치가 없고 너무 비천했다. 다른 사람이 두 번이나 나를 신고했다는 것은 나에게는 양심도, 인격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어찌 크리스천의 모습이 있겠는가! 나는 조그마한 이익을 위해 더 이상 자신의 양심과 인격을 팔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아야 하고, 개인의 사욕을 버리고 크리스천이 마땅히 가져야 할 모습으로 살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만일 이 사람을 신뢰할 수 있다면 너는 중요한 일만 그에게 맡겨 처리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가 일을 처리할 때 너를 생각해 주고 마음이 착하고 책임감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처리해 주고, 심지어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것보다 더 신경 써서 해 주며, 매사에 너를 생각해 주고, 너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기 때문이다. 신뢰할 만한 사람은 인성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는 실행의 길을 찾았다. 기왕 이 일을 시작했고 월급을 받고 있으니 나는 이 일을 내 일처럼 여기고 해야 한다. 진솔하게 책임을 지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어야 인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 후 내가 다시 출근했을 때, 나는 예전에 일 하던 태도를 버리고 마음을 다해 일하기 시작했다. 화분과 꽃잎에 먼지가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나는 물로 살짝 깨끗이 닦아냈고, 복도 전체를 물걸레로 깨끗하게 닦았다. 그렇게 하자 기분이 유달리 상쾌했고, 바빠서 시간을 보는 것도 잊어 버렸다. 나는 더 이상 몇 시간이나 일 했는지 따지지 않았고, 사서 걱정하는 일도 없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의 마음은 아주 편안했다.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끌어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타락한 성품 속에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나의 마음이 편안한 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맛 본 것이다. 앞으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실천하고 인간답게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위로할 것이다.

기쁨의 비결, 단점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다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단점이 비웃음거리가 된다면 아주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런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래 주인공의 이야기로 그 원인을 찾고, 기쁨과 자유로움을 얻어보세요.

왜 우리는 평범이 아닌 뛰어남을 선택하려 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것을 좋아하며 평범한 사람이 아닌 훌륭한 사람으로 거듭나길 위해 노력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추구 방식이 가져오는 고통과 억압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을까요?

곧 있으면 기말고사 기간입니다. 다른 과목은 걱정이 없는데, 제가 가장 취약한 유기화학 과목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어떻게 해야만 이 과목에 점수를 높일 수 있을까? 이 과목 시험을 망친다면 전체 성적이 하락 할 것이고, F학점을 받아 낙제하면 더 골치 아파질 텐데 마음이 초조해지자 제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한다면 반드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의지하며 열심히 공부했고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필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또 한 번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저의 기억력을 높여주시고, 이 모든 지식을 제가 기억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또한, 교수님이 내주신 과제는 항상 성실히 수행했습니다. 기숙사 룸메이트들이 노는 것을 보면, ‘하루 종일 공부를 했으니 이제 나도 컴퓨터 게임을 좀 하면서 쉬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게임을 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 한 단락이라도 더 본다면 하나님께서 기특하다고 해주시며 이 시험을 잘 칠 수 있게 도와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게임 시간까지 할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로 했습니다. 예배 갈 시간이 되었을 때 다른 학생들이 모두 복습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과목이 본래 취약한데, 복습시간이 타 학생들보다 적다면 내 성적도 낙관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예배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이 예배에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텐데, 그렇다면 시험을 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실 거야. 여기서 억지로 암기하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겠지!’ 이런 생각에 주저 없이 복습을 포기하고 먼저 예배에 나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했습니다. 어느덧 기말고사 기간이 되었습니다. 한동안 이 과목에 들인 노력과 시간, 그리고 하나님과의 ‘호흡’을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하나님께선 분명 이번 시험을 잘 칠 수 있도록 축복을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험 보는 그 날 찬양을 흥얼거리며 강의실에 들어갔고 평온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번 시험은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꼭 이번 시험을 잘 칠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시간이 일분 일초가 지나갔습니다. 앞장의 문제는 비교적 잘 넘어갔는데, 마지막 문제에서 막혔습니다. 복습할 때 분명 본 문제인데, 어떻게 푸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시험 마감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마음이 초조해지고 심장은 쿵쿵댑니다. 이때 저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찾아 이 문제를 풀어달라고 구원요청을 했습니다. 기도 후 마음이 평온해지며 곧 실타래가 풀리듯 답안을 적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기뻐서 하나님께 계속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 주가 지나 성적이 공개되었습니다. 반 친구들은 쉴새 없이 인터넷으로 성적을 조회했습니다. 친구들의 높은 점수와 낮은 점수를 듣게 되자 조금 긴장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하나님과 함께 ‘호흡’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보며 예배도 빠지지 않았기에 분명 좋은 성적을 얻게 해주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문제는 분명 하나님이 도와주셨으니 점수가 아무리 낮더라도 얼마나 낮게 나오겠나 하는 생각으로 자신감 있게 성적을 조회했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성적은 73점이었습니다. 멍하게 있다가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73점이라니? 어쩜 이렇게 낮을 수 있단 말인가?’ 마음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렇게 점수가 낮다니, 설마 교수님께서 채점에 실수했을까? 그럴 리가 없는데! 그동안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했는데, 점수가 이렇게 낮다니? 하나님은 어째서 내게 축복해 주지 않은 걸까?’ 매우 큰 상실감이 찾아왔습니다. 기숙사로 돌아온 후 매일 게임을 즐겨 하던 친구가 소리쳤습니다. “75점 맞았어. 복습도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이거 너무 쉬운걸? 사실 과락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 말을 들으니 저는 더욱더 억울해져 원망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쟤는 매일 복습도 안 했는데 어떻게 나보다 점수가 높을 수가 있지? 내 점수가 이렇게 낮은데 하나님은 왜 도와주시지 않은 걸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괴로워졌고 오랫동안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그때 문득 예배에서 형제자매들이 교통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니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상황에서 난관에 부딪혔을 때 먼저 순응하고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묵묵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번 시험을 잘 치지 못해 너무 괴롭습니다. 이번 일에서 당신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예배 때 이 일을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통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주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늘 요구가 있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이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늘 관념이 있는데, 이것은 또 무슨 문제이냐? 사람의 본성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나는 사람이 어떤 일에 부닥치든, 어떤 일을 대하든 늘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육체만 고려하며, 늘 자신을 위해 이유와 핑계를 찾고 진리는 전혀 없으며, 모두 자신의 육체를 위해 변호하고 자신의 앞날을 위해 타산하며, 모두 하나님께 은혜를 요구하고 어떤 이득이든 다 얻으려고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왜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많을까? 