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 Reading Made Easy

욥의 삶의 가치

시련을 겪은 후의 욥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욥 42:7~9)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 42:10)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 하게 하시니 그가 양 일만 사천과 약대 육천과 소 일천 겨리와 암나귀 일천을 두었고”(욥 42:12)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7)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를 귀하게 여기고 우매한 자를 천하게 여긴다 욥기 42장 7절에서 9절에 하나님은 욥을 그의 종이라고 언급했다. 욥에게 사용했던 ‘종’이라는 이 호칭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차지하는 욥의 비중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에 대해 더 높은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을지라도, 이 호칭은 결코 욥이 하나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여기서의 ‘종’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애칭’이다. 하나님이 여러 차례 ‘내 종 욥’이라고 언급한 표현으로부터 하나님이 욥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종’이라는 단어의 함의를 언급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이 말씀 구절에서 ‘종’이라는 단어에 대해 내린 정의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먼저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욥을 시련한 후, 욥의 행동과 말을 열납했음을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알린 것이며, 처음으로 욥의 행동과 말이 정확하고 옳았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바스 등 친구들의 정확하지 않은 그릇된 논쟁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노한 것이다. 그들도 욥처럼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도,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도 않는 상황에서 생활했지만, 욥이 하나님에 대해 그토록 정확한 인식을 가졌던 반면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엉뚱하게 추측하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겼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염증을 느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욥의 행동과 말을 열납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분노를 느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실제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한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취하여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의 우매한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 구절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엘리바스 등 친구들에게 그들이 속죄받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들이 우매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들은 반드시 번제를 드려 과오를 만회해야만 했던 것이다. 보통 번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번제는 욥에게 드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번제가 다른 것과 차별화된 부분이다. 욥은 시련 가운데서 하나님을 증거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열납되었다. 동시에, 욥의 친구들은 욥이 시험을 받던 기간에 다 드러났다. 그들은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정죄받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했다. 이 ‘징벌’이 바로 욥 앞에서 번제를 드리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욥이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과 노를 풀어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한 것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자 함이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이 욥의 순전함을 정죄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행동을 열납하지 않으나 욥의 행동은 흔쾌히 열납하고 기뻐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사람은 하나님께 열납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높아지고,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죄를 지어 하나님 눈에 천하게 보인다는 것을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이 두 측면은 하나님이 두 부류 사람에 대해 내린 정의이고, 이 두 부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이다. 또한 이 두 부류 사람의 값어치와 지위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욥을 종이라 불렀을지라도 이 ‘종’이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에게서 권세를 받아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과오를 사해 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또한,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고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보다 지위가 높고 존귀한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한 ‘종’의 진정한 함의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이런 ‘특별한 영광’을 얻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종’이라 불리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 2가지 완전히 다른 태도는 이 두 부류 사람을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하나님께 열납되고, 하나님께 귀하게 보이는 것이다. 반면, 우매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날 수 없어 하나님이 기뻐 받지 않으며, 늘 하나님의 미움을 사고 하나님의 정죄를 받으며, 하나님께 천하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욥에게 권세를 주다 욥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다. 욥의 기도에 하나님은 그들의 우매함대로 그들에게 갚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을 벌하지 않고 그들에게 어떤 응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종인 욥이 그들을 위해 드린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욥의 기도를 열납했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한 것이다. 여기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나님이 한 사람을 축복할 때 그에게 많은 것을 내려 주는데,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또 그에게 권세를 주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자격이 있게 하였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그 몇 사람의 과오를 기억하지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욥에게 준 권세이다. ‘욥의 기도로 타인이 하나님께 정죄받지 않는’ 이런 방식으로 그 우매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엘리바스 등 친구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징벌이었다. 욥은 다시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더 이상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욥은 어떤 말을 했느냐? 바로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던 말이다. 또한 욥기에 기록된 그 많은 분량의 말들이다. 그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 말들을 보면, 욥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원망도 의심도 없었으며, 오직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기다림은 바로 그의 순종하는 태도였다. 그의 태도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 한 말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그를 기쁘게 받았다. 그가 시련을 겪을 때,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은 그의 곁에 있었다. 하나님이 곁에 있다고 해서 그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보고자 한 것을 보았고, 듣고자 한 것을 들었다. 욥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 앞에 이르렀고, 그의 모든 말은 하나님 귀에 상달되었다. 하나님은 다 들었고 보았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때, 그 시기 하나님에 대한 욥의 앎과 마음속의 생각은 사실 지금 사람들처럼 그렇게 구체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당시의 배경에 따라 그가 말한 것을 인정해 주었다. 그것은 욥의 마음속 생각과 모든 행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것과 드러낸 것들이 이미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욥이 시련을 겪는 동안, 그의 마음속 생각과 다짐을 통해 하나님은 결과를 보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하나님이 보기에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뒤이어 하나님은 시련을 거두어 갔다. 그 후 욥은 고통 속에서 벗어났으며, 욥의 시련은 그때부터 사라져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욥은 이미 시련을 겪었고 또한 시련 속에서도 굳게 서고 사탄을 완전히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당한 복을 그에게 내린 것이다. 욥기 42장 10절과 12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욥은 또 한 번 하나님의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많이 받았다. 이때, 사탄은 물러가 더 이상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욥은 더 이상 사탄의 방해와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준 것 역시 더 이상 사탄의 참소를 받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여생을 보냈다 비록 그때의 복은 소와 양, 낙타, 재산 등에 국한되었을지라도, 하나님이 욥에게 주고자 했던 복은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그 당시, 하나님이 욥에게 어떤 영원한 약속을 주려 한다는 기록이 있느냐? 욥에 대한 하나님의 복에 결말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또 그 복은 결말과 연관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욥의 비중과 지위가 얼마나 되든지 간에,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에는 매우 적당한 선이 있었다. 그는 결말에 대해 선포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의 계획이 사람의 결말을 선포할 단계까지 진행되지 않았을 때, 즉 사역을 끝내는 단계가 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물질적인 축복만 좀 주었을 뿐 사람의 결말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욥은 여생을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보냈다. 이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된 점이다. 같은 점은 그도 정상인처럼 늙어 가고 어느 날 세상과 이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욥 42:17). 여기서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는 무슨 의미이냐? 하나님은 결말을 선포하지 않은 그 시대에 욥에게도 수명을 정해 주었으며, 그 수명이 다 찬 후 욥은 자연스럽게 세상과 이별했다. 그가 두 번째로 복을 받은 후부터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그에게 그 어떤 고통도 주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이 보기에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아주 정상적인 일이었다. 무슨 선고도 아니었고, 정죄도 아니었다. 욥은 그의 살아생전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그가 죽고 난 후에 어떤 결말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았고, 그 어떤 평가도 없었다. 하나님은 말씀하고 일할 때 매우 적당한 선이 있다. 그가 하는 말씀과 일의 내용과 원칙은 그의 사역 단계와 사역 시기를 근거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욥의 결말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나님 마음속에 정해져 있지 않았을까?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지도 않았고 알려 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욥이 기한이 차서 죽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일생이다. 욥의 삶의 가치 욥의 일생은 가치가 있는 삶이 아니냐? 그의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왜 그의 삶이 가치가 있다고 말하느냐? 사람 쪽에서 볼 때, 그의 가치는 무엇이냐?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그는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인류를 대표해 사탄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했다. 또한 그는 피조물이 해야 할 본분을 다 이행했고,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고 본보기가 되어 인류에게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사탄을 완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볼 때, 욥의 삶의 가치는 그가 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고 찬양하여 하나님께 위안을 안겨 드리고 기쁨을 얻게 한 것에 있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의 삶의 가치는 또한 욥이 살아생전에 겪은 그 시련에서 사탄을 이겼고, 사탄 앞에서,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한 데에 있다. 그리고 인류 중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얻게 하였고, 하나님께 위안을 안겨 드렸으며, 절박한 마음을 가진 하나님께 결과를 보게 하고 희망을 보게 한 데에 있다. 그의 증거는 하나님의 인류 경영 사역에서 하나님을 위해 굳게 서고 사탄을 부끄럽게 한 선례를 남긴 것이다. 이러한 것이 욥의 삶의 가치가 아니냐? 그는 하나님께 마음의 위안을 얻게 하고 영광받은 기쁨을 미리 맛보게 했으며, 하나님의 경륜이 거기서 완벽한 시작을 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욥의 이름은 이로부터 하나님이 영광을 얻은 상징이 되었으며, 인류가 사탄을 이긴 표징이 되었다. 욥의 삶과 그가 사탄을 이긴 위업은 하나님께 영원히 소중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후세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는 완전무결하고 빛나는 보석처럼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욥은 화복을 따지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욥의 이야기에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오늘 언급할 중점이다. 욥이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을지라도,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있었다. 그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했느냐? 바로 앞에서 말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태도였다. 이 ‘찬송’에는 조건도 배경도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여기서 욥이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이 주관하도록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결심하고 계획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숨김없이 다 열어 놓았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대립되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하나님께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 달라고, 무엇을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 또한,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을 경배하면 무언가 얻을 것이라는 허황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욥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뭘 얻어 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욥이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던 이유는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가 복을 받거나 화를 당한 것으로 인해 그렇게 한 것은 전혀 아니다. 욥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든 화를 입든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능은 변함없기 때문에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주재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람이 화를 입는 것 역시 하나님의 주재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큰 능력과 권능으로 사람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배치한다. 사람에게 수시로 임하는 화복은 모두 하나님의 큰 능력과 권능의 발현이며, 어떤 관점에서 보든지 간에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받아야 마땅하다. 이것이 욥이 살아가면서 체험하고 깨달은 것이다. 욥의 이 모든 생각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고, 그의 모든 행실은 하나님 앞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그것을 중히 여겼으며, 욥의 그러한 인식을 귀하게 여기고 그러한 마음도 귀하게 여겼다. 그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언제 어디서나 그에게 임하는 모든 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욥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요구하는 바가 없었다. 욥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배치를 기다리고, 받아들이고, 직면하고, 순종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욥이 생각하는 자신의 책임이자,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다. 욥은 하나님이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거나, 무엇을 명령하거나, 무엇을 가르쳐 주거나, 무엇을 알려 주는 말씀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말로 하자면, 그에게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그 어떤 깨우침이나 인도, 공급이 없는 상황에서, 그가 그러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고 하나님을 그런 태도로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하나님이 보기에 욥의 그러한 행동은 아주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 그의 증거는 하나님이 칭찬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고, 하나님이 친히 가르쳐 주는 말씀을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심오한 이론만 떠들어 대며 큰소리치고, 번제만 중시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인식도 없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지도 않는 사람들보다는 욥의 마음이나 사람됨이 하나님에겐 훨씬 소중했다. 욥은 마음이 순결하고 하나님께 숨기지 않았고, 그의 인성은 정직하고 선했으며, 또한 정의와 긍정적인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성을 갖추고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길을 좇아 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주재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의 권능과 큰 능력을 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다. 그가 화복을 따지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므로 사람이 걱정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고 무지하며 이성이 없는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태도이자,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행동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욥의 이러한 인식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었다. 지금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욥의 이론적 인식이 너희보다 더 많으냐? 하나님이 그 당시에 행한 사역과 말씀은 매우 적었으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욥이 그러한 성과를 이룬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을 체험한 적이 없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대함에 있어 그러한 태도를 갖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인성과 그의 추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인성과 그의 추구는 지금 사람들이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 하나님은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가 세상에 없다고 말씀했다. 그 시대에 하나님은 이미 그에 대해 이러한 평가와 결론을 내렸는데, 하물며 지금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흔들린 적이 없다

