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진실한 고백

여호와 하나님이 요나와 한 이 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진실한 고백이다. 한 방면으로는 조물주가 자신이 주재하는 만물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을 사람에게 알려 주는데,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한 바와 같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즉, 하나님은 니느웨 성에 대해 대략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성안에 살아 있는 것(사람과 가축 포함)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 즉, 아이나 미성년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류에 대해 손금 보듯 환히 안다는 구체적인 실증이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조물주가 인류를 대하는 태도, 즉 조물주의 마음속에 차지한 인류의 무게를 사람에게 알려 주는데,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한 바와 같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이 요나를 책망하는 말씀이지만 전부 실정이다. 요나가 비록 부탁을 받고 가서 여호와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말씀을 선포하기는 했지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고, 여호와 하나님이 성안의 사람들을 근심하고 또 기대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이 그를 질책한 것은 그에게 하나님이 인류를 친히 만든 것이기에 각 사람에게 심혈을 기울이고 기대를 두고 있으며 각 사람마다 하나님 생명의 공급을 누리고 있고, 각 사람은 다 하나님의 심혈과 대가로 바꿔 온 것임을 알려 주는 데에 의의를 두었다. 또한 하나님은 요나가 박 넝쿨을 아끼는 것처럼 그가 친히 만든 인류를 최후 시각이 이르기 전에는 절대로 가볍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더구나 그 성에 또 그토록 많은 아이와 무고한 육축들이 있다고 알려 주는 데에 그 의의를 두었다. 하나님은 더욱더 좌우도 분변하지 못하는 철없는 연령의 피조된 인류에 대해 그들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끝내거나 그들의 결말을 그렇게 쉽게 정할 리가 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성장하여 더 이상 앞사람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더 이상 받지 않기를 바랐으며, 그들이 니느웨의 과거를 간증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나님은 더더욱 회개한 후의 니느웨와 니느웨의 미래를 보고, 하나님의 긍휼 아래에서 다시 살아가는 니느웨를 보기 바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직 좌우도 분변치 못하는 니느웨 성의 그 피조된 인류가 바로 니느웨의 미래이고, 그들이 니느웨의 언급하기 싫은 과거사를 짊어지고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서 니느웨의 과거와 장래를 간증하는 중임도 맡게 될 것이라고 본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 진실한 고백은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긍휼을 완전하게 나타내었다. 그 고백은 인류에게 ‘조물주의 긍휼’이 공허한 어휘나 입으로만 하는 약속이 아니라 구체적인 원칙과 방식, 목표가 있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아주 확실하고 참되며 거짓이나 가식이 없다. 그는 이렇게 시기마다, 시대마다 끊임없이 인류에게 긍휼을 베풀고 있지만, 요나와의 대화는 그가 왜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지, 어떻게 인류를 긍휼히 여기는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관용과 진심을 베풀었는지를 조물주가 지금까지 언어로 표현한 유일한 서술인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 간결한 대화에서 표현한 것은 인류에 대한 그의 완전한 마음이고, 인류에 대한 그의 마음속 태도의 실정이며, 또한 인류에게 널리 긍휼을 베푸는 구체적인 실증이기도 하다. 그는 인류의 선조들에게 긍휼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한 세대 또 한 세대 인류의 후손들에게도 베풀어 주고 있다. 비록 하나님의 진노가 늘 인류의 어느 구석에, 어느 시대에 임했을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은 멈춘 적이 없었다. 그는 그의 긍휼로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피조된 인류를 이끌고 인도하며 한 세대 또 한 세대의 피조된 인류에게 공급하고 자양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류에 대한 그의 진심은 영원불변하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라고 말씀한 것처럼 그는 계속 그가 친히 만든 만물을 아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조물주의 공의 성품에 있는 긍휼이다. 이것 역시 틀림없는 조물주의 유일무이함이다!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진실한 마음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늘 그의 행사를 나타내 사람에게 보여 주며, 그는 인류와 대화를 멈춘 적이 없고 인류를 향해 숨거나 피한 적도 없으며, 그의 마음과 생각, 그의 언어와 행사는 인류에게 다 공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하나님을 알려고만 한다면 여러 가지 경로와 방식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인류가 한사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인류를 피하고, 인류에게 숨고, 사람이 이해하고 아는 것을 싫어한다고 여기는 까닭은 인류가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고,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더욱이 조물주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행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한가한 시간만에라도 조물주의 말씀이나 행사에 관심을 돌리거나 알아보고, 조물주의 생각과 마음의 소리에 조금만 유의한다면, 조물주의 모든 생각과 모든 말씀과 행사는 다 공개적이고 투명한 것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조물주가 항상 인류 가운데 있고 만물과 인류와 늘 대화하고 있으며 매일 새로운 행사가 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실질과 성품은 그가 인류와 대화하는 동시에 발표되고, 그의 마음과 생각은 그의 행사에서 남김없이 나타난다. 그는 늘 인류를 동반하고 살펴보고 있으며, 소리 없는 언어로 조용히 만물과 인류에게 알려 준다. “나는 천우(天宇) 위에 있다, 나는 만물 가운데 있다, 나는 지키고 있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 나는 바로 너의 곁에 있다……”, 그의 두 손은 따뜻하고 힘이 있으며, 그의 발걸음은 가볍고, 그의 음성은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그의 그림자는 돌고 도는데 인류의 곁을 감돌며, 그의 얼굴은 아름답고 온화하며, 그는 떠난 적이 없고 사라진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인류와 밤낮 동반하면서 사이좋게 지내왔다. 인류에 대한 그의 살뜰한 보살핌, 그의 특별한 ‘감정’, 그의 진실한 염려와 사랑은 그가 니느웨 성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나타났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과 요나의 대화에서 그가 친히 만든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연민의 정이 더욱 완전하게 유로되었다. 여기에서 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마음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요나> 4장 10~11절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원래 말씀으로, 요나와의 대화이다. 이 대화는 비록 간결하지만 그 속에는 조물주가 인류를 아끼고 염려하는 정이 가득 담겨 있다. 이 말에는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 마음속의 진실한 태도와 감정이 표현되어 있고 또한 인류가 들어 보기 어려운, 하나님이 명확한 언어로 표현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된 마음이 들어 있다. 이 대화는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뜻하는데 어떤 태도이냐? 바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전후에 대한 태도이다. 이 태도 역시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인데, 여기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성품도 있다. 이 말씀에서 유로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이냐? 자세히 읽어 보면 여기에서 하나님이 ‘아끼다’라는 이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이 단어로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태도를 설명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끼다’, 이 단어를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있을 것이다. 우선 이 단어에는 보살피고 불쌍히 여긴다는 뜻이 있고, 다음은 매우 사랑한다는 뜻이 있으며, 또한 아까워 차마 상처를 주지 못한다는 뜻도 있다. 결론적으로, 이 단어가 표현하는 것은 사랑하고 귀여워하고 내버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인류를 긍휼히 여기고 관용한다는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사람이 자주 말하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의 소리와 인류에 대한 태도를 이 말씀을 할 때 이미 남김없이 표현하였다. 비록 니느웨 성의 사람들도 소돔 사람들처럼 패괴되고 사악하고 폭력으로 가득 찼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회개로 인해 마음을 돌이키고 더 이상 그들을 멸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지시에 소돔 성의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였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복종하고 회개하고 또 각 방면에서 진실하고 간절하게 표현하였기에 하나님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들을 아끼는 마음이 우러나 그들에게 상을 주게 되었다. 하나님이 상을 주고 인류를 아끼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고, 그의 긍휼과 관용, 인류를 대하는 진실한 마음은 그 누구도 구비하지 못한 것이다. 네가 위인이나 초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높은 위치에 서서, 위인의 각도나 매우 높은 곳에 서서 인류나 피조물에게 이런 서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느냐? 