이것은 사람의 본성이 매우 탐욕스럽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이성이 전혀 없음을 증명한다. 사람이 하는 모든 것, 기도하든 교통하거나 설교하든, 어쨌든 사람의 추구, 사람의 생각, 사람이 동경하는 것은 다 하나님께 뭔가 요구하고, 뭔가 토색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뭔가 얻어 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말씀을 읽은 후 자매님은 “우리가 사탄에게 부패한 후 내면에는 이기적이고 비열하고 사악한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는 더 이기적이고 더 탐욕스럽게 변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건 불순한 의도가 있고, 하나님께 많은 요구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의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채워주시기를 원하기만 합니다. 평소에 우리가 말씀을 먹고 마시고, 기도와 예배하는 것 모두 하나님과의 거래입니다. 항상 대가를 지불하여 하나님의 축복으로 바꾸려고 하죠. 우리가 하는 행위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지 않나요?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복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단지 이번 시험을 잘 치지 못했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거역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일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반성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자매님과의 교통으로 자신을 책망하고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일을 떠올려보았습니다. 겉으로는 매일 기도하고 하나님께 다가갔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게임을 즐길 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고, 다른 친구들이 복습에 열중해 있을 때 저는 시간을 쪼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동을 했으나 실제로는 다른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께 좋은 성적을 달라고 하기 위함이었고 진실한 경배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저의 목적이 올바르지 않아 매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지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매번 하나님의 말씀을 본 것도 사실은 주마간산 식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었으며, 예배도 항상 시간에 맞춰 참석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앉아있어도 마음속으로는 빨리 끝내고 복습하러 가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가식적인 행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축복의 조건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시험을 잘 치게 해달라고 무리하게 요구만 했던 것입니다. 맨 마지막 문제를 풀었을 때 저는 하나님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73점이라는 점수를 확인했을 때는 하나님께 따지고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정말 일말의 양심과 이성도 남아 있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저의 모든 행동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축복을 위한 하나님과의 거래였던 것입니다. 이를 깨닫자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빚을 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매님은 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에게 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토색하지도 않았다. 욥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은,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자신이 복을 받거나 화를 입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든 화를 입든,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은 바뀔 수 없기에, 어떤 상황에 처하든 하나님의 이름은 당연히 찬송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화를 입는 것도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은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안배하고 있으며, 조석으로 변하는 사람의 화복은 모두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병을 선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며, 어느 각도에서 보든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이것은 욥이 한평생 체험하고 인식한 것이다. 욥의 그런 모든 마음과 행위는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고, 하나님 앞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은 그것을 귀히 여겼다. 하나님은 욥의 그런 인식을 소중히 여겼고, 욥에게 있게 된 그런 마음도 소중히 여겼다. 그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분부를 기다리고 있었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에게 임하게 될 모든 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욥은 하나님에게 요구가 없었다. 욥이 자신에게 요구하여 행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모든 안배를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마주하고, 순복하는 것이었다. 욥은 이것을 자신의 직책으로 여겼는데, 이것 또한 하나님이 원했던 것이기도 하다.』 욥의 경험에 큰 격려를 받고 고무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했으며, 절대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않았습니다. 거액의 자산을 잃고 온몸에 악창이 났을 때, 욥은 비록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이치를 따지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피조물이 창조주를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축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거래하는 조건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또한 피조물은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창조주의 섭리에 따라야 하며 인간은 하나님과 이치를 따질 자격이 없고 주신 이도, 거두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칭송을 받아 마땅한 분이심을 알았습니다. 자신을 욥에 비교하여 생각하자 더욱더 부끄러워졌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지 수년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예배, 기도 이 모두가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일에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하고,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말고, 관념에 따라 판단하면 안 된다는 정확한 노선을 찾았습니다. 오직 기다림과 수용,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을 받아들이자 그 게임을 자주 하는 친구가 고등학교 재학시절 동일 과목을 공부하여 이번에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대다수 문제는 기존에 아는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와 달리 저는 이 과목을 기존에 배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즉 기초가 탄탄하지 않았으므로 시험 점수가 낮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자 더욱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도움 없이 마지막 문제를 틀렸다면 이 과목에서 과락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것도 모르고 되려 비이성적으로 하나님만 원망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우매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마음속 응어리가 모두 풀렸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직접 체험하고 또 형제자매님과의 교통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과 거래하거나 하나님께 뭔가를 요구하면 안 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진리추구, 순종만이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는 학교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값진 깨달음입니다. 이를 깨닫고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가득해졌습니다. 다시는 점수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시험장에 들어섰을 때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오늘 시험점수가 몇 점인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건 상관없습니다. 전 기쁘게 받아드릴 것입니다. 평정심을 계속 유지할 것입니다.” 기도 후 마음이 평안해졌고, 시험 중간중간 하나님께 의지했습니다. 시험 종료 후 마음은 편안해졌습니다. 성적이 나왔고, 86점이란 점수를 얻었습니다. 시험이 저번보다 더 어려웠지만 더 높은 점수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저에게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이성을 지녀야 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과 그래야만 마음과 영혼의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원망을 해결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아빠가 맏이이기 때문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엄마가 첫 자녀로 아들을 낳기를 원했다는 이야기를 엄마로부터 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딸이었고, 그런 나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내가 두 세 살쯤, 아빠는 출근을 하셔야 했고, 엄마는 농사를 지으시느라 바빠서 나를 돌봐주실 시간이 없으셨기에,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셨다. 