욥은 하나님에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다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 9:11)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2~6) 하나님은 욥에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욥은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다 너희는 이런 구절들에서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 보았느냐?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한 사람이 있느냐? 먼저 우리는 욥이 어떻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 천지 만물을 하나님이 주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보자. 다음 구절로 이상의 2가지 문제에 대한 해석이 가능할 것 같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 이 구절로부터 욥은 전해지는 말을 통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지 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는 하나님을 따르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 후 그는 삶 속에서,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무엇이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갔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지금의 사람들과 같지 않으냐? 욥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말로, 욥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하시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요인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가 하나님을 따를지라도 하나님은 한 번도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고, 그와 말을 나눠 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냐? 하나님이 그와 얘기를 나눈 적도 없고 그에게 어떤 명령을 한 적도 없었음에도 욥은 만물을 통해서, 자신이 들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다. 그것을 계기로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욥이 하나님을 따르게 된 원인과 과정이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든지, 어떻게 자신의 순전함을 지켰든지 간에, 하나님은 그에게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다. 다음의 이 구절을 읽어 보자.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 9:11).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욥은 하나님이 그의 곁에 계시다는 것을 느꼈을 수도 있고 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 단 한 번도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이 그의 앞을 지나가거나 일을 행하거나 사람을 인도한다고 상상하기는 했지만 전혀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주의하지 않을 때 사람에게 임하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이 언제 임했는지, 어디에 임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에,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은 모습을 감춘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음으로 인해 흔들린 적이 없다 다음 구절에 또 욥의 이런 말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이 기록을 보면, 욥의 체험에서 하나님은 시종일관 욥에게 보이지 않았고, 그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난 적이 없으며, 그에게 공개적으로 무슨 말씀을 한 적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는 늘 하나님이 그의 앞을 지나가거나 그의 우편에서 일을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그의 곁에서 그의 모든 것을 주재하고 계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을 전혀 본 적이 없는 상황에서도 욥은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 할 수 없는 것이냐?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지도 않았고 나타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욥에게 진정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계속해서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냐? 너는 욥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느냐?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보인 의로움은 하나님이 과장한 것이 아니라 진짜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 하나님이 그를 대하는 것도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그에게 말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의연하게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지키며, 하나님의 주재를 믿었다. 게다가 하나님께 죄지을까 두려워 항상 번제를 드리며, 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였다. 욥이 하나님을 본 적이 없음에도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이 사실로 볼 때, 욥이 얼마나 긍정적인 것을 좋아했는지, 욥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했고 얼마나 실제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이지 않는다 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믿음을 잃거나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그는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보이지 않는 사역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했으며, 하나님의 주재와 능력을 느꼈다. 그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난 적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는 만물 가운데서 이미 하나님의 주재를 보았고, 다른 사람이 받지 못한 복과 은혜를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하나님이 예전과 다름없이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은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어떤 사람도 얻지 못한 성과, 곧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욥의 증거가 후세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와 계시

사람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완전히 얻는 전 과정을 깨달은 동시에,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긴 목적과 의미도 알게 되었다. 또 더 이상 욥이 받았던 고난을 마음에 두지 않게 되었고 욥이 받은 고통의 의미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이 생겼다. 사람은 더 이상 욥과 같은 시험이 올까 걱정하지 않게 되었으며, 더 이상 하나님이 주는 시련에 반발하고 저항하지 않게 되었다. 욥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욥이 사탄을 이긴 증거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도움과 격려가 되었다. 욥에게서 사람들은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다. 사람이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에 의지하면 사탄을 완벽하게 이길 수 있다는 것도 보았다.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고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결심과 믿음만 있다면, 사탄에게 실패와 수치를 안겨 줄 수 있다는 것도 보았다. 또한 목숨을 버릴지언정 굳게 서겠다는 결심과 의지만 있다면, 사탄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져서 황급히 도망간다는 것을 보았다. 욥의 증거는 후세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었다. 이 경고는 사탄을 이기지 못하면 영원히 사탄의 참소와 방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또한 영원히 사탄의 공격과 상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다. 욥의 증거는 또 후세 사람들에게 계시를 주었다. 이 계시를 통해,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야만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힘 있게 증거해야만 영원히 사탄의 통제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에서 살 수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욥의 인성과 품격, 그가 인생에서 추구한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욥의 일생의 삶과 그가 시련 속에서 보여 준 행동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욥의 증거에서 하나님이 위안을 받다 지금 내가 너희에게 욥은 사랑스러운 자라고 말하면, 너희는 아마도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내가 왜 이러한 일들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 너희가 욥과 같은 혹은 비슷한 시련을 겪게 될 때, 너희가 환난을 겪게 될 때,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위해 배치해 놓은 시련을 겪게 될 때, 시험 속에서 사탄을 이기기 위해,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치욕과 고통을 이겨 내게 될 때, 너는 내가 한 이 말들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너는 욥과 비교했을 때 너 자신이 그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며, 욥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얼마나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욥이 말한 그 멋진 말들이 타락한 사람에게 있어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욥이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해내기 힘든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네가 해내기 어렵다고 느낄 때,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얼마나 걱정스러워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렀는지, 하나님이 인류에게 한 것과 인류를 위해 바친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 교제했으니 너희들은 욥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 마음속에 있는 욥은 진정으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맞느냐?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아마 분명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욥이 했던 그런 일들은 사탄을 포함한 그 어떤 사람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들은 욥이 사탄을 이긴 가장 유력한 증거이다. 이 증거는 욥에게서 만들어진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얻은 첫 번째 증거이다. 그러므로 욥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을 증거했을 때, 하나님은 욥에게서 희망을 보았으며, 하나님의 마음 역시 욥으로부터 위안을 받았다. 창세부터 욥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처음으로 무엇이 위안인지, 무엇이 사람으로부터 위안을 받는다는 것인지 진정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은 무엇이 진정으로 그를 증거하는 것인지를 보았고 또 그것을 얻었다.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의 증거와 욥에 대한 다방면적인 설명을 듣고 난 후, 자신 앞에 펼쳐진 길에 대해 계획이 생겼을 것이라 믿는다. 또한 그동안 우려와 공포로 가득했던 많은 사람들이 점차 심신이 편안해지기 시작했고, 조금씩 안심하게 되었을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긴 것과 하나님 사역의 근본 취지와의 관계