인류 중 어느 누가 인류의 생존 상황에 대해 손금 보듯 환히 알 수 있겠느냐? 어느 누가 인류의 생존에 대해 부담을 가지고 책임을 질 수 있겠느냐? 어느 누가 한 성을 멸한다고 말할 자격이 있겠느냐? 또 어느 누가 한 성을 사해 줄 자격이 있겠느냐? 누가 자신이 만든 만물을 아낀다는 이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오직 조물주밖에 없다! 조물주만이 이 인류를 아끼고, 조물주만이 이 인류를 사랑하며, 조물주에게만이 이 인류를 떼어 버리지 못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으며, 또한 조물주만이 이 인류에게 긍휼을 베풀어 줄 수 있고, 조물주만이 모든 피조물을 소중히 여긴다. 그의 마음은 인류의 일거일동에 끌렸다. 즉, 그는 인류가 사악하고 패괴된 것으로 인해 노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인류가 회개하고 신복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돌이키고 축하한다. 또한 그의 하나하나의 마음과 생각은 모두 인류를 위해 생기고 움직이며, 그의 소시소유(所有所是)는 인류를 위해 발표되며, 그의 희로애락은 모두 인류의 생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인류를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자신 생명의 세부적인 것을 조용히 지불하며, 자신 생명의 일분일초를 봉헌한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아낄 줄 몰랐고, 오히려 지금까지 친히 만든 인류를 아껴 왔다…… 그는 그의 모든 것을 다 이 인류에게 주었다…… 그가 조건 없이, 값없이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 주는 것은 단지 인류가 그의 눈 아래에서 계속 생존하고 그의 생명의 공급 아래에서 계속 생존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고, 언젠가 인류가 그의 앞으로 귀복(歸服)하여 그가 바로 인류를 자양해 생존하게 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그분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조물주의 공의 성품은 생생하게 유로하고 창현하고 나타난다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얻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참된 회개이다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노가 그때 얼마나 컸든지, 니느웨 성 사람들이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은 그 순간, 하나님은 마음이 점차적으로 누그러져 뜻을 돌이키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 성을 멸할 것이라고 선포하기 직전, 즉 그들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기 바로 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노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일련의 회개를 한 후,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노는 점차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관용과 긍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의 이 두 가지 방면의 성품이 한 가지 일에서 동시에 유로되었는데 이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여기의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은 어떻게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느냐? 이 두 가지 확연히 다른 실질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기 전후에 하나님에게서 나타나고 유로되어 사람은 하나님의 실질이 참되고 사람이 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음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태도로 사람에게 알려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긍휼히 여기기 싫어하는 것도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진실로 회개하는 것이 드물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진정으로 떠나는 것이 드물다고 알려 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노할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참된 회개가 있기를 바라고, 사람의 참된 회개를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에게 긍휼과 관용을 아낌없이 베풀어 줄 것이다. 즉, 사람의 악행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회개하는 사람에게 베풀어 주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사람에게 베풀어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을 대한 일에서 하나님의 태도는 아주 명확하게 유로되었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고, 하나님은 사람의 진실한 회개를 원하며, 사람이 악한 길과 강포에서 떠나기만 하면 마음을 돌이키고 사람에 대한 태도를 바꿀 것이다. 조물주의 공의 성품은 생생하게 유로하고 창현하고 나타난다 하나님이 니느웨 사람에 대해 마음을 돌이켰을 때, 그의 긍휼과 관용이 가상이더냐? 물론 아니다! 그러면 한 가지 일에서 하나님의 이 두 가지 방면의 성품이 전환된 것을 통해 너는 무엇을 보게 되었느냐? 하나님의 성품은 완전한 것이지 분열된 것이 결코 아니며, 그가 노하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관용하든, 그것은 모두 그의 공의 성품이 발표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생생하게 나타난다. 그는 사물의 발전에 근거해 그의 마음과 태도를 바꾼다. 그가 니느웨 사람에 대해 태도를 바꾼 것은 그에게 마음과 생각이 있고, 그는 로봇이나 돌부처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하나님 자신이기에 니느웨 사람에게 노할 수도 있고, 또 그들의 태도로 인해 그들의 과거를 용서할 수도 있으며, 니느웨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결정할 수도 있고, 그들의 회개로 인해 그의 결정을 바꿀 수도 있음을 인류에게 알려 준다. 사람은 규례에 맞추기를 좋아하고, 또 규례로 하나님을 규정하고 하나님을 정의하기를 좋아하며, 또 공식에 맞춰 하나님의 성품을 인식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상 영역에서 사람은 하나님이 생각할 줄 모르고 하나님께 실질적인 생각이 없다고 여긴다. 사실상, 사물의 변화로 인해, 환경의 변화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도 끊임없이 전환된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또 다른 방면의 실질을 유로할 것이다. 전환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는 그 순간에 하나님은 인류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또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생생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신의 진실한 유로로 인류에게 그의 진노, 그의 긍휼과 자비, 그의 관용이 확실히 존재하는 것임을 실증하고 있다. 그의 실질은 사물의 발전으로 인해 언제 어디서나 유로될 것이다. 그에게는 수사자와 같은 진노가 있고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은 긍휼과 관용도 있다. 그의 공의 성품은 그 어떤 사람이 의심하거나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그 어떤 사람이 바꾸고 곡해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만사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공의 성품, 즉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긍휼은 언제 어디서나 유로될 수 있으며, 그는 만물의 구석구석에 생생하게 발표하고 있고 시시각각 생생하게 시행하고 있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공의 성품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에 따라 기계적으로 발표되고 유로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자재로 언제 어디서나 발표되고 유로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켜 더 이상 진노를 발하지 않고 더 이상 니느웨 성을 멸하지도 않은 것을 보았을 때, 너는 하나님이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진노가 빈말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진노를 크게 발하고 그의 긍휼을 거두어들일 때, 네가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 진실한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악행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를 크게 발하는데, 하나님의 진노에는 흠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회개로 감동받고 사람의 회개로 마음을 돌이킨다. 그가 감동받고 마음을 돌이키고 사람을 관용하고 긍휼히 여기는 것에는 모두 어떤 흠도 없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순결하며, 어떤 뒤섞임도 없다. 하나님은 관용한다면 곧 관용하고, 긍휼을 베푼다면 곧 긍휼을 베푼다. 사람의 회개와 여러 가지 표현으로 인해 그의 성품에서 진노가 유로되고 긍휼과 관용도 발표된다. 그가 유로하고 발표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다 순결하고 직접적이며, 그 어떤 피조물의 실질과도 다르다. 하나님이 발표한 일하는 원칙,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 하나님이 내린 그 어떤 결정이나 하나님의 그 어떤 행동에서도 그 어떤 흠이나 오점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결정하고 어떻게 하는 이상 그대로 이루는데, 그 결과는 모두 정확하여 틀림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근원은 흠이 없고 오점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흠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 역시 피조물이 구비하지 못한 것이고, 또한 거룩하고 흠 없는 것이며, 어떻게 고찰하고 알아보고(원문: 推敲) 체험해 본다 해도 검증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참된 신복이 있으면 너는 늘 하나님의 보살핌을 받을 것이다

