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인류는 타락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창조주 권능의 주재하에서 살아간다

사탄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타락시키면서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대대로 사람들을 미혹하였으며, 인간 세상에서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 또 사람을 해치고 미혹하고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유혹하며, 하나님의 경륜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는 등의 악행이 가득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는 만물 생령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정한 법칙과 규율을 따르고 있다. 하나님의 권능과 비교할 때, 사탄의 사악한 본성과 그것이 날뛰는 것은 추하기 그지없으며, 사람을 역겹게 하고 염증이 나게 한다. 또한 보잘것없고 일격에도 견디지 못한다. 비록 사탄이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할지라도, 사탄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그 어떤 사람, 일, 사물도 변화시킬 수 없다. 수천 년이 지나도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내려 준 빛과 공기를 누리고 있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친히 불어넣어 준 생기로 숨을 쉬고 있고, 하나님이 만든 꽃과 새, 물고기와 곤충들을 누리며, 하나님이 공급해 준 만물을 누리고 있다. 낮과 밤은 여전히 끊임없이 교체되고, 사계절 역시 변함없이 순환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는 올겨울에 떠나가서 내년 봄에 다시 돌아온다. 물속의 물고기는 그들의 집인 강과 호수를 떠나 본 적이 없다. 땅 위의 매미는 여름날 마음껏 자기들만의 노래를 부른다. 풀 속의 귀뚜라미들은 가을날 가을바람을 따라 노래한다. 기러기는 무리를 이루고 매는 외롭게 지낸다. 사자 무리는 사냥하며 살아가고, 사슴들은 꽃과 풀밭을 떠나지 않는다. 만물 가운데의 각종 생령들은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 다시 가며 찰나 속에서 변화무쌍하다. 하지만 그들 각자의 본능과 생존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공급해 주는 자양분을 받아 생존한다. 그 누구도 그들의 본능을 바꿀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들의 생존 법칙을 파괴할 수 없다. 만물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하고 미혹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이 만든 물과 공기와 만물을 떠날 수 없다.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만든 이 공간 속에서 번성하며 살아간다. 인류의 본능은 변화가 없으며, 인류는 여전히 두 눈으로 바라보고, 두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하며, 마음으로 깨닫고, 두 다리와 두 발로 걸으며, 두 손으로 일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이 공급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본능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가 하나님과 협력하는 기관은 변하지 않았고, 피조물의 본분을 다할 수 있는 기관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 심령의 필요는 변하지 않았으며, 인류가 뿌리를 찾아 돌아가려는 소망은 변하지 않았다. 인류가 창조주의 구원을 얻고자 하는 소원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 살아가면서 사탄의 피비린내 나는 학대를 견디고 있는 인류의 현주소다. 비록 사탄의 엄청난 유린을 당한 인류가 더 이상 태초에 창조한 아담과 하와가 아니고, 지식과 상상, 고정 관념 등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들이 가득하고 사탄의 타락 성품이 가득한 인류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이 만든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와 섭리하에 있고, 하나님이 정한 코스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기에 사탄에 의해 타락한 인류는 단지 외관상 더럽고 굶주리고 반응도 조금 느리고 기억력도 조금 감퇴되고 나이가 조금 많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기능과 본능은 오히려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이런 인류가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이다. 이런 인류는 창조주의 부름을 듣고 창조주의 음성을 듣기만 하면 바로 일어나 그 음성의 근원을 찾아 달려간다. 이런 인류는 창조주의 그림자를 보기만 하면 모든 것을 제쳐 두고 창조주를 위해 헌신하며, 심지어 목숨까지 바친다. 인류의 마음과 영이 창조주의 마음의 소리를 깨닫게 될 때, 인류는 사탄을 버리고 창조주의 곁으로 온다. 인류가 완전히 몸의 더러움을 씻어 내고 창조주가 다시 공급해 주는 자양분을 얻게 될 때, 인류의 기억은 회복된다. 그때의 인류는 진정 창조주의 권세 아래로 돌아온 것이다.