비록 이때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인정하고, 또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을 인정했을지라도, 욥을 인정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더 알게 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욥의 인성과 그가 추구하는 바를 부러워하는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욥이 이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이처럼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데 왜 하나님은 그를 사탄에게 넘겨서 그런 고통을 받게 하셨을까?’ 이러한 질문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의문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이 질문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곤혹스러움을 느끼게 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명확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하나님이 행하는 모든 일은 다 그 필요성이 있으며, 또한 다 평범하지 않은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가 사람에게서 하는 일들은 다 그의 경영과 관련되며, 인류의 구원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이 욥에게 행한 일도 예외는 아니다. 욥이 하나님 눈의 순전하고 정직한 자임에도 말이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하고 어떤 방식으로 하든지, 무엇을 대가로 삼고 무엇을 목표로 하든지 간에, 그가 하는 사역의 근본 취지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근본 취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요구,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즉 하나님이 보기에 긍정적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다 하나님의 절차에 따라 사람 마음에 심어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본질을 명확하게 알며,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의 근본 취지 중 하나이다. 또 한편으로 사탄은 하나님 사역의 부각물이자 봉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사탄에게 넘겨진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사탄의 시험과 공격 속에서 사탄의 사악함과 추함과 비열함을 보게 함으로써 사탄을 증오하고 부정적인 것을 인식하고 분별하게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은 점차 사탄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참소, 교란과 공격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순종,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경외심에 기대어 사탄의 공격과 참소를 완전히 이기면, 사람은 완전히 사탄의 권세에서 구출된다. 사람이 구출됐다는 것은 사탄이 패했다는 선언이며, 그 사람은 더 이상 사탄의 먹이도, 사탄이 삼키려고 하는 대상도 아닌 사탄이 포기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은 정직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으며, 사탄과 철저하게 결별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사탄에게 수치를 주고, 사탄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또한 사탄에게 완전한 실패를 안겨 준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과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사탄을 물리쳐, 사탄으로 하여금 그에 대해 확실히 손을 놓게 만든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는 최종 목표이다.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완전히 하나님께 얻어지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탄으로부터 오는 크고 작은 시험과 공격에 직면해야 한다. 그리고 완전히 사탄을 이기고 거기에서 나오는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자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준 시련과 사탄의 무수한 시험과 공격을 겪은 사람이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요구를 아는 자요,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고 사탄의 시험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포기하지 않은 자다.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는 정직하고, 선하고, 애증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진 자이다. 이러한 사람은 사탄의 속박, 염탐, 참소, 상해 등이 없으며,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를 얻은 자이고, 완전히 해방받은 자이다. 욥이 바로 이러한 자유인이었다. 이 또한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넘긴 의미이기도 하다. 욥은 사탄의 상해를 겪었지만 영원히 자유로운 해방을 얻었다. 그는 영원히 사탄에 의해 타락하지 않고 상해와 참소를 받지 않으며, 어떤 우려도 걱정도 근심도 없이 하나님의 얼굴빛 속에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복 가운데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 권리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고, 아무도 파괴할 수 없으며, 아무도 차지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권리는 욥이 자신의 믿음과 의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바꾼 것이다. 그는 목숨을 대가로 땅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삶을 얻었으며, 진정한 피조물로서 천경지위(天經地緯)로 땅에서 그 어떤 간섭도 받지 않고 창조주를 경배할 자격과 권리를 얻었다. 이 역시 욥이 시험을 겪어 얻은 가장 큰 성과이다. 구원받기 전의 사람의 삶은 항상 사탄의 방해를 받으며, 심지어 그 삶은 사탄에게 통제받는 삶이다. 즉,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는 사탄에게 구금된 자이고, 자유가 없는 자이며, 사탄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배할 자격과 권리가 없는 자이며, 사탄에게 쫓기고 심한 공격을 받는 자이다. 이러한 사람은 행복을 논할 수도 없고, 정상적인 생존 자격은 물론이고 존엄성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할 수도 없다.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 사탄과 싸워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과 경외심을 무기로 사탄과 결사전을 벌여 철저히 물리쳐야 한다. 그리하여 사탄이 너를 보면 도망가고 너를 보면 간담이 서늘해지게 해야 한다. 그러면 사탄이 너에 대한 공격과 참소를 완전히 포기할 것이다. 그때 너는 구원받아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네가 사탄과 철저히 결별할 결심만 하고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 유리한 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면, 너는 여전히 아주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너는 사탄으로부터 오는 괴롭힘으로 인해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굳게 서지도 못하고, 사탄의 참소와 공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가 구원받을 희망은 요원해진다. 최종, 즉 하나님의 사역이 마지막을 고하게 될 때에도 네가 여전히 사탄에게 꽉 잡혀 벗어나지 못한다면, 너는 영원히 기회도 희망도 없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러한 사람은 완전히 사탄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하나님의 검증을 받아들이고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내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온 몸과 마음을 얻게 하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장기적으로 공급해 주고 돌봐 주는 사역을 하는 기간에 그의 뜻과 요구를 모두 알려 주었다. 또한 하나님의 행사,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 주었다. 그 목적은 사람에게 믿음의 분량을 갖추게 하고자 함이며, 하나님을 따르는 기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다양한 진리를 얻게 하고자 함이다. 그러한 진리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사탄과 싸울 수 있는 예리한 무기이다. 사람이 이러한 장비를 갖추려면 하나님의 검증에 직면해야 한다. 하나님의 검증은 여러 가지 방식과 경로가 있지만, 모든 경로와 방식에는 다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의 ‘협력’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람에게 사탄과 싸울 예리한 무기를 준 다음, 사람을 사탄의 손에 넘겨 사탄으로 하여금 그 사람의 분량을 ‘검증’하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탄이 설치한 진영에서 벗어나고, 사탄의 포위 공격에서 살아 나오게 되면 이 검증을 통과한 것이다. 만일 사탄의 진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사탄에게 항복하게 되면,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어떤 부분을 검증하든지 간에, 검증의 기준은 사람이 사탄의 공격에서 굳게 설 수 있는지의 여부, 사탄의 올무 속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무기를 버리고 사탄에게 굴복하는지의 여부이다.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는 사탄을 이길 수 있는지, 사탄을 물리칠 수 있는지의 여부에 있다. 사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는 사람이 독립적으로 하나님이 준 무기를 들고 사탄의 결박을 끊고 사탄에게 사람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접고 포기하게 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사탄이 사람을 단념하고 포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두고 더 이상 하나님과 싸우지 않고, 그 사람을 참소하지 않고 방해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더 이상 제멋대로 그 사람을 해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얻어진 자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한 사람을 얻는 전 과정이다.

욥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2)

욥의 이성 욥은 실제 체험이 있었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가장 이성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이성적인 선택은 그가 평소에 추구했던 것과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인식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했기 때문에 만물은 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재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그 믿음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됨으로써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재와 배치에 순종하기를 원했고, 또 순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더 진실하게 경외할 수 있었으며, 그 경외심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실제적으로 악에서 떠나게 되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으로 말미암아 온전해진 것이다. 그의 온전함은 그를 지혜롭게 만들었으며, 그를 가장 이성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성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문자적 해석은 이성과 생각이 논리에 맞아 터무니없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적절한 언행과 판단, 적절한 규범을 가진 도덕적 기준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욥의 ‘이성적’은 그렇게 간단하게 해석될 말이 아니다. 여기서 욥이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인성과 그가 하나님 앞에서 보인 행동과 관계가 있다. 욥은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재를 믿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주재에 순종할 수도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욥은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한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인식을 통해, 욥은 자신에게 임한 일을 더욱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하며 정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것들을 더욱 정확하고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즉, 그의 언행과 일 처리 원칙과 방침은 맹목적이거나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이지 않았고, 매우 규범적이고 명확하며 아주 구체적이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임하든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알았고, 각종 복잡한 사건의 관계들을 어떻게 균형 잡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알았다. 또한, 마땅히 지켜야 할 길을 어떻게 지켜 나가야 할지도 알았으며, 더욱이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줄 때와 거두어 갈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욥의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이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욥은 육체에 극심한 고통이 닥치고, 가족과 친구들의 권고가 임하고,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실제적인 행동으로 또다시 자신의 진실한 면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욥의 진정한 모습: 진실하고 순박하며 위선적이지 않음 욥기 2장 7~8절을 보자.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이것은 욥이 몸에 악창이 난 후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이때, 욥은 재 가운데 앉아 몸의 통증을 견디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치료해 주는 이가 없었고, 그의 육체적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하는 이도 없었다. 그는 혼자서 기와 조각으로 악창이 난 상처를 긁었다. 표면적으로 볼 때, 이것은 욥이 고통받던 기간 중 한 장면에 불과해 욥의 인성과 욥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욥은 이 기간에 그 어떤 말로도 이때의 심정과 생각을 표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의 행동과 반응은 그의 인성을 진정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앞의 1장의 기록에서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라는 구절을 보았다. 그리고 2장의 이 구절에서는 이 동방 사람 중 가장 큰 자가 뜻밖에도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앞뒤의 2가지 묘사는 아주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지 않느냐? 이 대비를 통해, 우리는 욥의 본모습을 보게 되었다. 욥은 신분과 지위가 대단했지만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소중히 여기지도 않고,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을 어떻게 보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자신의 행동이 자기 신분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서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위의 복을 탐하지 않았고, 지위와 신분이 그에게 가져다주는 후광을 즐기지도 않았다. 욥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가치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에만 신경 썼을 뿐이다. 욥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욥의 본질이었다. 그는 명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명리를 위해 살지 않았다. 그는 진실하고 순박하며 위선적이지 않았다. 애증이 분명한 욥 욥이 아내와 나눈 대화에서 욥의 또 다른 면의 인성이 모두에게 보여졌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9~10). 욥의 아내는 욥이 그런 고통을 겪는 모습을 보고 욥에게 권고함으로써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호의’는 욥의 칭찬을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욥을 노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순종을 부인하는 동시에,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욥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을 용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다른 사람이 그러는 것은 어떻겠느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모욕하는 말을 내뱉는 것을 보고 그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었겠느냐? 그래서 욥은 아내를 ‘어리석은 여자’라고 한 것이다. 욥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는 분노와 증오가 담겨 있었고, 책망과 질책도 담겨 있었다. 이것은 애증이 분명한 욥의 인성의 자연스런 발현이자, 그의 정직한 인성이 사실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욥은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정의감이 있었기에 사악한 풍조와 추세를 증오했으며, 그릇된 사설과 황당무계하고 터무니없는 말들을 증오하고 정죄하고 밀어냈다. 또한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자신의 정확한 원칙과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다. 욥의 선함과 성실함 욥의 다양한 행동에서 욥의 인성을 볼 수 있다면,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일에서는 또 욥의 어떤 인성을 볼 수 있을까? 이것이 다음으로 내가 이야기할 주제이다. 앞에서 나는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원인에 대해 얘기한 바 있다. 그 일에서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만일 욥이 마음이 강퍅하고 사랑도 없고, 아주 냉혹하고 무정하며, 인간성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림으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증오했겠느냐? 다시 말해, 욥의 마음이 강퍅하고 인간성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으로 인해 마음 아파했겠느냐?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마음 아파한 것 때문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겠느냐? 절대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당연한 답이다. 욥은 마음씨가 착했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렸기에 하나님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욥은 마음이 착했기에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을 느끼게 되어 더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기에 자신의 생일을 증오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모든 행동은 사람이 배울 만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일만큼은 사람들에게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의문을 갖게 만들거나 다양한 평가를 내놓게 만들었다. 사실, 욥의 이 행동이야말로 욥의 인성과 본질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의 인성과 본질에는 숨기거나 과장된 것이 없었으며, 사람에 의해 가공된 것도 없었다. 그의 이 행동들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선함과 성실함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넘치는 샘물같이 맑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욥이란 사람의 면면을 알고 난 후에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인성과 본질에 대해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하나님이 ‘순전하고 정직하다’라고 한 말씀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고 진일보한 실제적인 앎과 깨달음이 있으리라 믿는다. 또 그러한 앎과 깨달음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욥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1)