매번 엄마가 일을 끝내고 나를 데리러 오셨을 때, 내 바지는 항상 오줌으로 젖어 있었고, 작은 엉덩이는 빨개져 있었지만, 할머니는 바지를 갈아 입혀 주지 않으셨다. 엄마는 이런 내가 너무 안쓰러워 할머니와 말다툼을 하셨다고 한다. 결국, 나를 혼자 집에 두실 수 밖에 없었는데, 그때 난 겨우 다섯 살이었다. 엄마가 밭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면, 나는 의자에서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남동생이 태어난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남동생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며 돌보아 주셨지만, 나를 점점 차갑게 대하셨다. 그래서 내 마음 속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으며, 동생을 편애하고, 나에게 너무 불공평하게 대한다고 느꼈다. 내가 9살 때, 추석을 맞아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갔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주방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고, 나는 혼자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거의 다 되어서 남동생이 왔다. 우리 둘은 같이 주방으로 들어 갔는데,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급하게 “찬장에 월병 뒀어요, 얼른 꺼내서 손자 먹여요!” 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속으로, ‘난 온 지 한참 됐는데 나한테는 안 주고, 남동생이 오자마자 바로 월병을 꺼내 주다니.’라고 생각 했다. 나는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고, 울면서 집으로 뛰어 갔다. 평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나에게 말을 하실 때도 좋게 말하시지 않고 항상 소리를 지르거나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셨다. 설날이 되어 온 가족이 할머니 댁에 모여 같이 밥을 먹을 때, 할머니께서는 아주 친절한 말투로 “내 새끼~ 얼른 와서 밥 먹어라!”라고 남동생을 부르셨지만, 나에게는 차가운 얼굴로 “얼른 와서 밥 안 먹고 뭐해!”라고 소리치셨다. 때때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남동생을 품에 안고 놀아 주셨는데, 이러한 자상함은 나에게 결코 보여주지 않으신 것이었다. 내 기억 속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나에게 인자한 미소를 보여준 적이 없었으며, 항상 매우 차갑고 낯선 모습만 보여 주셨다. 내 어린 마음에는 조금씩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원망이 생겼다. 그 당시, 아빠는 일을 하다가 사고로 반신 불수가 되셨고, 가족의 모든 일은 엄마가 짊어지게 되셨다. 아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저금해 놓은 모든 돈을 다 써버렸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셨다. 할아버지는 소를 한 마리 키우셨지만 우리가 밭을 갈 때도 도와주지 않으셔서 엄마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고 밭일을 맡기셔야 했다. 나와 남동생이 학비 낼 돈 마저 어렵게 되자, 할 수 없이 엄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찾아가 도움을 좀 달라고 부탁하셨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할아버지는 자신이 나와 남동생의 학비를 대 주시고, 생활비만 엄마가 대는 것으로 약속 하셨다. 그러나 뜻밖에 날아든 비보를 듣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여름방학 때,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고, 연이어 발생한 일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나의 원망을 더 깊게 만들었다. 개학을 앞두고 학교에 등록을 해야 해서 엄마는 나에게 할아버지에게 가서 학비를 받아오라고 했다. 내가 할아버지 집 대문에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가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고 계신 것을 보았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저 학교에 등록을 해야 돼서 학비 받으러 왔어요!”라고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담뱃대를 빠시면서 무표정하게 밖을 쳐다보시며 나에게 “아들을 잃은 마당에 손자가 다 무슨 소용이야!”라고 하셨다. 할아버지의 그 말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마음을 찔렀고,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며 밖에 서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께서는 학비를 주지 않으셨고, 나는 억울함에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마음 속으로 할아버지를 원망하며 생각했다. ‘할아버지, 정말 너무 모질군요! 아빠도 없는데 우리마저 버리시다니요!’ 나는 오기를 부리며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흥! 오늘부터 나도 할아버지는 없어, 당신들이 죽어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거야!’ 그때부터, 나는 그들을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인정하지 않았고, 다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일들을 물어보면, 나는 매우 차갑게 “저한텐 할아버지 할머니가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취직 후, 휴가 때 집에 돌아 가서 친구네 집 앞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이쪽으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할아버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서 친구랑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중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새로 이사한 집에 가보지 않았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향한 원망하는 마음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중에 엄마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어느 날, 엄마는 나에게 “딸, 예전에 내가 네 앞에서 항상 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원망해서 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미워하게 된 것 같다. 사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남아선호사상이 있고, 우리에게 잘 대해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분들을 미워해서는 안돼.” 엄마의 이 말은 나를 매우 놀라게 했다. 엄마는 지금껏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싫어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변한거지?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 편을 들어주다니? 나는 의아하게 엄마를 쳐다 보았고, 엄마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거 아니? 사람이 모두 사탄에 의해 깊이 타락되어 어쩔 수 없이 타락된 성품으로 살아가고 있어서 분쟁과 미움, 그리고 싸움이 일어나게 된 거야. 이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엄마는 하나님 말씀으로 깨달을 수 있었어. 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 건, 사탄이 그분들을 타락시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탄의 성품대로 살아가기 때문이야. 우리가 그분들을 미워 할 수 있는 것도, 타락한 성품 때문이란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일부를 이해하게 되었으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고, 그분들을 이해하고 포용하기로 했단다.” 엄마의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에게 못되게 대한 건 사실이잖아. 만약 우리한테 잘 대해 주셨어도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싫어했을까? 어쨌든, 내가 그들을 미워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야!’ 하지만, 엄마가 하나님을 믿고 나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대하는 부분에서 이렇게 큰 변화가 있다는 것에 날 정말 놀라게 했고, 하나님에 대한 호감이 생겼다. 나중에, 엄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세에 하시는 사역에 대한 간증을 하셨고, ≪하나님 3 단계 역사의 실제 기록 정선≫이라는 책을 주셨다. 나는 이 책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진리를 선포하고 구원사역을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인간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보았기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나님을 믿은 후 나는 최초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류를 위해 좋은 환경과 각종 식물을 예비해 주셨으며,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는 원래 에덴 동산에서 즐겁게 살고 있었지만, 뱀의 유혹을 받아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아름다운 생활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우리를 구원하는 사역을 계속 하고 계시며, 인류가 누렸던 본래의 아름다운 생활로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받아들일 수 있어서 행운이였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 기뻤다. 이때부터 나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예배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자매님에게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자매님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을 찾아 주었다.