창조주의 신분을 갖춘 하나님만이 유일무이한 권능을 소유한다

사탄의 ‘특별’한 신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의 여러 면의 행위에 관심을 보인다. 심지어 많은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 외에 사탄도 권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사탄도 이적을 보이고 인류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것 외에도 마음속에 사탄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탄을 하나님으로 삼아 숭배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불쌍하기도 하거니와 가증스럽기도 하다. 그들이 불쌍한 것은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고, 그들이 가증스러운 것은 그들의 대역무도와 타고난 사악한 본질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너희에게 권능이 무엇인지, 권능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이고 대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하나님 자신이 곧 권능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고지상함과 하나님의 본질을 상징한다. 하나님 자신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대변한다. 그렇다면 사탄은 자기 자신을 감히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탄은 자신이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자신이 또 만물을 주재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있을까? 사탄은 만물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러지 못한다! 사탄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창조한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생명이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사탄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없기 때문에 영원히 하나님의 지위와 신분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은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사탄에게 하나님과 같은 능력이 있느냐? 물론 없다! 사탄이 행한 일들, 사탄이 보인 이적은 무엇이냐? 능력이 맞느냐? 권능이라 할 수 있느냐? 물론 아니다! 사탄은 사악한 흐름을 주도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교란시키고 파괴하며 방해하는 짓을 일삼는다. 몇천 년 동안, 사탄은 인류를 부패시키고 해쳤으며, 사람을 유혹해서 타락의 길로 가게 하거나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골짜기로 걸어가게 하였다. 이런 짓 말고, 사탄이 인류에게 행한 것 중에 어느 것 하나 기념하거나 칭찬하고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있느냐?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타락하였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사탄에 의해 해를 입었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있었다면 인류가 하나님을 버리고 죽음의 길로 나아갔을까? 사탄에게 권능과 능력이 없다면, 사탄이 행한 모든 것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겠느냐? 혹자는 사탄의 모든 행위가 보잘것없는 잔재주에 불과하다고 정의한다. 그러나 나는 사탄에 대한 이런 정의는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인류를 타락시키는 사탄의 악행이 보잘것없는 잔재주일까? 사탄이 욥을 해한 그런 사악한 기세와 욥을 집어삼키려던 강렬한 욕망은 단연코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욥이 소유하고 있던 엄청난 양의 소와 양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찰나에 욥의 그 거액의 재산이 모두 사라졌다. 그것이 보잘것없는 잔재주로 할 수 있는 것이냐? 사탄이 한 행위의 성격으로 볼 때, 사탄은 파괴, 방해, 파멸, 상해, 사악, 극악, 어둠 등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와 매치되고 어울린다. 그러므로 모든 정의롭지 못하고 사악한 것의 출현은 사탄의 행위와 떼어 놓을 수 없으며, 또한 사탄의 추악한 본질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 할지라도, 아무리 거만할지라도, 야심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사탄의 파괴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사람을 미혹하고 타락시키는 재능이 탁월하다 할지라도, 또한 사람을 협박하는 수법과 권모술수가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무리 변화무쌍할지라도 상관없다. 사탄은 지금까지 생명 있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만물이 생존하는 법칙과 규율을 정할 수도 없었고,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을 주관할 수도 주재할 수도 없었다. 우주에 사탄에 의해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 존재하는 사람이 없고 그것으로 인해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또한 사탄이 주재하고 주관하는 사람이나 어떤 것은 없다. 반대로, 사탄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지시와 명령에 순종해야만 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물 한 방울, 모래 한 알도 함부로 만질 수 없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 위의 개미조차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이 만든 인류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눈에 사탄은 산속의 백합만도 못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만도 못하며, 바닷속의 물고기만도 못하고, 땅 위의 구더기만도 못하다. 만물 가운데서 사탄의 역할은 만물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 사탄의 본성이 얼마나 악독하고 본질이 얼마나 사악하든지 상관없다. 사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분수껏 자신의 기능을 지키는 것인데,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과 부각물이라는 역할을 잘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본질이자 본래의 자리인 것이다. 사탄의 본질은 생명과 무관하고, 능력과 무관하며, 권능과 무관하다. 사탄은 하나님 수중에 있는 장난감일 뿐이며,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사탄의 본모습을 알게 된 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권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권능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권능이든 능력이든 그것은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서, 그 어떤 부정적인 것들과도 무관하며, 그 어떤 피조물이나 비피조물과도 무관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생명이 있고 활력이 넘치는 어떤 형식의 것이든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은 모든 생명체에게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게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기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생존하며 지속된다. 그 후에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체를 주재하고 주관한다. 이는 지금까지도 틀림이 없었으며,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갖추지 못한 것이며, 창조주만이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권능이라 부른다. 이것이 창조주의 유일무이함이다. 그러므로 ‘권능’이라는 이 단어 자체나 권능의 본질은 오직 창조주와 관련이 있다. 이는 그것이 창조주만의 신분과 본질의 상징이기 때문이며, 창조주의 신분과 지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창조주 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권능’이라는 이 단어와 관련이 있을 수 없다. 이 역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에 대한 해석인 것이다. 사탄이 욥을 호시탐탐 노렸을지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욥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사탄의 본성이 사악하고 잔인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후에는 사탄도 하나님이 지시한 것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욥에게 임할 때, 사나운 늑대가 양 떼에 침입하듯 사납게 날뛰었을지라도, 감히 하나님이 정해 준 범위를 망각할 수 없었고, 감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사탄은 어떻게 해도 감히 하나님 말씀의 원칙과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냐? 이 점에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그 어떤 말도 사탄은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사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이고 천상의 법이며,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 뒤에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천상의 법을 어기며 위반한 자들에 대한 처벌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 하나님의 권능을 넘어서고 천상의 법규에 대항한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 결과는 도대체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사탄이 욥, 이 한 사람에게 행한 일은 사탄이 인류를 타락시킨 축소판일 뿐이다. 그리고 사탄이 그 일을 벌일 때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해 준 범위와 내린 명령은 사탄이 모든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원칙의 축소판일 뿐이다. 또한 사탄이 그러한 일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는 사탄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위치의 축소판일 뿐이다. 사탄이 욥을 시험하던 그 일에서 보인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사탄이 하나님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께 감히 대항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축소판일 뿐이다. 이러한 축소판이 너희에게 주는 경고는 무엇이냐? 사탄을 포함한 만물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감히 창조주가 정한 천상의 법칙과 규칙을 어기지 못하며, 그런 법칙과 규칙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저항자에 대한 창조주의 처벌을 바꾸거나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만이 천상의 법칙과 규칙을 정할 수 있고, 창조주만이 그러한 법칙과 규칙을 시행할 능력이 있으며, 창조주의 능력은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만의 권능이며, 이 권능은 만물 가운데 가장 높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크고 사탄이 그다음이다’라는 말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유일무이한 권능을 가진 창조주 외에 다른 신은 있을 수 없다. …… 지금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이상의 내용을 나누었으니 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럼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하나님의 권능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상징하지 않느냐? 하나님 자신만의 지위를 상징하지 않느냐? 만물 가운데 너는 어떠한 일들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았느냐? 어떻게 보았느냐? 사람이 경험하는 사계절에서 볼 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에 대한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봄에는 나무에서 싹이 트고 꽃이 피며, 여름에는 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겨울에는 나뭇잎이 떨어진다. 이 법칙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권능이 어느 한 면으로 구현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자 빛이 있었는데, 이 ‘빛’은 지금 존재하고 있지 않느냐? 그것의 존재는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이냐?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공기가 지금도 존재하지 않느냐? 인류가 숨을 쉴 수 있는 공기도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냐?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누가 빼앗아 갈 수 있느냐? 누가 그것의 본질과 기능을 바꿀 수 있느냐? 하나님이 나눈 낮과 밤, 주야를 정한 법칙을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사탄을 포함해 깨뜨릴 수 있는 자가 있느냐? 밤이 되었을 때, 잠을 자지 않고 대낮처럼 보낼지라도 역시 밤이다. 네가 너의 생활 규칙을 바꾸었지만, 낮과 밤이 교체되는 법칙은 바꿀 수 없다. 이 사실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다. 그렇지 않으냐? 사자에게 소처럼 밭을 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코끼리를 나귀로 변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닭을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늑대를 양처럼 풀을 먹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를 육지에서 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그들을 물속에서 살도록 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물속에서 살아야 한다. 육지에서는 살 수 없어 죽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만물은 모두 자기만의 생존 법칙과 범위가 있고, 각각 자기만의 본능이 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창조주가 정한 것으로, 그 누구도 바꿀 수 없고 벗어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자는 영원히 사람과 격리된 야생 세계에서 살지, 영원히 소처럼 충직하게 성실하게 사람과 함께하며 사람을 위해 일할 수 없다. 코끼리와 나귀는 다 동물이고 네 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숨을 쉬는 피조물이지만, 그들은 다른 종이다. 그들은 각자 하나님에 의해 종류가 구분되고 모두 각자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서로 바뀔 수 없다. 닭도 두 다리를 가지고 있고 독수리처럼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나무 위에 날아오를 수 있을 뿐 영원히 하늘을 날 수 없다. 이것은 닭의 본능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정해진 것이 자명하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발전해 오면서, 인류의 과학은 ‘일취월장’했다고 할 수 있다. 과학 탐구 과정에서 이룩한 성과가 ‘과히 놀랄’ 정도이니, 인류의 재능은 날로 커지고 있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유독 한 가지만은 인간의 과학으로 돌파하지 못한다. 인류는 비행기를 만들고, 항공 모함을 만들고, 원자 폭탄을 만들고, 우주로 날아가고, 달나라에 착륙하고, 인터넷을 발명하여 하이테크 시대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숨 쉴 수 있는 생물은 만들어 내지 못한다. 어떤 생물의 본능과 생존 법칙 및 각종 생물의 생사윤회에 대해서 인류의 과학은 무능하고 통제할 수 없다. 이로부터 인류의 과학이 얼마나 높은 수준에 달했든 창조주의 생각 하나에도 비할 수 없고, 창조주의 만물 창조의 오묘함과 창조주 권능의 위력은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구상의 바닷물이 그렇게 많아도, 하나님이 각각에게 경계를 정해 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지금껏 함부로 자신의 범위를 넘어 육지로 올라온 적이 없다. 그들은 정해 준 대로 있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움직이라고 말씀할 때에야 움직일 수 있고, 그들이 어디로 가고 어디에 머무를지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늘 하는 말로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어떻게 할지 결정할 권리가 있고,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만물의 법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의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명령으로 바뀌는 것이지 사람의 의지로는 바뀔 수 없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천지 만물, 우주, 별, 1년 사계절, 사람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은 다 하나님의 명령과 지시,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할 당시의 법칙에 따라 조금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서 존재하고 운행되며 변화한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것의 법칙을 바꿀 수 없으며, 그것 본래의 운행 궤적을 바꿀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생기고, 그 권능으로 말미암아 소멸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이다. 여기까지 말했는데, 너희는 이제 하나님의 권능이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상징한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하나님의 권능이 어떠한 피조물이나 비피조물이 갖출 수 있는 것이냐? 그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모방하고 따라 하고 대체할 수 있는 것이냐?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 2:6) 사탄이 감히 창조주의 권능을 초월하지 못하기에 만물이 규율 속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이것은 욥기에서 발췌한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그’는 욥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짧을지라도 많은 문제들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기록된 것은 하나님이 영계에서 사탄과 나눈 구체적인 대화로서, 하나님이 말씀하는 대상인 사탄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의 구체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이고 명령이다. 그 명령의 세부적인 사항은 욥의 목숨과 관련되며, 하나님이 사탄에게 정해 준 욥을 대하는 마지노선에 관련된다. 즉, 오직 욥의 생명은 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먼저 이것이 하나님이 사탄에게 한 말이며, 또한 욥기의 원문과 연관시켜 볼 때 하나님이 어떠한 배경에서 이러한 말씀을 했는지도 알 수 있다. 사탄은 욥을 참소하고자 했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동의를 얻어야 욥을 시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욥을 시험하고자 하는 사탄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사탄에게 이러한 조건을 걸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였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 이 말씀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느냐? 확실히 이것은 지시이고 명령이다. 이 말씀의 성격을 파악하면, 너는 이 명령의 선포자가 하나님이며, 명령을 받아들이는 자는 사탄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양자의 관계는 이 명령을 통해 이 말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보여진다. 물론 이 역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 영계에서의 하나님과 사탄의 관계이며, 하나님과 사탄의 신분과 지위의 차이이다. 또한 지금까지 인류가 구체적인 사례와 구체적인 기록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과 사탄의 신분과 지위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이 기록이 인류가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를 아는 데에 있어 중요한 문헌이며, 이 기록에서 인류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받았고, 영계에서의 창조주와 사탄의 대화를 통해 창조주 권능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씀으로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권능이 또 한 번 입증되었다. 겉으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은 사탄과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호와 하나님이 말씀하는 태도와 서 있는 위치가 사탄보다 높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명령하는 어조로 사탄에게 지시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탄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를 알려 주고, 욥을 사탄의 손에 붙였으니 그를 마음대로 대할 수는 있으나 욥의 생명을 취할 수는 없음을 알려 주었다. 그 함축적 의미는 비록 욥을 사탄의 손에 붙였으나 욥의 생명까지 붙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이 있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에게서 욥의 생명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태도는 사탄에게 한 이 명령에서 아주 명확하게 나타난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과 대화할 때 서 있던 위치 역시 이 명령에서 나타났다. 여호와 하나님이 서 있는 위치에서 볼 때 그는 빛과 공기를 만들고 만물 생령을 만든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만물 생령을 주재하는 하나님이고, 인류를 주관하고 음부를 주관하는 하나님이며, 모든 생명체의 생과 사를 주관하는 하나님인 것이다. 영계에서 하나님을 제외하고 누가 감히 사탄에게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또한 왜 사탄에게 친히 명령을 내린 것일까? 이는 욥의 목숨을 포함해서 사람의 생명은 모두 하나님이 주관하고, 하나님은 사탄이 침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욥의 생명을 빼앗아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도록 허락했을 때에도 욥의 생명을 앗아 가서는 안 된다는 이 특별한 명령을 내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탄은 하나님의 권능을 감히 넘어설 수 없으며, 하나님의 명령과 구체적인 지시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스럽게 명령에 복종하고 따르며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 물론 사탄은 또한 마음대로 하나님의 어떤 명령도 바꿀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에게 준 범위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감히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 권능의 위력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권능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냐? 사탄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고, 자기가 속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인류보다 훨씬 잘 안다. 그러기에 사탄은 하나님의 지위와 권능에 대해 영계에서 확실하게 보았고, 하나님 권능의 위력과 하나님의 권능이 행사되는 원칙에 대해 깊이 느꼈다. 그래서 감히 태만하거나 그 어떤 것도 전혀 거스르지 못하며, 감히 하나님의 권능을 벗어나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그 어떤 도전도 감히 하지 못한다. 사탄은 본성이 사악하고 교만할지라도 하나님이 정해 준 한계와 범위를 감히 벗어나지 못한다. 천만년 동안, 사탄은 엄격하게 그 한계를 지켰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지시와 명령을 준수하였으며, 지금껏 감히 한계선을 넘어갈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사탄이 악독하긴 하지만 타락한 인류보다 훨씬 ‘현명’하다. 사탄은 창조주의 신분을 알고 자신의 한계를 안다. ‘규율을 지키는’ 사탄의 행위로부터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은 사탄이 뛰어넘을 수 없는 천상의 법칙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의 권능으로 인해 만물이 법칙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인류가 하나님이 정한 코스 속에서 번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이 규율을 깰 수 없고 이 법칙을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창조주의 손에서 나온 것이고, 창조주의 결정에서 온 것이며, 창조주의 권능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가 만물 생령을 주관하고 주재하는 사실은 창조주의 권능이 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욥기에도 마찬가지로 욥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욥에게 무엇을 주었느냐?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욥 42:12). 인류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욥에게 베풀어 준 것들은 무엇이냐? 사람의 재산이 아니냐? 이런 재산을 소유한 욥은 그 시대에 아주 부유하지 않았겠느냐? 욥은 그 재산들을 어떻게 소유하게 된 것이냐? 그의 부는 어떻게 생긴 것이냐? 그런 재산은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소유하게 된 것이다. 욥이 그 재산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하나님의 축복을 어떻게 대했는지는 여기서 우리가 언급할 주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축복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은 모든 사람이 꿈에도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일생 동안 재산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는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람이 주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재산을 베풀어 주고 축복을 줄 수 있는 권능과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축복에는 원칙이 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느냐?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다! 아브라함과 욥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실은 같지만,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축복은 다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이 모래와 같이, 별과 같이 많으리라고 축복하였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준 이 일에 대해 말하자면, 하나님은 한 사람의 후손, 한 종족을 강성해지게 한 것이다. 이 일에서 하나님이 권능으로 주재한 것은 만물 생령 중에서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인류이다. 하나님 권능의 주재하에 이 인류는 하나님이 정한 범위와 속도에 따라 종족을 번식하며 생존해 나간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이들 족속의 생존 능력, 번성 속도, 수명은 다 하나님이 지배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한 이 모든 것의 원칙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이든지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권능의 보호하에 막힘없이 순조롭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대해 말하자면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어떤 시대에서도, 인류가 어떤 재난을 겪어도 아브라함의 후손은 다 죽음이라는 재앙의 위협에서 안전할 것이며, 그 족속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욥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그를 매우 부유하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준 것 가운데, 숨 쉴 수 있는 각종 살아 있는 생명체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 생명체의 수, 번식의 속도, 생존율, 얼마나 실할지 등등 이러한 구체적인 사항들도 다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다. 이 생명체 또한 언어 능력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창조주의 지배하에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배하는 원칙은 욥에게 약속한 축복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욥에게 준 축복에 대해 말하자면, 약속의 내용은 다소 차이가 날지라도 만물 생령을 주재하는 창조주의 권능은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 아브라함과 욥에 대한 서로 다른 약속과 축복 가운데에서 구현되고, 또 한 번 인류에게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의 상상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세부적 내용은 또 한 번 인류에게 오직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하는 가운데서만 하나님의 권능을 알 수 있다고 알려 준다.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능에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궁창이 있으라 하니 궁창이 생겼고 뭍이 드러나라 하니 뭍이 드러났다’는 이런 말씀에서만 구현된 것이 아니다. 더 많은 부분은 하나님이 어떻게 빛을 지속시키고, 궁창이 사라지지 않게 하며, 뭍을 영원히 물과 나뉘게 하느냐에서 구현된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빛, 궁창, 뭍과 같은 피조물들을 주재하고 관리하느냐의 구체적인 내용에서 구현된다. 인류에게 준 하나님의 축복에서 너희는 또 무엇을 보았느냐? 아브라함과 욥에게 복을 준 후에, 하나님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권능이 이제 막 행해지기 시작하였고, 그가 자신이 한 모든 말씀을 현실로 이루고, 자신이 한 말씀의 모든 세부 사항을 실현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후의 세월 속에서 그가 하고자 한 모든 일들을 계속하였다. 어쩌면 사람은 하나님께 권능이 있기 때문에 말씀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만사만물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이런 상상은 황당한 면이 없지 않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말씀으로 모든 것을 이룬다는 것에 대해, 만일 네가 단편적으로만 보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주재하는 만물이 생존하는 각종 현상과 사실들을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너의 이해는 공허하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이러한 상상은 하나님에 대한 앎이 이미 미궁에 빠져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상상 속 하나님은 명령만 내리는 기계일 뿐, 권능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욥의 사례를 통해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실제적인 면을 보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욥을 축복한 후에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고, 사자에게만 시키고 자신은 결과만 기다린 것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자마자 만물은 하나님 권능의 인도하에 하나님이 행하고자 하는 사역에 협력하여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과 사물을 예비하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하나님의 권능은 온 땅에서 행해졌고, 아브라함과 욥에게 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 응답하기 위한 길을 열었다. 그뿐만 아니라, 앞으로 진행될 각각의 절차와 모든 중요한 부분에 필요한 것들을 다 계획하고 예비하였다. 그 기간에 하나님이 움직인 것은 하나님의 사자들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하나님의 권능이 행해진 범위는 하나님의 사자들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만물을 움직여서 하나님이 이루려는 사역에 협력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권능을 구체적으로 행하는 방식이다.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은 권능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셋째 하늘이나 어떤 고정된 자리에 계시면서 그 어떤 구체적 사역을 행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다 생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또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할 필요 없이 그저 말 한마디로 충분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이 그러냐? 확실히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권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의 권능은 진실하고 실제적인 것이지 절대로 공허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진정성과 실제성의 단면은 그가 만물을 창조하고 만유를 주관하며, 그가 인류를 인도하고 경영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나타나고 구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각각의 방식, 각각의 관점, 각각의 세부 내용과 그가 이룬 모든 사역, 그리고 만물에 대한 그의 이해는 확실히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 공허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의 권능과 능력은 항상 모든 일에서 나타나고 구현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 실제로 존재함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시시각각 자신의 권능과 능력으로 계속 사역하며, 만물을 주관하고 주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능력과 권능은 천사와 하나님의 사자를 포함해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어떤 축복을 주고, 욥에게는 또 어떤 것을 축복하였는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결정한 것이며,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된 것이다. 설사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이나 욥에게 직접 임했을지라도, 그들이 한 것은 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한 것이며, 모두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경 기록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임한 것을 보았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무엇을 하였는지 보지 못했을지라도, 사실상 진정한 능력과 권능으로 행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설사 네가 천사나 사자에게 큰 능력이 있어 그들이 이적과 기사를 행하거나 하나님이 준 사명을 받고 일련의 일을 행하는 것을 보았을지라도, 그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이 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것일 뿐, 절대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물을 창조하고 주재하는 창조주의 권능을 가진 사람이나 사물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창조주의 권능을 행하거나 나타낼 수 없다. 창조주의 권능은 영원히 바뀌지 않고 거스를 수 없다 ……하나님은 권능과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일할 때는 매우 신중하고 원칙이 있으며 신용을 지킨다. 그의 신중함과 그가 일하는 원칙은 거스를 수 없는 창조주의 성품과 뛰어넘을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지고지상한 권능을 가지고 있고, 만물이 모두 그의 권세 아래에 있을지라도, 그가 만물을 주재하는 능력을 갖추었을지라도 단 한 번도 자신의 계획을 파괴한 적도 방해한 적도 없다. 그는 권능을 행할 때마다 항상 자신의 원칙을 엄격하게 지키며, 그가 말씀한 대로, 그가 계획한 절차와 목표대로 정확하게 진행한다.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는 만물 역시 하나님 권능의 행사 원칙을 따르고 있다. 그의 권능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없고, 그의 권능의 행사 원칙을 바꿀 수 있는 존재도 없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복받는 자는 그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게 되고, 저주받는 자 역시 그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게 된다. 하나님 권능의 주재하에, 하나님 권능의 시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없으며, 하나님 권능의 행사 원칙을 바꿀 수 있는 존재도 없다. 창조주의 권능은 그 어떤 요인의 변화로도 바뀌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의 권능의 행사 원칙 역시 그 어떤 원인에 의해서도 바뀌지 않는다. 천지가 격변한다 하더라도 창조주의 권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만물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창조주의 권능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영원히 바뀌지 않고 거스를 수 없는 창조주 권능의 본질인 것이다. 이 역시 창조주의 유일성인 것이다!