욥이 겪은 시련의 전 과정을 알고 난 후, 대다수의 사람들이 욥과 관련된 정보에 관심을 보일 것이라 믿는다. 특히, 욥이 어떻게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되었는지, 그 ‘비결’에 더욱 관심을 보일 것이다. 오늘 여기서 욥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보도록 하자. 욥의 일상생활에서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음을 보았다 욥이라는 사람에 대해 얘기하려면,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먼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여기서 말하는 ‘순전하고 정직하다’를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느냐? 욥이 아주 완벽하고 강직하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이것은 문자적인 해석과 이해이다. 욥이라는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실생활을 떠나서는 안 된다. 단지 문자적으로, 책에서, 그리고 도리상만으로는 그 어떤 답도 찾을 수 없다. 먼저 욥의 일상생활이 어땠는지 살펴보자. 즉, 그의 삶에서 보편적인 모습은 어땠는지 보자. 이것들을 통해 욥의 삶의 원칙과 인생 목표를 알아보고, 또 욥의 인성과 품격, 그가 추구한 것이 어땠는지 알아보자. 성경의 욥기 1장 3절의 마지막 구절을 보도록 하자.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이 구절은 그 당시 욥의 지위와 신분이 아주 높았음을 말해 준다. 여기에서 그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인 이유가 많은 재산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이기 때문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어쨌든, 욥의 지위와 신분은 사람들에게 존중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서 사람들이 받게 되는 욥에 대한 첫인상이다. 즉, 욥은 순전한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고, 엄청난 재산과 고귀한 지위를 소유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 환경과 조건을 가진 정상인이라면, 그가 평소에 먹고 마시는 것, 생활의 질, 개인 생활의 각 부분은 절대다수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다음 성경 구절들을 계속 봐야 한다.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4~5). 이 구절에는 2가지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는 욥의 자녀들이 자주 잔치를 베풀어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일은 욥이 항상 번제를 드렸는데, 이는 자녀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늘 걱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2가지 일은 두 부류 사람의 서로 다른 삶의 내용에 대한 기록이다. 하나는 욥의 자녀들이 생활이 풍족하여 늘 잔치를 베풀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호사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으며, 풍부한 물질이 가져다주는 높은 질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나날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늘 죄를 짓고, 늘 하나님의 노여움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를 성결케 하지 않고, 이를 위해 번제를 드리지 않았다. 이것으로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더욱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물론 욥의 자녀들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중점은 이러한 일들이 임했을 때 욥은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성경 구절에 기록되어 있는 다른 한 가지 일이다. 이 일은 욥이라는 사람의 인성과 본질, 그의 일상생활과 관련된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욥의 자녀들이 잔치를 베풀 때 욥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욥의 자녀들만 항상 함께 먹고 마셨던 것이다. 즉, 욥은 잔치를 베풀지도, 자녀들과 함께 즐기지도 않았고, 흥청망청 먹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는 부유하고, 각종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수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호사를 부리지 않았다. 그는 부유하다고 해서 질 높은 생활 환경에 빠져 살지 않았고, 육체적 쾌락을 탐하지도 않았으며, 번제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욱이 부유하다고 해서 마음으로 점점 하나님을 멀리하는 일이 없었다. 여기서 욥은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준 복으로 인해 탐욕스러워지거나 향락에 빠지지 않았고, 생활의 품격을 중시하지도 않았으며, 일을 함에 겸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사람됨에서 그가 허세를 부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조심스럽고 신중했으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생각했고, 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그는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 자녀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 이것은 욥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욥의 마음을 차지하지 못했고, 그의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도 대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일상에서 행한 것이 자녀들을 위한 것이든 자신을 위한 것이든 모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과 관련이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단지 입술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실행에 옮겨졌으며,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에서 드러났다. 욥의 이와 같은 실제 모습에서 우리는 욥의 정직함을 보았으며, 정의를 사랑하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그의 본질을 보았다. 그가 항상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했다’는 것은 자녀들의 행동을 지지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싫어하고 그들을 정죄했다는 뜻이다. 그는 자녀들의 행위가 여호와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자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자복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욥의 이러한 행동을 통해, 우리는 욥의 인성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욥은 항상 죄를 일삼으며 하나님께 범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았고, 그들을 멀리하고 피했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그는 혈연관계에 연연해 사람됨의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 또한, 정에 이끌려 그들의 죄에 관용을 베푸는 일도 없었다. 대신, 그들이 죄를 자백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도록 권고하고, 그들이 향락에 빠져 하나님을 버리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욥이 사람을 대하는 원칙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원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는 하나님이 열납하는 것과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좋아하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과 악행을 저지르거나 하나님께 죄를 짓는 자들은 혐오했다. 그의 애증은 그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드러났다. 이것이 곧 하나님 눈에 보인 욥의 정직함이었다. 물론 이 역시 우리가 알아야 할, 욥이 일상생활에서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보인 진정한 인성과 삶의 모습이다. 시련 속에서 보여진 욥의 인성(시련 속에서 보인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남에 대해 알아보다) 이상 우리가 말한 것은 다 시험을 당하기 전 욥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난 인성의 여러 측면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면에서 보여지는 욥의 모습을 통해 욥의 정직함,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악에서 떠나는 것에 대해 일차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알고 이해할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일차적’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의 인성과 품격, 욥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을 추구하는 정도에 대해 아직 진정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절대다수의 사람은 성경에서 알게 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한 욥의 이 두 구절을 통해 욥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조금 갖게 된 것 외에는 깊이 있는 앎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이 하나님이 주는 시련을 받아들일 때 어떤 인성을 보였는지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이 욥의 진정한 인성을 완전히 볼 수 있다. 욥은 재산을 약탈당하고, 자녀들이 목숨을 잃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욥 1:20). 이 구절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욥이 이 소식을 듣고 난 후 놀라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으며, 소식을 알리러 온 종을 꾸짖지도 않았다. 더욱이 현장에 가서 조사하지도 않았고, 어떤 상황인지 사실 확인을 해서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잃은 재산을 아까워하거나 그로 인해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자녀와 가족들을 잃은 것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 욥의 이러한 행동은 일반 사람들의 행동과 달랐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안겨 주었으며,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가 ‘냉혈 인간’이라는 비난을 사게 되었다. 재산이 순식간에 사라져 아무것도 없게 될 때, 일반 사람들은 괴로움이나 절망감을 느낄 것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람에게 재산은 사람이 일생 동안 흘린 피땀이며, 사람이 생존을 위해 의지해야 하는 것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희망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재산이 사라졌다는 것은 자신의 피땀 흘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고, 희망이 사라지고 심지어는 미래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정상인들이 재산을 대하는 태도이고, 재산과 사람의 밀접한 관계이다. 또한 사람이 재산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다수의 사람은 욥이 재산을 대하는 이러한 냉담한 태도에 대해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오늘 욥의 마음을 해석함으로써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의혹을 풀어 가도록 하자.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욥에게 풍부한 재산을 주었으니 욥은 재산을 잃고 하나님께 죄송한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는 하나님이 준 재산을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했고, 보살피지도 못했으며, 지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산이 약탈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욥의 첫 번째 반응은 마땅히 현장으로 달려가 각종 물건을 철저히 점검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 죄를 자백했어야 했다. 그러나 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그가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는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모든 것은 다 본인이 힘들게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복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받게 된 복을 삶의 근거로 삼는 대신 자기가 지켜야 할 길을 전심전력으로 지키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베풀어 준 복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더 많은 복을 탐하거나 더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재산을 대하는 태도였다. 욥은 복받기 위해 무엇을 하지는 않았으며, 복이 없거나 복을 잃었다고 걱정하거나 상심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베풀어 준 복으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모든 것을 망각하는 일이 없었고, 항상 복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길을 소홀히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일도 없었다. 재산을 대하는 욥의 태도를 통해, 사람들은 욥의 참된 인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욥은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물질생활에 대한 요구 기준이 아주 낮았다. 둘째,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거두어 갈까 걱정한 적도 없고 두려워한 적도 없다. 이것은 그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태도이다. 즉, 하나님이 언제 거두어 가든 혹은 하나님이 거두어 가든 가지 않든, 어떤 요구도 원망도 없었다. 그는 이유도 묻지 않았고, 하나님의 배치에 순종하기만을 구했다. 셋째, 욥은 본인의 재산은 하나님이 준 것이라고 생각했지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이다. 즉, 욥의 확신을 가리킨다. 욥에 대한 이상의 3가지 개괄을 통해 욥의 인성과 그가 평소에 진실로 추구한 것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되지 않았느냐? 욥이 재산을 잃었을 때 그처럼 냉정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욥의 그러한 인성과 그의 추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욥은 평소에도 그렇게 추구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준 시련 속에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분량과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욥이 한 이 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그가 갑작스러운 생각이 떠올라 만들어 낸 말도 아니다. 이는 그가 오랜 인생의 경험에서 보고 얻은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기만 하고, 하나님이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며 원망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욥의 순종은 아주 실제적이지 않으냐?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만 믿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사실은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욥은 아주 성실하고 정직하지 않으냐?