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지 않았을 때에는 사탄의 본성이 사람 안에서 주인이 되어 사람을 지배하였다. 그 본성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느냐? 예를 들자면, 너는 왜 이기적이 될까? 너는 왜 자신의 지위를 지키려고 할까? 너는 왜 정이 그렇게 많은 걸까? 너는 왜 불의한 것을 좋아하고 악을 좋아할까? 이런 것들의 뿌리(원문: 根據)는 어디에 있을까? 어디에서 온 것일까? 너는 왜 이런 것을 받아들이기 좋아하는 걸까? 이제는 너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주로 사탄의 독소가 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탄의 독소란 무엇일까? 완전히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네가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한마디로 문제의 근본 원인을 말하였다. 사탄의 논리가 이미 사람의 생명이 된 것이다. 사람이 이것을 위하든 저것을 위하든, 그것은 다 자신을 위한 것이다. 사람은 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자매는 이렇게 교제해 주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 사람이 사탄에 의해 타락된 후, 사탄의 독소는 우리의 생존의 근본이 되었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하늘과 땅이 그를 멸망시킨다’라는 생각이 우리 마음속에 주입되어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게 되었으며, 아주 이기적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좋고 나쁨을 평가할 때, 이 사람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근거로 그를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자매님에게 못되게 대했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탄 독소의 지배를 받아‘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하늘과 땅이 그를 멸망시킨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사람들 사이에는 진정한 사랑과 포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탄의 독소가 우리의 심령을 왜곡하여 양심과 이성을 잃게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해야 올바른 사람인지 알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자매님의 교제를 통해 내 마음은 확 밝아졌다. 우리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과 포용이 없는 것은 모두 우리가 사탄의 타락으로 인해 사람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모두 타락된 성품으로 살아가면서 점점 더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이익에만 급급한 삶을 살게 된 것임을 깨달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감동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실, 할아버지 할머니도 피해자였군요. 그분들은 사탄에 의해 타락되서 그렇게 변한 거네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제야 알았어요. 제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미워하는 건 사탄의 독소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하늘과 땅이 그를 멸망시킨다’라는 말로 괴롭힘을 당한 거예요. 이제는 더 이상 사탄에게 눈이 멀어 속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을 의지해서 그분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고 싶어요.” 그 후, 나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다. 『인류의 희로애락은 이기적이고 어두운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하나님을 영원히 함께 논할 수 없다. 하나님은 영원히 지고지상하고 영원히 존귀하며, 사람은 영원히 미천하고 영원히 한 푼의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인류를 위해 봉헌하고 지불하고 있지만, 사람은 모두 영원히 자신을 위해 토색하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인류의 생존을 위해 수고하지만, 사람은 영원히 정의와 광명을 위해 그 어떤 것도 바치지 않는다. 설령 사람이 잠시 노력한다 해도 일격에도 견디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노력은 영원히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영원히 이기적이고, 하나님은 영원히 사심 없다. …』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사실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류의 생존을 위해 사심 없이 희생하고 계시지만, 사람들은 모두 이기적이어서 자신의 취향과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첫 번째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위해 사심 없이 아름다운 에덴동산을 예비해 놓으셨고, 그들이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셨다. 우리가 사탄에 의해 타락된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구원을 멈추지 않으셨으며, 우리에게 풍부한 물질을 베풀어 주셨고, 우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셨다. 동시에, 진리를 선포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역사를 하고 계시며, 우리의 생명이 목양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보살핌과 보호를 받도록 하신다. 그러나 사탄으로 인해 타락된 후 우리 인간은 모두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살아간다. 이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나는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어느 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다. 『몇천 년을 거친 고대 문화의 역사적 지식은 사람의 사상 관념과 정신 풍모를 물샐틈없이 봉했는데, 좀 먹지 않는 문돌쩌귀와 같다. 사람은 십팔 층 지옥에서 살고 있는데, 마치 하나님에 의해 지하 감옥에 떨어진 것처럼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한다. 사람은 이미 봉건사상에 숨쉬기조차 힘들 만큼 억압당하였고, 다 질식하여 반항할 힘이 전혀 없으며, 그저 말없이 참고 참을 뿐이다… 지금까지 아무도 감히 정의와 공평을 위해 분투하거나 일어선 적이 없고, 그저 봉건 교육의 가혹한 속박 속에서 개돼지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날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찾아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생각지 못하였다. 사람은 격타(擊打)당하여 늦가을의 낙엽처럼 시들고 누렇고 삐쩍 말랐다. 사람은 일찍이 기억을 상실하고, 인간 세상으로 불리는 지옥에서 속절없이 살며 …』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왜 남자 아이만 좋아하고 여자 아이는 좋아하지 않는지를 깨달았다. 이는 사탄이 주는 봉건 사상에 오래도록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출가한 딸이요, 쏟아진 물이다.”라는 말이나, “가문을 빛내고 혈통을 이어 나가는데 아들이 없다면, 대가 끊긴 것이다.”라는 생각은 모두 사탄의 독소가 사람의 사상과 관념으로 변한 것으로서, 사람들이 이러한 독소에 근거하여 살았기 때문에 남존여비 사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사탄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를 볼 수 있었다. 만약 우리에게 진리가 없다면 사탄의 궤계를 간파할 수 없기 때문에, 봉건 사상의 굴레에 묶여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며, 거기에 짓밟히고 우롱당할 수 밖에 없다. 이때부터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바르게 대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사탄이 계속 우리를 타락시키고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우리 사이를 이간질 하고 행복했던 우리의 생활이 화목함을 잃어버리도록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피해자다. 언제 고향에 가게 되면, 하나님의 말세 사역을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간증할 것이며, 그들도 사탄의 타락과 괴롭힘에서 벗어나도록 할 것이다. 그후에, 한 자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녀의 아빠는 삼촌만큼 능력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할머니는 그녀의 식구만 차별했는데, 간식이 있으면 그녀는 주지 않고 숨겨 두었다가 사촌들에게만 주었다고 한다. 그녀도 할머니에 대한 미움이 있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 속에 쌓였던 미움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할머니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할머니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보게 되었고, 자신이 사탄에게 타락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그녀의 할머니가 자발적으로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는 것인데, 그때 그 둘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가정이 따뜻하고 화목하게 변했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는데, 자매님이 겪은 일들이 바로 내가 겪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감사를 드렸다. 나에게 존재하는 사탄의 타락한 성품을 알게 하시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이고, 우리 인생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에야 우리가 비로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으며, 사탄의 타락과 괴롭힘에서 완전히 벗어나 빛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나는 앞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것이다!

어떻게 웹소설의 함정에서 벗어날 것인가?