니느웨 성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뀐 이 과정에는 망설임이 없고 모호한 요소가 없으며, 순수하게 노하던 데에서 순수하게 관용하는 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실질의 참된 유로이다. 하나님은 일을 함에 있어서 지금까지 우유부단한 적이 없다. 그가 일을 하는 원칙과 목적은 다 맑고 투명하며, 다 순결하고 흠이 없으며, 절대로 그 어떤 간계와 음모도 뒤섞여 있지 않다. 즉, 하나님의 실질에는 어둠과 사악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노한 것은 니느웨 성 사람들의 악행이 그의 눈앞에 이르렀기 때문인데, 그때 그의 노는 그의 실질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노가 사라지고 다시 하나님이 관용을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베풀었을 때에도 하나님이 유로한 것은 여전히 하나님 자신의 실질이었다. 그 모든 것의 변화는 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태도로 인해 바뀐 것이다. 그 기간에 사람의 범함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사람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의 실질은 바뀌지 않았다. 사람이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면 하나님은 사람에게 노를 발하고, 사람이 진실하게 회개할 때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켜 더 이상 사람에게 노하지 않으며, 사람이 목을 곧게 세워 계속해서 하나님께 대항할 때 하나님의 노는 끊임없고,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을 훼멸할 때까지 조금씩 사람에게로 다가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성품의 실질이다. 하나님의 성품이 유로하고 발표하는 것이 진노이든 아니면 긍휼과 자비이든, 그것은 다 사람의 표현과 행위에 근거하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사람 마음 깊은 곳의 태도에 근거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노를 끊임없이 어떤 사람에게 발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다. 그가 진실하게 회개하거나 하나님께 ‘머리를 숙인’ 적이 없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하게 신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지 못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늘 하나님의 보살핌을 얻고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을 수 있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적대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늘 하나님 앞에서 진실로 회개하기에 설사 그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항상 임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임하지 않을 것이다. 매우 간결한 이 기록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참된 실질을 보았고, 하나님이 노를 발하는 것과 마음을 돌이키는 것에는 다 원인이 있다는 것도 보았다. 비록 하나님이 진노를 발할 때와 그 시각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킨 것에는 선명한 대비가 있어 사람에게 하나님의 노기와 관용, 이 두 방면의 실질에 매우 큰 간격(원문: 跨越)이 있고 혹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 같지만, 니느웨 성 사람들의 회개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에서 사람은 또 한 번 하나님의 진실된 성품의 다른 면의 표현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돌이킴은 인류에게 또 한 번 확실하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진실성을 보게 하였고, 하나님 실질의 진실한 유로를 보게 하였으며, 인류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전설이나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때의 하나님의 마음은 진실한 것이고, 하나님의 돌이킴도 진실한 것이며, 하나님이 확실히 또 한 번 인류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마음속의 진실한 회개로 하나님의 긍휼을 얻고 자신의 결말을 바꾸었다 하나님의 돌이킴과 진노에는 모순이 있느냐? 당연히 없다! 그것은 그때의 하나님의 관용에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원인이냐? 그것은 성경 본문에서 말한 “각기 악한 길에서 떠나”와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이다. ‘악한 길’은 한두 가지 악한 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을 하는 근원이 사악하다는 것이다. ‘악한 길에서 떠났다’는 것은 바로 더 이상 그렇게 일을 하지 않고, 더 이상 악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으며, 일을 하는 방식, 근원, 출발점, 속셈, 원칙이 다 바뀌어 마음속에 더 이상 그런 방식과 원칙을 누림과 즐거움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의 “떠날 것이라”는 것은 바로 내려놓고 버리고 과거와 철저히 결별하여 더 이상 지나온 길을 걷지 않는다는 뜻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난 이 현상은 그들이 진실하게 회개했음을 실제로 증명하고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면도 보고 사람의 마음도 관찰한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한 회개를 확실하게 살펴봄과 동시에 또 니느웨 사람들이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난 것을 보았을 때에야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이다. 즉, 사람의 행위와 표현, 사람의 각종 행실과 마음속으로 진실하게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태도에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고 뜻을 바꾸고 결정을 거두어 그들을 징벌하거나 멸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니느웨 사람의 결말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되찾은 동시에 재차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을 얻었으며, 그에 따라 하나님도 노기를 거두었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진실한 회개를 보았다

니느웨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대한 것은 소돔 성의 사람과는 확연히 달랐다 ‘무너지리라’는 무슨 뜻이냐? 일반적인 말로 하면 없어진다는 것이다. 왜 없어지느냐? 누가 한 성을 무너지게 할 수 있느냐? 물론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다 어리석지 않아 듣자마자 그 말은 하나님에게서 오고 하나님이 행하려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또한 그들의 악이 여호와 하나님을 노하게 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노가 그들에게 임하게 되어 그들이 성과 함께 멸망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를 들은 후, 성안 사람들의 표현은 어떠했느냐? 성경 본문에 니느웨 성의 왕에서 백성까지의 일련의 구체적인 표현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성경 본문에 이렇게 기록되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니느웨 성의 사람들은 소돔 성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나타냈다. 즉, 소돔 성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대항하여 악에 악을 더했지만, 니느웨 성의 사람들은 그 말을 들은 후 무시하거나 대항하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해 신복(信服)하며 금식을 선포했다. 여기의 ‘신복’은 무엇을 가리키느냐? 글자 그대로 이해하면 바로 믿고 순복한다는 뜻이다. 니느웨 사람들의 실제 표현에 따라 해석하면 바로 그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곧 그렇게 할 것임을 믿고 회개하기 원했다는 뜻이다. 곧 임할 재난에 직면하여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었느냐? 그들은 마음속으로 신복했기 때문에 바로 두려움이 생겼다. 그럼 무엇으로 니느웨 사람들의 신복과 두려움을 실증할 수 있느냐? 성경 본문에서 말한 바와 같다.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즉 니느웨 사람들의 신복은 진실한 것이다. 그들은 신복으로 인해 두려움이 생겨 금식하고 굵은 베 옷을 입었는데, 이것이 바로 그들이 회개하기 시작한 표현이다. 소돔 성의 사람들과 확연히 다른 것은 니느웨 사람들은 대항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회개의 표현과 행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니느웨의 백성들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니느웨의 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니느웨 왕의 회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니느웨 왕은 소식을 들은 후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다. 그런 다음, 또 성의 모든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고, 짐승이나 소나 양에게는 풀도 먹이지 말고 물도 마시지 못하게 하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굵은 베옷을 입고 사람마다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선포하고 또한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고 선포했다. 니느웨 왕이 행한 일련의 일에서 보면, 그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회개가 있었다. 그는 먼저 보좌에서 일어난 다음 조복을 벗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았는데, 이 일련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니느웨 왕이 그의 왕위 신분을 내려놓고 일반 백성처럼 굵은 베옷을 입었음을 알려 준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온 선포를 듣고 나서 니느웨 왕은 왕위에 앉아 악한 길이나 손으로 행한 강포를 계속한 것이 아니라 수중의 권력을 내려놓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와서 회개했다는 것이다. 그때의 니느웨 왕은 군왕의 신분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보통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와서 회개하고 죄를 자백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또 성의 모든 사람들이 그와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와서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라고 선포했고, 아울러 또 구체적인 안배까지 했다. 예컨대,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한 성의 왕으로서 그는 성안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가 좋아하는 일은 그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에 대해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거나 혼자만 회개하고 죄를 자백할 수도 있었으며, 성안의 백성들이 어떻게 택하든, 회개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니느웨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보좌에서 일어나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여호와 하나님께 회개하고 죄를 자백했을 뿐만 아니라 성안의 사람과 짐승에게 다 이렇게 하라고 명령했으며, 심지어 사람에게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으라”고 명령했다. 