욥은 사탄을 이겨 하나님 눈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보고 사람은 겉면을 본다고 나는 늘 말해 왔다. 하나님은 사람의 내면을 살핌으로 사람의 본질을 아는 반면,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 사람의 본질을 정의한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을 때, 욥의 세 친구 및 모든 영적 인물들은 그 행동에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왔기에 생일을 비롯해 생명과 육체를 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지 저주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신성불가침한 것이자 영원히 바뀌지 않는 진리이다. 그런데 욥은 그 ‘관례를 위반’하고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보통 사람들이 볼 때 금기를 깬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해와 동정은 물론, 하나님의 용서도 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많은 사람들은 욥의 ‘의로움’에 의심을 품었다. 이는 그들이 욥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방종’해져 그렇게 경거망동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살아생전에 그가 받은 하나님의 축복과 보살핌에 감사하기는커녕 자신이 태어난 날이 멸망했으면 하고 저주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겉으로 보여지는 현상이 사람들이 욥을 정죄하는 증거가 된 셈이다. 그러나 그때 욥의 진짜 마음이 도대체 어떠했는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또 욥이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인지 누가 알 수 있겠느냐? 그 속사정과 이유는 하나님만이 알고 있고, 또한 욥 자신만이 알고 있다. 사탄이 손을 뻗어 욥의 뼈를 쳤을 때, 욥은 마수에 걸린 것이었다. 그는 벗어날 수도 저항할 힘도 없었으며, 그의 몸과 영혼은 극한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다. 그 ‘극한의 고통’을 통해, 욥은 육으로 사는 사람의 보잘것없음과 무력감, 유약함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동시에 욥은 하나님이 왜 인류를 염려하고 보살피는지, 하나님의 그 심정을 느끼고 이해하게 되었다. 마수에 걸려든 욥은 평범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도 무력하고 나약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가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을 때, 그는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고 숨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는 하나님이 욥을 완전히 사탄의 손에 넘긴 한편, 욥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마음 아파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욥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아파하고, 욥의 상처로 말미암아 괴로워했다. 욥은 하나님의 아픔을 느꼈고, 또한 아까워하는 하나님의 마음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마음 아파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더 이상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눈물 흘리는 것도 원치 않았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이때의 욥은 육체 껍데기에서 벗어나 더 이상 육체로 인한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더 이상 자신의 아픔으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욥은 할 수 없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참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걱정시켜 드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오는 고통까지도 참아 내야 했다. 하나는 육체에서 오고 하나는 마음에서 오는 이중의 아픔에 욥은 가슴이 찢어지고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으며, 참으로 속절없고 무기력한, 육체를 가진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욥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강렬해졌으며, 사탄을 증오하는 마음 역시 그에 따라 더 심해졌다. 그때의 욥은 차라리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를 바랄지언정,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육체를 심히 증오하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도, 자기가 태어난 날도 싫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다 싫어졌다. 욥은 자신의 생일과 자신의 출생에 관련된 모든 것을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던 것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욥 3:3~4). 욥의 말 속에는 자신에 대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또한 그 말에서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 때문에 자책하고 죄스러워하는 심정도 묻어났다.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이 두 마디는 그 당시 욥이 자신의 심정을 최대한으로 표현한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완전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때, 또 한편으로는 욥이 원했던 대로 욥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진정으로 승화되었다. 물론 이 ‘승화’는 하나님이 예정했던 결과였다. 욥은 사탄을 이겨 하나님 눈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다 욥은 처음의 시련에서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로 인해 무너지지 않았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탄의 시험을 이겨 냈고, 재산과 자녀 그리고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는 시련을 이겨 냈다. 다시 말해, 욥은 하나님이 그의 소유를 거두어 간 것에도 순종할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감사와 찬양까지 드릴 수 있었다. 이것이 욥이 사탄의 첫 번째 시험에서 보여 준 것이며, 또한 욥이 하나님의 첫 번째 시련에서 증거한 것이다. 두 번째의 시련에서 사탄은 손을 뻗어 욥에게 갖은 해를 가했다. 욥은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고통을 겪었을지라도 그의 증거는 오히려 사람을 놀라게 했다. 그는 그의 강인함과 믿음,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으로 또 한 번 사탄을 물리쳤다. 그리고 그가 보여 준 것과 증거한 것 역시 또 한 번 하나님께 인정받고 열납되었다. 이번 시험에서 욥은 자신의 실제 행동을 통해 사탄에게 선포했다. 육체의 고통으로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과 순종을 변하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과 경외심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 또한 죽음에 이르렀어도 하나님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며,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버리는 일 또한 없을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욥의 의연함을 본 사탄은 겁이 났다. 욥의 믿음으로 사탄은 두렵고 간담이 서늘해졌으며, 사탄과 사생결단하겠다는 욥의 기세를 보고 침통해졌다.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에 사탄은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래서 사탄은 욥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욥을 참소하는 짓을 그만두었다. 이것은 욥이 세상을 이기고, 육체를 이기고, 사탄을 이기고, 사망을 이겨 하나님께 속한 완전한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욥은 그 두 차례의 시련 속에서 굳게 섰으며,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실제로 나타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그의 생존 법칙의 범위 역시 확장될 수 있었다. 그 두 번의 시련을 겪은 후, 욥은 인생에 더욱 풍부한 경험이 생겼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는 더 성숙해지고 원숙해졌으며, 더 강인해지고 더 믿음 좋은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또한, 자신이 지키고 있는 순전함의 정확성과 가치를 확신하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준 시련으로 욥은 사람을 염려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끼게 되었으며, 하나님 사랑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부터 욥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이 더 추가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준 시련에 욥은 천 리 밖으로 밀려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다. 욥은 육체의 고통이 극한에 달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보살핌을 느끼게 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게 되었다. 그런 모습은 욥이 일찍이 계획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운 발현이었다. 욥의 그 ‘자연스러운 발현’은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욥은 자신을 미워했고, 하나님이 고통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과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잊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의 욥은 오랜 세월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사모하고 그리워하던 데서 헤아리고 사랑하는 경지로 자신을 승화시켰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순종과 경외심을 헤아림과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상처 주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이 슬퍼하거나 상심하는 것은 물론, 괴로워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눈에 욥은 여전히 변함없는 욥이었지만, 그의 믿음과 순종,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하나님은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되었다. 그때의 욥은 하나님이 기대했던 완전함에 이르렀으며, 하나님 눈에 명실공히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었다. 욥은 자신의 의로운 행동으로 사탄을 이겼고,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섰으며, 자신을 더 온전하게 했고, 자신의 생명 가치를 승화시켰으며, 사탄에게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더 이상 사탄에게 공격받지 않고 시험당하지 않는 사람의 첫 사례가 되었다. 욥은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에게 참소당하고 시험당했으며, 의로움으로 인해 사탄의 손에 넘겨졌고, 또한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이기고 사탄을 물리쳤으며 굳게 섰다. 그로부터 욥은 더 이상 사탄에게 넘겨지지 않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으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빛 속에서 살고, 사탄의 감시와 해가 없는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눈에 진정한 사람이 되었고, 자유로워졌다.

욥에 대한 사람들의 많은 오해

욥이 겪은 고통스러운 일은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한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이 직접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욥의 고통받은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 욥은 자신이 평소에 마음속에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 평소의 행동 원칙과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전부 드러냈다. 그것은 다 진실한 것이었다. 만일 욥에게 시험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에게 시련을 주기 전에, 욥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욥이 매우 위선적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아주 많은 재산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만일 욥이 시련을 받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는 말을 했다면, 너는 욥이 큰소리치기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그가 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는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이 임하면 분명 하나님의 이름을 버릴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고, 보고 싶지도 않아 하고, 자신에게 임하지 않았으면 하며, 임할까 봐 두려워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차마 볼 수 없었던 그런 지경에 처해 있을 때에도 여전히 그의 순전함을 지킬 수 있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의 그때의 반응에, 공리공론을 즐기며 글귀만 늘어놓기 좋아하던 자들은 모두 입을 닫았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지만 하나님에게서 오는 시련을 받아들인 적이 없던 자들은 욥이 지켜 낸 순전함에 의해 정죄받았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길을 지킬 수 있다’고 믿지 않았던 자들도 욥의 증거로 인해 심판을 받았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행동과 그의 말을 두고 혹자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혹자는 질투를 하며, 혹자는 의혹을 품는다. 심지어 무시하는 태도로 욥의 증거에 대해 코웃음 치는 자도 있었다. 그들은 욥이 시련 속에서 받았던 고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욥이 했던 말도 들었고, 시련이 임했을 때 그가 보여 준 인간성의 ‘나약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나약함’은 그들이 생각하는 욥의 이른바 순전함 중의 순전하지 않은 부분인 동시에, ‘하나님 안중의 순전한 자’의 흠집이 되어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순전한 자’는 ‘완벽한 사람’, 즉 흠도 없고 오점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나약함이 없고, 고통도 느끼지 못하며, 또한 아파하고 슬퍼하는 정서도 없고, 증오도 없으며, 과격한 행동도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욥이 진정으로 순전한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욥이 시련 속에서 보여 준 많은 행동들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재산과 자녀를 잃었을 때, 욥은 사람들의 상상처럼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고 대성통곡한 것이 아니다. 그의 이러한 ‘예상을 벗어난 행동’은 사람들에게 그를 냉혈 인간으로 보이게 했던 것이다. 그에게서는 눈물도 혈육의 정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처음에 욥이 사람들에게 남긴 ‘나쁜 인상’이었다. 이어지는 욥의 일련의 행동들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겉옷을 찢는’ 행동을 하나님에 대한 불경한 행동으로 보았으며, ‘머리털을 미는’ 행동을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께 대드는 것으로 오해하였다. 욥이 말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는 이 말 외에 사람들은 욥에게서 하나님이 칭찬한 그 어떤 의로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욥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그저 이해되지 않아 하거나 오해하거나 의심하거나 정죄하거나 도리적으로 인정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은 욥에 대해 위와 같은 인상을 받은 데다가 욥의 의로움에 한층 더 의구심을 품었다. 욥이 했던 것과 성경에 기록된 그의 행동은 천지를 놀라게 하고 귀신도 울릴 만큼 큰 감동을 선사할 것이라는 사람의 상상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장거’를 이룩하기는커녕, 고작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던 것이다. 이 행동은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욥의 의로움에 의혹을 품게 하고, 심지어는 부정하는 태도를 갖게 하였다. 욥은 몸을 긁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맹세한 적이 없었고, 통곡하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사람들은 욥에게서 그의 나약한 모습만 보았을 뿐, 다른 것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욥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지라도 그 말에서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거나 일치된 결론을 내릴 수 없었으며, 욥의 말에서 그의 의로움을 볼 수 없었다. 시련의 고통을 겪고 있던 욥이 사람들에게 준 인상은 대체로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행동 이면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보지 못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과 그가 어떤 원칙으로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고 있는지를 보지 못했다. 그의 비굴하지도 않고 거만하지도 않은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이 그저 빈말일 뿐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 역시 그저 전설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그의 ‘나약함’에 대해서는 인상이 깊었다. 또한 그 ‘나약함’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의했던 순전하고 정직한 자를 ‘다시 보게’ 되었으며, 심지어 ‘새롭게 이해’하기까지 했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 때, 내가 말한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과 ‘새로운 이해’가 여기에서 입증되었다. 아무도 욥이 고통받은 정도를 상상하거나 느낄 수 없지만, 욥은 ‘대역무도’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몸의 고통을 줄여 보고자 성경에 기록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 뿐이다.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욥 3:3). 아무도 이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 수도 있다. 너희가 보기에 이 말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뜻이 있느냐? 이 말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뜻이 있느냐? 나는 너희 대부분이 욥의 이 말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너희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한 자라면 그 어떤 나약함을 보여서도 안 되고 슬퍼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탄의 모든 공격에 직면해야 하고, 심지어 웃으면서 사탄의 시험을 마주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사탄이 욥의 육체에 어떤 고통을 가해도 욥은 마땅히 아무런 반응도 없어야 하고, 자신이 느꼈던 어떤 것도 표현하지 말아야 하며, 심지어 하나님께 더 강력한 시련을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강직한 자가 마땅히 보여 주고 갖춰야 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욥은 극도의 고통 속에서 그저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을 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뜻은 더욱 없었다. 이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진짜로 행하기는 아주 어렵다. 예부터 지금까지 욥과 같은 시험을 받아 본 자가 없을뿐더러, 욥과 같은 상황을 겪어 본 자도 없기 때문이다. 왜 욥과 같은 시험을 받은 자가 아무도 없겠느냐? 이는 하나님이 보기에 이러한 책임과 사명을 짊어질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으며, 욥이 해낸 것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욥처럼 이러한 고통이 임했을 때,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는 것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말 아무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지금 욥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욥의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냐? 의인인 자, 이처럼 하나님을 증거한 자, 사탄으로 하여금 머리를 감싸고 도망쳐 다시는 하나님 앞에서 참소하지 못하게 한 자를 칭찬한다고 해서 안 될 게 뭐가 있느냐? 설마 너희의 요구 기준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것이냐? 너희는 시련이 닥쳤을 때 욥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말이냐? 하나님도 칭찬했는데 너희가 무슨 이견이 있느냐?