오늘날 웹소설은 이미 많은 이들의 생활 일부가 되었습니다. 수업을 들을 때도, 출근할 때도, 차에 탔을 때도, 심지어 신호등의 녹색불을 기다릴 때도 소설을 읽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틈만 나면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열고 한 권 그리고 한 권을 읽습니다. 소설의 허구 세상 속에 사는 건 아편을 피우는 것과도 같아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웹소설에 깊이 빠졌던 피해자 중 하나입니다. 5학년 여름방학의 어느 날, 저는 한 가게에서 숙제를 마치고 무의식적으로 점원이 테이블위에 놓은 두꺼운 책 2권을 보았습니다. 호기심에 몇 장을 넘겨보니 그 책들은 바로 무협 소설이었습니다. 그 후로 전 시간을 때울 때 소설을 보았습니다. 산 중에 사는 몇몇 무림고수가 의롭지 못한 일들을 해결하고 아무런 속박 없이 자유롭게 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전 이같이 ‘멋진’ 삶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이렇게 여름방학 내내 소설에 빠져 지냈고 ‘내가 이 고수들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환상을 가졌습니다! 중학교에 입학 후,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커지자 저는 속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더욱 갈망했습니다. 그리하여 소설은 저의 유일한 정신적인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소설 속 세상만이 나의 모든 근심을 잊게 해주었습니다.나는 조금씩 소설의 세계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업 중에 책상 밑에서 몰래 소설을 보다가 선생님에게 들켰습니다. 선생님은 절 꾸짖으며 또 소설을 보면 부모님을 학교로 모셔오라고 하였습니다. 전 부모님께서 이 사실을 아실까 두려웠고 어쩔 수 없이 며칠은 ‘얌전히’ 지냈습니다. 하지만 뭘 하든 마음이 계속 불안했고 머릿속에는 온통 소설의 줄거리가 맴돌았습니다. 결국 전 참지 못하고 다시 소설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제 모습을 보고 아예 포기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전 수업시간에도 대놓고 소설을 보았습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소설을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밥을 먹으라고 해도 그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밥 먹을 시간에 차라리 소설을 한 편 더 보는 게 낫지’. 전 배가 고파도 밤을 새우면서 소설을 봤습니다. 소설의 세계에 심취해 있을 때는 배고프다는 생각이 조금도 안 들었고 피곤하다는 생각은 더욱 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정신이 온통 몽롱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축 늘어져 버려서 길을 걸을 때면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학교에서 잠시라도 소설을 안 보면 마음이 고양이에게 할퀴기라도 한 듯 고통스러워져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전 부모님이 주신 급식비마저 웹소설을 보는 데 썼습니다. 낮에 학교에 있을 때는 배고픈 것을 참고 저녁에 집에 와서야 밥을 먹었습니다. 이런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 면역력이 떨어져 자주 아팠고 위장도 상했습니다. 심할 때는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제가 소설을 보고 있었는데 남동생이 밖에서 놀다가 널려있는 이불에 실수로 불이 붙게 했습니다. 동생이 절 불렀지만 전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오셔서 불을 끄고 절 혼내실 때야 밖에 불이 났다는 걸 알았습니다. 부모님은 소설에 빠진 저를 여러 번 타일렀지만 전 부모님의 말씀을 안중에 두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을 듣지 않자 부모님은 제 책가방을 검사해 소설책을 찾아내셨습니다. 부모님은 늘 갑작스레 저의 방에 들어와 제가 몰래 소설을 보고 있지는 않나 확인까지 하셨습니다. 제가 소설을 보고 있으면 그 책을 찢거나 대여 카드를 태웠고, 아니면 책을 그대로 버리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렇게 각종 방법을 쓰셨지만 제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든 전 여전히 소설의 세상에 심취해있었습니다. 소설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제가 소설 속 캐릭터가 된 환상을 가졌습니다. 온종일 머릿속으로 소설 줄거리만 생각했고 꿈에서도 이야기가 이어져서 잠을 깬 후에도 눈을 감고 꿈 속의 줄거리를 되새겼습니다. 전 평생 이 같은 세상 속에 살고만 싶었습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를 보고는 ‘내가 차에 치여 죽으면 소설 속 주인공처럼 다른 세상으로 순간이동을 하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을 했습니다. 종일 환상 속에 살아가면서 제 정신은 온통 혼미해졌고 허구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했습니다. 몇 년간 소설에 빠져 지내다 보니 활발했던 제 성격도 괴팍하게 변해버렸고 심지어 가족과의 대화도 꺼려졌습니다. 정상이던 시력도 근시가 매우 심해졌고 성적은 뚝 떨어졌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을 중단한 저는 취직을 한 후에는 소설에 더욱 빠져 지냈습니다. 가끔은 밤새 소설을 보느라 머리가 어지럽고 바늘로 찔리는 듯한 고통이 오면 가끔은 소설이 지겨워져서 보기 싫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매번 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휴대폰을 열어 소설을 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후회했습니다. 소설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 기분은 참으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수많은 고통을 받던 저는 소설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저 자신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17살 때 어머니는 제게 하나님의 말세 역사를 전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예배 때마다 너무 졸렸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게만 느껴졌습니다. 또한 소설을 보는 것처럼 신나지 않아 집에서 소설을 보는 게 예배보다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을 믿긴 했지만 예배에 잘 나가지 않았고 가끔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볼 때는 머릿속에 여전히 소설의 줄거리가 맴돌았습니다. 2015년, 하나님의 최신 말씀이 나온 후 전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지금의 젊은 사람들, 특히 16~17세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모두 무엇을 하느냐? (PC방에 갑니다.) PC방에 가서 인터넷 게임을 하는데 대다수 현대인의 생활이 다 이렇다. … 늘 게임 하고 컴퓨터에 빠져 있으면 사람은 퇴폐된다. ‘퇴폐적이다’라는 것은 이방인의 단어인데, 우리의 말로 하면 그 사람이 정상 인성이 없다는 것이다. 게임에서 싸우고 죽이는 것 그리고 가상 세계의 그런 것들로 가득 채워져 정상 인성에 속하는 것들은 다 빼앗기고, 그것에 의해 채워지고 강점되었다. 생각하는 공간이 강점되면 사람은 곧 퇴폐된다. 이방인도 이런 사람을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 이방 세계에서 이런 젊은 사람들은 갈 곳이 없다. 학부모들도 속수무책이고, 학교 교사들도 그들을 어떻게 할 수 없고, 그 어떤 국가의 교육 제도도 이 풍조에 대해 어쩔 수 없어 순응할 수밖에 없다.』하나님의 말씀을 보고서야 전 알았습니다. 제가 소설에 심취한 건 사실 인터넷 게임과 같이 모두 사악한 풍조에 속했던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처음에는 그저 시간을 때우려고 소설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 줄거리에 조금씩 마음을 뺏겼고 소설 속 세상에 완전히 심취했습니다. 착하고 말을 잘 듣던 저는 괴팍하고 유별나게 변해버렸습니다. 또한 항상 환상 속에 살아가면서 소설이 아닌 것들에는 아무 흥미도 못 느꼈습니다. 만약 계속 이렇게 살아간다면 망가질 게 뻔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전 육체를 배반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인터넷 게임이나 소설 속에 사는 걸 싫어하십니다. 저희가 사탄에게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것도 원치 않으십니다. 저 역시 육체를 배반하고 싶지만 혼자서는 해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셔 절 웹소설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주시옵소서” 하지만 전 사악한 풍조에 너무 깊게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소설을 안 보기 시작한 첫째 날, 저는 보고 싶은 욕구 때문에 아무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힘든 하루를 보냈습니다. 