창조주의 권능은 시간, 공간, 지리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창세기 22장 17절에서 18절을 보자.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였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여러 차례 축복하며 그의 자손을 크게 성하게 하리라고 했다. 그 정도가 얼마나 된다고 했느냐? 성경 구절처럼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줄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그저 형상적인 언어일 뿐이다. 하지만 이 형상적인 언어를 통해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줄 후손이 한둘이 아니고 수천수만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나라를 이룰 정도가 된다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러 나라의 아비가 되리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까지 많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일이냐, 하나님에게 달린 일이냐? 자신의 후손이 얼마가 될지 사람이 통제할 수 있느냐?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느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게 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후손이 몇 명일지조차도 사람은 결정할 수 없다. 누가 자신의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않겠느냐? 하지만 아쉽게도 세상일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 얼마나 되든,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 상관없이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예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이 너에게 주는 대로 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네게 적게 주었는데 네가 너무 많이 받게 되는 법은 없다. 하나님이 네게 많이 준다면, 네가 많다고 탓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냐?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결정이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으며,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네 씨로 크게 성하게 하리라고 한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이다. 이 언약은 ‘무지개 언약’처럼 영원히 지켜질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기도 하다. 이러한 약속을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과 자격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며, 사람이 믿든 안 믿든, 받아들이든 못 받아들이든,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보든,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의지나 생각이 바뀐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니며, 그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변화에 의해 변하는 것도 아니다. 만물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반대로, 만물이 사라지는 그날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히 이뤄지는 날이다. 이는 그가 창조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창조주의 권능을 지녔으며, 창조주의 능력이 있고, 만유와 모든 생명을 주관한다. 그는 무에서 유를, 유에서 무를 가능케 하며, 모든 생과 사의 전환을 주관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손을 번성케 하는 것이 하나님께 있어서는 지극히 간단한 일인 것이다. 이 일이 사람이 듣기에는 천일야화나 동화 속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하나님이 하고자 결정한 일이나 사람에게 약속한 일은 천일야화나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본 사실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는 이러한 체득이 있느냐? 이런 것은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아브라함의 후예가 많지 않으냐? 얼마나 많으냐?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과 같지 않으냐? 각 나라, 각 지역, 세계 각지로 널리 퍼져 있지 않으냐? 이러한 사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냐? 하나님 말씀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난 후,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동안 그 말씀이 계속해서 이뤄지고, 끊임없이 현실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위력이자 하나님 권능의 증거이다. 하나님이 만유를 창조할 때,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 이는 순식간의 일로,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러한 일의 성취와 응답은 시간 차 없이 즉시 이루어진 경우이다. 이 또한 다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한 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 권능의 또 다른 면의 본질을 볼 수 있게 하였다. 또 사람들에게 창조주의 권능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하고, 창조주 권능의 더 실질적이고 더 훌륭한 면도 느끼게 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자마자 하나님의 권능은 그 사역을 주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한 것들이 점차 현실이 되기 시작하였다. 만물의 모든 것들이 다 이로 인해 다양한 변화를 맞았다. 일례로, 봄이 오면 풀이 파릇파릇해지고 꽃이 피고 나무에 싹이 튼다.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고 기러기들이 돌아오며, 논밭에는 사람들의 일손이 분주해진다. 이에 발맞춰 만물도 다시 소생한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의 놀라운 행사인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이룰 때, 하늘과 땅의 만물이 다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새로워지고 변화되는데,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이루기 위해 만물이 다 힘쓰며 움직이게 된다. 모든 피조물들이 다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배치되어 각자의 역할을 다하고 각자의 기능을 다한다. 창조주의 권능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에 범위가 정해져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에 시간적 제약이 있느냐? 하나님 권능의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을 논할 수 있느냐? 크고 작음과 강함과 약함을 논할 수 있느냐? 사람의 기준으로 헤아릴 수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은 사라졌다 나타나고 있다가도 없는 것이 아니며, 아무도 그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할 수 없다.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축복하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지 간에 그의 그 축복은 지속된다. 그 지속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권능을 증거하고, 인류에게 창조주가 가진 영원불멸의 생명력이 수없이 재현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의 권능이 나타날 때마다 그의 말씀을 완전하게 구현해 내어 만물과 인류에게 보여 준다. 그리고 그의 권능으로 이뤄진 일마다 더없이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완전무결하다. 그의 생각, 그의 말씀, 그의 권능과 그가 이룬 일마다 전부 그 어떤 것도 비할 수 없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피조물에게 있어서 그 의의와 가치는 인류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한 후에는, 그 사람이 어디서 태어났든, 무엇을 하든, 약속받기 전후의 그의 사정이 어떻든, 그의 생존 환경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났든, 하나님은 그것을 다 환히 알고 있다. 하나님이 한 말씀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하나님이 보기에는 다 방금 일어난 것과 같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한 모든 약속을 추진하고 주관하고 실현시키는 능력과 권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약속이 무엇이든 간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그 약속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요소, 예를 들면 시간, 장소, 종족 등과 같은 요소의 범위가 얼마나 넓든, 그 약속은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하나님께 있어서 전혀 힘들지 않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 주관하는 범위는 우주 전체, 인류 전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빛을 만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빛만 관리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물을 만들었으니 물만 관리하고, 나머지 일은 하나님과 무관하다고 한다면 오해가 아니겠느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일이 몇백 년이 지난 뒤에는 사람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기에 그 약속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고, 단 한순간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 기간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권능을 행하였는지, 만물은 또 어떻게 하나님에 의해 배치되었는지, 하나님이 창조한 만물 가운데 얼마나 훌륭한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인류가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행사에서 나타난 탁월한 면면들은 만물 가운데 전해지고 칭송되고 있다. 만물은 또한 창조주의 놀라운 행사를 나타내며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하는 갖가지 미담들은 만물을 통해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은 만물에게 하나님이 어디에나 다 존재하고 항상 존재함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때, 너는 하나님은 어디에나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은 시간, 지리, 공간, 그리고 그 어떤 사람과 일, 사물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범위는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며, 사람이 헤아릴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어려우며, 영원히 다 알 수 없는 것이다.