니느웨 왕의 일련의 행동은 진정 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해낸 것이다. 그의 일련의 행동은 인류 역사상 어떤 왕도 하기 어려운 것이고 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의 이런 행동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고, 인류가 기념할 만하고 본받을 만한 것이다. 인류 역사상 모든 왕들이 다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께 대적하고 대항했지만,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행한 악을 돌이킴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사함을 받고 징벌을 피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니느웨 왕은 백성을 이끌고 하나님께로 돌아섰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났다. 동시에 그는 또한 왕의 자리에서 내려와 여호와 하나님으로 뜻을 돌이키고 진노를 거두게 하여 성안의 모든 사람들을 살아남고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니느웨 왕의 행동은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고,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께 회개하고 죄를 자백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진실한 회개를 보았다 니느웨 성의 왕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후 일련의 일을 했는데, 그들의 표현과 그들이 그런 일을 한 성질은 무엇이냐? 다시 말해, 그들이 한 모든 행위의 실질은 무엇이냐? 그들은 왜 그렇게 했느냐?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진실로 회개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죄를 자백했을 뿐만 아니라 행하는 모든 악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게 한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그들이 크게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곧 하려는 일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금식하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 위에 앉음으로써 돌이켜 더 이상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을 표시하고자 했고, 여호와 하나님께 노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했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그의 결정을 거두고 내리고자 했던 재앙을 거두어 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들의 모든 표현에서 보면, 그들이 전에 행한 악은 여호와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고 그들이 곧 훼멸당하게 되는 원인이 됨을 이미 인식하였는데, 그로 인해 모두 철저히 회개하기를 원했고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기를 원했다. 즉,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후 각 사람의 마음속에 모두 두려움이 생겨 더 이상 계속해서 악을 행하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증오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 그들의 이전 죄악을 용서하고 그들의 과거로 그들을 대하지 말아 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다시는 악을 행치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 분부한 대로 행하기를 원했으며,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의 회개는 진실한 것이고 철저한 것이다. 그들의 회개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것이지, 가식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를 발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 니느웨 성의 왕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일거일동과 모든 표현 그리고 그들 각자의 결정과 선택,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눈에 분명하고 뚜렷하게 보였다. 하나님의 마음은 그들의 표현에 따라 변화가 생겼는데, 그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였느냐? 성경의 기록을 보면 너는 답을 찾게 된다. 원문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이 비록 마음을 돌이켰지만 그때의 하나님 마음은 결코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노하던 데에서 노를 그친 후, 니느웨 성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한 재앙을 니느웨 사람에게 내리지 않겠다고 그렇게 신속하게 결단을 내린 원인은 하나님이 니느웨 각 사람의 마음속을 살펴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본 것은 니느웨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진실한 회개와 자백이었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진실한 신복이었으며, 그들이 마음 깊이 그들의 악행이 하나님의 성품을 건드렸음을 느껴 그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은 또 니느웨 사람들이 마음 깊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 더 이상 그들에게 노하지 말고 그 재앙을 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간구도 들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사실을 살펴본 후 노가 조금씩 사라졌다. 그전의 노가 얼마나 컸든지 사람 마음 깊은 곳의 진실한 회개를 보았을 때 하나님의 마음은 사람의 진실한 회개에 감동되었다. 그는 차마 그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못하였고, 더 이상 그 사람들에게 노하지도 않았으며, 계속해서 그들에게 긍휼과 관용을 베풀어 주었고, 그들을 인도하면서 공급해 주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경고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임하다

(욘 1:1~2)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욘 3장) 여호와의 말씀이 두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찌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욘 4장)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하나님이 니느웨를 구원하다’, 이 이야기는 지면상으로는 매우 짧지만 사람으로 하나님 공의 성품의 다른 한 방면을 보게 한다. 이 방면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예전에 하였던 사역을 돌아보아야 한다. …… 계속해서 두 번째 단락 <요나> 3장의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라는 이 말을 보자. 이 말은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 성의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직접 전해 준 말이다. 물론 이것도 여호와가 니느웨 성의 사람들에게 하려는 말씀이다. 이 말은 사람에게 성안의 사람들의 악독이 하나님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 마음에 그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성을 멸해 버릴 것임을 알려 준다. 그러나 그 성을 멸하기 전에 하나님은 성안의 사람들에게 알려 줌과 동시에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할 기회도 주었는데, 기한은 40일이었다. 즉, 40일 동안에 성안의 사람들이 회개의 표현이 없고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거나 엎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 성을 소돔을 멸한 것처럼 멸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성안의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었다. 아주 뚜렷한바, 이것은 단순하게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전했을 뿐만 아니라 성안의 사람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태도도 전한 것이다. 동시에 이 간단한 선포는 성안의 사람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주었다. 이 경고는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증오하고 그들의 악행이 곧 치명적인 재난을 초래할 것이므로 성안의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매우 위태롭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준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정의의 힘과 긍정적 사물의 보장이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생각하고 행한 이런 사례들을 알아감을 통해 너는 사람의 범함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인식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이 방면의 성품을 사람이 얼마를 인식할 수 있든지, 어쨌든 모두 하나님 자신만이 갖고 있는 한 방면의 성품이다.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음과 위엄은 하나님 자신만이 갖고 있는 실질이고,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 자신만이 갖고 있는 성품이다. 하나님이 노를 발하는 원칙은 하나님 자신만이 갖고 있는 신분과 지위를 대표하는데, 말할 필요 없이 그것도 역시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의 실질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한 실질이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지도 않고, 지리적 위치가 바뀐다고 해서 바뀌지도 않는다. 그의 원래 성품은 그의 고유한 실질이다. 그의 역사 대상이 누구이든지 그의 실질과 공의 성품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노하게 했을 때, 하나님이 발하는 것은 그의 원래 성품인데, 그때 그가 노를 발하는 원칙은 변하지 않고, 그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지위도 변하지 않는다. 