둘째 날, 전 여전히 초조하고 불안했습니다. 머릿속은 온통 소설 줄거리뿐이었고 좌불안석으로 있으면서 휴대폰을 쳐다보기만 해도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올렸던 말씀을 떠올리며 참았습니다. 셋째 날, 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난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됐으니까 하나님도 날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실 거야’. 이렇게 전 결국 소설을 다시 읽어버렸습니다. 나중에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마치 뱀과 같아 본질은 바로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것이다. 너의 육체가 목적을 전부 달성할 때는 네가 곧 목숨을 잃을 때이다.』 그러자 전 두려워졌습니다. 계속 이렇게 소설만 본다면 사탄에게 야금야금 삼켜 지옥에 떨어질 게 뻔했습니다. 그리하여 전 마음속으로 육체를 배반하고 소설을 끊겠다고 단단히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휴대폰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오늘은 우선 하나님에게 다짐 하지 말아야겠어. 오늘 밤에 다짐을 해버리고 소설을 안 보면 앞으로는 다신 볼 기회가 없을 거야. 오늘 밤까지만 보고 내일 다시 다짐해야지!’ 이렇게 전 다시 휴대폰을 열고 밤새도록 소설을 봤습니다. 소설을 보는과정에 저의 마음속은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다는 걸 알았고 사탄에게 속히고 참해를 당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전 자책을 하며 고통 속에서 밤새 소설을 봤습니다. 다음 날 아침, 바늘로 머리를 찌르는 듯한 두통이 왔습니다. 저는 잘못인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한 제게 하나님의 징계가 임했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전 재빨리 하나님께 기도하고 다시는 소설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전 비록 육체를 배반할 마음은 있었지만 진리는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의지만으로 억제하다 보니 결심을 행하기란 무척 힘들었습니다. 정말 참기가 어려울 때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한 차례 한 차례의 조류는 다 한 가지 사악한 기운을 띠고 있는데, 이 사악한 기운은 사람을 끊임없이 타락되게 하고, 사람의 도덕이 점점 추락되게 하며, 인격과 품격도 점점 떨어지게 한다. 심지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격과 인성이 없고, 양심도 없으며, 더욱이 이성도 잃게 되었다.…한 차례 한 차례의 이런 조류는 그렇지 않아도 심신이 건전하지 못하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모르며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에 대한 분별력이 조금도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꺼이 이런 사회 풍조를 받아들이게 하였고, 사탄의 생존 관점, 인생철학, 가치관을 받아들이게 하였으며, 사탄이 사람에게 알려 준 삶에 대한 방식과 그것이 ‘선사해 준’ 생존 방식을 받아들이게 하였는데, 사람은 저항할 힘도, 능력도 없고 더욱이 저항할 의식마저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전 알았습니다. 소설도 사람을 해치는 사탄의 독약 중 하나였습니다. 일단 발을 들이면 벗어날 수가 없고 어떻게 해도 끊을 수가 없어 정상 인성을 갖춘 사람의 생활을 잃게 만듭니다. 이 모든 건 사람을 해치는 사탄의 악한 계략인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항상 온갖 수단으로 사람들을 자신의 함정으로 밀어 넣습니다. 저희는 진리도 없고 분별력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항상 속임을 당하고 사탄이 만들어 놓은 늪에 빠져 참해를 당합니다. 사탄이 사람을 해치는 그 결과를 알게 되자 전 몹시 두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기적절하게 절 구원해주지 않으신다면 앞으로 제 모습이 어떨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어서 전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 일은 어떻게 해결해야겠느냐? 사람은 시험에 빠지거나 사탄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늘 기도해야 한다. 이 사악한 시대, 더러운 귀신과 마귀가 무리 지어 사는 시대에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가 항상 너와 함께할 수 있도록 간구하여 하나님이 너를 보살피고 보호하여 너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고 심령과 성실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소설로 고통받던 8년이라는 세월을 생각하니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습니다. 저 자신의 힘으로 사탄의 통제를 벗어나는 건 역부족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여러 번 기도를 드리고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서야 사탄이 횡행하는 화려한 세상 속에서 미혹되지 않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전 다시는 소설을 보지 않을 것이고 또 본다면 하나님의 징계를 달갑게 받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다짐했습니다. 하루는 또 휴대폰을 열어 소설을 읽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다짐을 생각하니 소설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손으로 휴대폰 화면만 계속 만지작댔습니다. 소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지만 한편으로는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가 육체를 배반하도록 도와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제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소설의 줄거리도 조금씩 희미해졌고 마음이 무척 가벼워졌습니다. 그 후로 전 소설을 보고 싶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점점 소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고 정신도 맑아져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이 날마다 알차게 생활했습니다. 이 경험에서 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으며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고 의지해야만 시험과 함정으로 가득한 사악한 세계에서 저 자신을 지키고 사탄에게 잡혀 먹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감사드립니다! 현재 전 하나님의 집에서 본분을 하며 매일 형제자매들과 함께 지냅니다. 저희는 마음의 벽 없이 열린 마음으로 즐겁게 생활합니다. 기쁠 때는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고 찬미하며 힘든 일 앞에서는 함께 기도하고 교통하며 서로를 도와줍니다. 하나님의 인도 속에서 저는 웹소설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사람은 살면서 도대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아주 친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녀는 가정도 행복하고 사업도 성공해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고, 젊은 나이에 공장을 운영하고 차와 집 그리고 자녀도 있어 정말 출세한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는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일이 바쁘다 보니 건강검진을 받으러 가지 않았고, 너무 과로해서 그런 거니 조금 쉬면 좋아질거라 생각해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결국 몸이 더 심하게 아파오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내 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녀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힘든 것이었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유방암 말기입니다. 조금 일찍 오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금 이 상태로는 치료하기가 힘들고 위험한 상태입니다.” 