창조주만의 말씀 방식과 특징은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권능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축복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 17:4~6)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 내가 아브라함을 택한 것은 그로 그의 자식과 권속들에게 나 여호와의 도를 지킬 것을 명함으로 의와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함이라 이로써 내가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것이라”(창 18:18~19, 중국어성경 직역)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욥 42:12) 창조주만의 말씀 방식과 특징은 창조주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권능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고 얻고 싶어 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원칙이 있고, 그의 방식대로 사람에게 복을 내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어떤 약속을 하고 얼마만큼의 은혜를 베풀어 주는지는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 따라 분배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을 설명할까? 사람에게 그 안에서 무엇을 보게 할까? 여기서 우리는 잠시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는지, 하나님이 축복해 주는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접어 두자.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 가는 것을 목표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살펴보자. 즉,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 가는 이 관점으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보자. 이상 네 단락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준 축복에 관한 기록이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욥과 같은 하나님이 복을 내리는 대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있고, 또한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을 내리는 이유와 그 복의 내용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어조, 말씀하는 방식과 하나님이 서 있는 위치와 시각으로부터, 사람은 복을 내리는 자와 받는 자의 신분과 지위, 그리고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어조와 방식, 그리고 하나님의 위치는 창조주의 신분을 가진 하나님만의 것이다. 그는 권능과 위력은 물론 창조주의 존귀함과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의 위엄을 지니고 있다. 먼저 다음의 말씀을 보자.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창 17:4~6).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이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린 축복이다. 하나님이 그를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고, 그의 후손을 번성케 하리라 하였다. 또한 나라들이 그를 좇아 일어나고 열왕이 그를 좇아 일어나리라고 말씀하였다. 너는 이 몇 마디 말씀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지 못했느냐? 너는 하나님의 권능을 어떻게 보았느냐? 너는 하나님 권능의 어떠한 본질을 보았느냐? 이 구절들을 자세히 읽다 보면, 하나님의 권능과 신분이 하나님의 어휘 사용에서 확연히 나타난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 될찌라 … 내가 너로 … 하리니” 이 중에서 ‘너는 … 될찌라’, ‘내가 … 하리니’ 등의 표현에서 하나님 신분과 권능이 나타나는 확고한 어휘 사용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창조주의 신실함이요, 또 한편으로는 그것은 모두 창조주의 신분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전용 어휘이자 관용어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축복하기를, 후손이 번성하고 나라들이 그를 좇아 일어나고 열왕이 그를 좇아 일어난다고 했다면, 이는 확실히 하나의 바람일 뿐이지 약속이나 축복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감히 “나는 반드시 너로 하여금 어떠하게 할 것이다. 나는 너를 어떠어떠하게 하겠다.”라는 말을 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에게 이러한 결정권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설사 이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빈말일 뿐이고 헛소리일 뿐이며, 사람의 욕망과 야심이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사람의 욕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감히 이렇게 큰소리칠 수 있겠느냐? 사람은 누구나 좋은 소망을 갖기 마련이어서, 후손들이 모두 출세하고 남보다 뛰어나기를 바란다. ‘만일 황제가 되는 후손이 있을 수 있다면, 그건 크나큰 행운이야! 성장(역주: 도지사급에 해당)만 될 수 있어도 괜찮아. 어쨌든 높은 사람이면 돼!’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의 바람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저 후손을 위해 축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어떤 누군가의 약속을 이루어 줄 수는 없다. 인간에게 거기까지 가능하게 하는 권력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안다. 자신의 일도 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운명을 주관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할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는 그런 권능이 있어서 사람과 약속한 것, 사람에게 축복한 모든 것들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며, 하나님께 있어 사람의 후손을 번성케 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그가 누군가의 후손을 번성하게 하는 것은 단 한 마디로도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그는 한 번도 이 때문에 수고한 적이 없다. 또한 이 때문에 머리를 쓰거나 고민해 본 적도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자 하나님의 권능이다. 창세기 18장 18절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중국어성경 직역)”라는 말씀을 보고 난 후, 너희는 하나님의 권능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창조주의 비범함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창조주의 지고지상을 느낄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긍정적이다. 하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 필승의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또는 그런 확신이 있음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권능을 실증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그의 말씀이 이뤄지도록 내린 명령인 것이다. 여기에 너희가 주목해야 할 두 어휘가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은 반드시 강대한 나라가 되고 땅의 만국은 필히 그로 인해 복을 받을 것이니라(중국어성경 직역)”라고 한 말씀에 어떤 모호한 부분이 있느냐? 걱정하는 부분이 있느냐?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느냐? 그런 것은 인류에게서 자주 드러나는, 사람만이 갖고 있는 요소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의 ‘반드시’와 ‘필히’ 이 두 어휘 때문이라도, 사람의 그런 요소는 창조주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감히 이러한 어휘를 타인에 대한 축복에 사용하지 못한다. 또한 그 누구도 감히 타인에게 강대한 나라를 주겠다고 확실하게 말하지 못하며, 감히 타인에게 천하 만민이 반드시 그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할수록 증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그런 권능을 가지고 있어 하나님의 권능이 이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한다. 또한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말 것임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매우 확실한 것이고, 주저하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에 따라 이 모든 일을 이루고자 하였으며, 그 어떤 세력도 이 일의 응답을 바꾸거나 저지하거나 파괴하거나 교란시킬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 말씀의 이룩과 성취를 멈추게 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창조주가 하는 말씀의 위력이며, 부인할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인 것이다! 네가 이 말씀을 다 읽었을 때, 마음속에 의혹이 일겠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능력과 위엄, 권능이 묻어난다. 이러한 위력과 권능, 그리고 일이 필연적으로 성취된다는 것, 이것은 그 어떤 피조물과 비피조물이 이를 수도 초월할 수도 없는 것이다. 창조주만이 이러한 어조로, 이러한 뉘앙스로 인류와 대화할 수 있다. 그의 약속이 빈말이 아니고 허풍이 아니며, 사람과 사물이 모두 초월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권능의 구현이라는 것이 사실로 입증되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을 때, 하나님 말씀의 위력과 하나님의 권능을 느꼈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면, 너는 어떤 느낌을 받을 것 같으냐? 그 사람을 너무 오만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가 허풍을 떤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그가 자신을 과시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그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고 그런 권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그러한 일들을 이룰 수 없다. 그가 이렇게 확실하게 약속한다면 단지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함부로 지껄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그것은 분명 오만하고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며, 전형적인 천사장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왔다면, 네가 오만함을 느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농담이라고 느끼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이며 사실이다. 그의 말씀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그가 어떤 일을 이루고자 마음먹었을 때, 그 일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씀은 아브라함과 세운 언약이며,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이다. 그 약속은 기정사실이며,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점차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했다고 하나님께 오만한 성품이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룰 수 있고,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이며, 그 일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고, 그 일들을 이루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능력 범위의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라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이 나타나고 발현된 것이며,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권능이 완벽하게 구현된 것이고, 창조주 신분에 가장 적합하고 합당한 증거인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는 방식, 어조, 어휘 사용은 바로 창조주 신분의 상징이며, 하나님 자신의 신분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거짓됨도 불순함도 없으며, 확실히 창조주의 본질과 권능이 완벽하게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피조물에게는 이러한 권능도 없고 이러한 본질은 물론 하나님이 부여한 능력도 없다. 만일 사람에게서 이러한 부분들이 보여진다면, 그것은 확실히 타락 성품의 분출이며, 사람의 교만과 야심이 꿈틀거리는 것이고, 전형적인 마귀와 사탄이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사람을 미혹하고 유인하는 악독한 본심의 발현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언어적 노출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과 자리를 다투고 하나님을 사칭하며, 하나님을 대신하고 싶어 한다고 말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말씀하는 어조를 흉내 내는 속셈은 사람들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함이며, 원래 하나님께 속하는 인류를 빼앗고자 함이다. 이것은 분명히 사탄이고, 천사장의 후예가 하는 행위이며, 하늘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너희 중에는 하나님을 모방하여 어떤 방식으로 말을 했던 자가 없느냐? 사람을 오도하고 미혹시킬 마음을 품고, 사람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의 권능과 위력을 가지고 말을 하고 일을 하며, 자신의 본질과 신분은 남다르며, 심지어 어조가 하나님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주려고 했던 자가 없느냐? 너희는 이런 일들을 한 적이 없느냐? 하나님의 말투를 모방해서 말하고, 이른바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손짓을 하며, 하나님의 위력과 권능인 척 가장한 적이 없느냐? 이런 것들은 너희들 대부분이 자주 하거나 하려고 마음먹은 것들이 아니냐? 이제 너희가 창조주의 권능을 진짜로 보고 느끼고 알게 되었는데, 처음 너희가 행하고 드러냈던 행동들을 돌이켜 보면 역겹게 느껴지지 않느냐? 너희가 비열하고 파렴치했던 모습을 알게 되지 않느냐? 이러한 자들의 성품과 본질을 해부해 보면, 그들은 저주받아 마땅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보통 이런 일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굴욕을 자초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너희는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 어느 정도로 심각한 것이냐? 사람이 이렇게 하는 본심은 바로 하나님을 모방하고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자 함이다. 또한, 사람들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를 없애고 사람들 가운데서 사역하는 하나님을 쫓아내고, 자신이 사람을 통제하고 차지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는 모두 이러한 욕망과 야심이 있다. 사람마다 이렇게 사탄이 타락시킨 본질 속에서 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면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사탄의 본성 속에서 살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에 관련된 주제로 나누었다. 너희는 하나님을 사칭하고 하나님을 모방하고 싶은 욕망과 야심이 아직도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 노릇을 하고 싶은 욕망이 있느냐? 아직도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느냐? 하나님의 권능은 사람이 능히 모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신분과 지위는 사람이 사칭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네가 하나님 말씀의 어조를 흉내 낼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본질을 모방할 수는 없다. 네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하나님을 사칭할 수는 있을지라도, 영원히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없고, 영원히 만물을 주재하거나 주관하는 일은 할 수 없다. 하나님이 보기에 너는 영원히 그저 아주 하찮은 피조물일 뿐이다. 너의 능력과 재주가 얼마나 뛰어나든, 네가 얼마나 많은 은사를 가졌든, 너의 모든 것은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있는 것이다. 네가 몇 마디 모진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너에게 창조주의 본질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너에게 창조주의 권능이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지,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며, 밖으로부터 더해진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피조물의 일원으로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본위를 지켜야 하며, 성실한 사람됨으로 분수껏 창조주가 맡겨 준 바를 지켜야 한다. 도에 넘치는 일을 해서도 안 되고, 자신의 ‘능력 범위’ 밖의 일을 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이 증오하는 일을 해서도 안 된다. 위대한 사람, 초월적인 존재, 고귀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들은 사람에게 존재하지 말아야 할 ‘소망’이다. 위대한 사람,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일이며,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파렴치한 일이고, 혐오감을 불러오고 버림받을 일이다. 반대로 진정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야말로 귀한 것이고, 피조물이 지켜야 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목표인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언약을 세우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1~13) 만물을 창조한 후, 창조주의 권능이 ‘무지개 언약’으로 또 한 번 입증되고, 나타나다 창조주의 권능은 언제나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나타나고 행사된다. 그는 만물의 운명을 주재할 뿐만 아니라, 그가 친히 빚은 인류, 즉 다른 구조와 형식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특별한 피조물 역시 주재하고 있다. 만물을 창조한 후에도 창조주는 그의 권능과 능력을 나타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만물과 전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권능을 본격적으로 행한 것은 인류가 그의 손에 의해 탄생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인류를 경영하고 주재하기로 하였고, 인류를 구원하기로 하였다. 또한 진정으로 인류를 얻고자 하였는데, 바로 만물을 관리할 수 있는 인류를 얻고자 한 것이다. 그는 그러한 인류가 그의 권능 아래에 살아가며, 그의 권능을 알고 그의 권능에 순종하게 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으로 그의 권능을 나타내고, 그의 권능으로 자신의 말씀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권능은 어디서든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좀 더 친숙한 일부 특별 사례들만을 뽑았다. 이것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유일무이함과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권능을 이해하고 알게 하겠다. 창세기 9장 11절에서 13절의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기록과 관련된 말씀과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다른 부분도 있다. 유사한 부분은 무엇일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행한 것이다. 다른 부분이라면 이 단락의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라는 점이다. 이 대화는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사람에게 언약에 대해 알려 주는 내용이다. 하나님이 그때 권능을 행한 것은 사람과의 대화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인류가 창조되기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와 명령이었으며, 그가 만들고자 하는 피조물에게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대상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은 사람과의 대화이며, 또한 그가 인류에게 하는 당부와 훈언이고, 그가 만물에게 하달하는 권능을 지닌 명령이었던 것이다. 이 단락에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일들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느냐? 거기에는 홍수로 세상을 멸한 후, 하나님이 사람과 언약을 세우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더 이상 홍수로 세상을 멸하지 않을 것임을 알려 주고, 또한 이를 위해 하나님이 증거를 세운다고 하였다. 그 증거는 무엇이냐?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이것은 창조주가 인류에게 한 원래의 말씀이다. 그가 말씀함과 동시에 무지개가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너희는 다 무지개를 본 적이 있을 텐데, 무지개를 보았을 때, 이 무지개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고 있느냐? 과학으로는 이 사실을 논증할 방법이 없다. 과학으로는 그 근원을 찾지 못했으며, 그것의 행방도 찾지 못했다. 이것은 창조주가 사람과 세운 언약의 증거이기 때문에, 과학적 근거는 필요 없다. 그것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고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말씀이 있고 난 후, 권능이 지속되는 결과인 것이다. 창조주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과 세운 언약과 약속을 지켜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무지개를 출현시켜 하나님이 세운 언약의 증거로 삼은 것은 창조주에게나 창조된 인류에게 있어,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천상의 규율이자 법칙이라는 의미이다. 변함없이 지속되는 이 법칙은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하고 난 후 그의 권능이 또 한 번 진정으로 구현된 것이며, 창조주의 권능과 능력이 무한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지개’를 그 언약의 증거로 삼은 것은 창조주 권능의 지속과 연장선인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이 또 한 번 말씀으로 행한 것이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사람과 세운 언약의 증거이다. 이는 그가 무엇을 이루고자 결정하고, 어떤 방식으로 이루고, 어떤 방식으로 성취하겠다고 하면, 그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사람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말씀이 있고 난 몇천 년 후인 오늘날에도 인류는 하나님이 말씀한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인해, 그 일은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 무지개를 없어지게 할 수 없고, 그것의 규칙을 바꿀 수도 없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권능인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면 반드시 책임지고, 책임지는 이상 반드시 이루며, 이루어진 것은 반드시 영원까지 지속된다.” 이 말은 여기서 아주 명확하게 구현되는데, 바로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의 확실한 증거이자 특징이다. 이러한 증거와 특징은 그 어떤 피조물도 갖추지 못한 것이고, 그 어떤 피조물에게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어떤 비피조물 가운데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증거와 특징은 유일무이한 하나님만이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 특유의 신분과 본질을 피조물과 구분시켜 준다. 아울러, 그것은 하나님 자신 이외의 모든 피조물과 비피조물이 영원히 초월할 수 없는 증거이자 특징인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사람과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그는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알려 줌과 동시에 그의 뜻도 알려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특별한 증거를 사용해서 사람과 언약을 세우고, 그 증거로 그가 사람과 세운 언약에 확신을 준 것이다. 이 ‘언약’을 세웠다는 것이 하나의 큰 사건이 아니냐? 얼마나 큰 사건일까? 바로 그 ‘언약’의 특별함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언약이 아니며, 또 단체와 단체 간의 언약도 아니다. 더욱이 한 국가와 또 다른 국가 간에 세운 언약도 아니며, 창조주가 인류 전체와 세운 언약이다. 이 ‘언약’의 유효 기간은 창조주가 만물을 폐기하는 그날까지이며, 이 ‘언약’의 시행자는 창조주이고, 그것의 수호자 역시 창조주이다. 요컨대, 인류와 세운 ‘무지개 언약’의 모든 것은 창조주와 사람의 대화에 따라 응하고 이루어졌으며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권능에 순종하고, 따르고, 신뢰하며, 그 권능을 깨닫고 목도하고 칭송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 있겠느냐? 유일무이한 하나님 이외에 이러한 언약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매번 무지개가 나타나는 가운데, 그것은 인류에게 창조주가 사람과 세운 ‘언약’을 알려 주고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창조주가 인류와 세운 언약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가운데, 그것이 인류에게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은 ‘무지개’와 ‘언약’ 자체가 아니라, 창조주의 영원불변의 권능인 것이다. 무지개의 출현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은 창조주가 은밀한 곳에서 행하는 놀랍고도 오묘한 행사이며, 창조주의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변치 않는 권능의 생생한 구현이다. 이런 것들은 창조주의 또 다른 면에서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권능의 구현이 아니냐?