그가 노를 발하는 원인은 그의 실질에 변화가 생겼거나 그의 성품에 다른 요소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범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공개적인 도발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다.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도전은 바로 하나님과 겨루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노를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대항할 때, 하나님과 겨룰 때, 끊임없이 하나님의 노를 시험하고 있을 때는 바로 죄악이 범람할 때인데, 그때면 하나님의 진노가 자연히 유로되고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노를 발하는 것은 모든 사악한 세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모든 적대 세력이 훼멸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의 유일무이함이고 하나님 진노의 유일무이함이다. 하나님의 존엄과 하나님의 거룩이 도전을 받을 때, 정의의 힘이 저지당하고 사람에게 보이지 않을 때가 바로 하나님이 진노를 발할 때이다. 하나님의 실질로 인해, 무릇 땅에서 하나님과 겨루며 적대하고 맞서는 이런 세력은 다 사악하고 패괴된 것이고, 다 비정의적인 것이고 사탄에게서 온 것이며, 사탄에게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광명하며 거룩하고 흠이 없으므로, 사악하고 패괴되고 사탄에게 속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진노를 발함에 따라 다 사라질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진노를 발하는 것은 공의 성품의 한 방면 표현이지만, 절대 하나님이 노를 발하는 것에 원칙이 없거나 대상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절대로 쉽게 노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진노와 위엄도 절대로 쉽게 유로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진노는 매우 적당한 한도와 척도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화를 내거나 울분을 토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성경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대화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어떤 사람이 한 말은 깊이가 없고 아주 우매하여 어린 아이와 같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결코 격살하지 않았고 그들의 죄를 정하지도 않았다. 특히, 욥이 시련을 받는 기간에 욥의 세 친구와 다른 사람들도 욥에게 약간의 말을 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그런 말을 들은 후 그들을 어떻게 대하였더냐? 그들을 정죄하였더냐? 그들에게 노를 발하였더냐? 그러지 않았다! 하나님은 욥에게 그들을 위해 간구하고 기도하라고 알려 주고 그들의 과실을 기억하지 않았다. 이런 것은 모두 패괴된 무지한 인류를 대하는 하나님의 주요한 태도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진노를 발하는 것은 정서적인 표현이나 발산이 절대 아니고, 하나님의 진노는 사람이 이해하는 노기의 총 폭발이 아니며, 그가 진노를 발하는 것은 정서를 스스로 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고 또한 울분이 극도에 달해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도 아니다. 반대로, 그의 진노는 그의 공의 성품의 공표이고, 또한 공의 성품의 참된 표현이며, 그의 거룩한 실질의 상징적인 유로이다. 하나님이 진노여서 사람의 범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노하는 데에 이유를 따지지 않거나 원칙이 없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유를 따지지 않고 원칙이 없이 함부로 화를 내는 것은 패괴된 인류의 특허이다. 사람은 일단 지위가 있으면 종종 정서를 자제할 수 없어 걸핏하면 트집을 잡아 분풀이하고 불만을 털어놓으며, 기분 풀기를 좋아하고 항상 공연히 화를 내며,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여 사람들에게 그의 신분과 지위가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지위가 없는 패괴된 인류의 정서도 항상 통제력을 잃는데, 그들이 화를 내는 것은 항상 자신의 이익이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자기의 지위와 품위를 지키기 위해 패괴된 인류는 자주 정서를 쏟아내고 교만방자한 본성을 유로한다. 사람이 화를 내는 것과 분풀이하는 것은 모두 죄악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불만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인데, 여기에는 뒤섞임과 음모 그리고 간계가 가득 차 있고 또한 사람의 패괴와 사악도 가득 차 있으며, 더욱이 사람의 야심과 욕망도 가득 차 있다. 정(正)과 사(邪)의 겨룸에서 사람은 정의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의의 힘이 위협받고 박해당하고 공격을 받을 때, 사람의 태도는 냉대하거나 피하거나 뒤로 물러서는 것이지만, 사악한 세력을 대함에 있어서는 비위를 맞추고 비굴하게 아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분풀이는 사악한 세력의 출구이고, 혈기에 속한 사람의 악행이 범람하고 억제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가 발할 때는 모든 사악한 세력과 사람을 해하는 모든 죄악이 제지당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막는 모든 적대 세력이 드러나 분리되고 저주를 받으며, 하나님과 적대하는 사탄의 모든 공범자들이 징벌을 받고 철저히 제거될 것이다. 그 대신에 하나님의 사역은 막힘 없고, 하나님의 경영 계획은 한 단계씩 예정대로 앞을 향해 전개되며, 하나님의 선민은 사탄의 방해와 미혹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안정되고 평온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공급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사악한 세력이 번식하거나 범람할 수 없는 보장이 되고, 또한 모든 정의와 긍정적인 사물이 존재하고 전해지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전복되지 않는 보장이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감춰져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람의 범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무지하고 우매한 전 인류를 주로 긍휼과 관용 위주로 대하고, 하나님의 진노는 대부분의 시간과 일에서 모두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가 공표되는 것을 보기 매우 어렵고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기도 매우 어렵다. 그리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람을 관용하고 사람을 용서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한 부분 사역과 마지막 한 절차가 사람에게 임했을 때 즉, 하나님의 마지막 한 번의 긍휼과 마지막 한 번의 경고가 사람에게 임했을 때에도, 사람이 여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전혀 회개치 않고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이 사람들에게 관용과 인내를 베풀어 주지 않는다. 반대로, 그때는 하나님이 긍휼을 거둘 것이고, 그에 따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발하는 것은 오로지 진노밖에 없다. 그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의 진노를 나타낼 수 있고 사람을 징벌하고 멸할 수도 있다. 하나님이 불사름의 방식으로 소돔 성을 멸하였는데, 이 방식은 하나님께 있어서 한 인류나 한 물체를 철저히 멸하는 가장 빠른 방식이다. 그 인류를 불로 사른 것은 그들의 육체만 멸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더욱이 그들의 영, 혼, 체를 전부 멸하여 그로부터 그 성의 인류가 물질세계와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가 한 가지 방식으로 유로되고 표현된 것이다. 이런 방식의 유로와 표현은 하나님 진노의 한 방면 실질이자 당연히 하나님의 공의 성품 실질의 유로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발할 때, 하나님은 더 이상 그 어떤 긍휼과 자비도 유로하지 않고, 그의 관용과 인내도 더 이상 나타내지 않는다.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일도, 그 어떤 이유로도 하나님을 계속 인내하도록 설득시킬 수 없고, 긍휼과 관용을 재차 베풀도록 설득시킬 수 없다. 그 대신 하나님은 일분일초도 늦추지 않고 그의 진노와 위엄을 공표하고 그가 하려는 일을 하는데, 깔끔하게, 마음에 꼭 들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범함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의 발표 방식이자, 공의 성품의 한 방면 표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될 때, 하나님의 진노를 발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위엄을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음을 느낄 수 없는데, 이런 것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는 오로지 긍휼과 관용, 사랑만 있다고 계속 착각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성을 멸하고 한 인류를 증오하는 것을 사람이 보게 될 때, 인류를 멸하는 그의 노와 위엄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공의 성품의 다른 한 측면을 보게 할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사람의 범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의 범함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은 그 어떤 피조물도 상상할 수 없으며, 그 어떤 비피조물도 간섭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고 더욱이 사칭하거나 모방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방면의 성품은 인류가 반드시 인식해야 할 한 방면의 성품이다.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이런 성품이 있고 또한 하나님 자신만이 이런 성품을 구비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런 공의 성품을 구비한 것은 그가 사악함과 흑암, 패역을 증오하고 인류를 패괴시키고 인류를 삼키는 사탄의 온갖 악행을 증오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고, 그에게 대항하는 모든 죄악된 행위를 증오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며, 그의 거룩하고 흠 없는 실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그는 어떤 피조물이든, 비피조물이든 그에게 공개적으로 대항하고 겨루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설령 그가 전에 긍휼히 여겼던 사람일지라도, 설령 그가 택한 사람일지라도 그의 성품을 건드리고 그의 인내와 관용의 원칙을 거스르기만 하면 그는 가차 없이, 조금도 망설임 없이 사람의 범함을 용납하지 않는 그의 공의 성품을 나타내고 유로할 것이다.