이 갑작스러운 비보에 그녀는 고통 속에 빠져들었고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습니다. ‘그때 느낌이 좋지 않을 때, 왜 일찍 검사 받지 않았을까’라며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병상에 누워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최근 몇 년 동안 바쁘게 뛰어다니고 사업도 성공했으며 가정도 아주 행복했지만, 머지않아 이 모든 것이 그녀와 관계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난 후, 남편은 아직 젊어 다시 결혼할 수 있고 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엄마”라 부를 것이며 집과 차의 주인도 다른 사람이 될 것이고, 모든 것이 곧 다른 사람의 것이 될 거라는 것을 생각하니 그녀는 상심의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비록 남편과 자식이 그녀를 놓치기 아쉬워하지만 그래도 결국에는 죽음이 닥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저는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지만 그녀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서 추구하는 명리와 지위는 모두 허망하고 아무런 가치와 의의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모두가 이런 것을 추구하고 있지 않는가. 돈과 세력이 있고 집과 차도 있지만 마지막에 이런 것들이 사람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사람이 일생에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살면서 도대체 무엇을 추구해야 헛되이 살지 않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느 날, 저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혈육간의 정, 돈과 명리이며 사람은 혈육간의 정, 돈과 명리를 일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본다. 비록 사람들이 다 운명이 기구하다고 원망하지만 사람은 여전히 “사람은 왜 살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삶의 가치와 의미”, 사람이 가장 잘 알아야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할 이런 문제를 뒷전에 두고 일생이 몇 년이든 사람의 청춘이 다하기까지, 귀밑머리 백발이 되기까지, 얼굴이 노화되기까지, 명리가 사람이 노쇠해지는 걸음을 막지 못하고 돈이 사람의 심령의 공허함을 메우지 못한다는 것을 의식하기까지, 누구나 생로병사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기까지, 누구나 운명의 안배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기까지 오로지 명리를 추구하기 위해 바삐 뛰어다닌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인생 중의 마지막 고비에 직면할 때에서야 사람이 설사 거액의 재산이 있고 고귀한 신분과 대단한 지위가 있다 하더라도 다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다 필연적으로 그의 원래 위치로 즉,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고독한 영혼으로 돌아갈 것임을 진정 깨닫게 된다…… 사람이 곧 죽게 될 때에야 사람은 평생을 쏟아부어 추구했던 것들이 본래 다 금방 사라져버리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어서 어느 하나도 붙잡을 수 없고 어느 하나도 가져갈 수 없고 어느 하나도 사람에게 죽음을 피하게 할 수 없으며 또한 어느 하나도 고독한 영혼의 귀로 가운데서의 위로나 동반자가 될 수 없고 더욱이 어느 하나도 사람을 죽음에서 벗어나도록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은 한평생 다 돈과 명리를 추구하며 이 양자를 목숨을 건지는 지푸라기로 삼고 유일한 받침대로 삼는데, 마치 돈과 명리를 가지면 사람이 계속 살아갈 수 있고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죽음이 다가올 때에야 사람은 돈과 명리가 사람에게 그렇게 요원하고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이처럼 연약하고 힘없고 이처럼 일격에도 견디지 못하며, 사람이 죽음 앞에서는 이처럼 고독하고 의지가지없고 이처럼 무력하며, 원래 사람의 생명은 돈과 명리로 바꿔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든지 얼마나 높은 지위가 있든지 죽음 앞에서는 다 마찬가지로 빈궁하고 미소하며, 돈으로 생명을 살 수 없고 명리가 사람의 죽음을 면케 할 수 없으며, 돈이든 아니면 명리든 다 사람의 수명을 일분일초도 연장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은 이런 느낌이 있을수록 계속 살아갈 수 있기를 갈망하고, 사람은 이런 느낌이 있을수록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무서워한다. 이때서야 사람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진정 발견하게 되고 또한 사람이 살든 죽든 다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사람이 장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진정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우리에게 세상의 돈·지위·명예를 추구하면 결국엔 모두다 헛된 것임을 알려 줍니다. 사람이 죽음에 직면했을 때, 이런 것들은 사람의 생명을 1분 1초도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의 생사는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원래 위치인,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고독한 영혼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조물주께서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확실히 가리켜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조물주의 주재를 체험하고 조물주의 권세를 인식하는 기회로 삼고 하나의 피조된 인류의 본분을 다하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얻기 어려운 한번의 기회로 삼는다면 사람은 틀림없이 정확한 인생관이 있을 것이고 틀림없이 조물주의 축복과 인도 아래에서 살 것이며 틀림없이 조물주의 빛 속에서 거닐 것이고 틀림없이 조물주의 주재를 인식할 것이며 틀림없이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귀복할 것이고 틀림없이 조물주의 기묘한 행사를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이며 또한 틀림없이 조물주의 권세를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말할 필요없이,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조물주가 사랑하고 열납하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이라야 담담하게 죽음에 직면하는 태도가 있을 수 있고 인생의 마지막 한 고비를 흔쾌히 맞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저는 사람의 모든 것은 조물주께로부터 온 것이고 결국에는 다시 주물주께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사는 모두 조물주께서 배치해 놓으시고 정하신 것으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습니다. 각 사람이 이 세상에 온 것은 다 자신의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시고 배치하시는 것에 대해 진실로 인식하게 될 때, 조물주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할 것이며 진리에 대한 추구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추구를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자신의 일생을 조물주의 주재와 권세를 체험하는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이러면 명리·지위·돈의 유혹을 담담하게 대하고 다가오는 죽음을 포함해 생활 가운데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또 마땅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의의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창현할 수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추구하여 마지막에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그때는 조물주의 축복 가운데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생활 속에서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추구해야 하며, 자신의 일생을 조물주의 손에 맡겨 조물주께서 주재하시고 배치하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야만 가치와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만물은 모두 하나님의 권세를 창현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겨울에 주인집으로 이사왔습니다. 주인집 뒷마당은 매우 난잡했고 시들어 죽은 각종 잡초와 볼품없는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에 복숭아나무는 가지가 앙상하여 모양새가 없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 복숭아나무 너무 못생겼네! 