사탄이 다시 욥을 시험하다(온몸에 악창이 나다)

1)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 2:6) 2) 사탄의 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4~5) 3) 욥은 시련을 어떻게 대했는가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9~10)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욥 3:3) 욥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길을 귀하게 여겼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욥 2:3). 이 대화에서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사탄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첫 번째 시련에서 보인 욥의 반응과 모습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평가는 사탄의 시험을 당하기 전의 평가와 똑같았다. 즉, 시험이 임하기 전에 욥은 하나님 눈에 순전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와 그의 가족을 지켜 주었으며, 그에게 복을 내린 것이었다. 욥은 하나님 눈에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었다. 시험을 겪은 후,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었다고 해서 입으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였다. 욥의 실제적인 행동에 하나님은 갈채를 보냈으며, 만점을 부여했다. 욥의 눈에는 모든 재산이든 자녀든 하나님을 버릴 만큼 중요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그 어떤 재산이나 자녀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욥이 처음의 시험을 받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사랑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에 대한 욥의 애정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었다는 것을 보았다. 이번 시련이 욥에게는 단지 여호와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가 다시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게 되는 경험을 한 것일 뿐이었다. 욥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의 마음을 씻는 진실한 체험이었으며, 그의 인생을 충실하게 하는 생명의 세례였다.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과 경외심을 검증하는 한 차례의 풍성한 잔치였다. 이번의 시험으로 욥은 부자의 신분에서 무일푼의 빈털터리 신세가 되었으며, 동시에 사탄으로부터 해를 입었다. 욥은 자신이 무일푼이 되었다고 해서 사탄을 증오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탄의 졸렬한 행위로 인해 사탄의 추함과 비열함을 보았으며, 사탄이 하나님께 적대감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영원히 지키겠다고 더욱 굳게 마음먹는 계기가 되었다. 욥은 맹세했다. ‘재산, 자녀, 가족 같은 어떤 외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저버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며, 절대 사탄의 노예나 재산의 노예, 그 어떤 사람의 노예도 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어떤 누구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욥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리였다. 시험을 다른 시각으로 봤을 때 역시 욥은 얻은 것이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에게 준 시련에서도 얻은 바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다. 지난 수십 년의 인생에서 욥은 여호와 하나님의 행사를 보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내려 준 복을 받았다. 하지만 그러한 복은 욥을 더 불안하게 만들었고, 더 빚진 마음이 들게 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없는데도 이와 같은 큰 복을 받아 참으로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은 늘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울러,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의 위대함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랐으며, 더 나아가 자신의 순종과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이 그의 순종을 검증하고 그의 믿음을 정결케 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욥은 이번에 시련이 임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이런 기회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기에 전혀 태만하게 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욥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소원이 실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기회가 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순종과 경외심이 검증받을 수 있고, 아울러 정결해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이로부터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욥은 이와 같은 믿음과 추구가 있었기에 이번 시련에서 더욱 순전해질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또한, 욥은 하나님이 내려 준 복과 은혜에 더욱 감사했으며,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행사를 더욱 찬양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더 경외하고 앙망하며, 하나님의 사랑스러움과 위대함과 거룩함을 더 간절히 사모했다. 이때의 욥이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을지라도, 욥의 경험과 체험을 놓고 봤을 때 욥의 믿음과 인식은 엄청난 진보와 발전이 있게 되었다. 그의 믿음은 커졌고, 그의 순종은 목표에 도달했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한층 더 깊어졌다. 비록 이번 시련으로 욥의 마음과 생명이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되었지만 욥은 이로 인해 만족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욥은 이번 시련에서 자신이 얻은 수확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고, 또 자신의 결점과 부족한 부분들을 성찰해 보았다. 아울러, 그는 묵묵히 기도하며 다음 시련을 기다렸다. 욥은 자신의 믿음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하나님의 또 한 번의 시련을 통해 승화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언행 하나하나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살피고 있다. 욥의 생각은 여호와 하나님의 귀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이 다시 한번 예상대로 임했던 것이다.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진정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를 느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탄에게 질문을 하자, 사탄은 속으로 기뻐했다. 왜냐하면, 사탄은 하나님 눈에 완전한 사람을 공격할 기회가 또 한 번 주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탄에게는 이 얼마나 얻기 힘든 기회인가! 사탄은 이 기회를 틈타 욥의 믿음을 철저하게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렇게 하여 욥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 더 이상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은 언제든지 욥을 자기 수중에서 멋대로 우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자신의 사악한 의도를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을지라도 그의 악독한 본성은 억제할 수 없었다. 그 실상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탄의 대답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찌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2:4~5). 사탄의 이 말에서 사람은 자연히 사탄의 악독함에 대해 실제적인 인식과 느낌을 갖게 된다. 사탄의 이런 황당무계한 논리를 듣게 되면, 진리를 사랑하고 사악함을 증오하는 모든 사람들은 사탄의 비열함과 파렴치함을 증오할 것이다. 또한 사탄의 그릇된 논리에 염증과 역겨움을 느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욥을 위해 기도와 축원을 올릴 것이다. 정직한 자가 더 순전해질 수 있기를 기도할 것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가 영원히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빛 속에서 살고, 하나님의 인도와 축복 속에서 살기를 바랄 것이다. 또한, 욥의 의로운 행동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을 영원히 편달하고 격려하기를 바랄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사탄의 이러한 말 속에서 사탄의 악독한 속셈을 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아주 흔쾌히 사탄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다만 사탄에게 또 한 가지 조건을 붙였다.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욥 2:6). 사탄이 이번에는 손을 뻗어 욥의 뼈와 살을 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찌니라”라고 말씀했다. 이 말씀의 뜻은 욥의 육체를 사탄의 손에 붙이지만 그의 생명은 보존해야 하며, 그의 생명을 앗아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외에는 어떠한 방식과 수단으로 욥을 대해도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 사탄은 허둥지둥 욥의 앞에 이르러 손을 뻗어 그의 살가죽을 쳤으며, 그의 온몸에 악창이 나게 했다. 욥은 살가죽의 통증을 느꼈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기묘함과 거룩함을 찬양했다. 그 모습에 화가 난 사탄은 더 길길이 날뛰었다. 사탄은 사람을 해치는 쾌감을 느꼈기 때문에 손을 뻗어 악창이 난 욥의 살을 움켜쥐어 곪아 터지게 했다. 그 순간 욥은 피와 살에 너무나 큰 통증을 느껴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온몸의 피부와 살을 문질렀다. 마치 그러면 육체의 통증으로부터 오는 마음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듯이 말이다. 욥은 하나님이 곁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더 강해지려고 애를 썼다. 그리하여 또 한 번 무릎 꿇고 엎드렸다. ‘당신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사람의 고통을 살피시나이다. 당신께서 어이하여 사람의 나약함까지 생각해 주시나이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사탄은 욥이 통증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보았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는 것은 보지 못했다. 이에 사탄은 급하게 손을 뻗어 욥의 뼈를 쳤다. 욥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욥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고통을 느꼈다. 마치 살가죽이 뼈에서 벗겨지는 것 같았고, 또 뼈가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았다. 수많은 화살이 심장을 뚫는 것 같은 통증에 그는 죽는 것보다 못한 느낌이 들었다. 욥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극한에 달했다. 그는 소리치고 싶었으며, 몸의 살가죽을 뜯어내 통증을 덜어 내고 싶었다. 그러나 욥은 참고 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몸의 살가죽을 뜯어내지도 않았다. 욥은 사탄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욥은 또다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하지만 이때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욥은 여호와 하나님이 항상 그의 앞에, 그의 뒤에, 그의 좌우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가 아파할 때 아파하는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으며, 그때는 얼굴을 가리고 자신을 숨겼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의미는 고통받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때 욥은 눈물을 흘렸다. 욥은 몸의 통증은 억지로 참았지만, 하나님에 대한 감사는 더 이상 억제할 수 없었다.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존재입니다. 너무 연약하고 무기력하며 여리고 무지합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어찌하여 이처럼 생각해 주고 긍휼히 여기시나이까? 당신께서 저를 치시고 오히려 당신이 고통스러워하시나이다. 사람이 무슨 가치가 있어 당신께서 생각해 주고 마음에 두시나이까?’ 욥의 기도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었지만, 하나님은 그저 조용히 바라보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사탄은 수를 다 썼어도 성과가 없자 조용히 물러났다. 그러나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련은 결코 이로 인해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욥에게서 나타낼 큰 능력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는 사탄의 퇴각으로 인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더 멋진 장면은 각 인물의 출현에 따라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또 다른 모습은 범사에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한 것이다 욥이 사탄의 온갖 학대를 받으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리지 않았을 때, 가장 먼저 그의 아내가 나서서 사람이 볼 수 있는 사탄의 역할을 하며 욥을 공격했다. 성경 말씀은 이와 같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 이것은 사탄이 사람의 모습으로 한 말이었다. 이 말은 공격과 참소의 의미를 띠고 있었고, 유혹과 시험과 훼방의 의미도 띠고 있었다. 사탄은 욥의 육체를 공격해도 소용이 없자 직접 욥의 순전함을 공격하였다. 이를 통해, 욥이 그의 순전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게 하여 계속 살아가지 못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사탄은 또한 이러한 말을 빌려 욥을 유혹하고자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버린다면 그 모든 고통을 참지 않아도 되고 그 육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니라.’ 아내의 권고를 듣고 욥은 이렇게 질책하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 이 말은 욥이 오랫동안 쌓아 온 인식이다. 다만 욥이 이 말을 인식한 것에 대한 진실성이 이때 입증되었을 뿐이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권고하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말했다. 그 의미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이렇게 대하는데 어찌해서 그 하나님을 버리지 않느냐? 당신이 그렇게 살아서 뭐하냐?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렇게도 불공평한데 당신은 계속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받을지라고 말하다니, 그의 이름을 찬송하는데 왜 당신에게 화를 입게 하느냐? 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버려라. 다시는 그 하나님을 따르지 마라. 그렇게 하면 당신의 재앙은 사라지리라.’라는 것이다. 이때 하나님이 보고자 했던 욥의 증거가 또다시 나왔다. 이런 증거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없는 것이며, 우리가 성경의 그 어떤 이야기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욥이 이러한 말들을 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보았다. 단지 하나님은 이번 기회에 욥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맞다는 것을 실증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내의 그런 권고를 듣고도 욥은 자신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버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이 말은 매우 무게가 있지 않으냐? 여기에는 이 말이 매우 무게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딱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칭찬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원하고 듣고 싶어 했던 말이며 보고 싶어 했던 결과였다는 것이다. 이 역시 욥이 증거한 것 중의 정수에 해당한다. 여기서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욥의 귀함은 바로 그가 시험을 받고 온몸에 악창이 났을 때, 즉 가장 고통스러울 때 그의 아내와 친족들의 권고에도 여전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는 것에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마음속에는 어떠한 시험이나 아무리 큰 환난과 고통이 찾아와도, 설사 죽음이 찾아올지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버리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하나님의 자리가 가장 크며,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욥에 대한 이러한 평가를 볼 수 있다.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은 입술로 범죄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은 하나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미움을 사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했다. 그의 마음과 입은 일치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본 참된 욥이었으며, 또한 하나님이 욥을 귀하게 여겨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탄이 욥을 처음으로 시험하다(가축은 약탈당하고, 자녀는 화를 입다)