소돔 성은 완고하게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대항하여 하나님에게 철저히 제거되었다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대략적인 이해가 있게 된 후, 다시 돌아와 소돔 성 즉, 하나님 안중의 죄악의 성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그것의 실질을 알아감으로 하나님이 왜 그것을 멸하려고 했고, 왜 그렇게 철저하게 멸하려고 했는지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인식하도록 하자. 소돔 성은 사람의 안중에 사람의 욕망과 사악을 완전히 충족시킬 수 있는 성이었다. 그 성은 밤마다 풍악을 울리고 노래를 부르며, 요염하고 유혹적이었으며, 그것의 번화함은 사람을 깊이 매혹시키고 광기를 부리게 했으며, 그것의 사악함은 사람의 심령을 갉아먹고 사람을 미혹하여 타락시켰다. 그것은 더러운 귀신과 악령이 제멋대로 판치는 성이었는데, 죄악과 살육, 피비린내와 썩은 냄새로 가득 찼었다. 그것은 사람을 소름 끼치게 하고, 뒷걸음질 치게 하는 성이었다. 그런 성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참 도를 구하거나 광명을 갈망하는 사람은 없었고, 죄악에서 나오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은 사탄의 통제 속에서 살고, 그것의 패괴와 우롱 아래에서 살면서 인성과 이지를 상실했고, 사람의 원래 생존 목표도 상실했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한 악행은 무수히 많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항했는데, 그들의 악행이 그들과 그 성과 성안의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한 걸음 한 걸음씩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갔다. 이 두 단락의 말에 소돔 성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패괴되었는지 그 자세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두 종이 소돔 성에 도착한 후에 사람들이 그들에게 저지른 행위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간단한 그 사실은 소돔 성의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패괴되고 사악했는지, 하나님께 어느 정도로 대적했는지를 드러냈고, 그에 따라 성안 사람들의 본모습과 실질도 폭로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노를 멸시했다. 그들은 완고하게 하나님께 대항하기만 했고,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들의 악독한 본성은 더 심해져 완고하게 하나님을 적대하기만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임함을 적대시했고, 하나님의 징벌과 하나님이 준 경고는 더욱 적대시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 그들이 삼키고 해할 만한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돔 성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해하고자 한 일은 그들의 모든 악행 중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고, 여기에서 폭로된 그들의 사악한 본성은 바닷물의 한 방울에 불과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을 불로 멸할 것을 택하였다. 하나님은 그 성을 홍수로 멸한 것이 아니고 태풍, 지진, 해일로 멸한 것도 아니며, 더욱이 다른 방식으로 멸한 것도 아니다. 불사르는 방식으로 그 성을 멸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불사름은 그 성이 완전히 훼멸됨으로 지구상에서 철저히 사라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의 ‘훼멸’은 형체나 외관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안 모든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철저히 없어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성과 관련된 모든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은 다 훼멸되었고, 그들은 내세나 윤회가 다시 없고, 피조된 인류 중에서 하나님에게 단번에 영구적으로 제거된 것이다. ‘불사름’은 죄악이 그곳에서 제지되고 종결되어 다시는 존재하지 않고 파생될 수 없음을 의미하고, 사탄의 사악이 번식할 토양과 머물러 거할 무덤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탄의 싸움에서 사탄에게 하나님의 승리로 낙인이 되었다. 소돔 성의 훼멸은 사람을 패괴시키고 삼킴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탄 야심의 대실패작이고, 인류 발전사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거절하고 스스로 타락한 인류의 수치스러운 기호이며, 아울러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진실되게 유로(역주: 흘러나옴)한 실제 기록이다. 소돔 성이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린 불에 타서 재만 남았을 때, 그것은 ‘소돔’이라 불리는 성이 그때부터 다시는 출현하지 않고 성안의 모든 것도 다시는 출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노에 의해 훼멸되었고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 속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 성품으로 인해 상응하는 징벌을 받았고, 하나님의 공의 성품으로 인해 마땅히 있어야 할 결말에 이르렀다. 그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은 그것의 사악함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이 그 성과 그 성에서 사는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성에서 자라는 그 어떤 만물도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시는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이자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표현이다. 그 성의 사악함과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그 성에 대해 노하고 증오하고 혐오했기 때문에 다시는 그 성과 그 성의 사람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까지 보고 싶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성을 불로 살라 버린 것이다. 불사름당한 성에 재만 남았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정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는데, 심지어 그것에 대한 기억도 다 없어지고 말살되었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태워 버린 것은 온 소돔 성만이 아니고, 성안에 있는 죄악으로 가득 찬 사람과 죄악으로 더럽혀진 만물만이 아니라, 태워 버린 것은 더더욱 인류의 사악함과 하나님을 대적함으로 남겨진 기억들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성을 불사른 목적이다. 인류는 극도로 패괴되어 누가 하나님인지도 모르고, 자기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른다. 네가 하나님을 언급할 때, 그는 공격하고 훼방하고 모독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러 갔을 때에도 그 패괴된 사람들은 회개의 표현이 추호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행하던 악에서 떠나지도 않았고, 오히려 제멋대로 하나님의 종을 해하고자 했다. 그들이 드러내고 유로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 극도로 증오하는 그들의 본성 실질이다. 보다시피, 하나님에 대한 그 패괴된 사람들의 대적은 단순히 패괴 성정의 유로가 아니고, 단순히 진상을 모르고 한 훼방이나 비웃음도 아니다. 그들의 악행은 우매 무지로 인한 것이 아니고, 속임당함으로 인한 것도 아니며, 더욱이 미혹당함으로 인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제멋대로 하나님과 대립하고 대항하며 기고만장한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의심할 바 없이, 사람의 이런 표현은 반드시 하나님을 노하게 할 것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건드릴(원문: 觸怒) 것이며, 사람의 범함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건드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이 공개적으로 직접 그들에게 발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의 진실한 유로이다. 죄악으로 가득 찬 그 성에 대해 하나님은 가장 빠른 방법으로 그것을 멸하고, 가장 철저한 방식으로 그 속의 사람과 모든 죄악을 멸하여 그곳의 사람을 다시는 존재하지 않게 하고, 그곳의 죄악이 그로부터 더 이상 번식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가장 빠르고 가장 철저한 방식은 바로 불사르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소돔 성의 사람을 대한 태도는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거들떠보지 않는 것도 아니라, 그의 진노와 위엄, 권병으로 징벌하고 격살하여 그 사람들을 완전히 멸하는 것이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육체상의 훼멸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영혼상의 훼멸이고 영구적인 제거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있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의 참된 함의이다.

소돔이 하나님의 진노를 거스려 조금의 흔적도 없이 훼멸되었다

소돔 성의 사람들이 그 두 종을 보았을 때, 그들이 그곳에 온 이유를 묻는 사람이 없었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러 왔는지 묻는 사람도 없었다. 반대로, 그들은 한패가 되어 미친개와 흉악한 늑대처럼 다짜고짜 그 두 종을 잡으러 왔다. 그 당시에 발생했던 일을 하나님이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았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의 이런 행위와 이런 일을 대함에 있어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했겠느냐? 하나님은 그 성을 멸하기로 뜻을 정하였다. 그는 망설이거나 기다리지 않고 더 이상 인내하지도 않는데, 그의 날이 오면 하려는 사역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9장 24~25절에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고 했다. 이 두 구절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그 성을 멸했는지 또 하나님이 무엇을 멸했는지를 알려 준다. 우선, 성경 본문에 하나님이 그 성을 불로 살랐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그 성을 불사른 정도는 바로 사람과 땅에 난 것까지 다 멸한 것이다. 즉,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 그 성을 멸했을 뿐만 아니라, 성안의 사람과 살아 있는 것까지 모조리 멸하여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성이 훼멸된 후, 그 땅에는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없었고, 더 이상 생기가 없었으며, 더 이상 생명의 흔적이 없었는데, 소돔 성은 한 성에서 온통 폐허로, 적막한 빈터로 되고 말았다. 그 땅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행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더 이상 살육과 피비린내가 없었다. 하나님이 왜 그 성을 그렇게 깨끗이 불살랐을까? 너희는 거기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설마 하나님이 그가 창조한 인류와 만물이 그렇게 훼멸되는 것을 냉정하게 보고만 있었겠느냐? 네가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노를 보았다면, 하나님이 멸한 대상과 그 성이 훼멸된 정도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노한 정도를 쉽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한 성을 증오할 때는 징벌을 내릴 것이고, 하나님이 한 성을 증오할 때는 거듭 경고를 주어 사람에게 그의 노를 알게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한 성을 없애고 훼멸하기로 뜻을 정했을 때는, 즉 하나님의 진노와 위엄을 거스렸을 때는 더 이상 징벌하거나 경고하지 않고 직접 훼멸시켜 철저히 사라지게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다.