하나님을 유일무이한 주재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람이 구원받는 첫걸음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진리를 진지하게 대하고, 마음으로 느끼고 깨달아야 한다. 그러한 진리가 모든 사람의 삶과 관계가 있고, 모든 사람의 과거와 현재, 미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삶을 살면서 거치는 몇 개의 중요한 관문과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재에 대한 깨달음, 그의 권능을 대하는 태도에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의 종착지와도 관계가 있다. 따라서 이를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 평생 동안 노력해야 한다. 네가 하나님의 권능을 직시하고 그의 주재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권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된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주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이를 먹어도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권능을 진정으로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을 수십 년간 믿는다고 해도 인생의 끝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이는 얼마나 슬픈 일이냐? 따라서 인생의 길을 얼마나 걸어왔든, 현재 나이가 몇 살이든, 앞으로 갈 길이 얼마나 남았든, 우선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고 직시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너의 유일한 주재자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는 것은 모든 사람이 완수해야 할 과제이자 인생을 알고 진리를 얻는 열쇠이다. 또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매일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알아 가는 데에 있어 배워야 할 기본적인 것이다. 위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름길로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일깨워 주고 싶다. 하나님의 주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가 있다면 이 또한 불가능하다고 일깨워 주고 싶다. 하나님은 사람의 유일한 주이고,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유일한 주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주재할 수 없고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든 타인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그것을 배정하거나 좌우하거나 변화시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유일무이한 하나님만이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할 수 있다. 유일무이한 하나님 자신만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권능을 가지고 있기에 창조주만이 인류의 유일무이한 주재자이다. 하나님의 권능은 창조된 인류를 주재할 뿐만 아니라, 아무도 보지 못하는 비피조물과 우주 별하늘도 주재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그 어떤 사람이나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 누군가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어떤 특기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요행의 심리를 가지고 현재의 처지를 바꾸거나 벗어나려고 한다면, 혹은 인간의 노력을 빌어 출세하거나 명예와 부귀를 모두 가지는 운명으로 바꿔 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고생을 자초하고 자기 무덤을 파는 것이라고 하겠다! 너는 조만간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고 본인의 노력이 헛수고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운명을 거스르려는 욕심과 부도덕한 행동으로 인해 그릇된 길로 빠지게 될 것이며,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너는 지금 당장은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진리를 점차적으로 깊이 체험하게 될 때면 오늘 내가 한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마음과 영이 있는 사람인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인지는 하나님의 주재와 진리에 대한 태도에 의해 좌우된다. 하나님의 권능을 진정으로 느끼고 깨달을 수 있는지도 이에 의해 결정된다. 네가 평생 동안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느껴 본 적이 없고 그의 권능을 인정하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너는 황폐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며 분명 하나님이 혐오하여 버리는 대상이 될 것이다. 이는 너 자신이 가는 길과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하나님이 사역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주는 시련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주재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권능에 순종하고, 점차 하나님의 말씀으로 실제적인 경험이 있게 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과 주재에 대해 진정으로 깨닫게 되고, 진실한 체험을 얻게 되며, 진정 창조주에게 복종하게 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재를 깨닫고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이에 순종한다. 이런 사람은 욥처럼 눈앞에 닥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욥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며, 무엇을 선택하거나 무엇을 바라고자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피조물의 신분으로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이 사실을 어떻게 대하고 인식할 것인가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쉽게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있으며, 모든 사람은 능동적 또는 수동적으로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받아들인다. 사람이 살면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어도, 결국에는 창조주가 배정해 놓은 운명의 길로 되돌아가게 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이며, 또한 창조주가 권능으로 만물을 주재하고 다스리는 방식이다. 그 덕분에 만물이 질서 정연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인류는 아무런 방해 없이 끊임없는 윤회를 반복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이 규칙적으로 돌아가고, 매일, 매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너희들은 이러한 사실에 눈을 뜨고 어느 정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진리에 대한 너희들의 경험과 인식,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따라 많이 느낄 수도, 적게 느낄 수도 있다.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진리의 실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만큼 체험했는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가 사람의 순종 여부에 의해 결정되느냐? 하나님의 권능이 사람의 순종 여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권능은 언제나 존재한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자신의 생각과 뜻에 따라 모든 사람의 운명과 만물을 주재하고 배치한다. 이는 사람의 변화나 누군가의 의지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며, 시간과 공간, 지리적인 변화로 인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나님 자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를 알고 받아들이고, 그의 주재에 순종하느냐로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이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갖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과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의 운명은 여전히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다. 네가 하나님의 주재를 모른다고 해도 하나님의 권능은 변함없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은 사람의 의지와 기호, 선택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천지가 사라진다고 해도 그의 권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유일무이한 권능을 갖고 있다. 그의 권능은 사람이나 사물, 공간, 지리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항상 변함없이 권능을 행하고 큰 능력을 나타낸다. 그는 경영 사역을 계속하며 만물을 주재하고, 만물에게 공급하며, 만물을 지배한다. 이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는 사실이며 태고부터 변함없는 진리이다! 하나님의 권능에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와 실행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는 사실에 대해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고 알아야 할까? 이는 모든 사람이 직면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네가 삶에서 문제에 맞닥뜨릴 때 하나님의 권능과 주재를 어떻게 느끼고 깨달아야 할까?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여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어떻게 체험해야 하는지 모를 때, 네가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는 마음과 소원, 실제가 있다는 것을 어떤 태도로 분명하게 보여야 할까? 우선 너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다음 구할 줄 알아야 하며, 그런 후에는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때, 즉 하나님이 배정한 사람과 일과 사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점차적으로 너에게 나타나기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배치해 놓은 사람과 일, 사물을 통해 하나님의 고심을 살피고 깨닫는 것이다. 그 속에 있는 진리를 깨닫고, 사람이 행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얻고자 하는 성과와 맺고자 하는 열매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배정한 사람과 일, 사물을 받아들이고, 그의 주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또한, 창조주가 어떻게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어떻게 그의 생명과 진리를 공급해 주는지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배정과 주재 아래에서 모든 일은 자연의 섭리대로 흘러간다. 너는 하나님이 주재하고 배치한 모든 것을 따르겠다는 결심을 했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구할 줄 알아야 하며,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에 순종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이자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너희가 많은 노력을 들여 이런 태도와 소양을 갖춰야만 진정한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여섯 번째 관문, 죽음