열매나 맺을 수 있겠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복숭아나무도 싹이 돋아나고 파릇파릇해지더니 후에는 기름진 잎사귀로 가득하여 생기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무에 대해 약간의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하루하루 흘러가면서 복숭아나무는 꽃이 피고 서서히 열매를 맺었습니다. 가지에 달린 복숭아를 보니 작고도 못난 것이 마치 벌레 먹은 듯했습니다. 쭈그렁복숭아를 보는 순간 저는 매우 실망하였습니다. ‘복숭아나무야, 복숭아나무야. 네가 만약 싱싱한 복숭아를 맺지 못하면 너의 가치를 또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겠니?’ 복숭아나무에 대한 저의 기대는 깡그리 사라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의 시선은 빨갛게 익은 복숭아에 끌렸습니다. 주렁주렁한 열매는 햇빛의 자양을 받아 어느새 그렇게 크고 빨갛게 열렸는지 전의 그 “쭈그렁이” 모양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복숭아는 바람에 온몸을 흔들며 주위의 모든 것과 인사를 하는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고 탐스러웠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서 저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기묘한 행사의 창현 하에 이 세계는 조금씩 하나님이 만든 만물에 의해 풍성해졌다. 그것은 혼탁하고 어둡던 데에서 밝고 환해지고, 몹시 고요하던 데에서 생기발랄하고 활력이 넘치게 되었다. 피조된 만물 중에서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작은 것에서 미소한 것까지 어느 한 가지도 조물주의 권세와 능력으로 창조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매 한 가지 피조물마다 그것의 특유하고 고정된 존재의 필요성과 가치가 있다. 그것의 형식이나 구조가 어떻게 서로 다르든지 어쨌든 조물주의 창조에서 온 것이기만 하면 그것은 모두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서 생존한다. 어떤 때 사람이 한 가지 곤충을 보고 그 곤충이 아주 못생겼으면 “이 벌레 왜 이렇게 못생겼어? 이렇게 못생긴 벌레는 절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게 아니야. 하나님이 절대 이렇게 못난 것을 만드실 리 없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은 너무나 우매하다! 마땅히 “이 벌레는 아주 못생겼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거니 틀림없이 그것의 독특한 용도가 있을 거야.”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은 그가 만들려는 각종 생물들에게 다양한 생김새가 있게 하고 다양한 기능과 용도가 있게 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든 만물은 천편일률적인 것이 없다. 외형에서 내부 구조까지, 생활 습성에서 제각기 차지한 위치까지 모두 각기 다르다. 소는 소의 생김새가 있고 당나귀는 당나귀의 생김새가 있고 사슴은 사슴의 생김새가 있고 코끼리는 코끼리의 생김새가 있다. 말해 봐라, 어떤 것이 가장 잘생겼고 어떤 것이 가장 못생겼는가? 어떤 것이 가장 유용하고 어떤 것이 가장 존재할 필요가 없는가? 어떤 사람은 코끼리의 생김새를 좋아하지만 코끼리로 농사짓는 사람은 없다. 어떤 사람은 사자와 범의 생김새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그것들이 만물 중에서 가장 위풍있게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그것들을 애완동물로 삼아 기를 수 있는가? 어쨌든 만물을 대함에 있어서 사람은 모두 조물주의 권세에 순종하는 즉 조물주가 만물에게 제정해 준 법칙에 순응하는 이런 태도를 품어야 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며, 조물주의 본의에 대해 구하고 순종하는 이런 태도를 품어야만이 진정 조물주의 권세에 대해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것이니 사람이 또 흠잡을 이유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저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모두 그것의 특유한 면이 있고 모두 하나님의 권세와 지혜를 창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복숭아나무를 볼품없고 맺힌 열매도 못났다고 한 것은 저의 시야가 좁아서 겉면만 보고 조물주의 권세 아래에 있는 만물은 모두 완전무결하다는 것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때 제가 못났다고 여겼던 복숭아나무를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복숭아나무는 여전히 못난 그대로이고 주변의 잡초도 여전히 우거져 있어.’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조화롭게 보였습니다. 즉 복숭아나무는 모양새가 “못났다” 해서 자신이 살아갈 “용기”를 잃지 않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다 해서 주변의 잡초를 무시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잡초도 “지위가 낮다” 하여 열등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각자의 사명을 모두 이행하고 있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들을 어떻게 여기든지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고 묵묵히, 조용히 자기들이 존재하는 가치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하나님이 말씀하는 동시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생겨났다. 순식간에, 저마다 형태가 서로 다른 작은 생명이 흙 속에서 작은 머리를 한들한들 내밀면서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지도 않은 채 한시도 참지 못해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이 세상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는다. 그것들은 조물주가 베풀어 준 생명에 감사를 드리고 있고 그것들이 다 만물 중의 일원이고 조물주의 권세를 창현하기 위해 제각각의 생명을 바칠 것임을 이 세상에 알리고 있다. 하나님 말씀의 발함에 따라 땅 위에는 풀들이 파릇파릇하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각 종류의 채소가 생기 넘치게 자라나 흙을 뚫고 올라오며 산천, 평원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밀림이 울창하다…… 조금의 생기도 보이지 않던 벌거벗은 이 세계는 신속히 푸른 풀과 채소와 나무 등의 각종 식물에 덮여 푸른 빛깔이 차고 넘친다…… 공기 속에는 푸른 풀의 향기가 가득하고 흙의 향기가 풍기며 각종 식물은 공기의 흐름에 따라 숨을 쉬기 시작하고 자라나는 과정을 시작한다. 동시에 이 모든 식물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끊임없이 순환하면서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 맺고 번식하는 생명 역정을 시작하고 그것들 제각각의 생명의 운행 궤적을 충실히 지키기 시작하고 만물 중에서의 그것들 제각각의 배역을 이행하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모두 조물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조물주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며, 모두 조물주의 끊임없는 공급과 자양을 얻을 것이고 또한 영원히 조물주의 권세와 능력을 창현하기 위해 이 대지의 곳곳에서 꿋꿋이 살아갈 것이며, 그것들은 또 조물주가 그것들에게 부여한 생명력을 영원히 창현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저는 하나님께서 시초에 이 세계를 위해 식물을 창조하는 기묘한 광경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창조하는 그 순간부터 그것들에게 생명이 되풀이되는 궤적과 만물 중에서 맡아야 할 그것들 각자의 역할을 주셨습니다. 조물주의 명정으로 말미암아 이 법칙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전이되지 않았고 또한 사람의 애호에 따라 바뀌지도 않았습니다. 식물로써 그것들은 완강하게 곳곳에서 살고 자신의 존재로 조용하게 조물주의 권세와 능력을 창현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묵묵히 조물주의 은택에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늘 이렇게 평범한 것 같지만 미묘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어느 누가 발견한 적이 있을까요? 이 한 그루의 복숭아나무는 저에게 사람됨의 도리를 알게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지위가 있든 없든 지식이 있든 없든 재주가 있든 없든 모두 하나님의 주재와 명정이고 모두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습니다. 조물주의 안중에는 어떤 종류, 어떤 하나의 피조물이든지 모두 그것 의 특정된 사명이 있고 존재할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조물주의 주재에 순응하고 조물주의 권세를 창현하기 위해 피조물의 직책을 잘 이행하여 피조물의 사명을 완성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