소돔 성의 패괴 정도는 사람으로 치를 떨게 하고 하나님을 분노케 했다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다’, 우선 이 사건에 대한 성경 본문을 보도록 하자. (창 19:1~1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롯이 문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말라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 들이고 문을 닫으며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창 19:24~25)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이 단락의 기록을 통해, 소돔 성의 사악과 패괴(敗壞)가 천인공노할 정도까지 이르렀으므로, 그것이 하나님의 안중에 마땅히 훼멸되어야 할 대상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면 그 성을 멸하기 전에 성에서 어떤 일들이 발생했고, 그런 일들의 발생이 사람에게 주는 계시는 무엇이며, 또 그런 일들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를 통해 사람에게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게 하는지, 기록된 내용들을 상세히 읽어 보고 일이 발생한 전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소돔 성의 패괴 정도는 사람으로 치를 떨게 하고 하나님을 분노케 했다 그날 밤, 롯은 하나님의 두 사자를 영접하고 그들을 위해 식탁을 베풀었다. 식사 후 그들이 아직 눕지도 않았는데, 성 안의 사람들이 사방에서 다 모여 롯의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불렀다. 원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이것은 누가 한 말이냐? 이 말은 누구에게 한 것이냐? 이런 말은 소돔 성의 백성들이 롯의 집 밖에서 롯을 향해 외친 말이다. 이 말을 들으면 느낌이 어떠냐? 분개하게 되지 않느냐? 듣기에 역겹지 않으냐? 너로 분노가 치솟게 하지 않느냐? 그 사람들의 외침은 사탄의 행위를 뜻하지 않느냐? 그 외침에서 너는 그 성의 사악함과 흑암을 느꼈느냐? 그 사람들의 외침을 통해, 너는 그들의 행위가 잔혹하고 야만적이라는 것을 느꼈느냐? 그 사람들의 행위를 통해, 너는 그들이 패괴된 정도를 느꼈느냐? 그들이 말한 내용에서 그들의 본성이 사악하고 성정이 악독하고 잔인하여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성의 사람은 롯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사탄과 똑같아서 사람만 보면 해하고 삼키려고 했다…… 여기까지 말하고 보니, 사람으로 그 성의 음산함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고, 그 성의 죽음의 기운과 그 성의 사악함과 잔혹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인성이 추호도 없고 사람의 영혼을 삼키는 야심으로 가득 찬 한 무리 폭도들을 마주하여 롯은 뭐라고 말했는가? 성경 본문에는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 롯이 이 말을 한 의도는 그의 두 딸을 버려서라도 사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치대로라면 롯이 제기한 조건에 대해 그 무리들이 양보하여 그 두 사자를 내버려둬야 했다. 그 두 사자는 어쨌든 그들과 전혀 모르는 사이이고,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그들의 이익을 해친 적도 없다. 하지만 그들은 사악한 본성의 부추김을 받아 결코 그만두지 않고 오히려 더 심해졌다. 여기에서 그들의 또 다른 대화를 통해 사람은 그들의 악독한 본질에 대해 더한층 알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이 왜 그 성을 멸하려고 하였는지도 알고 깨닫게 된다. 그럼, 그들은 그 후에 또 뭐라고 말했느냐? 원문에서는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고 말하였다. 그들이 왜 문을 부수려고 했느냐? 그 이유는 그들이 성급히 그 두 사자를 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두 사자는 소돔에 뭐하러 갔느냐? 그들이 온 목적은 롯의 가족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성안의 사람들은 그들이 그곳에 온 것은 법관이 되기 위한 것이라고 착각하여 이유도 묻지 않고 추측만으로 그 두 사자를 쳐서 해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이 해하려고 한 것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두 사람이었다. 보다시피, 그 성안의 사람들은 이미 완전히 인성과 이지를 상실했고, 그들이 미치고 사납게 날뛴 정도는 사람을 해하고 삼키는 사탄의 악독한 본성과 다른 점이 없다. 그들이 롯에게 사람을 내놓으라고 하자 롯은 어떻게 했느냐? 원문에서 알 수 있듯이, 롯은 그들을 결코 내놓지 않았다. 롯은 하나님의 그 두 사자를 아느냐? 전혀 모른다! 그런데 그는 왜 그 두 사람을 구할 수 있었느냐? 그는 그 두 사람이 뭐하러 왔는지 알고 있었느냐? 그는 비록 그 두 사자가 온 이유는 몰랐지만 그 두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가 그들을 영접했던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종을 주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에서 롯이 평소에도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소돔 성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임했을 때, 그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두 종을 영접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또 두 딸을 넘겨주어 그 두 종을 보호하려고 했는데, 그것은 롯의 의로운 행위였다. 또한 그것은 롯의 본성 실질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자 하나님이 종을 보내 그를 구한 원인이기도 하다. 롯은 위험과 어려움이 닥쳤을 때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두 종을 보호했는데, 심지어 자기의 두 딸로 그 두 종의 안전을 바꾸려고 했다. 그 성에 롯이 했던 그런 일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 또 있었느냐? 없었다는 것이 사실에서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롯 외에 소돔 성의 모든 사람은 다 훼멸시켜야 할 대상이었고, 마땅히 훼멸될 대상이었다. 이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소돔을 훼멸하시다

(창 18: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창 18:29)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0)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1)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 몇 단락은 내가 성경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렇지만 완전한 본래 말은 아니다. 너희가 본래 말을 읽고 싶으면 성경에서 보면 된다. 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부분적인 내용은 빼고 일부 중요한 단락과 구절만 골랐다. 몇 구절을 빼도 오늘의 교통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우리가 교통할 이 모든 구절과 내용의 중점은, 그 당시에 발생한 이야기의 자세한 내용과 사람에게서 나타난 표현들이 아니다. 그것은 제쳐 두고, 그 당시에,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이 어떠하였는지만 이야기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보고, 하나님이 한 매사에서 참된 하나님 자신을 보게 되면, 목적에 도달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분부대로 일을 행하는 사람만 기억하고 돌보아 준다 이 몇 단락 말씀에 중요한 단어가 몇 개 있다. 바로 그 몇 개의 숫자들이다. 우선, 여호와는 성읍 가운데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모든 사람을 용서하겠다고 말씀했다. 즉,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했다. 진짜로 의인 오십 명이 있었을까? 없었다. 이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또 어떤 대화가 있었느냐? 아브라함이 만약 사십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냐고 하자, 하나님은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였다. 계속하여 아브라함이 만일 삼십 명이면 어떻게 하겠냐고 하자, 하나님은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였다. 그럼 이십 명이면? 역시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열 명이면? 역시 멸하지 않는다고 했다. 성읍에는 진짜로 의인이 열 명 되었을까? 열 명은 없어도 한 명은 있었다. 그 의인 한 명은 누구일까? 그 사람이 바로 롯이다. 그 당시에, 성읍에는 의인이 한 명만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할 때, 이 숫자에 대해 아주 각박하거나 아주 엄격한 기준이 있었느냐?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십 명이면 어찌 하시겠나이까”, “삼십 명이면 어찌 하시겠나이까”라고 거듭 캐물으면서 “열 명이면 어찌 하시겠나이까”라고까지 묻자, 하나님은 “열 명만 있어도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고, 열 명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을 남기고 용서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였다. 그 열 명이라는 것은 이미 아주 보잘것없는 숫자였지만, 사실상 소돔 성에 놀랍게도 의인이 열 명도 안 되었다. 보다시피, 그 성읍에 있는 사람들의 죄악과 사악한 정도가 하나님이 보기에 이미 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의인이 오십 명이 있으면 그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했다.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한 것은 무슨 뜻일까? 그런 숫자는 하나님에게 결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는 의인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 성읍에 의인이 단 한 명만 있어도, 하나님은 그 성읍을 멸할 때에, 그 의인을 거기에 말려들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 뜻은, 하나님이 그 성읍을 멸하든 멸하지 않든, 또한 그 성읍에 의인이 얼마나 있든, 그 죄악된 성읍은 하나님이 보기에 저주를 받아야 하고, 반드시 훼멸되어 하나님의 눈에서 소실되어야 하지만, 의인은 마땅히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시대이든, 인류가 어떤 시기에까지 발전했든, 하나님의 이 태도는 바뀌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사악을 증오하고, 자신의 눈에 있는 의인은 돌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명확한 태도는 하나님 실질의 진실한 유로이기도 하다. 그 성읍에는 의인이 오로지 한 명뿐이었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최종의 결과는, 그 성읍이 반드시 훼멸되어야 했던 것이다. 