1) 하나님의 말씀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욥 1:12) 2) 사탄의 대답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9~11) 하나님이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한 이유는 욥의 믿음을 완전케 하기 위함이었다 욥기 1장 8절은 성경에 처음으로 기록된 여호와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였느냐? 원문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 앞에서 욥에 대해 평가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씀했다. 하나님과 사탄의 이 대화가 있기 전에,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해서 욥을 시험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바로 욥을 사탄에게 넘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욥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과 평가가 완전히 정확함을 실증할 수 있고, 욥의 증거로 말미암아 사탄에게 수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경외심을 완전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탄이 하나님 앞에 왔을 때, 하나님은 즉시, 단도직입적으로 사탄에게 질문했다.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의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들어 있다. 사탄이 곳곳을 떠돌며 하나님의 종 욥을 늘 감시하고, 늘 시험하고 공격하며, 어떤 방법으로든 그를 무너뜨려 하나님에 대한 욥의 믿음과 경외심이 굳게 서지 못했음을 입증하고자 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어떻게든 욥을 해할 기회를 노리는 사탄이 욥에게 하나님을 배신하게 하여 하나님의 손에서 그를 빼앗아 가려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욥의 마음을 감찰하는 하나님은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보았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것도 보았다. 하나님은 질문의 방식으로 사탄에게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여서, 절대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따를 리가 없음을 알려 준 것이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들은 사탄은 점점 더 화가 났으며 그럴수록 욥을 빼앗아 가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렬해졌다. 사탄은 사람이 ‘순전하고 정직할’ 수 있다는 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다는 것도 전혀 믿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사탄은 순전하고 정직한 자,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자를 증오하기 때문이다. 이는 욥기 1장 9~11절에 기록된 바와 같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하나님은 사탄의 악독한 본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사탄이 이미 오래전부터 욥을 해하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다시 한번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사탄이 순순히 따르도록 ― 욥을 공격하고 시험하려던 본래의 진면목을 드러내도록 ― 하고자 했다. 즉, 하나님은 의식적으로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사탄이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모습’으로 인해 증오하고 분노하여 욥을 공격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욥의 모습을 통해 사탄을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사탄이 철저히 수치를 당하고 실패하도록 하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 사탄이 더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임을 의심하거나 참소하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시련과 사탄으로부터 온 시험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는 시련을 감당할 수 있고, 사탄의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는 유일한 적임자는 욥이었다. 이 대화를 끝으로, 사탄은 허락을 받고 욥을 시험하였다. 이것이 사탄의 첫 번째 공격이었는데, 그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욥의 재산이었다. 사탄이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라고 욥을 참소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욥의 소유물을 빼앗아 가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탄과 대화한 의도였다. 다만 하나님은 사탄에게 한 가지 요구를 했는데, 욥기 1장 12절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할 때 욥을 사탄에게 넘기면서 제시한 조건이었다. 즉, 하나님은 이렇게 선을 그음으로써 사탄에게 욥을 해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다. 하나님은 욥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자신 앞에서 보여 준 욥의 정직함과 순전함은 검증을 통과할 수 있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욥에 대한 사탄의 시험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탄에게 범위를 제한하였다. 욥의 재산은 빼앗아 가도 되지만, 그의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이때, 하나님은 욥을 완전히 사탄의 손에 넘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시험하든 상관하지 않았지만, 욥 본인을 해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즉,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사람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사는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지, 사탄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사탄은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가서 각종 수단을 다 동원해 욥을 시험하였다. 욥은 바로 가득하던 소와 양을 잃게 되었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준 모든 재산을 잃게 되었다.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이렇게 욥에게 임했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욥이 받았던 시험의 유래를 알고 있지만, 그 ‘당사자’인 욥은 그 일을 알고 있었겠느냐? 욥은 평범한 사람으로, 배후에 있었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단지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순전하고 정직해서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자신에게 임했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이다. 그는 영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으며, 그 시련의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욥은 어떤 일이 임하더라도 항상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굳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일들을 대하는 욥의 태도와 반응을 하나님은 아주 분명하게 보았다. 하나님이 본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을 보았다. 시험을 받기 전부터 시험을 받을 때까지, 욥의 마음은 줄곧 하나님께 열려 있었으며, 하나님 앞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욥은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버리지도, 등지지도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있어 가장 기쁘고 위안이 되는 부분이었다. 이어서 욥이 어떤 시험들을 받았는지, 또 그 시련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자. 계속 성경을 읽어 보자. 3) 욥의 반응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욥 1:20~21) 욥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자발적으로 돌려 드린 것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했다.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이 말씀이 끝나자 사탄은 물러갔고, 곧이어 욥은 갑작스러운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먼저 소와 나귀를 빼앗기고, 종들이 살해당했다. 이어서 양 떼들과 종들이 불에 타 죽었다. 그 후에 낙타를 약탈당하고, 종들이 죽임을 당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자녀들도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욥이 처음으로 받은 시험이었고 이러한 일련의 공격에 그는 고통을 받았다. 이 공격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욥의 재산과 자녀들만 목표로 삼았으며, 욥 본인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욥은 거액의 재산을 가진 엄청난 부자에서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충격은 그 어떤 사람도 감당할 수 없고, 정면으로 직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욥은 비범한 일면을 보여 주었다. 성경에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고 난 후에 보인 첫 번째 반응이었다. 우선, 욥은 놀라지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으며, 분노와 증오는 더더욱 없었다. 여기에서 욥이 마음속으로 이 모든 재앙이 결코 우연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비롯된 일이 아니며, 보응이나 징벌이 임한 것도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자신에게 임한 것이고,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재산과 자녀를 거두어 간 것임을 확신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의 욥의 마음은 매우 차분했으며, 정신도 매우 맑았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매우 이성적이고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닥친 재앙에 대해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보통 때와 다른 냉정함을 보여 주었다. 즉,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했던 것이다. ‘겉옷을 찢었다’는 것은 그가 벌거숭이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음을 의미하고,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하나님 앞에 돌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는 것은 그가 벌거숭이로 세상에 왔고 지금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갓난아기처럼 자신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욥이 자신에게 닥친 그 모든 일을 대한 태도는 그 어떤 피조물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은 믿음의 차원을 넘어섰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와 순종이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내린 복에 감사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두어 간 것에 대해서도 감사했으며, 더욱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도 자발적으로 돌려 드릴 수 있었다. 욥이 보여 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은 인류의 모범이다.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은 사람들이 갖춰야 할 최고 수준의 인성이었다. 욥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그는 자신의 체험으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했으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순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이 그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거두어 가도 전혀 원망하는 바가 없었으며, 게다가 땅에 엎드려 하나님이 자신의 육체를 당장 거두어 가더라도 그 어떤 원망도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욥의 이러한 모든 반응은 그의 순전하고 정직한 인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즉, 욥은 순수하고 정직하며 선하기 때문에 자신이 체험하고 느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굳게 믿으며 흔들리지 않았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욥은 하나님의 인도와 만물을 통해 보게 된 하나님의 행사에 따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생각과 행실, 태도와 일 처리 원칙을 자신에게 요구하고 규범화했다. 오랜 시간 그렇게 하면서 욥은 자신의 체험으로 인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하고 실제적인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악에서 떠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욥이 고수한 ‘순전함’의 유래이다. 욥은 정직하고 단순하며 착한 인성을 갖췄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악에서 떠난 실제 체험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욥은 사탄의 이 같은 공격 속에서도 굳게 설 수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이 주는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고 만족스러운 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의 시험에서 욥은 아주 ‘단순’하게 반응했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도 욥이 해냈던 그 ‘단순’한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고, 욥이 보여 준 그 모습도 갖출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지금 욥의 그 ‘단순’한 반응을 보고, 오늘날 말로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표명한 ‘절대 순종, 죽기까지 충성’이라는 구호나 결심을 그것에 비교해 보면, 너희는 매우 부끄럽지 않으냐? 너는 성경에 기록된 욥의 집에 닥친 이 모든 상황을 보았을 때, 어떤 반응이 있었으냐? 많은 생각이 들지 않았느냐? 매우 놀라지 않았으냐? 욥이 맞닥뜨린 시련은 ‘끔찍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 않으냐? 다시 말해서, 글로 묘사된 내용만 봐도 욥에게 시련이 임했을 때의 장면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하물며 실제 현장은 어떠했겠느냐? 이로써 욥에게 임한 것은 ‘연습’이 아니라 ‘실제 총탄을 든 정규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임한 그 시련은 도대체 누가 직접 한 것이냐? 물론 사탄이 한 것이다. 사탄이 직접 한 것은 맞으나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어떤 방식으로 욥을 시험하라고 했느냐? 말씀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조건을 하나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욥에게 그런 시험이 임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욥에게 닥친 시험을 통해 사탄의 사악함과 추함과 악독함, 그리고 사탄이 사람을 증오하고 하나님을 적대시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여기에서 이번 시험의 잔인함 정도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을 해치는 사탄의 악독한 본성과 추한 몰골이 이때 낱낱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사탄은 이러한 기회, 하나님이 허락한 이러한 기회를 빌미로, 욥에게 가차 없이 미친 듯이 해를 가했다. 그 해치는 수단과 잔인함의 정도는 지금의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하고 전혀 견뎌 내지도 못할 정도였다. 욥이 사탄의 시험을 당하며 그 시험 속에서 굳게 섰다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준 시련 속에서 자신의 순전함과 정직함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기 위해 사탄과 대결을 벌였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대결에서 욥은 가득했던 소와 양을 잃었고 재산 전부와 자녀까지 잃었다. 하지만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버리지 않았다. 즉, 그는 사탄과의 대결에서 재산과 자녀를 잃을지언정 그의 순전함과 정직함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지키고, 사람됨의 근본을 지키려고 하였다. 성경에는 욥이 재산을 잃는 전 과정과 욥의 반응과 태도가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간단명료한 묘사에 욥이 그 시험에 아주 ‘쉽게’ 직면했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실제 장면과 사탄의 악독한 본성을 결부시켜 보면, 이 몇 마디로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 장면은 이보다 훨씬 더 처참하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인류를 대하고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을 대하는 잔인함과 증오의 정도이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몸에 손대지 말라는 요구를 하지 않았다면, 사탄은 분명 사정없이 욥을 사지로 몰았을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있기를 바라지 않으며, 하나님 눈의 의인이나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다는 것은 사탄을 멀리하고 저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하나님이 허락한 이 기회를 이용해서 모든 분노와 증오를 사정없이 욥에게 쏟은 것이다. 이것으로 욥이 육체와 마음, 외적 내적으로 받은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당시의 장면을 볼 수 없고, 그저 성경의 기록을 통해 욥이 고통받았을 당시의 심정을 미미하게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욥이 지킨 순전함에 사탄은 수치를 당하고 황급히 도망갔다 욥이 이러한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였을까? 하나님은 감찰하고 살펴보았으며, 또한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감찰하고 살펴보면서 심정이 어땠을까? 당연히 몹시 마음 아팠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파서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라고 허락한 것을 후회했을까?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탄에게 하나님 앞에 있는 욥이 의롭다는 것을 확인할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또한, 사탄에게 그것의 사악함과 비루함을 드러낼 기회를 준 것이다. 더욱이 욥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사탄, 나아가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궁극적으로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틀림없이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았느냐? 사실, 욥이 사탄을 이긴 것이 아니냐? 여기에 욥이 한 가장 멋진 말이 있다. 그 말이 바로 욥이 사탄을 이겼다는 증거이다. 그가 말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이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욥의 태도이다. 이어서 욥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라고 말했다. 욥에게서 나온 이런 말들로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며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칭찬은 틀리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칭찬한 그 사람이 의인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 말은 하나님에 대한 욥의 증언이다. 바로 이처럼 평범한 말 한 마디에 사탄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수치를 당해 황급히 도망가게 되었으며, 속수무책이 되었다. 욥의 이 한 마디에서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의 행사가 얼마나 놀랍고 위력이 있는지 보게 되었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의 길이 권세 잡고 있는 사람의 비범한 매력도 보게 되었고, 보잘것없는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을 지키기 위해 발산되는 강력한 생명력도 보게 되었다. 첫 번째 대결에서 사탄은 이렇게 패했다. 사탄은 이 사건으로 ‘시야를 넓히게’ 되었지만 욥에 대해 손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사탄의 악독한 본성 역시 이로 인해 변하지는 않았다. 사탄은 계속해서 욥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또 하나님 앞에 오게 되었다. 계속해서 욥이 두 번째 시험을 받을 때의 구절들을 보자.