수많은 번잡한 일들, 좌절과 실망, 기쁨과 슬픔, 좋은 시절과 나쁜 시절, 잊을 수 없는 시간들을 경험하고 계절이 지나고 또 지나는 것을 보며 사람은 미처 알지 못한 채 삶의 중요한 시기를 보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인생이 저물어 가는 시점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시간은 온몸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 이제는 똑바로 서 있을 수도 없고, 검은 머리가 흰색으로 변했으며, 초롱초롱 빛나던 눈은 흐릿해졌다. 부드럽고 탄력 있던 피부는 주름지고 얼룩졌다. 청력이 약해지고, 치아는 흔들리고 빠지며, 반응과 움직임이 느려진다. 이 시점에서 사람은 열정적이었던 젊은 시절과 작별하고 생의 황혼, 노년에 들어선다. 앞으로 남은 것은 한 가지, 삶의 마지막 관문인 죽음이다. 1. 오직 창조주만이 사람의 삶과 죽음을 주관할 수 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전생의 인연으로 시작된 것이라면, 죽음은 전생 인연의 끝인 것이다. 태어나는 것이 금생에서 해야 할 사명의 시작이라면 죽음은 그 사명의 끝인 것이다. 창조주가 사람이 태어날 때 그 상황을 정해 놓았으므로 그의 죽음의 상황 또한 이미 계획되어 있다. 다시 말해, 우연히 태어나거나 예기치 못하게 죽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태어남과 죽음은 모두 그 사람의 전생 및 금생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태어남과 죽음의 상황 모두 창조주가 예정해 놓았다. 이것이 그의 타고난 숙명이자 운명이다. 모두가 다른 상황에서 태어나듯 모두가 다른 상황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수명, 죽음의 방식과 시점이 모두 다른 것이다. 어떤 사람은 튼튼하고 건강하지만 일찍 죽는다. 어떤 이는 몸이 약하고 자주 아프지만 장수하며 편안히 눈을 감는다. 비명횡사하는 사람도 있고, 천수를 다하는 사람도 있다. 타지에서 마지막을 맞는 이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눈을 감는 이도 있다. 하늘에서 죽는 사람도 있고, 지하에서 죽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익사하고 누구는 재난에서 죽는다. 누구는 아침에, 누구는 밤에 죽는다. 누구나 주목받고 태어나 아주 멋진 삶을 살고 명예롭게 죽기를 바라지만 운명을 뛰어넘고, 창조주의 주재에서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사람은 미래를 위해 어떤 계획이든 세울 수 있어도 어떻게 태어나고 죽을지 계획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죽음이 닥치는 것을 피하고 막으려 애쓰지만 알지 못하는 사이 죽음은 조용히 다가온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더 나아가 어디서 죽을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존재는 사람도, 자연계의 어떤 생명체도 아닌 창조주이다. 그의 권능은 유일무이하다. 인류의 삶과 죽음은 자연법칙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주의 권능과 주재로 생긴 결과이다. 2. 창조주의 주재를 모르는 사람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 노년에 접어든 이가 맞이하는 도전은 가족을 부양하거나 인생의 원대한 꿈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삶과 작별할까, 어떻게 죽음을 맞을까, 어떻게 삶에 마침표를 찍을까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사람들이 죽음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도 죽음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사람이 모르는 또 다른 세상이 죽음의 저편에 존재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를 두려워하고, 죽음을 직면해야 함에도 겁을 내며,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애써 외면한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차고,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수수께끼가 되고, 모든 이의 마음에는 걷히지 않는 그늘이 생긴다. 사람은 몸 상태가 악화됨을 느낄 때, 죽음이 다가옴을 감지할 때, 은은한 공포와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낀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외로움과 무력함을 더욱 느끼게 될 때 사람은 스스로 묻게 된다. ‘사람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삶이 이렇게 빨리 끝나는 것인가? 이것이 삶의 마지막 시간인가? 결국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삶은 궁극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가? 명성과 부를 얻기 위한 것인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인가?’ 사람이 이 구체적인 질문에 대해 생각해 봤든 그렇지 않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크든, 마음 깊은 곳에는 이 수수께끼에 깊숙이 파고들려는 욕망과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이 있다. 세상에 대한 그리움과 떠나기 싫은 마음도 섞여 있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들여다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걱정을 너무 많이 한다.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마음 놓을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이것저것 걱정을 한다. 마치 걱정거리가 있으면 죽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지울 수 있기라도 한 듯, 산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 가면 죽음이 가져오는 무력함과 외로움을 피할 수 있기라도 한 듯, 아이들과 사랑하는 사람과 재산을 걱정한다. 사람은 마음속 깊이 어렴풋한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 파란 하늘과 이 세상을 다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이다.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는 것에 익숙해진 외로운 영혼은 낯선 미지의 세계로 혼자 떠나기 싫어한다. 3. 명성과 부를 좇던 삶은 죽음 앞에서 무너진다 본래 가진 것 하나 없던 외로운 영혼이 창조주의 주재와 정해 놓은 운명으로 부모와 가족을 얻고, 인류의 일원이 되고, 삶을 경험하고 세상을 볼 기회가 생겼다. 창조주의 주재를 경험하고, 창조주의 만물 창조가 얼마나 경이로운지 알며, 창조주의 권능을 알고 그 권능 아래에 복종할 기회도 생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이 드문 기회를 제대로 잡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평생의 에너지를 운명과 맞서 싸우는 데에 쓰고, 자기가 가진 모든 시간을 가족을 부양하고 번갈아 가며 부와 지위를 좇는 데에 다 써 버린다. 사람들은 가족, 돈, 명예, 이익과 같은 것들을 소중히 아끼고, 삶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모두가 운명이 기구하다고 불평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음속 저편에 미루어 둔다. 그 일이란 사람은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의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생이 얼마나 되든 명성이나 부만 좇다가 젊음을 보내고 흰 머리와 주름살을 발견한다. 그제서야 명성이나 부도 나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돈이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 없으며, 누구도 생로병사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고, 누구도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삶의 마지막 시간을 마주한 뒤에야 백만장자도, 집안이 대단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며, 모든 사람은 반드시 그의 원래 자리, 즉 가진 것 없는 외로운 영혼으로 되돌아가야 함을 진실로 이해하게 된다. 부모가 있는 사람은 부모가 그의 모든 것이라 믿는다. 재산이 있으면 돈이 삶에서 기댈 수 있는 자본이라 생각한다. 지위가 있으면 그것에 집착하여 목숨이라도 걸려고 한다.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평생을 바쳐 좇은 그러한 것들이 찰나에 지나가는 구름에 불과하여 소유할 수도, 가져갈 수도 없고, 죽음을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외로운 영혼이 돌아가는 길에 함께하거나 위안이 될 수도 없고, 사람을 죽음에서 구원해 줄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세상에서 쌓은 명성이나 부는 일시적인 만족, 잠시의 기쁨과 위로를 주고 마음이 편안한 듯한 착각을 주어 방향을 잃게 한다. 그래서 안식과 위안과 평온을 갈망하던 사람들이 망망대해에서 허우적대다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에 휩쓸리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 즉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왜 사는지, 어디로 가는지 등의 질문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명성이나 부에 꾀여 잘못된 길을 가고, 조종당하여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세월은 눈 깜짝할 새 지나고,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삶의 좋은 시절은 지나간다.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과 조금씩 멀어지고, 가졌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는다. 그제서야 사람은 갓 세상에 태어나 우는 아기처럼 여전히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사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삶이란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 사람이 왜 세상에 왔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또한 내세가 있는지, 하느님이나 보응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죽음이 다가올수록 삶이 진정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고, 마음은 점점 더 공허해지며, 의지할 데가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죽음의 공포는 매일같이 커진다. 사람들이 죽음에 임박해 이런 행동을 보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삶의 기반이 되었던 명성이나 부를 곧 잃게 되기 때문이며,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을 남겨 두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낯선 미지의 세상, 두렵고 알 수 없는 세상,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는 세상과 곧 혼자 대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다 불안감을 느낀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사람마다 처음으로 느끼는 공포와 무기력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야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사람은 어디서 왔으며, 삶의 이유는 무엇이고, 누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며, 누가 인류를 생존하게 하고 인류의 생존을 주재하고 있는가 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진정한 삶의 자산이며, 사람 생존의 근본이다. 어떻게 가족을 부양할지, 어떻게 명성과 부를 좇을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성공할지, 어떻게 더 부자가 될지, 어떻게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고 경쟁해서 남들을 이길지를 배우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익히는 다양한 생존의 기술로 물질적 편안함은 충분히 얻을 수 있지만, 그것들이 마음의 진정한 평안과 위안을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꾸만 방향과 통제력을 잃게 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게 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죽음을 대면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이렇게 해서 삶은 망가진다. 창조주는 모든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고, 모두에게 일생 동안 그의 주재를 체험하고 알도록 기회를 준다. 하지만 사람은 죽음을 마주했을 때, 곧 죽게 되었을 때에야 문득 이를 깨닫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었다! 사람들은 돈과 명성과 부를 좇는 데에 인생을 쓴다. 그리고 그것을 목숨을 건지는 지푸라기로 삼고 유일한 의탁으로 삼는다. 그것만 있으면 영원히 살 수 있고 죽음도 오지 않을 것처럼 꽉 움켜쥔다. 죽을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이 얼마나 멀리 있고 죽음 앞에서 얼마나 힘이 없는지,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스스로가 얼마나 외롭고 무력한지를 깨닫게 된다. 또 사람들은 돈이나 명성과 부로 목숨을 교환할 수 없다는 것, 아무리 부자여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똑같이 가난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없고, 명성이나 부가 죽음을 면케 하지 못하며, 둘 중 어느 것도 단 1분 1초를 더 살게 하지 못함을 깨닫게 된다. 이것을 깨달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강렬하게 살고 싶어 하고, 죽음이 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스스로 지배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며, 죽고 사는 것의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그 어떤 사람도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4. 창조주의 권세에 복종하여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다 한 사람의 탄생은 외로운 영혼이 이 세상에 와서 인생을 경험하는 출발점이자 창조주의 배치에 따라 창조주의 권능을 경험하는 시발점이 된다. 이는 당연히 한 사람 또는 한 영혼이 창조주의 주재와 권능을 인지하고 창조주의 권능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사람은 평생 동안 창조주가 배치한 운명의 법칙 속에서 살아간다. 양심과 이성이 있는 사람이 수십 년의 삶을 살아가면서 창조주의 주재를 인정하고 창조주의 권능을 인지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수십 년의 인생 경험을 통해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이 정한 것임을 깨닫고 삶의 의미를 느끼거나 정리하는 것은 굉장히 쉬운 일이다. 그러한 삶의 경험을 인정함과 동시에 사람의 생명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마음이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을 진정한 삶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삶의 목표와 사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닫게 된다. 또한 창조주를 경배하지 않거나 창조주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죽음에 직면할 때, 즉 영혼이 다시 창조주와 마주할 때 그 영혼은 더없는 공포와 불안에 떨게 될 것임을 점차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 사람의 생명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하고 운명이 누구에 의해 좌우되는지도 깨닫지 못한다면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밖에 없다. 수십 년 동안 삶을 영위하면서 창조주의 주재를 깨달은 사람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순수하게 받아들인 사람이며, 삶의 이유를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또 창조주의 주재를 제대로 이해하고 경험한 사람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는 창조주의 권능 아래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은 창조주가 사람을 만든 의미를 안다. 또 창조주를 경배해야 하고, 사람의 모든 것이 창조주로부터 비롯되었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안다. 이런 사람은, 삶은 창조주가 마련한 것이고, 죽음은 창조주의 주재에 있으며, 삶과 죽음 모두 창조주의 권능으로 정해져 있음을 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을 때 자연스레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되고, 몸 이외의 모든 것을 편안히 내려놓게 된다. 또한, 무조건적으로 반항하거나 극도의 두려움에 떨지 않고 곧 닥칠 모든 것을 흔쾌히 수용하고, 그것에 순종하며, 창조주가 마련한 삶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하게 된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창조주의 주재를 경험하고 창조주의 권능을 알아 가는 기회로 삼고, 또한 창조된 사람으로서의 본분을 이행하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는다면, 분명히 올바른 인생관을 가지게 될 것이고, 창조주의 축복과 인도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의 빛 속에서 행하고, 창조주의 주재를 깨달으며, 창조주의 권세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또 창조주의 경이로운 행사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고 창조주의 권능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은 분명 창조주의 사랑을 받고 창조주에게 열납될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삶의 마지막 관문을 흔쾌히 맞이할 수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욥이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삶의 마지막 관문을 흔쾌히 맞이하는 태도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순조롭게 인생의 길을 갔고 그의 삶의 사명을 완수하였으며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갔다. 5. 욥은 평생 동안 추구하고 얻은 것이 있었기에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 성경은 욥에 대해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7)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욥은 어떠한 미련이나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모두가 알다시피, 욥은 살아생전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다. 그의 의로운 행위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후세에 기려졌다. 그는 인류 중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며 땅에서 하나님께 의인이라고 불렸다. 또 하나님이 준 시련을 받기도 했고 사탄의 시험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부여한 ‘의인’이란 호칭이 무색하지 않게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섰다. 하나님의 시련을 받는 수십 년 동안 그는 이전보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았으며, 더 성실하고 담담하게 살았다. 그는 의로운 행위로 인해 하나님이 준 시련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욥은 시련을 받은 후 수십 년 동안 삶의 가치와 창조주의 주재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창조주가 복을 베풀어 주는 것과 거두어 가는 것에 대해 더 정확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욥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이전보다 더 축복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욥이 창조주의 주재를 깨닫고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욥은 나이를 먹고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에도 재산에 대해 추호도 걱정하지 않았고 다른 근심거리도 없었다. 어떠한 미련도 없었고 당연히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갔기에 자신의 최후도 걱정하지 않았다. 현대인 중에 죽음을 앞두고 욥처럼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왜 겉보기에 쉬워 보이는데도 이런 자세를 갖춘 사람이 없는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다. 욥이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인정하며,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기를 추구하는 주관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인생의 중요한 몇 개의 관문을 넘겼고, 자신의 노년을 보냈으며, 인생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했다. 욥이 살면서 어떤 일을 겪었든 그의 추구와 인생 목표는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 행복한 것이었다. 그가 행복할 수 있었던 것은 창조주의 축복이나 칭찬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추구와 인생 목표이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창조주의 주재를 조금씩 깨닫고 실제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창조주의 주재를 경험함과 동시에 그의 경이로운 행사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그를 알아 가면서 느끼는 따뜻함과 잊지 못할 경험, 마음 깊이 새겨진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주의 뜻을 깨닫는 과정에서 위안과 기쁨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창조주의 위대함, 경이로움, 사랑스러움, 신실함을 경험하여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욥이 아무런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평생 동안 추구하고 얻은 것이 있었기에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창조주가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는 것에도 담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걱정 없이 성결하게 창조주와 마주할 수 있었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욥이 소유했던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너희들은 그런 행복을 소유할 조건을 갖추었느냐? 지금의 사람들이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욥처럼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의 사람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죽음을 앞두고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공포에 질려 덜덜 떠는 사람도 있다. 기절하는 사람,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는 사람, 심지어 대성통곡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행동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에만 갑작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당혹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마음 깊은 곳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대해 제대로 느끼거나 깨닫지 못하고 진심으로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이 모든 것을 계획하거나 통제하려 들고, 자기 스스로 운명과 생사를 결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6.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여야 그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거나 이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하면 운명과 죽음에 대한 인식도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사람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주재하며, 사람이 그의 주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숨을 거두기 전 끊임없이 유언을 남기고 걱정과 미련을 남긴다. 마음의 짐이 몹시 무겁고, 원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삶과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그 과정을 건너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 고통 없이 이 세상을 떠나고, 아쉬움과 근심 없이 삶의 마지막 관문을 맞이하고 싶다면, 그 유일한 방법은 미련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미련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창조주의 주재와 권능을 깨닫고, 창조주의 주재와 권능 아래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류의 다툼과 죄악, 사탄의 올무에서 멀어질 수 있다. 욥처럼 창조주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살 수 있고, 자유롭고 가치와 의미가 있는 정정당당한 삶을 살 수 있다. 욥처럼 창조주의 시련과 박탈, 창조주의 섭리에 순종할 수 있다. 욥처럼 평생 동안 창조주를 경배하여 창조주의 칭찬을 받을 수 있으며, 욥처럼 창조주가 친히 발한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의 나타남을 볼 수 있다. 욥처럼 행복한 삶을 살다 고통이나 근심과 미련 없이 행복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으며, 욥처럼 빛 속에서 지내며 빛 속에서 삶의 모든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 빛 속에서 순조롭게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즉,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주재를 경험하고 깨달아 빛 속에서 세상을 떠날 수 있다. 그리하여 창조주의 인정을 받는 피조물로서 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관문, 자녀