너희는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그 시대에, 하나님은 한 성에 의인 오십 명이 있다는 이유로 그 성을 멸하지 않을 것이고, 의인 열 명이 있다는 이유로도 그 성을 멸하지 않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는 일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로, 인류를 용서하고 관용하는 결정을 하거나 인도하는 어떤 사역을 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의로운 행실을 아주 중요시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을 아주 중요시하며, 하나님 앞에서 선행이 있는 사람도 매우 중요시한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소돔 성에는 하나님의 종이 열 명 있었느냐? 없었다! 그 성읍은 하나님이 남겨 둘 가치가 있었느냐? 그 성읍에는 오직 롯 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자를 영접했다. 그 뜻은 성읍에 하나님의 종이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롯을 구출하고, 소돔 성을 멸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그 대화가 보기에는 간단한 것 같지만, 아주 깊이 있는 문제를 하나 설명한다. 즉, 하나님은 매우 원칙 있게 일을 하기에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오랫동안 감찰하고 고려하며, 시기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그 어떤 결정이나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려고 한 그 결정에는 오차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읍에 의인이 사십 명도, 삼십 명도, 이십 명도 심지어 열 명도 없고, 성읍에 있는 유일한 의인은 롯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읍에서 발생된 일과 성읍의 상황은, 하나님이 눈으로 감찰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손금 보듯 환하게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결정은 틀릴 리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전능이 안받침되어, 사람은 그토록 마비되고, 그토록 무지몽매하며, 그토록 시야가 좁다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우리가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은 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 발표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또한 우리가 보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 숫자는 매우 간단하여 별다른 문제를 설명하지 않지만, 여기에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성품이 발표되어 있다. 하나님이 의인 오십 명이 있다는 이유로 그 성을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로 인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관용으로 인한 것이 아니냐? 너희는 하나님의 이 방면의 성품을 보았느냐? 나아가 의인 열 명만 있어도, 하나님은 그 의인 열 명을 이유로 그 성을 멸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관용이 아니냐?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냐? 하나님은 그 의인들을 긍휼히 여기고, 관용하고, 걱정하였기에 그 성을 멸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관용이다. 우리가 마지막에 보게 된 결과는 무엇이냐? 아브라함이 “만일 거기에 열 명이 있으면”이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이 “내가 그 성을 멸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후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 성에는 자신이 말하는 의인이 열 명도 없었기에, 아브라함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왜 소돔 성을 멸하려고 뜻을 정했는지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어떤 성품을 보았느냐? 하나님은 어떤 뜻을 굳혔느냐? 즉, 그 성에 의인 열 명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 성읍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반드시 그 성을 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노기가 아니냐? 이 ‘노기’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지 않느냐? 이 성품은 하나님의 거룩한 실질의 유로가 아니냐? 사람이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실질의 유로가 아니냐? 하나님 편에서는 의인 열 명도 없다는 것이 확정되었기에, 하나님은 반드시 그 성을 멸하려고 했고, 그 성안의 사람들을 호되게 징벌하려고 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였고, 너무 더럽고 패괴(敗壞)되었기 때문이다. 이 대화들을 왜 이렇게 분석하겠느냐? 그것은 간단한 이 몇 마디 말에서, 긍휼을 널리 베풀고 노를 심히 발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완전히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인을 귀하게 여기는 동시에, 의인을 긍휼히 여기고 관용하고 마음에 두고 있는 동시에, 그 성안의 패괴된 모든 사람을 마음속으로 심히 증오하고 있었다. 이것은 널리 긍휼을 베풀고 심히 노를 발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그 성을 멸하였느냐? 불로 태웠다. 하나님은 왜 불로 태우는 그런 방식으로 그 성을 멸하였을까? 네가 어떤 물건이 불에 타는 것을 보거나 혹은 어떤 물건을 불에 태워 버리려고 할 때, 그 물건에 대해 어떤 심정이냐? 왜 그것을 태우려고 하느냐? 그 물건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 있지 않겠느냐? 포기한다는 뜻이 있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불 태우는 방식을 쓴다는 것은 포기한다는 뜻이 있고, 증오한다는 뜻이 있으며,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왜 불로 소돔을 멸했는지의 심정이다. 불로 태우는 방식은 곧 하나님이 노한 정도를 뜻한다. 하나님의 긍휼과 관용은 확실히 존재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과 공의는 하나님이 노할 때에 사람에게 하나님의 거스를 수 없는 면을 보게 한다.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의 분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은 사람에게 긍휼을 널리 베풀어 준다. 사람이 패괴로 가득 차고 하나님을 원수로 보며 극히 적대시할 때, 하나님은 심히 노를 발한다. 그러면 그 노를 어느 정도까지 발할까? 그 사람의 대적과 악행이 더 이상 하나님에게 보이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의 눈앞에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노기가 사라지게 된다. 말하자면, 그 어떤 사람을 막론하고, 만약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미 하나님을 등졌다면 돌이킬 수 없다. 그 사람의 몸이나 혹은 생각이 겉으로 보기에도, 주관적인 생각에서도, 아무리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복하려고 한다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이 일단 하나님을 등졌다면, 하나님은 끊임없이 노를 발할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노를 심히 발할 때, 사람에게 기회를 충분하게 다 주었을 때에, 하나님의 노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고, 또한 영원토록 긍휼과 관용을 더 이상 베풀어 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성품의 거스를 수 없는 면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성을 하나 멸하려고 했을 때, 그 일이 사람이 보기에는 아주 정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죄악으로 가득 찬 성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존재할 수 없고, 계속 남아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이 그것을 멸하는 것은 사리에 맞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소돔을 멸하기 전과 후에 발생한 일에서 하나님 성품의 전부를 보게 된다. 하나님은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에 대해서는 관용하고 긍휼히 여기지만, 악하고 죄에 속한 것과 사악한 것에 대해서는 심히 노를 발하는데, 심지어 그 노는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 성품의 가장 주요하고 또한 가장 두드러진, 더욱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로한 두 가지 주된 부분이다. 곧, 긍휼을 널리 베풀고, 노를 심히 발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너희들 중, 대부분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조금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노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각 사람에게서 다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 긍휼을 널리 베풀어 준 적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직 이 자리에 있는 너희들 중, 어느 사람이나 어느 일부분 사람들에게 노를 심히 발한 적이 아주 적으며, 심지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조급해하지 말라! 하나님의 노기는 언젠가 사람마다 보고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이겠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 대해 노기가 그치지 않을 때, 즉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 대해 노를 심히 발할 때면, 하나님은 이미 그 사람을 내버린 지 아주 오래되었고, 하나님은 그 사람의 존재를 증오하고, 더 이상 그 존재를 인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노기가 일단 임하면, 그 사람은 소실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의 사역은 아직 그 정도까지 하지 않았다. 일단 하나님이 노를 심히 발할 때면, 너희는 아무도 감당할 수 없다. 보다시피, 하나님은 이 시대에 너희 모두에게 긍휼만 널리 베풀어 줄 뿐, 아직 노를 심히 발하지는 않았다. 혹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노기가 임하게 해 달라고 하여, 하나님의 노기와 사람이 거스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이 도대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체험해 봐도 된다. 너희는 그럴 용기가 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