성경 및 하나님이 욥을 평가한 말씀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 1:1)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5)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 우선 첫 번째 구절을 보자.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말은 성경 기록 중 욥을 평가한 첫 번째 말이다. 이것은 욥에 대한 욥기 저자의 평가로서, 당연히 욥에 대한 사람의 평가를 의미한다. 그 평가는 이렇다.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다음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보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이 두 평가 중 하나는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지만,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욥의 행위와 모습이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칭찬까지 얻었음을 말해 준다. 즉, 욥이 사람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는 늘 자신의 행위와 마음을 하나님 앞에 놓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았으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눈에 비친 그는 땅에서 유일하게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 욥이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모습 이어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모습들을 살펴보자. 위와 아래 이 두 성경 구절을 제외하고, 1장 5절을 보자. 이것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구체적인 사례이다. 이 사례는 평소 생활 속에서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는지와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늘 이렇게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이 잔치를 열 때,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였다. 그래서 욥은 이 일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느냐? 원문에는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라고 묘사되어 있다. 욥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이 결코 외부적인 행동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일상생활 속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는 스스로 악한 일을 멀리했을 뿐만 아니라, 늘 아들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는 욥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할까 매우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들도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배반할까 걱정했음을 말해 준다. 이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욥의 경외심은 진실했으며,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욥은 어쩌다가 한 번씩 그랬느냐, 아니면 항상 그랬느냐? 원문 마지막 구절에는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욥이 가끔, 혹은 일시적으로 기분이 좋을 때 들여다본 것이 아니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죄를 자백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 욥이 항상 아들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고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항상’이란 하루 이틀이나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욥의 태도는 일시적인 것도, 단지 인식상에만 머문 것도, 그저 입으로만 떠든 것도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길이 그의 마음과 행동을 지배했으며, 삶의 근본으로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음을 뜻한다. 욥이 항상 이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항상 두려워했으며, 자신의 자녀들도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걱정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이 길이 그의 마음속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욥이 항상 이렇게 행한 이유는 그의 마음속에 걱정과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악행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두려워했고,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아울러 그는 자녀들을 위해 걱정하며 자녀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할까 두려워했다. 이런 것들은 욥의 일상생활에서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정상적인 모습들이 바로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다’는 것이 빈말이 아님을 입증하고,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삶을 실제로 살았음을 입증한다. 즉,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라는 말로 욥이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행한 모든 행동을 우리에게 알려 준 것이다. 욥이 항상 그렇게 행함으로 그의 행동과 마음은 늘 하나님 앞에 있지 않았느냐? 다시 말해, 하나님은 늘 그의 마음과 행동을 열납하지 않았느냐? 욥은 어떤 상황과 배경에서 항상 그렇게 했느냐? 혹자는 하나님이 항상 그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하며, 혹자는 욥이 악에서 멀리 떠나고자 하는 사람이었기에 항상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 혹자는 욥이 자신의 재산은 쉽게 얻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베풀어 준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면 재산을 잃게 될까 두려워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이 다양한 견해들은 다 사실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욥을 열납하고 귀하게 여긴 이유는 그가 ‘항상 이러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욱이 욥이 사탄에게 넘겨져 시험받았을 때,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탄 앞에서 보인 그의 모습 때문이다. 다음의 구절들이 바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이다. 이 증거들을 통해, 우리는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분부하시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창 22: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약속하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창 17:15~17)

하나님이 무지개를 사람과 맺은 언약의 증거로 삼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1~13)

홍수 후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1~6)

하나님이 홍수로 세상을 멸하려고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창 6:9~14)