사람은 결혼 후 자녀를 양육하게 된다. 어떤 자녀를 몇 명 둘지는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운명과 창조주의 배치에 의해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거쳐야 할 다섯 번째 관문이다. 한 사람의 출생이 자녀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라면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두 가지 역할이 바뀌면서 인생의 각 시기를 경험하게 되고, 다양한 인생 경험을 하게 된다. 다양한 인생 경험을 하면서 창조주의 변함없는 주재를 체험하게 되고, 또한 창조주가 정한 운명에서 벗어나거나 이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1. 자녀의 일은 사람이 결정할 수 없다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출생, 성장, 결혼에 불만을 가지기 마련이다. 자신의 가정이나 외모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모를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성장 환경에 큰 불만을 터뜨리고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결혼만큼 불만스러운 것은 없다. 출생, 성장, 결혼에 있어 여의찮은 일이 얼마나 많았든 경험자는 출생 시점과 장소, 외모, 부모, 배우자를 사람이 선택할 수 없고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다. 사람은 자녀를 양육할 때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모든 꿈을 자녀를 통해 이루고 남은 미련을 해소하려고 한다. 이 때문에 자녀에게 터무니없는 욕심을 가지게 된다. 딸은 예쁘고 아들은 잘생기기를 바란다. 딸은 예술적인 재능을 두루 갖추고, 아들은 공부와 운동에 능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지길 바란다. 딸은 부드럽고 현명하며 교양과 지성을 겸비하기를 바라고, 아들은 똑똑하고 유능하며 이해심이 많기를 바란다. 딸과 아들 모두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를 살뜰히 챙기는, 모두에게 사랑과 칭찬을 받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이처럼 인생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가짐과 동시에 더 많은 욕심을 부리게 된다. 변변찮은 능력 탓에 이번 생에서는 더 이상 성공의 기회와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운명을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자신이 못 이룬 꿈과 희망을 자녀에게 맡기고 대신 이뤄 주기를 바란다. 자녀가 가문을 빛내거나 높은 위치에 오르기를 바라고, 큰 부자나 유명인이 되기를 바란다. 자녀가 출세만 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여긴다. 사람의 계획과 생각이 아무리 완벽하다고 한들 부모가 자녀의 수, 그리고 그 자녀의 외모나 능력 등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 더군다나 자녀의 운명은 부모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자신의 운명도 어쩌지 못하면서 자녀의 운명을 바꾸려 들고, 자신의 운명에서 한 발짝도 옴짝달싹 못 하면서 자녀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것은 얼마나 무모하냐?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으냐? 사람은 자녀를 위해 온갖 심혈을 기울이지만 어떤 자녀를 몇 명 두게 될지는 계획이나 바람처럼 되지 않는다. 즉, 무일푼임에도 많은 자녀를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부자임에도 슬하에 자식이 없는 사람도 있다. 딸이나 아들을 간절히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자녀 덕분에 복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화를 입는 사람도 있다. 부모는 똑똑한데 자녀는 어리석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부지런한 부모와는 달리 자녀가 게으른 경우도 있다. 정직하고 선한 부모가 간사하고 악한 자녀를 두는가 하면 건강한 부모가 장애아를 두는 경우도 있다. 평범한 부모가 비범한 아이를 두는 경우도 있고,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낮지만 자녀가 대성하는 경우도 있다. 2. 다음 세대를 키운 후 사람은 운명을 새로이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서른 즈음에 결혼을 하지만, 삶의 그 지점에서 운명에 대한 이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기 시작하고 그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세대 역시 이전 세대의 삶과 모든 경험들을 되풀이하는 것을 목격한다. 아이들의 삶과 경험 속에 비치는 자신의 과거를 보며, 그들은 자신의 삶이 꼭 그랬듯 다음 세대가 걸어가는 길 또한 계획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러한 사실과 마주하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의 운명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임을 인정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소망을 차츰 내려놓게 된다. 욕망의 불길도 조금씩 꺼진다. 이 시기는 삶의 중요한 몇 고비를 이미 지나 인생을 새롭게 이해하고, 새로운 삶의 자세를 갖게 되는 시기이다. 그 나이에 사람이 미래에 얼마나 큰 기대를 걸 수 있을까? 아직도 백마 탄 왕자를 꿈꾸는 50세 여성이 있을까? 50세 남성이 아직도 백설 공주를 찾고 있을까? 아직도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 되길 바라는 중년 여성이 있을까? 대부분의 나이 든 남성들이 사업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가 과연 젊은 사람들과 같을까? 한마디로 말해,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정도 나이가 들면 결혼, 가족, 아이들에 대해 비교적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 나이가 되면 거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운명에 도전하려는 욕구도 없다. 경험상 그 나이가 되면 사람은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자세를 취하게 된다. ‘사람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해. 자식에게는 자식의 운명이 따로 있지.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하는 거야.’ 진리를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세상의 갖은 우여곡절과 좌절과 고난을 겪은 많은 사람들은 종종 “다 운명이야!”라는 한 마디로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총결한다. 이 표현은 일생 운명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결론과 깨달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사람의 무력함을 보여 주는데, 투철하고 정확하다 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창조주의 주재를 인식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고, 이를 깨달았다고 해서 창조주의 권능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3. 운명을 믿는다고 해서 창조주의 주재를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긴 세월 하나님을 따른 너희는 운명에 대해 세상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너희는 창조주의 예정과 창조주의 주재를 진실로 알게 되었느냐? 어떤 사람들은 “다 운명이야.”라는 표현을 깊이 이해하고 마음으로 느끼지만 하나님의 주재를 전혀 믿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려는 의지가 없다. 바다에서 어쩔 수 없이 파도에 떠밀려 가야 하는 사람처럼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고, 운명이라 생각하며 단념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사람의 운명이 하나님의 주재 안에 있음을 인정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주재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을 알아 가는 삶,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는 삶, 더 이상 운명에 맞서지 않는 삶,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 다시 말해,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창조주의 주재에 순종하는 것과는 다르다. 운명을 믿는 것은 창조주의 주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아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믿음은 그저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표면 현상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는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가 만물의 운명을 주재하는 근원임을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며, 인류의 운명을 다스리는 그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과는 더더욱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이 운명을 믿고 이를 마음 깊이 느낌에도 인류의 운명에 대한 창조주의 주재를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비극일 것이며, 헛되고 공허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창조주의 권세 아래에 돌아오지 못하고, 창조주의 인정을 받는 참다운 인류가 되지 못한다. 진실로 창조주의 주재를 알고 경험한 사람은 소극적이거나 무력하지 않고 적극적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의 운명이 정해져 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삶과 운명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게 된다. 즉, 사람의 일생은 창조주의 주재 아래에 있다는 것이다. 살아온 길을 뒤돌아볼 때, 그 여정을 차례차례 떠올려 볼 때, 사람은 힘들었든 평탄했든 걸어온 걸음마다 하나님이 배치하고 인도해 왔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세심한 계획과 배치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늘날까지 오게 되어 창조주의 주재와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어떤 사람이 운명에 대해 수동적 태도를 가진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 그를 위해 예비한 모든 것에 대항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순종의 태도가 없다는 증거이다. 어떤 사람이 사람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에 능동적 태도를 가진다면, 삶을 되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주재를 진실로 이해하게 될 때 하나님이 예비한 모든 것에 진정으로 순종하고 싶어질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 더 이상 거역하지 않고 더욱 단호한 의지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그의 운명을 다스리게 할 것이다. 이는 운명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알지 못한 채 제 뜻대로 안개 속을 비틀거리며 나아가는 사람에게 삶은 너무나 어렵고 가슴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를 알게 되었을 때, 총명한 사람들은 그 주재에 대해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택한다. ‘자신의 두 손으로 좋은 삶을 일구기 위해 애썼던’ 고통스러운 날들, 운명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의 방식으로 소위 삶의 목표를 추구하던 것에 안녕을 고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때, 하나님의 주재를 분명하게 알 수 없을 때, 그 하루하루는 의미도 가치도 없으며 아주 고통스러울 것이다. 어디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사람의 삶의 방식과 추구 목표는 끝없는 슬픔과 벗어날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어 지나온 길을 돌아볼 수조차 없게 한다. 오로지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고, 그의 섭리에 순종하고, 참된 삶을 추구할 때, 사람은 차츰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풀려나고 삶의 공허함을 떨쳐 버릴 수 있다. 4. 창조주의 주재에 순종해야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주재를 알지 못하는 탓에 늘 반항심과 패역한 태도로 운명과 마주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과 주재, 그리고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 그들이 처한 상황과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헛된 바람일 뿐, 언제나 좌절을 맛보게 된다. 영혼 깊은 곳의 몸부림은 고통스러운 것이며, 그 고통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생명은 그렇게 낭비되고 있다. 그 고통의 원인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주재 탓이냐, 아니면 사람의 운명이 나쁜 탓이냐? 분명히 둘 다 틀렸다. 한마디로 말해, 사람들이 선택한 길,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 근본적인 원인이다. 이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인정할 때, 하나님이 너를 위해 주재하고 배치한 모든 것이 큰 은혜와 보호임을 알게 될 때, 고통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며 자유롭게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에서 벗어나 예전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창조주가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는 것이 실제로 어떤 가치와 의미를 갖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창조주의 주재에 대해 진정으로 인정하지도, 순종하지도 못한다. 창조주의 섭리를 구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창조주가 사람의 운명과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고 창조주의 권세에 진정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운명과 창조주의 권능에 극력 대항하여 초래되는 고통을 떨쳐 버리기 또한 쉽지 않다. 물론 참된 자유를 얻기 어렵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이 내적 상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기존의 삶의 방식과 인생 목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 생활 방식과 인생관, 추구, 소망과 꿈을 정리하고 분석한 다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요구에 대조해 자신의 생존 방식과 인생관 등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 있는지, 하나님의 요구에 맞는 것이 있는지, 올바른 인생의 가치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진리를 점점 더 깨닫는 삶을 살고 인성 있게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게 하는 것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인류가 추구하는 다양한 삶의 목표와 방식을 반복적으로 살피고 자세히 분석해 보면, 창조주가 인류를 창조할 당시의 뜻에 들어맞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창조주의 주재와 보살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고, 사람을 타락시키고 지옥으로 이끄는 함정임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기존의 인생관을 버리고 여러 함정을 멀리하며, 하나님께 삶을 맡겨 배치하고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에 순종하기만을 구하며, 자신의 선택이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는 쉽게 들릴지 몰라도 어려운 일이다.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기꺼이 협력하고 어떤 이는 꺼린다. 꺼리는 사람들에게는 협력하려는 생각과 의지가 없다. 하나님의 주재를 알고,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다스리고 배치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들은 벗어나려 하고,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하기를 원치 않는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배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두 손으로 운명을 바꾸고 싶어 하고, 자신의 힘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하며, 하나님의 권능과 주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보려고 한다. 사람에게 슬픔이 생기는 것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며 명예와 이익을 좇기 때문도, 운명에 맞서 안개를 뚫고 힘겹게 나아가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존재를 알고 나서도,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고집하고 수렁 밖으로 발을 빼지 못하며, 강퍅하고 끈질기게 실수를 계속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전히 진창 속에서 허우적대고 완고하게 창조주의 주재와 겨루고 끝까지 대항하면서 전혀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부서지고 피 흘리며 쓰러질 때에야 포기하고 되돌아선다. 이것이 사람의 슬픔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순종을 선택한 자는 현명하고, 도망치려는 자는 우매하고 완고하다고 하는 것이다.

네 번째 관문, 결혼

사람이 나이를 먹고 성숙해지면 부모와 점점 소원해진다. 출생과 성장 배경도 그 의미가 퇴색된다. 그 대신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면서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추구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부모가 아닌, 삶을 같이할 수 있는 반려자를 ― 운명이 맞닿아 있는 배우자를 ― 필요로 하게 된다. 이렇게 독립 후 맞닥뜨리게 되는 인생의 첫 번째 과제가 바로 결혼, 즉 사람이 거쳐야 할 네 번째 관문이다. 1. 결혼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은 인륜지대사로, 각종 책임을 진정으로 짊어지고 각종 사명을 점차 완수해 가게 되는 출발점이 된다. 결혼 전에는 결혼에 대한 장밋빛 환상을 가지기 마련이다. 여성은 백마 탄 왕자를, 남성은 백설 공주를 배우자로 원한다. 이는 사람마다 결혼에 대해 각기 다른 조건과 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악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결혼을 곡해하고, 결혼의 조건을 더 까다롭게 저울질한다. 다양한 이유로 결혼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왜곡된 시각으로 결혼을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기혼자들은 결혼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어떠하든 결혼이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지만 누가 자신의 결혼 상대자가 될지는 알지 못한다. 결혼에 대해 저마다의 의견과 생각을 가질 수는 있어도 자신의 배우자를 예상하거나 결정할 수는 없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면 구애를 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이 너에게 관심이 있을지, 너의 반려자가 될 수 있을지를 개인이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와 삶을 함께할 배우자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반대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네 삶의 일부로 들어오고 운명의 가장 중요한 부분, 즉 네 운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배우자가 되기도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결혼의 형태는 천태만상이다. 만족스러운 결혼 생활을 즐기는 부부가 있는가 하면 결혼에 불만을 가진 부부도 있다. 동과 서를 넘나드는 결혼이 있는가 하면 남과 북을 아우르는 결혼도 있다. 천생연분인 부부가 있고 비슷한 집안의 상대와 결혼한 부부도 있다. 행복한 결혼이 있는가 하면 불행한 결혼도 있다. 동경과 질시의 대상이 되는 결혼이 있는가 하면 몰이해와 경멸을 자아내는 결혼도 있다. 기쁨으로 가득한 결혼이 있는가 하면 눈물이 끊이지 않는 절망적인 결혼도 있다. 결혼 생활에 임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제각각이다. 결혼에 충성하며 죽을 때까지 배우자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결혼 생활을 아끼고 소중히 지키는 사람도 있다. 반면, 결혼을 체념하거나 이해할 수 없어 하는 사람이 있고, 결혼을 저버리고 적대시하는 사람도 있다. 결혼 자체가 가져다주는 것이 행복이든 고통이든, 결혼을 통해 각 사람이 맡게 되는 창조주가 정해 놓은 사명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이 반드시 완수해야 할 것이다. 결혼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은 창조주가 정해 놓은 것이기에 바뀌지 않는다. 2. 결혼은 두 사람의 운명에서 비롯된다 결혼은 삶의 중요한 관문이다. 결혼은 운명에서 비롯되고, 운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결혼은 사람의 의지와 취향에 기반하지 않으며, 외부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롯이 두 사람의 운명, 창조주가 결혼을 할 두 사람을 위해 배치하고 마련한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 결혼은 자손의 번영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결혼은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필요한 일종의 의식에 불과하다. 사람이 결혼을 통해 수행하는 역할은 자녀 양육뿐만 아니라 결혼 생활을 유지하면서 완수하게 되는 역할과 사명을 포함한다. 한 사람의 출생이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에 영향을 미치듯이 결혼 역시 주변의 사람과 일, 사물에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변화를 초래한다. 사람은 독립 후 인생 여정에 오른다. 인생 여정에서 내딛는 모든 발걸음은 결혼과 관계된 사람과 일, 사물로 이어진다. 그와 동시에 결혼 상대방도 그런 사람과 일, 사물을 향해 다가간다. 창조주의 주재로 아무런 관계가 없던 두 사람이 같은 운명에 의해 결혼이란 울타리를 만들고 기적적으로 한 가족이 된다. ‘한배를 탄 공동 운명체’가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결혼 후 한 사람의 인생 여정은 배우자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배우자와 연관되며, 그 배우자의 인생 여정 역시 자기 짝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 운명과 연관된다. 즉, 운명이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어 삶의 사명이나 역할을 혼자만의 힘으로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출생은 거대한 인연의 끈에 맞닿아 있고, 한 사람의 성장도 복잡한 인연의 끈에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결혼 역시 거대하고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유지된다. 결혼은 인간관계로 연결된 모든 사람과 관련이 있으며, 그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 결혼은 태어난 가정, 성장 배경, 외모, 나이, 자질과 재능 등의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는 두 사람의 공동 사명과 관련된 운명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결혼은 창조주가 주관하고 계획한 사람의 운명에 의해 비롯된다.

세 번째 관문, 독립

모든 사람은 성장 과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성숙해진다. 다음으로 할 일은 성장 단계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부모에게서 완전히 독립하는 것이다. 성인으로서 독립적으로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고 성인으로서 직면해야 할 모든 사람과 일, 사물을 마주하며 자신의 운명에 나타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살면서 거쳐야 할 세 번째 관문이다. 1. 사람은 독립 이후 어렴풋이 창조주의 주재를 체험한다 한 사람의 출생과 성장이 그 인생 여정의 준비 기간이자 운명의 기반이라면, 독립은 운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출생과 성장이 운명을 위해 축적한 재산이라면, 독립은 그 재산이 줄어들거나 늘어나기 시작하는 분기점이다. 부모의 품을 떠나 독립할 때 어떤 사회 환경에서 어떤 일이나 사업을 하게 될지는 모두 운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이는 부모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어떤 사람은 대학에 진학해서 좋은 전공을 선택하고, 졸업 후 만족스러운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인생 여정에서 첫발을 순조롭게 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기술을 가졌어도 사업을 일으키기는커녕 자기에게 맞는 일이나 자신이 속할 곳을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첫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실패를 경험하고 앞날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경우이다. 성공과는 연이 없는 운명인 것처럼, 힘들게 공부했지만 대학교 문턱을 밟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의 첫 희망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 경우, 운명이 변수로 가득 차 있음을 처음 실감하고, 앞길이 순탄할지 험난할지 두려움과 기대를 동시에 갖게 된다.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아도 책을 써서 이름을 날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식 없이도 창업을 통해 수익을 내고 밥벌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기로에서 과연 사람은 스스로 방향을 정할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의 바람과 결정에 따른 선택이 가능한 것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적게 일하고 많이 벌길 원하고, 바람과 햇빛을 피할 수 있는 편안한 곳에서 살면서 그럴싸한 옷을 입고 싶어 한다. 또한 남보다 성공해서 가문을 빛내고 싶어 한다. 사람의 소망은 이렇게 ‘완벽’하다. 그러나 인생의 여정에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운명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된다. 또한, 자신의 미래를 대담하게 계획하거나 마음껏 꿈을 키울 수는 있어도 꿈을 실현할 능력과 권력이 없을뿐더러 미래를 결정할 능력이 없음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된다. 사람이 직면한 현실은 언제나 꿈과 괴리가 있고 늘 생각만큼 만족스럽지 않다. 사람은 그런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 심지어 자신의 직업, 앞날을 위해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고, 운명을 바꾸기 위해 노력과 희생을 아끼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해서 자신의 꿈과 희망을 이룰 수 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영원히 운명을 바꿀 수는 없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자신의 숙명을 거스를 수는 없다. 능력, 지능,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 앞에서 사람은 나이, 우열, 귀천을 구분할 수 없는 동등한 존재이다. 사람이 평생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지, 얼마나 많은 부를 가질지는 부모에 의해 좌우되거나 재능, 노력, 욕심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는 창조주가 배치한 운명에 달려 있다. 2. 사람은 부모의 품을 떠난 후 인생이란 큰 무대에 올라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사람이 성숙해지면 부모의 품을 떠나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은 이 시점에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불확실했던 현세의 사명도 이 시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형식적으로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만, 현생에서 수행할 역할과 사명은 부모와 아무 관계가 없으므로 부모와 유지했던 친밀한 관계는 독립 후 점점 단절된다. 육적인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무의식적으로 부모를 의존한다. 그러나 성장기를 벗어나면 객관적으로 모든 것이 부모와 완전히 상관없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독립적으로 해내야 한다. 부모는 한 사람의 삶에서 출산과 부양의 책임을 지고,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형식적으로 제공할 뿐이다. 모든 사람의 운명은 창조주가 배치한 운명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미래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으며, 그 누구도 좌지우지할 수 없다. 부모조차 자식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독립적이고 각자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의 운명을 막을 수도 없고, 현생에서 맡은 역할에 힘을 보탤 수도 없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고 어떤 환경에서 성장할지, 이는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 그것이 운명을 결정할 수 없고 어떤 운명 속에서 사명을 완수하게 될지도 결정할 수 없다. 따라서 부모는 한 사람이 현생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없고, 가족들 역시 그 사람이 현생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완수하게 될지, 어떤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지는 현생의 운명에 의해 좌우된다. 즉, 창조주의 뜻으로 정해진 모든 사람의 사명은 객관적인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성장 환경에서 성숙해지고, 인생 여정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며, 창조주가 계획해 놓은 운명을 조금씩 실현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삶에서 역할을 짊어지고, 창조주의 정한 운명과 주재에 따라 피조물로서의 책임을 수행한다.

두 번째 관문, 성장

한 사람이 어떤 가정 환경에서 어떤 가정 교육을 받는지는 그 사람이 태어난 가정에 의해 좌우되며, 이는 성장 배경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일생에서 두 번째로 거치게 되는 중요한 관문이다. 이 관문 역시 사람이 선택할 수 없으며 이미 운명으로 정해져 있다.

첫 번째 관문, 탄생

어디에서 또는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는지, 어떤 성별과 외모로 태어나는지, 언제 태어나는지, 이것은 모든 사람이 삶에서 거쳐야 할 첫 번째 관문과 관련된 몇 가지 내용이다. 첫 번째 관문은 창조주가 운명으로 정해 놓은 것으로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외부 환경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 인위적인 요인은 창조주가 운명을 배치한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한 사람의 탄생은 창조주가 그 사람의 운명에 대한 첫 번째 단계를 완성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은 창조주가 운명으로 정해 놓은 것이므로 사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앞으로의 운명과 상관없이 사람이 어떤 배경에서 태어날지는 이미 정해져 있다. 따라서 출생 배경은 삶의 운명에 의해 좌우되지 않으며, 창조주가 삶의 운명에 행사하는 주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1.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창조주의 배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첫 번째 관문과 관련된 출생지, 태어날 가정, 성별, 외모, 출생 시간 중에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느냐?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시점에, 어떤 곳이나 어떤 가정에서, 어떤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다. 얼떨결에 한 가정의 일원, 한 가정의 자녀가 된다. 삶의 첫 번째 관문에서 사람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창조주의 배치하에 정해진 환경에서 태어난다. 태어날 가정, 성별, 외모뿐만 아니라 사람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출생 시간 역시 정해져 있다. 이 중요한 관문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출생과 관련해서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새로운 생명이 이 세상에 올 때 창조주의 예정과 인도가 없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에서 머물러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고, 가족, 귀속, 진정한 가정도 없게 될 것이다. 창조주의 세심한 배치하에 머무를 곳을 찾고 부모, 귀속, 가족을 얻어 인생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창조주의 배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새로운 생명이 가지게 될 모든 것은 창조주가 부여하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표류체에서 조금씩 피와 살이 있고 모양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어진다. 그 생명은 사고를 하고 숨을 쉴 수 있다. 따뜻함과 냉정함을 느끼고 물질세계의 여느 피조물과 다를 바 없이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또한, 창조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세상만사를 경험하게 된다. 창조주가 한 사람의 탄생을 배치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사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사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주로부터 선사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또 다른 형태로 창조주로부터 필요한 것을 공급받고 그의 주재 아래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사람의 출생 배경이 각양각색인 이유 다시 태어나면 명문가에서 태어나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많다. 여성의 경우, 공주 같은 외모로 모두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 한다. 남성의 경우, 먹고 살 걱정 없이 떵떵거리며 사는 왕자를 꿈꾼다. 이렇게 원하는 출생 배경에 대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시에 태어난 가정부터 외모, 성별, 심지어 출생 시간까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것에 큰 불만을 느낀다. 그런데 사람은 왜 이런 가정에 태어났는지, 왜 이런 외모를 타고났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어디에서 태어나든, 어떤 외모로 태어나든, 사람은 창조주의 경영을 위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고 정해진 사명을 완수하는 이 근본 취지는 영원히 바뀔 수 없다. 창조주의 눈으로 보면 사람이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떤 성별로 태어나고, 어떤 외모를 가지는지는 잠시 스쳐 가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런 것은 창조주가 인류 전체와 삶의 각 시기를 경영하기 위해 사용하는 작은 기호나 상징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진정한 종착지와 결말은 한 시기의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매번 사명과 창조주의 경륜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창조주가 내리는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이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탄생은 전생, 금생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이번 윤회의 끝이라면 한 사람의 탄생은 당연히 새로운 윤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간 윤회가 전생이라면 새로운 윤회는 금생으로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탄생이 전생, 금생과 관계가 있다면 그 사람이 태어난 곳, 가정, 성별, 외모 등 모든 요인 역시 전생, 금생과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사람의 출생과 관련된 모든 요인이 전생의 영향을 받을 뿐만 아니라 금생의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출생 배경이 각양각색인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명문가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남쪽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북쪽에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사막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오아시스에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환호, 웃음, 축하를 동반하는 탄생이 있는가 하면 슬픔, 불운, 걱정을 유발하는 탄생도 있다. 태어날 때부터 집안의 복덩이로 불리는 사람도 있고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사람도 있다. 외모가 반듯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목구비가 조화롭지 않은 사람도 있다. 외모가 준수한 사람도 있고 부족한 사람도 있다. 한밤중인 자시에 태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오시에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사람마다 제각각인 출생 배경은 창조주가 배치한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에 따라 금생의 운명, 금생에서의 다양한 역할과 사명도 결정된다. 이 모든 것이 창조주의 주재와 예정하에 이루어지며, 아무도 그가 정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의 출생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인류의 운명, 만물의 운명은 창조주의 주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너희는 이미 성인이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중년이나 노년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 전부터 믿기까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해서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의 사역을 체험하기까지 그의 주재에 대해 얼마나 깨달았느냐?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느냐? 삶을 살면서 범사에서 다 소원 성취되었느냐? 지금까지 몇십 년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일이 뜻대로 풀렸느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났느냐? 얼마나 많은 일에 기뻐했느냐? 얼마나 많은 일의 결과, 다시 말하면 타이밍, 하늘의 뜻을 기다리고 있느냐? 또 얼마나 많은 일에 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손을 놓고 있느냐? 모든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기대가 가득하다. 자신의 삶이 뜻대로 풀리고,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살면서 출세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난하고 미천한 삶, 우여곡절로 점철된 삶, 불행이 끊이지 않는 삶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에 경험한 모든 일에 대해 어리둥절하다면,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거나 이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동물마냥 무지몽매하게 살거나 삶에 대해 반성을 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운명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사람이 왜 사는지 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운명에 대해 어떠한 깨달음도 얻지 못하고 인생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영혼이 없는 송장과 같으며 짐승과 진배없다. 사람은 만물 속에서 이 세상이 선사한 온갖 물질을 누리고, 물질적인 세계가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경험하는 것, 사람의 마음과 영이 경험하거나 체험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과 상관없고 그 어떤 물질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 깊이 깨달은 것이고,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은 운명 또는 인생에 대한 이해나 느낌으로 이어진다. 또한, 은연중에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배치하고 지배하는 주재자가 있음을 자주 느끼게 한다. 사람은 그 모든 것을 통해 자신에게 예비된 운명, 창조주가 준비한 앞날의 계획, 창조주가 주재하는 운명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사람이 운명에 대해 무엇을 깨닫고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든 간에 아무도 이 사실을 바꿀 수 없다. 사람이 매일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지, 어떤 사람이나 일을 맞닥뜨릴지,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예상할 수 있을까? 사람은 이 모든 것이 일어날지 아닐지를 예상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이 뜻대로 진전되도록 손을 쓸 수도 없다. 사람은 살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생활상의 소소한 일’이 일어나거나 흘러가는 방식 또는 법칙은 인류에게 어떤 일이든 우연이란 없으며 그것이 일어나는 과정과 필연성은 사람의 의지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창조주가 인류에게 전하고자 하는 훈계와 인류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또한, 그 일들은 운명을 자신의 손으로 결정하고자 하는 인류의 야심과 욕망에 상반된다. 이는 반복적으로 얼굴을 가격하는 것처럼 주의를 환기시키고 도대체 누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주관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인류는 또한 야심과 욕망이 끊임없이 무너지고 깨지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예비된 운명, 현실, 하늘의 뜻, 창조주의 주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생활상의 소소한 일’부터 삶의 운명까지 창조주의 주재와 배치를 나타내지 않는 것이란 없다. 또한, 그것들은 ‘창조주의 권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메시지와 ‘창조주의 권능은 지고지상하다’는 불변의 진리를 전달한다. 인류의 운명과 만물의 운명은 창조주의 주재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그의 배치와 맞닿아 있다. 한마디로 인류의 운명과 만물의 운명은 창조주의 권능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다. 인류는 만물의 법칙을 통해 창조주의 지배와 주재를 경험하고, 만물의 생존 법칙을 통해 창조주의 다스림을 목격하게 된다. 만물의 숙명을 통해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하고 주관하는 방식을 깨닫게 된다. 또한, 인류와 만물의 생사윤회를 통해 창조주가 모든 만물 생령을 지배하고 주관한다는 것을 진정 느끼게 된다. 그리고 창조주의 지배와 계획이 세상의 모든 법률, 규정, 제도뿐만 아니라 그 어떤 힘과 세력도 넘어선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따라서 인류는 어떠한 피조물도 창조주의 주재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세력도 창조주의 명령을 따르는 만사만물에 해를 끼치거나 이를 바꿀 수 없다. 인류와 만물은 하나님이 정한 규율에 따라 살아가면서 한 세대 또 한 세대 번성해 왔다. 이것이 창조주의 권능이 실제적으로 구현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느냐? 인류는 객관적인 법칙을 통해 창조주의 주재, 만사만물에 대한 그의 예정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하는 원칙을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느냐? 창조주가 주재하고 배치하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 창조주가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믿기에 그가 인류의 운명도 주재한다는 사실을 진정 믿고 인정하는 사람이 있겠느냐? 사람의 운명이 창조주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진정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창조주가 인류의 운명을 주재하고 주관한다는 사실을 마주하여, 인류는 창조주의 주재를 어떤 태도로 바라보아야 할지, 이는 지금 이 사실에 직면한 모든 사람이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